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경재

[평양에서 왔습니다] <31>~<35>

서석천 2025. 4. 10. 04:31

[평양에서 왔습니다] <31>
초대소서 ‘밀봉교육’… 격리된 채 공작원으로 조련
 
 
절친이던 명수와의 이별
 
1985 531,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들어간 초대소(招待所)는 평양 중구역 소재 중구 1호 초대소(일종의 안전가옥·safe house)였는데, 평양시 중심부에 있는 평양 제1백화점 건너편 아파트 2층에 있는 살림집을 그대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 중구 1호 초대소에서 1주일 동안 체류했다. 이 초대소는 공작원으로 소환되기 전에 나와 명수를 밤에 승용차에 태워 시내를 몇 바퀴 돌다가 데려왔던, 그래서 간부들과 최종 면접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 후 1990 5월 조장 권중현과 1차로 남파되기 전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모셔다가 같이 생활하기도 한 초대소다.
 
대학을 졸업하고 명수와 함께 중구 1호 초대소에서 생활한 지 사나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나와 명수는 인사 담당 지도원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모란봉 기슭에 자리 잡은 3호 청사 정문 앞 면회실로 가서 당시 중앙당 연락부(현 문화교류국) 1부부장 이정용을 각각 개별적으로 만나 면접을 진행했다.
 
그는 내게 대학 재학 기간의 생활과 학과 성적·훈련 결과 등을 간단히 물어보고 앞으로 남조선혁명과 조국 통일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할 각오가 되어 있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든지 맡겨 주신다면 얼마든지 수행할 결심이 되어 있다고 대답하자 만족해 하며 같이 손잡고 남조선혁명을 잘해 보자고 격려한 뒤 나를 돌려보냈다. 이때의 면접은 대학에서 그동안의 학과 성적과 훈련 결과·생활 태도 등에 관한 자료를 모두 넘겨받아 이미 부서 배치를 끝낸 상태에서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일종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나흘이 지난 66일 오전, 나와 명수가 있는 중구 1호 초대소 밑에 벤츠 승용차가 와서 멈추더니 지도원을 대신해 운전기사가 초대소로 올라왔다. 그는 나에게 짐을 챙겨 아래로 내려오라는 담당지도원의 지시를 전달했다. 당시 나를 담당한 지도원이 초대소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나와 같이 있던 명수가 다른 과 소속 공작원으로 임명받은 상황에서 소속이 다른 지도원과 공작원이 상호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 생활 4년 동안 동고동락을 해 오면서 무척이나 정이 많이 들었던 친구 명수와 손을 꼭 잡고 나오는 눈물을 꾹 참고 악수를 한 다음 짐을 들고 아파트 밑으로 내려갔다. 이때 명수와 헤어진 이후 나는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명수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988년 관절염이 심해 공작원을 그만두고 제대했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당시 내가 들고 내려온 짐이라야 대학에서 입었던 군복 1별과 내의·세면도구 등을 넣은 군용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대남 공작원, 아니 인간병기를 제조해 내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일반인들은 존재 자체도 알지 말아야 하고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이 대학에서 공작원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나와 명수는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도 북한 최고의 대학에 다닌다는 자부심과 영광을 안고 숱한 시간을 함께 땀과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이겨 내 왔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서로 기억할 수 있는 대학 시절의 내 친구, 그의 본명은 한명식이었다. 철저하게 바깥세상과 격리된 채 몇 년을 살아오면서 심지어 어느 것 하나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나와 명식이에게 그렇게 급작스러운 이별이 닥쳐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와 명식이가 마주해야 할 또 다른 관문, 밀봉교육과 적구화(한국인화·일본인화) 교육이라는 단절의 시간을 알지 못한 채 나는 명식이(명수)와 헤어졌다.
 
 
▲ 평양을 방문한 일본 기자들이 2006년 7월5일 김영남 씨와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 씨가 결혼식을 올리고 머물렀던 평양 순안공항 인근 대양리 초대소를 방문해 취재했다. 조선신보=연합뉴스
 
 
대남공작과에 배치되다
 
운전기사의 호출을 받고 중구 1호 초대소에서 내려와 나를 찾아온 지도원에게 인사하자 그는 앞으로 나를 담당하게 된 최 지도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서로 도와서 잘해 보자’고 격려한 다음 초대소에 가서 이야기하자며 나를 승용차에 태웠다. 나를 태운 승용차는 평양 시내를 벗어나 1시간 정도 달려 평양시 순안구역에 위치한 초대소에 도착했다. 물론 그때는 그 초대소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
 
초대소에 도착하자 최 지도원은 4년 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겠다며, 앞으로 사용할 가명을 다시 짓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철호라는 이름이 어떠냐고 의향을 물어 내가 괜찮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앞으로는 대학에서 원래 사용하던 가명 박승국 대신 이철호라는 가명을 사용하자고 했다. 그런 다음 앞으로 초대소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해 주겠다며 점심 식사를 함께 한 후 초대소를 떠났다.
 
이때부터 초대소에서 대남 공작원으로서의 본격적인 내 삶이 시작되었다. 그 누구도 없이 단독으로.
 
그 후부터 나는 3개월 동안 오롯이 혼자 생활해야 했다. 한창 피가 펄펄 끓는 20대의 나이에 4년 동안 떠들썩한 집단 속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혼자 생활하려고 하니 그때는 왜 그렇게 답답하고 힘들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몸서리가 쳐진다.
 
물론 그 후에도 초대소 생활을 혼자서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초기에 혼자 생활했던 첫 3개월 기간에는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다. 어떤 때는 TV를 보다가 웃기는 장면이 나오면 혼자 웃다가 문득 옆을 둘러보고는 혼자라는 것을 느끼고 내가 과연 살아 있는 것이 맞긴 한가 싶어서 어이없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최 지도원이 돌아간 다음 나는 초대소 요리사와 접대원으로 일하는 아주머니들을 통해 최 지도원이 중앙당 연락부 1과 지도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내가 중앙당 연락부 1과가 남한에 직접 공작원을 침투시켜 대남공작을 하는 부서라는 것, 그래서 결국 나도 대남공작 전담과인 1과에 배치받았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소속된 부서를 담당 지도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 요리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눈치껏 알아낸 것이다.
 
