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前 실장이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아닙니까』하며 초콜릿을 건넨다.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과 국민회의의 대변인으로, 청와대 공보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기자들을 접했던 그가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와 책상 위의 녹음기를 거북해하는 듯했다.
─오랜만에 하는 인터뷰죠.
『盧武鉉(노무현) 정부 내내 입을 안 열었으니까 꼭 5년 만이네요. 아니네요, 제가 청와대 대변인·정책기획수석·비서실장으로 있었을 때도 인터뷰를 안 했으니까, 정식 인터뷰는 金大中 前 대통령 당선 이후 10년 만에 처음입니다』
─왜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까.
『「국민의 정부」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때 제가 입을 열면 제 얘기가 아니라 金大中 대통령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니까요. 윗분에게 累(누)가 될까 봐 침묵하고 있었던 거죠』
달콤한 초콜릿을 먹으며 시작된 인터뷰였지만, 질문은 씁쓸한 기억을 짚는 것으로 시작됐다.
─「국민의 정부 5년」의 뒷감당을 온몸으로 한 셈이 됐습니다. 감옥살이를 얼마나 했습니까.
『2년은 징역을 살고, 2년은 병원에 있었죠. 盧武鉉 집권 5년이 곧 朴智元 징역 5년이죠』
─사면과 복권은 언제 됐습니까.
『2007년 2월에 사면됐고, 복권은 그 해 12월31일에 됐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朴실장에게 지난 5년은 분명 「잃어버린 5년」이군요.
『그 말이 가장 강하게 해당되는 사람이죠』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다가 5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억울하지는 않았습니까.
『청와대를 떠나기 전에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얘기를 해요. 「과거 정치사를 보면 정권의 2인자는 정권이 끝나면 반드시 구속된다. 2003년 2월25일 盧武鉉 대통령 취임식 끝나면 그날 오후에 미국行 비행기를 타라」』
─왜 미국行 비행기를 안 탔습니까.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책임을 져야죠. 저는 책임을 피하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기 때문에 미국에 가면 누구보다 편하게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가면 그 책임이 金 前 대통령에게 갈 것 아닙니까』
朴 前 실장은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金大中씨가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을 때 처음 정치인 金大中과 인연을 맺었고, 金大中씨의 미국內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뉴욕에서 가방공장 등을 운영했던 그는 뉴욕한인회 회장,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1992년 귀국해서 민주당 대변인으로 金大中 총재를 보좌하기 시작했다.
「위장된 미소」로 5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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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 총재특보 시절인 1997년 5월 회의석상에서 김대중 총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박지원 前 실장. |
─朴 前 실장이 盧武鉉 정부 5년을 囹圄(영어)의 몸으로 지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혼자서 많은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내 언행에 대한 책임이 모두 金 前 대통령에게 향하기 때문에, 「위장된 미소」로 5년을 보냈죠. 구치소에서도 모범수 노릇을 했습니다. 교도관들이나 동료 죄수들의 평가가 꽤 좋습니다. 지금도 함께 고생한 사람들끼리 연락하며 지냅니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감옥살이가 간단치 않았을 겁니다. 감옥에 갔다가 쉽게 허물어지는 사람이 적지 않더군요.
『좁은 공간에서 하루 22시간 동안 혼자 있습니다. 주말에는 24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밤에 달빛이 들어오는 좁은 창을 내다보며 많이 울었죠. 못난 사람이 감옥에 오니 가족과 하느님밖에 없더라고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반을 읽었어요』
─朴 前 실장이 감옥에서 「손봐야 할 세 명」을 손꼽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거기에 盧대통령이 포함되는 거죠.
『잘 아시면서(웃음). 구치소 간부가 제게 이런 얘기를 들려 줘요.
「소위 고위급이라는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오면, 다들 용서한다고 하지만 마지막까지 딱 세 놈은 손보겠다고 마음의 칼을 간다. 그런데 그 세 사람까지 용서하면 감옥 밖으로 나가더라」
저도 인생 끝까지 손봐야겠다고 마음먹은 「딱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 인간이 도대체 나한테 왜,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사람들이죠』
『復權 안 돼 울분이 치밀었다』

─세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했습니까.
『운동시간이었어요. 구치소 운동장이 삼각형인데 한 바퀴 돌면 딱 38보입니다. 손바닥만 하죠. 고개를 들면 삼각형의 새파란 하늘이 보여요. 당시 집사람이 넣어 준 「매일미사」라는 책과 성경을 아침마다 낭독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예수님은 원수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데, 나는 아직도 이 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어요. 내 일생에 그렇게 진지한 기도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운동을 마치고 방에 돌아왔더니 교도관이 와서 제가 그토록 기다리던 대법원 선고 날짜가 잡혔다고 하더군요』
─세 사람을 용서한 바로 그날입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나서 바로 몇 시간 뒤예요. 그들을 용서하니까, 하느님이 제게 축복을 주시더군요. 그런데 나와서 편해지니까, 사람이 반대로 됩디다』
─그게 무슨 얘긴가요.
『2007년 2월에 사면은 됐는데, 복권을 안 해주더라고요. 사면과 복권은 같이 가는 거잖아요. 사면은 해주고, 복권은 안 해주는 게 무슨 처사입니까. 감옥에서는 용서를 했는데, 다시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거예요(웃음).
「朴智元을 복권시키면 정치활동을 할 거고, 그건 金大中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거다」 그런 목적일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울화가 치밀어 욕을 하면서 운동을 하다 돌에 걸려 넘어져서 양쪽 팔의 뼈가 다 부러졌어요. 양쪽 팔에 모두 깁스를 했습니다』
─어디서 넘어지셨나요.
『청계천에서요. 제가 요즈음 매일 두시간씩 청계천을 걷습니다』
─2차 남북頂上회담을 마친 盧武鉉 대통령이 金大中 대통령을 초청했을 때 동행한 것으로 압니다. 5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감회가 어땠습니까.
『다 용서했습니다. 그저 덤덤한 마음이었습니다』
『정부 돈 단돈 1달러도 北에 간 적 없어』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