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아들 얼굴 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부모님
조용하면서도 다정하게 지냈던 최명철의 3분대
3분대장 최명철은 함경북도 나진 출신으로 원유가공 업체인 승리화학공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 입학한 관계로 다른 친구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다. 구수한 입담이 특기인데 1학년 때부터 4학년 졸업할 때까지 줄곧 3분대장을 역임하면서 화려한 언변과 부드러운 설득력·솔선수범의 자세로 분대원들을 잘 이끌어 친구들도 모두 그를 좋아하고 따랐다.
이정길은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독학으로 배운 기타 솜씨가 대단한 친구였다. 키가 큰 편이었는데 운동에는 소질이 없는지 격술을 포함해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다. 특이한 건 이 친구가 4학년 때 미리 복제해 놨던 키로 대학 주차장에 세워 놓은 승용차 시동을 건 다음 밤새도록 평양 시내에 돌아다니는 등 자유주의(무단 외출)를 하다 경찰에 걸려 불명예 제대할 뻔 했는데, 대학 부학장이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배짱이 좋다’며 용서해 준 바 있다. 부학장의 예언이 맞아떨어졌는지 이정길은 작전부 산하 남포연락소에 배치된 후 내가 1995년 2차로 남파될 때 나를 제주도 온평리까지 안내해 주는 등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당시 이정길과 만난 것이 대학 졸업 후 10년 만이라 너무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이광철은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반곱슬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 과묵하고 책임감이 강한 친구였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친구였고, 파티할 때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김형남은 압록강 국경인 자강도 중강 출신으로 트럼본 나팔을 아주 잘 불었다. 중앙 무대에까지 올라가 예술 경연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독주까지 할 정도였다. 키는 168cm 정도로 큰 키는 아니었지만,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만능 운동선수였고 운전 또한 능숙했다. 특히 그는 격술 동작이 너무 정확하고 멋이 있는 데다 품새를 잘했다. 성격은 부드럽지만 호불호가 분명하고 나와도 각별히 지냈던 절친이다.
김철은 평안북도 동림 출신으로 곱상하게 생겼다. 성격도 얌전하고 말이 없고 착한 친구였다. 대학 3학년 때 격술을 하다가 상대방이 뒤에서 두 팔까지 감아 잡고 거꾸로 내리꽂았는데, 낙법을 잘못해 쇄골이 부러져 수술을 받아야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대동강 도하를 할 때 어깨 통증으로 수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해 내가 그의 짐(30㎏)까지 메고 대동강을 건너가느라 상당히 고생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늘 달고 살았던 잊을 수 없는 친구다.
나성봉은 평안남도 회창 출신으로 말수가 적고 근육질의 몸매에 기계체조를 특히 잘했다. 한번은 이 친구가 철봉에 매달려 강하게 흔들기를 하다가 공중에서 철봉을 놓쳐 떨어지면서 입에 거품을 문 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나와 다른 친구가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군의관이 응급조치를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축 늘어진 그를 업고 100m 정도 떨어진 군의소까지 가는데 얼마나 무거웠던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명수는 황해북도 신계 출신으로 나와 함께 평양에서 공작원 선발을 위한 신체검사 및 면접 심사 때부터 시작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양성반에 위탁교육생으로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같은 소대에서 공부하고 생활했던 절친이다. 얼굴색은 물론 피부 전체가 하얗고 생김새도 남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성격도 여성스러운 면이 더 많은 친구였다. 머리가 좋아 학과 성적이 좋았고, 특히 미술 실력은 천재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나와 함께 대학 졸업 후 연락부 공작원으로 임명돼 일본 공작과에 배치받았으나, 1988년 경 관절염이 심해 전역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다.
윤현철은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어서 그런지 수영 영법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주로 하는 평영을 특히 잘했다. 키가 167cm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수영 실력은 소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 상반신을 물 위에 거의 내놓고 평영으로 수영을 하는데 그냥 물에서 걸어가는 것처럼 빨랐다. 이 친구는 우리 소대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면서 김정일을 경호하는 요원으로 차출되었다.
