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김철진의 평양실록 평양에 분 칼바람
심화조 사건의 숨겨진 내막
⊙ 2년간 2만여 명 희생된 심화조 사건의 내막과 결말
⊙ 김정일, “아버지 괴롭힌 최지주 후손들과 서북청년단 잔당 잡으라는 게 아버지의 유훈”
⊙ 평양 용성구역의 70세 이상 노인들은 모두 서북청년단 단원이라며 처형
분단 후 57년. 그 세월 동안 평양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김철진씨는 북한의 당과 군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남으로 넘어온 탈북자다. 평양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갖가지 사건들에 대한 그의 증언을 《월간조선》이 입수해 연재한다. 이는 후일 통일 한국이 써 나갈 새로운 대한민국 현대사의 사초로 활용될 수 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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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생전에 인민보안부(前사회안전성)를 자주 찾았다. 지난 2010년 6월 인민보안부에서 운영하는 대동강 과수종합농장을 찾은 김정일. |
1996년 평양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후일 ‘심화조 사건’으로 불리게 된 희대의 간부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 첫 작업이 평양의 용성구역 안전부(현재의 경찰서)에서 시작했다고 해 일명 ‘용성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화조 사건의 주연은 채문덕이었다. 시간은 심화조 사건이 일어나기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정일과 그 동창생 채문덕
채문덕은 김정일과 같은 시기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다. 졸업 후 평양시의 안전국장(군인 계급으로는 중장)까지 올라가며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1992년 채문덕에 대한 견제가 들어왔다. 당시 중앙당 본부의 당 책임비서였던 문성술과 평양시 당 책임비서였던 서윤석의 견제였다. 문성술은 중앙당 조직간부부 1부부장도 함께 맡고 있었다. 이들은 채문덕이 김정일과 대학 동창생이라는 것만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날친다’고 주장했다. 결국 채문덕은 평안남도 북창군으로 쫓겨 가 득장 분주소의 소장(중좌 직급)으로 직급까지 격하됐다. 채문덕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을 테다.
1995년, 채문덕은 다시 중앙 무대로 돌아왔다. 평안남도에서 이를 갈며 복귀를 꿈꾼 지 꼭 3년 만이었다. 장성택의 후원을 받아 가능했다. 중앙당 조직행정부 부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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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의 형 장성우 前3군단장. |
이듬해인 1996년, 중앙당 내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그때까지 사회안전성(현재의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의 정치국장 자리는 장성택의 형 장성우가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성우가 인민군 평양시 방어군단인 3군단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인민보안부의 정치국장이 어떤 자리인가.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의 민정수석이나, 경찰청장 혹은 국정원 2차장에 비교할 수 있는 핵심 직위다. 장성우가 맡고 있던 정치국장 자리를 물려받은 이가 바로 채문덕이다.
유배 아닌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치안의 핵심 자리를 차지한 채문덕이 그 순간 떠올린 이가 누구였을까. 바로 자신이 쫓겨 가게 된 단초를 제공한 문성술과 서윤석이었을 게다.
채문덕을 정치국장으로 임명하며 김정일은 채문덕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김일성의 유훈이라며 김정일이 내린 지시는 이런 내용이었다.
“일제 강점기, 김일성이 고향 만경대에서 지낼 때, 김일성 가문을 착취한 ‘최지주(崔地主)’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해방 후 최지주의 아들 최성택은 남조선으로 달아나 장성이 되었다. 다른 자식들과 그 후손은 아직도 북에서 자신의 출신을 속인 채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그들을 잡아내지 못했다.
또 한 가지 골칫거리로 서북청년단이 있다. 광복 후와 6·25 전쟁 당시 악질적인 반공활동을 한 서북청년단의 잔당들이 아직도 북에 많이 남아 있으니 이들을 꼭 잡아서 숙청하라.”
김정일이 왜 이런 지시를 내렸을까.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핑계를 댔지만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평양의 고위급 간부들과 인민들은 김정일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정된 정보만을 보며 사는 일반 인민들과는 다르게 ‘로열 패밀리’의 뒷모습을 조금씩이라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 사이에 김일성과는 또 다르게 독단적인 김정일의 행태에 대해 뒷말과 비난이 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들이 반기를 들 수도 있겠다는 것을 감지한 김정일이 선택한 것이 바로 대대적인 숙청과 물갈이였다.
서북청년단 조작 사건의 시작
김정일은 채문덕에게 ‘심화조’를 조직하라고 명령했다. 심화조는 우리로 치면 특별감찰팀 같은 특별 조직이었다. 심화조 차원에서 전국의 모든 간부들을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무리 당시 김정일이 악의 축으로 자리 잡는 초기 단계를 밟고 있었던 시기라 해도 감찰팀 같은 조직을 어느날 갑자기 만들기는 눈치가 좀 보였을 터. 구실이 필요했다.
채문덕의 레이더망에 한 사람이 걸려들었다. 평양 용성구역 행정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채문덕이 정치국장을 맡기 직전인 1995년 말 용성구역에서는 다소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전부 주민등록과의 안전원(군사계급은 대위) 박 모라는 사람이 용성구역의 행정위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했다. 박씨는 자신이 담당한 주민등록 자료를 살펴보다가 알게 되었다며, 행정위원장이 미군 첩보기관에서 훈련을 받고 6·25 전쟁 시기에 남조선에서 침투한 간첩이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그런데 박씨가 참고했다는 자료가 허위라는 게 밝혀졌다. 박씨는 되레 간부 모함죄에 걸려 불명예 제대를 했고 심지어 량강도 백암군으로 추방까지 당했다. 어떻게 보면 잔잔한 바다에 잠깐 일었던 파도 같은 이 사건은 이듬해 폭풍의 전조곡이 됐다. 채문덕이 이 사건에 주목한 것이다.
김정일이 심화조 지시를 내리고 얼마 후 갑자기 용성구역의 룡추동 뒤의 산에서 미국산 무기와 수류탄, 총알이 발견됐다는 긴급 뉴스가 TV를 통해 나왔다. 뉴스의 내용은 이랬다.
< 6·25 전쟁 시기,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서북청년단 특공대가 북으로 잠입했다. 이들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김일성이 집무를 보던 용성구역 건지리의 최고사령부를 습격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북조선 인민 속으로 숨어든 서북청년단 잔당들은 지금도 무기를 감춰 놓고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룡추동 뒤의 산에 이들이 숨겨 놓은 미국산 무기들을 찾아냈다. 계급적 원수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뒤이어 용성구역 행정위원장도 실은 서북청년단의 한 명이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행정위원장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지방으로 쫓겨났던 안전원 박씨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중좌로 승급된 후 그 전에 일했던 부서인 사회안전성 주민등록국의 책임지도원으로 승진까지 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서북청년단의 잔당을 잡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업적을 인정받아 공화국 노력영웅 칭호도 받았다.
2년 동안 2만여 명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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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 못 이겨 자신이 서북청년단 단원이라고 자백하고 처형당한 서관히 前농업담당 비서. |
1997년 초, 사회안전성 본부에 중앙상무조가 설치됐다. 책임자는 물론 채문덕이었다. 전국의 모든 도, 시, 군 안전부에 ‘심화조를 설치해 간부들의 경력을 검증하라’라는 지시가 김정일의 이름으로 내려왔다.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심화조의 첫 타깃은 중앙당의 농업 담당 비서였던 서관히였다.
서관히는 김정일이 비료를 사 오라고 준 300만 달러(미국 달러)를 탕진했다는 이유로 사회안전성 교화국 7교화소(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위치)에서 교화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화조는 서관히를 다시 불러 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에 있는 사회안전성 예심국 구류장 안에서 모진 고문이 시작됐다. 고문에 못이긴 서관히는 거짓 자백을 했다.
