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국적으로 암약한 러시아 스파이
2022년 4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서 입국심사 중 브라질 국적의 빅터 뮐러 페레이라(Victor Muller Ferreira, 1988년생)가 신분증 위조 혐의로 체포돼 조사받은 후 브라질로 송환됐다.
그의 정체는 러시아 군(軍) 정보총국(GRU) 요원 세르게이 체르카소프(1985년생). 그의 네덜란드 입국 목적은 헤이그 소재 국제형사재판소(ICC) 침투였다. 당시 ICC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군 전쟁 범죄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여기 침투하려다 실패했다. 2009년부터 13년에 걸쳐 양성한 GRU 요원의 침투 공작이 무산된 것이다.
네덜란드 정보보안국(AIVD)과 미국 연방수사국(FBI) 및 브라질 당국의 발표를 종합하면 러시아 GRU는 체르카소프를 해외 공작원으로 양성하기 위한 준비를 2009년부터 했다. GRU는 남미에 유럽계 혼혈 인구가 많아 현지인 위장이 용이하고, 특히 브라질은 신분증 발급 통제가 느슨하다는 사실에 주목해 신분 세탁 공작을 했다.
체르카소프는 2010년 6월 러시아 여권으로 브라질에 최초 입국했으며 2011년 8월 2차 입국, 자신을 브라질인이라고 주장했다. 현지 러시아 요원의 지원으로 신원보증인과 관련한 공무원을 매수해 ‘페레이라’의 가짜 출생증명서를 발급받았다. 1993년에 사망한 브라질 여성 ‘주라시 엘리자 페레이라’의 아들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법원 기록, 유족 등에 따르면 그녀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 체르카소프는 페레이라의 명의로 운전면허증, 여권 등을 만들어 여행사에 취업한 후 성실히 세금을 내며 합법적인 신분을 유지했다. FBI와 CIA(미 중앙정보국)는 해당 여행사가 현지 GRU 요원의 소유인 것을 파악했다.

브라질인의 신분을 확보한 체르카소프는 미국에 침투하기 위해 2014년 아일랜드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2018년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 입학허가증으로 미국에 진출했다.
그는 명문대 대학원생 신분으로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각종 정치·경제 세미나 등에 참석하고 정부기관, 저명한 싱크탱크, 금융기관과 언론사의 인턴으로 활동하며 인맥을 쌓았다. 그렇게 하며 수집한 정보는 러시아로 보냈다. 2020년 미국 외교정책에 관한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9월 브라질로 귀국해 대학원 시절에 만든 네트워크를 활용해 브라질 정치·경제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스파이로 암약했다.
그는 지도교수인 유진 핑켈 존스홉킨스 대학 준교수의 추천서를 받아 국제형사재판소의 인턴십을 신청해 합격했다. 그는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상파울루 인근에 비밀자료가 든 하드 드라이브 등을 은닉하고, 2022년 3월31일 네덜란드로 향했다. 당시 네덜란드 정보보안국은 신분을 세탁한 러시아 요원이 국제형사재판소 침투를 위해 입국할 것이라는 정보와 신원 사항을 FBI로부터 제공받은 상태였다.

▲ 기소장에는 체르카소프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국무부 직원, 국회의사당 직원, 이스라엘 전문가, 미국 해군사관학교 교수 등과 접촉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전 수개월, 수년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한 미국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고 명시되었다. 필자 제공
체르카소프는 체포 후 심문받을 때 러시아 스파이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모든 증거는 그의 신분이 가짜임을 말하고 있었다. 브라질로 송환된 체르카소프는 브라질 연방법원에 의해 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5년 2개월로 감형됐다.
러시아 당국은 체르카소프의 정체를 부인하고, 그가 수배 중인 마약 밀매업자라며 범죄인 인도 요청을 했으나 거부되었다. 2023년 3월 미국 FBI는 체르카소프를 외국 기관 요원, 비자 사기, 은행 사기, 전신 사기 및 불법 활동 혐의로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미국 입국 후 페레이라의 신분으로 미국 은행에 부정 계좌를 개설하고 버지니아주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또한 미국 내 요주의 인물 및 러시아 요원들과 연락했고, 특정 미국인의 정보와 미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체르카소프의 정체를 밝힌 단서는 2018년 3월 영국에서 있었던 전 러시아 요원 스크리팔 독살 사건(본지 스파이 세계 제59호, 2025.4.23.게재)에 연루된 GRU 요원들을 추적할 때 나왔다. 미·영 정보기관들은 이들의 여권번호가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세계에서 위장 요원으로 암약하는 러시아 요원들의 여권번호를 상당 부분 특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 스파이의 국제형사재판소 침투는 차단됐다.
유동열 202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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