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시리아, 제국 세력의 힘이 서로 충돌하는 단층선에 놓여 있어 전쟁 치러
⊙ ‘제국적 능력은 있지만 제국의 야심을 버린’ 일본과 손잡아야
⊙ 먼로 독트린(미국),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레벤스라움(히틀러), 대동아공영권(일본)은 ‘세력권 정치’의 표현
⊙ 푸틴의 러시아, 시진핑의 중국, 에르도안의 튀르키예, 모디의 인도 등 ‘세력권 정치의 귀환’ 주도
⊙ ‘제국적 능력은 있지만 제국의 야심을 버린’ 일본과 손잡아야
⊙ 먼로 독트린(미국),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레벤스라움(히틀러), 대동아공영권(일본)은 ‘세력권 정치’의 표현
⊙ 푸틴의 러시아, 시진핑의 중국, 에르도안의 튀르키예, 모디의 인도 등 ‘세력권 정치의 귀환’ 주도

2020년대가 절반이 지나고 있는 지금, 바야흐로 제국(帝國)이 귀환하고 있다. 제국은 그 내부 인구의 다양성을 위계적(位階的)으로 관리하는, 팽창과 통합의 기억을 간직하는 정치체(政治體)다. 그리고 이 다양성을 관리하기 위하여 제국은 민족주의나 시민민주주의보다 높은 층위(層位)에서 작동하는 보편 이념을 필요로 한다. 정교회(正敎會)와 러시아 제국, 소련의 기억에 바탕을 둔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나 이슬람과 오스만 제국, 케말주의를 조합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튀르키예는 2010년대에 일찌감치 귀환한 제국의 대표적 사례다. 최근 기독교 보수주의를 통해 미국을 새로운 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제국의 실험이 서구(西歐) 자유주의 문명의 핵심까지 도달했음을 만방에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제국의 귀환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서 국제정치적인 함의를 살펴보자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력권 정치’의 귀환일 것이다. 팽창의 기억은 제국의 역사에서 언제나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모든 제국은 자신들이 문명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정치체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自意識)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속 수많은 제국이 바깥으로 팽창을 시도하고, ‘문명적 교화’를 통해 새로운 신민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 러시아의 침공은 제국의 등장과 함께 팽창 시도로 귀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신호다. 물론 무력(武力) 침공은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다. 정치·경제·문화 등 각종 수단을 총동원하여 인접국을 자신들의 세력권하에 놓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는 늘 있어 왔다. 세력권 정치를 고대(古代)부터 현재까지 언제나 있었던 일상적 현실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리메스와 장성
정착 생활이 시작되자, 인간은 생존과 지배를 위해 ‘공간’을 둘러싼 경쟁에 나섰다. 도시와 산, 평야와 강은 단순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통제가 따르는 자원이 되었다. 이러한 공간 통제는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한(漢)나라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등장하며 제국적 의미의 세력권 개념으로 발전했다.
로마는 지중해를 ‘우리 바다’로 지칭했고, 갈리아(프랑스), 브리타니아(영국), 북아프리카로 계속해서 팽창해 나갔다. 국경 북쪽의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들을 포섭하여 그들과 거래 관계를 맺으며 관리해 나갔다. ‘리메스’라고 불리는 로마의 게르만 국경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마 세력권에 들어오고자 하는 게르만 부족들이 접촉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주(周)나라 시대에 시작된 중화사상은 세계를 중원의 문명[華]과 바깥의 오랑캐[夷]로 나누는 인식의 틀이었다. 중원 문명이 계속 발전하면서 장강, 사천 분지, 오르도스는 점차 중국의 천하 질서를 받아들이며 ‘중국화’되었다. 진(秦)을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세운 한나라는 유교와 법가(法家)에 입각한 중화 문명의 표준을 정비했다. 고조선, 남월(南越), 흉노를 향한 한무제의 원정은 중화 문명이 미치는 세력권을 전통적인 경계 바깥으로 확장하려는 제국적 시도의 정점(頂點)이었다. 만리장성은 중국이 만든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었다.
로마와 한이 멸망하고 중세(中世) 시대가 시작되며 이러한 제국적 정치는 축소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제국은 꾸준히 생겼다 사라졌고,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로마와 한이 만든 제국적 통치술을 결합하여 자신들만의 세력권을 구축하고자 했다. 비잔티움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의 칼리프 제국, 돌궐과 당(唐) 제국, 몽골 세계제국에 이르기까지, 이 제국들은 기독교, 이슬람, 유교 등의 보편원리와 군사력, 상업적 부(富)를 바탕으로 제국 외부의 종족들을 교화, 포섭하고 정복해 나갔다.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베스트팔렌 조약
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세력권 정치를 시작한 국가들은 유라시아의 대제국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서양에 면한 이베리아 반도의 소국(小國)들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세계 최초로 지구적 규모의 세력권 분할을 논했다. 두 국가는 원양(遠洋) 항해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인도양과 아메리카 대륙에 세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유라시아 지역과 달리 이 지역들은 정복의 비용이 낮고 추출할 자원은 많은 곳이었다. 상호 간 충돌을 막고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494년에 교황의 중재하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이는 대서양 한가운데에 선을 그어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의 세력권으로 놓는 무지막지한 조약이었다.
