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와 5'18

북한군이 확실하게 왔다는 정황증거 총정리

서석천 2013. 5. 26. 13:02

북한군이 확실하게 왔다는 정황증거 총정리

정보에 대한 이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하는 분석에는 학문적 이론과 학습된 지혜가 필요하다. 분석은 왜 하는가? 대책에 필요한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한다. 통계학에서는 공간에서의 점들을 가지고 분석을 하고, 일반 사회에서는 정황들을 가지고 분석을 한다. 미국의 정보분석과 한국의 정부분석이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정보맨들은 확률과 통계를 정보분석에 사용하지만 한국의 정보맨들은 수학적 개념 없이 고식적으로 정보를 판단한다는 차이에 있다.

통계학이 공간에서의 분산된 점들을 가지고 어떤 추론(inference)을 이끌어낸다면 전략정보는 정황들을 가지고 추론을 이끌어 낸다. 한마디로 점들을 분석하면 경향성(트렌드)을 발견할 수 있고, 정황들을 분석하면 전략정보가 나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과(apple)를 눈앞에 갖다 대주어야 그것이 사과라는 것을 믿는 사람을 위해서는 정보판단이라는 분야가 존재할 필요가 없고, 분석학문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사과가 직접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주변의 여러 가지 정황들을 분석하여 좁혀 들어가면 그것이 사과라는 것을 추론해 내는 능력이 바로 정보분석 능력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정보는 없다. 새로운 점들이나 정황들이 더해지면 또 다른 업그레이드 된 정보가 탄생한다. 이처럼 정보는 영원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광주 5.18에 북한특수군이 반드시 왔다는 결론(정보판단)을 내렸다. 아래에 필지가 찾아낸 수많은 정황들을 요약해 본다.

광주에 온 북한특수군 실체를 증명하는 정황들

1. 총상 사망자 69%를 광주시위대가 소유한 총에 맞아 죽었다.

광주에서 사망한 시민은 166명, 이중 116명이 총상 사망자였다. 그중 69%에 해당하는 80명은 무기고에서 나온 시민폭도의 총에 맞았고, 31%인 36명은 계엄군이 소유한 M-16에 맞았다. 광주시민이 또 다른 광주시민을 이렇게 죽였다면 광주시민은 자작극을 벌이기 위해 이웃 광주 시민들을 쏜 짐승 같은 사람들이 된다. 광주시민들은 대답해야 한다. 계엄군이 36명을 죽이는 동안 광주시민이 80명을 죽였는가? 아니라고 대답하려면 북한 특수군의 소행임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의 소행도 아니다, 광주시민의 소행도 아니다, 무조건 부정만 하면 80명은 누가 죽였는가?

2. 4시간 만에 전남 17개 시군에 숨어있는 44개 무기고를 털었다.

5월 21일 오전 9시, 아시아 자동차에 심상치 않은 600명의 폭도들이 집결했다. 이들은 374대의 군용트럭과 4대의 장갑차를 열쇠와 함께 탈취했고, 전라남도 전역에 널려 있는 멀고 가까운 44개 무기고를 향해 출발했다. 낮 12시에서 4시까지 5,408 정의 무기와 8톤 트럭 분의 폭약을 탈취했다. 12시와 4시라는 표현은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의 표현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여러 달 전부터 고첩들을 이용해, 무기고 위치와 생김새를 사전에 파악하여 아시아자동차에서 “요 땅” 하고 44개 팀을 출발시키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의 일이다. 그 80%가 양아치, 구두닦이 껌팔이 등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기층세력’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첫 번째 여성 증언자는 자기 남편 안창식이 3개월 전부터 고첩들을 동원하여 전라남도 전역을 다 뒤져 무기고 위치를 파악했다고 한다.

3. 공수부대를 능가하는 담력을 가진 300명의 특수군중이 매복해 있다가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지휘부를 공격하여 와해시켰다.

