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세대 출신 만능 공작원 키워라”… 김정일 특명
땔감도 없는 당 간부의 집
집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는 심하게 앓고 계셨다. 하지만 원래 의지가 강한 분이라 일어나 앉아 내 인사를 받으셨고 내가 준비해 간 스웨터를 받으시고는 죽기 전에 장손이 사다 주는 옷을 다 입어 본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할머니는 1년 전부터 당장 돌아가실 것처럼 무척이나 심하게 앓으셨는데 그때마다 큰손자가 보고 싶다고 나를 찾으셨다고 했다. 아마도 큰손자를 이렇게 만나보려고 그러신 것 같다며 이제는 나를 보았으니 돌아가셔도 눈을 감으실 것 같다고 했다.
휴가 1주일 동안 나는 부모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들을 만나 함께 술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 있었던 일들과 업무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든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하면 안 되는 보안사항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지내면서 보니 땔나무가 거의 없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할머니 간병을 하느라 가을에 땔나무를 미처 마련하지 못했고, 또 조금 해 놓은 것이 있기는 하나 날라 오지 못했다고 하셨다. 사실 아버지가 1개 리(里)의 당 조직을 책임진 초급 당비서(리당비서)를 하셨지만 워낙 말씀이 없고, 특히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셔서 집에 땔나무가 없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른 간부에게 이야기해서 나무를 실어 오게 했다.
다시 집을 떠나 초대소로
그 후 휴가 기일이 다 되어 집을 떠나야 했는데, 군당(郡黨)에 이야기하니 군당 선전부장이 도당(道黨)에 회의 때문에 가는데 같이 차를 타고 가자고 했고, 나는 군당 선전부장과 같이 지프차를 타고 해주까지 갔다. 막상 군당 선전부장을 만나고 보니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사로청위원장을 할 때 사로청지도원을 했던 강성원이라는 사람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해주에 도착한 후 도당 11과 지도원이 구입해 준 승차권으로 열차를 타고 평양 대동강역에 도착해 담당 지도원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초대소로 갔다.
초대소에 복귀한 후 휴가 기간에 있었던 일을 보고했는데, 나는 담당 지도원에게 집에 땔나무가 없어 대책을 세운 것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다시는 추운 겨울에 휴가를 안 가겠다”고 덧붙였다. 도당에서 휴가를 위해 차를 보장해 준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아버지에게 떠넘겨 결국 아버지만 고생시켜 드렸는데 다음부터는 아버지에게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울러 트럭 적재함에 올라타고 3시간 동안 떨면서 집에 도착했는데, 그렇게 고생하면서까지 휴가를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당 지도원은 앞으로 책임지고 대책을 세우겠다고 내게 다짐했다. 그래서인지 그 후부터는 휴가 갈 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휴가를 다녀온 후에도 사상이론교육과 공작 실무교육 등을 계속 받았고, 얼마 후 사회에 나가서 하게 될 노동 현실 체험 준비도 했다.
공작원을 지도핵심으로 키워라
1980년대 초 김정일은 공작원들의 세대 교체와 관련하여 새 세대(신세대) 청년들을 선발하며 그들을 지도핵심으로 키울 것을 강조했다. 새 세대라는 명칭은 북한 영화 ‘조선의 별’에 나오는 김일성의 청년 시절 동료들을 지칭하는 ‘새 세대 공산주의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만 해도 공작원 대부분은 6·25전쟁을 전후로 월북한 남한 출신이었고, 그들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남한에서 대공수사 기관의 방첩 활동이 강화되고 연고자들의 자수 권유나 주민들의 간첩 신고, 혹은 공작원의 자수와 변절 등으로 간첩망 붕괴 사고도 잇따랐다. 따라서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할 수 있는 공작원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이에 따라 북한 출신에 의한 대남 공작원 세대 교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이 강조한 지도핵심 육성 방침은 바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새 세대 청년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하면 그들 대부분이 사회생활 경험이 적기 때문에 이들을 능수능란한 공작원으로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여건에서 여러 측면에서 부족한 젊은이들을 능력 있는 공작원으로 키우기 위해 제시된 것이 바로 김정일의 지도핵심 육성 방침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핵심 육성 방침의 첫 번째 핵심 내용은 공작원을 당과 수령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투철한 사상적 각오를 가진 사람으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주체의 혁명이론과 전략전술로 철저히 무장하고 정세를 스스로 판단하며, 조성된 정세에 맞는 투쟁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것은 물론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 또한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정세 판단 능력과 책략 수립 능력·조직 지휘 및 운동 지도 능력을 소유한 사람, 혁명적 사업 방법과 인민적 사업 작풍, 그리고 전술·기술적 능력을 갖춘 공작원으로 육성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자질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지도핵심’이라는 것이다.

김종태와 조르게 같은 사람으로 키워라
김정일이 강조했던 지도핵심의 징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공작원을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당시 서울시당위원장을 지냈던 김종태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북한으로 치면 도당책임비서(도지사)나 중앙당 부장(장관) 급으로 키우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 공작원들을 만능으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에서 활동한 구(舊)소련의 이름난 공작원이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실제로 일본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는데, 지적인 수준에서는 조르게처럼 어느 한 분야의 박사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다방면으로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소유한 ‘박식가’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육체적인 능력이나 군사·기술적 측면, 그리고 사람·조직을 다루는 면 등 모든 측면에 있어 수준급으로 키우라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이러한 지도핵심 육성 방침을 관철한다며 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가 새롭게 도입한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이 노동 단련(노동 현실체험) 프로그램과 간부현실체험 등이다. 북한 출신 공작원을 남한 사람처럼 만들기 위해 도입한 적구화 교육, 즉 한국인화 교육과 그 후에 새로 생긴 연구원(대학원)과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하에서는 독재자가 원한다면 필요한 천재들을 전국에서 모두 불러 모아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집중적으로 투입하거나 투자하는데, 북한이 핵을 개발하기 위해 집중 투자하고 대남 공작원 양성을 위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세우고 인재들을 엄선한 다음 인간병기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4년간의 혹독한 단련을 거친 뒤 노동 단련과 간부 현실체험을 거쳐 적구화 교육에 투입된, 바로 이 ‘새 세대 출신’ 1세대 공작원인 셈이다.
