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왔습니다] <46>
고교생·어부도 납치해 대남 공작에 투입
북한 땅의 경상도 사나이들
적구화 교육 당시 경상도 말과 문화를 가르친 경상도 사나이가 여러 명 있었다. 그중 내가 아는 사람은 차 선생과 권 선생·공 선생, 남파 공작원 출신의 한 선생과 최 선생 등이다.
차 선생은 경상도 사투리 중에서도 경상남도 말을 가르쳤다. 대남공작부서 내부의 원칙에 비추어 분명 ‘차’씨라는 건 가명의 성씨일 텐데, 나는 그의 본래 성씨를 모른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175~180cm의 큰 키에 몸무게도 80kg 이상으로 거구였다. 원래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던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부산에서도 산 적이 있다고 한다.
남파되면 딸을 찾아봐 달라던 차 선생
그에게서 경상도 말을 배웠던 조장 권중현은 그가 어선 선장이었으며 그와 함께 배를 탔던 선원도 북한에서 살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권중현의 말대로 그가 바다 사나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상당히 크고 성격도 급했으며 쌍욕도 아주 잘했다. 정확히 그가 어떻게 북한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권중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다가 납북된 후 북한에 머물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진해서 북한에 남게 되었는지 아니면 강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북한에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권중현과 내가 1990년 5월 함께 남파될 때 권중현에게 찾아와 자기 딸을 찾아봐 달라고 조용히 부탁한 적이 있다. 나와 권중현이 이선실과 접선한 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살 때 권중현은 ‘차 선생의 딸이 서울 강남 지역 어디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수첩에 메모해 온 전화번호를 가지고 찾아보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운동권 출신의 권 선생 “반정부 투쟁의 발원지는 대구”
권 선생은 대구 사람으로 170cm 중반의 비교적 큰 키에 마른 체구였으며 1987년 당시 50대 중반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195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던 진보당 청년 조직에도 관여한 적이 있다고 하며 광산을 경영하다가 부도가 났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그는 남한에서 반정부 투쟁의 발원지는 언제나 대구였다는 점을 늘 자랑하고 다녔으며 대구 경산에는 사과가 많고 따라서 미인도 많다는 말을 항상 했다. 또한 “한국에 살 때 만난 아내가 수재였다. 그래서 아이들도 수재였다.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시절에 3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였다”며 자기는 다윈의 진화론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공 선생은 1987년 당시 40대로 160~165cm 정도의 비교적 작고 왜소한 편이었으며 경상북도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아는 게 없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양성반 동기생 가운데 일본 공작과에 배치받았던 조성렬이 일본어를 배운 뒤 다시 공 선생으로부터 경북 사투리를 배웠던 관계로 그 친구와 함께 한 번 본 게 전부라서 얼굴 생김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라도 출신의 춤 강사 황 선생
황 선생은 적구화 교육 당시 내가 만난 유일한 전라도 사람이다. 그는 1987년 당시 30대 중반이었고 1980년대 초반 상선을 타고 제3국에 나갔다가 그곳에 있는 북한공관으로 귀순했다고 한다. 나중에 우연히 북한에서 발행한 잡지에 실린 황 선생 관련 기사와 사진을 보았는데 북한으로 입북할 때 그의 본명은 하영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본인 말로는 남한에 있을 때 가수 조용필을 따라다니며 밴드부에서 드럼을 쳤다고 항상 자랑하고 다녔다. 그의 노래 실력과 춤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아서는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정확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남파 공작원은 서울말과 경상도 말이 필수
흥미로운 점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파 공작원 가운데 70% 이상이 경상도 말을 배웠고 나머지 30% 정도가 서울말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는 경상도가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85~87년 2년간 남한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다 복귀한 2인 공작조가 한국에서 생활하기에 가장 편한 언어가 서울말, 즉 표준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비율이 역전되어 70% 이상이 서울말을 배우게 되었고 나머지 30% 정도가 경상도 말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전라도 말을 배우는 공작원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전라도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전라도 말을 배우는 공작원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황 선생은 적구화 교육을 받고 있던 공작원들에게 언어보다는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아직도 매일 아침 그가 내가 생활하던 초대소에 찾아와 커피에 달걀노른자를 타서 모닝커피를 함께 만들어 마시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한국군 관련 강사 20대 후반의 마 선생
적구화 교육 기간 나를 가르쳤던 강사 중에는 고교생으로 납북된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나는 검거될 때까지 나를 가르친 그들이 납북된 고교생들인지 몰랐다.
그 가운데 마 선생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당시 20대 후반에 미혼이었으며 공작원들에게 한국군과 관련된 내용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국군의 창설부터 군 구조와 각급 부대 현황, 병영 생활, 입대 및 제대 절차, 총검술 훈련 등 군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강의와 실습 등의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는 당시 내게 충청남도 천안이 고향이며 형제가 많다는 것, 그중에서 본인은 막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심성이 착한 데다 머리도 좋은 편이었고 6·25 전쟁을 겪은 세대는 더더욱 아니어서 그의 입북 경위가 대단히 궁금했다. 적구화 교육을 받는 동안 그와 비교적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대남공작기관의 비밀 준수 원칙, 즉 보안 수칙 때문에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러한 나의 궁금증은 남한에 와서야 풀리게 되었다.
마 선생은 납북된 ‘천안농고 이명우’
이후 검거되어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던 당시 수사관이 앨범을 들고 와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앨범에는 1970년대 중·후반 서해와 남해에 있는 해수욕장 또는 섬에 피서 갔다가 납치된 고등학교 학생들의 사진도 있었는데 찬찬히 보니 일부는 내가 적구화 교육을 받는 과정에 만났던 강사들이었다.
그중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적구화 교육 강사 ‘마 선생’이었다. 그런데 사진 밑에는 ‘천안농고 이명우’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마 선생’이 ‘이명우’라는 이름의 천안농고 출신 납북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명우는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8년 친구 홍근표와 함께 전남 홍도에 피서갔다가 같이 납치되었으며 그 후 그의 부모님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명우는 적구화 교육 강사로 있으면서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그 후 북한 최고의 경제 간부 양성기관인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해 공부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충청북도 진천경찰서에 강연하러 갔다가 이명우의 친형을 만나 그의 안부를 전해 주기도 했다.
환경관 강사는 이명우와 함께 납북된 홍 선생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홍 선생 역시 이명우와 함께 납북된 사람이다.
그는 천안 상고 출신으로 친구 이명우와 함께 1978년 여름 홍도에 피서갔다가 납북된 홍근표다. 홍근표는 납북된 이후 이명우와 함께 대외연락부 소속 강사로 공작원들을 직접 가르치다가 1980년대 후반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임명되어 이명우와 헤어졌다.