강영환은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키가 163cm로 작은 편이었다. 공부든 훈련이든 못하는 것 없이 모두 잘하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의지가 강하고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의 정신력과 투지가 마음에 들었다. 수류탄 투척 훈련할 때 다른 친구들은 안전핀을 뽑은 상태에서 그냥 던지는데, 이 친구는 안전핀을 뽑고 가철을 놓은 상태에서 2초 후에 던져 주변 친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적이 있다. 참고로 수류탄은 안전핀을 뽑고 가철을 놓으면 ‘딱’ 하고 뇌관을 때리는 소리가 나고 그때부터 3초 후에 터진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그걸 알고 2초 후에 던진 것이다. 가끔 잘못 제조된 수류탄도 있어서 그렇게 하면 정말 위험하니까 못 하게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모험심 강한 친구였다.

김철호는 황해남도 과일이 고향이다. 특별히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 없어서 그랬는지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친구였다. 말없이 얌전하고 공부 잘하고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잘하는 친구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가끔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행동을 해서 친구들을 놀라게 했던 4차원이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최영철은 평양시 선교구역 출신이다. 평양 출신들이 대체로 그렇듯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말만 많은 친구였다. ‘대남=죽음’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1학년이 끝나갈 즈음 자해 소동을 피워 곧바로 불명예 전역했다.
이렇게 내가 소속되었던 소대에서는 4년 동안 총 5명(최철민·배국남·주성일·송광철·최영철)이 졸업을 못 하고 중도 퇴학해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3학년 때는 백두산을 비롯한 양강도 지역의 혁명 전적지·사적지들에 대한 답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1개월 동안은 평양시 삼석구역 대동강 기슭의 김정일별장 건설 현장에 동원되어 건설 노동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 지 5년 만인 1990년 남한에 침투해 공작임무를 수행한 뒤 복귀해 이선실과 권중현·황인오 등과 함께 대학 3학년 때 건설에 참여했던 김정일별장 옆 초대소에 묵은 적이 있었다. 이때 별장은 이미 완공되어 있었고 호위국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득도한 4학년
4학년생이 되면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 실습과 훈련·관광 등을 위해 외부에 나갈 때 군인들과 싸움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학년 때까지는 몸이 근질근질해서 지나가는 군인들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싸우는 경우가 많지만 4학년이 되면 싸움 자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싸움을 걸어와도 가능하면 피하는 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한편, 졸업반인 4학년에 올라가면 강의실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야외 훈련을 진행한다. 훈련 비중이 전체 교육의 70% 정도를 차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울러 모든 종목의 훈련은 예전처럼 2·3주 정도 실시하는 단기 훈련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야외에 나가 텐트를 치거나 비트를 파고 숙영하면서 하는 장기 훈련이었다. 훈련 기간만 해도 5~11월, 약 7개월에 달했닫. 7개월간 실내에 들어가는 경우 없이 계속해서 야외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4학년에 올라와 새로 배운 과목은 핵공학과 전기공학·화학공학이었고, 여기에 정보학 과목이 추가되었다. 핵공학과 전기공학·화학공학은 남북 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남한에 침투해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는 물론 변전소와 고압선 철탑·화학공장 등을 파괴함으로써 남한의 기간산업을 마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편성된 과목이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의 기본 원리와 화학공장 및 전자제품 공장의 일반적인 구조와 핵심 설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말하자면 공학적인 측면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한의 전력망을 마비시키고 화학공장을 파괴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힐 것인가를 위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습 명목으로 평양화력발전소와 남흥청년화학공장(평남 안주)·평양10월5일자동화종합공장 등을 방문해서도 그곳 엔지니어들에게 “발전소를 완전히 멈추게 하려면 어디를 폭파하면 됩니까?”는 수준의 질문을 하는 정도였다.
