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유동열의 스파이 세계<56>~<58>

서석천 2025. 4. 9. 05:13
[유동열의 스파이 세계]<56>
‘탁월’했던 동독 스파이 수장 마르쿠스 볼프
마르쿠스 볼프, 첩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파이 마스터로 평가
철저한 은닉성과 보안성으로 서방세계에‘얼굴 없는 남자'로 알려져
볼프, 일상생활 모든 영역 심지어 내밀한 사적 영역까지 침투 장악
 
 
가장 탁월하고 악명높은 냉전 시대 스파이 조직의 수장을 꼽자면 단연 동독의 마르쿠스 볼프(Mrkus Wolf)를 들 수 있다. 그는 첩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스파이 마스터로 평가되고 있다.
 
마르쿠스 볼프는 ‘슈타지(Stasi)로 통칭되는 동독 국가보안부(MfS)의 해외공작국(HVA·일명 정찰총국) 국장을 32(19541986) 역임하며 스파이 활동을 총지휘했다. 그는 철저한 은닉성과 보안성으로 서방세계에서는 얼굴 없는 남자(Man Without A Face)’로 알려졌다. 이는 후에 출간된 그의 자서전 제목이 되기도 했다. 그는 미샤(Misch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볼프는 1923 119일 독일 남서부의 마을 헤힝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계 유대인으로 의사였는데 공산주의자였다. 어머니는 보육교사였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볼프의 가족은 탄압을 피해 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1934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볼프는 모스크바에서 독일계 칼 리프크네히트 학교에 다녔고 1940년 모스크바 항공연구소에 들어갔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알마타로 피신해 그곳에서 1942년 독일공산당에 가입했고 코민테른(국제공산당) 학교에 입교했다. 이곳에서 공산혁명을 위한 군사 및 비밀공작 훈련을 받았고 선전선동술까지 이수했다. 1943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대독 방송(Radio Moscow)의 독일어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1945 5월 소련의 독일 침공 때 베를린에 파견되어 마이클 스톰이란 이름으로 독일 인민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 겸 논설자로 일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볼프의 국적은 독일소련동독으로 3번 바뀌었다.
 
볼프는 1949년 모스크바 주재 동독대사관의 영사로 파견되었다. 2년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소련의 추천으로 동독의 새로운 정보기관 창립 멤버로 합류한다. 이때 나이가 29세였는데 그의 정보작전 역량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경제과학연구소로 위장한 이 기관은 소련 내무인민위원회(KGB 전신)의 고문 4명과 동독인 8명이 창립 멤버였다. 이 기관이 1952년 창설된 동독 국가보안부(MfS·슈타지)의 모체이다. 볼프는 슈타지 소속 해외공작국의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가 2년 후 1954 31세의 나이로 부서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해임될 때까지 무려 32년간 해외공작국 국장으로 각종 스파이 공작을 지휘헸다.
 
볼프는 대() 서독 공작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1961 8월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에 동독을 떠나 서방으로 간 300만 명의 난민들 사이에 스파이를 끼워 보냈다. 이런 방법으로 수천 명의 스파이를 서독의 정부기관·정계·재계에 침투시켜 큰 성공을 거뒀다. 대표적 사례가 1974년 적발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수석 보좌관인 귄터 기욤’(본지 스파이세계 제4·2024.1.30.) 공작이다.
 
볼프는 1956년 슈타지 해외공작국 장교인 기욤 부부를 동독 탈출 피난민으로 위장시켜 서독에 이주해 합법 신분을 획득하게 한다. 이후 장기간 공작 끝에 1969년 총리실에 침투시키는 데 성공한다. 기욤은 서독의 거의 모든 현안 관련 비밀문서와 심지어 총리의 사생활 정보까지 모조리 동독으로 넘겼다. 당시 언론들이 볼프가 서독 총리의 귓속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고 비유할 정도였다. 기욤 부부는 서독 연방정보부(BND)와 연방헌법보호청(BfV) 등 서독 정보기관들이 무려 18년간이나 추적한 끝에 검거할 수 있었다.
 