나는 적구화 교육 막바지에 서울말 강사인 박 선생, 이명우 등과 함께 적구화 환경관에 실습 갔다가 홍근표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내가 보았던 홍근표는 밝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슈퍼마켓 담당 강사 이민교, 납북된 고교생 출신
적구화 환경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슈퍼마켓을 담당한 이 선생도 있었다. 실습을 위해 적구화 환경관에 가서 그를 몇 번 만나 대화를 해 보니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서울이나 경기도 출신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직접 물어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에 대해서도 검거된 후 알게 되었는데, 그는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7년 여름 홍도 해수욕장에 갔다가 납치된 ‘이민교’라는 이름의 고등학생이었다.
이발소·여관 담당 강사는 이민교와 함께 납북된 최승민
이 외에도 적구화 환경관에서 이발소와 여관 등을 담당하고 있던 강사도 이민교와 연배가 비슷했는데, 앨범 속의 사진을 보니 이민교와 함께 홍도에 놀러 갔다가 납치된 최승민일 가능성이 높다.
납북자 관련 얘기가 나온 김에 초대소에서 목격한 일본인 강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일본인 강사가 납북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20-2호, 120-21호 초대소는 일본어 교육 전문 초대소
적구화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평양시 순안구역 초대소 지역에는 대일공작과의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초대소도 있었다. 내가 적구화 교육을 받은 초대소 지역엔 전부 현지화 교육을 위한 초대소가 있었는데 그런 곳들에선 중국어·일본어·스페인어·영어 등의 외국어와 각국의 문화를 가르쳤다.
그중 120-2호 초대소와 120-21호 초대소는 일본어 교육 전문 초대소다. 2호와 21호 초대소에선 일본인 강사가 대일공작과 공작원과 함께 숙식하면서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친다. 말하자면 한국인 강사가 대남 공작원들과 함께 숙식하면서 적구화 교육을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일본인화 교육을 하는 것이다.
120-2호 초대소에는 일본말을 가르치는 ‘다나카’라는 이름의 일본인 남자가 있었다. 나는 이런 얘기를 일본공작과 공작원으로 그에게 일본말을 배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동창 조성렬로부터 들었다.
일본인 납북자 강사
조성렬은 1989년경에 공작원을 그만두고 제대했다. 그는 일본어를 배운 다음 남한 적구화 강사인 공 선생으로부터 경상북도 말을 배웠다. 그때 나와 만났는데, 그가 일본인 강사의 부인도 일본인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일본인 강사와 그의 부인이 어떻게 북한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시 그가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이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일본인이 자진해서 월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납북자로 추정된다.
내가 순안초대소 지역에 있는 2층짜리 특별초대소에서 생활할 때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다나카’라는 일본인이 우산을 쓴 공작원과 함께 걸어가는 옆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공작과에 있던 내 친구와 얘기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보기도 했다. 170cm 정도의 키에 보통 체격이었고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약간 기르고 있었는데 미남형이었다.
120-21호 초대소는 일반 초대소보다 규모가 큰 초대소였는데, 그곳에도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일본인 강사가 있었다.
대학 동창생 조성렬에 의하면 일본인 강사들은 북한 돈으로 월급을 받는 남한 출신 강사와 달리 엔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생활비로 받은 외화로 평양 시내 외화상점에서 외제 물품을 구매해 생활했으므로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다.
실제로 다른 초대소에서 생활할 때 창고에 빈 일본산 술병이 많아 요리사에게 물어보았더니 내가 초대소에 오기 전에 일본인 강사가 외화상점에서 사다가 마신 것이라고 했던 적이 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남한에서 자유의 몸이 된 후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면 자식들과 무엇을 가장 먼저 해 보고 싶으셨나요?
아버지 : 내가 아버지가 되면 가족과 함께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었어. 북한에는 여행의 자유가 없는 데다 교통수단도 변변치 않아 내가 어렸을 때는 물론 그 후에도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없었거든.
그러다가 남파 공작원을 하면서 북한 전역을 거의 다 돌아다녔지만 금강산이나 백두산 관광을 제외하고는 즐거운 적이 거의 없었어. 주로 야간에 완전 군장을 하고 훈련하느라 걸어 다녔기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밖에 없어.
그래서 너희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자주 갔던 거야. 아마 너희 또래 가운데 너희들만큼 전국 방방곡곡 안 가 본 곳 없을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들도 많지 않을 거야.
김동식 2025-04-30
*************************
[평양에서 왔습니다] <47>
“남한서 군대 얘기는 필수”… 관련 지식 달달 외워
정치인 신상 등 남한 정·관계 속속 파악
적구화 교육 당시 공부했던 내용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정치와 관련해서는 입법·사법·행정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비롯해 장관·국회의원 등의 신상에 대해 파악했다. 그 밖에 정치 조직 및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서도 배웠다. 사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북한의 정부 기관(현재 내각) 명칭보다 남한 행정부의 부·처의 명칭이나 장관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10대·30대 재벌 비롯해 생필품 브랜드까지
다음으로 경제와 관련해서는 10대 및 30대 재벌그룹의 명칭·회장·주요 생산품에 대해 파악했다. 나아가 각 재벌 그룹 계열사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가전제품·화장품·의류·신발류·필기용품·식료품 등 생활필수품은 어떤 회사 제품이 있고 유명한지에 대해 배웠다.
예를 들면 구두 브랜드로는 금강·에스콰이어가 있고, 맥주는 하이트·OB·크라운 등이 있으며 소주는 진로·그린·경월 등이 있고 막걸리는 포천막걸리가 유명하다는 것 등이다. 가전제품 기업은 삼성·엘지·현대·대우가 유명하고 식품이나 음료 하면 해태·동양·롯데이고 화장품은 태평양이 유명하다는 식이다.
군대 얘기 좋아하는 남쪽 사람들… 군 관련 내용은 필수
한국군에 대해서도 배웠다. 군 입대를 앞두고 실시하는 신체검사 시기와 절차, 그리고 입영통지서를 받고 신병 훈련소에 입소해 신병 훈련을 받는 절차와 방법, 훈련 내용 등을 강의를 통해 숙지했다. 집총 동작과 제식 동작·총검술 등은 실제 동작으로 배우고 신병 훈련이 끝난 후 자대 배치·군 내무반 생활·제대 절차·예비군 훈련 등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리고 계급과 군번에 대한 일반상식도 가르쳐 주었다.
