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김동식 기획연재] <15>

서석천 2025. 5. 17. 05:12
김영환 밀입북시킨 공작원은 베테랑 ‘공화국영웅’
 
김정일 치적 과시 위한 전국영웅대회
 
김정일은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는 동시에 북한 정권을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1988 9월 북한 전역에 살고 있던 공화국영웅들과 노력영웅들을 평양으로 불러 모아 전국영웅대회를 개최했다. 노동당 소속 대남공작부서는 물론 북한군 정찰국(현재의 정찰총국)에서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영웅들이 이 대회에 참가했다.
 
그런데 당시 북한 대남공작부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중앙당 연락부(당시는 대외연락부)는 현직 공작원들 가운데 영웅대회에 참가시킬 공화국영웅의 수가 너무 적어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중앙당 연락부 소속 현직 공작원 가운데 공화국영웅은 단 두 명, 1985 10월 청사포 사건 발생 당시 남한에 침투해 2년간 공작 활동을 하다 1987년 복귀한 강모와 박모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영웅대회 이후 경제 및 무역 부문 간부들을 양성하는 인민경제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공작원을 그만둘 사람들이었다.
 
공화국영웅 칭호 미리 받은 윤택림
 
이런 사정으로 연락부에서는 이미 대남 침투 준비를 마치고 대기 상태에 있던 윤택림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로 하고 김정일에게 보고해 허락을 받았다. 이후 연락부에서는 윤택림이 예전에 여러 번 남한에 침투해 공작 임무를 수행했던 공적을 종합 평가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전국영웅대회에도 참석시켰다.
 
갑작스럽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윤택림은 전국영웅대회에 참가한 후 원래 계획대로 1988년 겨울 서해안을 통해 남한에 침투했다. 그리고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베테랑 공작원답게 약 1년간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5개의 간첩망을 새로 구축하거나 검열하는 등 부여된 공작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북한으로 복귀했다.
 
윤택림, 공화국영웅 칭호 값을 하다
 
당시 윤택림이 검열 지도했던 5개의 간첩망 중 하나가 고영복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였다.
 
윤택림은 남한에 침투해 고영복을 접선한 후 그동안의 간첩 활동 결과를 점검하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충성 편지를 쓰게 한 다음 그것을 가지고 북한으로 복귀했다. 윤택림은 자취하던 서울 관악구 신림동 월셋집에 화재 사고가 나자 고영복의 도움으로 그의 친구가 운영하는 서울 시내 기원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윤택림은 서울지하철공사 동작 분소장으로 일하던 심정웅과 그 일가가 포함된 간첩단을 지도 검열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당시 윤택림이 남한에 침투해 포섭한 인물이 남한 주사파의 대부로 널리 알려진 서울대 출신 김영환이다.
 
주사파 대부 김영환 포섭, ‘민족민주혁명당’ 구축
 
윤택림은 인천에 사는 김철수로 신분을 위장하고 출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김영환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김영환을 만나서는 자신이 북한에서 파견된 노동당 대표라고 신분을 소개한 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김영환을 통해 북한 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 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을 구축했다
 
한편 윤택림에게 포섭된 김영환은 1991 5월 강화도에서 북한이 보낸 반잠수정을 타고 평양으로 몰래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후 제주도 해상을 통해 남한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그 밖에도 윤택림은 2개의 간첩망을 더 구축하거나 지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더 이상 아는 바가 없어 여기에 적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윤택림은 1988년 말 남한에 침투해 부여된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1989년 가을 북한으로 복귀했다.
 
공화국영웅 윤택림, 김일성훈장을 받다
 
북한으로 돌아온 윤택림은 다른 공작원들 같았으면 남파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을 테지만 남한에 침투하기 전에 이미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공화국영웅 칭호 대신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다.
 
김일성훈장은 그 후에 나온 김정일훈장이나 김정은훈장과 같이 북한에서 수여하는 훈장 가운데 가장 등급이 높은 훈장이다. 공화국영웅 칭호를 포함해 다른 훈장이나 메달은 김씨 일가와 노동당을 위해 특별한 공로를 세운 북한 사람이라면 직업이나 직위, 직책과 직급에 관계없이 받을 수 있지만 김일성훈장 등 김씨 일가의 이름이 들어간 훈장은 최소한 시장이나 군수급 이상 고위급 간부들에게만 수여하는 훈장이라는 특징이 있다.
 
남파공작원들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으면 차관 대우를 해 주기 때문에 이미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윤택림도 직급상으로는 충분히 김일성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기는 했다. 아마 그래서 윤택림에게 김일성훈장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연락부 소속 공작원 가운데 공화국영웅 칭호와 함께 김일성훈장을 받은 사람은 윤택림이 유일했다.
 
 
▲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은 1999년에 국가정보원이 밝힌 공안 사건이다. 국정원은 당시 민혁당을 1980년대 학원가의 자발적 주사파 세력이 북한에 포섭되어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고 남한 내 혁명 전위 조직으로 결성한 지하당으로 발표했다. 주요 구성원인 하영옥·김영환·박준O·이석기 등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민족민주혁명당 간첩 사건 증거품. 연합뉴스
 
 
윤택림, 훈장 수여와 함께 전격 승진도
 
특히 윤택림은 김영환을 포섭하는 등 남파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원 신분에서 곧바로 대남공작 및 공작원들을 지도하는 중앙당 사회문화부 6(대남 공작과) 부과장으로 전격 승진 임용되었다.
 
윤택림이 곧바로 중앙당 사회문화부 부과장에 임용된 것은, 대체로 공작원들이 중앙당 간부로 임용될 때 지도원으로 임용된다는 점과 지도원으로 3~5년은 근무해야 부과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파격적인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불과 3년 만에 이번에는 대남공작 전담 부서인 중앙당 사회문화부 6(대남공작 전담) 과장으로 승진했다.
 