아울러 내가 처음부터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었기에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에는 직접 남한에 침투해 대남 공작을 하는 부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해외공작과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시 중앙당 연락부에는 1과와 2과가 직접 침투에 의한 대남 공작을 전담하고 있었고, 3과는 일본 담당 공작을, 4과는 중국 및 동남아 지역을 대상으로 공작을 하는 부서였다. 5과는 공작원들의 사상교육을 담당했고 6과는 교육을, 그리고 7과는 유럽 및 미주 지역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초대소 밀봉교육의 진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혼자 생활하게 된 초대소는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곳일 뿐만 아니라 공작원들끼리의 접촉도 금지되었다. 그래서 밀봉교육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다. 초대소는 공작원들이 상시 체류하면서 각종 훈련도 받고 사상교육도 받는 숙소 겸 업무 장소로 일종의 안가(安家)와 같은 곳이다. 평양 시내 중심과 외곽의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각 도청 소재지에도 도당(道黨)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초대소가 있다.
 
초대소는 평양 시내 또는 외곽지역의 1층 단독주택이나 시내 중심에 있는 아파트 1·2가구를 개조해 사용하는 일반초대소와, 2·3층으로 된 한옥 또는 서양식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1개 층을 통째로 초대소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규모가 큰 초대소를 특별초대소 또는 특각이라고 한다.
 
일반초대소는 보통 신입 공작원이나 교육 및 훈련을 받는 공작원들이 사용하며, 특별초대소는 남한 또는 해외에 침투하기 위해 준비하거나 임무 수행 후 복귀한 공작원 등 급수가 높은 공작원들이 주로 사용한다.
 
초대소는 대부분 침실과 학습실(서재)·거실과 화장실·주방 및 요리사 숙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초대소가 일반초대소에 비해 방도 많고 규모도 크며 탁구대·샌드백 등이 비치된 운동 공간 및 시설 등이 잘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특별초대소에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극장이 있기도 하다.
 
보통 일반초대소에는 요리사 1명이 고정적으로 생활하면서 그곳에 체류하는 공작원들과 초대소를 방문하는 담당 간부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고 초대소 관리도 담당한다. 특별초대소에는 규모에 따라 요리사 2·3명과 서빙을 전담하는 접대원이 있다, 이러한 특별초대소는 보통 대남 및 해외 침투를 위해 준비하거나 임무 수행 후 복귀한 공작원들이 체류하기 때문에 고위 간부들이 자주 방문하는데, 이런 이유로 특별초대소에는 봉사 인원이 많다.
 
초대소 요리사는 보통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성(과부)들이며, 접대원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미모의 아가씨들이 대부분이다. 북한에서 중앙당 5과에 뽑혀 가는 아가씨들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미모의 젊은 여성들이 접대원으로 발탁되어 일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대소 요리사들이 중앙당 간부의 후처로 들어가는 일도 많으며, 접대원 아가씨들은 공작원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북한에서 공작원 생활을 할 당시 중앙당 재정경리부 초대과 담당 부부장이 부인과 사별하자 거의 20년쯤 나이 차이가 나는 미모의 초대소 요리사와 재혼하기도 했다. 아마도 초대소가 중앙당 재정경리부 초대과 관리 대상이고, 요리사와 접대원 등 초대소 관계자들 역시 재정경리부 초대과 소속이기 때문에 부부장의 재혼이 더 쉬웠을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경우이기 때문에 별일이 아니지만 초대소는 누군가에 의해 24시간 감시되는 곳도 아니고, 특히 일반초대소는 대부분 산속에 있고 보안 유지를 위해 일정하게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골짜기마다 한 동씩 따로 지어놓은 관계로 불륜 사고도 자주 일어나곤 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집에서 엄마가 해 주시는 요리를 먹을 때나 여행지에서 여러 다양한 요리를 먹을 때마다 아버지가 북한 초대소에 계실 때 이미 그 음식들을 드셔 본 경험이 있으셔서 놀랄 때가 많았어요. 저나 동생이 잘 알지 못하는 이름의 외국 요리들을 말씀하실 땐 정말 놀랐거든요. 그걸 북한에서 드셔 보셨단 말이야? 그런 생각에 말이죠.
 
대부분은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을 먼저 떠올려 먹을거리가 많이 없어 못 먹고 못산다는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북한의 일반인들은 결코 알 수 없을, 초대소에서 요리사들이 직접 해 준 요리 중에서 가장 맛있게 드셨던 건 어떤 음식이었나요?
 
아버지 : 글쎄, 초대소 생활을 해 본 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특별히 맛있었던 음식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네. 일단 북한의 일반 주민이 식량난으로 굶어 죽더라도 공작원들은 초대소에서 최고급 요리를 대접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야.
 
초대소에서 요리사들이 해 주는 음식은 보통 한국의 특급호텔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급 한정식 요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러니까 채소로 만드는 요리는 물론 육류와 해산물로 만드는 요리까지 정말 다양하지. 한식 요리가 기본인데, 스키야키와 같은 일본요리와 중식·양식 등의 요리도 만들어 주었어.
 
그리고 각 초대소 요리사마다 잘 만드는 음식이 따로 있어 초대소를 이동할 때마다 특색 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어떤 초대소 요리사는 평양냉면을 정말 맛있게 했는데, 그런 이유로 여름이면 간부들이 일부러 냉면을 맛있게 만드는 초대소로 점심 먹으러 올 때도 있었어. 그리고 어떤 요리사는 돼지갈비구이를 정말 맛있게 했고, 어떤 요리사는 비빔밥과 해삼탕을, 어떤 요리사는 생선구이와 밑반찬을 맛있게 만들었어.
 
그중에서 지금도 연세 많은 요리사가 만들어 줬던 돼지갈비구이가 정말 맛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양념한 돼지갈비에 찹쌀밥을 감싸 어떻게 구워냈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돼지갈비구이가 부드럽고 담백해서 밥반찬은 물론 안주로도 제격이었던 것 같아.
 
김동식 2025-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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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32>
남의 집 공짜 숙식하기… 기상천외한 反합법 훈련
 
 
공작원 기초교육 시작
 
초대소에 입소한 지 2일가량 지나 다시 초대소로 찾아온 최 지도원은 용돈(생활비)과 함께 노트와 만년필 등 필기도구를 주더니 공작원 전용 상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공작원 전용 상점에 도착해 받은 용돈으로 양말과 속옷·세면도구 등 초대소에서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과 함께 양복 기지(원단)를 구매하도록 했다
 
그다음 양복 디자이너를 불러 내 신체 사이즈를 재도록 하여 양복을 맞추게 했다. 당시만 해도 내 옷이라고 해 봐야 대학을 졸업하면서 입고 나온 군복 한 벌이 전부여서 그때까지도 나는 그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생활하고 있었다.
 
초대소로 돌아온 최 지도원은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자고 한 후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공작원 기초교육이 시작되었다.
 