중요한 것은 향후 대남 침투 준비를 할 때 신분 위장(세탁)을 해야 하는데, 남자들의 경우에는 경력에 군 관련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에 군 관련 내용은 될수록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며 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실제로 남파되어 활동할 때 현지인들과의 대화 과정에 군대 얘기가 반드시 나오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군 복무를 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내용보다 군 관련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며 한국군 관련 교육을 강의와 함께 실제 동작을 해 보는 방법으로 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처럼
교육과 관련해서는 초·중·고등학교 등에서 배우는 교과 내용을 모두 숙지하도록 했다. 사실 교과 내용 가운데 한국사 같은 것은 북한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다른 과목에 대해서는 상식 수준에서 취급하고 있다.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졸업, 학교 생활 기간에 반드시 하는 행사의 종류와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한다며 이를 가르쳤다. 예를 들면 학예회라든가 소풍·운동회·수학여행 등의 시기와 장소·방법 같은 것들이다.
서울대는 데모 많이 해서 관악구로 쫓겨나…
남한의 각 대학 명칭과 위치, 연혁과 특징에 대해서도 배웠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는 원래 대학로가 있는 종로구 혜화동에 있다가 박정희 정권 시대에 데모를 많이 해서 변두리인 관악구로 쫓아냈고 한국에서 수재들만 가는 일류 대학이라는 것이다.
고려대는 법학과와 정치학과가 유명하고, 연세대는 의예과와 영문과·상과가 유명하며 서강대는 경제학과를 알아 준다는 식이다. 또한 경희대는 한의학과, 홍익대는 미술과, 건국대는 수의학과, 중앙대는 연극영화과, 동국대는 불교학과와 연극영화과, 한양대는 공과가 유명하다는 식으로 상식적인 선에서 가르쳐 주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향후 대남 침투시 신분 위장과 함께 공작 활동을 할 때 남한 사람들과의 원만한 대화를 위한 것이었다.
“흥정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상업 시설과 그 이용 절차에 대해서도 배웠다. 백화점·전문점·시장·슈퍼마켓·창고형 매점(마트) 등 상업 시설의 종류와 명칭을 익히도록 했다.
대표적인 백화점으로 신세계·롯데·미도파가 있고 대표적 시장으로는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광장시장·황학동 벼룩시장·노량진 수산물시장·장안평 자동차부품시장·용산 전자상가·가락동 농수산물시장·경동 한약시장과 부산 자갈치시장 등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백화점을 제외한 모든 상가에서는 가격을 흥정할 수 있다는 것과 반드시 흥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흥정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가상 상황을 설정해 놓고 실제 물건을 사는 것처럼 흥정을 해 보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교육했다.

셋집 얻으며 흥정하는 방법 실습
숙박업소 종류와 이용 절차에 대해서도 배웠다. 숙박업소에는 호텔·여관·여인숙·하숙·민박 등의 종류가 있다는 것과 함께 각각의 이용 절차를 배웠다. 그리고 실제로 각종 숙박시설을 이용하고 셋집을 얻으면서 흥정을 해 보는 등의 방법으로 숙달하도록 했다.
또한 접객업소에는 이발소와 목욕탕·다방·술집·카페·카바레·나이트클럽 등이 있고, 이와 같은 시설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에 대해 강의를 들은 다음 가상 상황을 놓고 배운 대로 말하고 동작을 해 보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음식점에는 한식·일식·양식 등의 전문 음식점과 부페·분식집·포장마차 등이 있다는 것, 각종 음식점에서는 어떤 음식을 팔고 가격은 대체로 얼마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용하는지 등 이용 절차에 대해 배웠다.
선동열·이만수·홍수환·차범근… 아직도 기억나는 이름들
스포츠 및 오락과 관련해서는 스포츠 종목과 용어, 종목별 경기 방법, 특히 야구·복싱·축구 등 각종 프로 스포츠에 대한 상식을 배웠다. 이때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의 장면들을 비디오로 시청했다. 또한 당시의 유명한 스포츠인들에 대해서도 상식적으로 알아 두도록 했다.
그때 기억해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유명한 인물로 야구선수로는 선동열·이만수·장종훈·최동원·김성한·김재박 등과, 프로복싱과 레슬링선수로는 홍수환·김일, 축구선수로는 차범근·최순호·허정무 등이 있다.
“고스톱도 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오락에는 장기·바둑·고스톱·당구 등의 종류가 있다는 것과 그것들을 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배우고 실제로 해 보기도 하는 과정을 통해 약간이나마 숙련했다. 당구는 주로 15구 포켓볼을 쳤는데, 적구화 교육 기간에 여러 번 밤을 꼬박 새우면서 쳐 보았고 장기와 고스톱 역시 여러 번 해 봐서 대충은 알고 있다. 한번은 담배 내기 고스톱을 치다가 감정이 생겨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사무소 이용 절차와 관련해서는 주민등록 전·출입 신고 절차와 방법, 호적 및 주민등록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호적, 주민등록 등·초본을 발급받는 방법 등에 대해 가르쳤다.
우편·통신 시설의 이용 절차에 대해서는 먼저 편지에는 일반 편지와 속달 편지가 있다는 것과 함께 편지 주소 쓰는 방법과 우편번호 등을 공부했다.
편지 봉투에 주소 쓰는 위치도 남·북한 달라
다른 점이 있다면 남한에서는 반드시 써야 하는 우편번호를 북한에서는 군(軍)에서만 사용한다는 점이다. 편지 주소 역시 북한에서는 상단에 수신자 주소를 기재하고 하단에 발신자 주소를 기재하는데 남한에서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널리 사용되고 있던 공중전화 이용 방법과 요금제에 대해서도 배웠다.
남한에 있는 각 종교의 교리와 교파 등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배웠다. 예를 들면 종파로는 가톨릭 또는 천주교, 기독교 또는 개신교, 불교·원불교·대종교·천도교·정교·이슬람교·통일교·침례교 등 수많은 종파가 있고, 각각의 종파가 예수를 믿거나 석가모니를 믿는 등 서로 믿는 대상과 교리가 다르다는 것도 배웠다.
관혼상제에 대한 일반적 이해와 지켜야 할 에티켓, 그리고 인사말과 부조 문화 등 생활풍습에 대해서도 배웠다.
반드시 알아야 할 관광지와 유명 사찰 등
관광지와 관련해서는 유명한 관광지와 피서지, 특산물 등에 대해 배웠다. 이를 통해 국립공원은 설악산·계룡산·오대산·속리산·지리산·덕유산·내장산·한라산·북한산·가야산 등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수욕장으로는 부산 해운대와 송정·광안리해수욕장, 대천·경포대·속초·만리포·제주도 등에 있는 해수욕장이 유명하다고 배웠다.
