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스파이 세계

서석천 2025. 5. 22. 04:26
소련과 나치 독일의 스파이, 美대사관 암호요원 켄트
 
1940 520일 자택에서 아침 식사 중이던 런던 주재 미대사관 외교관 타일러 켄트(당시 29)가 영국 국내 정보부서인 MI5(보안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MI5는 켄트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여러 개의 여행 가방과 상자 및 부엌 찬장 안에 숨겨진 붉은 가죽 책자 속에서 무려 1929건의 비밀 문서를 발견했다. 여기에는 미 국무부의 암호 해독문뿐만 아니라 런던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P. 케네디(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버지)의 메모,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 간의 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MI5가 감시하고 있는 인사 명단과 대사관 암호실 열쇠 복사본 등도 압수됐다. 켄트의 간첩 혐의, 즉 공무상비밀유지법 위반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확보된 것이다.
 
M15가 켄트를 체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이틀 전인 518일 외교관 면책 특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518일 아침 케네디 미 대사는 MI5의 수장 가이 리델의 전화를 받았다. 대사관 내 한 직원의 보안 누설과 관련해 상의하기 위해 당일 15시에 맥스웰 나이트 요원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나이트 요원은 미 대사관의 암호담당 요원인 켄트가 독일 첩보요원에게 외교 기밀을 계속 누설하고 있음을 통보했다. 관련 증거물을 확인한 케네디 대사는 충격을 받았고 켄트의 외교관 면책특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M15는 520일 전격적으로 켄트를 체포하게 된다. 켄트는 대체 누구인가.
 
▲ 영국 주재 미국 대사 조셉 P. 케네디(가운데)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필자 제공
 
     
켄트는 1911 324일 중국 만주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인 그의 아버지가 미국 영사로 근무했을 때이다. 그의 아버지가 독일 라이프치히, 스위스 베른, 아일랜드 벨파스트, 버뮤다 등의 임지로 부임할 때마다 가족이 함께 움직였다. 그래서 켄트는 어린 나이에 유럽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켄트가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8살 때로 아버지가 1919년 국무부에서 은퇴했을 때였다. 그는 워싱턴 D.C.에 있는 명문 학교 세인트 올번스 스쿨에 다녔다. 1929년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해 외국어를 전공했고 2학년 봄학기 때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이후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역사학과 경제학 학위를 취득했다.
 
▲ 미국 명문 프린스턴 대학 출신의 타일러 게이트우드 켄트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 행각의 전모를 밝힌 책 ‘Conspirator(공모자)’의 표지 이미지. 
 
 
소련 주재 미 대사관이 처음 개설될 때 러시아어·프랑스어·그리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를 구사했던 켄트는 1934년 국무부에 채용되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초대 대사인 윌리엄 블릿은 친소주의자였는데 직원들에게 소련인들과 긴밀한 접촉을 통해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라고 독려했다. 당시 켄트는 항상 값비싼 정장을 입고 다녀서 지위가 낮았음에도 부유한 외교관으로 보였다
 
소련 정보기관인 NKVD(인민보안부·KGB의 전신)는 켄트의 여성 편력을 이용해 미인계를 구사했다. 켄트는 볼쇼이 극장의 미모 여배우 타티아나 등을 비롯해 많은 미인들과 사귀며 즐겼다. 하지만 하위 외교관 월급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사치 생활을 하다 보니 돈이 부족했고 이들이 제안하는 암거래 사업에 뛰어들어 파산 직전에까지 몰렸다. 결국 그는 KGB의 제안에 넘어가 비밀 외교전문들을 넘기며 여자·마약·술 등 사치생활을 영위했다. 당시 그가 교류한 미모의 여자들은 소련의 비밀요원이었고 암거래 사업도 켄트를 수렁에 빠뜨리기 위한 공작이었다.
 
 
켄트의 행동을 추적하던 대사관 방첩담당관이 블릿 대사에게 그의 반역 의혹을 보고했고 대사관 간부들도 그의 해임을 제안했으나 대사는 문란한 사생활에 대해 엄중한 구두 경고를 내리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는 모스크바 파견 근무 4년을 마치고 NKVD의 제안에 따라 독일 베를린을 지원했으나 영국 런던으로 발령을 받았다. 런던은 가려던 곳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사실 더 큰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다. 1939 923일 켄트는 모스크바를 떠나 런던을 향했다. 배 안에서 반유대주의자를 자처하는 독일인 사업가 루트비히 마티아스를 만나 술친구가 되었는데 그는 사실은 영국 당국의 감시를 받던 나치독일의 스파이였다.
 
▲ 켄트와 그의 연인 러시아 요원 타티아나 일로바이스카야. 필자 제공
 
켄트는 그해 105일 런던 대사관에서 업무를 시작하자 마자 영국 MI5의 감시 대상에 올랐다. 독일의 비밀경찰 요원과 같은 배에 탑승해 술자리를 같이했기 때문이다
 
켄트는 대사관의 암호 해독 책임자로 근무하며 대사관 근처의 아파트를 빌려 기밀 문서를 계속 수집했다. 그는 근무가 끝나면 런던의 활기찬 사교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습성은 계속되었다
 
그는 반공산주의 성향의 러시아계 이민자들이 모이는 러시안 클럽의 단골이 되었다. 이 클럽의 주인은 전 런던 주재 러시아 해군 무관이었던 니콜라이 볼코프였다. 켄트는 그의 딸인 안나 볼코프(남작부인)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기밀 문서를 넘겼다볼코프는 나치 독일에 포섭된 스파이였다. 볼코프 남작부인에게 전달된 비밀문서들은 이탈리아 대사관의 중개인을 통해 베를린으로 보내졌다.
 
MI5의 방첩부서를 이끌던 맥셀 나이트 요원은 러시안 클럽에 여성 요원을 침투시켜 남작부인과 친교를 쌓으며 기밀을 넘겼던 자가 바로 미 대사관의 켄트라는 것을 파악했다. 1940 5월 영국 총리에 취임한 처칠은 영국 내 모든 대적(對敵)분자들의 체포에 주력했다. 520일 켄트가 체포된 지 불과 이틀 후 의회는 적과 교류한 혐의가 있는 모든 사람의 구금을 허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볼코프 남작부인도 켄트와 같은 날 체포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케네디 대사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켄트는 1940 10월 영국에서 공무상비밀유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도 기밀문서를 빼돌려 소련에 전달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그는 모범수로 2년을 감형받아 5년 동안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1945 10월 석방되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1952년부터 1963년까지 간첩 혐의 등으로 여섯 차례의 FBI(미 연방수사국)의 수사를 받았지만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수사가 종결되었다. 이후 켄트는 암 투병 중 1988 1120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국 MI5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영국 정부가 켄트의 비밀누설 혐의를 알고도 8개월 동안이나 방치한 것은 반()영국·()독일 성향으로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부정적이었던 케네디 대사를 제거하려는 공작의 일환이었음이 밝혀졌다. 스파이의 세계는 적과 우방의 경계가 모호한 국익 중심의 냉정한 세계임을 보여준다.
 
유동열  2025-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