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김문수는 누구인가

서석천 2025. 5. 13. 05:28

1994: '노동 대부', 사회주의 붕괴에 "혁명 끝났다" … 2025: 나라 거덜낸 '가짜 좌파' 도장깨기

개천에서 용났다지만 서울대 졸업만 25년 걸려
불타는 정의감에 학창시절 3선 개헌 반대 시위
미싱공장 위장 취업해 노동계 현실 직접 체험
두 차례 옥살이 후 민중당으로 제도권 진입 시도
  • ▲ 노동운동탄압규탄대회 봉쇄농성 85.4.10 부평 1동 성당에서 농성을 이끄는 김문수(학출노동운동가). ⓒ연합뉴스
    "혁명의 시대는 갔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아스팔트에서 노동자를 위해 누구보다 거칠게 살아온 그는 이런 말을 남기면서 민주자유당에 들어가 우파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김 후보는 1951년 9월 경북 영천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냈지만 김 후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무렵 아버지가 친척 보증을 잘못 서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판자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 후보의 정의감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경북고 재학 시절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 시위에 앞장서 무기정학을 당했다. 
     
    김 후보는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1970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졸업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 제적당하면서 25년 만인 1994년에야 늦깎이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대 입학 후 학생운동 조직인 '후진국 사회 연구회'에 가입한 뒤 운동권에 발을 들였다. 연구회 활동을 하며 유신(維新) 독재 타도 운동에 참여했다. 
     
    김 후보는 피복공장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방과 달리 서울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후 고 김근태 전 의원의 권유로 드레스 미싱공장에 위장 취업해 노동계 현실을 직접 체험하게 됐다. 오전에는 미싱사로 일했고 저녁에는 사람들과 만나 토론하며 바쁜 일과를 보냈다. 
  • ▲ ⓒ인터넷 커뮤니티 갈무리
     
    그는 1971년 가을 부정부패 척결 전국학생 시위에 연루돼 제적됐다. 1973년 제적이 풀려 학교에 돌아갔으나 1974년에도 연거푸 제적됐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민청학련 사건은 유신 시절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반정부 시위를 벌인 학생 등 관련자 180여 명이 구속·기소된 사건이다.
     
    김 후보는 두 차례 제적 후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옷에 똑딱이 단춧구멍을 뚫는 '또또사'로 시작했지만, 열관리기능사, 환경관리기사 등 7개 자격증을 취득하며 한일공업(도루코)에 보일러공으로 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1978년 김 후보는 한일도루코 노조교육선전부장에 이어 위원장 직무대리까지 맡으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권에 진입했다. 김 후보는 당시 임금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노동운동가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흔들리게 된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복 차림의 형사에게 끌려간 곳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서 자신의 서울대 선배들이 연루되자 김 후보도 조사 대상에 오른 것이다. 이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일주일간 밤낮없이 고문을 당했다. 이후 49일 만에 풀려났다.
     
    1986년엔 5·3 인천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2년간 옥살이를 했다. 인천항쟁은 인천에서 열린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에 민주화운동 세력이 총집결해 벌인 시위다. 김 후보의 회고록에 따르면 수감 당시 '족수승'(손발을 몸 뒤쪽으로 활처럼 묶는 것) 등 각종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갖은 고문에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서 함께 활동한 심상정 전 의원에 대한 정보를 불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 ▲ 민자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9일 오전 청와대에서 김문수 경기 부천 소사 지구당위원장등 10개 신임 지구당위원장들을 접견하고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동계 전설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김 후보는 1990년 고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과 제도권 정치 진입을 도모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며 민중당 구로갑지구당 위원장을 지냈다. 
     
    민중당 노동위원장으로도 활동했으나 1992년 51개 지역구 전패 및 정당 존립에 필요한 득표율 2%도 못받아 해산됐다. 그 무렵 김 후보는 소련 등 공산주의 동유럽 등 사회주의의 붕괴를 지켜보며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이념에 회의를 느꼈다.
     