▲ 마르쿠스 볼프의 자서전 '얼굴없는 남자'. 필자제공 
또한 이른바 미남계로 불리우는 로미오(Romeos) 공작을 전개했다. 건장하고 젊은 남성 스파이를 서독으로 보내 정부나 당 간부들의 여성 비서나 여성 공무원을 유혹하는 공작이다. 공작 대상이 된 여성들은 대다수 외로운 노처녀들이었다. 이들은 친절하고 멋진 젊은 남성의 접근에 낚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마음을 훔친 다음 비밀을 훔치는 것이다. 아데나워 서독 총리실의 여비서도 걸려들었다. 서독 연방정보부 여성요원도 포섭돼 13년 동안이나 연인 관계를 지속했는데 그동안 핵심 정보가 동독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비록 낮은 직책이지만 비서의 속성상 여러 기밀 사항에 접근할 수 있어 일명 비서 스파이 공작으로도 칭한다. 반면에 서독 남성을 유혹하는 미인계 줄리엣 공작도 배합되었다.
 
볼프의 많은 작전에서 섹스가 주요 역할을 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스파이 역사에 기록된다면 스파이 활동에서 섹스를 사용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만든 공로 때문일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침투한 악명 높은 스파이 조직의 수장이었다. 동독이 붕괴되기 직전 동독인 50명 중 1명이 슈타지에 협력하여 이웃·가까운 친구, 심지어 배우자에 대한 정보를 누설했을 정도이다. 볼프는 슈타지의 2인자로서 서독과 나토 본부 및 서방세계에 수천 명의 스파이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자신의 신상 정보를 완벽히 통제했다.
 
볼프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1979년 슈타지 해외공작국 요원인 베르너 슈틸러가 서독으로 망명했을 때이다. 슈틸러는 볼프의 부하이자 친구였다. 그가 베일에 싸여 있던 볼프의 신상을 상세히 알렸고 동독의 대(對)서독 공작의 실상을 진술했다. 그의 제보로 서독에서 암약 중인 소련과 동독 스파이 17명이 검거되었다. 슈틸러의 망명으로 볼프의 공작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듯한 정장과 음악을 좋아했던 볼프는 건강상의 이유로 결국 1986 63세의 나이에 은퇴했다
 
1990 9월 동·서독이 통일되기 직전 볼프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도움으로 소련으로 탈출했으나 소련이 붕괴되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1991 9월 결국 독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통일독일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993년 뒤셀도르프 법원에서 반역죄로 6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95년 연방형사법원에서 그의 활동이 공산주의 동독에서 합법적이었다는 이유로 형이 무효화되었다. 그는 1997년 슈타지 시절 불법 구금·강압·신체적 위해 혐의로 징역 2년과 5만 마르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악랄한 스파이 공작의 댓가치곤 너무 낮은 형량이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슈타지 해외공작국에 협조했던 서독의 고위층에 대해 끝까지 함구했다.
 
출소 후 볼프는 독일 텔레비전·다큐멘터리·토크 쇼에 자주 등장하며 매우 매력적인 남자로 변신했다. 그는 한 기자에게 정보 세계의 도덕성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정상적인 도덕적 사고와 결코 비교될 수 없다며 자신의 스파이 공작을 정당화했다. 그는 1997 얼굴 없는 남자: 공산주의의 가장 위대한 스파이 마스터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는 2006 119 83세의 나이로 베를린 아파트에서 사망했다.
 
유동열 20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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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세계] <57>
이스라엘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응징 작전
아이히만을 체포해 이스라엘로 압송한 모사드와 신베트의 비밀작전
세계여론, 이스라엘이 나치의 학살자를 응징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함 
 
1960 511일 오후 85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정류장에서 버스에서 내린 50대 중반의 남자가 자신의 집으로 귀가하던 중 복수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실려 갔다. 그 남자는 10일 후 522일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수감되었다. 이 괴한들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요원들로 해외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와 국내 정보기관인 신베트(Shin Bet)의 정예요원들이었다.
 
납치된 남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을 주도한 나치 독일의 친위대(SS) 소속 중령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이었다. 1960 523일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총리는 그의 체포 사실을 발표했다. 나치 전범을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압송해 온 모사드와 신베트의 전격 작전에 이스라엘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심각한 외교적 갈등이 발생했으나 세계적으로 결집한 유대인들의 열띤 외교적 노력으로 무마되었다.
 