자신은 서북청년단 단원이고, 북한의 농사를 망치려고 일부러 비료값을 탕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하다 죽은 김만금도 같은 서북청년단이었고, 황해남도 당 책임비서 피창린, 개성시 당 책임비서를 했던 김기선, 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규도 서북청년단 단원이었다는 자백이 나왔다. 이에 대해 두 명, 과거 채문덕의 ‘원수’였던 문성술과 서윤석이 이 화살을 피해 가지 못했다.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였던 문성술과 당시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서윤석도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자백이 서관히의 입에서 나왔다. 채문덕의 개인적인 복수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처형이 시작됐다. 이미 죽은 김만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양시 형제산구역 십미리에 있는 사회주의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던 김만금의 시체를 파내서 거기에 대고 총을 쐈다.
림형규, 피창린, 김기선 등을 고문한 끝에 자백을 받아 내고 총살했다. 문성술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안전부에 있는 구류장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했다. 문성술은 모진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고 자기는 죄가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설사약을 먹이고 3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이지 않았다. 문성술은 그렇게 사망했다. 서윤석은 고문을 통해 온 몸의 모든 뼈마디가 부서져서 죽었다. 처형당한 간부들의 가족은 전부 사회안전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던 18호 관리소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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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으로 촬영한 18호 교화소.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가 지난 2003년 공개한 사진이다. |
칼부림은 일파만파 퍼졌다. 용성구역에서 거주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 중 대부분이 서북청년단 특공대원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6·25 때 청년으로 넘어왔으니 지금 쯤은 70세 이상이라는 계산법이었다. 이들은 모두 고문을 받고 자백을 한 후 총살당했다. 그 가족들은 관리소로 갔다.
평양시 강남군, 자강도 희천시 등 각 지역의 안전부에서 당 책임비서를 고문하다가 죽이는 사건도 속출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강남군과 희천시에서는 안전부를 해산하고 병사들을 다 제대시키고 다시 조직하기도 했다.
나중엔 관리소가 넘쳐나 관리소를 새로 지었다. 1998년 여름 함경남도 대흥군에 17호 관리소가 새로 들어섰다. 그 후 어느날 밤, 18호 관리소에 있던 ‘서북청년단 잔당의 가족들’이 무개 화차에 실려 17호로 이감됐다.
2년의 기간 동안 총살되거나 관리소로 간 이들은 2만명에 육박했다. 평양의 중앙기관 간부들은 1997년과 1998년 두 해를 공포 속에서 보냈다.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만 나면,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소리인 줄 알고 공포에 떨었다. 그 가족들도 물론이었다. 두 해 동안 평양 사람들은 숨죽이며 살았다. 김정일의 목표가 그렇게 실현됐다.
김정일의 兎死狗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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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숙청도 김씨 일가식 토사구팽이 아니었을까. 지난해 12월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당하는 장성택. |
심화조가 큰 공을 세웠다며 김정일은 채문덕과 당시 주민등록국장이었던 박창선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를 내렸다. 참모장 황진택에게는 김일성 훈장을 주었다. 그외 나머지 심화조로 일한 이들에게 국가수훈표창을 주었다. 그러면서 계속 불순분자들을 잡아내라 격려했다.
심화조 활동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중앙당 군수담당 비서였던 전병호와 사법·검찰 담당 비서였던 계응태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자, 평양의 간부와 주민들 사이에서 의혹과 불만의 목소리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일성 정권에 충성을 바쳤던 많은 간부들과 주민들이 다 간첩이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이 나라가 유지되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그러자 김정일은 다른 패를 빼 들었다. 바로 ‘토사구팽’이었다. 어차피 간부들을 대거 숙청하고 분위기 단속을 하려는 애초의 목표는 초과 달성됐으니, 남은 순서는 사냥개를 죽이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다.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가 힘을 합쳐 사회안전성을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이후 나온 조사 결과는 다시 평양을 들썩이게 했다. 심화조 사건이 채문덕의 개인적인 복수심과 공명심이 불러온 비극이라는 게 조사의 결론이었다. 김정일은 마치 자신은 심화조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중앙당에 해당 사안과 관련한 점검을 다시 하고 관련자를 철저히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이제 사회안전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리니 인민들을 보호하는 뜻인 인민보안성으로 조직의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때 사회안전성이 인민보안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2010년에는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로 다시 개칭됐다.
2000년 초부터 심화조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7월 채문덕은 사형을 당했다. 9월에는 나머지 심화조 단원들이 전격 체포됐다. 체포도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이 진행됐다. 사회안전성 봉화예술극장에 사회안전성에서 일하는 모든 성원들을 모이게 한 후, 중앙당의 계응태 비서가 들어와 황진택, 박창선 등 사회안전성의 장성 10여 명을 일거에 공개 체포했다. 전국의 안전부에서 심화조로 파견 나왔던 안전원 6000여 명도 체포됐다. 이들은 총살당하거나 교화소로 보내졌다.
심화조 사건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이들도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연좌죄가 적용돼 사회안전성 조직부국장은 중장에서 상좌로 밀려나, 평양시 력포구역 안전부 정치부장으로 갔다. 선전부국장(소장)은 신경성뇌출혈을 일으켜 평양시 보통강구역에 있는 안전성 병원으로 실려 갔다. 정신을 차린 후엔 자살했다. 본부 지도과장(대좌)은 중좌로 철직돼 평양시 평천구역 안전부 정치부 부부장이 되었다.
심화조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김정일은 ‘따뜻한 손길’을 내렸다. 관리소에 잡혀 갔던 사람들에게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높은 배려를 내렸다. 자기 자리에 돌아가서, 자기가 살던 집으로 다시 가서 살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이 와중에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 처벌 당시, 아버지가 총살된 후 관리소에 가는 가족들 중 혈연관계로 이어지지 않은 사위와 며느리들은 본인이 요구하면 이혼을 할 수 있게 해 줬었다. 이들 중엔 다른 사람을 만나 재혼하고 살던 사람도 많았는데, 다시 돌아와 원래의 남편 또는 부인과 살도록 하라고 해서, 한동안 이혼과 재결혼 바람이 불기도 했다.
평양시에서는 관리소에 갔던 사람들의 억울함을 김정일의 ‘인덕정치’로 어루만져 준다며 옥류관과 연못관, 평양면옥을 비롯한 큰 식당들에서 연회를 열었다. 이들에게 당이 한 끼 식사를 차려 주면서 위로를 한다는 명분이었다. 이 가족들이 밥을 먹으면서 김정일의 인덕정치에 보답하겠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고 안전원들의 만행을 규탄하기만 하자 위로연을 중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리소에 들어가 딸, 손녀들은 다 안전원들에게 강간당하고 피창린 같은 이는 아들 3형제가 다 매맞아 죽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것을 한 끼 식사로 대체하려는 김정일의 속임수가 통할 리가 없었다.
崔地主의 후손들 결국 총살
김정일은 자신은 몰랐던 일인 양 굴었지만 평양 주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어떻게 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한 사람의 독단으로 고위급 간부들이 싸그리 처형당할 수 있었겠는가.
가족들의 불만 제기 때문인지, 그 후 18호와 17호 관리소의 거의 모든 안전원들이 체포되고 철직되었다. 심화조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김정일의 말을 빌리면, 김일성이 유훈까지 내리며 잡으라고 했다던 만경대 최지주의 후손들은 어떻게 됐을까. 최지주의 딸은 과거를 속이고 함경북도 무산군 상업관리소 소장을 맡고 있었고, 그의 남편은 무산군 행정위원회 국장으로, 아들은 국경경비대 부소대장으로 군사복무를 하고 있었다. 심화조 사건이 끝나고도 한참 후인 2007년 말, 18호 관리소에 잡혀 왔다.
