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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투표, 편의가 원칙 위에 설 수 없다

서석천 2025. 5. 28. 05:15
사전투표, 편의가 원칙 위에 설 수 없다
중요한 거래를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인감은 단순히 종이에 찍는 도장이 아니다. 내 도장을 사전에 정부기관에 등록해야만  인감’으로서의 효력을 인정받는다. 누군가 내 도장을 위조해서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등록된 인감과 일치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아 제시한다. 그 문서에 찍힌 도장이 실제로 등록된 인감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는 매우 중요하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감을 대신하는 전자서명이 등장했다. 그러나 전자서명도 핵심은 마찬가지다. 단순히 이름을 입력하는 것으로는 본인 인증이 되지 않는다. 공신력 있는 인증기관에 사전 등록하고, 약속된 인증 과정을 통해 를 증명받아야 한다. 기술은 바뀌어도 본인 인증이라는 절차는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이 원칙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공직선거법 제158조 제3항엔 투표관리관은 투표용지에 자신의 도장을 날인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표가 정당하게 행사되었음을 확인하고 보증하는 마지막 절차다. 다시 말해, 국민 주권의 최종 확인 장치가 바로 투표관리관의 날인인 것이다.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 원칙을 가볍게 여기고 있다. 사전투표에서 실제 관리관이 자기 도장을 찍지 않고, 선관위가 제작한 이미지를 인쇄하여 도장 대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선관위 측은 사전투표의 효율성을 위해 인쇄로 대체했다고 말한다.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효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법이 정한 핵심 원칙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 행위는 단순한 편의 추구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이 된다.
 
사전투표는 휴일로 지정한 당일 투표에 참여할 수 없는 국민을 위한 제도다. 단 하루인 당일투표의 두배가 되는 이틀을 할애해 개인의 주권 행사를 위한 편의를 봐준다면 1, 2분 아니 10분이 지연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런 국민에게 10, 30, 혹은 길어야 1분이 더 걸릴 수 있다는 이유로 법이 정한 절차를 생략하는 것은, 말 그대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더구나 실제로 도장을 찍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 차이를 만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욱 인쇄 날인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관리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행정 편의냐 불법이냐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이며, 법과 원칙에 대한 자세다. 만약 인감도장이 진짜 주인의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모양이 똑같아도 법적 효력을 부정당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전투표용지에 인쇄된 도장이 실제 관리관이 자신의 도장을 날인한 게 아니라면 그 표 또한 확인된 표가 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미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 조 바이든이 퇴임 직전 자신의 형제와 아들을 포함한 범죄인들에 선제적 사면장을 대량으로 발부하면서 자동서명기기인 오토펜(Autopen)’을 사용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물론 오토펜을 사용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바이든이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서명이 도용되었다는 지적이다. 법적으로는 오토펜 서명이 효력을 갖는다고 하지만 그 서명의 주체인 대통령이 자신이 행사하는 사면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그 명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면이 그렇다면, 선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선거란 국민의 한 표, 한 표가 모여 대통령을 뽑고 국회를 구성하며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다. 이 신성한 절차에서 투표관리관의 날인이라는 마지막 보증 수단을 인쇄물로 대체하겠다는 발상은, 국민 주권을 복제물 취급하는 것이다.
 
이제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관리관이 직접 도장을 찍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인가?
 
 
사전투표는 국민의 주권 행사를 돕기 위한 제도적 배려다. 그렇다면 그 절차는 더욱 철저하고 투명해야 한다. 인감도장이든, 전자서명이든, 오토펜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인증 수단이든 간에 그것이 ‘진정한 나의 의사’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관위가 자신들이 만든 내부 지침이 옳으니, 상위법인 공직선거법을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까지 내세우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출 권력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위험한 착각이며, 교만한 태도다.
 
사전투표용지에는 반드시 관리관 개인의 도장이 직접 날인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며 법치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선거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편의가 아니라 신뢰와 정당성’이다.
 
