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여행

중국 오대산 성지순례

서석천 2018. 9. 8. 12:39

'화북의 지붕' 중국 오대산

 
만년설이 서린 듯한 오대산과 오대산의 상징인 대백탑이 있는 대회진 풍경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 으뜸이며 세계 5대 불교 성지 중의 한 곳인 중국 오대산. 오대산은 우리나라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오대산 태화지에서 목욕하며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으로 유명하며, 또한 세계 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도 오대산에서 수행한 것으로 전한다.

 

 중국인들은 "금의 오대산, 은의 아미산, 동의 보타산, 철의 구화산"이라는 말로 중국 4개 불교명산의 순서를 매긴다. 보타산의 문수보살도 오대산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네팔 룸비니 가든, 인도 녹야원, 보리 가야, 쿠시나가와 더불어 오대산이 세계 5대 불교성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오대산은 어디서나 육산의 모습을 띈다. 산 능선에 양을 방목하고 있다.
오대산 능선에서 마침 날씨가 조금 개이자 산 아래 마을 풍경을 잠시 비쳐줬다. 능선을 깎아 만든 도로가 구불구불 나 있다.
해발 2,000m 남짓 되는 대라정에서 오대산 관광단지가 있는 대화진을 내려다봤다. 오대산의 상징인 대백탐과 그 옆에 중국 최고의 절로 꼽히는 현통사 등도 있다. 

오대산은 이름 그대로 다섯개의 평평한 봉우리로 이뤄져 있다. 그 다섯 개의 봉우리를 오대(五臺)러 부른다. 그 중 북대가 3,061.1m로 가장 높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중대 취암봉(2,893m), 동대 망해봉(2,795m), 서대 괘월봉(2,773m), 남대 금수봉(2,474m), 북대 협두봉(3,061.1m)로 구성되어 있다. 중대 취함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하나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국이다.

 

오대산에 불교가 들어와 사찰이 들어서지 시작한 때는 서기 68년 즈음으로 전한다. 현통사의 전신인 영노사가 건립된 건 이때다. 낙양의 백마사가 중국 최초의 절로 알려져 있으나, 백마사는 승려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강했다. 실질적인 중국 최초의 사찰은 현통사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불교는 당나라에 들어서 황제들이 앞장서서 절을 짓기 시작하면서 융성한다. 도교는 서민종교, 불교는 왕족과 귀족종교로서의 기능을 하며 급속도로 세를 확산해 갔다. 오대산의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인도와 조선, 일본 등에서도 잇따라 스님들이 찾아왔다.

 

오대산 오대로 오르는 길에는 어김없이 문이 나온다. 중대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문.

 

   대화진에 있는 54m 높이의 오대산 상징 대백탑.

 

대화진에서 오대산을 바라봐도 육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오대산까지 가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비행기를 타고 북경까지 가서 버스나 철도를 이용하는 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경에서 오대산 주차장과 절이 모여 있는 대회진까지는 약 6시간 소요된다. 오대산 대회진에서 오대까지는 대개 30분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올라가면 도착한다. 대회진에는 절이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숙박시설도 아주 많다. 거리마다 기념품 가게나 상가들이 널려 있어 필요한 물품은 언제든지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아래는 우리일행이 다녀온 성지순례일정과 동선이다. 베이징에서 일정은 시작된다.

 

 

부산 신광사(주지 교융스님)신도님들과 함께 중국의 문수성지인 중국 오대산으로 불교 성지순례길 다녀왔다.
세계 5대 불교성지로 꼽히는 중국 오대산은 산서성(山西省) 오대현(五臺縣)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사방 250㎞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오대산(五臺山)은 중국 불교 중심의 하나로, 보현보살을 모신 사천성의 아미산(峨眉山), 지장보살을 모신 안휘의 구화산(九華山), 관세음보살을 모신 절강성의 보타산(普陀山)과 함께 중국 불교 4대 성지로 꼽히고 중국의 불교전래와 더불어 화엄경 교리에 의하여 성립된 문수보살 상주법신 도량으로 유명하다.