영웅대회 선물이 불러온 논란
 
북한 당국은 1988 9월 개최된 전국영웅대회에 참가한 영웅과 고인이 된 영웅의 유가족들에게 김정일 명의로 TV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전국영웅대회를 개최한 노동당 지도부에서는 대회에 참가한 생존 영웅들에게는 컬러 TV를 선물로 수여했다. 그러나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 수행, 또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많은 인명을 구조하거나 김 부자의 초상화를 보호하고 사망한 영웅의 유가족, 노환이나 병으로 사망한 영웅의 유가족들에게는 흑백 TV를 선물로 주었다.
 
한마디로 살아 있는 영웅에게는 가격도 비싸고 좋은 컬러 TV를 선물로 주고 사망한 영웅의 유가족에게는 그보다 못한 흑백 TV를 준 것이다. 바로 이것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전국영웅대회가 끝나고 참가자 또는 유가족들에게 TV 선물이 실제로 전달되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특히 대남 침투를 담당한 노동당 작전부 소속 전투원들과 남한 내에서 활동하는 공작원, 그들의 유가족들에게서 살아 있는 영웅이나 죽은 영웅이나 다 같은 영웅인데 이건 너무하다늙거나 병으로 사망한 영웅이야 어쩔 수 없을지 모르지만당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영웅이 된 사람들에게 더 잘해 주지는 못할망정 차별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그러면 누가 목숨까지 바쳐서 충성하겠느냐우리는 당장 적구(敵區)에 침투하는 과정에 죽을 수도 있는데죽으면서까지 충성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고위 간부들의 일탈 행위 
 
대남 침투 및 공작 분야에서 위와 같은 불평불만이 팽배해지고 이것이 그대로 간부들에게 전달되자 그들은 격분한 대남공작부서 내부의 불만을 달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전국영웅대회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중에 알고 보니 전국영웅대회를 기획하고 지휘한 중앙당 조직지도부 등 고위 간부들이 대회 준비 및 참가자들에 대한 선물 수여를 빙자해 김정일로부터 거액의 외화를 받아낸 후 그것으로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스위스산 고급 시계를 사다가 김정일의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나누어 가지고 남은 돈으로 TV를 구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고위 간부들이 제 욕심부터 채우느라 민심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이 행동한 것인데 김정일은 그것도 모르고 간부들이 자신에게 충성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전부 내의 김정일 경호 전담 조직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작전부의 임무는 국내 및 해외에 침투하는 공작원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침투하게 해 주고 복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중앙당 작전부 부장 임호군이 김정일에 대한 과잉 충성 차원에서 작전부 내에 대남 침투 및 공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김정일 경호 전담 조직을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김정일에게 보고해 승인을 받은 다음 경호 전담 조직을 창설한 것인데, 작전부장 임호군으로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산 찾아 재일교포 무용수 고용희 밀회한 김정일
 
사실 김정일은 1970년대 말부터 부친인 김일성 모르게 재일교포 출신의 무용수 고용희를 동해 휴양지인 강원도 원산 별장에 숨겨 놓고 수시로 놀러 갔는데, 원산에 내려가서는 신변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원산연락소에 자주 들렀다.
 
원산연락소에 찾아올 때마다 김정일은 전투원들과 자신의 경호원들 간의 사격 경기도 조직하고 직접 권총 실탄사격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 전투원들이 운용하는 대남 침투용 공작 선박을 타고 해상을 통해 함흥이나 청진 또는 금강산이 있는 고성까지 이동하거나 선박을 세워 놓고 바다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김정일이 측근들과 함께 원산에 내려와 대남침투용 공작선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은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쓴 책 ‘김정일의 요리사’에도 비교적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원산연락소를 방문했던 김정일이 대남침투용 공작선에 승선해 “40으로 갑시다며 공작선의 속도를 40노트까지 높이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는 사실은 대남공작부서 내부에서 알 만한 간부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김정일의 빈번한 원산 방문으로 간부·전투원들 고충 커
 
당시 북한 강원도 원산 바닷가 별장에 숨겨 놨던 고용희와 그곳을 수시로 찾아오던 김정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현재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김정은과 그의 여동생 김여정, 형인 김정철이다.
 
이와 같이 김정일이 원산에 올 때마다 원산연락소에 들러 전투원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물론 수시로 대남 침투용 공작선까지 차출하자 중앙당 작전부와 원산연락소의 정상적인 운영은 물론 실제적인 대남 침투를 위한 해상 훈련도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정일이 원산에 올 때마다 동행해야 하는 중앙당 작전부장 임호군 등 공작부서 간부들, 원산연락소 전투원들의 괴로움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원산 연락소 내 임호군이 만든 충성호 방향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차라리 별도의 김정일 경호전담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앙당 작전부와 원산연락소의 전체적인 운영에도 편리하고 김정일에게도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한 작전부장 임호군은 원산 연락소 내에 100여 명 규모로 김정일 경호 전담 조직인 충성호 방향을 만들었다.
 
중앙당 작전부 소속의 각 연락소에는 통상적으로 300~500명 정도의 대남 침투 전투원 및 지원 인원이 있는데, ‘방향은 연락소 산하에 50~100여 명 규모로 구성된 단위조직 명칭이다.
 
아울러 김정일 전용 선박인 충성호는 공작선을 김정일이 이용하기 편리하게 부분적으로 개조한 선박이며, 이를 운용하는 별도의 조직을 원산연락소 산하에 만들고 그 명칭을 충성호 방향이라고 붙인 것이다.
 
김동식  2025-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