막일꾼으로 변한 공작원
먼저 노동 단련(또는 노동 현실체험)과 관련해 이야기하고 넘어 가자.
공작원의 ‘노동 단련’이란, 말 그대로 실제로 노동을 해 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각종 방법이나 기술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공작원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한 훈련을 실시한다. 그래서 ‘노동 현실체험’이라는 표현보다는 ‘노동 단련’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한마디로 막노동을 직접 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어렵고 힘든 노동 현장이 훈련 장소가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각종 건설 현장이나 광산·제철소 등 주로 육체적으로 힘을 많이 써야 하는 현장에 가서 일을 하게 된다. 노동 단련은 원래 공작원들에게 시키던 직업기술 훈련을 변형시킨 것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연락부 공작원들에게 적용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첫 번째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물론 김정일의 지도핵심 육성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또 다른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그전까지는 공작원들이 나이 많은 남한 출신이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출신의 젊은 세대로 바뀐 것과 관련된다.
나이 많은 공작원들은 이미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노동 단련을 다시 시킬 이유가 없었는데 1980년대 당시 젊은 공작원들은 사회에서 직업을 갖고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공작 방향이 달라진 것과 관련된다. 그전처럼 남한에 침투해 공작 거점을 구축하고 장기적으로 잠복해서 직업 활동도 하며 사람들을 사귀고 그 과정에서 공작 여건을 조성해 점차적으로 공작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사전에 공작 대상을 미리 선정한 뒤 남한에 침투 후 단기간 내에 그를 포섭하고 복귀하는 속전속결의 전술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공작원들은 남한 침투 후 복귀로 차단 등과 같이 예상치 못한 사정이 발생해 공작 기간이 연기되지 않는 한 따로 일정한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직업기술 또한 배울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대학을 갓 졸업했기 때문에 노동을 해 본 적이 없거나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 공작원 집단의 주류를 이루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공작원들에게 사회 현실을 체험시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노동 단련’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 단련은 모든 공작원이 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없는 공작원에 대해서만 실시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작원으로 소환된 대상들이 포함되는데, 기간은 대체로 6개월 또는 1년이었다.
노동 단련을 할 때는 해당 노동 현장에 가서 그곳 노동자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일하며, 일한 만큼 월급도 받는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 방법을 익힐 뿐만 아니라 건전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배양하며 수양을 쌓고 사회 현실과 군중의 심리 또한 파악하여 그들을 움직이는 방법을 체득하는 데 그 기본을 두고 진행한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에서는 역사 교육을 어떻게 하나요? 예를 들어, 우리처럼 구석기시대부터 쭈욱 내려와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 등의 시대순으로 역사 교육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특히나 우리 분단의 역사에 관해서는 어떤 식으로 배우셨는지요?
아버지 : 북한에서도 역사 교육은 한국에서처럼 구석기시대부터 내려오면서 신석기시대·봉건시대(조선시대)·일제 강점기 등의 시대순으로 역사 교육을 하고 있어. 선대 역사가들이 인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한 것에 대해 북한이 더 이상 부정할 수는 없는 거니까 북한도 어쩔 수 없이 시대별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어.
그렇지만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인류 역사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시대 별로 역사를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이 왕조 체제를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거나 외세에 반대해 투쟁했던 내용 위주로 가르치지.
예를 들면 조선시대에 뛰어난 왕들이 세운 업적은 전혀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아무리 대학을 나왔어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나도 대남 공작원을 할 때까지는 몰랐으니까….
특히 현대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김일성이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독립시켰다고 가르친다든가, 남북 분단이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어.
김동식 20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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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37>
건설 현장 노동 단련… 체중 10kg ‘쏙’
노동당에 정당원으로 입당
나는 휴가를 다녀온 후부터 노동 단련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공작원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되기 때문에 왜 내가 건설 현장에 와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 위장 구실을 마련하는 것을 기본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나와 박철만은 호위국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집단 제대하고 무역회사인 ‘금강무역상사’에서 근무하던 중 자금 관리를 제대로 못해 혁명화 나온 사람으로 위장했다. 말하자면 공금을 횡령했기 때문에 노동을 통해 그 죄과를 씻는 차원에서 노동 현장에 나간 것으로 구실을 마련했다.
실제로 누가 봐도 믿을 수 있게 나이를 3년 늘려서 공민증(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소지했다. 공민증은 지도원들이 내 가명과 가짜 신상정보를 토대로 안전부(경찰서)에 가서 직접 만들어 왔다.
이러한 준비 끝에 나는 2월 하순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에 있는 평양시 중구 종합주택건설 사업소 조립 직장 노동자로 배치되어 노동 단련을 했다.
한편, 나는 노동 단련을 나가기 직전인 2월 중순에 노동당의 정당원(正黨員)이 되기 위한 입당 심사를 받았다. 정당원 입당 심사는 처음 입당할 때처럼 노동당 규약과 함께 현행 노동당의 정책 등에 대한 학습을 얼마나 했는지 테스트하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당시 나를 담당했던 최 지도원과 담당 과장이 초대소에 들어와 당규약과 10대 원칙, 현행 노동당의 정책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질문했고, 앞으로도 맡겨진 임무 수행은 물론 생활을 잘 하라고 한 다음 정당원 입당 심사를 끝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3월 중순 노동 단련을 위해 평양 만경대 구역 광복거리 건설 현장에 나가 한창 건설 노동을 하던 중 당원증을 수여받아 정식 당원이 되었다. 당시 나는 담당 지도원과 함께 평양시 모란봉 구역에 있는 3호 청사 정문 앞 대기실에 가서 연락부장이었던 정경희의 입회하에 입당 선서를 하고 그를 통해 노동당 당원증을 받았다.