다른 대남공작부서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중앙당 연락부에서의 공작원 기초교육은 담당 과장의 지도하에 3~4개월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나도 3개월에 걸쳐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새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양성반을 졸업한 박철만과 함께 공작조가 재편성되면서 그를 기준으로 다시 같은 교육을 반복하다 보니 3개월간 다시 교육을 받게 되어 내가 공작원 기초교육을 마치는 데는 6개월 이상이 걸렸다.
 
공작원 기초교육은 사상이론 교육과 공작 실무교육, 각종 훈련 등 크게 3개 분야로 나누어 진행한다.
 
사상이론 교육은 김일성·김정일 혁명 역사와 주체사상 그리고 남한혁명이론과 대남 전략 전술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담당 지도원이나 과장·부부장 등 간부들이 초대소를 방문하여 개별 강의를 하고 토론하는 방법으로 진행한다.
 
공작 실무교육은 지하당(간첩망) 구축 방법과 이론, 초대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비밀 규율(보안 규칙) 등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훈련은 이 내용을 바탕으로 실제 종합 판정 훈련을 진행한 후 그 결과를 놓고 평가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처음 본 아주머니 공작원
 
초대소 생활을 시작한 지 1개월가량 지났을 때였다. 토요일이어서 담당 지도원들이 주말 정치 행사 참석을 위해 귀가하고 나 혼자 여느 때처럼 초대소에서 점심식사를 끝낸 후 차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있는 초대소 안으로 30대 중반의 깔끔하게 생긴 아주머니 한 명이 불쑥 들어왔다. 그러면서 2호 초대소에 있는 공작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내가 있던 1호 초대소와 2호 초대소는 직선거리로 150m가량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요리사들이 생활하면서 공작원 식당으로 사용하는 건물이 있어 1호와 2호 초대소 공작원들은 같은 식당에서 식사했다. 물론 1·2호의 공작원들은 서로 마주치거나 얼굴을 보면 안 되기 때문에 식당 건물 양쪽 끝에 마련된 방에서 각각 식사하도록 했다.
 
2호 초대소에 여자 공작원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요리사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초대소 생활 규정과 원칙을 어기고 나를 찾아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여성 공작원은 토요일이라 초대소에 중앙당 간부가 한 명도 없는 기회를 틈타 그렇게 무단 행동을 한 것이다. 갑자기 닥친 일에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 그는 앞으로 서로 알고 지내자며 어디서 들었는지 선생님은 전투원양성반 졸업생이니 잘할 것 아니냐그러니까 내가 있는 초대소에 와서 격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 초대소로 돌아갔다.
 
나는 요리사를 통해 그가 당시 중국 및 동남아시아 지역 공작을 담당했던 노동당 연락부 4과 소속 공작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이며 평양의학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일했다는 것, 결혼해서 아들 하나 낳고 살다가 남편과 사별한 후 공작원으로 선발되었고, 1년제 공작원 교육과정을 졸업했다는 것 등 비교적 자세히 그의 신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 북한 국가관광총국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조선관광’이 2019년 5월10일 기차관광 상품을 소개했다. 연합뉴스
 
그 후 나는 중앙당 간부들이 자리를 비우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가 있는 초대소에 가서 격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도 내가 있는 초대소에 놀러 오는 등 2·3회 정도 비밀 왕래를 하다가 그가 다른 초대소로 옮겨 가면서 더 이상의 왕래는 없었다.
 
당시 그는 나를 볼 때마다 마치 친동생처럼 상당히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때 내가 20대 초반이었지만 사실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가 정말 심심하고 답답해서 찾아온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본인이 공작원으로 소환된 것은 이미 단독으로 해외에 나가 활동하고 있는 남자 공작원과 진짜 부부처럼 행세하면서 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가()부부로 위장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 후에 초대소 요리사로부터 그가 예상대로 해외에 파견되어 가짜 부부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종합 판정 훈련
 
대학을 졸업한 지 1개월이 채 되지 않은 6월 하순, 나는 당시 중앙당 연락부에서 공작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종합 판정 훈련에 참가했다. 훈련 지역은 함경북도 청진시와 나남·어랑, 평안남도 평성시 등이었으며 훈련 내용은 비합법 훈련과 반합법 훈련, 100리 강행군과 사격, 비트 파기와 장애물극복·격술 및 격파 등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훈련에 들어가기 전 당시 나를 담당했던 김 지도원이 위와 같은 훈련 내용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다.
 
그런데 종합 판정 훈련 종목 중에 내가 배운 적 없는 한국의 국민체조가 들어 있었다. 따라서 훈련 담당 지도원을 불러 별도로 남한의 국민체조를 배워서 익혔다.
 
구체적인 일정을 보면, 우선 열차로 함경북도 청진까지 가서 청진연락소 전투원들의 안내를 받아 청진 앞바다에서 잠수로 해상 침투를 한다. 육지에 상륙한 다음에는 철책을 극복하고 전투원들로부터 이탈한다. 그 후 3일 동안 단독으로 비합법 행군과 비트 숙영, 무인포스트 매몰 및 발굴과 산악 접선 등을 하면서 마지막 목적지인 청진시 주변 산까지 이동한 후 그곳에 비합법 장비를 매몰한 다음 하산한다.
 
하산 이후에는 반합법 행동으로 전환해 청진 시내로 들어가며 거기서 가두(街頭) 접선과 미행 극복, 검문검색 통과, 증명서와 돈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숙식 해결 등 반합법 훈련을 진행한다. 그 후 다시 비합법 행동으로 넘어가 3일 동안 극기 훈련을 병행하며 산악행군으로 나남까지 이동해 청진 시내에서 했던 것과 같은 내용의 훈련을 반복한다.
 
동시에 증명서를 휴대하지 않은 상태로 열차 승차권을 구입한 후 나남역 개찰구를 통과해 승차한 후 열차 내에서 검문을 극복하면서 어랑역까지 간다. 다음 어랑역 집찰구를 빠져나와 시내에서 또다시 청진과 나남에서 한 것과 같은 훈련을 진행한다.
 
반합법 훈련 마지막 과정은 돈과 증명서 없이 어랑-평성행 열차승차권을 구입해 개찰구를 통과한 후 열차를 타고 평성역에 도착, 그대로 집찰구를 통과해 나오는 것이었다.
 
그다음 평성시에서 초대소가 있는 평양 순안까지 야간 100(40km)를 강행군(구보)으로 이동해 야간 사격을 한 뒤 비트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다음 날 아침까지 잠을 잔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오전 비트에서 나와 격술과 장애물 극복 등 육체적 능력을 평가받는다. 육체적 능력 평가는 격술 품새와 벽돌 격파, 1:7 연결 타격, 국민체조, 50m 수평 밧줄 타기, 3층 벽돌 건물 오르기와 같은 장애물 극복 훈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모든 종목을 10여 일 동안에 걸쳐 해내야 한다.
 