당시의 제국이었던 오스만과 명(明)나라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조약이었지만, 토르데시야스가 오늘날 세계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스페인어를 쓰게 된 것, 그중에서 브라질만큼은 포르투갈어 국가로 남은 것, 태평양의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가 되고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포르투갈 식민지가 된 것도 모두 토르데시야스의 세력권 분할의 유산이다. 두 국가는 가톨릭 선교를 통한 ‘문명화’를 통해 자신들의 정복과 약탈을 정당화했다.
16세기 들어 유럽 안에서는 세력권을 둘러싼 격돌이 발생했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통제권에서 벗어나려는 지역 간에 갈등이 발생, 폭발한 것이다.
신교(新敎)와 구교(舊敎)의 전쟁은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면서 마무리되는데, 개별 국민 국가가 국경 내부에서만큼은 확실히 주권을 행사하고, 종교 문제로 인한 충돌을 막기 위해 종교의 관용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국제 질서의 근간이 되었지만, 동시에 세력권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투쟁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누르고 상업적 패권(覇權)을 행사하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인도, 인도네시아 등지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격돌했다. 이 지역들은 기독교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권 존중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고, 서유럽 국가들의 세력권 투쟁의 장으로 금세 전락했다.
유럽의 세력권 경쟁
물론 유럽 대륙도 언제까지나 예외는 아니었다. 강대국들의 완충(緩衝)지대 역할을 하던 도시 국가, 봉건 영주(領主) 질서는 국민 국가가 발전하며 빠르게 저물고 있었고, 유럽의 각 지역은 이 와중에 국력을 배양한 강대국들에 의해 분할되기 시작했다.
이는 유럽에서 계속되는 전쟁을 만드는 주요 동기이기도 했다. 유럽의 세력권 경쟁은 제로섬 게임이었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어느 지역에 대해 세력권을 주장하면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로 그 지역이 자신의 세력권임을 내세우며 충돌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력권 분할 과정에서 유럽 각국은 고도의 외교적 기술과 의례를 발전시키고, 실패하면 전쟁을 감수하기까지 했다. 예컨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경우 ‘평화적’으로 폴란드를 분할 합병하며 폴란드는 세력권 정치의 대표적 희생자가 되었다. 한편 스페인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으려던 프랑스는, 경쟁국인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반발을 사며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다.
그래도 이러한 극한 갈등은 1815년에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가 ‘유럽 협조 체제’를 만들면서 상례화된 조정으로 수습될 수 있었다. 유럽 협조 체제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라는 5대 강대국이 유럽에서 각자의 세력권을 합의하고, 세력권에 변동이 있을 것 같을 때는 상호 합의와 조정을 통해 갈등을 외교적으로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유럽 협조 체제는 시작부터 삐걱거렸지만, 유럽 강대국들은 그럭저럭 서로 간의 큰 전쟁을 피하며 식민지 팽창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세력권 정치는 이제 전 세계로 다시 뻗어갔다.
‘먼로 독트린’과 ‘그레이트 게임’
유럽 제국주의가 세계로 팽창하면서, 유럽 바깥에서 부상(浮上)하는 강대국들도 각자의 세력권을 주장하며 제국 건설을 도모했다.
첫 번째 타자는 신생 독립국이던 미국이었다. 1823년에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유럽 강대국들이 남북 아메리카에 개입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며 아메리카를 사실상 미국의 세력권으로 선포했다. 당시 미국의 힘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列强)들보다 훨씬 약했기에 유럽 열강은 먼로 독트린을 처음에는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 영국령 캐나다와 국경 조정,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을 통해 정말로 아메리카를 세력권으로 거느릴 강대국으로 팽창해 나갔다. 이후 미국 자본은 라틴아메리카를 실질적인 세력권으로 두며 상업, 금융에서도 이득을 확보했다.