아시아자동차에 집결한 위의 600명 중 300명은 5월 21일 오전 8시 정각에 20사단 지휘부가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한 후 톨게이트 주변에 화염병 등 폭발물을 준비해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08:00시 정각에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하여 지프차 14대와 기관총 및 무전기들을 탈취한 후 곧바로 아시아자동차로 가서 또 다른 300명과 합류했다. 이런 행동은 지휘자 없는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4. 북한 노동당이 은연중 폭로한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이 한국군 훈련소 탄약고를 공격하여 수많은 무기를 탈취하고 광주시를 모두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에 해당하는 8톤 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을 탈취하여 도청 지하실에 쌓아놓고 단시간 내에 이들을 폭탄으로 조립하여 쌓아놓고, 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을 향해 “만일 광주로 재진입하면 광주시 전체를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러한 억지력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과 억지력 전략을 생각해낼 수 있는 존재는 일반 정규군의 머리를 능가한다. 하물며 오합지졸에 불과한 양아치 계급이 어찌 이런 대담한 전략을 구상하고 한국군 정규군 무기고를 탈취하고, TNT-뇌관-도화선을 탈취하여 순식간에 조립할 수 있겠는가? 이런 구성과 기술과 대담성은 당시 우리 공수부대에도 없었다고 장담한다. 더구나 광주시민 전체를 죽일 수 있는 이런 위험한 짓은 광주시민이 할 수 없는 일이다.

5. 5.18묘지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12구의 시체가 있다.

서양사람들이 와서 죽었을 리는 없다.

6. 북한에서 교도소를 점령하라는 전문이 있고, 계엄군이 교도소에 배치되자마자 6차례에 걸쳐 장갑차를 동원한 교도소 공격이 있었고, 여기에서 발생한 전투는 6.25때의 고지쟁탈전을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북한이 광주폭도들에게 교도소 공격을 지시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오합지졸에 불과한 광주시민들이 교도소 뒷산인 설탕고지 점령을 위해 6회의 공격을 감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7. 광주에 왔다가 북한의 영웅이 되어 다시 탈북한 중좌출신이 분당에 살고 있으며 단독 수기를 냈다.

8. 350명 규모의 한라산 산부대를 지휘하는 데에는 기라성 같은 사령관과 민민전-남로당 당원들이 알려진 이름으로 지휘를 했는데, 그 넓은 광주일원의 수많은 곳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지휘된 시위전쟁에는 지휘자가 없다.

1991년 북한에서 개봉된 북한의 5.18연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주인공은 박관현, 치사하게도 5.18광주시위 기간에 도망가 있던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다. 뒤늦게 당국에 체포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위장한 전두환의 졸개 교도소장’을 상대로 하여 벌이는 교도소 투쟁의 영웅담을 그린 영화다. 오죽 소재가 없으면 이런 인간을 영웅으로 묘사하겠는가? 북한영화는 물론 공수부대와 전두환과 미국을 모략한 영화다.

2007년, 16년 뒤늦게 남한에서 개봉된 남한의 5.18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26세의 골재채취화물차 운전수 박남선을 ‘예편한 공수부대 대령’으로 신분세탁을 하여 시민군 대장이며 광주사태를 총 지휘한 사령관으로 조작했다. 이처럼 북과 남에서 영화를 만들면서도 5.18의 지휘자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시민군’이라는 것은 5월 25일에야 형성됐지만 강온간의 싸움을 하다가 27일 새벽이 오기 전에 모두 도망가 버렸다. 그 방대하고 조직적이고 특전부대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시내 게릴라전은 참으로 방대하고 고차원적인 전쟁이었지만 이를 지휘한 지휘자는 한국 땅에 없다. 북한의 특수부대가 곳곳에서 지휘한 것이다.

9.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 눈으로 보듯이 그리고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썼다.

북한이 1982년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과 1985년에 발행한 “광주의 분노” 그리고 수많은 북한 정기간행물들에는 버스차량의 번호까지 우리의 상황일지와 일치하게 기록했고, 시위폭도들의 감정의 움직임까지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죽은 학생들의 이름 나이 학년 등 객관적 자료들이 안기부 자료와 일치한다. 누군가가 구석구석에서 역사책을 쓰기 위해 상황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내용들이다. 더구나 이 책들에는 시내작전의 전술과 전략 그리고 교훈까지 설명돼 있어 읽은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북한군이 현장 곳곳에 비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록들이다.