나는 여러 훈련 종목 가운데 육체적인 훈련은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증명서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열차 승차권을 구입해 개찰구와 집찰구를 통과하고 열차 내에서 검문을 극복하는 반합법 훈련 종목이 가장 걱정스러웠다. 만약 북한이 남한처럼 주민등록증 검열 없이도 열차승차권 구입과 개찰을 할 수 있고 열차 내에서도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으며 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여관에 들어가 잘 수 있는 여건이었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열차 승차권을 구입할 때는 물론 개찰구를 통과할 때도 반드시 증명서와 통행증을 확인한 다음 신분과 출장 목적이 확인되어야 위의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증명서 없이 열차 승차권을 구입하거나 남의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은 웬만큼 가까운 관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러한 반합법 훈련 종목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짧은 시간 내에 끈끈한 대인관계를 형성해야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규정대로 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해 육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숙련되어 있었지만, 사회 물정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반합법 훈련 종목들이 당연히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약간이나마 실정을 아는 곳은 연락소밖에 없었으므로 일단 내가 대학 시절에 입던 군복을 가져갔다가 반합법 훈련을 할 때 군복을 입고 전투원처럼 행세하기로 결심하고 훈련에 임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상상할 수 없는 아버지의 이전 삶은, 어떤 경우 저와 동생에게 나침반 같은 역할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특히나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얼마 지나면 군에 입대하게 될 동생에게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저와 동생이 젊은 시절에 꼭 해 봤으면 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아버지 : 이미 너희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군복무는 피하지 말고 꼭 하라고 이야기했고 너는 이미 군복무를 마쳤지.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군복무가 꼭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의무라서 그런 것이 아니야.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는데, 국민의 의무를 이행한다는 차원에서도 그렇고 젊었을 때 그 정도의 고생은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는 물론 스스로 선택해서 한 건 아니지만, 15년간 남파공작원 생활을 하면서 정말 죽을 고생을 다 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고생한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
 
요즘은 군복무 기간이 18개월밖에 되지 않는데, 18개월이 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80년의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을 때 18개월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해. 그렇지만 군복무 18개월이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많은 도움을 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너희들이 젊은 시절에 꼭 해 봤으면 하는 다른 하나는 내가 해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음껏 사랑도 해 보고 연애도 해 봤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내가 말하는 사랑이나 연애는 남녀 간의 아름답고 건전한 연애이고 사랑을 얘기하는 거야.
 
김동식 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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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33>
100리 강행군 출발지 잘못 찾아갔다가 낭패 
 
성공적인 종합판정 훈련
 
 
나는 김 지도원과 평양역에서 열차를 타고 청진시에 도착해 그날 밤으로 청진연락소 전투원들과 함께 훈련 선박을 타고 청진 앞바다에 나가 잠수복을 입고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북한 해안경비대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지역과 철책을 통과해 육지에 상륙했다. 당시 나를 안내했던 전투원들은 대학 1~2년 선배들이었다.
 
상륙 후 일정한 지점에서 전투원들과 헤어진 나는 그때부터 단독으로 비합법 훈련에 돌입했다. 그런데 비가 많이 내리면서 짙은 안개까지 낀 상태여서 밤에만 이동해야 했던 나로서는 시야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행군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게다가 숙영 장소에 도착해 비트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잘 때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비트 안에까지 물이 들어와 거의 물속에서 잠을 자야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조건에서, 1000m가 넘는 산악 지역에서 그것도 혼자서 사정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행군하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비에 젖은 땅을 파고 비트 안에 들어가 발목까지 물에 잠긴 채 새우잠을 자면서는 꼭 이렇게까지 고생을 해 가면서 혹독한 훈련에 임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심각하게 해 보았다.
 
해안 상륙으로부터 3일 동안 진행된 비합법 행군과 비트 숙영·무인 포스트 매몰과 발굴·장비 매몰 및 하산 등의 과정은 많은 비와 안개로 인해 고생은 좀 했지만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혼자서 판단하고 결심한 후 오롯이 혼자서 모든 훈련을 해내야 했기 때문에 그전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고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아마도 대학 시절에는 어떤 훈련을 하든지 2~3명이 팀을 이루어 서로 의지하고 도울 수 있어 외롭거나 힘들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산에 장비를 매몰하고 청진 시내로 내려온 후 훈련 담당 지도원과 접선하고, 미행을 극복할 때는 사복과 연락소 군복을 바꿔 입어 가며 미행자들을 따돌렸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도 전투원들이 입는 군복을 입고 증명서를 연락소에 그냥 두고 나와서 없다며 한 번만 봐줄 것을 사정하는 식으로 넘겼다. 증명서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 자는 문제는 평양-청진행 열차 안에서 사귄 아주머니의 집에 들어가 자는 방법으로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었다또한 극기 훈련을 하며 행군할 때는 훈련 시작 전에 초대소에서 이미 약초와 산나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갔기 때문에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다.
 
청진 나남-함북 어랑까지 가는 열차 승차권은 나남역에 역무원으로 근무하는 아가씨를 통해 구입했다. 당시 나는 내가 원래 어랑 사람인데지금은 평양 보통강변에 냉면으로 유명한 청류관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오랜만에 고향에 왔다가 친구를 만나려고 여기 나남까지 차를 타고 오면서 미처 증명서를 못 가져와서 그러니 어랑읍까지 가는 열차표를 구입해 주면 좋겠다나중에 평양에 오면 잘 대접해 주겠다며 거짓말로 그를 설득해 겨우 승차권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함북 어랑-평남 평성시까지 가는 열차 승차권은 군인들이 출장 시 사용하는 후불권을 얻어 그것으로 열차 승차권을 구입해 훈련 전에 걱정했던 것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후불권은 군인들이 출장을 다닐 때 돈 대신 사용하는 일종의 출장증이나 수표와 같은 것이다.
 