이 외에는 기존부터 해 오던 전술·기술적인 과목들에 대한 강의와 훈련을 계속 진행하는 정도였다. 여기에 국군 훈련과 오토바이 운전 훈련·유격 전술(비정규전) 훈련이 새롭게 추가되었고, 11월에는 대동강 도하에 이어 1500리 강행군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1개월간 특공대 전투사격 훈련을 실시하는 등 특수전에 필요한 여러 가지 훈련들도 진행했다.
1개월간의 국군 훈련
4학년 때 처음으로 받은 훈련은 국군 훈련(‘괴뢰군 훈련’으로 지칭)이었다. 국군 훈련은 대남침투 요원들이 남한에 침투할 때 주로 국군 복장을 착용하고 군인으로 행세하면서 행동하기 때문에 위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훈련은 대남 침투 시 남한 땅을 직접 밟아야 하는 특공대반 4학년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당시 4학년에는 특공대반 3개 소대에 인원이 90명가량이었는데, 3개 소대가 다 같이 국군 훈련을 받았다. 우리는 훈련 기간에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는 독좌저수지 기슭에 텐트를 치고 생활했다. 아침에 기상해 구보와 목봉 체조 등으로 아침 운동을 하고 일조 점호·제식훈련·집총훈련·총검술·학과 출장·일석 점호 등 저녁 취침 때까지 국군의 일과표를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으로 훈련했다.
이러한 훈련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교관들이 과거 남한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월북한 국군 출신자들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은 다음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훈련 기간에는 국군의 얼차려 중 하나인 ‘원산폭격’도 했고, ‘진짜 사나이’와 ‘육군 김일병’ 등의 남한 군가도 가르쳐 주고 행진할 때 큰 소리로 부르도록 했다.
또한 국군 훈련 기간에는 그해 겨울에 예정되어 있던 대동강 도하에 대비한다면서 아침저녁으로 저수지에서 수영 훈련을 하는 방식으로 냉한 극복 훈련도 했다. 그때가 5월 초였기 때문에 저수지 물이 너무 차가워서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대동강 도하 대비 수영 연습 및 냉한 극복 연습은 실제로 대동강 도하를 진행한 그해 11월 초까지 계속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세상에 태어난 제 모습을 제일 처음 보았을 때 아버지는 기분이 어땠나요?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나요? 친정 쪽 가족이 없는 엄마가 혹여 마음 아파하실까 봐 그런 엄마를 위해 아버지를 아끼셨던 지인 분들이 많이 오셔서 함께 축하를 해 주었다고 엄마가 그러셨는데, 처음으로 저를 안은 엄마는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먼저 났다고만 하시던데….
아버지: 네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북에 계시는 부모님이었어. 부모님께서 손자를 봤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나도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많이 울었지.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쁘던지 그때의 감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
네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첫째에 이어 둘째도 아들이 태어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다른 사람은 딸도 있어야 좋다고 하는데, 난 아니었거든. 왜냐하면 한국에 친척이 없는데 너희들이 같은 남자니까 서로 의지가 되고 마음도 든든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동생이 태어났을 때도 네가 태어났을 때만큼이나 엄청 좋았단다.
김동식 2025-03-20
*************************
[평양에서 왔습니다] <27>
“남한 가서 맹장염 걸리면 죽는다”… 아예 제거 수술
아직도 이해 안 되는 트럭 타기 훈련
국군 훈련이 끝난 다음에는 3주간 오토바이 운전 훈련을 했다. 오토바이를 타려면 자전거를 탈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이미 자전거도 탈 줄 알았고 또 승용차 운전을 배운 이후라서 그런지 한결 쉬웠다. 오토바이 훈련은 소대 단위로 한다. 일본제 혼다 750㏄ 4기통 오토바이 10대를 가지고 진행했다. 비록 비포장도로였지만 먼지를 일으키며 어깨에 힘주고 달리면서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달리는 트럭의 적재함에 올라타고 내리는 훈련도 진행했다. 먼저 트럭의 뒤 또는 옆의 적재함 뚜껑을 손으로 잡은 상태에서 두 발을 차 밑으로 넣었다가 점프해서 솟구친 다음 낙법을 써서 트럭 적재함으로 굴러 들어가는 방법으로 올라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럭 적재함에 탈 때 차체에 발을 딛거나 대지 않고 점프해서 오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트럭에서 내릴 때는 트럭이 달리는 방향의 45도 각도로 뛰어내리는 방법으로 훈련했다.