김해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KE829)편 으로 3시간 가량날아 북경 국제공항에서 현지 가이드(채휘권)미팅하여 북경에서 점심공양 해결하고 화북 대동으로 4시간 가량 이동, 대동에서 저녁공양후 호텔(대동 왕부 국제호텔)투숙,

 

 

아침일찍  중국3대 석굴중 한곳인 운강석굴로 이동, 호텔에서 1시간걸려 운강석굴 도착,
세계 3대석굴은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석불, 인도의 아잔타석굴과 함께 중국의 운강석굴도 세계3대 석굴이라고도 불린다.
중국 3대 석굴은 운강석굴(雲崗石窟)과 용문석굴, 그리고 돈황석굴인데.. 운강석굴이 가장 먼저  북위의 종교 총 책임자였던 담요(曇曜) 스님이 황제(문성제)에게 건의해 조성(460년)하기 시작했다. 이어 용문석굴이 역시 북위시대인 서기 490여년부터 작업에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중국 고대 불교문화의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돈황석굴은 당나라 시대인 서기 7, 8세기쯤 조성됐다
운강석굴은 굴 앞 벽이 무너지면서  운강노천대불(雲崗露天大佛)의 완연한 미소가 세상에 알려졌다.
무주산 자락 1Km 길이의 절벽을 따라 석굴 252개가 펼쳐져 있다. 불감 1천100개에 5만불 이상이 조각돼 있다.
운강석굴에 있는 불상은 작은 크기부터 엄청나게 큰 불상까지 다양하게 새겨져 있고. 작은 불상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운강석굴은 중국 황실의 후원 아래 조성되면서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로부터 전해진 불교의 종교적 상징예술이 중국 전통문화와 성공적으로 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운강석굴 참배후 중국 고대 사찰 중 하나인 화엄사로 간다.

 

일정상엔 현공사 참배를 계획했으나 현공사는 9월1일~9월30일까지 사찰공사로 인해 대동시내에 위치한 화엄사로 대체 된 곳이다.
화엄사는 요나라 금나라때의 사찰로 대동시내 성곽 안에 있다. 화엄사의 창건연대를 아는 것은 어렵지만, 일설에는 당대,혹은 북위때라고 한다.
 현재 공인된 창건연대는 요대 청우8년(1062년)이고, 요나라 황실의 종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위가 대단했으나, 이후에 전쟁통에 파괴되어 금나라 天眷 3년(1140년) 중건되었고. 이후에도 화엄사는 다시 전란을 수차례 겪고 파괴되어 수차례 중수되었지만, 온몸은 상처투성이었고, 망가짐을 감당하기 어려워 엉성한 풍경이 되었고... 사원의 중요건축은 대웅보전(大雄?殿)과 박가교장전(薄伽?藏殿)이다.

명나라 중기에 화엄사는 상화엄사(대웅보전 중심)와, 하화엄사(박가교장전 중심)으로 나누어졌으나, 신중국 성립후, 정부에서 지원하여 수차례 유지보수가 진행되었고, 1961년 상화엄사와 하화엄사는 전국중점문물보전단위가 되었고. 1963년, 상하 사찰은 다시 하나로 병합되어 문화혁명시기 화엄사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내 건축, 불상, 경전, 문물들이 고이 보전될 수 있었다.1984년 사원은 불교계로 반환되어 정비'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화엄사 참배후 대동에서 점심후 응현으로 이동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목탑인 석가탑 참배하러 간다 .

