대남 공작의 전성기를 빛낸 윤동철의 ‘도꾸다이’ 공작조
공작선을 개조한 김정일 전용 ‘충성호’
중앙당 작전부장 임호군은 작전부 산하 원산연락소 내에 김정일 경호 전담 조직인 충성호 방향을 만들면서 동시에 원산연락소에서 대남 침투 전용으로 사용하던 공작선을 부분적으로 개조해 사용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평양 낙랑구역 대동강 변에 있는 대남 침투용 공작선 건조 기관인 ‘927 연락소’에 김정일 전용 특별 선박을 건조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김정일 전용 선박 건조 지시를 받은 927 연락소에서는 선박 외관을 대남 침투용 공작선과 유사하면서도 화려하게 만든 다음 엔진은 공작선에 장착하는 것과 같은 고속엔진을 그대로 장착하고 내부는 최고급 자재로 호화스럽게 꾸며서 특별 선박을 만들었다. 김정일 전용 선박이 건조되자 중앙당 작전부에서는 ‘충성호’라는 이름을 붙여 김정일에게 선물했다.
전용 선박 건조와 함께 전문 경호 인력 선발
이렇게 해서 김정일 전용 선박이 마련되자 이 선박을 바다에 띄워 운용하는 동시에 김정일의 신변을 경호하는 전문 경호 인력을 갖추는 것이 또 다른 문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당 작전부에서는 먼저 산하에 있는 모든 전투연락소, 즉 남포·해주·개성·사리원·원산·청진 등 6개의 대남 침투 연락소에서 선박 운용 및 훈련 성적이 우수한 전투원들을 대상으로 김정일 경호원을 선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작전부 소속 전투원들의 경우 이미 신체검사 및 신원조회를 통해 출신 성분과 건강 상태, 충성심 등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경호 인력 선발이 가능했다.
경호 요원으로 선발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출신 14명
또한 추가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생 가운데 우수한 자원을 김정일 경호 요원으로 선발하도록 했다. 그 첫 대상이 1985년 나와 함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제19기 졸업생이었다.
중앙당 작전부에서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제19기 전체 졸업생 170여 명 가운데 정밀 신체검사와 심층 면접을 통해 최종적으로 14명을 김정일 경호 요원으로 특별 선발했다. 특징적인 것은 당시 김정일 경호원으로 선발된 동기생들의 키가 170cm 전후였는데, 이는 김정일의 작은 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후문이다.
당시 김정일 경호원으로 선발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제19기 졸업생 중에는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대학 시절 3중대장으로 활동했던 우수한 성적의 소유자 강호성과 함께 강원도 통천 바닷가 출신으로 수영 실력이 남다른 윤현철,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사격 실력이 좋은 유재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충성호 방향 배치에 불만 품은 경호원들
이들은 원산연락소 산하 충성호 방향에 배치되어 별도의 경호 관련 교육과 훈련을 받고 김정일 경호원으로 투입되었다. 경호원으로 임명된 후 이들은 김정일이 원산에 내려와 충성호를 이용할 때만 경호에 동원되고 김정일이 선박을 이용하지 않는 기간에는 관련 교육과 훈련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가운데 불만을 가진 인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원래 북한 전역에서 소수 정예 요원으로 선발된 후 대남 혁명 완수와 조국 통일을 실현하는 데 한몫할 것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혹독한 교육과 훈련 과정을 이수했고, 그래서 자부심과 자긍심도 대단했다.