그리고 과천 어린이대공원·성동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용인 민속촌과 자연농원, 한려해상국립공원·단양팔경·강릉 오죽헌·의상대·청간정·진주 촉석루 등의 관광지 및 놀이시설과 함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비원·종묘 등의 고궁이 있고 경주·부여 등지에 역사 유적 등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유명 사찰로는 서울의 조계사, 속리산의 법주사, 계룡산의 갑사와 동학사, 내장산 백양사,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 공주 마곡사, 동래 범어사 등이 있다는 것, 유명 온천지는 온양·도고·덕산·수안보·이천·유성·부곡·동래·마금산·백암·경산·화순 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산물로는 강화의 인삼과 화문석, 여주·이천 지방의 쌀과 도자기, 춘천의 막국수, 전주의 비빔밥, 경산 사과, 제주도 감귤, 순창 고추장, 포천 막걸리, 천안 호두과자 등 너무 많아 여기에 일일이 다 옮겨 적을 수 없을 정도다. 이와 함께 관광지를 이용하는 시기와 절차, 그리고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배우고 실제로 해 보기도 했다.
교통수단의 종류 배우고 이용 절차 실습
교통수단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널리 이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열차와 버스ㆍ택시ㆍ지하철 등이 있으며, 열차에는 새마을호ㆍ무궁화호ㆍ 통일호ㆍ비둘기호 등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버스에는 고속버스·시외버스·시내버스·좌석 버스·마을버스 등과 최근에 새로 생긴 우등버스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택시에는 일반택시와 중형택시·모범택시·공항택시·콜택시 등이 있다는 것을 공부했다.
아울러 1987년 당시 지하철이 건설되어 운행되는 곳은 서울과 부산이며, 서울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노선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 외에도 렌트카와 여객선·비행기 등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있다는 것도 배웠다.
이러한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절차, 즉 매표·개찰·승차·하차·집찰 방법, 그리고 각종 요금 및 계산·지불 방법, 교통시각표를 이용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배우고 가상 상황을 만들어 직접 해 보는 방법으로 습득하도록 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와 엄마는 사상과 이념은 물론 문화적 차이가 심한 북한과 남한이라는 곳에서 각각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서로 다른 것이 많았을 것 같아요. 거기에다 아버지와 엄마가 연애했던 기간이 정말 짧았기 때문에 두 분이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많이 없었을 텐데…. 결혼을 하고 엄마랑 많이 다투진 않으셨나요?
아버지 : 네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엄마는 연애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 체제와 이념은 물론 경제 발전 수준이 다른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문화적 차이가 컸던 것이 사실이야. 그런 문화적 차이 때문에 결혼 초기에는 엄마와 엄청 많이 다퉜어. 물론 지금도 그 간극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체제와 이념, 경제 발전 수준이 같은 사회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문화적·성격적 차이는 필수적으로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해.
문제는 각자가 그러한 차이를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 우리 부부도 이견이나 갈등이 생겼을 때 처음에는 언성을 높여 다툼을 벌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이해하니까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더라고….
결국 나는 부부생활을 하면서 이견이나 갈등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두 사람의 인내와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어.
김동식 2025-05-01
*********************
[평양에서 왔습니다] <48>
조장의 화풀이 생트집… 그래도 진심은 통한다
서울과 지방 대도시 정도는 알아야 한다
적구화 교육 강사들은 서울과 부산·대구 등 지방 대도시의 자연·지리적 특징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우선 내가 서울말을 배우고 있었고 강사 역시 서울 출신이라서 서울의 일반적 특징에 대해 다른 지역보다 더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서울의 지리에 대해서는 서울 토박이 정도는 아니지만 대체적인 윤곽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서 길을 잃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갈 수 있다.
부산엔 돈이 많고 대구엔 미인이 많다
아울러 부산과 대구에 대해서도 배웠다. 당시 들었던 내용 가운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우선 부산에는 3가지가 많다는 것이었다. 즉 부산에는 물보다 술이 많고, 종이보다 돈이 많으며 여자보다 아가씨가 많다는 것이었다. 자갈치시장 회가 맛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대구에는 아가씨들이 사과를 많이 먹어서 미인이 많다는 것, 곰탕을 잘하는 현풍할매곰탕이 유명하다는 것 등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에 배웠던 것들이어서 그동안 기억에서 지워진 것도 있고, 일부는 적구화 교육이 끝난 후에 남한 자료를 보면서 새로 알게 된 것도 있다. 그렇다고 여기에 적은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현실과 관련한 적구화 교육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적구화 교육 기간에 사상이론 학습이나 강연 등을 일절 중단하고 훈련도 일시적으로 중지한 상태에서 오직 적구화 교육에만 집중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당생활 총화와 함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약간의 운동 정도는 하게 한다.
금강산 관광 때부터 꼬인 관계
적구화 교육을 받는 동안 여러 가지 일도 많았다.
조장 김명걸과 함께 적구화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해 가을, 서울말 강사 박 선생과 함께 또다시 금강산관광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담당지도원과 박 선생, 나와 조장 김명걸 등 우리 일행은 금강산 관광을 마칠 즈음 해금강 지역에 갔었다. 원래 그곳은 휴전선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군(軍) 관계자들에게 양해를 얻어 해금강에서 관광도 하고 해산물을 채취해 어죽을 쑤어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금강은 정말 몇 마디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절경이었고 바다에는 홍합과 해삼 등 해산물도 얼마나 풍부한지 모른다. 그날 우리는 해금강에 간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회와 어죽도 쑤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내가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곳 군인들과 함께 주정 농도가 40도인 개성 인삼주 3병을 마시고 만취되어 백사장에 누워서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한마디로 필름이 끊긴 것이었다.
잠에 취해 투덜거린 게 화근
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후 4시경,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 일행이 해금강을 출발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김명걸이 내게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왜 무시하느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으니 오히려 “왜 그러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제야 자초지종 이유를 이야기했다.
내가 한참 정신없이 자고 있을 때 김명걸이 나를 깨워 카드놀이를 하겠다며 카드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카드놀이를 하려면 할 사람들이 가져다 하지 왜 자는 사람을 귀찮게 깨우면서 그러느냐”고 투덜대고는 그냥 누워서 잤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봐도 술을 많이 마시고 자다가 잠결에 한 말이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술에 취해 자다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필름이 끊어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쨌든 내가 실수했다고 판단하고 솔직하게 “술에 취해서 무의식중에 한 실수이니 양해해 달라. 미안하다”고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는 앞으로 그러지 말라며 내 사과를 받아 주는 것처럼 하고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내 실수를 들먹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괴롭혔다.

약속 어기고 적반하장으로 충성심 들먹여
그 앙금이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후에도 가시지 않았던지 김일성·김정일에게 보내는 축전을 작성할 때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축전은 원래 초안을 써서 지도원들에게 검사받은 다음 최종적으로 깨끗이 정성스럽게 써서 제출하는데, 처음 초안을 작성할 때는 글씨를 그다지 잘 쓰지 않아도 된다. 북한에서는 정성을 다해 곱게 쓰는 것, 정자로 글을 쓰는 것을 정서(正書)라고 한다.