    결국 김 후보는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로 "혁명의 시대는 갔다"라는 말을 남긴 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게 된다.
김희선 기자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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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는 누구인가-中

좌우에서 미운오리새끼 취급에도 애국심 하나로 '뚜벅뚜벅' … 고문에도 입 닫은 뚝심

구타·전기 고문에도 열지 못한 김문수의 입
노동자·약자·서민 위해선 거침없는 행보
보수 불모지 부천에서 진보 아성 꺾고 3선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금배지도 내버려
  • ▲ 1988년,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가족들의 모임인 민가협(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 행사에 참석해 '양심수 전원 석방'을 외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운동권의 전설에서 우파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게 꽃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변절자'라는 비난을 견뎌야 했고, 소장파 국회의원으로서 설움도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 대한 변하지 않는 애국심 하나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김 후보는 두 차례의 투옥과 모진 고문에도 운동권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맞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져도 그의 입을 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춧가루 물 먹이기, 전기 고문도 행해졌지만 동료의 행방을 두고는 입을 굳게 닫았다. 
     
    이후 2년 6개월의 투옥 생활이 시작됐다. 김문수라는 이름 대신 '1125'로 불리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영문도 모른 채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대한민국은 변혁의 시기를 겪었다. 김 후보의 삶도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소련의 붕괴를 목격했고 자본주의로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사회주의로 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 대신 현실 정치에 뛰어든 김 후보가 1994년 민주자유당(민자당) 부천시 소사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부천의 낡은 아파트로 둥지를 옮겼다. 그리고 2년 뒤 있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준비에 돌입했다. 지역 연고도 없는 데다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정치 신인이었기 때문이다. 
     
    김 후보는 이른 아침 약수터로 출근해 늦은 밤까지 소사구 구석구석을 누비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하루도 쉬지 않았던 그의 손에는 늘 수첩이 들려 있었다. 주민들이 제기하는 민원이나 불합리한 문제들을 까먹지 않기 위함이었다.
     
    김 후보가 매일 소사구 곳곳을 돌고 또 도는 사이 15대 총선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김 후보의 승리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가 부지런히 2년을 보냈더라도 기성 정치인의 아성을 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사구 현역 국회의원은 부천 명문가의 토박이이자 부천의 땅 부자로 유명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박규식 의원이었다. 제1야당인 국민회의 후보도 막강했다. 제22대 국회 최고령 현역인 박지원 의원이 당시 소사구에서 출격을 대기하고 있었다. 박지원 의원은 당시 DJ의 막강한 신임을 얻고 있는 대변인 신분이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3등을 면치 못했다. 지난 2년간 경청한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지옥철, 대통령도 같이 타봅시다'라는 파격적인 공약도 내놨지만 단번에 판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박규식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박지원 의원과 일대일 구도가 됐다. 그럼에도 김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부천시는 대대로 민주당 의원들이 당선된 곳인 만큼 민자당도 그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의 진심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선거를 사흘 남겨두고 판세는 조금씩 흔들렸다. 그렇게 김 후보는 불과 1600여 표 차이로 박지원 의원을 꺾고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 ▲ 2004년 2월 26일 한나라당 공천심사에서 박주천,박명환의원이 배제되자 박주천의원 지지자들이 김문수 위원장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진심의 힘을 당선으로 입증한 김 후보는 또다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총선에서 주민들에게 약속한 '지옥철 해결'을 이뤄내야 했다. 아무도 김 후보에게 공약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선거 때만 반짝 진심인 척하는 기성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평소 행실부터 남달랐다. 이에 한동안 국회에 등원할 때마다 입구에서 제지를 당해 관등성명을 대야 하는 일화도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는 국회 경비대의 물음에 "저 김문수 의원이라고…. 의원회관 갑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다름 아닌 그가 타던 '아반떼' 차량 때문이었다. 김 후보의 차량을 방문 차량으로 오인했던 것. 대다수 국회의원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녔지만 김 후보는 소형 승용차를 고집했다. 이마저도 당선 후 처음으로 장만한 것이다. 
     