유라시아에서는 러시아가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미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는 제국의 두 도구인 상업과 군대를 바탕으로 남쪽의 이웃들을 영향권으로 포섭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정교회 슬라브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코카서스를 획득했으며, 중국으로부터는 연해주(沿海州)를 얻어내 태평양 출로(出路)도 확보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가 인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자국의 세력권을 위협한다고 우려하며, 오스만과 페르시아, 중국에서 자신만의 세력권을 공고히 하고자 경주했다. 두 강대국의 세력권이 수십 년에 걸쳐 충돌하는 과정은 훗날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
먼로 독트린과 유사했던 러시아의 세력권 선언은 외무대신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가 1864년에 유럽 각국에 보낸 ‘고르차코프 회람서한’이었다. 고르차코프는 이 서한에서 러시아가 유럽에서 세력권을 확장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변경을 안정화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며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했다. 영국은 이것을 인도를 위협하는 러시아의 세력권 팽창으로 간주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첩보와 외교 활동을 통해 러시아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의 노력은 대체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영국은 극동에서의 세력권 경쟁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이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던 19세기 말, 러시아는 만주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으며 조선에까지 진출할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두 국가의 세력권에 도전을 가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당연히 러시아의 해상 진출에 촉각을 기울이던 영국이었다. 만약 러시아가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 너머 한반도 남해안에도 항구를 확보하면 홍콩과 같은 극동 식민지들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둘째는 한반도에 인접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새롭게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일본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하는 이미 에도(江戶) 막부 말기부터 일본에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을 배타적 세력권으로 삼으면 일본의 장차 팽창이 차단될 것이고, 나아가 일본 본토가 러시아군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라 우려했다.
육군대신과 총리를 지낸 일본 육군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利益線)’ 안에 있는 지역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의 조선 장악에 군사적인 대응까지도 검토했다. 이러한 세력권 정치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조선은 영국, 일본, 러시아가 얽힌 쟁패(爭霸)의 장이 되며 최종적으로 일본 제국에 합병되고 만다.
‘최후의 제국 전쟁’
지구적으로 확대된 세력권 정치는 말 그대로 전 세계를 전쟁터로 삼는 ‘세계대전’으로 폭발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지구상 대부분의 땅은 식민지나 반(半)식민지의 형태로 열강들의 세력권으로 분할됐다. 이제 제국들은 팽창을 위해서는 다른 제국의 세력권을 명시적으로 침범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을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세력권 경쟁, 중동을 세력권으로 삼고자 한 독일의 ‘세계정치(Weltpolitik)’ 정책과 영국·프랑스의 충돌이 맞물리며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하며 각지에서 반식민지 독립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 실질적인 목적은 사실 패전국들의 세력권을 분할하는 데 있었다.
해소되지 않은 세력권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20년 뒤에 더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독일은 ‘생활권(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을 주창하며 동유럽 전체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두고자 폴란드와 소련을 침공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에 의해 분할된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두고자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은 이 세력권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명명했다. 그래서 전쟁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이 전쟁들을 일컬어 ‘최후의 제국 전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냉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어나자 각국은 제국의 세력권 정치가 인류 문명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품게 되었다. 초(超)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은 추축국(樞軸國)의 제국을 분쇄하고,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도 해체하며, 주권 국가에 기반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미소(美蘇) 합의로 탄생한 유엔은 주권 존중과 무력에 의한 국경 변경 금지를 원칙으로 삼으며 국제 외교에 있어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제국의 세력권이라는 현실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동유럽에서만큼은 세력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커다란 동기가 있었다. 소련은 동유럽을 언젠가 다시 서쪽에서 올지 모르는 침공에 대한 완충지대로 삼고자 이 국가들에 군대를 주둔하고 공산당 정권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소련의 세력권은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인정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사후(死後) 들어선 트루먼 행정부가 스탈린의 동유럽 점령과 세력 팽창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서면서 미소 관계는 점차 험악해졌다.
한편 소련을 의심했던 미국 역시 자신만의 세력권을 더 공고히 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미국은 서유럽에서는 나토(NATO) 동맹을 구축(構築)하고, 아시아에서도 소련을 둘러싼 튀르키예, 이란, 필리핀, 대만, 대한민국의 반공(反共) 정권을 후원하며 대(對)소련 봉쇄를 위한 세력권을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러일 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한반도는 다시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이 충돌하는 전장이 되며 6·25의 비극이 벌어졌다.
‘은밀한 세계 제국’ 미국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제국이 경쟁하던 냉전 시대는 제국의 붕괴로 마무리되었다. 소련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유럽 공산 정권의 연쇄 붕괴로 자신의 제국적 권역을 상실했고, 소련 자신마저도 15개 국가로 해체되고 말았다. 표트르 대제(大帝) 이래 3세기간 팽창해 온 러시아 제국의 세력권은 그야말로 허무하게 축소되었다.