김명걸은 자기 글씨체가 예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초안을 쓸 테니 자기보다 글씨체가 나은 내가 정서를 하라고 했다. 물론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작성하기로 한 초안부터 마지막 정서까지를 통째로 내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초안은 글씨를 알아볼 정도로 쓰면 되고, 이미 조장이 초안을 쓰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대로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정서는 약속대로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짜고짜 내게 충성심이 없다고 하면서 단순한 절차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걸고 들었다. 여기에 나도 질세라 그런 문제를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모함하지 말라며 “당신은 약속도 안 지키고 여자들처럼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라고 그를 몰아세웠다. 그래서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김명걸은 이때에도 담당 부서에 제의해 당장 공작조를 해체하도록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부서에 전화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러고는 내가 어서 전화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자 제풀에 취소했다. 이 일은 그 후 내가 술을 같이 마시며 화해하자고 해서 넘어갔다.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에게 차인 김 조장
이런 와중에 김명걸과 수개월 전부터 사귀던 초대소 접대원 아가씨가 다른 공작원과 눈이 맞아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접대원 아가씨와 결혼한 공작원은 1985년 가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가 1987년 말경에 복귀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2인 공작조의 조원 박모 씨였다.
사실 김명걸은 그때 적구화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 남파 공작 임무를 받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운이 나쁘면 남한에 침투했다 죽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까 그 접대원 아가씨로서는 이미 남한에 침투했다 복귀해 공화국영웅 칭호까지 받아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남자를 선택할 만도 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 아가씨가 김명걸을 차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는 신경이 아주 날카로워졌다. 며칠 동안 말도 안 하고 고민하더니 자기가 사귀던 아가씨가 다른 공작원과 결혼한 것, 본인이 화가 난 것 등 모두가 내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나중에 나도 모르게 담당 부서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동에서 뺨 맞고 서쪽에 눈 흘기기… 조장의 옹졸한 화풀이
그는 내 성격이 까다롭고 조장인 자기 말도 잘 안 들어서 나와 같이 일을 못 하겠다며 공작조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담당 부부장과 지도원들이 갑자기 초대소에 들어와 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담당부서에서 회의를 소집한 이유조차 몰랐다가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회의가 시작된 후 담당 부부장이 조장인 김명걸에게 먼저 발언권을 주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 단점만 열거하고 나서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앞으로 같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담당부서 회의에서 자아비판
조장의 발언이 끝나자 담당 부부장은 나를 쳐다보면서 조원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소집된 회의에 참석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격이었다. 정말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고 눈물까지 나왔다. 당장 조장 김명걸이 잘못한 것을 전부 나열하면서 반격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 둘 사이에서 생긴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든, 또 누구에 의해서 발생했든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가지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런 자리가 마련된 것 자체를 수치로 생각했다. 그래서 조장 김명걸이 지적한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며 자신을 반성한 다음 앞으로 기회를 주면 고치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조장 김명걸의 잘못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그 누구에게 빚을 지고 그것을 갚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며, 그 누구의 눈치나 보고 비위나 맞춰 주려고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데 대해서는 어떤 비판을 해도 충분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또 어떤 책임이라도 내가 질 것이 있으면 결코 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진정성을 가지고 단호하게 이야기한 다음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면서 보니 김명걸은 ‘당신들도 들은 것처럼 저 친구가 다 잘못했다고 하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진심은 통한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었다. 담당 부부장이 회의를 결속하는 자리에서 김명걸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부부장은 “조장이 나이도 많고 또 조장이라는 책임을 맡았으면 그에 걸맞은 생각을 해야 한다. 공작조 내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도 조장이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조장은 책임지는 모습을 하나도 보이지 않고 조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오히려 나이 어린 조원은 자기가 모두 책임지겠다고 하니 이 공작조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다”며 김명걸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리고 내게는 조원도 너무 본인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결과적으로 나와 갈라지든가 아니면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 비판받게 하려던 김명걸의 의도는 빗나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 둘의 관계는 적구화 교육이 끝난 그해 말까지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김명걸은 적구화 교육 강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하지 못해 그들에게도 나쁜 인상을 안겨 주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담배를 걸고 고스톱을 치다가 승부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이었다. 당시 강사가 김명걸에게 피박을 씌워 담배를 많이 따게 되었는데, 이때 김명걸이 화를 못 참고 강사에게 주어야 할 담배를 그 자리에서 다 꺾어 버렸다. 그래서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김명걸과 어떤 오락도 하지 않게 되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제 기억으로는 저와 동생이 어릴 때 다녔던 유치원은 유독 학부모가 직접 참여하는 활동이나 상담 같은 프로그램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거의 대부분을 직접 참여해 저희와 함께 많은 체험을 해 주셨는데, 혹시나 학부모가 되어 참여한 그런 활동들에서 당황스러웠던 적은 없으셨나요? 완전히 다른 교육과 문화 풍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로서는 모든 것이 새로웠을 것 같아요.
아버지 : 너희들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진행했던 모든 프로그램이 한국과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았던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어. 그래서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던 게 사실이야.
나도 어렸을 때 북한에서 유치원에 다닌 적 있지만 북한에는 부모님들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전혀 없어. 기껏해야 아이들이 사고를 치면 부모님을 불러다 자식 교육 잘하라며 훈계하는 게 전부였지.
그러나 너희들이 다녔던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나도 그렇지만 다른 학부모들도 자식을 처음 낳아 키울 테니까 생소한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 또 자식의 일이라서 그런지 그런 어색함과 쑥스러움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어.
오히려 너희들이 유치원에 가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즐겁게 참여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즐거웠고, 그래서 유치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급적이면 참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김동식 2025-05-07
***********************
[평양에서 왔습니다] <49>
비밀 아닌 비밀… KAL기 폭파 등 모두 북한 소행
적구화 실습과 테스트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적구화 교육을 마칠 즈음 우리는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는 적구화 교육환경관(일명 ‘남조선환경관’)에 가서 강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2주간에 걸쳐 실습과 함께 테스트 준비를 했다.
남조선환경관은 산 중턱에 너비 15m, 높이 10m, 길이 1.5~2km 정도 되는 터널을 뚫고 그 안에 음식점·슈퍼마켓·이발소·여관·개찰구·역대합실·커피숍·극장·문방구·양장점·내무반 등 남한의 각종 시설물을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촬영 세트장 같은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각 시설물에는 남한 출신의 강사가 들어가 있다. 이들은 실습하러 온 공작원들이 해당 시설을 이용하면서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고 현실감 있게 하는지 체크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지적해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남한 출신 가장해 백화점에서 쇼핑하기
한편, 대남 공작원들이 적구화 교육을 마치기 직전이나 마친 다음 꼭 한 번씩 해 보는 장난 비슷한 것이 있다. 그것은 평양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이나 해외에 사는 남한 출신 교포처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자신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다.