10. 유언비어의 생산지는 북한이었다.

광주폭동의 초기 원동력은 지역감정을 유발한 고차원적인 유언비어였다. 그런데 민주화 보상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벼라 별 종류의 행동을 해서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유언비어를 만들었다고 유공자가 된 사람은 없다. 그런데 북한에서 발간된 책들을 보니 광주에 나돌던 유언비어는 물론 1990년대 대학가 대자보를 붉게 물들였던 “찢어진 깃발”까지 모조리 북한 책들에 전시돼 있다. 유언비어는 군중선동의 가장 큰 무기이고 이는 북한이 제작하여 직접 와서 뿌렸다. 이는 강명도의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도 증언돼 있다.

11. 초대 전교조 회장 윤영규가 지켜본 36인 무장조는 북한 특수군일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총기가 회수되지 않은 곳은 기동타격대와 36인조 무장조였다. 36인조 무장조는 일종의 비상대기조였는데 이들은 수류탄, 대검, M-16자동소총으로 무장되어 함께 행동하고 함께 움직였다. 기동타격대는 시위 외곽순찰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무기 회수가 어려웠지만 무장조는 도청 민원실 강당에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민원실로 갔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들어가자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오게 된 취지를 설명하자 그들은 긴장한 채 물끄러미 처다 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들 중 한명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선생들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 . .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일어났다. ‘우리는 무등갱생원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은 총을 반납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고 나면 돌아갈 집은커녕 밥 한 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그런데 이제 끝났으니 느그들 돌아가라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당신들도 아시다 시피 갱생원은 공수대 포위선을 넘어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총을 가지고 있어야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오갈 데 없는 우리에게 총을 달라는 말은 죽으라는 이야기 하고 같습니다. 차라리 죽으면 싸우다 죽겠습니다.’”

12.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들에는 “5.18민중항쟁이 대남공작 역사 상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3. 김일성은 1989년부터 황석영과 윤이상을 불러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하여 북한 전역에서 상영했다. 북한이 5.18에 얼마나 애정이 깊었고, 5.18을 얼마나 중요시했으면 남한 사람인 이 두 사람에게 엄청난 금전적 선물을 주면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겠는가?

14. 북한 최고의 명예는 5.18이다.

대륙간탄도탄 제작용 1만 톤짜리 프레스에 '5.18청년호’, ‘5.18전진호’, ‘영예의 5.18청년직장’ '5.18무사고 견인초과운동' '5.18누에고치반' 등의 영예칭호를 부여한다.

15. 해마다 북한에서는 당정 최고의 간부와 모든 언론들이 대거 참여하여 5.18을 전국적으로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통일부 자료도 이를 확인).

16. 탈북자 36명이 각기 증언한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을 읽으면 5.18에는 북한 특수군이 와서 수행한 반란폭동이며, 이는 김대중과 김일성이 야합하여 일으킨 역적행위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 론

1. 역사바로세우기에 참여한 판검사들은 빨갱이들이다.

“광주시위대는 헌법수호를 위해 결집한 준-헌법기관이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됐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신군부가 조기 진압했다. 따라서 신군부의 조기진압행위는 내란행위다.”빨갱이 판사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

2. 아래의 표현은 무죄다.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되어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불순분자들이 시민들을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 제주 4.3사건에서처럼 잔인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러 놓고, 좌익들이 이를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소위 모략전을 반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으로 굳혀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심리적 내전’이 바로 5.18이라고 생각한다”

http://blog.daum.net/peckt918/201

2012.10.11.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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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특수군 600명을 증거하는 기록들

1995년 7월 18일에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공동으로 내놓은 “5.18관련사건수사결과”, 1985년 5월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2001-2006년에 걸쳐 5.18기념재단에서 발간한 “5.18의 기억과 역사 1,2권”, 전남대학교출판부에서 발간한 “5.18항쟁증언자료집 I-IV 권"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 역사책들에서 뽑아낸 따끈따끈한 증거들이, 5.18은 김대중 추종자들과 간첩들과 북한특수군 600명이 연합하여 일으킨 국가전복 목적의 폭동작전이었음을 당당하게 입증한다.  