아이히만은 누구인가. 그는 1906년 독일 라인란트의 졸링겐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그의 가족은 아버지를 따라 오스트리아 린츠로 이주했다. 그는 기본 교육을 마치고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나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1920년대 대공황 상황에서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광산에서 잠시 일한 후, 일용 노동자·사무직 근로자·영업사원을 전전했다. 당시 나치당(Nazi·국가사회주의당)의 광풍이 유럽으로 확산되자 1932년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에 입당했다. 여기서 그의 인생 진로가 바뀌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에서 집권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불법화했다. 아이히만은 1933 7월 독일 바이에른으로 가서 망명 오스트리아 군단에 합류하여 14개월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4년 나치 독일의 정보기관인 보안방첩부(SD)에 선발되어 유대인 문제를 담당했다. 그는 1938 8월부터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독일에서 유대인에게 출국 허가를 발급할 권한을 부여한 빈의 유대인 이주사무소를 지휘했다. 당시 그는 18개월도 되지 않는 기간에 약 15만 명의 유대인을 오스트리아에서 강제 추방했다.
 
1939 9월 나치 독일의 통합정보기관인 제국중앙보안본부(RSHA)가 설립된 후 아이히만은 국가비밀경찰인 게슈타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40 유대인 청소담당’ RSHA 4국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5년 동안 아이히만의 사무실은 유대인 이주와 호송 및 학살을 실행하는 본부였다. 1941년 죽음의 수용소를 만들고 가스 독살실을 개발하고 호송 시스템을 조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1941년에 처음으로 악명높은 폴란드 소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방문했고 같은 해 11월에 나치 독일 친위대(SS)의 중령으로 진급했다.
 
▲ 오토 아돌프 아인리히. 필자제공 
1942 1월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을 위해 소집된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에서 유대인 전문가로서 아이히만의 지위가 공고해졌고 RSHA의 수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그에게 이른바 최종 해결책’, 즉 유대인 대량학살 계획의 실행을 위임했다. 그는 독일에서 유대인을 가능한 한 빨리 없애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과 보헤미아에서 유대인을 대량으로 추방하여 강제 이주시켰다
 
아이히만은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한 지 6주 후인 1944 4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약 44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을 강제 추방하여 폴란드 소재 수용소로 보냈다. 그는 1944 8월 친위대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에게 약 400만 명의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죽었고 또 다른 200만 명이 이동학살부대(Einsatzgruppen)에 의해 죽었다고 보고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하인리히 힘러가 학살을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그는 총통의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무시하고 학살을 이어 갔다.
 
전쟁 후 아이히만는 체포되어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1946년 탈출했다. 그는 수년간 가짜 신분으로 독일에서 살다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1950년 아르헨티나로 도주해 정착했다. 이후 모사드는 1957년에야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국적을 세탁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위장명으로 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모사드가 현지에 요원을 보내 우여곡절 끝에 그의 신분과 소재를 확인하고 체포 작전을 실행하는 데는 3년이 걸렸다. 작전에는 지휘를 맡은 모사드 요원을 비롯해 10명의 신베트 요원이 투입되었다. 1960 4월 작전 요원들은 서로 다른 교통편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집결했다. D데이는 1960 510일로 잡았는데, 아르헨티나 제150주년 독립기념일(511)에 이스라엘 대표단 방문 시 그 항공기에 태워 텔아비브로 압송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표단 항공기 도착이 연기되자 작전을 하루 연기하여 511일 실행했고 안가에 9일간 감금했다가 520일 귀환하는 대표단 항공기에 비밀리에 탑승,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아이히만은 1960 511일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522일 이스라엘로 압송되었고 재판에 넘겨졌다. 아이히만에 대한 세기의 재판은 1961 411일에 시작되었다. 엄청난 국제적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끝에 1961 1211일 그는 반(反)인도 범죄·유대인에 대한 범죄·불법 조직 가입 등 15가지 형사 혐의로 기소되어 1215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그는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고 기각되자 뻔뻔하게도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다. 사면 청원은 기각되었고 1962 61일 자정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그의 유해는 소각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 반(反)인도 범죄 등 15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정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 필자 제공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총리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 언론에 저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우연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또한 백만 명의 아기가 우연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 국가들 앞에 알리고 싶습니다고 강조했다. 재판이 끝나 갈 무렵 대다수 국가와 세계 여론은 이스라엘의 행동이 정의로운 것이고 나치 학살자를 재판에 세워 응징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이 작전으로 모사드는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 반열에 올랐다.
 