그런데 그토록 어렵게 배운 것을 써먹을 수도 없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경호 임무를 수행하라고 하니 그들의 불만과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경호원들의 불만 폭발시킨 강호성 사망 사건
그러던 중 대학 시절 3중대장으로서 훈련 및 학업 성적이 우수했던 강호성이 경호원으로 차출된 지 3년 만인 1988년 여름 김정일이 바다낚시를 할 때 잠수복을 입고 낚싯줄이 내려간 바닷속에 들어가 떡밥을 뿌려 주면서 물고기가 모여들게 하는 연습을 하다가 어이없게도 폐그물에 걸려 사망하는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강호성 사망사건이 발생한 후 낚시용 물고기나 몰아 주는 하찮은 일을 위해 훈련하다 사망했다는 사실에 동기생들의 불만과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고 한다. 바로 그러한 시점에 발생한 사건이 1989년 강호성과 필자의 대학 동기생인 유재석에 의한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시절 학업과 훈련, 특히 실탄사격 성적이 우수했던 유재석은 그러잖아도 김정일 경호원이 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학 동기생인 강호성까지 쓸데없는 훈련을 하다 무의미하게 사망하자 그동안 참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탈영 후 경비대 군인 20여 명 사살 후 자살한 유재석 경호원
유재석은 실탄사격 훈련을 위해 휴대하고 있던 AK소총과 실탄 수십 발을 휴대한 상태에서 연락소 경내를 이탈한 뒤 원산 시내 건물 뒤에 몸을 숨긴 채 뛰어난 사격 실력으로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총을 가지고 접근하던 북한 경비대 군인 20여 명을 사살하고 실탄이 떨어질 즈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후 임호군은 중앙당 작전부장 직책에서 해임되었고, 임호군이 만들었던 원산연락소 충성호 방향은 중앙당 작전부 소속에서 김정일 경호를 전담하는 호위사령부로 이관되었다.

윤동철·김군철의 2인 대남 공작조
한편, 북한 대남공작 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서는 윤택림 1명으로는 부족했던지 대남 공작에 실제로 투입된 바 없어 공화국영웅 칭호를 줄 수는 없었지만 영웅대회가 끝나면 곧바로 대남침투 및 공작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윤동철 공작조도 영웅대회에 참석하도록 했다. 이 공작조는 40대 초반의 공작조 조장 윤동철과 20대 후반의 조원 김군철로 구성된 2인 공작조였다.
윤동철은 북한군 특수부대에 복무한 후 노동당 간부로 활동하다 공작원으로 선발돼 1970년대 말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양성반 3년제 과정을 졸업하고 중앙당 연락부 대남 공작과에 배치된 인물이다. 그는 키가 178cm 정도로 큰 편이고 체격도 좋아 40km 강행군 등 모든 훈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공작원이었다.
김군철은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임무를 수행한 이철, 그리고 모자 공작조로 위장하고 이선실 접선 및 대동 복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남한에 침투했던 김성철 등과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제17기 동기생으로 필자의 2년 선배였다. 조장인 윤동철보다 키는 조금 작았지만, 체력이 특별히 좋은 데다 훈련 성적이 뛰어나 조장과 명콤비를 이뤘다.
아울러 윤동철과 김군철 모두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공격적으로 해낸다는 의미에서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이 ‘도꾸다이(特大)’ 공작조라는 별명을 달아 줄 정도였다.
윤동철·김군철 공작조는 김정일이 대남 공작기관을 장악한 이후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정규교육과 혹독한 훈련 과정을 마친 전형적인 김정일 시대의 새세대 공작원들이었다. 이들은 1988년 가을 전국영웅대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89년 초 강화도 해안을 통해 남한에 침투했다.
해안 침투 시 기상 악화로 반잠수정에서 하루 보낸 공작조
통상적으로 남파 공작원들이 강화도 해안을 통해 침투하는 경우 작전부 소속 해주연락소 전투원들이 반(半)잠수정에 태워 강화도 해안까지 접근한 다음 공작조와 함께 육지에 상륙하는 방식으로 안내해 준다.
그런데 이들이 해주에서 강화도까지 반잠수정을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원래 계획했던 시간에 침투 목적지인 강화도 건평리 해안으로 상륙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따라서 원래의 침투 일정을 순연하여 다음 날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방식으로 침투하기로 하고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무인도에 반잠수정을 절반쯤 물에 잠기도록 한 상태로 정박시켜 놓고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다음 날 계획했던 침투 시간에 맞춰 강화도 건평리 해안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해안에 상륙한 후 일정한 곳까지 이동해 안내조와 헤어진 공작조는 가까운 마을 근처로 이동한 다음 산에서 잠복하다 다음 날 새벽 옷을 갈아입으려고 배낭에서 옷을 꺼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수포장을 해서 배낭에 넣어 두었던 옷이 모두 물에 젖어 입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반잠수정을 물에 잠기도록 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옷과 무전기를 비롯한 공작 장비를 넣은 배낭 관리를 잘못해서 내부로 물이 스며 들어간 것이었다. 다행히 무전기를 비롯한 다른 공작 장비는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갈아 입을 옷이 얼어 버리자 침투 시 차림 그대로 서울로 직행
문제는 추운 겨울이라 물에 젖은 옷이 뻣뻣하게 얼기까지 해서 그것을 입고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조장 윤동철은 북한에서 침투할 때 입고 왔던 옷을 그대로 입고 서울까지 이동하기로 결심하고 갈아입기 위해 가지고 왔던 옷은 그대로 땅에 묻어 버렸다.