본격적인 건설 노동 시작
내가 평양시 종합주택건설사업소 노동자로 배치돼 노동 단련을 하게 된 현장은 평양시 만경대 구역에 새로 짓고 있던 광복거리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다. 광복거리는 1989년 여름 남한의 임수경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참가하여 화제가 되었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대비해 조성하고 있던 신도시였다. 일종의 선수촌이었다.
당시 나는 서평양역 앞에 위치한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의 건설노동자 합숙에서 그곳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을 했다. 대체적인 일과는, 평양 서성구역 하신동 합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7시경 출발하여 약 15분 동안 걸어서 혁신 전철역까지 이동한 다음 지하철을 타고 만경대구역 전철역인 ‘광복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약 10분 동안 이동해서 8시경 현장에 도착해 작업을 한 뒤 저녁 7시경에 퇴근하는 것이었다.
원치 않았던 다이어트
그 당시 북한은 지금처럼 배급을 못 주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식량이 모자라 외국에서 식량을 적지 않게 수입해 왔다. 내가 지냈던 합숙소에서도 베트남에서 수입해 온 안남미로 밥을 지어 주었는데 풀기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기름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염장무 국과 반찬이라고는 염장무 무침 한 가지가 전부여서 아침을 먹고 건설 현장에 도착하면 소화가 다 되어 버려 배고픔 때문에 일할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합숙소에서 점심 도시락으로 싸 준 것도 먹으려고 뚜껑을 열면 밥이 한쪽으로 쏠려 절반도 안 되었다. 그나마 같이 일하던 아가씨들이 도시락을 바꿔 먹자고도 하고, 어떤 때에는 아예 자기 집에서 도시락을 두 개씩 가져와 하나를 건네주어 배불리 먹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도 모자라 월급으로 받은 돈을 전부 음식 사 먹는 데 썼지만 허기를 달랠 수는 없었다.
결국 건설 현장에 투입된 지 2개월 만에 체중이 10kg 이상 감소했다. 그야말로 원치 않았던 다이어트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다 못한 담당 지도원이 “단련을 시킨다고 하다가 사람 죽이겠다”고 하면서 초대소에서 육류 통조림과 기름·과자 등을 몰래 가져다주었고 그것들로 영양 보충을 해 가면서 겨우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었다. 먹거리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노동은 전부 인력에만 의존하는 수(手)작업이어서 더 힘들었다.
특히 아파트 기초공사를 위해 땅을 팔 때는 포크레인과 같은 기계 장비는 아예 없어 전부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으로 파야만 했다. 2월이라 추운 겨울이어서 땅이 얼어 있었는데, 곡괭이질을 하다 보니 손이 저려 나중에는 수저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건설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는 건설 현장에 있는 휴게실에서 잠을 자면서 주야로 일을 하기도 했다.

노가다 판에서 꽃 핀 사랑
노동 단련 과정 중엔 이런 일도 있었다. 나와 박철만이 일하던 작업반에서는 전체 인원을 3개 팀으로 나누어 8시간씩 3교대로 일을 하도록 했는데, 박철만도 나와 같은 시간대에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만이 다른 팀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가 왜 팀을 바꾸는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야간작업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에 박철만이 당시 직장 통계원(경리) 아가씨와 같이 출근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후에도 박철만과 경리 아가씨가 같이 출근하는 모습이 여러 번 보였고 직장 내부에서는 그들이 연애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와 박철만은 일하는 시간이 달라 같은 방을 쓰면서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고, 또 당시에는 그의 차가운 성격 때문에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당시 박철만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었고 이미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테니 별로 나쁠 것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관계는 굉장히 가까워졌는지 노동 단련을 마치고 초대소로 철수할 때는 결혼 문제까지 거론될 정도로 발전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20대 초반의 나는 그들이 그토록 가까워졌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노동 단련이 끝날 즈음 내가 박철만에게 직접 사실 관계를 물어보았을 때도 그는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내가 그 두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박철만과 헤어진 후 담당 지도원을 통해서였다. 박철만은 노동 단련이 끝난 후 나와 헤어져 각각 1인 공작조로 활동하다가 그로부터 1년 후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이 발견되어 제대했다. 그 후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갔다는데 연애하던 건설업체 경리 아가씨와 결혼해 함께 갔다고 한다.
나는 약 6개월간에 걸치는 노동 단련을 마치고 8월 중순에 건설 현장에서 철수해 다시 평양시 순안 구역 화대천 초대소로 돌아왔다. 이때 보안을 지킨다며 갑자기 철수하는 바람에 그곳 노동자들과 미처 인사도 못 하고 초대소로 복귀하게 되었다. 초대소에 돌아온 후 노동 단련 결과보고서를 작성해 담당과에 제출하고, 며칠 후에는 담당 과장과 지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에 대한 종합 평가를 했다.
남포연락소 전투원들과의 첫 합동훈련
그 후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사상이론 학습과 여러 가지 훈련을 다시 했다. 엉망이 된 건강 상태는 초대소에서 잘 먹으며 적당히 운동을 병행했더니 2개월 정도가 지나 회복되었다. 나는 우리가 노동 단련을 나가 있는 사이에 발표된 김일성·김정일 노작이나 노동당의 방침 등을 읽고 기본사상을 발췌하는 방법으로 사상이론 학습을 했다.
노동 단련을 끝내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남포갑문 위쪽에서 수영 및 잠수 훈련을 진행했다. 이때에는 남포연락소 전투원 2명과 함께 연락소 초대소에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훈련을 진행했는데, 조장 박철만이 끝내 마지막까지 훈련을 채우지 못하고 판정 역시 격술 훈련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나 혼자서만 받게 되었다. 이때 나는 4km 수영 판정을 대학 시절과 마찬가지로 1시간30분 이내로 주파했고, 잠수 역시 1km의 거리를 정해진 시간 내에 좌우 편차 없이 정침(正浸), 즉 정확히 도달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수영 및 잠수 훈련이 끝난 후 박철만은 병원에서 심장을 위주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이때 박철만을 검진한 담당 의사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공작원으로 선발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할 정도로 심장 상태가 안 좋았다. 종합검진 결과에 의하면 심각한 심장질환 환자였던 것이다. 종합검진을 받기 전까지는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그 누구도 그에게 심장병이 있는지조차 전혀 몰랐으니 그래서 물 속에만 들어가면 금방 숨이 차서 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언론 인터뷰나 방송 출연, 심지어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일에 대해서도 엄마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동생은 이유가 있다면 아버지가 충분히 판단하여 당당히 맞설 것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엄마를 안심시켜 왔습니다. 아버지가 결정한 이런 일련의 일들 때문에 위협이나 두려움 같은 직접적인 감정을 느껴 보신 적 있나요? 검거 후 3년 반이 지나서야 자유인의 몸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하시게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신변은 아버지 스스로가 지켜 오고 계시잖아요.