유동열 202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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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미국 정부가 공개 수배한 북한 사이버 간첩들
 
2024 1212(현지시간) 미국 법무부는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북한 정보기술(IT) 인력 14명을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 위반과 전자사기 범행·자금세탁 및 신원 도용 음모 등 5개 혐의로 기소했다. 유죄가 인정되면 각각 최대 27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중대 범죄이다.
 
같은 날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이들 14명의 얼굴과 영문 및 한글 이름을 공개하고 공개 수배했다. 또한 미 국무부는 이른바 정의에 대한 보상 프로그램에 따라 북한 IT 인력의 해외 송출·돈세탁·대량살상무기 확산 지원 활동 등에 대한 제보를 하면 사안에 따라 최대 500만 달러( 70억 원)의 현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조치는 북한의 거듭되는 악의적 사이버 활동을 원천 차단하려는 의지를 방증한다.
 
2000년대 이후 북한은 사이버 공간을 본격적인 외화벌이의 장으로 악용하고 있다. 초기 단계에는 불법 도박·게임 프로그램 개발 판매, 불법 사이버 도박회사 운영, 디도스 공격 대행, 랜섬웨어 공격 등을 자행했다. 그러나 연 1조 원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북한의 가상자산(암호화폐) 탈취 규모에 비하면 이런 것들로 벌어들이는 외화는 푼돈에 불과하다. 올해 221일 가상화폐 거래소 바이비트(Bybit)’가 북한 해킹 조직에 털려 한 번에 무려 146000만 달러( 2조 원) 상당의 가상화폐를 탈취당했다.
 
최근 북한은 사이버상의 금전 탈취에 더해 고숙련 IT 인력을 해외 업체에 위장 취업시켜 수익을 창출하고 각종 IT 정보를 불법 탈취하고 있다. FBI에 의해 공개 수배된 14명은 중국 옌볜 소재 실버스타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소재 볼라시스 실버스타라는 북한 회사에 근무하는 IT 인력이다. 두 회사의 총대표인 정성화와 각 회사의 대표인 리경식·김류성 등이다
 
이들 회사는 130여 명의 IT 요원을 운용하고 있다.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는 이들을 ‘IT Workers(IT 인력·IT 근로자)’ 등으로 표기하지만 이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북한의 최정예 스파이 부서인 정찰총국 내 기술정찰국에서 파견한 해외 요원들이다. 북한은 이들을 ‘IT Warriors(사이버 전사)’라고 부른다.
 
▲ 2024년 12월12일 미 FBI가 공개 수배한 북한 사이버 간첩들 . 필자 제공
 
 
기소장에 의하면 이들의 수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북한의 사이버 간첩들은 미국인의 개인식별 정보를 도용하고 도난당한 신분증을 이용해 위조 여권과 가짜 신분증을 만들고 가명의 이메일·소셜 미디어(SNS) 계정, 지불 플랫폼 및 온라인 구인 사이트 계정과 가짜 웹사이트·프록시 컴퓨터·가상 사설망·가상 사설 서버 등을 만들었다
 
이후 미국 내 IT 회사에 재택근무 취업을 신청하고 원격으로 면접을 보았다. 자신이 숙련된 IT 인력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웹 도메인을 등록하고 가짜 웹사이트를 설계해 자신이 근무한 회사가 평판이 좋은 회사인 것처럼 위장했다. 채용된 후 회사에서 보내 주는 업무용 전용 노트북 등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돈으로 미국인을 매수해 그가 집에서 받게 하는 수법을 썼다.
 
매수된 미국인이 노트북을 수령하면 회사 관련 앱들을 설치하고 해외에서 노트북에 액세스할 수 있도록 불법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재택근무 장소는 미국이었지만 실제는 북한의 사이버 간첩들은 중국·러시아 등 해외에서 작업했다. 즉 업무용 노트북을 가지고 미국에서 근무하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위장했지만 실제 고용된 북한의 IT 인력은 해외에 있다. 이런 식으로 구축한 수법을 노트북 팜(farm)’이라고 한다.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재택근무를 하면서 회사 시스템에 불법으로 접근해 독점 소스코드와 같은 민감한 정보를 훔친 다음 이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냈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활동 수익을 중국 내 북한 계좌로 송금했다
 