그런 다음 자신은 물론 조원 김군철에게도 침투할 때 가지고 온 권총을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 휴대하도록 한 다음 대담하게 택시를 타고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직행했다. 당시 강화대교에는 군·경 합동검문소 있었는데, 택시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는 과정에 검문검색에 걸리는 등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그대로 권총을 꺼내 대응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렇게 ‘무모하면서도 대담한 행동’으로 강화도에서 서울 남대문시장까지 이동한 윤동철과 김군철은 가게에서 옷을 사서 갈아입은 다음 본격적인 공작 활동에 착수했다.
“역시 ‘도꾸다이(特大)’ 공작조!”
남한에서의 공작 활동을 마무리하고 북한으로 복귀한 윤동철 공작조가 위와 같은 사실을 얘기했을 때 북한 대남 공작지도부 간부들은 한결같이 이들을 가리켜 “역시 도꾸다이 공작조가 틀림없다”며 감탄했다.
당시 윤동철 공작조에 부여되었던 첫 번째 임무는 재야에서 활동하다 그 후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공동대표를 역임한 김낙중 간첩망을 검열 지도하는 것이었는데, 이 임무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아울러 서울 소재 모 출판사 대표를 전취(포섭)하라는 공작 임무도 받았는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도꾸다이 공작조의 면모를 훌륭히 발휘했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윤동철이 그 출판사의 위치를 찾아내 대표와 미팅 약속을 잡은 다음 방문해 보니 출판사가 영세해 별도의 대표 사무실이 없었다. 따라서 대표는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윤동철이 아무리 작은 소리로 출판사 대표에게 얘기를 하더라도 옆에서 근무하는 다른 직원들이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온 노동당 대표다”
그러자 윤동철과 김군철은 출판사 대표를 자연스럽게 사무실 외부로 유인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프린트 용지에 사인펜으로 “나는 북한에서 온 노동당 대표이다. 당신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한 곳에 나가서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문구를 큼직하게 적어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가 대표에게 슬쩍 보여준 다음 외부로 불러내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방법대로 프린트 용지에 글을 적어 가지고 가서 출판사 대표에게 보여준 다음 그를 사무실 밖으로 불러내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들이 포섭했다는 인물이 운영했다는 서울 소재 출판사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주소지 등은 알 수 없다.
북한 대남 공작지도부에서는 만약에 당시 출판사 대표가 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몰래 112에 신고라도 했다면 이들은 곧바로 검거되었을 텐데, 정말 위험하면서도 대담하게 행동했다며 칭찬했다.
대담함과 기지로 위기 극복하고 무사 귀환
침투할 때부터 대담하고 공격적으로 활동하면서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윤동철·김군철 공작조는 북한으로 복귀할 때도 다른 공작조들이 쉽게 겪지 않는 일을 또 겪어야 했다. 이들이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맡겨진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북한으로 복귀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복귀 접선 장소인 강화도로 이동하던 중 접촉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교통사고가 발생하자 이들은 경찰이 출동해서 사고 조사를 하면 국내 현지인 신원정보가 기재된 위조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고 있던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리라는 것을 알고 택시 운전기사에게 현금을 주고 상황을 신속하게 정리한 다음 교통사고로 다친 몸을 이끌고 황급히 사고 현장을 벗어나 가까운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런 다음 북한 공작지도부에 무전을 통해 교통사고 때문에 약속된 시간에 접선 장소에 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 후 이들은 사고로 다친 몸이 완쾌될 때까지 양계장에서 일하면서 약 2개월간 숨어 지내다가 몸 상태가 좋아진 다음 북한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으로 복귀한 다음에는 남파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적을 인정받아 2명 모두 공화국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그 후 조장 윤동철과 조원 김군철로 구성된 2인 공작조는 해체되었으며, 윤동철은 그 후에도 다른 공작원과 공작조를 편성해 두 번째로 남한에 침투한 후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복귀했다.
김동식 2025-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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