아버지 : 네 말처럼 내가 언론 인터뷰나 방송 출연을 하지 않은 건 내 신변에 대한 위협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어. 물론 누가 협박한다고 해서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을 내가 아니지만, 지금까지 누가 나를 해치겠다고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위협하거나 협박한 적은 없었어. 만약 그 누가 위협이나 협박을 해 왔더라도 나는 내가 해야 한다고 결심한 일을 했을 거야.
그렇지만 너희들이 어렸을 때는 네가 말한 것과 같이 내 얼굴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언론 인터뷰나 방송 출연 등을 가급적 하지 않았어. 그 이유는 내 얼굴이 언론에 나가면 너희들이 학교에 가서 놀림을 당하거나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너희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한마디로 너희들을 배려해서 그런 거였지. 그래서 너희 엄마도 내가 언론에 노출되는 걸 반대했던 것이고….
그런데 너희들이 어렸을 때도 몇몇 간첩단 사건 재판에는 증인으로 법원에 출석했어. 이때는 일단 내 얼굴이 공개되는 것이 아니니까 너희들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또 내가 증인으로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야.
그러다가 너희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내 존재와 과거에 대해 알게 된 다음부터는 TV 방송 출연을 비롯해 언론 매체와 인터뷰를 하는 등 공개 활동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예 얼굴을 드러내고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지.
김동식필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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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38>
공작조장과 불화… 간부 체험 앞두고 결국 결별
결국 해체된 공작조
그런 와중에 나와 박철만 사이에 끝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어느 날 초대소 요리사가 우연히 발견한 박철만의 수첩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수첩에는 공작조가 편성된 후 내가 지도원들에 대한 불평불만을 표출했던 내용들이 적혀 있었는데, 불평불만 또는 비판했던 내용들이 날짜·시간 별로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그는 다른 이유에서 적어 놓았다고 할 수 있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는 향후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경우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면밀하게 적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문득 화가 났고 한편으로는 생사를 함께할 조장으로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유치하다는 생각까지 들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수첩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조장 선생 허락을 받지 않고 그것을 본 것에 대해서는 우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수첩을 보니 내가 이때까지 이야기했던 내용들을 수첩에 적어 놨던데, 왜 그런 것이냐?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직접 내게 지적하면 될 것인데 시시하게 그게 뭐냐?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조장을 믿고 같이 공작을 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하는 일은 서로 신뢰가 있어야 함께 할 수 있는 일인데 이런 식이라면 신뢰가 쌓이기는커녕 의심만 커질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하기 힘들지 않겠냐? 어디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 봐라.”
그러자 그는 수첩을 몰래 보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화를 낼 뿐 다른 설명은 없었다. 그 일 이후 박철만과의 관계는 더욱 벌어졌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뜬 후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24시간 얼굴을 서로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 초대소에서의 공작조 생활은 부부가 같이 생활하는 시간보다도 더 길다고들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윗사람이 말을 안 하면 아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윗사람을 대하기가 어려워지고 서먹서먹해진다. 조장과 조원과의 관계 역시 상급자인 조장의 컨디션과 태도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좌우된다. 사실 박철만을 만난 이후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와 대화를 나눈 적은 불과 몇 차례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참을 만했는데 나이도 어리고 조원인 나로서는 그에게 계속해서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싫어져 나중에는 아예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둘 사이에 대화가 거의 없이 지나는 날이 많아지며 나는 하루하루 그를 마주하기가 더 고달파졌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정도는 시험을 보거나 글을 써서 발표하기 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수준을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훈련 결과는 바로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 수준이 금방 드러난다. 나는 어떤 훈련을 하든 좋은 결과를 받았던 반면, 박철만은 매번 도중에 그만두거나 도저히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 훈련을 중단 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장인 그는 아마도 이런 부분들이 콤플렉스가 된 모양이었다.
간부 현실 체험이 임박하면서 박철만이 나와 같은 공작조에서 생활하지 못하겠다고 먼저 담당 지도원에게 의견을 제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담당 과에서는 그의 심장병이 문제가 되어 그를 제대(해임)시키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는데, 결국 공작조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같은 공작조에서 생활하던 나와 박철만은 간부 현실 체험을 앞두고 갈라지게 되었다.

대남 공작을 하려면 간부도 해 봐야 한다
간부 현실 체험 역시 노동 단련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초에 제시한 김정일의 ‘새 세대 청년 공작원 및 지도핵심 육성’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실천 방안의 하나로 새로 도입된 공작원 교육과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중요한 테스트 과정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1980년대 초부터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새 세대 청년들이 대남 공작원 집단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작원으로 소환되었으므로 같은 또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해 볼 기회가 적었고, 따라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서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포섭 공작 및 지하당 조직 구축을 능숙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대인관계도 가져 보고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경험을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간부 현실 체험이다.