    검소했던 그는 국회의원의 상징인 금배지마저 떼버렸다. 1996년 겨울 신한국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계기가 됐다. 당시 노동운동가 출신이던 김 후보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그는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서 노동유연성 확대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의 큰 방향성에 동의했다. 그러나 설득과 타협의 과정이 부족했던 점에 대해선 통렬히 반성했다. 노동자들이 김 후보를 향해 던지는 욕설과 멱살잡이를 묵묵히 견딘 것도 이런 차원에서였다. 결국 그는 1997년 3월 국정감사 기간 중 대정부질문에서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1998년에는 주민과의 약속을 마침내 지켜냈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파고든 덕이었다. 철도청을 찾아가고 지방자치단체를 거듭 설득했다. 동료 국회의원들이 모이는 자리에만 가면 경인 지옥철 문제를 꺼내 들었다. 기나긴 노력 끝에 건설부 장관으로부터 2배 정도의 선로용량 증가가 가능한 복복선 약속을 받아냈다.
  • ▲ 한나라당 김문수의원이 5일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식아동 지원 예산을 위해 싸우다 '김결식'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밥 굶는 아이들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게 무슨 민생국회인가"라며 추가경정예산 막판 조율을 위해 3당 원내총무가 모여 있는 곳을 기습 방문해 항의하는 등 국민과 약자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냈다.
     
    17대 대선을 앞두고는 공천심사위원장을 제안받기도 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 전달 사건으로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부정부패와 거리가 먼 인물이 필요했다. 철저하게 깨끗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개혁 공천이 요구됐고, 김 후보를 내세워 이미지 쇄신에 나섰다.
     
    김 후보는 자신의 소임을 해냈다. 기존의 관행을 뒤엎고 공심위 구성에서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였고, '쪽지 공천'을 원천 차단했다. 자신에게 공심위원장을 제안한 최병렬 대표도 탈락시켰다. 선배·동료 의원 27명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김 후보는 자신만의 소신 정치로 보수 불모지 부천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지역 주민들 입에서 "당이 아닌 김문수를 지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좌파 진영에서는 그에게 배신자라며 손가락질을 했고, 우파 진영에서는 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김 후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응원하는 국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결심한 김 후보는 노동운동을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늘 약자를 최우선으로 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은 예나 지금이나 그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는 3선 의원이 돼서도 변하지 않았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던 2006년 그는 부천시 소사구를 넘어 경기도 전체로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된다. 
김희선 기자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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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는 누구인가-下

대중교통 환승할인부터 GTX까지 서민 정책 '꼿꼿' 마무리 … '진짜 잘사니즘' 장본인

행정 문외한 김문수, 진심 하나로 도지사 재선
대중교통 환승·GTX 도입 … 택시 운전사 활동
2024년 마침내 빛 발한 김문수의 소신 정치
야당 공세에도 꿋꿋 … 우파 대선 후보로 우뚝
  • ▲ 2006년 5월 31일 오후 경기도 수원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후보 개표상황실에서 김문수 후보와 부인 설난영 여사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활짝 웃고 있다. ⓒ연합뉴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35년 정치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다름없었다. 대쪽 같은 신념으로 신망받던 그는 연거푸 선거에 참패했고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면서 국민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혔다. 그러나 한결같이 단단한 그의 소신은 다시금 그를 우파 진영의 선봉장에 우뚝 서게 했다.
     
    2006년 김 후보는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하마평에 오르내렸다. 행정 경험이 없던 그에게 새로운 도전인 만큼 신중하게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더 많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길을 택했다.
     