세계3대 불가사의한 탑, 프랑스의 에펠탑,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그리고 여기 불궁사의 목탑이라고 중국인들은 말한다.
세계 최고' 최대의 목탑, 정식명칭은 불궁사(佛宮寺) 석가탑, 산서성 삭주시 응현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목탑으로, 국보 중의 국보다. 불궁사의 원래 명칭은 보궁선사(寶宮禪寺)다.
이것은 사원 내부에 사리를 보관하였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936년에 건설 되었다.
응현목탑의 구조는 중루형식으로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평면팔각형으로 외관상 6층 이지만 층마다 암층이 있어 내부는 9층이다.
남문을 들어서면 연화대 위에 단좌한 석가모니상과 그 아래에는 갑옷 차림의 여덟 역사(力獅)가 버티고 서 있다.
실내와 화랑벽에는 여래불상을 비롯한 공양드리는 여인상과 금강'천왕'제자 등의 벽화가 선명한 색채에 온화하면서도 풍만한 모습의 공양여인상은 예술미를 전한다. 매층마다 나무계단이 있어 맨 위층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지금은 3층 까지만 올라갈 수 있다.
사원이 가장 번성했을 때에는 400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원나라 말기 전란에 휩싸여 그 규모가 작아졌고, 후에 다시 확대되기는 했지만
명'청 시기의 규모가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탑의 높이는 67.31m 이며 기단부의 직경은 30.28m 로 정 팔각형이다.
단 한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목재로만 제작되었다고 하니 그 건축기술이 신공(神工)이라 할 만하다.
총 7430여 톤의 목재가 사용되었고, 4m의 석재 기단부 위에 5층으로 건설되었다.
응현목탑(應縣木塔)으로 알려진 현존 세계 최고' 최대 목탑인 불궁사석가탑이 세워진 건 1056년 이지만, 신라의 최대 목탑은 황룡사 9층석탑으로 645년 세워졌고 높이만도 80m를 넘었다 하지 않는가. 저 응현목탑처럼 그대로 있었다면...ㅠㅠ, 상상 속의 황룡사 목탑만 아른거릴 뿐이니 아쉬울 뿐이다. 아쉬움을 안고 석가탑 참배를 마치고 오대산으로 이동, 응현에서 5시간을 이동하여 저녁 공양후 하회 산장호텔에 투숙,

호텔에서 아침공양후 오대산 북대로 이동한다. 이번 순례일정 중  하일라이트 다.
대동에서 육로를 통해 산시성 중심부로 들어서려면 황토고원(黃土高原)을 지나는데 황토고원이 끝날 즈음 얼핏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큰 산이 시야를 꽉 채우는데 중국의 명산 타이항산이다. 타이항산은 한문으로 태항산(太行山)이다. 한문 행(行) 자는 ‘걷다’의미로 쓰일 때 ‘행’으로 읽고, ‘줄을 서다’의 ‘줄’로 쓰일 때는 ‘항’으로 읽는다. ‘큰 산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는 뜻이 있기에 ‘태항산’ 즉 타이항산으로 읽는다.

(태항산은 2011년5월에 구련산-주가포-석애구-왕망령-만선산-운대산등 5일간 트레킹으로 답사 한 적이있다)
태항산은 중국 산시성 북부에서 허베이성, 허난성 등 3개 성 남북 600Km, 동서 250Km에 걸쳐 있다. 사실상 산맥이다. 그 중 산시성 북부에 자리한 산이 항산. 따라서 흔히 말하는 ‘태항산’은 태항산맥을 이르고, 항산(恒山)은 태항산맥에 솟아 있는 산 중 산시성 북부에 있는 산 헝산을 이른다. 지역 이름도 태항산맥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기에 산동성(山東城)이고, 서쪽에 있기에 산서성(山西城)이다.

산서성 오대산은 3,000미터 급 주봉을 포함하여 5개의 봉우리로 인해 오대산이라 불리고, 중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유일한 공통의 성지인 이곳 오대산은  동대(東台)/ 망해봉, 서대(西台)/ 괘월봉, 남대(南台)/ 금수봉, 북대(北台)/ 엽두봉(최고봉 해발 3,058m), 중대(中台)/ 취암봉. 으로