2008년 4월에 가족 3명이 함께 옥수수가루(일명 속도전가루)를 배낭에 메고 관리소를 탈출했다. 무산군까지 가서 국경을 넘으려다가 그만 잡혀 버렸다. 탈출 20여 일 만에 다시 관리소로 돌아온 것이다.
그 후 6월 관리소 강변에 수감자들이 다 모인 채 최씨 여인은 교수형을, 그의 남편과 아들, 그들에게 잠복초소 위치를 대준 인민반장은 공개 총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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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북한판 ‘발키리’ 프룬제 사건
⊙ 러시아인 교수마저 ‘북한은 사회주의 아닌 스탈린식 독재’라고 비판… 소련 군사대학에서 김일성,김정일의 실체를 알게 된 유학생들
⊙ ‘우리가 정권을 잡자’, 북한판 ‘발키리 작전’이 될 수 있었던 유학생들의 모의
⊙ 5년간 200여 명 숙청, 살아남은 이들도 고위 간부에는 등용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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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 위치한 프룬제 군사학교 건물 전경. 다른 사관학교와 통합돼 지금은 종합사관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
1993년 2월 8일, 평양의 인민무력부 본부. 갑자기 지시가 내려왔다. 본부 구성원 모두 회의실로 집합하라는 명령이었다. 무슨 일일까, 의아해하는 부원들 사이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이 조선인민군 창건일이니 훈장수여식을 하려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다며 본부 부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니, 주석단에는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었던 최광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아래 연탁에는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원흥희의 모습이 보였다.
부원들이 모두 회의장에 들어오자 원흥희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인민무력부 안에 잠입해 있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을 모두 숙청하겠다!”
그러자 회의장 양옆에 있던 출입문이 동시에 열렸다. 인민무력부 보위국 군관들과 하전사들이 두 줄로 쏟아져 들어왔다. 완전무장을 한 채였다. 이들은 회의장 복도에 줄지어 서서 부원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원흥희는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이 불린 이 앞에 득달같이 보위국 하전사 2명이 다가갔다. 한 명이 총을 겨누면, 다른 한 사람은 김일성 초상화 배지와 훈장, 견장을 떼어냈다. 주머니를 뒤져 신분증도 꺼냈다. 손을 뒤로한 채 수갑을 채우고, 어깨에 망토를 걸치게 한 다음 데리고 나갔다.
이 자리에서 즉시 체포된 이만 70명을 넘었다.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이었던 홍계성 상장과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이었던 강영환 중장, 그 외에도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주요 장성들과 고위급 군관들이 줄줄이 끌려나갔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단서는 하나, 그들은 모두 소련의 ‘군사 아카데미야’ 출신이었다.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나뉘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성원들은 온몸이 땀에 전 채 회의장을 나왔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로 5년여 동안 진행된 ‘소련 군사 아카데미야 유학생 숙청’은 이렇게 시작됐다.
북한 군부 이끈 소련 군사유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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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군대의 지휘관이었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 |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야는 1918년 레닌이 만든 군사교육기관이다. 붉은 군대의 지휘관을 길러내기 위해 세웠다. 창설 당시 명칭은 ‘참모 아카데미야’였다. 1921년 ‘붉은 군대 아카데미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25년부터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야’로 불렸다.
프룬제는 군인이자 혁명가였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1885년 2월 2일~1925년 10월 31일)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다. 루마니아 출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프룬제는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붉은 군대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민병대를 조직해 혁명에 뛰어들었고, 후에는 트로츠키에 의해 동부전선 총사령관에 임명돼 반혁명군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85년 김일성은 구(舊) 소련을 방문했다. 이때 김일성이 한 일 중의 하나가 북한의 군사간부들과 국방과학자를 소련으로 유학 보내기로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이듬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재 명칭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각 연방국 곳곳의 군사대학에 북한의 군인·대학생들이 군사대학원생과 군사유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파견됐다. 사실 소련 군사유학은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이었다. 1950년대에 소련으로 군사유학을 떠났던 이들이 돌아와 북한 군부 요직을 잡고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100여 명에 달했다. 오극렬, 김일철, 조명록이 대표적인 50년대 소련 군유학생 출신들이다.
군사유학생 선발 과정은 까다로웠다. 군사유학생의 경우, 일단 인민무력부 산하의 각 군사대학과 제2자연과학원 산하 평양국방대학(당시엔 강계공업대학), 룡성 약전공업대학에 재학 중인 2~3학년 학생만 선발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3번의 선발시험을 통과했다 해도 최종적으로 선발되려면 출신이 좋아야 했다. 최종 선발된 학생들은 3인조 또는 5인조로 편성이 돼 외국으로 출발했다.
군사대학원생은 인민군대 각 군단과 병종사령부에 복무 중인 군사작전·기술 부문의 현직 군인 중에서 선발했다. 역시 실력과 출신이 좋은 사람으로 뽑았다.
소련 곳곳에 꽤 많은 북한 군사대학원생·유학생들이 파견됐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모스크바의 프룬제를 비롯한 여러 군사 아카데미야와 군사기술대학에서 공부한 인력이 약 250여 명에 달했다. 모스크바가 아닌 다른 도시에도 파견이 됐는데, 크라스노다르(Krasnodar)에는 미그(MIG)기 조종사 육성 과정에 약 스무 명이 파견됐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잠수함 관련 인력 양성을 위해 역시 스무 명가량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보따리 장사하며 유학생활비 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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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유학생 숙청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었던 최광. |
군사유학생들은 꽤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인민무력부에서 장학금으로 매월 110루블가량의 생활비를 지급했고 지하철과 버스 등 모든 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줬다. 공연장이나 영화관 이용도 무료였다. 방학 때는 관광도 다닐 수 있게 해줬는데 모두 무료였다. 매해 1월 1일에는 최고사령관 이름으로 인삼술 한 병과 달력 두 개씩을 특별 지급해 줬다.
매년 한 번씩 북한에 다녀갈 수도 있었다. 매해 7월 방학이 되면 모스크바에 있는 북한대사관 무관부에 모여 다함께 비행기를 타러 갔다. 평양에서 다시 소련으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로 비행기를 타고 나갔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 자격으로 유학을 나와 있던 일반 사회유학생들은 이보다 덜한 대우를 받았다. 일반 유학생들은 매월 장학금으로 85루블을 받았고, 다른 무료 혜택은 전혀 없었다. 북에도 2년에 한 번 다녀갈 수 있었고, 비행기가 아닌 기차를 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소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군사유학생이나 일반 유학생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대학의 구내식당의 한 끼 식사비가 보통 1루블이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하고 담배라도 사서 피우면 110루블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그래서 시작한 게 장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북한에서는 외국에서 가져오는 물건은 대인기였다. 소련의 물건을 북한에 가져가서 팔고, 북한의 물건을 소련으로 가지고 나와서 팔면서 유학생활비를 댔다.
방학이 시작돼 평양에 들어갈 때 여러 가지 물품을 사서 들고 갔다. 소련산 냉장고, 텔레비전, 손목시계, 카메라, 사진 필름, 사진 인화용지, 사진 현상액, 옷가지 등의 물건이었다. 평양에서 소련으로 나올 때도 물건을 사가지고 나왔다. 고려인삼 엑기스, 인삼차, 사슴표 운동화, 일본산 비디오녹화기, 세이코 손목시계 같은 물건이었다. 이 물건들을 수업이 끝난 후 팔았다. 구매하는 사람 중에는 소련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 사람도 있었다.
인민무력부에서는 군사유학생들이 장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학생들이 사상적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사를 하다가 들키면 북한으로 소환을 당하기도 했다. 유학생들이 장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북한에서 감시하기 위해서는 ‘스파이’가 필수적이다. 인민무력부 보위국에서는 유학생들이 속한 조에서 한 명씩을 선택해 보위부 스파이로 삼았다. 다른 사람의 사상이 어떤지 편지로 보고하게 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스파이’는 동료를 감쌌다. 다 잘하고 있다는 보고만을 올렸다.