공작원들은 간부 현실 체험 과정에서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대인관계를 형성해 심화시키며 이를 통해 앞으로 하게 될 대상 포섭 요령을 습득한다. 또한 군중 앞에서 강연도 하고 연설도 해 봄으로써 군중 담력을 키우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에서 간부로 있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된 대상들은 이 훈련을 따로 하지 않고, 사회에서의 간부 경력이 없는 공작원들을 위주로 간부 현실 체험을 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먼저 공작원의 나이와 학력·경력 및 공작원 활동 기간·공작 경험 등을 감안해 간부 현실 체험을 할 업체나 직급을 결정하도록 했다. 보통 공장이나 기관·기업소 또는 군(郡)급이나 도(道)급 기관의 사로청 간부 등의 당 간부 직책을 맡아 수행하는 방법으로 진행하는데, 기간은 6개월이 대부분이고 특별한 경우 1년간 간부 현실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공작원들이 간부 현실 체험을 할 때 임명받는 직책은 대체로 공장·기업소 사로청위원장이나 초급당위원회 비서, 그리고 시·군(구역)당위원회 부장·부부장 등이다.
건설사업소 청년동맹 간부가 되다
나는 박철만과 헤어지기 전에 초대소에 같이 있으면서 간부 현실 체험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간부 현실 체험을 위해 파견될 곳은 평안남도 평성시에 있는 평성 도시건설 사업소였다. 당시 나는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청년조직인 사로청(현재 청년동맹) 위원장의 직급을 받았다.
간부 현실 체험에 임하기 전에 근로단체 간부 양성 기관인 평양 금성정치대학 졸업을 앞두고 실습을 위해 파견된 졸업생으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했다. 금성정치대학은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위치한 4년제 대학으로 청년동맹·직맹 등 근로단체라고 일컫는 노동당의 외곽 정치조직 간부들을 키워 내는 정치 대학이다. 이 대학을 졸업하면 청년동맹이나 직업총동맹·농근맹 등 정치 조직의 간부로 임명되며 나이가 들면 당 간부로 승진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금성정치대학 졸업생으로 위장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청년동맹 업무에 대해서 모르면 안 되었고, 또 그것이 현실 체험에서 해야 할 업무였으므로 금성정치대학에서 사용하는 교재들을 가져다가 독학으로 해당 업무와 관련된 내용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러한 준비를 마치고 그해 10월 초 평안남도 평성시로 이동해 평안남도 당위원회에서 관리·운영하는 도당(道黨) 초대소에서 숙식하면서 간부 현실 체험을 하게 되었다.
평남도당 초대소에서 간부 현실 체험
평남도당 초대소는 도당 청사로부터 직선거리로 150m가량 떨어진 곳 있는 2층 양옥집이었다. 1층에는 식사할 수 있는 홀과 주방, 요리사가 생활하는 침실이 있고 2층에 공작원들이 생활하는 침실·서재·응접실 등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 약 6개월간 체류하면서 간부 현실 체험을 했다.
도당 초대소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고 담당 지도원과 함께 평성시당 조직비서에게 찾아가 인사했다. 인사가 끝난 다음 평성시당 조직비서는 다시 평성시 사로청위원장을 불러 그에게 나를 소개하며 “중앙당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평성 도시건설 사업소 사로청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일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신분증도 발급해 주고 잘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그 후 평성시 사로청위원장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가서 평성 도시건설 사업소 사로청위원장의 직함으로 된 신분을 발급받았다. 그런 다음 평성 도시건설 사업소 사로청위원장을 불러 인사를 시켰다. 당시 평성 도시건설 사업소 사로청위원장은 평성 제1사범대학을 졸업한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는데, 그의 부친은 평안남도 직업총동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바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당시 내가 우선적으로 한 것은 같이 일할 대상들을 만나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같이 일할 대상들이란 하부 조직, 즉 직장과 작업반의 사로청 조직을 책임진 사로청 간부들이었다.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업무를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고, 또 그들이 앞으로 나와 같이 업무를 해 나가야 할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따로 만나기도 하고 집체적으로도 만나면서 각각의 성격과 취미·경력 그리고 조직의 문제점 등을 파악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문서를 통해 업무 내용을 파악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그런데 사실 문서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그것으로는 내가 알고 싶은 전체적인 업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당시 평성 도시건설 사업소 사로청 조직의 전반적인 현황과 걸려 있는 문제들을 파악할 수 있었고, 앞으로 현실 체험 기간에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정할 수 있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언젠가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엄마가 제게 펼쳐서 보여준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한 장의 종이를 보고 엄청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 근무하셨던 곳에서 사격훈련을 갔을 때 아버지가 직접 10점을 쏜 바로 그 표적지였고, 엄마가 그것을 잘 보관하고 계셨더군요.
가끔이지만 아버지의 사격 실력이나 공작원 훈련 등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실 때마다 아버지 말이 거짓말일 것이라는 댓글들이 어김없이 달리던데, 이럴 때마다 사실 저는 집에 있는 표적지를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유독 심하게 반발하거나 심지어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아버지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셨나요?
아버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부모가 다르고 태어나서 자란 조건과 환경도 다르기 때문에 생각 또한 다를 수밖에 없어. 같은 부모 밑에 태어난 형제도 모두 생각이 다르니까…. 따라서 각자가 갖고 있는 능력이나 실력 또한 마찬가지야. 어떤 사람들은 운동에 소질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에 소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수학을 잘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정말 군인 체질을 타고 나는 경우도 있어. 이렇게 모든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달란트가 다른 거야.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나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 반발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못났거나 자존심·자존감이 없는 사람이거나 자신의 실력·능력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 실력이나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 나에게 반발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그가 누구든 내 실력이나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반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맞서서 싸우거나 논쟁해 봤자 시간과 정력만 낭비하는 셈이니까 굳이 맞서려고 하지 않고 무시하고 넘어가는 편이야.