이 훈련은 평남 증산군의 한적한 시골 도로에서 실시했는데, 우리가 이 어렵고 위험한 훈련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 “이렇게 훈련하면 혹시 잠자리에 오줌을 싸지 않느냐?”고 물어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속 40㎞ 이상으로 달리는 트럭은 아무리 빨리 뛰는 사람이라도 잡을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훈련했던 1980년대 중반에는 한국에는 시속 40㎞ 이하로 달리는 트럭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래서 지금도 도대체 달리는 트럭 잡아타는 훈련을 왜 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계속되는 각종 특수전훈련
달리는 트럭 잡아타기 훈련과 함께 암벽타기와 고층에서 뛰어내리기, 벽을 타고 건물 올라가기 훈련도 실시했다. 이 훈련들은 모두 1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암벽타기 훈련은 20~30m 높이의 벼랑을 밧줄을 타고 오르는 방법으로 했다. 벽을 타고 건물에 올라가는 훈련은 붉은 벽돌로 지은 아파트 벽체 틈에 손가락을 넣고 오르는 방법으로 했다. ‘스파이더맨’처럼 벼랑을 맨손으로 올라가는 것과 흡사하다.
또한 장대를 이용하여 고층 건물에 올라가는 훈련도 실시했다. 이를 위해 올라갈 사람이 장대 앞부분을 겨드랑이에 낀 상태에서 꽉 잡고, 다른 사람들은 뒷부분을 잡은 상태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서 건물을 향해 동시에 뛰어간다. 뛰어가는 상태에서 앞 사람이 점프하여 벽체에 발을 붙이는 동시에 뒤에서 계속 밀어줌으로써 그 힘으로 3층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건물의 2층과 3층 창턱에서 맨땅에 뛰어내리는 훈련도 했다. 일반적으로 3층이 가장 뛰어내리기 힘든 높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3층에서 뛰어내리다 착지를 잘못해 이가 깨지기도 했다.
각종 구조물에 대한 폭파 훈련도 실시했다. 이를 위해 폭발물 제조하는 방법을 이론적으로 배운 다음 철도 레일과 나무 또는 건물의 벽을 실제로 폭파해 보는 방식으로 훈련했다. 또한 많은 인명을 살상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제일 깊숙한 곳에 폭약을 설치한 다음 그 앞에 자갈 등을 쌓아 놓고 폭파하는 방향성 폭파도 해 보는 등 1주일간 집중적으로 폭파 훈련을 진행했다.
폭파 훈련을 할 때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다. 직경이 30㎝ 이상 되는 굵은 아카시아나무 밑 부분에 TNT 폭약 2개를 설치한 후 터뜨려 나무를 쓰러뜨리는 방식으로 땔감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200g짜리 TNT 폭약에 뇌관을 꽂고 도화선을 연결한 다음 불을 붙여 저수지 물속에 집어넣으면 폭발 소리에 물기둥이 치솟으며 물고기가 기절해 물 위에 떠오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때 물 위에 떠오른 잉어와 붕어·잡어 등 민물고기를 건져다 소대 전원이 매운탕을 푸짐하게 끓여 먹기도 했다.
이와 함께 비정규전 혹은 유격전이라고 하는 특공대 전술훈련도 진행했다. 인간 병기 단련에 원칙을 둔 스파르타식 종합훈련이다. 특공대 전술훈련은 평안남도 대동과 증산·평원, 남포시 용강·강서·대안 등 여러 지역에서 3개월 동안 진행했다.