‘김일성 부자 연봉이 얼마인가?’
시간이 흐르면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여갔다. 일단 장학금이 너무 적어서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장사를 해야만 하는 데에 불만이 컸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사상적인 의구심이 곁들어지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같이 공부를 하던 외국 유학생 중에는 독일, 뽈스까(폴란드의 북한말), 웽그리아(헝가리의 북한말), 벌가리아(불가리아의 북한말), 체스꼬(체코의 북한말), 쿠바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군인들이 있었다. 북한 유학생들은 이들을 통해 동유럽의 실상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이었다.
매달 한 번씩 자신의 나라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때 북한 유학생들이 조선(북한)의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면 다른 나라 유학생들은 신랄하게 비판을 해댔다. 이들은 조선식 사회주의와 자신의 나라의 정치체제를 비교하며 조선의 사회주의는 ‘스탈린식 독재’라고 말했다.
김일성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이 쏟아졌다. 여기에는 심지어 소련인 교수들도 가세했다. 북한 유학생들은 다른 나라 학생들에게 김일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김일성은 20세에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1937년 6월 4일 150명을 데리고 양강도 보천보를 기습했고, 1937년 6월 30일에는 600명을 거느리고 일본군 1500명과 중국 위만군 500명, 도합 2000명을 소멸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을 패망시키고 우리나라를 해방시켰으며, 해방 후 당과 군대를 창건하고 나라를 세웠다. 지금은 해마다 2월 16일과 4월 15일에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으로 1kg의 당과류를 선물로 주는 은정을 베푼다.’
이렇게 말하면 군사대학 교수들과 다른 나라의 유학생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있나?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을 뿐이고, 일본은 소련과 미국 연합군이 패망시켰다. 김일성 부자의 연봉은 도대체 얼마이기에 전국의 아이들에게 당과류를 나눠줄 수 있나? 그야말로 개인을 숭배하는 독재정권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거듭해서 들은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조선식 사회주의에 대한 의문이 싹텄다. 왜 우리나라만 ‘리조봉건’시기(조선시대)처럼 오직 한 가문이 대를 이어가며 통치하는가 하는 의구심과 불만도 쌓이기 시작했다.
너무 일찍 발각된 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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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1950년대 소련 군유학생 출신이다. |
결정적으로 유학생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 계기는 ‘북한으로의 전원 철수’였다. 소련이 붕괴한 후, 북한 정권은 군사유학생들을 전원 북한으로 불러들였다. ‘인민군대의 기둥이 되고 골간이 되어야 할 군사유학생들이 자본주의 황색바람과 날라리풍에 물 젖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유학생들은 북한의 군사대학으로 분산 배치됐다. 이들은 ‘북한 정권은 우리를 믿지 못하는가’하는 의문을 품었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자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들을 달래려 군사계급을 한 계급씩 높여줬다.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학을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의 대우가 너무 달라진 것도 원인이었다. 유학을 떠날 때는 행여 이들이 남한으로 넘어갈까 봐 유학생들을 장성급으로 우대해 주다가, 북한으로 돌아오자 당 회의를 열어 사상투쟁을 한다며 사상 비판까지 해댔기 때문이다.
군사유학생들은 서로 단단히 뭉치기 시작했다. 군사유학생들의 부모는 대부분 중앙당, 인민무력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 같은 조직의 고위 간부들이었다. 출신성분과 성장배경이 비슷하다는 점과 소련에서 공부하며 나라 바깥의 실상을 보고 들었다는 점이 이들을 뭉치게 했다. 부모들이 고위직에 있으니 누가 우리를 잡을 수 있겠나 하는 자신감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뭉치게 한 이런 점이 훗날 군사유학생들을 사지로 몰고 간 올무로 작용했다.
군사유학생들은 김일성 정권의 독재성과 부패, 사회주의 제도의 취약성을 정면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동유럽 나라들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사유학생들끼리 모여 함께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모의는 너무 일찍 발각돼 버렸다.
발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비밀을 지키는 데 허술했다’는 점이다. 순진했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다. ‘그 누가 우리를 잡겠느냐’하는 생각에 너무 공개적으로 행동했다. 뿔뿔이 서로 다른 대학과 부대에 흩어져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자주 만났다. 술도 마시면서 비밀리에 정권을 잡을 모의를 했는데 공개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결국에는 꼬리를 밟힐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군사유학생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품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군사유학생들끼리만 똘똘 뭉쳐 어울리고 ‘만약 정권을 잡는다면 군사유학생들끼리 나라를 이끌어 나가자’는 식으로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들의 모의를 지지할 이유가 있었을까. 결국 인민무력부 보위국이 군사유학생들의 모의를 염탐해 김정일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5년간 軍유학생 중 80%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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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프룬제 군사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모습. |
김일성과 김정일은 보고를 듣자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자신들을 배반한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믿었던 군사유학생 출신들이었기 때문이었을 터다. 김 부자는 인민무력부 보위국에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소련 군사 아카데미야 사건이 시작됐다.
숙청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1993년 2월 8일의 대대적인 체포 이후에도 숙청이 이어졌다. 소련 유학 시절 각 조에서 스파이 역할을 했던 이들이 가장 먼저 숙청당했다. 유학생들이 변절한 것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5년 동안 군인을 숙청하는데 그 과정이 어찌 순조롭기만 했겠는가. 1993년 말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김책공군대학에서 공부하던 17명의 군사유학생을 체포할 때의 일이다. 이들을 물자호송 식으로 평양에 데리고 온 다음, 평양역에서 체포하려고 하자 이 17명은 격투도 마다 않고 저항해 보위중대가 동원돼 이들을 진압한 일도 있었다. 숙청이 길어지면서 유학생뿐만 아니라 군사유학생들이 소련에 있을 당시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에 있었던 이들도 끌려 들어갔다. 당시 소련 주둔 북한대사관 군사 무관이었던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었던 최수연 대좌 등 무관부 출신들이 모두 체포됐다. 김학산 중장은 체포 당시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장이었다.
5년의 시간 동안 군사유학생 출신의 80% 이상이 총살당했다. 홍계성 상장과 강영환 중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장성과 170여 명의 고급 군관 등 약 200명의 군사유학생 출신 군관들이 그들이다. 부모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중앙당, 인민무력부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다는 이유로 경질됐다. 그 가족은 평양시에서 추방됐다.
인민무력부 보위국은 사전에 모의를 밝혀낸 공로를 인정받아 보위사령부로 승격됐다. 보위국장이었던 원흥희는 중장에서 단번에 대장으로 특진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준 은인이니 특진이 문제가 아니었을 터다.
‘프룬제 사건, 남한 짓이다’
북한의 숙청 사건들이 으레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고 난 후 프룬제 사건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당에서 돈을 들여 키운 사람들을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이 숙청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2001년 6월 중앙당에서 모든 성급 기관과 당 조직에 비공개 지시문을 내렸다. 여기에는 프룬제 사건에 대한 다른 설명이 들어 있었다. 이들의 숙청이 남한이 보낸 간첩이 한 짓이라는 얘기였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이었던 리봉원은 남조선에서 보낸 간첩이었다. 프룬제 아카데미야 숙청 사건은 리봉원이 소련에서 선진 군사과학기술을 배운 유학생들을 없애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었다. 이제 남은 유학생 출신들을 간부직에 등용해라.’