이뤄졌고, 중국 4대 불교명산으로는 오대산/문수보살의 성지, 구화산/지장보살의 성지, 보타산/관음보살의 성지, 아미산/보현보살의 성지,

산서성 오대산(五臺山)은 중국 4대 불교 명산의 하나이며, 2009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국가5A급 명승지다.
최 전성기였던 당나라 시대에는 360여 개의 절이 세워졌으며, 현재는 태회진을 중심으로 47개의 절이 있으며, 각 봉우리마다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다. 당나라 중기는 오대산 불교가 절정을 이룬 시기이다. 특히 대종(代宗) 치세에는 장안(長安)의 불공삼장(不空三藏)이 조정의 원조를 배경으로 767년 남대(南臺)에 금각사(金閣寺)를 건립하여, 오대산을 호국밀교(護國密敎)의 본산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때부터 문수보살의 거처인 오대산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일본·중앙아시아·티베트·인도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졌고, 각처에서 순례자가 찾아왔다. 옛부터 순례자들은 이곳을 찾아 모든 봉우리에 참배를 했는데, 이를 조대(朝臺)라 하였다. 참배의 전 과정은 100킬로미터에 달하고, 고산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순례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청 건륭 때, 산 아래 ‘대라정’에 오대를 참배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다.
 이를‘소조대(小朝臺)’라 부르고, 원래의 다섯 봉우리를 참배하는 것을‘대조대(大朝臺)라 불렀다. 오대산은 우리나라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오대산 태화지에서 목욕하며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으로 유명하며, 또한 세계 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도 오대산에서 수행한 것으로 전한다.

 


오대산 북대는‘북 중국 화북의 지붕으로 알려져 있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는 중대, 동대, 서대, 남대, 북대 협두봉(최고봉 3,058m)으로 구성돼 있다. 중대 취암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하나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국이다. 북대에선 고도의값을 하느라 세찬바람으로 춥고 몸가누기도 힘들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발원지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며, 지혜는 통합을 이룬다.‘일즉다(一卽多)이고 다즉일(多卽一)’이다. 화엄경의 아이콘인 것이다. 자장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에서 수행했다. 태화지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 앞에서 7일 동안의 기도를 통해 꿈에서 본 보살로부터 범어로 된 사구게와 100개의 부처님 사리 등을 받고 귀국했다.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고, 오대산 태화지와 지명이 비슷한 울산 태화사, 용이 살던 곳인 양산 통도사에 사리를 봉안할 사찰을 건립했다.

이어 오대산 중대에 적멸보궁을 창건하여 문수신앙의 중심도량으로 만들었다. 이곳이 한반도 문수보살 신앙의 효시다.

북대 문수전에 참배하고 중대로 이동한다. 이동중 태화지에 들린다. 알려진 대로 자장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7일간 기도를 올린 장소다. 잔뜩 의미 부여를 하고 갔지만 막상 현장은 볼품없는 우물에 불과하다.

중대는 또 취암봉(翠岩峰)이라고 한다. 비취색 암벽이 아름다워 이름 붙은 봉우리다. 중대 정상엔 유동문수를 모신 연교사에 참배하고..,
혜초스님 원적도량인 금원보리사찰이고, 세계문화유산인 오대산 금각사 순례, 금각사는 당나라대력(大歷)이년(767년)에 건조하기 시작하여

 "구리와 기와로 주조하여 기와에 금을 칠하고 불각을 금각으로 장식하다" 하여 금각사(金閣寺)라 불린다.

참배후 점심 공양. 이어 오대에 모셔져 있는 대라정으로 리프트편으로 올라간다. 오방문수전이 모셔진 절이다.

 

대라정에 대한 사연은 중원을 석권한 북위 효문제, 수 양제, 송 태종, 원 영종, 청 성조 등 황제들은 제각각 오대산을 오르려 했다.
 청나라 6대 황제 건륭도 즉위 즉시 오대산을 찾았다. 하지만 오대산은 그 높이만큼 기상도 천변만화했다. 정상 북대는 거의 만년설에 가까울 정도로 눈이 덮여있다. 건륭은 처음 동대로 향했으나 세찬 비바람으로 가지 못했다. 중대는 폭설로 아예 길이 끊어져 버렸다. 건륭은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이듬해 다시 오대산을 찾았다. 지금의 대라정에서 한숨을 돌린 후 오르려하는 순간 갑자기 폭풍이 몰아쳤다.

이에 건륭은 대라정 주지에게 어명을 내린다.
“3년 후 다시 올 테니 5대 문수보살을 꼭 친견하게 하라.” 대라정 주지는 아예 오대산의 5대 불상을 그대로 본떠 대라정에 모셨다고 한다.
5대 문수보살인 동대 총명문수(東臺聰明文殊), 북대 무구문수(北臺無垢文殊), 중대 유동문수(中臺孺童文殊), 남대 지혜문수(南臺智慧文殊), 서대 사자후문수(西臺獅子吼文殊)가  대라정 본존에 있다. 오방문수전 앞에는 청 황제 건륭이 비석을 세워 뒷면에 직접 쓴 시를 남겼다.