미국과 서방 진영에서는 이에 제국의 시대가 마침내 끝났으며, 자유주의 규칙에 의하여 운영되는 평등한 주권 국가들의 국제 질서가 자리 잡았음에 환호했다.
물론 탈(脫)냉전기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국제 정치의 이면에는 여전히 세력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에서 여전히 무역·금융·군사적인 영향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나 중앙아시아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일본은 정치적인 영향력 대신에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에 일본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경제적 세력권을 구축했다.
그리고 역시 가장 중요한 제국은 미 제국이었다. 냉전은 끝났지만, 제국의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지구 전역’이 미국이라는 단일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극(單極) 질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은행과 IMF 등 국제 금융기관, 기축통화(基軸通貨)인 달러를 통해서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5대양 6대주 전체를 작전 구역으로 삼는 미군기지와 항공모함은 언제든 세계 제국의 힘을 보여줄 수 있었다. 미국은 자유주의라는 이념과 법적 체계를 통해서 주권 국가 간의 평등을 역설했기에, ‘전 세계가 세력권’인 미국의 제국적 성격은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권 국가 간의 문제를 조정하고, ‘제국의 부활’을 시도하는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곳이 한 군데밖에 없음은 누구나 알았다. ‘은밀한 세계 제국’인 미국이었다.
하지만 미국 단극 패권은 유라시아 각지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주장하는 제국들이 부상하면서 도전을 맞이했다. 이미 이전부터 조짐은 보이고 있었다. 2000년대부터 러시아는 탈소련 국가들의 자유화 혁명(색깔 혁명)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고, 훗날에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에 군사적 개입까지 감행했다. 이란은 미국이 들쑤셔 놓은 중동(中東)에서 조용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레바논·시리아·이라크·예멘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치열한 지정학(地政學) 경쟁 펼쳤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과도한 군사 개입에 지친 미국은 러시아와 이란의 도전에 직접적으로 대처할 역량이 없었다. 한 번 빈틈이 보이자 패권은 연쇄적으로 위기에 처했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체제 이후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자국의 전략적 통로를 확대하고, 특히 미얀마·파키스탄 등 인도양 연안국에서 세력권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제국의 첨병으로 항만, 파이프라인, 도로가 중국 자본을 통해 바쁘게 건설되기 시작했다.
인도양 지역을 전통적 영향권으로 여겨온 인도는 일본이 제시한 ‘인도-태평양 구상’에 참여하며 중국의 도전에 응전(應戰)해 나갔다.
한편 에르도안의 튀르키예도 발칸과 중동 등지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가며 ‘신(新) 오스만 세력권’을 쌓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은 나토 회원국으로서 세계 제국 미국에 전반적으로 잘 협조했지만, 오스만 제국 이래로 자국과 연고가 있는 인접국들에 정치·경제·문화적 영향력을 전방위적으로 발휘하기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튀르키예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독자 노선을 바탕으로 세력권 경쟁에 뛰어든 대표적 국가가 되었다.
‘강대국 정치의 비극’
이미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부활할 조짐을 보인 유라시아 강대국들은 2020년대부터 더 노골적으로 제국적 행보를 보이며 세력권 정치를 시작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력권 정치가 과거처럼 상시적인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전 세계에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계 제국인 미국마저도 그 부담을 끝내 짊어지지 못해 트럼프 시대로 이행한 상황에서 연쇄적인 세력권 경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력권 경쟁이 가장 비극적으로 두드러지는 또 다른 사례는 시리아다. 본래 아사드 정권 시기 시리아는 정권을 비호해 주던 이란과 러시아의 세력권이었다. 그러나 작년 말 시리아에서는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이전에 반군(叛軍)이 이끌던 신정부가 들어섰는데, 많은 논평가들은 이를 두고 시리아가 튀르키예의 세력권에 놓이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남부의 드루즈교도 지역을 점령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을 주장하는 모양새다.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왕정 국가들도 시리아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사실 근대 유럽에서 보였듯이 한 번 세력권 경쟁이 시작되면 이런 쟁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강대국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자신의 세력권에 다른 강대국들이 침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상호 갈등을 벌인다.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는 이를 두고 ‘강대국 정치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단층선 충돌’
우리나라처럼 강대국이 아닌 국가들은 제국과 세력권의 부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한 가지 편한 길은 어느 나라의 확실한 세력권에 편입되는 길이다. 러시아와 연대(連帶)하는 벨라루스나 튀르키예와 공조하는 아제르바이잔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안정적이고, 오히려 제국들로부터 도움도 받는다.
사실 한국도 원래 미 제국의 보호를 받으며 비슷한 전략을 오랜 기간 취했었다. 하지만 ‘의존 전략’은 제국의 권력이 교체될 경우에는 꽤나 위험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한반도에 대한 청(淸) 제국의 세력권이 무너지자, 러시아와 일본이 들어오며 조선은 멸망했다.