    한나라당 경선을 통해 당당히 통과한 김 후보는 국회의원 선거와 마찬가지로 경기도 곳곳을 두 발로 뛰어다녔다. 선거운동 기간 경기도에서 5㎞ 마라톤 대회가 열렸을 당시 김 후보는 다른 후보와 함께 출발선상에 섰다. 그리고 도착선상에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다면 하는 그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 나온 것이다.
     
    김 후보의 진정성에 경기도민들은 '김문수의 경기도'를 선택했다. 김 후보는 경기도민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에 학창 시절보다 열심히 도정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가장 먼저 교통 문제 해결에 칼을 빼 들었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경기도민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교통 사정은 제자리걸음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대중교통 환승할인제를 도입했다. 같은 시기 서울은 환승 제도가 이미 시행되고 있었지만 경기도는 도입되지 않았다. 서울시를 설득해 광역 대중교통 환승할인제를 이끌어냈다.
     
    지금의 GTX도 김 후보의 작품이다. 경기도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싶었던 김 후보의 진심이 이를 탄생시켰다. 
     
    2009년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공부하고 시험을 통해 택시운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직접 경기도민의 발이 된 그는 보좌진이나 숙련된 택시기사를 대동하지 않고 경기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도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들은 각종 민원과 지적 사항은 고스란히 도정에 반영됐다.
    설연휴 마지막날인 2009년 1월 27일 택시운전 자격증을 얻은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경기도 수원시내 일대에서 1일 택시기사 체험에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 경기도민은 또다시 '국민머슴' 김 후보에게 도정을 맡겼다. 김 후보는 유시민 전 의원을 큰 차이로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뜨겁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선거에 임한 김 후보의 진심이 도민에게 닿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기도에서 함께 일할 경기도의원 다수가 도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여소야대 국면을 피할 수 없게 됐으나 김 후보는 일방통행보단 설득을 통한 타협점을 찾아갔다.
     
    행정가 김문수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해나가던 어느 날 '갑질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11년 12월 남양주소방서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도지사 김문수입니다"라고 말하며 수화기 너머 관등성명을 요구했다. 소방서 직원은 이를 장난 전화로 오인해 무슨 일인지 되물었고, 이러한 통화 내용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이에 대해 김 후보 캠프 관계자는 "도지사 8년에서 굳이 논란을 꼽으라면 나오는 게 '꼰대 문수'다. 오해가 있었지만 마냥 잘했다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잠깐 경기지사를 스쳐 간 누구와 비교했을 때 이 정도면 참 깨끗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김 후보는 각종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2012년에는 대선 경선에 출마했지만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패했다. 2014년 경기도지사 3선을 포기한 후 2016년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지만 김부겸 민주당 후보에게 밀렸다.
  • ▲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2024년 12월 11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진행된 '윤석열 대통령 위헌적 비상계엄 선포 내란행위 관련 긴급현안질문'에서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의 사과요구를 거부한 채 다른 국무위원들과 달리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김 후보가 다시 중앙정치에 모습을 드러낸 건 윤석열 정부에서다. 2022년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을 시작으로 2024년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국무위원을 지내며 야당의 갖은 공세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역사관을 문제 삼으며 사과를 요구하는 야당의 거센 비판에도 초지일관이었다. 이에 국회 상임위원장에서 퇴장당하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그의 소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의 뚝심이 빛을 발한 것은 지난해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국면이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2024년 12월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인물이 있었다. 바로 김 후보였다. 이에 그는 '꼿꼿문수'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원칙을 준수하며 시종일관 당당하고 결기 있는 모습에 국민의힘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그를 대선 후보로 선택했다. 
     
    '정치인 김문수'는 35년 만에 또다시 도전에 직면했다. 이번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파 진영을 하나로 모으고 '반(反)이재명' 연대를 통해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것이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단일화 과정에서 내홍을 겪었지만 바람을 일으키기에 앞으로 20일은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이 당 안팎의 중론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김 후보의 진심이 이번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킬지, 미풍에 그칠지 관심이 여의도로 쏠리고 있다.
 