이 훈련은 공포탄(空砲彈)과 가(假)수류탄·폭약 등을 사용하면서 테러 및 습격 대상에로의 접근과 가상 적군(敵軍) 사령부 또는 이동하는 적에 대한 습격, 미사일기지 등 전략시설에 대한 정찰과 습격·폭파, 추격하는 적에 대한 매복 공격·신속한 이탈 등 여러 가지 전술적인 부분들을 이론적으로 배운 다음 실전에 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걸리지도 않은 맹장염 수술을 하다
나는 5월부터 진행된 4학년 첫 훈련인 국군 훈련과 각종 장애물극복 훈련·트럭 잡아타기 훈련 등 각종 훈련을 진행하던 중 8월 초에 맹장염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4학년생들 사이에는 적국(한국)에 침투해 활동하던 중 맹장염에 걸리면 병원에도 못 가 보고 그냥 죽을 수밖에 없다며, 결국 맹장염에 걸려 죽지 않으려면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소문처럼 돌았다.
이에 따라 맹장염에 걸리지 않은 일부 동기생들이 일부러 맹장염에 걸린 것처럼 군의관에게 거짓말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맹장염 수술을 받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 군의관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맹장염 수술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각 소대에서 상위권에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도 맹장염 수술을 받아야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맹장염 수술을 하기로 결심하고 급성맹장염에 걸린 환자들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구체적인 행동 수칙까지 외운 다음 군의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당시 친구들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급성맹장염에 걸리면 혈액검사 할 때 적혈구 수가 올라가는데 적혈구 수를 올리려면 혈액검사 전에 간장을 한 숟가락 먹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맹장은 배꼽 오른쪽에 있는데, 의사가 진찰할 때 맹장이 있는 위치에 손끝으로 꾸욱 눌렀다 갑자기 떼는데 그때 순간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엄살을 떨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친구들이 알려준 대로 군의소에 가서 일단 군의관에게 급성 맹장염에 걸린 것처럼, 오른쪽 아랫배가 아프다고 엄살을 떤 다음 군의관이 손끝으로 오른쪽 아랫배를 눌렀다 놓을 때 갑자기 통증이 오는 것처럼 연기해 군의관으로부터 혈액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실시된 혈액검사를 앞두고 역시 친구들 말대로 간장을 한 숟가락 마시고 들어가 혈액검사를 받았다. 물론 나중에 혈액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혈액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미리 담배 30갑을 가지고 담당 군의관을 찾아가 조용히 건네주면서 맹장염 수술을 꼭 받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가져다준 뇌물이 통했는지 아니면 정말 혈액검사 결과 급성맹장염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와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군의관이 맹장염 수술 처방을 해 줘서 드디어 대남공작 요원 전용 병원인 ‘915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간단한 검사를 하고 다음 날 곧바로 맹장염 수술에 들어갔다. 병원 2층의 수술실에서 국부마취만 한 채 수술대에서 맹장 제거 수술을 받았다. 당시 국부마취를 해서 그런지 정신이 말짱했고, 수술칼로 오른쪽 아랫배를 가르는 느낌이 손톱으로 피부에 줄을 긋는 것처럼 그대로 전달되었다.
맹장염 수술을 집도한 외과 군의관은 창자를 꺼내 맹장을 잘라낸 후 나에게 ‘이것이 방금 수술해서 잘라낸 맹장’이라며 보여주기도 했다. 수술이 끝난 다음 바늘과 실로 수술 자리를 봉합하는데, 바늘과 실이 피부를 관통하는 느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수술이 끝난 다음에는 병원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군의관이 들것에 실어 입원실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괜찮다며 수술 부위를 손으로 감싸 누르고 1층에 있는 입원실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지만 당시에는 친구들 말을 듣고 나도 젊은 혈기에 용감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수술 부위를 손으로 붙잡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 입원실에 누웠다. 저녁쯤에 마취가 풀렸는지 그때부터 통증이 시작되어 수술 과정에 배에 찬 가스가 나올 때까지 24시간 동안 진통제도 없어서 맞지 못하고 복통과 함께 수술 부위 통증 때문에 얼마나 아픈지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튼 수술 일주일 만에 실밥을 뽑고 10일 만에 퇴원해 대학으로 돌아간 다음,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소대원들과 함께 야외 훈련에 나갔다. 그러니까 맹장염 수술 후 20일 만에 훈련을 나간 셈이다.