지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50명 남짓한 군사유학생들은 거의 군복을 벗었다. 고위 간부직에는 등용되지 못했다. 이렇게 군사 아카데미야 유학생 사건은 종결됐다. 프룬제 사건 이후 소련 군사유학 프로그램은 완전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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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軍 체제를 지키려는 金正日의 몸부림
⊙ “軍복무를 10년 하고도 총 한번 제대로 안 잡아 본 병사도 있다”, 선군정치에 이의제기한 ‘군부파’
⊙ 김정일, “나는 300만명의 당원과 300만명의 평양시민, 200만명의 군인만 믿는다”
⊙ 룡천역 폭발 사고 후 4년간 배후 조사한 북한, 결론은 ‘남한이 보낸 간첩의 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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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789군 부대를 시찰하면서 장병들에게 손을 흔드는 김정일. 김정일은 생전에 인민군의 역할을 강조하는 선군정치를 주장했다. |
‘선군(先軍)’, 북한체제를 알려면 꼭 이해해야 하는 개념이다. 김정일 통치 시기, 구체적으로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강조됐다. 잊어버릴 만하면 《로동신문》 사설이나 신년사에서 한 번씩 언급돼서 그런지 남한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의 의미대로 제대로 이해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선군정치는 군(軍)이 중앙당이나 내각 등 모든 기관보다 힘이 세다는 의미가 아니다. “조국보위도, 사회주의 건설도 우리가 다 맡자”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 군이 국방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분야에 나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군대를 동원해 발전소를 짓거나 주택 10만호를 건설하는 식이다.
말이 좋아 선군이지, 민간 부문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걸 군인들이 억지로 동원되어 해결한다는 말이다. 기형적으로 진화한 체제에서 삐걱대는 부분을 군이 임시로 접착해 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결과로 군의 권력이 중앙당 산하의 조직들보다 실질적으로 세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군은 어디까지나 당의 영도 아래 움직인다.
선군정치를 위해 비상설기구였던 국방위원회가 상설기구로 개편되고, 군 중심의 당과 국가 지도체제가 차차 공고화되기 시작했다.
軍 내부의 갈등, 先軍派 vs. 軍部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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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파의 주요 장성들. 왼쪽부터 조명록, 김영춘, 김정각. |
선군을 주창하고 몇 년이 흘렀다. 군 내부에서 선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군부파’다. 군부파의 주장은 이랬다.
“선군이라는 미명 아래 병사들이 건설현장 인부로 동원되고 있다. 10년을 복무해도 총 한 번 제대로 쏴 보기는커녕 삽질만 하다 제대하는 병사도 있다. 이래서야 전투력에 문제가 안 생기겠는가. 군인이라면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훈련을 해야지, 왜 노역에 동원돼야 하나.”
선군파와 군부파의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양 파벌의 면면을 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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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파의 주요 장성들. 왼쪽부터 김일철, 김격식, 리명수. |
선군파의 우두머리는 당시 총정치국장이던 조명록 차수, 총참모장이었던 김영춘, 조직부국장이었던 김정각 등이었다. 군부파의 주요 인사는 당시 인민무력부장이었던 김일철, 2군단장이었던 김격식, 작전국장이었던 리명수였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살펴봐야 할 것이 군 수뇌부의 직제 구조다.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한국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으로 있을 때는 인민무력부장이 군부의 핵심인 총정치국, 총참모부, 인민무력부를 모두 통솔하며 군과 군내 당 정치사업 분야의 수장 노릇을 했다.
1995년 오진우가 암으로 사망한 후 변화가 생겼다. 최광이 인민무력부장으로, 조명록이 총정치국장으로 취임하면서 권력이 둘로 갈라졌다.
최광이 죽고 난 후인 1998년, 군 권력구조는 크게 변화했다. 총참모부가 인민무력부에서 독립해 나왔다. 기존의 작전국이나 정찰국 등 전투부서와 군단들에 대한 통수권은 총참모장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총참모부와 총정치국, 인민무력부가 병렬적인 구조로 국방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됐다. 인민무력부장의 권한이 전보다 현저히 줄어들면서 군부파는 심하게 반발했다.
김정일은 딜레마에 빠졌다. 선군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군 수뇌부의 갈등을 잠재워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인사이동이었다. 2군단장이었던 김격식(군부파)을 총참모장으로 올리고 총잠모장이었던 김영춘(선군파)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보냈다가 인민무력부장에 임명했다. 인민무력부장이었던 김일철(군부파)은 인민무력부 1부부장 겸 제2자연과학원 원장으로 철직시켰다. 이런 식으로 선군파와 군부파가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나눠 갖게 하며 갈등을 봉합하려 했다. 이런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군부파의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만수무강연구소마저 가져간 군부
김정일의 선택은 ‘선군’이었다. 김정일은 이런 말까지 했다.
“나는 300만명의 당원과 300만명의 평양시민, 200만명의 군인만 믿는다.”
사실, 김정일 체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선군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금강산발전소 건설이나, 주택 10만호 건설 같은 대공사에 투입할 인력은 군인들 외에는 없었다. 일반 주민들을 동원하자면 공사 기간 동안 그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하니 비용이 들고, 시간도 많이 소요될 게 뻔했다. 굴을 파는 등 위험한 작업에 기껍게 나설 리도 만무하다.
2009년, 김격식이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됐다. 총참모장이었던 인물이 4군단장으로 내려가게 됐다. 이를 두고 남한에서는 좌천이 아니라 특별한 임무를 맡긴 게 아닌가 하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계급을 강등하면서 내려보내는 게 어떻게 좌천이 아니겠는가. 이듬해에는 김일철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한 후 물러나게 했다. 결국 군부파는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김격식이 물러난 총참모장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리영호였다. 리영호는 ‘91훈련소’로 불리는 평양방어사령부의 사령관이었다. 평양방어사령부의 사령관은 성분이 좋은, 검증된 인물들이 맡아 왔다. 리영호의 아버지 리봉수는 김일성의 주치의였다.
이처럼 김정일이 선군파를 지지하자 선군파는 점점 더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안위를 지키고 건강을 관리하는 호위 업무와 만수무강 사업까지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호위국을 약화시키고 기초과학연구원(만수무강연구소)도 국방위원회 산하로 옮겨 버렸다. 기초과학연구원은 원래 중앙당 재정경리부 산하기관이었다.
선군정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면서 필연적으로 중앙당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07년 초, 김정일은 “중앙당의 기구를 개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앙당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이유였다.
중앙당 조직부는 과장급 이상 간부들 중 100여 명을 추려내 중앙당에서 해임하고 각 중앙 기관들로 분산배치했다. 2007년 11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중앙당에서 간부로 일하던 이들이 다른 기관으로 옮겨가게 되자, 재정경리부는 그들의 집을 모두 몰수했다. 당 간부에게 내려진 집이니, 직분이 바뀌면 내놓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점점 날씨가 추워졌지만 이들은 살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장으로 가족들을 데려와 사무실 한쪽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들 중 몇몇 사람들이 용기를 냈다.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김정일에게 신소 편지를 썼다. 이런 내용이었다.
< 중앙당 재정경리부 부장인 리봉수의 아들과 딸은 중앙당에서 근무하지 않는데도 중앙당 사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치국 위원들에게 매일 부식물을 배달하는 공급차가 이들의 집에도 들러서 음식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집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도 원래 살던 중앙당 간부 사택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편지는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김정일은 편지를 찢어 버렸다. 편지를 쓴 9명의 전직 중앙당 간부들과 그들의 가족은 전원 15호 정치범 관리소로 보내졌다. ‘종파분자’라는 낙인이 이들에게 찍혔다. 김정일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집단행동’이었다.
“룡천역 폭발사건은 남한 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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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 북한 체제는 ‘선군’의 기치아래 돌아가고 있다. |
이후 김정일은 조직부에 재정경리부를 집중적으로 검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008년 조직부가 재정경리부를 감찰했다. 각종 비리들이 드러났고, 리봉수 부장과 다른 과장들은 지방으로 추방됐다.