김희선 기자 202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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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이재명·586 운동권 저격 "좌파 해봤다, 가난이 진보인가, '가짜 진보' 확 찢고 싶다"

이재명의 대장동 개발과 법인카드 사용 등 부패,
문재인의 소주성, 586 운동권의 내로남불 등
좌파 집단의 위선적 행위 제기
"좌파 정권 동안 더 가난해졌는데도 속아...
좌파 정치인들 서민들 표만 이용"
대선 화두로 '가짜 진보론' 내걸어 계엄론과 정면 승부
  • ▲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12일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가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을 방문, 상인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한 12일, 이른바 '가짜 진보론'을 화두로 꺼내며 좌파의 위선적 행동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본인 스스로 좌파 진영의 뼈와 살을 다 체험한 만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586 운동권', 그리고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등이 보여준 내로남불과 속다르고 겉다른 모습을 대선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하겠다는 뜻이다.  
     
     
    김 후보는 이날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연신 민생과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경제 대통령'을 자처했다.
     
    국민의힘 상징인 '빨강색'이 아닌 베이지색 바지에 흰 폴로 셔츠, 편안한 운동화 차림을 한 김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흰색과 빨간색이 배합된 선거운동복에는 김문수 이름과 기호 2번이 적혔다. 
     
    김 후보는 중앙선대위 임명장 수여 후 연단에 올라 이날 새벽 공식 선거운동 첫 일정으로 방문한 서울 송파구의 가락시장을 언급했다.
     
    그는 "시장은 대한민국 경제를 알아보는 바로미터이자 경제가 활성화되는 현장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대한민국을 풍요롭게 했다"면서도 "경기 침체를 느꼈다"고 했다.
     
    김 후보는 "경제를 살리는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 시장을 살리는 '시장 대통령'이 되겠다. 민생을 챙기는 '민생 대통령'이 되겠다. 농민들이 농산품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농민 대통령'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연설 도중 탈북자 출신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을 연단으로 불러 북한의 경제 실상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거듭 강조했다.
     
    김 후보는 박 의원에게 "북한과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박 의원은 "우리의 시장이 자유롭다는 게 가장 큰 차이"라고 답했다.
     
    김 후보가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시장 가격을 국가에서 정하는 것을 지적하자 박 의원은 "국가가 매일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며 "북한에서 김일성 시대부터 꾸준히 인간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지상 낙원을 만들겠다고 외쳤는데 그 결과는 지옥이었다. 대한민국 땅에 첫발 내딛는 순간, 이것이 김일성이 옛날부터 만들고 싶어 했던 천국 같은 세상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전했다.
     
    김 후보는 "배고픔과 억압 등 여러 고통에 처한 북한 동포들을 우리가 구원해야 한다. 북한을 자유통일해서 풍요로운 북한을 만들 수 있는 정당은 국민의힘"이라며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진보이지 가난하게 하는 것이 진보인가"라고 날을 세웠다.
     
    이어 "가짜 진보를 확 찢어버리고 싶다"며 "더불어민주당이 할 수 있나. 진보당이 할 수 있나.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은 국민의힘"이라고 역설했다. 그러자 박 의원도 "민주당은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고 우리 사회를 패배주의로 만든 정당"이라며 "국민의힘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호응했다.
     
    그러면서 "저는 좌파도 해봤고 박 의원도 '김일성 수령님 만세' 이런 거 다 하고 살지 않았나. 우리는 다 경험한 사람들"이라며 "그래서 국민의힘이 이번에 반드시 이겨야 하고 이기는 것은 제가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고 북한 동포들이 올바르게 살고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 후보의 '가짜 진보론'은 민주당 정권과 이재명 후보의 치부이다.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지만 대장동 개발 과정에서 보여준 좌파 집단의 부정과 부패, 자신의 아들은 해외 유학을 보내면서 강남 부자들을 공격하는 행위, 소득주도성장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면서 정작 자영업자들만 폐업으로 몰리게 한 행위, 섣부른 부동산 정책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월세살이로 쫒겨 나는 행위, 겉으로는 서민을 생각하면서 법인카드로 초밥과 소고기를 사 먹는 행위 등등의 모든 위선과 탈법을 '가짜 진보'라고 저격한 것이다.
     