허양 202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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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信不立 선거 관리
국정원, 투표 관리 시스템 허점 있다 지적
해킹 후 인해전술 사전투표 경계해야
이유없는 복잡성은 모종의 의도 개재 의심
 
 
29일부터 사전투표가 시작된다. 공정한 투·개표 관리가 중요하다. 이에 관해 해외 케이스와 우리 제도를 이분 대비하여 짚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가나·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 개발도상국으로 불렸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반투명 플라스틱 재질의 투표함을 쓴다. 투표함 봉인은 일련번호가 적힌 케이블 타이로 한다. 투표지가 없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개표  시까지 투표함을 문자 그대로 봉인한다. 짐바브웨에서는 케이블 타이에 자물쇠를 더 채운다.
 
우리는 어떤가. 투표함은 불투명 플라스틱 재질로 된 것과 파우치(헝겊 자루) 2가지다, 아마도 대다수 사람이 이를 모를 것이다. 파우치 플라스틱 받침대를 투표함으로 오인하기 때문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설명에 따르면 관내 사전 투표함을 이송·보관하는 데 용이하도록 투표함을 파우치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당일 투표함도 개표장으로 이송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플라스틱 통이다.  2가지 재질의 투표함을 만들었을까 아리송하다.
 
투표함 봉인과 관련해 선관위는 스티커 형태의 봉인지를 사용한다. 문제는 선관위가 지난 4월10일 시연회에서 봉인지를 떼어냈는데 투표함에 뗀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관위는 투표함 재사용 등을 위해 그런 비잔류형 봉인지를 쓴다고 한다. 치킨 배달 박스 봉인지도 그보다 낫다. 봉인지가 찢어지고 흔적이 치킨 박스에 남으니까. 게다가 사전 투표함은 본체가 헝겊이라 봉인 스티커 붙이기가 아주 어렵다. 케이블 타이만큼 확실한 봉인이 어디 있을까. 우리도 예전에는 한지를 투표함에 풀로 붙이고 그 위에 도장 날인하는 등 봉인을 확실히 한 추억이 있다.
 
인도엔 주가드(Jugaad·임기응변) 정신’이란 게 있다. 일례로 인도에선 1루피(16원)짜리 생리대 제조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투표 시엔 중복 투표 방지를 위해 검지 손가락에 보라색 잉크를 묻혀 손도장을 찍는다. 이 잉크(indelible ink) 자국은 최소 4주간 안 지워진다. 인구 14억 명이 넘는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 인도는 전산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 바로 이 주가드 정신을 발휘하여 만든 잉크를 70년간 투표에 사용하고 있다. 이 잉크는 말레이시아·캄보디아·피지 등 여러 나라에 수출 중이다.
 
우리는 중복 투표 방지를 위해 신분증을 스캔해 전산상의 통합선거인명부 시스템과 대조한다. 이때 오른쪽 엄지 지문도 스캔한다. 많은 사람이 이 지문 스캔 과정을 본인 확인 절차로 오인한다. 휴대폰으로 스마트 뱅킹을 사용할 때의 지문 확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이건 본인 확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투표했다는 표시로 지문 스캔 이미지를 남겨 놓을 뿐이다.
 
국정원은 선관위 시스템 보안 점검에서 투표 여부 등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불순 세력이 해킹으로 전산 신분 확인 프로그램을 조작한 연후에 인해전술로 투표소를 돌아다니며 관외 사전 투표를 해댄다면 막을 도리가 없다. 인도처럼 원시적이나마 손가락 잉크를 찍어 주면 좋으련만….
 
중국은 민주 선거를 치르는 나라가 아님에도 알리바바와 스마트 드래곤(www.ballotexpert.com) 등이 선거 관련 전 품목을 취급한다. 특히 알리바바에서는 전세계 투표용지도 주문 제작, 판매 중이다. 우리나라 투표용지도 팔고 있다고 한다. 이 가짜 투표용지 유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
 
이 가짜 투표지 방지 장치가 우리 공직 선거법에 있다. 사전 투표 관리관이 개인 도장을 직접 날인하는 절차다. 그런데 선관위는 5월1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투표 관리관이 직접 날인하는 방식은 너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어렵다”면서 관리관 도장 날인은 인쇄 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선관위는 유권자 편의를 앞세우나 오히려 유권자들은 투표 무결성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거꾸로 됐다.
 
첨단은 간단하다. 선거 절차가 이유없이 복잡하면 모종의 의도가 개재되었다고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다.
 

강익현 국제정치학 박사 202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