증거1: 무시무시한 계엄령이 선포됐던 1980년 5월 17일 밤중,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 운동권들은 모두 지하로 숨거나 예비검속에 걸려들어 심한 고문들을 받았다. 광주 운동권은 잡혀갔거나 모두 숨었고, 교수, 대학생, 지식인들이 다 숨었다.(5.18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 1,2”, 전남대학교출판부에서 발간한 “5.18항쟁증언자료집I-IV"). 이런 공포의 시간대인 1980년 5월 18일 오전 9:30분에 날렵한 학생집단 200여 명이 전남대에 집결해 있는 계엄군 병사들에 다가와 시비를 걸고 돌을 던져 부상을 입히고 계엄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충장로와 금남로로 달려가 대기하고 있던 다른 대학생들과 파출소, 건물, 차량 등에 불을 질러 광주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불을 지르면 반드시 사람들이 꼬인다. 이들 학생 무리들은 광주의 대학생들이 아니었지만 검찰보고서는 대학생이라고 기록했다.  

증거2: 5월 21일, 서울을 출발한 20사단 지휘부가 08:00시 정각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 중 극비 정보를 입수한 300여 대학생시위대가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몽둥이, 화염병 등으로 기습공격을 가해 사단장용 지프차를 위시한 14개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공장에 가서 이들 지프차를 증표로 보여주며 장갑차 4대와 트럭 374대를 탈취했다. 또 다른 300명의 대학생 시위대가 대형 버스 5대를 타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와서 이날 09시에는 600명이 이곳에 집결하였다(검찰수사결과보고서, 5.18분석 최종보고서의 사진들).  

당시 광주에는 이런 능력을 가진 600명이나 되는 대학생도 없었고, 이런 공적(功績)으로 민주화인사가 된 광주인이 전혀 없다. 한국에는 이 정도의 배포와 훈련 수준을 가진 집단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5.18에 동원됐던 광주인들은 사리 판단 능력이 없는 10대 아이들이거나 20대 막노동꾼들이었다(사망자 및 유죄자 직업 및 연령 현황자료).  

단 한 번도 함께 모여 본 적이 없는 이런 10-20대 애송이들이 300명씩 2개조를 편성해 그 중 1개 조가 이동 중인 정규군 사단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으로 보고서 문장을 작성한 검찰은 이들 600명을 그냥 광주학생 시위대라고 기계적으로 적기만 했다.  

증거3: 이들 600명은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털어 5,408정의 무기와 탄약, 8톤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 광주에 이런 조직력과 능력을 가진 대학생 시위대는 없었다(검찰수사결과, 안기부의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북한의 ‘광주의 분노’).  

증거4: 검찰수사결과보고서, 광주의 분노, 안기부 상황일지, 광주일보 1996.10월 10일 특별보도 등은 “광주대학생들은 8톤 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폭탄으로 조립하여 도청지하실에 쌓아놓았다”고 기록했다.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전라도 계엄분소에 오직 한 사람 5급 갑의 배승일 문관뿐이었다. 배승일 문관은 광주수복 전 2일에 걸쳐 2,100개의 폭탄에서 뇌관을 분리했다. 북한특수군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증거5: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있었을 때에는 이들 600명이 활약했지만,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기인 5월 22일부터는 600명이 모두 복면을 한 상태에서 광주시민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검찰수사결과, 안기부 상황일지).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철칙 때문이었다. 광주유지들이 모인 5월 22일부터 무기반납을 위해 이들 비범했던 대학생들을 만나고 싶어 찾았지만 이들은 영영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광주인들은 광주 대학생들이 모두 꼭꼭 숨어 있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들 600명을 서울에서 내려온 연고대생 600명이라고 호칭했다. 5월 18일부터 21일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추방할 때까지의 무서운 조직력과 전투력, 이는 광주시민들이 발휘한 것이 아니라 외지인 600명이 발휘한 것이었다.  