마지막에 한 실수
 
그런데 훈련 종반에 접어들어 문제가 발생했다. 한 번도 단속되거나 노출되지 않고 무사히 평안남도 평성역에 도착해 집찰구를 빠져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훈련 담당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던 100리 강행군 출발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훈련 출발 전에 담당 지도원이 나에게 100리 강행군 출발 지점을 분명 오리고개로 알려 주었으나 내가 동북리고 오리고개로 착각하고 그곳으로 간 것이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5년 4월4일 특수 작전 부대 훈련 기지를 방문하고 종합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5일 보도했다. 작전 훈련 중인 특수작전 부대원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원래 오리고개는 평안남도 평성에서 평원으로 가는 도로에 있는 고개다. 그런데 나는 대학 졸업 후 교직원 전용 아파트 건설 노동을 할 때 골재 채취를 위해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보았던 평남 평성-평양 용성 구역 사이에 있는 동북리고개 오리고개로 착각하고 있었다. 평성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도로에 있는 고개가 동북리 고개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평성에서 훈련이 끝나면 당연히 평양 시내를 거쳐서 초대소가 있는 순안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판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오리고개가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훈련에 임했고, 당연히 평성역에 도착해서 개찰구를 빠져나와 곧바로 동북리 고개로 갔던 것이다. 내가 잘못 알고 찾아간 곳이기에 아무리 기다려도 담당 지도원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요즘처럼 휴대폰이라도 있었으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변변한 연락 수단 하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사고 아닌 사고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하기로 되어 있는 100리 강행군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걱정거리였다그때까지도 내가 동북리고개를 오리고개로 알고 잘못 찾아갔다는 생각은 못 하고, 100리 강행군을 예정대로 하자면 아무래도 내가 주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판단하에 연락 수단이 있는 곳까지 일단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곳이나 가서 내 신분을 밝히고 전화를 사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전화를 할 수 있는 초대소까지 가기로 하고 동북리고개에서 버스 정류소까지 걸어가 평양 용성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대학 졸업 후 며칠 동안 묵은 적이 있는 평양시 중구 1호 초대소를 찾아가 요리사에게 전화로 담당과에 내 위치를 알려 주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담당과 간부들이 승용차를 타고 와 100리 강행군 시작 지점인 오리고개까지 나를 직접 데려다줌으로써 다행히 훈련 일정을 계획대로 마칠 수 있었다. 당시 담당 지도원은 나의 상상력과 행동이 너무도 엉뚱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100리 강행군을 4시간 만에 끝내고 비트 숙영과 야간 사격·태권도와 격파·장애물 극복과 국민체조 등 여러 종목의 훈련도 성공적으로 잘 마쳤다훈련이 끝난 후 연락부 제1부부장과 담당 과장·지도원 등이 참석하여 훈련 결과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 나는 마지막 100리 강행군 출발 지점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간 것에 대해서는 지적받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서에서 3위권 내에 들어 종합판정 훈련을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가 후에도 계속해서 초대소에서 사상이론 교육과 대남 공작 관련 실무교육을 받았고,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까지는 담당 지도원과 함께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석암저수지에 가서 텐트를 치고 약 10일 동안 수영 및 잠수 훈련을 했다.
 
공작조의 조원이 되다
 
종합판정 훈련을 마무리하고 1개월 정도 지난 1985 9월 중순 어느 날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양성반을 졸업한 박철만이 나와 공작조를 편성하면서 그가 조장으로 임명되었다.
 
박철만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당시 20대 후반의 나이였다. 그는 7년제 대학인 사리원지질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2년제 공작원양성반을 졸업했다.
공작원으로 소환된 시점을 놓고 보면 나보다 2년 후배였고, 졸업도 6개월 정도 늦게 한 데다 노동당원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이만 빼고 모든 면에 있어서 나보다 후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락부에서는 나이가 많은 박철만을 공작조 조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박철만과 같은 공작조를 편성한 첫날 나는 그에 대해 실망했다나와 박철만이 공작조를 편성한 첫날은 마침 훈련이 진행되는 수요일이었고, 그날 저녁에는 100리 강행군을 했다. 나는 무게가 15kg 되는 모래 배낭을 메고 뛰었고 그는 모래 배낭 없이 맨몸으로 뛰게 되었다. 아무리 처음이라도 조장이고 윗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자기보다 어린 조원이 모래 배낭을 지고 100리를 뛰는 걸 보면서 빈말로라도 힘들 텐데 내가 좀 도와줄까?”라는 정도의 말은 건넬 법도 했지만 100리를 뛰는 동안 입을 다문 상태로 훈련을 마무리했다. 첫 만남부터 인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감정마저도 없는 차가운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기가 남조선혁명과 조국 통일을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며 손수건에 혈서를 써서 맹세하고 그것을 늘 품고 다닌다고 했다그러나 남조선혁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스스로 혈서를 써서 품고 다닌다고 하는 사람이 생명의 위협이 거의 없는 해외 공작과가 아닌, 언제 당장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대남 공작과에 배치된 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잦은 불평을 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박철만은 원래 유럽 및 미주 지역 공작을 담당했던 연락부 7과에서 직접 공작원으로 선발했고, 그래서 공작원 교육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7과에서 데려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졸업을 앞둔 시점에 연락부 7과 과장에게 문제가 생겨 박철만의 선발 계획이 무산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곳으로 알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이나 문화 등을 100% 차단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김정은 독재정권이 세습을 유지하면서 주민들을 통제하려면 일반 주민들은 변화되고 발전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실상을 절대로 알면 안 되는 일이잖아요!?
 
아버지 :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북한 주민들은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된 곳에서 살고 있어. 북한 당국이 주민들을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하는 것은 외부 정보가 북한으로 들어가면 주민들이 김정은 세습 독재정권의 실체를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민들이 김정은 정권에 반대해 투쟁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오죽하면 중·고등학교 어린아이들을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감옥에 보내고, 심지어는 총살까지 하면서 외부 정보 유입을 막아 보려고 하고 있겠어? 이런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가 오직 김정은 정권 유지를 위해서 행해진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거지.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비롯해 외부 정보가 북한으로 암암리에 유입되고 있고 그로 인해 주민들의 의식이 점차 깨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이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 주민을 김정은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더 많은 외부 정보를 들여보내 그들을 의식화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김정은 세습 독재정권을 붕괴시키고 자유를 찾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
 
김동식 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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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34>
신참 조장 탓에 또다시 교육·훈련… 고생 ‘두 배’
 
 
좌천된 김정일의 동창생들
 
1980년대 초반 중앙당 간부들 중에는 김정일의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생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생이라는 점을 악용해 권세를 부리고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내용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그들을 엄벌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다른 동창생들까지 직위 해제시켜 중앙당에서 내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중앙당 연락부 7과 과장도 김정일의 대학 동창생 가운데 한 사람이어서 과장직에서 해임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교수로 좌천되었다. 연락부 7과장이 해임되자 공작조장 박철만도 원래 계획대로 유럽 및 미주 공작을 전담하던 당시의 연락부 7과로 가지 못하고 대남 직접 침투 공작과로 배치된 것이다. 그래서 불평불만이 많았다.
 