 건륭 황제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오대산을 직접 올라가지 않고 대라정에서 기도를 할 수 있어,‘소조대’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대라정 참배 하고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인 현통사로 이동,

오대산에 불교가 들어와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한 때는 서기 68년 즈음으로 전한다. 현통사의 전신인 영노사(靈鷺寺)가 건립된 건 이때다.
낙양의 백마사가 중국 최초의 절로 알려져 있으나, 백마사는 승려 교육기관으로써 기능이 강했고...

실질적인 중국 최초의 사찰은 현통사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불교는 당나라에 들어서 황제들이 앞장서서 절을 짓기 시작하면서 융성한다.

도교는 서민종교, 불교는 왕족과 귀족종교로서의 기능을 하며 급속도로 세를 확산해 갔다. 오대산의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인도와 조선, 일본 등에서도 잇따라 스님들이 찾아왔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화북지방에 청량산이란 명산이 있는데, 그곳에 보살이 상주하고 있다.

그 이름은 문수라고 한다. 문수보살은 1만여 명의 보살과 함께 살며 항상설법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청량산이 곧 오대산이고,

때로는 오봉산이라고도 한다. 문수보살은 용의 화신이며, 석가모니불의 지덕과 체덕을 맡아서 부처의 교화를 돕기 위해 보살로 화했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절로 불리는 영노사의 후신인 현통사와 탑원사가 나란히 있다.

 


 현통사는 서기 58~76년에 건립된 오대산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탑원사도 바로 옆에 있다.
오대산에서 가장 크고 오대산의 상징인 54.37m 높이의 탑(일명 대백탑)이 단연 눈에 돋보인다. 원 왕조 시절(1301년)에 처음 지어졌다.
흰색으로 칠해 진 탑에는 석가모니불 진신사리와 문수발탑이 있어 탑원사란 명칭이 붙었다.
 연꽃 봉우리 중심에는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는 탑원사와 오대산 최대도량인 현통사를 중심으로 50여개의 크고 작은 사찰이 건립돼 있다.
탑원사에는 높이 75.3m, 둘레 83m의 우뚝 솟은 흰 사리탑이 있는데 이곳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어 오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티베트에서 순례를 온 라마승들이 사찰 여기저기서 오체투지를 하고,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거대한 탑원 아래에 조성해 놓은 마니주를 돌리며 ‘옴 마니반메 훔’을 염송한다. 탑원사와 한 사찰이었던 현통사는 오대산 최대규모이자 최초의 사찰이다.

원래는 24만여평에 9999칸을 이룬 거대한 사원이었으나 탑원사와 분리됐다. 현재도 현통사는 오대산 제일사찰로서 큰 규모의 불교행사는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10만근을 넣어 주조했다는 동종은 오대산 최대사찰의 위엄을 가지고 있었고,
오대산 사찰의 시원의 전설이 들어있는 관음전은 1900여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대산 내의 사찰 가운데 최대규모의 문수보살상이 봉안돼 있는 수상사(殊象寺). 높이만 해도 9.8m나 되는 문수보살상이 사자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 좌정해 있다.
현통사와 탑원사를 순례 참배하고, 오대산 최초의 문수보살상을 모시고있는 수상사를 순례 참배하고 저녁공양후 호텔로이동, 
호텔에서 아침공양후 영석현으로 이동 약160km 를 3시간 이동하여 면산 풍경구내 도착,
면산 대라궁은 에리베이터로 올라 갈 수 있으나 일행은 걸어서 올라간다. 대라궁은 절벽위에 건설되었고 위풍당당하고 장중하며 위엄이 있다. 이 건축물은 산을 의지하여 건축되었는데, 13층으로 되어있고 높이가 110m 이고, 총 면적이 30,000평방미터로 모두 24개의 명승지가 있단다.