처음에 어떤 공작원이 시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에서는 돈을 가지고도 자기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사지 못하기 때문에 고안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가 북한 내부의 기본적인 절차나 규정에서는 벗어나는 것이지만, 한국인화가 얼마나 되었는지 테스트도 하고 동시에 원하는 상품도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이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도 운전기사를 지도원으로 둔갑시켜 대동하고 평양 제1백화점에 들어가 얼마 전에 월북한 남한 사람처럼 서울말을 쓰면서 술과 담배를 산 적이 있다.
대학 졸업 후 적구화 완료까지의 8년 세월
우리는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친 후 그해 6월 하순에 대남 담당 부부장과 교육 담당 부부장, 그리고 해당 과의 과장·지도원 등 간부들 앞에서 그때까지 배운 서울말과 남한의 사회 환경, 각종 시설 이용 절차에 대한 종합적인 테스트를 받았다. 그런 다음 비교적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적구화 교육을 마쳤다.
적구화 교육을 마친 후 담당 과장은 우리에게 “선생들은 이제야 공작원이 되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한 때로부터 꼬박 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적구화 교육을 마친 공작조는 평양 순안 초대소 지역 내에 있는 북대천 1호 초대소로 옮겼다.
비밀 아닌 비밀… KAL기 폭파 등 각종 테러 사건
내가 적구화 교육을 마치던 1987년 후반기에는 한국인들은 물론 세상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한 KAL기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선거와 함께 88서울올림픽이 성공리에 개최되고 남북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많이 있었다.
특히 1987년 11월29일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한 후 북한에서는 신문·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공작원들의 경우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을 뿐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쯤은 대체로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83년 9월에 있었던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과 같은 해 10월에 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등도 모두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공작원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범은 대학 선배 이철
대구 미문화원 폭파를 거행한 테러범은 나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2년 선배 이철과 그의 조장이었다. 이철은 키가 작고 얼굴도 동안이어서 고등학생으로 위장하고 대구 미문화원에 들어가 폭발물을 설치한 후 원격조종 방식으로 건물을 폭파했다. 이철은 대구 미문화원 폭파 임무 수행 후 여러 번 직접 만나기도 했다.
한편, KAL기 폭파 사건의 당사자인 김현희는 대외정보조사부(현재 정찰국 해외정보국) 소속이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던 연락부에서도 2개 공작조가 해상을 통한 직접 침투의 방법으로 서울에 침투한 후 테러를 감행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폭파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88서울올림픽을 파탄내기 위한 이러한 테러 공작은 준비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제2의 KAL기 사건도 준비
당시 북한에선 제2의 KAL기 사건도 준비했다. 이 공작에는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이철이 속한 공작조와 윤동철·김군철 공작조의 2개 공작조가 동원되었다.
이 공작은 당시 하나밖에 없었던 국제공항인 김포국제공항이나 서울역 또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올림픽주경기장 등 시민이 많이 모이는 다중 집합 장소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불안감을 조성해 외국 선수들이 마음 놓고 올림픽 개최지인 서울에 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려 한 것이다.
그런데 KAL기 폭파 사건 이후 김현희가 검거되고 안기부에 의해 그것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국제사회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등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김정일이 어쩔 수 없이 제2의 KAL기 폭파, 즉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려 준비했던 테러 행위를 중단한 것이다.
김정일 경호 전담 요원 선발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던 1985년,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작전부에서는 김정일 전용 선박 운영과 경호를 전담할 경호원을 선발했다.
당시 작전부에서는 나와 동기인 19기 졸업생 가운데 키가 165~170cm인 친구들 가운데 40여 명을 1차로 선발해 대남 공작요원 전문 병원인 915 병원에 데려가 무좀까지 체크하는 등 별도의 정밀 신체검사를 했는데, 나도 거기에 차출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입학 때부터 연락부에서 공작원으로 선발해 위탁교육 중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본격적인 인선 과정 도중에 제외되었다.
그렇게 40여 명을 상대로 여러 차례의 정밀 신체검사와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19기 동기생 14명이 김정일을 경호하는 전담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1985년 5월 말 대학 졸업과 함께 중앙당 작전부 산하 원산연락소 예하에 있는 ‘충성호’ 방향에 배치되었다.
김정일 전용 선박 ‘충성호’ 방향
‘충성호’는 김정일이 동해상에서 이동할 때 이용하는 전용 선박의 명칭이다. 말 그대로 ‘김정일을 충성 다해 모시기 위해 만든 선박’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방향’이라는 것은 연락소 산하의 조직 명칭으로, 군대로 치면 대대나 중대 정도의 규모에 해당한다. 당시 충성호 방향에는 김정일 전용 선박과 호위 선박 등 3척의 ‘충성호’가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김정일의 요리사를 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쓴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충성호 선박과 함께 경호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책 앞 부분에 1988년 5월에 원산에서 선박에 타고 있는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었던 허담의 옆모습이 보이는데, 그가 타고 있던 배가 바로 ‘충성호’이고 그 옆에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승조원 겸 경호원들이다.
김정일 낚시 위해 잠수 도중 사망한 동기생
그런데 내 동기생들이 충성호 방향에 배치된 지 3년이 지난 1988~89년에 그들 가운데 2명이 서로 다른 이유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충성호 방향 경호원으로 차출된 동기생 가운데 강호성과 유재석이 바로 그 비운의 인물들이다. 강호성은 잠수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유재석은 총기를 휴대하고 탈출해 군 병력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강호성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원래 대학 4학년 시절 1중대장이었던 나와 함께 3중대장을 했을 정도로 잠수와 수영은 물론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친구였다. 그런 그가 잠수복을 입고 공기통을 멘 상태에서 바다에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임무는 김정일이 원산에 와서 충성호를 타고 낚시질할 때마다 물속으로 들어가 김정일 낚시에 물고기가 잘 물리도록 몰아주는 것이었다. 그 임무 수행을 위해 미리 수중에 들어가 훈련하던 도중 어부들이 쳐 놓은 그물에 잠수장비가 얽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탈출하려다 경비대와 총격전 후 자살한 동기생
유재석은 남한의 인기 개그맨 유재석과 이름이 똑같아서 더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특공대반 2중대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비교적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훈련 도중 휴대했던 AK 자동소총과 실탄 수십 발을 들고 뛰쳐나가 북한군 경비대 군인들과 대치하면서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는 군인들에게 실탄을 난사해 여러 명을 사망하게 한 다음 끝내 자살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김정일이 원산에 오지 않는 기간에 훈련을 너무 혹독하게 시켜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남파 전 적구화 교육을 받을 당시 서울의 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아버지께선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그리고 그 후 남한에 침투해서 실제 서울의 모습을 보셨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궁금합니다.