김동식 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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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39>
사로청 위원장들 기강 엉망… 회의 불참, 지각 예사
독자성 없는 꼭두각시 청년조직
북한의 청년조직은 어디까지나 노동당의 지도에 따라 당의 정책을 집행하는 노동당의 전위 조직이자 정치 조직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독자적으로 계획하고 전개하는 것이 전혀 없다. 아니,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각 기관·기업소의 청년동맹 조직은 중앙이나 시·도 단위 청년동맹 조직을 통해 받은 노동당의 지시대로 그 방침을 내려보내면 되는데, 주로 정치적인 행사나 모임 또는 경제적인 과제를 캠페인 식으로 해결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위에서 내려보내는 방침으로는 ‘김정일의 청년 시절을 따라 배우는 운동을 힘있게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것도 있고, 경제적인 과제의 경우엔 ‘고철·파동(구리) 수집 또는 농촌에 보낼 영농 자재 모으기’ 등 상급 단위 조직에서 주는 과제도 있었다. 이런 과제는 정해 준 기간 내에 캠페인 식으로 집행하면 된다. 다시 말해, 정기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생활총화나 회의 등을 제때에 하면 되고, 문제가 제기되는 시기마다 그것을 집행하기 위한 대책만 세우고 나면 그 외에는 크게 할 일이 없었다.
간부 현실 체험 훈련을 위해 건설사업소 청년동맹(사로청)에 파견된 나는 사로청(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 사업의 이런 본질적인 내용과 함께 건설사업소 청년동맹 업무의 문제점까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사로청위원장이 카드놀이나 장기와 같은 오락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각종 문서가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은 물론, 직장이나 작업반 단위의 조직들은 이미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어 있었다. 사실 북한의 건설사업소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말썽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 이런 문제들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여건을 파악한 후 앞으로 내가 현실 체험 기간에 중점적으로 해야 할 2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그 하나는 회의록을 비롯한 일체의 문건들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1·2개의 조직을 추려서 시범 단위인 ‘모범 초급단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다른 문제점들은 제기될 때마다 상황에 따라 대처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사람과의 사업, 건설사업소의 군기반장
청년조직 업무 전반에 대해 파악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부조직인 직장·작업반 사로청위원장들이 회의 시간을 제대로 지키도록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처음에 회의를 소집했을 때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고 20명이 넘는 나머지 인원들은 시간도 안 지키고 아예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일단 회의나 모임을 소집했을 때 1명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늦거나 빠지면 다음 날로 회의를 연기하도록 했다. 그리고 회의를 연기하게 만든 장본인에게는 반성문을 쓰게 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판을 시키겠다고 선포하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직장·작업반 사로청위원장들 대부분이 제대군인인 데다 이미 결혼을 한 사람들이었고 나 역시 제대군인 경력자로 위장하고 나갔었기 때문에 좀 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처음에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까지는 연배로서의 대접도 해 주면서 결코 강요나 무리한 요구가 아니니 자발적으로 알아서 지켜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실행에 옮기겠다고 경고한 후 실제로 그렇게 강행했다. 그랬더니 안 되겠다 싶었던지 회의나 모임 시간을 잘 지켰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약 2개월이 걸렸다.
이 과정을 통해 그다지 복잡하거나 힘든 문제가 아님에도 이미 굳어진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든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본인의 노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도 하게 되었다.
또한 이미 결심한 대로 업무 관련 서류를 갖추어 놓는 일도 동시에 해 나갔다. 서류는 회의를 진행하거나 어떤 문제를 집행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기록해 놓는 것이었는데, 후일에 사로청 사업의 장단점을 평가하는 물적 증거가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언제인가는 반드시 있게 될 검열(감사)에 임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당의 방침을 집행하기 위해 세웠던 여러 가지 집행계획서나 각종 회의 보고서와 결정서·토론 내용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것을 잘 정리해 하나로 엮어 놓는 한편 없는 문건은 새로 만들어 보충해 놓았다.

군중 앞에서의 강연·시범 단위 만들기
다음으로 간부 현실 체험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인 군중 상대로 담력 키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곳에 있는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접촉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심리도 파악하고 대인관계 요령도 습득하는 한편, 적게는 수십 명부터 많게는 1000여 명의 인원을 상대로 강연도 해 보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앞에 나가 말을 하려고 해도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떨려 생각했던 말을 다 못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얼마 후부터는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도 자신감을 갖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시범 단위를 만드는 문제에 대해서는 수도관 및 난방 배관 공사만을 전문으로 하는 난방작업반과 각종 건설기계 수리와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공무직장의 사로청 조직 등 2개 단위를 ‘모범 초급단체’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 일을 추진했다. 어떤 문제든 키포인트(중점)를 먼저 찾아내고 거기에 역량을 집중하면 다른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책임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시범 단위로 만들겠다고 설정한 단위의 책임자들을 만나 내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동시에 그들 각자가 맡은 바 임무와 사명에 충실하도록 설득하는 일도 병행했다.
사로청 간부 현실 체험을 하는 과정에선 여러 가지 일이 많았는데,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과 대인관계를 형성하며 이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방법을 체득하는 등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각종 회의와 모임을 준비하는 과정에 보고서와 결정서·토론문 등 여러 종류의 글을 많이 써 보면서 글쓰기 능력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강연과 대중 선동 연설을 하고 크고 작은 규모의 회의와 모임을 직접 지도해 보는 과정을 통해 웅변술을 제고할 수 있었고 조직 운영 방법에도 숙달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나의 노력으로 당시 평성 도시건설 사업소 사로청 조직은 활기 있게 움직이는, 살아 있는 조직이 될 수 있었다.
엄청난 규율 위반
이 기간에는 간부 현실 체험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엄청난 ‘규율 위반’을 감행한 것 등이 있다.
평성에서 간부 현실 체험 중이던 1987년 겨울, 나는 고향에 편지를 보내 어머니와 함께 두 동생에게 내가 숙식하고 있던 도당 초대소에 면회를 다녀가도록 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두 동생은 내 편지를 받고 평성 초대소로 찾아와 2박3일 동안 나와 같이 지내며 휴식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편지도 못 하게 되어 있고 무단 행동을 하다가 걸리면 비판은 물론 제대(해임)까지 감수해야 하는 여건에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는데, 나는 겁도 없이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저질렀다. 물론 사전에 가족들이 다녀갈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주도면밀하게 했기 때문에 걸릴 염려는 없었다. 공작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가족에 대한 생각이나 그리움 같은 인간적인 욕망은 사치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는 2박3일간 어머니·동생들과 함께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했더라도 실수를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제대로까지 이어질 정도의 심각한 규율 위반을 한 셈인데, 그 당시 내가 무슨 배짱으로 그런 모험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에서 탈북한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탈북인 중에서도 해외에서 근무하던 외교관들은 상대적으로 서양 문물이나 특히 한국의 현실적인 모습이나 문화 등을 더 직접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대남 공작을 위해 한국에 와서 직접 이곳의 실상을 보고 느꼈다가 북한으로 복귀한 아버지처럼 말이죠. 여기서 태어나 자란 나조차도 해외 다른 나라들을 접하게 되면 자연스레 비교를 하게 되곤 하는데, 해외 생활을 경험하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 같아요. 아버지는 그런 적 없었나요?