이처럼 처음부터 박철만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상태에서 박철만과의 공작조 생활이 시작되었다. 거기에다 하필 그의 교육프로그램에 맞춰 이미 받았던 교육과 훈련을 다시 받아야만 했던 나로서는 이래저래 손해가 막심했다.
 
상대방에게 어떤 첫인상을 주느냐가 대인관계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그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았음은 물론 대남공작과에 배치된 후부터 지속된 그의 불평은 같은 공작조로서 우리 둘 사이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 한 번의 종합판정 훈련
 
박철만과 공작조를 편성한 지 1개월쯤 되는 1985 10월 초 나는 조장 박철만과 함께 금강산 관광을 겸한 종합판정 훈련을 진행했다. 먼저 금강산 관광을 한 다음 강원도 원산과 문천·법동 일대에서 10일에 걸쳐 반합법 및 비합법 훈련을 하는 일정이었다.
 
나로서는 이미 6월에 종합판정 훈련을 받았고 한 해에 두 번씩이나 힘든 훈련을 해야 했으니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철만과 같은 공작조라서 어쩔 수 없었고 금강산 관광을 시켜 준다니 그런대로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박철만과 나, 훈련 담당 지도원은 열차를 타고 평양역을 출발해 원산역에 도착한 후 다시 승용차로 갈아타고 금강산으로 가서 관광부터 했다. 나는 그때 금강산이 처음이었다. 그나마 공작원을 했기 때문에 그때 다녀올 수 있었고 그로부터 2년 후 한 번 더 다녀왔다.
 
북한에서 금강산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 주민들은 금강산 관광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물론 금강산이 휴전선과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지역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 당국이 주민들이 관광이나 휴가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민들에겐 그런 곳에 놀러 다닐 만큼의 시간적인 여유도 없고, 교통수단 또한 낙후되어 있다.
 
아름다운 10월의 금강산, 그리고 특별대우
 
10월의 금강산은 참으로 아름답다.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황홀한 절경은 표현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도저히 몇 마디의 말로 다 형언하기가 힘들다.
 
내장산이나 설악산 등이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금강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붉게 물든 금강산의 단풍과 아름답고 신비한 절경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견줄 곳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남한에도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으니 필자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 2021년 10월28일 북한 대외선전 매체 메아리가 금강산 구천폭포의 가을 풍광을 전했다. 가을 단풍 사이로 폭포수가 흐르고 있다. 연합뉴스
 
 
공작원들이 금강산이나 백두산 등에 관광을 가면 특별대우를 해 준다. 일반 주민과 달리 그들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호텔을 이용한다. 금강산에 갔을 때도 원산 시내에 있는 송도호텔과 외금강에 있는 금강산호텔에 묵으면서 주로 외금강 일대를 돌아보고 금강산 온천에서 온천욕도 하면서 34일간을 즐겁게 보냈다.
 
북한에서는 당시 금강산의 3개 구역 가운데 외금강 일대와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일포가 있는 해금강의 일부 지역만 보여 주었다. 내금강 일대와 해금강의 대부분 지역은 군사기지와 휴전선 지역이라는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도 외금강 일대를 위주로 관광했다.
 
세상 만물의 모습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 놓았다는 만물상과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다는 천선대, 옥구슬처럼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고 하는 옥류동 계곡, 9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구룡연과 장쾌한 구룡폭포, 금강산에 내려왔던 8명의 선녀가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상팔담,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이 봉황새의 꼬리를 닮았다는 비봉 폭포 등 외금강 일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옛날 신라 화랑들이 하루만 쉬어 가려고 왔다가 경치가 너무도 빼어나게 아름다워 3일 동안 묵었다고 하여 삼일포라고 이름지었다는 삼일포 호수를 돌아본 다음 온정리에 있는 금강산 온천에서 온천욕도 했다.
 
사진도 마음대로 찍을 수 없는 공작원
 
당시 우리와 동행했던 훈련 담당 이 지도원은 원래 북한군 군관(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항공육전대(공수부대)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남한의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장을 달고 대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다가 당시 연락부에서 공작원들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 지도하던 6과 지도원으로 소환되었다. 지도원으로 임용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 지도원이었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은 물론 적지 않게 고생도 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사진 문제다. 그는 금강산 관광을 떠날 때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사진을 근사하게 찍어 잘 뽑아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물론 평소 공작원들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금강산에 갔다.
 
그런데 금강산에 도착하고 보니 카메라 필름이 컬러가 아닌 흑백이었고, 또 돌아와서는 30장 넘게 찍은 가운데서 고작 서너 장만 뽑아 주었다. 찍은 사진을 확실하게 책임지고 모두 뽑아 주겠다고 한 출발 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역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이유가 너무도 유치해서 실망이 컸다. 그는 필름을 현상하니 내가 안내원 아가씨와 같이 찍은 사진이 많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약혼식이나 결혼식 사진으로 생각할까 봐 뽑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은 사진을 보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며 사진을 찍어 준 중앙당 간부가 사진을 모두 뽑아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면서 그런 식으로 이상한 상상을 했다니 한심하고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진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공작원으로서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불가능했던 길고 긴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금강산 관광 가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는 지도원의 약속이 큰 기쁨이고 설레임이었다. 하지만 그의 설득력 부족한 언행들을 겪고 나서부터는 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지 않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금강산 관광을 마친 후 계획했던 대로 종합판정 훈련을 했다. 먼저 원산 시내에서 증명서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 숙식을 해결하고 열차 승차권을 구입하는 등 반(反)합법 훈련을 진행했다. 나는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원산이 고향인 친구의 집 주소를 알아 가지고 가서 그것을 이용해 훈련을 쉽게 끝낼 수 있었다.
 
그 후 원산과 문천의 산악 지역에서 행군과 숙영·무인 포스트 매몰 및 발굴·접선과 장비매몰 등 비합법 훈련을 계속해서 진행했는데,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것과는 별개로 공작조장인 박철만과 함께 훈련하니 혼자 할 때보다는 힘이 덜 들었다. 그때가 10월 중순이었고 야외에서 숙식하면서 훈련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조장이었던 박철만은 추위에 약해 더더욱 고생했다.
 
719종합훈련장에서의 격술 훈련
 
금강산 관광에 이어 종합판정 훈련을 마친 뒤 계속해서 사상이론 교육을 받으며 생활하던 나와 조장 박철만은 1985 12월에 초대소 지역에 새로 건설된 ‘719종합훈련장이라고 불리는 공작원 전용 체육관에 들어가 20일간 격술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격술은 태권도와 유도·호신술 등을 결합한 종합 무술이다.
 