이런 점에서 제국의 세력권이 서로 충돌하는 단층선(斷層線)에 놓이지 않게끔 우리의 위치를 찾는 일은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는 바로 그 단층선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트럼프의 미국이 동맹(혹은 세력권)과의 관계에 충격을 가하고, 시진핑의 중국이 인도-태평양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며 한반도도 일정 부분 세력권 간 단층선으로 변해가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와 밀착한 북한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한반도는 아직 세력권 충돌의 최전선(最前線)은 아니지만, 위기가 고조될 조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은 특정 제국에 무작정 의존할 수도 없고, 세력권의 충돌이 가시화되는 것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이제 ‘우리의 세력권’을 만들기 시작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물론 혼자서는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제국적 야심이 없는 국가들끼리 뭉쳐서, 합종(合從)을 통해 세력권을 형성하면 제국이 충돌하는 단층선을 바깥으로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제국적 능력은 있지만 제국의 야심을 버린 국가인 일본은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합종의 파트너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와 문화를 바탕으로 인도-태평양 제국(諸國)을 모아 공동번영하는 세력권을 만들 수 있다면, 시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조선왕조의 비극을 우리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국의 세력권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제국의 세력권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왔음을 명심하자.⊙
이러한 제국의 귀환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수도 없이 많다. 그중에서 국제정치적인 함의를 살펴보자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력권 정치’의 귀환일 것이다. 팽창의 기억은 제국의 역사에서 언제나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모든 제국은 자신들이 문명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정치체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自意識)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속 수많은 제국이 바깥으로 팽창을 시도하고, ‘문명적 교화’를 통해 새로운 신민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 러시아의 침공은 제국의 등장과 함께 팽창 시도로 귀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신호다. 물론 무력(武力) 침공은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다. 정치·경제·문화 등 각종 수단을 총동원하여 인접국을 자신들의 세력권하에 놓고자 하는 제국의 시도는 늘 있어 왔다. 세력권 정치를 고대(古代)부터 현재까지 언제나 있었던 일상적 현실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리메스와 장성
정착 생활이 시작되자, 인간은 생존과 지배를 위해 ‘공간’을 둘러싼 경쟁에 나섰다. 도시와 산, 평야와 강은 단순한 삶의 터전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통제가 따르는 자원이 되었다. 이러한 공간 통제는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한(漢)나라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등장하며 제국적 의미의 세력권 개념으로 발전했다.
로마는 지중해를 ‘우리 바다’로 지칭했고, 갈리아(프랑스), 브리타니아(영국), 북아프리카로 계속해서 팽창해 나갔다. 국경 북쪽의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들을 포섭하여 그들과 거래 관계를 맺으며 관리해 나갔다. ‘리메스’라고 불리는 로마의 게르만 국경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로마 세력권에 들어오고자 하는 게르만 부족들이 접촉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주(周)나라 시대에 시작된 중화사상은 세계를 중원의 문명[華]과 바깥의 오랑캐[夷]로 나누는 인식의 틀이었다. 중원 문명이 계속 발전하면서 장강, 사천 분지, 오르도스는 점차 중국의 천하 질서를 받아들이며 ‘중국화’되었다. 진(秦)을 계승하여 통일 제국을 세운 한나라는 유교와 법가(法家)에 입각한 중화 문명의 표준을 정비했다. 고조선, 남월(南越), 흉노를 향한 한무제의 원정은 중화 문명이 미치는 세력권을 전통적인 경계 바깥으로 확장하려는 제국적 시도의 정점(頂點)이었다. 만리장성은 중국이 만든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었다.
로마와 한이 멸망하고 중세(中世) 시대가 시작되며 이러한 제국적 정치는 축소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제국은 꾸준히 생겼다 사라졌고,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로마와 한이 만든 제국적 통치술을 결합하여 자신들만의 세력권을 구축하고자 했다. 비잔티움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아랍의 칼리프 제국, 돌궐과 당(唐) 제국, 몽골 세계제국에 이르기까지, 이 제국들은 기독교, 이슬람, 유교 등의 보편원리와 군사력, 상업적 부(富)를 바탕으로 제국 외부의 종족들을 교화, 포섭하고 정복해 나갔다.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베스트팔렌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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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교황 알렉산데르3세의 중재 아래 세계를 분할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했다. |
당시의 제국이었던 오스만과 명(明)나라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조약이었지만, 토르데시야스가 오늘날 세계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막대했다.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스페인어를 쓰게 된 것, 그중에서 브라질만큼은 포르투갈어 국가로 남은 것, 태평양의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가 되고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포르투갈 식민지가 된 것도 모두 토르데시야스의 세력권 분할의 유산이다. 두 국가는 가톨릭 선교를 통한 ‘문명화’를 통해 자신들의 정복과 약탈을 정당화했다.