아버지 :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도 북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사실 내가 대남 공작을 위해 한국에 침투해서 생활하면서 북한에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고,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도 많았어.
그런데 북한으로 돌아간 다음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건 한국의 발전된 모습이나 맛있는 음식, 풍요로운 생활이 아니라 통제로 인한 북한 현실의 답답함이었어. 북한으로 복귀하자마자 시도 때도 없이 회의를 하자고 하고, 김 부자 교시 학습하라고 하고, 생활총화 하자고 하고, 아무튼 사람을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아.
물론 남한에 침투하기 전에는 다 했던 것들인데, 매일 회의다 뭐다 해서 수시로 집합시키고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또 학습하라고 과제를 주고,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생활총화에서 자아비판을 하라고 하고…. 그런 것들이 그렇게 싫고 거부감이 생기더라고. 나중에는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앞으로 이렇게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니 ‘차라리 다시 남한에 침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남한에 침투해서 활동할 때는 회의나 학습·생활총화 같은 정치적인 행사는 여건이 안 되니까 안 하고 살았거든.
통제가 오죽 답답했으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남 침투까지 다시 생각할 정도였겠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만큼 북한은 주민들에게 티끌만큼도 자유를 주지 않아. 주민을 꼼짝 못 하게 통제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해외에서 근무했거나 남한에 침투했던 사람들은 그러한 통제를 가장 싫어하고, 그 때문에 답답해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이 생기는 거야.
그런 데다 나는 남한에 침투했다 복귀한 다음 노동당 간부 현실 체험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씨 일가의 사치와 위선·간부들의 부정부패·최악의 경제난 등을 직접 체험하면서 내 직업에 대한 회의감과 북한 체제에 대한 환멸감을 강하게 느끼게 됐어.
그래서 내가 능력만 된다면 김씨 독재체제를 붕괴시키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나 혼자서는 북한 김씨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러면서 내가 찾은 결론은 해외로 나가는 거였어. 남한으로 도망치면 부모 형제가 숙청되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해외에 나가 살자고 결심하고 해외 공작원으로 파트를 바꾸려고 했었지.
김동식 202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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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40>
공작원의 운명 앞에 무너진 애틋한 첫사랑
아름답고 착한 도서관 아가씨
간부 현실체험을 하는 기간에는 도당 초대소에서 생활하다 보니 도당에서 업무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도당 초대소에서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퇴근 후 혼자 지내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초대소에 있는 책은 볼 만한 것이 없어 도당 청사 내에 있는 도서실에 책을 빌리러 갔다.
도서실에 들어가니 아가씨가 사서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첫눈에 보아도 정말 미인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인사만 나누고 책을 빌려 왔는데, 그 후에 여러 번 책을 빌려 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친숙해지게 되었다.
마음씨 고운 두 살 연상의 그녀
그의 이름은 강영숙이었고,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더 많았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외국어학원을 졸업해 외국어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도당에 소환된 후 처녀로서는 쉽지 않은 노동당 입당까지 한 아가씨였다. 아버지는 대좌(대령)로 군복무를 하다가 만기 제대해 평양에 살고 있었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대학을 나와 평양에 살고 있었다. 평양시 안전국(현재 보안국)에서 근무하는 오빠도 있었고, 구역당 조직부 부부장으로 있는 오빠도 있었다. 마음씨도 착했는데 고향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다 갈 때 자신이 아끼는 물건들과 노트를 내 동생들에게 챙겨 주는 등 굉장히 신경을 써 주었다.
당시 그는 내 직업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내 나이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날이 갈수록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지고 나를 대하는 감정이나 느낌도 변해 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초대소 요리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내가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오기까지 했다.
서로의 마음 확인하며 이별 통보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그의 마음에 상처만 남겨 줄 것 같아 일단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불러내 내 생각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선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내 생각에 너는 지금 단순히 나를 좋아하던 단계를 넘어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이런 내 생각이 지나친 비약은 아니야?”
그로부터 내 생각이 맞다는 대답을 듣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네가 좋아. 물론 처음에 너를 좋아했던 감정은 순수한 것이었고 그것이 사랑인지는 나도 몰랐어. 사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과연 생길까 싶은 마음이 컸어. 그런데 오늘 ‘강영숙’이라는 한 여성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 역시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너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 관계는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친구 사이로 남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물론 사랑하는 감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그 누구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새겨듣고 판단은 네가 해.

현실의 벽… 두 살 연하의 공작원 신분
왜 우리 관계가 앞으로도 친구 관계로 지속되는 것이 좋을지 그 이유를 말하자면, 우선 내 나이가 너보다 어리기 때문이야. 물론 나이 차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네가 지금까지 내가 너보다 어리다는 것을 몰랐다는 거야. 너는 지금 당장 결혼해야 하는 나이(28세)지만 나는 아예 결혼이라는 것을 못 할지도 몰라. 내 나이 겨우 20대 중반인데 이왕 들어선 길인데 결혼보다는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야.
이런 내 결심이 언제 실현될 건지 모르고, 또 그 과정에서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혼보다는 친구 관계로 너와 지내고 싶어. 이런 조건에서 너에게 언제까지나 기다리라고 하면서 내 욕심만 차릴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 심지어 앞으로 계속 같이 생활할 수 있는 조건도 아니고 항상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 사이에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보장할 수도 없는 거잖아.”