    정작 서민들과 중산층은 이들 가짜 진보집단이 집권한 기간 동안 외려 더욱 가난해지고 이들의 가짜 정책, 즉 기본소득과 돈 뿌리기 등에 속고 있다는 것이 김 후보의 판단이다. 서민들의 표만 이용하고, 정작 분식된 정책으로 살림살이는 더 나빠지는 실태를 찌른 셈이다.  
     
    김 후보는 이런 측면에서 이번 선거를 '경제 대통령'을 화두로 내걸었다. 가짜 진보들이 펼치는 허구와 위선을 다시 한번 꺼내 유권자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진짜 경제 대통령'은 자신임을 보여주겠다는 심산이다.  
 
김희선 기자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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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켜본 김문수의 매력 - 신독(愼獨) 고독(孤獨) 겸손(謙遜) 강단(剛斷)

김문수 후보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2019년 10월 1일 수잔 솔티( Suzanne Scholte, 자유북한연합 대표:NKFC)여사의 북한 인권에 대한 강연장이었다.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까만 안경, 그리고 살아있는 눈빛을 가진 온화하지만 강렬한 김 후보의 인상이 남아있다. 당시 그는 기울어가는 대한민국을 위해 동의한다는 말만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행동해야 한다는 짧지만 단호한 메시지를 남겼다. 

6년이 지난 그가 갖은 역경을 뚫고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이 사람이라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자질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지도자의 덕목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신독(愼獨)을 아는 사람이다.

크던 작던 단체를 이끌 지도자는 그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신뢰는 단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람을 타고 생긴 인기를 얻은 사람은 쉽게 변질하고 실수하게 된다. 빛난다고 다 금이 아니듯이 아무리 화려한 정책을 내세운다고 해도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실망과 큰 피해를 입힌다. 반면 신뢰는 오랜 시간 변함이 없는 삶의 발자취와 모습을 통해 형성된다. 그 사람의 행적을 보면 신뢰를 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국민을 배신할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지도자로서 최고의 평가는 일괄된 진정성(Integrity)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사서삼경 중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신독(愼獨) 사상이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즉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삼간다는 뜻이다. C.S. 루이스(Lewis)는 신독을 인테그리티로 표현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독의 덕목을 가진 리더는 등댓불이다. 망망대해에서 외로이 서 있지만 어둠 속에서 묵묵히 빛을 비춘다. 항해자가 믿고 따라갈 길을 알려준다. 김문수 후보는 삶을 통해 신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바른길을 제시하고, 올바름을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하거나 무릎 꿇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고독(孤獨)을 즐기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바쁘고 힘들수록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지도자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깊이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깊은 고독의 시간을 통해 국민을 감동시키는 명언을 만들어 낸다. 영혼을 울리는 지도자의 한 마디는 국민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2차대전 당시 처칠은 영국 국민에게 ‘나는 피와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 달리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짧지만 진한 감동과 강한 힘이 있어 두고두고 많은 지도자가 인용하는 명문(名文)이다. 이런 처칠의 멘트는 고독한 성찰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한 마디에 영국 국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김문수 후보와 페이스북 친구이기에 수년 동안 그의 행적을 보아왔다. 그가 등산하는 사진을 종종 보았다. 그는 등산을 통해 고독한 성찰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최근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같은 말이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김 후보가 하는 이 말에 감동이 왔다. 저 사람이라면 믿고 따라갈 만하다는 확신이 든다. 

겸손(謙遜)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악수할 때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다. 손가락을 쥐지 않고 손바닥을 펴고 악수하는 사람은 왠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어 다시 보게 된다. 그와 악수할 때 밝은 미소와 함께 내민 손에는 상대를 존중하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서 전해지는 겸손을 느꼈었다. 