아버지 : 실제 서울의 거리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서울 모형 사판’이라고 해. 실물 모양의 건물 등을 축소해 서울 지도에 붙여 놓은 것이지. 그것은 평양시 교외인 용성구역에 터널을 뚫고 만들어 놓은 ‘적구화환경관’이라는 곳에 있어.
적구화환경관은 평양시 교외의 산 중턱에 길이 1~1.5km, 높이 10m, 너비 15m 정도 크기의 터널 내부에 만들어 놨는데, 터널의 제일 안쪽 부분에 서울 모형 사판이 있거든. 말 그대로 서울 지도를 그려 놓고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그대로 축소해 만들어 놓은 거야. 예를 들면 광화문에서 세종대로를 바라볼 때 오른쪽에 정부 서울청사와 외교부 청사, 그리고 세종문화회관 순으로 있는데 그 건물들을 그대로 축소 제작해서 엄청나게 큰 지도에 붙여 놓은 거라고 보면 돼.
서울 모형 사판을 보면서 정말 서울의 거리와 유사하게 잘 만들어 놨다는 데 놀랐고, 그것을 보면서 서울의 지리와 대표적인 건축물들의 위치·형태 등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서울 모형 사판을 보면서 서울 지리를 익혀 놔서 그런지 서울에 와서도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었어.
다만, 모형 사판이나 TV 화면에서 보던 것과 실물은 엄청나게 차이가 났지. 서울에 와서 백화점을 비롯해 건축물들을 실제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하고, 섬세했어. 값비싼 건축 자재를 보면서 남한이 정말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실감했지.
그래서 북한에 복귀해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 서울에 가 보고 절실히 느꼈다. 서울에 가 보니 거리와 건축물들을 엄청나게 잘 지어 놨던데, 통일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민족이 건설해 놓은 창조물들이 모두 파괴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파괴되면 그것들을 다시 복구하느라 또 수십 년이 걸릴 텐데, 그런 통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통일을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거야.
김동식 2025-05-08
***********************
[평양에서 왔습니다] <50>
잠꼬대하며 기밀 ‘줄줄’… 공작조장 또 교체
조장이 뭐 대단한 벼슬이라고…
적구화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1988년 여름, 나와 조장 김명걸은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석암저수지에서 열흘 동안 연례행사의 하나인 수영·잠수 훈련을 했다. 이때 김명걸의 수영 실력과 잠수 실력을 보니 먼저 만났던 박철만보다는 좀 나았던 것 같다.
그러나 훈련 기간에는 보통 야외에 텐트를 쳐놓고 스스로 밥을 지어 먹는데, 김명걸이 조장이라는 위치를 대단하게 생각했는지 열흘 동안 한 번도 식사 당번을 하지 않아 동행했던 운전기사나 지도원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갓 결혼한 조장은 백두산 답사를 신혼여행으로
수영·잠수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백두산 답사를 다녀오게 되었다. 담당 과에서는 김명걸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고, 또 그의 고향이 답사 코스의 중간 지점인 양강도 보천보였기 때문에 신혼여행을 겸해서 아내를 데리고 가게 했다. 나는 총각이었으므로 그와 떨어져 다른 지도원과 다녀왔다.
김명걸은 이미 1988년 초 평양에 사는 친척의 중매로 김일성이 거처하고 있던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 ‘경흥관’의 결혼식 매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렸었다. 원래 사귀던 아가씨보다 키가 약간 작은 것을 제외하면 생김새도 미인이었고 성격도 좋았던 것 같다. 김명걸은 그 후 아내 덕을 단단히 보았다.
백두산 답사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되는 9월 중순 김명걸과 함께 또다시 약 10일에 걸쳐 종합 훈련에 참가했다.
또다시 받게 된 비합법 훈련… 지도원에게 이의 제기
당시 담당 지도원이 초대소에 들어와 종합 훈련을 할 예정이라고 전하며 기본은 비합법 훈련을 위주로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불만이 있던 나는 지도원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비합법 훈련은 과거에도 여러 번 해서 이미 숙련되었으니 자동차 운전 연습과 같은 숙련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훈련 종목 가운데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훈련을 하자고 했다. 뜻밖의 문제 제기에 당황한 지도원은 당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지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내 주장을 굽히지 않자 지도원은 말문이 막혀 “당의 방침이니 무조건 집행해야 한다”며 당의 방침까지 들먹였다. 그래서 “그것이 당의 방침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당의 방침에 의해서 이번 훈련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그랬으면 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을 텐데요”라며 다시 항의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작부서에서 결정했기 때문에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열흘 동안 늦가을의 차가운 비를 맞으며 평안남도 평원과 숙천·문덕 일대에서 행군과 숙영·무인 포스트 매몰 및 발굴·접선 등의 비합법 훈련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에는 100리 강행군을 해서 초대소 근처까지 뛰어 들어와 산속에 비트를 파고 다음 날 아침 지도원의 비트 수색을 끝으로 훈련을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이것 역시 계획대로 마쳤다.
“6·25 때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지도원은 내가 이의를 제기했던 것 때문에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던지 100리를 뛰어와서 초대소 요리사가 끓여다 준 따끈한 꿀물을 마시려는데 감정을 자극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도원은 빈정대는 투로 이렇게 얘기했다.
“이런 정도의 훈련을 하면서 꿀물까지 마시면 되겠소? 우리는 6·25 전쟁 때 그런 것은 생각도 못 했는데…, 이래서야 어떻게 혁명을 하겠소?”
나는 그 말에 또다시 참지 못하고 이렇게 대답했다.
“6·25 전쟁 때 지도원 동지가 그렇게 했다고 우리가 꼭 그때처럼 해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까? 우리가 고생하는 것도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것인데, 일부러 좋은 조건도 마다하고 고생을 사서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꿀물 한 모금 마시는 게 무슨 대단한 사치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건 지나친 것 아닙니까? 우리도 앞으로 고생을 해야 할 시기가 오면 감수할 각오가 다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지도원은 얼굴이 상기되어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언제 선생하고 논쟁하자고 했소?”

지도원 골탕먹이려 찔레꽃 넝쿨 속에 판 비트
그날 밤 비합법 숙영을 하기 위해 비트를 팠는데, 나는 아예 다음 날 아침 지도원이 비트를 수색할 때 찾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가시가 많이 돋아 있는 찔레꽃 넝쿨 속을 헤집고 들어가 비트를 팠다.