‘719종합훈련장은 공작원들에게 격술 훈련뿐 아니라 자동차·오토바이 운전 연습도 동시에 시키기 위해 1980년대 초반에 지은 종합적인 훈련 시설로, 각종 헬스 기구와 사우나 시설 등을 갖춘 실내체육관과 투도(투검) 연습장이 있으며 여러 대의 운전 교육용 승용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이를 위한 차고도 있었다.
 
또한 기초적인 운전 연습을 위한 운동장이 있으며 강사와 공작원들이 훈련을 받으면서 묵을 수 있는 초대소 건물 등이 있다. 이 훈련장 역시 당시 연락부 교육 전담과인 7과에서 운영하고 있었으며 훈련 지도는 격술을 지도하는 강사와 운전 훈련 강사가 각각 담당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의 특이한 이력을 알게 되면,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저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사실 저는 아버지가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들과 크게 다르다고 느꼈던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끔 저와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며 저희가 혹시라도 받게 될 어떤 불이익이 걱정되어서 하신 말씀이었나요?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저희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 나가길 바라십니까?
 
아버지 내가 너희들에게 가끔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은, 네가 말한 대로 너희들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면서 나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어.
내가 30년간 한국에 살아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북한 출신들에게 폐쇄적이었고 불이익이 많은 것이 현실이야. 물론 그렇다고 특별히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탓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래서 너희들에게 가끔 미안하다고 했던 거야.
 
너희들은 한국에서 알게 모르게 북한 출신들에 대해 상당히 폐쇄적이고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해. 하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거나 자신감을 잃지 말고 대신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인 실력을 키우고 보다 현명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어.
 
김동식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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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35>
1984년 동해서 공작선 피격… 노동신문 ‘오리발’
 
 
격술 훈련 중도 포기한 공작조장
 
30대 중반의 격술 사범은 원래 사회안전부(경찰)에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1980년대 초 남한에서 사단장을 역임하다 캐나다로 망명해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한 최홍희가 처음 방북해서 태권도를 북한에 보급할 때 1기 교육생으로 입문해 훈련을 받고 태권도 5단의 단증을 받은 사범이었다. 그 후 1990년대 초에 강사직을 그만두고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했다.
 
자동차ㆍ오토바이 운전 강사는 40대 후반의 나이로 원래 내가 있던 국내공작과의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초 운전 연습 담당 강사로 임명되었다. 그 역시 1990년대 초에 강사직을 그만두고 해외공작과 공작원으로 임명되어 유럽에 나가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하며 공작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박철만은 당시 20일간 격술 훈련만 했다. 훈련은 이미 대학에서 배운 기술을 더욱 숙련하는 차원으로 유도와 호신술·낙법 및 단도 던지기(투검) 등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여기에 새로운 기술을 추가해서 배우며 ‘719종합훈련장 격술 사범이 만든 틀(품새)을 숙지했다. 마지막에는 담당 부부장과 과장·부과장·지도원 등 여러 간부가 참석한 가운데 격술 기본동작과 자유 대련·격파·투도 등을 해서 그 결과를 평가받았다.
 
사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 양성반을 졸업한 공작원들의 경우에는 대학 기간 중에 위에 언급한 것들을 다 배웠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배울 필요 없이 이미 배운 것을 복습하는 수준이다. 반면에 공작원 전문 교육과정을 졸업한 공작원들의 경우는 격술 교육 및 훈련 시간이 적어 격술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유도나 낙법·단도 던지기 같은 것은 아예 배우지 않아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박철만 역시 원래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데다 격술 훈련 시간마저 적었으니 그 수준이 매우 낮아 여러 가지 격술 동작과 기술을 배워야 했다. 그러던 중 조장 박철만이 훈련 마감일을 며칠 앞두고 포기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마지막 테스트를 며칠 앞두고 격술 강사와 자유 대련을 하던 중 강사의 평범한 돌려차기를 방어하지 못해 그대로 머리를 가격당하고 쓰러졌다. 이후 머리가 아프다면서 훈련을 포기해 버렸다. 결국 나 혼자 판정을 받았고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었다.
 
집중적인 격술 훈련이 끝나고 사상이론과 공작 실무교육을 받는 한편 무전 수신 연습도 했다. 수신 연습은 모스 부호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가져다 들으며 수신하는 방법으로 진행하는데, 1분에 최소한 80자 이상의 숫자를 수신해야 합격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수신 연습을 열심히 해 1분에 100자를 어렵지 않게 수신할 수 있었다. 사실 1분에 100자를 수신하면 1급 무전수의 실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자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노동신문의 의도적인 거짓말 청사포 사건의 전말
 
한편 금강산 관광을 겸한 종합판정 훈련이 끝난 그해 12월에 나는 북한이 노동신문을 통해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초대소 요리사의 말에 따르면 내가 있던 초대소와 가까운 옆 초대소의 2인 공작조가 1985 10월 중순에 남파 공작 임무를 받고 남한에 침투했다. 당시 나를 담당했던 최 지도원이 그 공작조도 담당했고, 그 공작원들 역시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초대소에 체류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요리사가 그들 모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리사를 통해 그들의 남파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공작조가 출발했다고 하는 그 시점으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노동신문을 보니 남한 해군이 동해상에서 북한 공작선을 격침시켰다고 보도한 데 대해 북한이 반박하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당시 그 기사를 보면서 노동신문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1996년 9월18일 새벽 강원특별자치도(당시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앞바다에 북한 간첩을 태우고 왔다가 좌초된 잠수정을 군인들이 경계 근무하는 가운데 헬기가 해상에서 수색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그때로부터 약 2년이 지난 1987년 말, 앞서 남파되었던 공작조가 복귀해 자신들의 대남 침투 및 활동 과정을 녹음한 테이프를 담당 지도원이 가져다 줘서 그것을 청취할 기회가 있었다. 녹음 테이프에는 그들이 1985년 가을 남한 해안에 상륙한 다음 전투원들이 자선(반잠수정)을 타고 공작선으로 돌아가다가 남한 해군에 의해 격침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침투 지역에 비상경계가 선포되었으며 그것을 극복하느라 고생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들 공작조는 강모 씨를 조장으로 하고 박모 씨를 조원으로 해서 구성된 2인 공작조였으며 1995년 당시 조장은 30대 후반이었고 조원은 30대 중반이었다.
 