이런 수법으로 사이버 간첩들은 6년간 최소 8800만 달러( 1232억 원)를 벌어들였다. 미국의 한 회사는 북한 IT 요원들에게 속아 수년 동안 수십만 달러의 급여를 지급하기도 했다. 북한의 해외 사이버 거점에서는 IT 요원을 대상으로 주기적으로 해킹 경연대회를 열어 거기서 발표된 기술을 실전에 활용하고 우수한 성과를 거둔 요원들에게는 보너스와 기타 상여금을 지급했다. 2022년 보도된 드림잡 작전(Operation Dream Job) 애플제우스  작전(Operation AppleJeus)’이 대표적 사례이다.
 
올해 122 FBI는 이와 같은 수법으로 활동해 온 북한 사이버 간첩 2(진성일·박진성)과 미국과 멕시코 국적의 중개자 3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2018 4월부터 2024 8월까지의 작전 기간 동안 64개의 미국 기업에서 일자리를 얻어 최소 86만6255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
 
2024 3 FBI 사이버 및 방첩부서에서는 ‘DPRK RevGen: Domestic Enabler Initiative(북한의 미국 취업사기 차단 활성화 계획)’에 따라 피해 미국 기업이 합법적인 미국 프리랜서 IT 근로자라고 믿는 개인에게 제공한 노트북을 호스팅하는 미국 기반 노트북 팜을 식별하여 폐쇄하고 이를 호스팅하는 개인을 조사하는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FBI는 국무부·재무부와 협력하여 북한 IT 인력 취업사기자 위협에 대해 국제 사회·민간 부문 및 대중에게 경고하는 권고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 211일에는 애리조나주에 사는 크리스티나 마리 채프먼(48)이 북한 IT 인력 취업사기에 협조해 300개가 넘는 미국 기업에서 원격 IT 직책으로 일하도록 지원하며 1710만 달러 이상의 불법 수입을 취득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녀의 행위로 300개 이상의 미국 기업이 손해를 입었으며 70명 이상의 미국인 신원이 유출되었다. 100건 이상에 걸쳐 허위 정보가 국토안보부에 전달되었고, 70명 이상의 미국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허위 세무 채무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창출된 자금은 대부분 김정은의 통치자금과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북한에 의해 자행되는 사이버 간첩들의 위협이 큰데 한국은 특정 정치권의 반대로 이를 차단할 법적 근거인 국가사이버안보기본법(가칭)조차 제정하지 못하는 망국적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동열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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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노비촉에 음독된 前 러시아 군정보국 대령 스크리팔
 
2018 34일 오후 415분 경 영국의 소도시 솔즈베리의 몰팅스 쇼핑센터 앞 벤치에서 노인 1명과 젊은 여성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신고를 받고 즉각 출동한 경찰과 구급요원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들은 이미 혼수상태였다. 이들은 세르게이 스크리팔(66전 러시아 군(軍) 정보총국(GRU) 대령과 그의 딸 율리아(33)였다.
 
수사 결과 이들 부녀는 옛 소련이 개발한 군사용 신경작용제인 노비촉(Novichok)이란 독극물에 중독된 것으로 밝혀졌다. 노비촉은 2017년 말레이시아 국제공항에서 독살당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에게 사용된 VX보다 10배나 독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독극물이다
 
스크리팔의 집 현관문 손잡이에서 끈적끈적한 물질이 발견되었는데 바로 노비촉이었다. 그의 자동차와 식사를 한 레스토랑 등 여러 장소에서도 노비촉의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농도는 낮았다. 이들 부녀는 영국이 비밀리에 개발한 노비촉의 해독제를 맞고 25일 만에 깨어났고 518일에 퇴원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경찰관은 병원 치료 중 사망했다.
 
스크리팔은 누구인가. 그는 1951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오조르스크 마을에서 자랐다. 1972년 즈다노프 군사공병 학교와 모스크바 군사공병학교를 마치고 소련군 공수부대에서 복무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역량을 인정받아 소련군 정보기관인 GRU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1990년 몰타 대사관, 1994년 스페인 마드리드 대사관에 GRU 요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1996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GRU 본부에서 인사국의 부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1999년 건강이 악화되어 은퇴할 때까지 대령 계급을 유지했다.
 