리봉수의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책시로 쫓겨나 농장원으로 일하고 있던 리봉수에게 옛 부하가 찾아갔다. 검열 정국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과장이었다. 재정경리부 운수과장을 맡고 있던 이 인사는 자신의 옛 상사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던지 면회를 갔는데, 김정일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김정일은 ‘가족주의 종파 온상’이라며 이들을 모두 15호 정치범 관리소로 보내 버렸다.
간부들 사이에 불안과 불만이 번져 나갔다. 2008년 초에는 중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최승철과 부하들이 체포됐다. 남한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죄목이었다. 최승철과 통일전선부는 그 전까지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처형당했다. 간부들 사이에는 “김정일이 노망이 났다. 망둥이가 자기 새끼를 잡아먹듯 당과 국가에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피바람은 계속됐다. 2008년, 서남식 전 철도성 부상과 김진성 전 문화상이 처형됐다. 김일성 때부터 철도성에서 일해 왔던 서남식이 갑자기 처형을 당한 이유는 뭘까. 시간은 처형 4년 전으로 돌아간다.
2004년 4월 22일 평안북도 룡천군 룡천역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엄청난 사람이 죽고 다쳤다. 사상자가 1170여 명에 달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폭발 시점이 공교로웠다.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김정일이 탄 특별열차가, 폭발 사고가 일어나기 9시간 전에 룡천역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북한은 사고의 경위와 상황을 서둘러 발표했다. 비극적인 사고였다는 설명이었다. 김정일의 속내는 달랐다. 무려 4년간 조사가 이어졌다. 룡천역 폭발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캐내기 위한 조사였다. 그 결과 범인으로 지목된 게 서남식과 김진성이었다. 서남식이 6·25 전쟁 당시 한국에서 파견된 간첩이고, 김정일을 암살하기 위해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는 설명이었다.
간부들은 믿지 않았다. ‘서남식이 정말 간첩이라면 왜 하필 그때 그런 모험을 했겠는가’라는 의문이 퍼졌다. 그러면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룡천역 폭발 사건은 독재정권에 항거하기 위한 암살 기도였구나”라며 암살 기도설을 믿게 됐다.
중앙당 3호 청사 해체
감찰은 계속 이어졌다. 중앙당 3호 청사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중앙당 3호 청사는 대남사업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을까, 대남사업을 전담하던 통일전선부, 작전부, 대외연락부 등의 부서가 한데 모여 있는 청사였다.
3호 청사가 해체된 결정적인 계기는 ‘46연락소’ 사건이었다. 46연락소는 당 작전부에 소속된 부서였다. 해외첩보 영화들을 번역하고 연구해 작전부의 전략 수립에 응용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2006년, 46연락소 연구원들이 사고를 쳤다. 남포에 내려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중앙당 신분을 들먹이며 외상을 요구하면서 돈을 내지 않은 것. 식당 사장이 계속 돈을 내라고 하자, 연구원들은 사장을 때리기까지 했다.
김정일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그러지 않아도 대남공작부서 소속 연락소 부원들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일이 많아 비난의 목소리가 큰 참이었다. 이런 일이 자꾸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물자부족’이었다. 음지에 있던 이들에게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자, 할 수 없이 양지로 나와 돌아다니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터졌다.
김정일은 “별것도 아닌 것들이 중앙당 신분을 추락시킨다”며, “연락소 부원들의 신분증에서 중앙당이라는 글자를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3호 청사에 있던 부서 중 작전부의 많은 부서가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산하로 옮겨졌다. 대외연락부는 통째로 내각 직속 부서가 됐다. 통일전선부만 3호 청사에 그대로 남았다. 통일전선부는 남한의 종교인사나 기타 거물급 인사들을 상대하고 관리하는 부서다.
검열과 숙청이 이어지며 간부들은 ‘당에 아무리 충실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간부들이 자신의 보신에만 신경 쓰면서 국가사업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8년, 그해 평양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평양시민들 중 동상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집에 있었는데도 동상에 걸린 사람도 있었다.
등장 직후 밉상으로 찍힌 청년장군
2009년 1월 김정일의 특별지시가 내려왔다. 중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등 주요 기관에 내린 지시였다. 내용은 이랬다.
“동무들이 지금까지 나를 받들어 일을 잘해 온 것처럼, 앞으로 청년장군 김정은(金正恩) 대장동지를 잘 받들어 모시고 수령님이 개척한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하록 해야겠습니다.”
이 내용이 적힌 판을 각 기관의 청사 중앙홀에 항상 붙여 놓게 했다. 중앙기관의 간부들 속에서 속살거림이 번져 나갔다. ‘왜 전세계 국가 중 우리나라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몇 개의 나라만이 왕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나이도 어린 김정은이 어떻게 당과 국가를 지도할 것인가’라는 내용의 의구심과 불만이 불거졌다.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뒤에서 이런 얘기들이 오고갔다.
2009년 6월 25일, 드디어 청년장군 김정은의 공식적인 첫 지시가 내려왔다.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 중앙검찰소에 내려진 지시였다. 바로 ‘도박 근절’이었다. 평양시 공원에서 장기와 카드를 하면서 도박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숙청하라는 내용이었다.
국가보위부 부부장, 중앙검찰소 부소장, 인민보안부 부부장, 보위사령부 부사령관 등 4명으로 이뤄진 6·25 중앙상무 그루빠(그룹)가 조직됐다. 이들은 평양시 보위부, 평양시 보안국, 평양시 검찰소와 보안부 정치대학 학생들, 각 지방에서 올라온 기동타격대와 함께 평양시 공원들을 불시에 덮쳤다. 장기와 카드를 하며 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 이들은 2년에서 7년 사이의 교화형이라는 벌을 받았다. 그해 8월 도박을 했다는 이유로 한 달간 평양시에서 추방된 세대만 약 400여 세대에 달했다. 심지어 체포를 위해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러시아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을 잡아와서 교화를 보낸 것.
이제는 불만이 간부들뿐 아니라 일반 평양시민들에게까지 번졌다. “청년장군의 첫 지시가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탄압하는 것이냐”는 비난이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12월 1일, ‘화폐변경’ 조치가 발표됐다.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중대조치라고 하면서 예고도 없이 화폐교환 절차가 진행됐다. “국가가 인민들이 아득바득 모아 놓은 돈을 몰수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평양시민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달 뒤인 2010년 1월 1일에는 “개인은 달러를 쓸 수 없다”는 방침이 발표됐다. 불만은 극에 달했다. 노골적으로 김정일과 김정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개혁개방을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무기명 편지가 김정일에게 도착하기도 했다.
軍 미필을 ‘대장’으로 임명
화폐변경에 대한 비난이 점점 더 거세졌다. 원래대로라면 화폐변경은 2단계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2009년에는 주민들이 달러를 내놓으면 2002년에 미리 만들어 놓은 화폐로 바꿔 준 다음, 2010년 3월이 되면 2002년산 화폐를 다시 2009년에 찍은 화폐로 바꿔 준다는 계획이었다.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던 간부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결국 김정일과 김정은은 화폐개혁이 실패했다고 인정해야 했다. 박남기가 희생양이 됐다. 화폐개혁을 시도한 원흉으로 지목돼 총살당했다.
선군정치의 기치 아래, 군을 완벽히 장악하려는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노력은 계속됐다. 2010년 9월 당대표자대회가 열렸다. 4차 당대표자대회에서 김정은, 김경희, 최룡해, 김경옥 등 4명은 조선인민군 대장의 군사 칭호를 수여받았다.
“어떻게, 단 하루도 군사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장 칭호를 줄 수 있는가?” 불만 섞인 비난이 군에서 터져 나왔다.
그 후 김정일은 최룡해를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러자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리영호를 비롯한 군 장성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결국 이후 리영호와 다른 여러 명의 군 간부들이 숙청됐다.