사실 훈련을 거의 마무리할 때쯤 되면 다른 지도원들 경우에는 공작원들에게 일단 비트를 파게 한 다음 검열만 하고 거기서 잠을 재우지 않고 초대소에 들어와 자게 한다. 그런데 최 지도원은 비트를 파고 난 후에도 나오라거나 초대소로 철수하자는 말이 전혀 없었다. 당시 나와 관계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가 워낙 원칙적인 선에서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도원은 김명걸의 비트를 찾고 나서 내가 파고 들어가 있는 비트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큰소리로 나를 부르며 나오라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고생 좀 해 보라는 마음으로 나가지 않자 그는 아예 포기하고 나에게 얘기도 하지 않은 채 초대소로 돌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스스로 비트에서 나와 초대소로 돌아오자 지도원은 내게 비트를 파지 않고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잠을 자다가 오지 않았느냐고 의심부터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도 실망스러워 자기 부하를 그렇게 믿지 못하겠느냐며 직접 내가 파고 들어가 잠을 잔 비트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확인을 시켜 주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무 말도 못 했다.
격술은 각종 무술이 결합된 종합 무술
그해 10월에는 조장 김명걸과 함께 또다시 719훈련장에 들어가 약 20일 동안 격술 집중훈련을 받았다. 다른 공작원이라면 한 번만 받으면 될 격술 집중훈련을 후임 조장으로 만난 김명걸이 나보다 후배였던 관계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받아야 하는 ‘덕’을 입었다. 격술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태권도와 유도 및 호신술과 기합술 등 각종 무술이 결합된 종합 무술이다.
격술 훈련을 받는 과정에 한 번은 나와 김명걸이 자유대련을 하다가 진짜 싸움이 날뻔한 적이 있었다.
진짜 싸움으로 번질 뻔한 자유대련
자유대련 전에 김명걸은 본인이 공작원양성반을 졸업한 공작원 가운데 격술을 제일 잘한다고 말끝마다 자랑했고, 내게도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덤벼들었다. 나는 김명걸이 나이도 많고 또 조장이어서 처음에는 공격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방어 위주로 했다.
그랬더니 그는 정말로 내 수준이 낮아 공격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겁 없이 덤벼들었다. 나는 그냥 한번 위협을 준다는 차원에서 결정적인 순간 발차기로 맞받았다. 그랬더니 그는 미처 피하거나 방어를 못한 채 그대로 내게 얻어맞았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대로 계속 하다가는 감정이 개입되어 훈련 과정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것 같아 그만두자고 말하며 일단 등을 돌려 천천히 걸어갔다.
그 순간 그가 내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와 권투장갑을 낀 주먹으로 내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그에게 한 방 얻어맞고 나도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 곧바로 그에게 돌아서며 맞받아치려고 공격 자세를 취했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똑같이 유치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동작을 멈춘 것이다.
또다시 혼자 받은 격술 판정
그 후 격술 훈련 종합 판정을 하루 앞두고 낙법 연습하다가 목이 꺾어질 뻔한 사고가 발생해 결국 김명걸은 최종 테스트를 받지 못했다.
당시 나는 격술 교관의 지시에 따라 김명걸이 보는 앞에서 내 키 높이의 뜀틀을 향해 뛰어가다가 점프를 한 다음 뜀틀에 손을 대지 않은 채로 뜀틀을 넘는 낙법을 성공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낙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충분한 연습조차 없이 뜀틀을 뛰어넘으려고 하다가 공중에서 곤두박질해 목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의 부상으로 인해 마지막 격술훈련 판정은 또다시 나 혼자서 받아야 했다.
이 외에도 초대소에서 적구화 교육 기간에 발표된 김일성·김정일의 노작과 당 정책, 주체 철학에 대한 공부는 물론이고 무전 송·수신 훈련과 암호 해독 훈련 등 통신 연락과 관련한 훈련도 지속적으로 실시했고 실탄 사격 훈련도 했다.
잠꼬대하는 공작조장
김명걸과 함께 하는 적구화 교육 과정 중 전에는 서로에 대해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된 적도 있다.
김명걸은 낮에 조금만 힘든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면 어김없이 잠꼬대를 하곤 했는데, 일반적인 그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당일 낮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옆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물론 좀 변덕스럽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겁이 많은 것 등은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낮에 있었던 일들을 다른 사람과 대화하듯 털어놓는 그의 특별한 잠꼬대는 적지에서 공작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공작원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잠꼬대 사실을 알려 주며 주의를 당부했지만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냈다.
결국 그 후 나는 이러한 사실을 담당 지도원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낮에 있었던 일 늘어놓는 잠꼬대… 공작원의 최대 약점
“김명걸이 잠꼬대하면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와 함께 적구에 침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 위해 공작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모든 것은 부서에서 판단할 일이지만 저로서는 그의 잠꼬대가 고쳐지지 않는 한 절대로 그와 함께 적구에 나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내 의견을 경청한 담당 부부장과 지도원은 김명걸에게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면 앞으로 공작원을 하기가 힘드니 무조건 고치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이 잠꼬대를 하지 않는다고 억지를 부렸다. 할 수 없이 담당 지도원이 초대소에서 직접 잠을 같이 자면서 확인하고 이야기해서야 겨우 믿는 눈치였다.
비단 잠꼬대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는 결국 그 이듬해 초에 김명걸과 헤어져 다른 사람과 공작조를 이루게 되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는 자식인 저와 동생에게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다음 세대가 더 나아진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제가 아버지를 뛰어넘는다는 게 과연 가능할지 또 어떻게 해야 가능할지 등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삶은 ‘국가’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거든요.
아버지 : 사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의 대부분을 개인이 아닌 국가를 위해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북한에서의 15년은 김씨 독재 체제를 위해, 남한에서의 20년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해 바쳤으니까….
내가 자식인 너희들에게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한 것은 단순히 나처럼 국가를 위해 충성하라는 건 아니었어.
후대 세대가 선대 세대를 뛰어넘어야 가정이든 국가든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얘기한 거였어. 실제로도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렇게 해서 발전해 왔으니까….
그런데 내가 너희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려 했던 것은, 내가 제대로 된 대남 공작원이 되기까지 준비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기 때문에 너희들도 어떤 일을 하든 10년은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 그 분야에서 프로가 된다는 의미에서 얘기한 거야.
한국은 북한에 비해 모든 면에서 조건과 환경이 좋으니까 그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너희들이 충분히 나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얘기한 거야. 지금 너희들을 보면 충분히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면 얼마든지 아버지인 나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믿어.
김동식 2025-05-12
'안보, 경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동식 기획연재] <15> (5) | 2025.05.17 |
---|---|
현실화된 北 핵보유 한국의 길은① (5) | 2025.05.13 |
[김동식 기획연재] <14> (3) | 2025.05.10 |
‘간첩은 없다’는 거짓 프레임 (0) | 2025.05.07 |
[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0) | 2025.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