수일 전 필자의 지인이 김 후보를 만난 소회를 보내온 메시지를 전해왔다. 그분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는 수류탄처럼 무리의 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경호원조차 밀치고 김문수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뜨겁게, 힘 가득, 온 마음을 실어 김문수와 악수를 했습니다. 김문수, 김문수를 연호하면서 무리를 따라 걸으며 두 번, 세 번 악수를 청했습니다. 저는 김문수 후보를 몇 차례 만났는데, 매번 겸손하고, 단아하며, 청아하고 맑은 성품을 느낍니다. 선비적 풍모의 전형적인 외유내강을 봅니다. 우리나라에 김문수 같은 정치인이 있다는 자체가 진흙탕 속 연꽃 같았습니다.”

지나친 겸손은 위장된 교만이라고 한다. 하지만 김 후보는 교만하지 않다. 그는 약자나 강한 자나 모두에게 한결같이 겸손했고 그들을 존중했다. 겸손이 삶 속에 체화된 사람이다.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정직하다. 남을 배려하기에 자신의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극도로 싫어한다. 

강단(剛斷)이 있는 사람이다.

현재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문제( 친북, 친중 성향 정치인의 문제, 거대 야당의 의회 횡포 문제, 권력형 비리 문제, 의료농단 문제, 청년 일자리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이를 해결할 강단을 가지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개혁 의지와 이를 뒷받침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내려 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거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간다. 그에게는 불의에 항거하고, 힘이 들어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용기와 강단이 있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강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실수를 시인할 줄 아는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지배자가 아닌 지도자가 될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의를 위해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까지도 함께 품고 가려는 그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 

3주 후,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더 낮은 곳에서 더 뜨겁게 일하는 대통령이 되어 있길 바란다. 고독을 즐기고, 신독하며, 무례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무엇보다도 돈 문제에 청렴한 삶을 살아온 그에게 좋은 결과를 기원한다.

이명진 객원칼럼니스트(의사, 의사평론가)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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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앞 눈물", 이것이 '인간 김문수'

"신장 7cm 혹, 식비 월 10만원, 선생님은 편모라고 아이 차별" … 눈물 흘린 김문수, 정책으로 약속지켰다

경기지사 시절 한부모 가정 민원인 호소에 눈물
무한돌봄사업 등 현실 정책으로 약자의 삶 개선
"金, 강경 이미지만으론 대변 못해, 재평가 돼야"
  • ▲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15일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서민 생활의 고통을 언급하던 중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정상윤 기자
    2009년 3월, 한 모자 가정의 절박한 사연 앞에 경기도지사 김문수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엄마는 신장에 7cm 혹이 생겨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미 석 달째 밀린 월세, 퇴거를 요구하는 집주인, '한부모 자녀'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별받는 아이를 둔 엄마의 간절한 호소. 
     
    가만히 사연을 듣던 김 지사는 "우리가 도와드릴게요"라며 눈시울을 붉혔고, 이후 김문수의 경기도는 '무한돌봄사업'으로 현장 밀착형 지원 체계의 모범 사례가 됐다. 
     
    15일 2009년 경기도지사 시절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후보가 한 모자 가정의 민원인을 만나는 영상이 SNS에 퍼지면서 그의 인간미가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 민원인은 500만 원 월세, 35만 원 반지하에 거주하며 어린 자녀를 혼자 돌보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었다. 몸도 성치 않아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모자 가정에 대한 의료보험은 아이에겐 50%는 지원되지만 본인에겐 일절 지원되지 않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민원인은 "선생님이라는 사람들까지 모자 가정이라는 이유로 우리 아이를 차별한다"며 "아이 때문에 살지 않느냐. 우리 아이의 꿈과 희망이라도 저버리지 않게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대한 김 후보의 대답은 "우리가 도와드릴게요" 단 한 마디. 김 후보의 눈물이 회자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울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 후보는 그 길로 2008년부터 추진해 온 '무한돌봄사업'을 확대 시행했다. 한부모 가정처럼 복지 시스템 바깥에 놓인 사람들을 행정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였다.
  • ▲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2009년 경기지사 시절 민원인의 사연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 ⓒ노컷TV 화면 캡처
    ◆서민 고통·약자 얘기에 '가슴 속 눈물' … 측근들 "정치 인생 가장 청렴한 분"
     