3대 세습에 대한 유례없이 강한 반항과 불만이 간부들 사이에서 표출됐다. 불만의 화살을 돌리기 위해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오랫동안 당 간부 자리에 있었던 계응태, 전병호, 한성룡 등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너무 많고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그리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죽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북한 주민들과 간부들의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도 “대학도 안 나온 어린 김정은이 어떻게 국가를 지도해 나갈 것인가” 우려하며 불안한 눈으로, 김정은이라는 존재와 그의 아버지가 어거지로 꾸려 놓은 선군정치라는 체제를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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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사일 개발史 40년
“미국 본토를 타격하라”
⊙ 北 미사일 연구의 최종 목표는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미사일로 ‘미국 본토 타격’
⊙ 소련 붕괴 후 망명한 러시아 과학자들이 北 미사일 연구에 크게 기여
⊙ 1998년 발사한 광명성 1호는 인공위성 아닌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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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7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된 전승절 열병식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KN-08이 등장했다. |
국제정치계에서 이제는 멸종되다시피한 ‘벼랑끝 전술’을 아직도 끈질기게 구사하는 나라, 바로 북한이다. 북한이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원천 중 하나가 ‘미사일’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북한 미사일 개발은 지상 대 공중(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하면서 시작됐다. 러시아산을 들여와 그걸 기본으로 탄두거리, 타격시간, 바람의 저항, 탄두장약, 상대방의 요격을 유도하는 요점들을 하나씩 개량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한국과 일본은 쉬운 공격대상
최종 목표는 미국 본토는 물론 전세계 어느 곳도 타격할 수 있는 다계단(다단계, multi-stage) 미사일 개발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대기권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대기권 아래로 진입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비행시간을 최대한 짧게 해 목표국의 레이더 탐지기에 포착되더라도 목표를 타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물론 탄두를 소형화하는 것도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핵을 장착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른 중점적인 연구방향은 간단하다. 상대방의 레이더 탐지기에 걸리지 않도록 하되, 탐지되어 상대가 요격미사일을 쏘는 경우, 탄두가 분리돼 요격미사일을 유도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할 것. 나아가 복수의 탄두를 장착해, 타격목표와 요격미사일, 요격미사일 발사지점을 향해 탄두가 각자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주된 연구진행 방향이다.
지대지(지상 대 지상) 미사일 개발 목표를 살펴보면 이렇다.
북한에서는 대체로 사거리 500km까지의 미사일을 단거리 미사일, 사거리 2000km의 미사일을 중거리 미사일로 분류한다. 그 이상은 장거리 미사일이다. 신형미사일 연구개발 원칙은 우선 단거리 미사일 개발을 기본으로 본다. 그런 다음 장거리를 다계단으로 묶어, 미국과 연합군 형식으로 미국 측을 도와 참전하는 국가들을 타격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춰야 한다고 천명한다.
한반도에서 쏜다고 가정하면, 일본 정도는 단거리 미사일로도 얼마든지 타격할 수 있다. 미국은 다르다. 타격하려면 중거리 미사일로도 모자라고 장거리 다계단 미사일이 필요하다.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한편, 다계단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1990년대 초에는 쿠바에 단거리미사일기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미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열강들의 항의와 규탄 때문에 철수했다.
미국 본토 타격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북한은 미국 본토 타격 가능 여부가 앞으로의 전쟁을 좌우할 기본 조건이라고 보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다계단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해 본토를 타격하는 것이 최상의 전쟁 시나리오지만, 지금까지의 미사일 수준으로는 목표 타격 전에 요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는 잠수함에서 수중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미사일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미국 본토에 비하면 한국과 일본은 매우 쉬운 타격대상이라고 본다. 단거리 미사일과 무인 조종기, 방사포면 충분하다고 북한 당국은 판단하고 있다.
“반드시 武力으로 조국을 통일하라”
1970년대 중순 이전, 북한군 반항공사령부는 소련의 지대공 미사일 ‘드비나’를 들여왔다. 남한의 공군에 해당하는 조직으로 공군사령부와 반항공사령부가 있는데, 당시에 이 두 조직은 별개로 나뉘어 있었다. 드비나를 들여오며 반항공사령부는 김일성에게 한 가지 목표를 보고했다. 바로 미국의 SR 전략정찰기를 격추하겠다는 것.
그런데 공군사령부도 같은 보고를 했다. 공군사령부는 소련산 ‘미그-19’를 이용해 정찰기를 격추하겠다고 보고했다. 일종의 정찰기 격추 경쟁이었다. 김일성은 두 조직 모두에 허락한다는 답변을 내려보냈다. 결과는 어땠을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반항공사령부가 쏘아올린 드비나가, 공군사령부가 띄운 미그-19를 격추하고 떨어진 것.
김일성의 지시가 내려왔다. 공군과 반항공사령부를 합치라는 지시였다. 공군사령부가 반항공사령부를 흡수하는 식으로 두 조직을 합쳤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산 미사일을 가져다가 모방 연구개발을 하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했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나중엔 평양시 은정구역에 있는 국가과학원 연구사들까지 미사일 연구에 투입하기도 했다. 은정구역은 남한으로 치면 대덕연구단지쯤 되는 과학연구의 본거지다.
1985년 10월 25일, 이날은 북한 미사일 연구에서 역사적인 날이다. 김정일이 당시 총참모장이었던 오극렬을 데리고 제2자연과학원 전시관을 찾아왔다. 그 두 사람은 4시간가량 머물며 미사일 연구의 현황보고를 들었다. 그런 후 김정일이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 과학자들의 국방과학 수준은 중졸 수준밖에 안 된다. 이제부터 과학자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연구사업을 지원하고 생활도 보장해 줄 테니 국방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을 일으켜 보라.”
미사일 개발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제2자연과학원은 지금도 10월 25일을 과학원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날로 기리고 있다. 김정일의 첫 현지지도일로 명명하고 창립절보다 더 크게 기념한다.
김정일은 구체적인 지시도 내렸다.
“우리는 반드시 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 다가올 전쟁은 6·25때와는 다르다. 특히 전자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연구하면서, 해안포를 비롯한 모든 지상포들의 장거리포(주체포)에 미사일 개발연구 역량을 집중하라.”
당시 제2자연과학원 전시관에는 70mm 주체포가 전시돼 있었다. 김정일은 “구경을 확대하고 서울을 직사로 쏠 수 있는 수준으로 (로켓과 미사일을) 개발하라”면서 “과학원이 가장 주되는 사업으로 끌고 나가야 할 것은 각종 미사일 개발”이라고 직접 과업을 지시했다.
이후 166로켓트 공학연구소를 크게 확장했다. 산하에 있던 발동기실을 628연구소로 분리하고, 조직 전체가 미사일 개발연구에 총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제2자연과학원에 있는 종합 사판(건물을 축소해 놓은 모형)을 보며 조직 이전 지시도 내렸다. 제2자연과학원을 국방과학의 특수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과학원 지구 안에 있는 다른 기관들을 모두 이전하라는 지시도 했다. 심지어 지구 안에 중앙방송국의 방송탑이 있었는데, 방송탑까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미사일 성공 副賞은 살구색 점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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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7일 전승절 열병식에 등장한 스커드 미사일. |
1988년, 소련에서 들여온 지대지 스커드미사일을 개조해 만든 중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첫 시험발사에서 당당히 성공을 거둔 터라 김정일은 상당히 기뻐했다. 김정일은 “우리의 국방과학 전사들이 큰일을 하였다”면서 “이제는 고등전문학교 졸업 수준으로 연구 수준이 올라갔으니, 전쟁준비를 적극 다그치기 위한 미사일 연구개발 사업을 더욱 강화하라”고 했다. 어찌나 기뻤던지 선물도 내렸다. 자신이 즐겨 입고 다니는 연한 살구색 점퍼였다. 제2자연과학원 연구사뿐만 아니라 실험수, 노동자 등 전체 직원들에게 자신이 즐겨 입는 옷을 같이 입자며 선물을 했다.