16세기 들어 유럽 안에서는 세력권을 둘러싼 격돌이 발생했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통제권에서 벗어나려는 지역 간에 갈등이 발생, 폭발한 것이다.
신교(新敎)와 구교(舊敎)의 전쟁은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면서 마무리되는데, 개별 국민 국가가 국경 내부에서만큼은 확실히 주권을 행사하고, 종교 문제로 인한 충돌을 막기 위해 종교의 관용을 강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국제 질서의 근간이 되었지만, 동시에 세력권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투쟁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누르고 상업적 패권(覇權)을 행사하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인도, 인도네시아 등지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격돌했다. 이 지역들은 기독교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권 존중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고, 서유럽 국가들의 세력권 투쟁의 장으로 금세 전락했다.
유럽의 세력권 경쟁
물론 유럽 대륙도 언제까지나 예외는 아니었다. 강대국들의 완충(緩衝)지대 역할을 하던 도시 국가, 봉건 영주(領主) 질서는 국민 국가가 발전하며 빠르게 저물고 있었고, 유럽의 각 지역은 이 와중에 국력을 배양한 강대국들에 의해 분할되기 시작했다.
이는 유럽에서 계속되는 전쟁을 만드는 주요 동기이기도 했다. 유럽의 세력권 경쟁은 제로섬 게임이었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어느 지역에 대해 세력권을 주장하면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로 그 지역이 자신의 세력권임을 내세우며 충돌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력권 분할 과정에서 유럽 각국은 고도의 외교적 기술과 의례를 발전시키고, 실패하면 전쟁을 감수하기까지 했다. 예컨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경우 ‘평화적’으로 폴란드를 분할 합병하며 폴란드는 세력권 정치의 대표적 희생자가 되었다. 한편 스페인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으려던 프랑스는, 경쟁국인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반발을 사며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다.
그래도 이러한 극한 갈등은 1815년에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가 ‘유럽 협조 체제’를 만들면서 상례화된 조정으로 수습될 수 있었다. 유럽 협조 체제는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라는 5대 강대국이 유럽에서 각자의 세력권을 합의하고, 세력권에 변동이 있을 것 같을 때는 상호 합의와 조정을 통해 갈등을 외교적으로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유럽 협조 체제는 시작부터 삐걱거렸지만, 유럽 강대국들은 그럭저럭 서로 간의 큰 전쟁을 피하며 식민지 팽창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세력권 정치는 이제 전 세계로 다시 뻗어갔다.
‘먼로 독트린’과 ‘그레이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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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 독트린에 의거해 미주대륙이 미국의 세력권임을 풍자한 1896년의 시사 만화. |
첫 번째 타자는 신생 독립국이던 미국이었다. 1823년에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는 유럽 강대국들이 남북 아메리카에 개입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며 아메리카를 사실상 미국의 세력권으로 선포했다. 당시 미국의 힘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列强)들보다 훨씬 약했기에 유럽 열강은 먼로 독트린을 처음에는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 영국령 캐나다와 국경 조정,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을 통해 정말로 아메리카를 세력권으로 거느릴 강대국으로 팽창해 나갔다. 이후 미국 자본은 라틴아메리카를 실질적인 세력권으로 두며 상업, 금융에서도 이득을 확보했다.
유라시아에서는 러시아가 세력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미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는 제국의 두 도구인 상업과 군대를 바탕으로 남쪽의 이웃들을 영향권으로 포섭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정교회 슬라브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했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코카서스를 획득했으며, 중국으로부터는 연해주(沿海州)를 얻어내 태평양 출로(出路)도 확보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가 인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자국의 세력권을 위협한다고 우려하며, 오스만과 페르시아, 중국에서 자신만의 세력권을 공고히 하고자 경주했다. 두 강대국의 세력권이 수십 년에 걸쳐 충돌하는 과정은 훗날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
먼로 독트린과 유사했던 러시아의 세력권 선언은 외무대신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가 1864년에 유럽 각국에 보낸 ‘고르차코프 회람서한’이었다. 고르차코프는 이 서한에서 러시아가 유럽에서 세력권을 확장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변경을 안정화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며 러시아의 입장을 설명했다. 영국은 이것을 인도를 위협하는 러시아의 세력권 팽창으로 간주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첩보와 외교 활동을 통해 러시아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의 노력은 대체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영국은 극동에서의 세력권 경쟁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이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던 19세기 말, 러시아는 만주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으며 조선에까지 진출할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두 국가의 세력권에 도전을 가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당연히 러시아의 해상 진출에 촉각을 기울이던 영국이었다. 만약 러시아가 뤼순과 블라디보스토크 너머 한반도 남해안에도 항구를 확보하면 홍콩과 같은 극동 식민지들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둘째는 한반도에 인접하여,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새롭게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일본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하는 이미 에도(江戶) 막부 말기부터 일본에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을 배타적 세력권으로 삼으면 일본의 장차 팽창이 차단될 것이고, 나아가 일본 본토가 러시아군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라 우려했다.