 대라궁의 건축시작 년대는 분명치않으나 당 현종 이융기가 확장하여 건축하고 역대 왕후장상, 명인과 아사들이 끊임없이 자금을 기부하여 대라궁을 수리 보수하며 건설하였다.

8신선, 마조에서부터 재물신,원진까지 그리고 삼청, 삼무등 대라신선까지 도가, 도교 여러신령들을 포함하여 거대한 신학시스템을 이루었다.
대라궁내부에는 300개의 조각상, 채색 흙 인형,목각화, 금불상이 있고 백운암 내부에는 당나라시기의 돌에 새긴<금강경>, 홍목조각<백가서도덕경>및 특수한 가공을 거친 대형벽화가 있으며 장경각, 수행동, 관성대등 문화유적도 있다. 보물이 집중되어 있는 곳 이라 말할수 있다.

대라경은 면산에서 가장 문화특색이 있는 명승지 가운데 하나다.

 


대라궁은 춘추전국시대 개자추가 어머니는 모시고 면산에 들어 온 후, 이곳에서 도교의 최고경지인 "대라선경(大羅仙境)"을 보았다고 하여 후세사람들이 이곳에 대라궁을 지었다고 한다.

 진나라 충신인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이 바로 "개공사당"인데 진나라의왕자 "중이"와 함께 19년간 망명생활을 하던중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넓적다리살을 베어먹인 "할고봉군(割股奉君)"의 고사와 추후 중이가 춘추오패 중의 하나인 진문공이 된 후에 논공행상에 연연하는 모습이 싫어 면산에 은거하였으나 나중에 실수를 깨닳은 진문공이 개자추를 청해도 오지 않자 면산에 불을 지르면 내려오겠지 하여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어머니와 함께 나무를 껴앉고 죽었다
그후 진문공이 크게 실망하여 그의 정절을 기리고자 개자추가 죽은 후 3일간 찬음식을 먹게했다는 한식의 기원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를 기린곳이 바로 "개공사당"이라는 곳이다. 이어 서현곡으로 이동하여 높은 고도로 인해 한 여름에도 서늘하고 수정같이 맑은물이 계곡의 멋진모습을 보여주는 곳인데.. 계곡에다 출렁다리를 놓아 박진감있고 스릴있는 일정중 유일하게 액티비티를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정과사(正果寺)는 포골진신상(抱骨眞身像)을 모신 절로, 지극히 수행이 높고 고승이 바른 수련의 결과로 인해 곧게 앉아 열반에들게 되면 그 유체에 진흙을 발라 말린 후에 생전의 모습 그대로 채색을 하여 모셨다고 하는데 이를 "포골진신상" 또는 "등신불(等身拂)"이라 한다

면산에는 수많은 절벽에 예로부터 많은 잔도가 있는데 이중"하늘다리"라는 뜻의 "천교(天橋)"는 폭1m, 길이 300m,인데 약 300m 높이의 절벽에 나 있는 길로써 구름이나 안개가 끼면 마치 하늘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면산 절벽 중에는 수직절벽에 높이 60m, 폭180m, 깊이50m의 큰 동굴인 포복암이 있다.

 이렇게 커다란 절벽이 배를 감싸는 듯한 모습의 포복암(抱腹岩)에 자리잡은 사찰이 운봉사(云峰寺)다.
약17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이 운봉사에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당나라 이전부터 동굴의 천정에 달린 수 많은 동종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공중도시 면산, 아찔한 산세와 깊은 협곡이 신비롭고, 해발2000m위 깍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진 불교와 도교사찰, 그리고 절벽위 호텔이 그 어디에서도 보기드문 장관이며, 자연과 인공건축물의 조화가 오묘하다.
면산 풍경구를 관광하고 160여km 를 약 3시간동안 달려 태원으로 이동, 저녁공양후 태원시내 루안데이스호텔 투숙,
이른아침 호텔에서 정정현으로 이동하여 임제탑은 동기와 탑개 전탑이라서 그 색깔을 따라 청탑(靑塔)으로도 불리고, 또 사리와 함께 임제 스님이 생전에 사용하던 발우 및 가사 등을 안에 넣어 건립했다고 해서 의발탑(衣鉢塔)으로도 불리고 있다.