    김 후보는 최근 대선 정국에서도 종종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중앙선대위 회의 때는 서민 생활의 고통을 언급하던 중 목이 메는 모습을 보였고, 지난 8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는 한센인 이야기를 하던 중에도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덕수 총리와의 단일화 논란 이후 후보 자격을 되찾자마자 김 후보가 향한 곳도 한센인 마을인 경기도 포천시 장자마을이었다. 
     
    과거 한센인들을 만나기 위해 소록도와 꽃동네를 자주 찾았던 김 후보는 "김문수 덕분에 70 평생 처음 글을 배웠다"며 삐뚤빼뚤한 써 내려간 한 한센병 할머니의 편지를 액자에 넣어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한편으로는 경기도지사 재임 당시의 소방관 갑질 논란과 자유한국당 시절 강경 보수 노선으로 인해 중도층에게는 부정적인 인식도 함께 남아 있다.
     
    그럼에도 김 후보의 과거를 회고하는 측근들은 '대선을 통해 재평가가 필요한 정치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김 후보와 경기도청에서 일했던 김찬영 전 대통령실 법률비서관실 행정관은 "시스템 바깥의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을 행정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며 "적어도 내 기억에서 김 후보는 힘없고 어려운 분들의 마지막 희망은 오직 정치와 행정뿐이라며 그 분들의 희망을 위해 어떤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섰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돈다발 싸들고 오는 사람을 제일 먼저 공천 탈락시키고, 아무 대가도 사심도 없는 종교단체 후원금도 돌려보내니, 세상 물정 모른다고 되려 손가락질받던 사람"이라며 "태극기만 봐도 애국가만 들어도 눈시울이 붉어지던 분"이라고 말했다. 
     
    최근 당 단일화 과정에서 김 후보에게 실망했다며 힐난을 퍼부었던 한 의원도 "김 후보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청렴한 정치인"이라고 말할 정도다. 
     
    대선 전까지 김 후보와 인연이 전혀 없었다는 한 초선 의원도 "한덕수 총리 쪽으로 단일화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김 후보는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며 "아직 그 청렴함과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고 치켜세웠다. 
     
    ◆김문수-이재명, 경기지사 시절 '같은 자리, 다른 결실' 주목 
     
    이러한 미담과 함께 김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경기도지사 시절 대비되는 행보도 주목받는다. 
     
    김 후보는 지난달 16일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재명 후보는 측근들이 하나둘 의문사했지만 내 측근 중엔 죽은 사람 없다"며 "경기도지사 시절의 성과를 비교해 봐도 나와 이 후보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전 대표는 성남시 대장동 조그마한 30만 평하는데 여러 의혹에 측근이 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감옥에 갔다"며 "그에 비해 나는 그보다 수십 배 큰 광교신도시와 광주신도시, 남양주 다산신도시, 판교 테크노밸리, 평택의 IT밸리 등 수많은 개발 사업을 했지만 한 건도 문제가 없었다. 누가 더 많은 일을 했고 누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었는지 결과를 보면 답이 나온다"고 자신했다. 
     
    반면 민주당 측은 지난 11일 '김문수 망언집'을 공개하고 "김 후보는 여성 비하, 약자 조롱, 역사 왜곡 등 문제가 심각한 후보"라며 "만에 하나라도 이런 인격의 소유자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의 상식과 가치, 국제적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추락한다"고 맞받아쳤다. 
 
박아름 기자 202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