그런데 무거운 배낭을 지고 친구들처럼 빠른 속도로 산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수술 자리가 너무 아파 배에 힘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약 일주일가량 더 휴식하고 훈련을 다시 했고, 그때부터는 충분히 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하지 않아도 될 맹장염 수술을 받으면서까지 ‘충성’하려고 했던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아버지가 1990년 1차 침투하셨을 당시 한국의 모습은 제가 태어나기 전이라 잘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가 북한보다는 여러 면에서 당연히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한국의 모습을 보고 현혹되셨을 것 같은데…. 북한의 사상 세뇌 때문에 한국의 우월성을 부정하셔야 했나요?
아버지: 네 말처럼 내가 1차로 침투했던 1990년 당시 한국은 북한에 비해 경제적으로 훨씬 발전했던 게 사실이야. 특히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기술 발전 수준은 정말 세계적이었으니까…. 그리고 북한에서 교육받을 때 한국 TV를 통해 서울의 중심 거리와 고층빌딩, 엄청나게 많은 자동차가 다니는 모습을 보았는데 실제로 서울에 와서 직접 보니까 TV에서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르더라고….
그렇지만 북한에서 철저한 세뇌 교육을 받은 데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노동당원이었고, 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북한은 인민 모두가 잘사는 나라’지만 ‘남한은 재벌을 비롯해 극히 일부 부자들만 잘살고 대다수의 서민은 못사는 나라’라며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애써 외면하면서 임무 수행에만 몰두했지.
또 한편으로는 ‘북한도 남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발전했겠지’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어. 그리고 북한에 부모 형제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수나 전향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갔기 때문에 북한에 돌아가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전쟁을 통해 통일을 하려고 하면 서울의 고급 빌딩과 거리, 한국의 발전된 경제가 한순간에 무너지기 때문에 차라리 통일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어.
그렇지만 내가 남한에 침투했다 복귀한 지 3년 만에 사회에 나가 노동당 간부를 하면서 북한이 남한에 비해 정말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어.
김동식 2025-03-24
************************
[평양에서 왔습니다] <28>
7개월 특공 훈련 겪어 보니… 김일성 항일 역사는 가짜
처음으로 먹어 본 카레라이스가 ‘가래밥’인 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맹장염 수술을 위해 입원했던 ‘915병원’은 대남요원 전용 병원이다. 병원 창설 연도는 알 수 없으나 9월15일에 창설되었다고 하여 ‘915연락소’ 또는 ‘915병원’이라고 한다. 평양시 형제산구역 학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915병원은 대남요원 전용 병원답게 남한이나 해외에 파견되는 현직 공작원들은 물론 대남 침투 시 안내해 주는 중앙당 작전부 산하 연락소 현역 전투원들과 함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도 입원하거나 진료를 받는다.
따라서 915병원은 각자의 보안 유지를 위해 입원실이 모두 1인실로 되어 있고, 식사도 각자 입원실에서 하게 되어 있다. 현직 공작원이나 전투원들의 식비와 수준을 감안하여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보다 식사의 질이 높다.
한번은 요리사가 쟁반에 밥과 반찬을 가져다주면서 한쪽 옆 공기에 담은 노란색 소스를 가리키며 ‘가래’라고 소개하고, 밥을 가래에 잘 섞어 먹으면 맛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런데 ‘가래’라고 한 소스의 냄새를 맡아 보니 한약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래서 나는 정말 그 소스가 가래나무 열매로 만든 소스인 줄 알았다.