중국 사찰의 대부분이 문화혁명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임제탑은 당시 보호문물이었던 덕분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법유당 안에는 명나라 때 나무로 조성한 임제상이 봉안돼 있고, 중국 선불교의 초조 달마대사와 육조 혜능대사의 상이 함께 봉안돼 있다.
법유당 벽면에서 임제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기록물을 볼 수 있다. 웅장함 대신한 소박함이 매력있다.

대웅전의 뒤편으로 장경루와 원통전이 잇닿아 있고, 법유당 오른쪽으로 길게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스승 황벽을 한 대 갈기고 소리를 질러 깨달음을 인가 받은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소 과격한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형식적인 전통이나 권위주의 사상을 벗어나 과감하게 인간존중을 강조했다. 인간 본연의 청정한 자성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 임제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임제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진정한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결코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마음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마주치는 모든 번뇌와 미혹을 끊어 죽여버려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일체의 사물에 걸림이 없어야 해탈자재한 경계에 이를 수 있다.‘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과 주관을 갖고 수행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인지 임제사는 그저 소박하고 소탈하다는 느낌만이 있을 뿐, 크고 웅장한 모습이 전혀 없다.

임제사 참배로 오늘일정 마치고 화북의 성도인 석가장으로 귀가. 
 석가장(石家壯)에서 이른 아침 1시간 거리의 조현 조주시의 백림선사(栢林禪寺)로 향한다. 선(禪)의 마술사 조주 스님의 향훈이 깃든 곳이다.
백림선사는 한나라 헌제 건안 연간(196~220)에 건립돼 처음에는 관음원(觀音院) 또는 동원(東院)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원나라 때이다. 절 안에는 천년을 버텨온 조주탑이 있고 산문은 조주의 만리교를 마주 대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자 푸른 측백나무들이 도열하여 일행을 반긴다.

 


숲속에 들어온 듯 청량한 향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쭉쭉 솟은 측백나무들이 열병식을 하듯 양쪽으로 늘어서 길을 열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신기루처럼 아름다운 탑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조주 스님의 사리를 모신 조주탑이다. 

이곳이 바로 뭇 수행자들의 혼을 흔들어 깨웠던 무(無)자 화두가 나온 문이며 ‘뜰 앞의 잣나무’ 라는 벼락이 ‘꽝’하고 내리쳤던 곳이다.
탑을 지나자 뒤편으로 관음전이 보인다. 관음전을 친견하고 긴 회랑을 따라 들어가자 뒤쪽으로 거대한 법당이 도량을 짓누르듯이 서 있다.

 만불루(萬佛樓)이다. 1만 명이 동시에 법회를 볼 수 있는 규모라는데 놀랍도록 거대하다.

문화혁명 당시 조주탑과 몇 개의 비석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파괴됐다. 그럼에도 지금의 백림선사는 도량 곳곳 수많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상주 인원만 150여명. 방이 450개나 되는 요사, 강원과 연구소, 박물관 등이 차곡차곡 들어서 중국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도량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다. 상의 다리가 부러지자 시주를 마다하고 타다 남은 부지깽이를 묶어 대신했다는 조주 스님의 눈물겹도록 맑은 청빈을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은 나라가 바다 속에 잠기더라도 『임제록』 한 권만 건지면 더할 것이 없다고 했다지만 우리에게는 아마도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가 아닐까 싶다. 측백나무 가득한 도량을 지나 산문을 걸어 나와 저녁공양하고 석가장 세기대주점에 투숙,

석가장 호텔에서 아침공양 마치고 북경으로 이동 360여km,를 4시간30여분 달려 점심공양 하고 공항으로 이동 18시45분 발 KE830편으로 귀국,

2018.09.08 중국 오대산 북대, 중대, 대라정, 현통사, 대백탑

'등산,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도 마니산, 석모도 해명산  (0) 2018.09.30
고성 연화산  (0) 2018.09.23
장성 축령산  (0) 2018.08.26
상주 청화산  (0) 2018.08.19
지리산 한신계곡 폭포  (0) 2018.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