그들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85년 가을 남한에 침투했다가 1987년 말경에 북한으로 복귀했다. 북한으로 복귀한 그들은 후배 공작원들의 공작 활동 참고용으로 자신들의 남한 침투 및 복귀 과정과 남한에서의 생활 등의 내용에 대해 녹음을 해 놓았다. 그것을 담당과에서 1980년대 말 당시 대남 침투 준비를 하고 있던 공작원들에게만 들려주어 침투 준비와 공작 활동에 참고하도록 했다.
 
나도 1989년 말과 1990년 당시 침투 준비를 할 때 기회가 있어 그 녹음테이프를 들어 보았는데,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침투 과정과 함께 남한에서 활동할 때 거주할 집은 어떻게 구하고 먹고 입는 것은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녹음되어 있었다. 그들은 대도시(대전)에서 하숙 또는 월세를 구해 생활했으며 강모 조장은 고시 준비생으로 위장하고 박 모 조원은 당구장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기술학원에도 다녔다고 한다.
 
그들은 북한으로 복귀한 후 모두 공화국영웅 칭호와 함께 김일성 명함이 새겨진 스위스산 고급 금시계를 선물로 받았으며, 1988년에 진행된 전국영웅대회에도 참가했다. 그 후에는 공작원을 그만두고 전역한 다음 인민경제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그들이 속한 학과가 국제관계대학으로 이관되면서 같이 넘어가 결국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무역 계통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북한은 이렇게 뻔한 사실 자체도 부정했으니 그 의도가 어떻든 노동신문은 거짓말을 한 셈이다. 북한은 종종 이처럼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곧잘 한다. 그들은 그것이 혁명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여기겠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목탄 트럭 타고 6년 만의 첫 휴가
 
대학 졸업 후 약 7개월간 또다시 사상이론과 공작실무 교육 및 여러 가지 실습과 종합판정 훈련 등으로 공작원 기초교육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받다 보니 어느새 1986년 새해가 되었다.
 
1986년 신정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김정일 명의의 선물을 담당 과장으로부터 전달받았다. 해마다 새해를 맞을 때면 대남 분야에 종사하는 공작원들과 전투원들에게 김정일 명의의 선물이 전달된다. 선물 박스 안에는 북한산 고급 술 3병과 담배 10·사탕·과자 그리고 생선·고기·과일 통조림·달력 등이 들어 있었다.
 
나는 1986년 새해를 맞아 1월 초에 드디어 집에 휴가를 가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온 뒤 햇수로는 6년 만에 가는 첫 휴가였다. 타향에 사는 사람에겐 고향에 간다는 것이 참으로 즐겁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아마도 고향이 자신을 낳아 키워 준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가 살고 있고,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정든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어릴 적 소꿉동무들과의 가장 소중한 추억들이 간직돼 있기 때문이리라! 더욱이 대학 4년 동안 방학은 물론 휴가·면회·외출·외박이 일체 허용되지 않은 채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생활을 해 오던 나에게 고향에 대한 생각은 사치일 정도였다. 그러니 이런 내게 휴가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행복이고 즐거운 일이었다.
 
6년 만에 가는 첫 휴가였지만 당시에는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휴가를 간다고 하니 초대소 요리사가 그동안 평소에 먹지 않고 모아 두었던 사탕·과자를 싸 주었다. 담당 지도원도 휴가용 물품이라면서 술 2병과 사탕·과자·담배 등을 가져다주었다. 당시 사탕이나 과자는 북한 주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선물 품목이었다. 나는 공작원 전용 상점에 가서 할머님께 드릴 스웨터와 내의, 그리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줄 화장품 등 가족들에게 줄 선물 몇 가지를 샀다. 그리고 설에 받은 선물도 그대로 남아 있어 그것까지 포장했다.
 
평양시에 가족이 있는 공작원은 그냥 승용차로 태워다 주지만 멀리 지방에 집이 있는 경우에는 교통 여건이 좋지 않아 대부분 열차로 고향에 다녀온다. 그래서 공작원들이 지방이나 고향에 갈 때는 해당 지역의 대남공작부문 가족 지원을 담당하는 도당(道黨) 또는 시·군당 11과에 통보해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
 
나 역시 고향이 지방인 황해남도였으므로 평양 대동강역까지 승용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 오후에 출발하는 해주행 열차를 탔다. 담당 지도원은 이미 황해남도 당위원회 11과에 전화를 해 두었다며 해주역에 내리면 도당(道黨) 11과 지도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해주역에 도착했는데 도당 11과 지도원이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평양에서 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 해주까지 오신 아버지만 보였다. 아버지는 도당 지도원이 나왔었지만 들여보냈다고 하시며 나를 트럭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아버지를 따라가니 나를 태우고 가려고 세워 놓은 목탄 트럭이 서 있었다. ‘목탄 트럭은 휘발유를 사용하는 트럭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휘발유 대신 석탄이나 숯 등을 때서 나오는 가스를 연소시켜 그 힘으로 달리게 만든 트럭이다. 그러니 트럭의 속도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보다 조금 빠른 정도였고 파워가 없어 비탈길을 오를 때는 겨우 올라가는데, 내가 첫 휴가를 나온 해에는 유달리 눈이 너무 많이 내린 데다 날씨가 대단히 추웠다.
 
해주로부터 40km 떨어진 고향까지 속도가 느린 트럭을 타고 가야 할 형편이 되었으니 정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6년 만에 아들이 온다고 그 먼 곳에서 목탄 트럭이라도 끌고 오신 아버지 앞에서 고맙다는 말은 못할 망정 상황을 탓하는 말 같은 건 꺼낼 수조차 없었다. 운전석 옆 좌석에 올라탄 나는 아버지와 함께 승용차로 1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를 3시간 이상 걸려서야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가 북한에서 학교 다녔던 어린 시절, 제한적으로라도 당시 그곳에도 여행이나 이동의 자유 같은 것이 있었나요?
 
아버지북한에는 내가 어렸던 시절은 물론 지금도 이동의 자유가 없어. 물론 자기가 살고 있는 시·군 지역 내에서 이동할 때는 여행증명서(통행증)’가 필요 없기는 해. 그런데 가까운 동네라도 빼어난 경치나 먹을거리도 없는 데다 시간도 없기 때문에 관광이나 여행을 위해 일부러 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렇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군 지역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조직에 신고해서 여행 허가를 받은 다음 관공서에 가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해. 북한 주민들이 한가하게 여행이나 관광을 다닐 수도 없지만, 특히 평양이나 개성 등 북한이 특별히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 지역에는 친척 방문이라도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
 
이렇게 북한 주민들은 이동의 자유·거주 이전의 자유를 비롯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노예처럼 생활하고 있어.
 
김동식 2025-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