가래는 호두와 생김새도 같고 열매도 거의 비슷한 사촌간이라고 보면 된다. 복숭아처럼 생긴 가래나무 열매의 과육을 칼로 베어 낸 다음 그것을 찧어서 흐르는 개울물에 풀어 넣으면 작은 물고기가 취해서 물 위에 떠오를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가래나무 열매 과육의 냄새는 한약 냄새와 거의 같다. 요리사가 ‘가래’라며 가져다준 소스의 냄새와도 유사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 요리사가 가져다준 소스가 ‘카레’가 아니라 ‘가래’ 인줄 알았다. 카레라이스가 아니라 가래밥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한 나의 오해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공작원 초대소에서 생활하면서 요리사들이 초콜릿처럼 생긴 일본 카레의 원료를 보여 주면서 설명을 해 주어 비로소 풀렸다.
대동강 도하에 이어 진행된 천리 강행군
대동강 도하 훈련은 대동강의 중류 지역인 남포시 대안에서 평양시 강남군까지 수영해서 건너가는 방식으로 했다. 11월 초였음에도 도하 훈련하는 날은 유별나게 기온도 영하로 내려가 상당히 추웠다. 강폭은 4㎞가량 되는 곳이었고, 정조(停潮) 시간이라고 하지만 썰물 시간대여서 강물의 흐름이 어느 정도 있을 때였다. 그래서 강을 직선으로 건너지 못하고 하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방식으로 거의 6㎞ 이상 거리를 수영해 건너가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거기에다 나는 30㎏ 이상 되는 내 장비와 함께 6개월 전에 쇄골이 부러졌던 친구 김철을 도와준다며 그의 장비까지 넘겨받아 60㎏ 이상 되는 장비를 어깨에 멘 상태에서 그 친구까지 끌고 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보다 대동강을 건너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고생도 엄청했다. 차가운 물속에 오래 있다 보니 마지막에는 몸이 굳어지고 발에 쥐가 올라 물속으로 가라앉기 직전까지 갔었다.
그날 우리 소대원 박정철은 대동강을 건너간 다음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인지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등 쇼크 상태에 빠져 구조 호흡과 구급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소생하기도 했다.
대동강 도하를 성공적으로 마친 우리는 곧바로 1500리 강행군 훈련에 들어갔다. 11월 초~중순에 13일에 걸쳐 진행된 1500리 강행군 훈련은 평양시와 황해북도·강원도 등 3개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대동강 도하 이후 평양시 강남군으로부터 시작된 1500리 강행군 훈련은 평양시 중화군과 상원군을 거쳐 황해북도 연산군·수안군·곡산군·신평군 등을 지나 강원도 법동군의 마식령까지 갔다가 다시 평양시 상원군까지 되돌아오는 긴 노정이었다. 당시에는 산악으로만 하루에 평균 150리(60km)씩 걸었다. 야간에만 행군했다. 어떤 날에는 하룻밤 사이에 230리(90km) 거리를 행군한 적도 있었다.
황해북도와 강원도 일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악지대로서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심해 오르고 내리는 데 무척 힘들었다. 거기에다 건전지(밧데리)까지 부족해 어떤 날 밤에는 환한 조명만 있으면 얼마든지 내려갈 수 있는 절벽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내려가지 못하고, 그 위에서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다. 밤에 주로 행군하고 새벽이나 아침 시간에 잠깐 잠을 잤는데, 그때가 초겨울이어서 자고 일어나면 배 위에 서리가 내려앉을 정도로 추위 때문에 고생도 정말 많이 했다.
특히 황해북도 신평군에 있는 대각산은 해발고도가 1400m 정도 되는 매우 험한 산이다. 이 산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는 더욱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날은 산 정상에서 저녁 9시경에 출발했는데,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흐린 날씨에 비가 많이 오고 모두 단독으로 행동하라는 지시와 함께 지도와 손전등도 주지 않았다.