육군대신과 총리를 지낸 일본 육군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利益線)’ 안에 있는 지역으로 규정하고 러시아의 조선 장악에 군사적인 대응까지도 검토했다. 이러한 세력권 정치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조선은 영국, 일본, 러시아가 얽힌 쟁패(爭霸)의 장이 되며 최종적으로 일본 제국에 합병되고 만다.
‘최후의 제국 전쟁’
지구적으로 확대된 세력권 정치는 말 그대로 전 세계를 전쟁터로 삼는 ‘세계대전’으로 폭발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지구상 대부분의 땅은 식민지나 반(半)식민지의 형태로 열강들의 세력권으로 분할됐다. 이제 제국들은 팽창을 위해서는 다른 제국의 세력권을 명시적으로 침범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을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세력권 경쟁, 중동을 세력권으로 삼고자 한 독일의 ‘세계정치(Weltpolitik)’ 정책과 영국·프랑스의 충돌이 맞물리며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하며 각지에서 반식민지 독립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 실질적인 목적은 사실 패전국들의 세력권을 분할하는 데 있었다.
해소되지 않은 세력권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20년 뒤에 더 끔찍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독일은 ‘생활권(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을 주창하며 동유럽 전체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두고자 폴란드와 소련을 침공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에 의해 분할된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두고자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다. 일본은 이 세력권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 전쟁’으로 명명했다. 그래서 전쟁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이 전쟁들을 일컬어 ‘최후의 제국 전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냉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어나자 각국은 제국의 세력권 정치가 인류 문명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품게 되었다. 초(超)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은 추축국(樞軸國)의 제국을 분쇄하고,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도 해체하며, 주권 국가에 기반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미소(美蘇) 합의로 탄생한 유엔은 주권 존중과 무력에 의한 국경 변경 금지를 원칙으로 삼으며 국제 외교에 있어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제국의 세력권이라는 현실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동유럽에서만큼은 세력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커다란 동기가 있었다. 소련은 동유럽을 언젠가 다시 서쪽에서 올지 모르는 침공에 대한 완충지대로 삼고자 이 국가들에 군대를 주둔하고 공산당 정권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소련의 세력권은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인정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 사후(死後) 들어선 트루먼 행정부가 스탈린의 동유럽 점령과 세력 팽창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서면서 미소 관계는 점차 험악해졌다.
한편 소련을 의심했던 미국 역시 자신만의 세력권을 더 공고히 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미국은 서유럽에서는 나토(NATO) 동맹을 구축(構築)하고, 아시아에서도 소련을 둘러싼 튀르키예, 이란, 필리핀, 대만, 대한민국의 반공(反共) 정권을 후원하며 대(對)소련 봉쇄를 위한 세력권을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러일 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한반도는 다시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이 충돌하는 전장이 되며 6·25의 비극이 벌어졌다.
‘은밀한 세계 제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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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전략. 사진=조선DB |
미국과 서방 진영에서는 이에 제국의 시대가 마침내 끝났으며, 자유주의 규칙에 의하여 운영되는 평등한 주권 국가들의 국제 질서가 자리 잡았음에 환호했다.
물론 탈(脫)냉전기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국제 정치의 이면에는 여전히 세력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에서 여전히 무역·금융·군사적인 영향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나 중앙아시아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일본은 정치적인 영향력 대신에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각지에 일본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경제적 세력권을 구축했다.
그리고 역시 가장 중요한 제국은 미 제국이었다. 냉전은 끝났지만, 제국의 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지구 전역’이 미국이라는 단일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극(單極) 질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은행과 IMF 등 국제 금융기관, 기축통화(基軸通貨)인 달러를 통해서 경제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5대양 6대주 전체를 작전 구역으로 삼는 미군기지와 항공모함은 언제든 세계 제국의 힘을 보여줄 수 있었다. 미국은 자유주의라는 이념과 법적 체계를 통해서 주권 국가 간의 평등을 역설했기에, ‘전 세계가 세력권’인 미국의 제국적 성격은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권 국가 간의 문제를 조정하고, ‘제국의 부활’을 시도하는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곳이 한 군데밖에 없음은 누구나 알았다. ‘은밀한 세계 제국’인 미국이었다.