원래는 간단한 표창만 했는데, 외무성에서 보고가 올라온 후 더 많은 상을 내린 것이다. 외무성 보고의 내용은 이랬다. 미사일이 일본 본토를 지나가면서 일본과 미국, 한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열강들이 아우성을 쳤다는 것. 그러자 김정일은 “국방과학자들을 크게 평가해 주라”고 말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소련 붕괴는 북한 미사일 개발에 결정적인 호재로 작용했다. 미사일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편성된 2개의 두뇌진, 약 20여 명의 러시아 군사과학자들이 북한으로 망명을 했다. 북한은 이들을 파격적으로 우대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축전동 광복거리에 한 개의 아파트를 내어주고, 매달 상당 금액의 월급을 미 달러로 지급했다. 그들은 166공학연구소와 628발동기연구소에서 연구사로 일하며 북한의 미사일 연구개발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미사일 연구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일정이 잡혔다. 1997년의 일이다. 첫선을 보이려고 대기 중인 미사일은 바로 ‘광명성 1호’였다. 그런데 북한 외무성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유는 이랬다.
“지금 북한이 대외적으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면서 유엔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로부터 식량과 물질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이럴 때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 지원을 받지 못한다.”
김정일은 이 말을 받아들여 미사일 시험발사를 보류하라고 명령했다.
미사일을 인공위성으로 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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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광명성 2호 발사에 성공한 후, 김정일과 연구사들이 관제센터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이듬해인 1998년 7월 초, 김정일의 시험발사 명령이 내려왔다. 이유는 언제나와 같았다. “우리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주고 적들에게는 공포를 주자”는 게 이유였다.
1998년 7월 중순, 제2자연과학원 회의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미사일 개발연구에 참가한 각 연구소 연구사들과 실험수, 노동자 대표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첫 장거리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했다. 결사대원의 수는 약 2000명. 결사대원들은 연구소별로 돌며 제2자연과학원 당위원회에서 서명을 받고 시험발사 준비에 돌입하였다.
미사일 발사준비는 철저한 기밀보안 속에서 이뤄졌다. 미사일 시험발사장은 함경남도 화대군 무수단리에 있었다. 발사장으로 향하는 모든 수송차량에는 60번이라는 차번호를 달았다. 비밀보장을 위해서였다. 차번호 60은 당시 문화예술부 소속의 차에 붙이는 번호였다. 일반인들은 차를 보고 ‘아, 어디서 영화를 찍는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1998년 8월 30일 드디어 장거리 미사일 광명성 1호를 발사했다. 미사일 발사는 성공이었다. 북한의 TV와 신문에는 연일 이런 보도가 나왔다.
“첫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하여 우리의 기술과 자재로 발사된 첫 인공위성이 자기의 궤도를 따라 돌면서 전 세계에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김정일장군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제2자연과학원 연구사들과 노동자들은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인데 왜 인공위성이라고 보도할까, 어리둥절해했다.
시험발사 직후, 평양에 있는 인민문화궁전에서 미사일 발사 성공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6000석 규모의 회의실에 미사일 발사 결사대원을 비롯해 미사일 발사에 기여한 조직의 조직원들이 모두 모였다. 고위 간부 중에는 전병호, 한성룡, 연형묵이 참석했다.
미사일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2자연과학원 연구사, 실험수, 노동자들과 시험발사에 기여한 2경제위원회와 인민무력부에 김정일의 감사문이 전달되고, 김정일의 이름으로 된 표창장과 명함시계, 노력영웅 칭호, 박사를 비롯한 훈장 및 학위·학직 수여가 진행됐다.
당시 김정일이 보낸 감사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국방과학자들이 이제야 대학졸업 수준에 도달했다. 하루빨리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세계적 수준에 맞게 연구개발하고, 현대전에 맞는 무장장비를 연구개발해 인민군대의 전투력강화와 전쟁준비에 이바지해야 한다. 북조선이 미사일 발사시험을 진행할 때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요격해 버리겠다고 한다. 미사일 다탄두 연구에 꼭 성공해서 우리의 미사일이 요격당하는 경우 탄두가 분리되어 하나는 원 목표를 타격하고, 분리된 다른 탄두는 요격미사일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다목적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라.〉
장거리 미사일 개발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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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전술로켓 시험발사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은의 모습. 이날 시험발사한 미사일은 사거리 200km의 300mm 단거리 다연장 방사포였다. |
제2자연과학원 연구사들은 장거리 미사일 개발연구에 총력을 집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그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동에는 과학촌 기지를 조성했다. 룡궁동에 과학자 사택을 지었고 과학자 거리를 만들었다. 룡성구역은 평양에서는 주변구역이지만 과학원 사람들은 중심구역 대우와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도록 후방사업을 튼튼히 꾸려 줬다.
2006년 9월 또다시 시험발사를 했지만, 제대로 오르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그 후 시험발사 준비를 하면서 10월 17일 위성연구소를 비롯한 과학원 산하 연구소들이 새롭게 확장공사를 했다. 룡성구역 룡추동 과학촌 기지 안에 관제센터를 새로 짓기도 했다.
2009년 4월 5일, 함경남도 무수단리에서 광명성 2호라 이름 붙인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이날의 성공은 북한이 사거리 4000km 이상을 비행할 수 있는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는 걸 의미했다.
4월 5일 당일, 10월 17일 위성연구소 관제센터에는 김정일과 김정은이 직접 와 있었다. 두 사람은 발사시험 과정을 영상화면으로 지켜봤다. 미사일 발사에 성공하자 김정일과 김정은은 연구사들을 크게 칭찬했다.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국방과학자들이 대단한 성과를 이룩해 조선의 기상을 만방에 과시했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으니 과학자들의 요구조건을 다 들어주겠다.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요구하라.”
그러자 10월 17일 위성연구소 과학부소장이 이렇게 말했다.
“집안의 가보로 간직할 수 있게 장군님과 기념촬영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김정일은 “오늘 예감이 왠지 실패할 것 같아 사진사를 안 데리고 왔는데 과학자들의 요구이니 사진사를 부르라”고 하면서, 사진사가 올 때까지 과학자들과 얘기를 나누겠다고 했다. 1시간가량 연구소 안팎을 돌아본 후, 사진사가 오자 김정일은 연구사들과 사진을 찍었다. 이때 ‘청년장군’도 함께 사진을 찍으라고 말했다.
사진 촬영 후 연구사들의 대부분이 국방대학 졸업생들이라는 얘기를 듣자 김정일은 중앙당 간부들에게, “국방대학 졸업생들은 나라의 보배”라고 하면서 “잘 돌봐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연구사들이 감개무량해 눈물을 흘리며 ‘김정일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북한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발사시험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훈장과 영웅칭호, 학위, 학직이 수여됐다.
북한에서는 지대공 미사일에는 100-1로 시작하는 일련번호가 붙는다. 해상 대 해상 미사일은 200-1로 시작하는 일련번호로 통용된다. 지상 대 지상 단거리 미사일은 500-1로 시작한다. 중거리와 장거리 미사일은 900-1로 시작되며 짝수가 아니고 홑수로만 나간다.
북한 미사일 본체에 새겨진 글자 ‘ㅈ’은 조선의 약호다. ‘ㅈ’ 다음에 100이나 900등의 숫자를 붙여 표시한다.
원래는 ‘MADE IN DPRK’라고 ‘원산지 표기’를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 당시, 이란에 수출한 북한산 미사일이 이라크를 타격한 적이 있다. 이라크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유조선을 침몰시킨 일이 있었다. 이후 북한의 모든 무장장비의 표기를 변형하였다.⊙ 
정리 : 河周希 月刊朝鮮 기자 _펌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