그 흔한 연애소설 한 번 읽어 본 적 없고 그렇다고 미리 머릿속에 대화 내용을 생각해서 나간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말이 잘 이어졌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의 태도는 대단히 냉정하고 단호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처음에는 약간 눈물을 흘리더니 시간이 좀 지나면서는 한두 마디씩 질문도 하면서 내 말을 마지막까지 다 들어 주었다.
평양 초대소로 철수… 그녀의 마지막 편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하더니 ‘말 그대로 사랑하는 감정은 그 누구의 요구나 강요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고, 또 그런 감정을 느끼고 안 느끼고 하는 것도 모두 자유이니 본인이 나를 사랑하는 감정을 갖고 안 갖고 하는 것 역시 자기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고 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도당 청사 내에 있는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부담 없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로 지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간부 현실체험을 마치고 평양에 있는 초대소로 철수해 돌아오게 되었다. 내가 평성을 떠나올 때 그는 초대소에 돌아가서 보라면서 봉인한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초대소에 도착해 봉투를 뜯어 보니 그 안에는 여러 장으로 된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결혼할 운명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앞으로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자기는 나를 보고 싶어도 찾아갈 수 없으니 너무 아쉽다면서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7년이 지난 1994년 여름이었다. 당시 그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평양에 사는 장교와 결혼해서 시내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던 그때의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면서 두 사람 다 평양 시내에 살고 있으니 만날 수 있겠다면서 기뻐했다. 그렇지만 그날 이후에는 시간도 없고 여건도 허락되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양주 3병에 취하다
간부 현실체험 기간에는 중앙당·도당 고위 간부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기회도 가끔 있었다. 신정 때는 내가 있던 초대소로 중앙당 연락부 담당 지도원과 평남도당 조직비서·조직부장·간부부장과 대남요원 가족 지원을 담당하는 11과 부부장 등 도당 고위급 간부들을 초대해 그들과 식사를 한 적도 있다.
그때 도당 간부들은 담당 지역인 평안남도에서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도 좋은 술이라고 소문난 양덕술을 가져왔는데, 알콜 도수가 40도가 넘어 양주만큼 독한 술이었다. 그 이전에도 술은 마셔 본 적이 있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도수 높은 술을 많이 마셔 보았다. 간부들이 돌아가면서 한 잔씩 권하는 통에 그때 마신 술이 3병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양주 3병을 마신 셈이다.
그래도 취해 넘어지지 않고 왔던 손님들을 모두 정중히 보내드린 다음 침대에 누웠는데, 6시간 후에야 비로소 깨어났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술을 잘 마시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그 ‘자랑스러운 명예’를 지키느라 오랫동안 고역을 치러야 했다.
대합조개와 휘발유·가마니 한 장… ‘조개 불고기’
한번은 평안남도 평원 바닷가에 가서 대합(백합) 구이를 처음으로 해 먹은 적도 있다. 일명 ‘조개 불고기’라고도 하는데, 대합조개와 휘발유, 가마니 한 장만 있으면 되고 방법도 비교적 간단해 어디서나 쉽게 해 먹을 수 있다.
먼저 가마니에 불이 붙지 않게 가마니를 물에 푹 적셔서 편 다음, 그 위에 대합조개 입이 하늘로 향하도록 촘촘히 세워 놓는다. 다음 대합조개 위에 휘발유를 분무기로 물을 뿌리듯 조금씩 뿌리면서 불을 붙인다. 이때 한 번에 많은 양의 휘발유를 뿌리면 조개가 타거나 익은 다음에도 냄새가 날 수 있으므로 최대한 조금씩 뿌려야 한다. 그래서 휘발유를 병에 담은 다음 솔잎 같은 것으로 막든가 병마개에 작은 구멍을 촘촘하게 여러 개 뚫어 조금씩 떨어지게 한다.
조개가 익으면 입이 벌어지기 때문에 타이밍을 잘 조절해 휘발유 뿌리는 것을 멈춰야 한다. 조개 입이 벌어졌는데도 계속해서 휘발유를 뿌리면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불이 꺼지면 장갑을 끼고 까먹으면 되는데, 냄새도 거의 나지 않을 뿐더러 참으로 담백하고 맛이 있다. 이런 조개구이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면 취하지도 않고 엄청 많이 마실 수 있다. 당시 내가 먹고 내려놓은 조개 껍질을 세어 보니 70개 쯤 먹었던 것 같다.
이런 일들을 추억으로 간직한 채 7개월간의 간부 현실체험을 마감하고 1988년 4월 중순 평양시 순안 구역에 있는 북대천 10호 초대소로 돌아왔다. 이 초대소는 원래 있던 화대천 1호 초대소에서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60대의 아주머니가 요리사로 있었다. 이 초대소에 약 한 달간 있으면서 사로청 간부 현실체험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담당 부부장과 과장·지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보고서를 발표한 뒤 간부들이 평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우리가 처음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아버지가 제주 서귀포 해안 어딘가에 차를 세우고는 많은 설명을 해 주셨어요.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리기도 했고 온통 제주의 푸른 바다와 검은 화강암, 그리고 맛있는 먹거리 등에만 정신이 팔려 아버지의 설명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제주에 갔었지만, 마지막 전역 전 휴가로 아버지와 갔던 여행에서야 제대로 아버지의 발자취들을 따라 돌며 그때의 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 KAL호텔, 그리고 성산읍 온평리 ‘해녀의 집’까지….
자식인 저희들에게 꺼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였을 텐데, 동생과 제게 이야기하신 후 마음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아버지 : 우리가 제주도로 여행 갔을 때 너희들에게 내가 해 온 일들과 함께 현장을 보여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야. 다만, 내가 예전에 북한에서 태어나 공작 교육과 훈련을 받고 남한에 침투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니까 그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과거에 했던 일이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숨길 이유도 없었어.
그래서 차라리 너희들에게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어렴풋하게 책이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의 눈으로 확실하게 보고 이해하라고 현장에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었던 거야. 다행히도 너희들이 거부감 없이 아버지의 과거를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 줘서 고마울 뿐이지.
김동식 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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