스크리팔은 2004 12월 영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국내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에 의하면 그는 1995년 스페인에서 근무할 때 영국 비밀정보국(MI6)에 포섭되어 ‘포스위드’라는 코드명을 받았다. 수사 결과 그는 수차례 10만 달러를 받고 무려 300여 명의 러시아 정보요원의 명단과 기밀을 넘겨 반역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은퇴 후에도 러시아 외무부 등에 근무하며 간첩 활동을 한 것 또한 밝혀졌다. 모스크바 군사법원은 2006년 그에게 간첩 행위를 통한 반역죄 13년 형을 선고했다.
 
2010 7월 수감 중이었던 스크리팔은 기쁜 소식을 접했다. 미국에 수감 중인 러시아 스파이 10명과 러시아에 수감 중인 스파이 4명을 맞교환하기로 합의했으며 그가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영국 정부가 스크리팔을 명단에 포함시킬 것을 미국에 강력하게 요구하여 미국이 수락했는데, 이는 영국이나 미국 정부가 그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장면이다. 본지 스파이 세계 2(2024.1.16.)에 소개된 러시아 미녀 스파이 애나 채프먼도 이때 송환되었다
 
2010 79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항에서 스파이 교환이 성사되었고 미국은 스크리팔의 영국 망명을 허용하여 스크리팔은 솔즈베리로 이사해 살았다. 이후 그는 영국과 미국 등 정보기관에 러시아 관련 정보를 계속해서 제공했는데 그러다가 독극물 테러를 당한 것이다.
 
영국 정부는 스크리팔에 대한 독극물 암살 시도를 러시아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외교적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그해 314일 영국은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외교적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정해 추방했다. 그러자 러시아도 영국 외교관 23명을 기피 인물로 지정해 맞추방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14개국 등 15개국이 동시에 러시아 외교관 추방을 발표했다. 이후 러시아와 서방국의 외교관 추방 조치는 지속되어 서방국에서만 153명의 러시아 외교관이 추방되는 등 외교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 영국이 공개한 스크리팔 노비촉 독살 작전을 수행한 러시아 군정보총국(GRU) 소속의 특수 요원인 알렉산더 페트로프(39)와 루슬란 보쉬로프(40). 필자 제공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의 용의자를 추적하여 2018 9월 러시아인 2명의 신상과 동선을 공개했다. 이들은 알렉산더 페트로프(39)와 루슬란 보쉬로프(40) GRU 소속의 특수요원이다. 이들은 31일 러시아 국적기인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영국 개트윅 공항에 도착하여 런던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인 32일 오후 3시 워털루역에서 기차를 타고 솔즈베리로 가서 2시간여 동안 동네를 둘러보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범행 당일인 34일에는 오전 1148분 솔즈베리역에 도착하여 스크리팔이 거주하는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오후 150분께 런던으로 돌아갔다. 이 장면들이 모두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
 
영국 수사당국은 이들이 스크리팔의 자택 현관문 손잡이에 노비촉을 분사했다고 보았다. 이들은 이날 오후 2230분 히드로공항을 통해 아에로플로트 항공편을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영국에 입국해서 작전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귀환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60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은 성공적 작전이었다. 2018 9월 영국은 이들 2명을 살인 음모·살인 미수·노비촉 신경가스 사용 등의 혐의로 결석 재판으로 기소했다.
 
 
▲ 노비촉 테러에서 살아난 스크리팔 전 러시아 군정보총국(GRU) 대령과 그의 딸 율리아. 필자 제공
 
 
영국에서 완치된 스크리팔 부녀는 안전을 고려해 미국으로 이송되었다. 율리아는 2010년 이후 몇 년 동안 솔즈베리에서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살았지만 러시아를 못잊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아버지가 망명 중인 상황임에도  러시아에 드나들 수 있었다. 올해 74세인 스크리팔은 아직 생존해 있다.
 
 
이후에도 러시아 정보요원에 의한 독극물 암살 사건은 지속되었다. 2006년 런던에서 독살당한 알렉산더 리트비넨코 전직 러시아 간첩은 호텔에서 폴로늄210이 섞인 홍차를 마시고 사망했다. 2020 8월에는 러시아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노비촉에 중독되어 중태에 빠졌다가 소생한 사건 등이 있다
 
스파이의 세계에서 암살 작전은 기본이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독극물 테러도 진화하고 있다.
 
유동열 2025-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