증거6: 이들 600명은 5월 21일 오후와 22일 새벽 사이에 광주교도소를 6회 공격했다(검찰수사결과).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을 것이다. 이 무모한 작전은 북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광주시민들 중, 북의 지령을 직접 받고 매우 무리하게도 야간에 광주교도소 공격을 지휘한 사람 없다,  

증거7: 광주에는 장갑차 4대를 운전할 수 있는 장갑차 운전수 4명이 없었고, 이를 운전한 공적으로 유공자가 된 사람 없다.  

증거8: 1980-81년 재판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5월 26일 낮과 밤에 개념 없이 설치던 20세의 구두공, 20대 중반의 화물차 운전수 등 개념 없고 뿌리 없는 떠돌이 노동자들이었다(처벌자 명단), 당시 정보당국은 5월 18일-21일까지 화려한 파괴-선동-엽기살인 기술을 보였던 600명 중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잡지 못했다. 정보당국이 잡은 폭도는 5월 22일 이후 어슬렁거리며 개별적으로 들어왔던 10대 어린이들과 20대의 개념 없는 막노동자들이었다(처벌자 명단과 5.18기념재단 자료).  

증거9: 총에 맞아 사망한 광주시민의 70%가 무기고에서 꺼낸 총에 의해 사망했다(안기부 일지, 계엄사).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조직적으로 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증거10: ‘5.18분석 최종보고서’ 사진들에는 광주인일 수 없는 얼굴과 포즈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특수장갑을 끼고 장갑차 위에 기관총을 걸고 사격준비 상태를 유지하면서 눈에서 빛을 내뿜는 고도로 훈련된 몸매, 막대기 하나로 20사단을 습격한 날랜 몸매들, 육중한 유탄발사기를 한손으로 파지한 용병의 몸매, 복면한 얼굴들, 광주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된 집단행동, 북한식 제식걸음, 총을 거꾸로 메는 북한의 총 파지 방법 등을 보인 용맹한 전사 집단은 광주의 양아치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석공 목공 구두공 등일 수 없다.

증거11: 광주 5.18묘지에는 한국인으로 판명되지 않은 시체가 12구 있다.  

증거12: 광수 한 사람이 2006년 탈북 해 지금 서울 근교에 살고 있다. 2013.5.15. 채널A의 ‘김광현의 탕탕평평’ 프로가 가명 김명국을 소개했다가 박근혜정부로부터 중징계를 당했다,  

증거13: 2013년 4월 22일의 TV조선 방송에 황장엽을 가장 먼저 접촉했던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씨가 출연했다. 황장엽이 약속장소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황장엽은 김기자에 메모를 전달했다. 5.18에 대한 알듯 모를 듯한 메모였다. 김기자는 1996년과 1998년에 황장엽과 김덕홍으로부터 확인한 내용을 방송에서 밝혔다. “5.18은 북한이 배후조종한 후 계엄군에 뒤집어씌운 사건이고, 그 작전을 기획한 대남부서 사람들이 5.18종료 직후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 파티를 했다”

증거14: 북한은 해마다 5.18을 남한과는 비교조차 안 될 거대한 규모로 북한 잔역에 걸쳐 여러 날 기념하고, 북한에서 최고인 것들에는 5.18호칭을 하사한다. "5.18영화제작소" "5.18청년호" ":5.18땅크호" "5.18누에고치반"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

증거15: 최첨단 영상분석 기법으로 발굴한 90명의 광수들(5.18광주 북한특수군)

 

5.18 북한특수군 공작조들(분석대기중 제102~117광수)

한장의 사진에 수많은 광수들이 한꺼번에 포착이 되어 작업의 분량이 많아졌습니다.

이미지를 올리는 제한 사이즈가 세로픽셀 8100이상은 올라가지 않으므로 한꺼번에 모두 다 
담지 못하게 되어 광수 하나하나 분리해 나누어서 그들이 그들일 수 밖에 없는 그들만의 
특징점 위주로 이미지 싱크로나이징 작업을 하여 그들이 5.18 광주 북한특수군이었음를 
증명하겠습니다.

 

출처: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500만야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