하지만 미국 단극 패권은 유라시아 각지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주장하는 제국들이 부상하면서 도전을 맞이했다. 이미 이전부터 조짐은 보이고 있었다. 2000년대부터 러시아는 탈소련 국가들의 자유화 혁명(색깔 혁명)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고, 훗날에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에 군사적 개입까지 감행했다. 이란은 미국이 들쑤셔 놓은 중동(中東)에서 조용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고, 레바논·시리아·이라크·예멘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치열한 지정학(地政學) 경쟁 펼쳤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과도한 군사 개입에 지친 미국은 러시아와 이란의 도전에 직접적으로 대처할 역량이 없었다. 한 번 빈틈이 보이자 패권은 연쇄적으로 위기에 처했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체제 이후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자국의 전략적 통로를 확대하고, 특히 미얀마·파키스탄 등 인도양 연안국에서 세력권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제국의 첨병으로 항만, 파이프라인, 도로가 중국 자본을 통해 바쁘게 건설되기 시작했다.
인도양 지역을 전통적 영향권으로 여겨온 인도는 일본이 제시한 ‘인도-태평양 구상’에 참여하며 중국의 도전에 응전(應戰)해 나갔다.
한편 에르도안의 튀르키예도 발칸과 중동 등지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가며 ‘신(新) 오스만 세력권’을 쌓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은 나토 회원국으로서 세계 제국 미국에 전반적으로 잘 협조했지만, 오스만 제국 이래로 자국과 연고가 있는 인접국들에 정치·경제·문화적 영향력을 전방위적으로 발휘하기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튀르키예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독자 노선을 바탕으로 세력권 경쟁에 뛰어든 대표적 국가가 되었다.
‘강대국 정치의 비극’
이미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부활할 조짐을 보인 유라시아 강대국들은 2020년대부터 더 노골적으로 제국적 행보를 보이며 세력권 정치를 시작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력권 정치가 과거처럼 상시적인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를 전 세계에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계 제국인 미국마저도 그 부담을 끝내 짊어지지 못해 트럼프 시대로 이행한 상황에서 연쇄적인 세력권 경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력권 경쟁이 가장 비극적으로 두드러지는 또 다른 사례는 시리아다. 본래 아사드 정권 시기 시리아는 정권을 비호해 주던 이란과 러시아의 세력권이었다. 그러나 작년 말 시리아에서는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고 이전에 반군(叛軍)이 이끌던 신정부가 들어섰는데, 많은 논평가들은 이를 두고 시리아가 튀르키예의 세력권에 놓이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남부의 드루즈교도 지역을 점령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을 주장하는 모양새다.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왕정 국가들도 시리아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사실 근대 유럽에서 보였듯이 한 번 세력권 경쟁이 시작되면 이런 쟁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강대국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자신의 세력권에 다른 강대국들이 침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상호 갈등을 벌인다.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는 이를 두고 ‘강대국 정치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단층선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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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왼쪽)은 2021년 6월 15일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만나 양국 간 협력을 다짐했다. 사진=AP/뉴시스 |
사실 한국도 원래 미 제국의 보호를 받으며 비슷한 전략을 오랜 기간 취했었다. 하지만 ‘의존 전략’은 제국의 권력이 교체될 경우에는 꽤나 위험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한반도에 대한 청(淸) 제국의 세력권이 무너지자, 러시아와 일본이 들어오며 조선은 멸망했다.
이런 점에서 제국의 세력권이 서로 충돌하는 단층선(斷層線)에 놓이지 않게끔 우리의 위치를 찾는 일은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는 바로 그 단층선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트럼프의 미국이 동맹(혹은 세력권)과의 관계에 충격을 가하고, 시진핑의 중국이 인도-태평양에서 자신의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며 한반도도 일정 부분 세력권 간 단층선으로 변해가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와 밀착한 북한의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한반도는 아직 세력권 충돌의 최전선(最前線)은 아니지만, 위기가 고조될 조건이 조성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은 특정 제국에 무작정 의존할 수도 없고, 세력권의 충돌이 가시화되는 것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이제 ‘우리의 세력권’을 만들기 시작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물론 혼자서는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제국적 야심이 없는 국가들끼리 뭉쳐서, 합종(合從)을 통해 세력권을 형성하면 제국이 충돌하는 단층선을 바깥으로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제국적 능력은 있지만 제국의 야심을 버린 국가인 일본은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합종의 파트너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와 문화를 바탕으로 인도-태평양 제국(諸國)을 모아 공동번영하는 세력권을 만들 수 있다면, 시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조선왕조의 비극을 우리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제국의 세력권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제국의 세력권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왔음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