낮부터 내린 비가 밤까지 계속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경사가 급한 산비탈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당시 나는 대각산을 내려오다가 6m가량 되는 벼랑에서 미끄러졌지만 다행히 나뭇잎이 쌓여 있는 곳에 떨어져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7개월간 야외 훈련을 하면서 불현듯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우리는 먹을 것도 제대로 먹고 훈련하는데도 1개월 지나니까 허기지고 가을이 되니까 벌써 춥고 힘든데, 김일성이 15년간 만주 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했다고…? 그건 정말 새빨간 거짓말이다’는 것이었다.
사격 명수가 되다
우리는 1500리 강행군을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와 2주간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고 12월 초에 또다시 특공대 전투 사격훈련을 하기 위해 평남 대동군에 있는 독좌저수지의 사격훈련장으로 나가 약 1개월간 실탄 사격훈련을 했다.
사격훈련 당시 사용한 무기는 북한군이 사용하는 자동보총(AK소총)과 북한제 권총(러시아 TT권총 모방)이었고 대전차무기인 발사관(RPG-7)과 체코제 기관권총으로도 사격훈련을 했다.
미국제 칼빈 소총은 물론 M1·M16 소총과 콜트권총 등도 적군(敵軍) 무기 성능 테스트 차원에서 몇 발씩 사격을 해 보았다. 당시 사격해 본 여러 종류의 무기 가운데 체코제 기관권총이 성능도 좋고, 크기에 비해 무게도 가볍고 명중률도 가장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격은 매일 실탄 200발 정도를 쏘았다. 한 번에 50발씩 소총과 권총 2정을 동시에 휴대하고 약 2km 구간을 달리면서 그 구간에 설치되어 있는 고정 목표와 이동 목표 등 여러 종류의 목표물에 서로 다른 자세로 사격하는 방법으로 했다.
나는 마지막에 진행된 사격 판정에서 AK소총은 100m 전방 표적지에 95점, 권총 사격에서는 30m 전방 표적지에 97점을 명중해 최고 점수를 받았다.
사격훈련이 끝난 다음에 시간이 좀 남았다. 이때 교관의 허락을 받아 친구들을 데리고 산속에 들어가 남은 실탄으로 고라니와 꿩을 사냥하기도 했다.
원래 북한에서 사냥은 김씨 일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우리 훈련장은 아무도 못 들어오는 지역이라 교관만 눈감아 주면 사냥이 가능했다. 사냥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내가 가지고 갔던 체코제 기관권총으로 쏜 총알이 달아나는 고라니를 명중시켰다. 다른 친구도 1마리를 더 잡아 고라니 2마리로 탕을 끓여 소대원들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해서 특공대 전투사격 훈련이 끝났다. 훈련을 마무리하고 보니 나뿐만 아니라 소대원 모두가 명사수가 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나는 사격 실력은 누가 실탄을 더 많이 쏴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살아 남기 위해 익힌 앉아서 잠자는 방법
내가 대학 생활을 할 당시 강의실에선 2인용 책상을 3열로 배치하고 2명씩 같이 앉아 공부했다. 나는 2분대 소속이었고 키가 작은 편에 속했으므로 항상 가운데 열 맨 앞자리에 앉아서 공부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4년 내내 교수님이 강의하는 교단 바로 앞에 짝꿍인 박명학과 같이 앉아 수업을 듣다 보니 가장 힘든 것이 수업 시간에 졸음이 올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는 1학년 때부터 야외 훈련에 나가면 보통 2~3주, 길게는 4~6주 동안 훈련하는데 모든 훈련은 야간에만 실시된다는 특징이 있다.
저녁 식사 후 8시쯤 훈련이 시작되면 보통 새벽 2~3시에 끝난다. 교관에게 훈련 결과를 보고하면 4시가 지나고 간단히 야식을 먹은 후 잠자리에 들어 오전 11시경에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면 12시~1시까지 점심을 먹고 교관으로부터 훈련 과제를 받아 지도연구를 하는 등 훈련 준비를 한 다음 저녁을 먹고 또다시 훈련에 돌입하는 방식으로 훈련이 진행된다.
이렇게 몇 주간 야간에만 훈련하다가 대학에 복귀하면 다시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들어야 한다. 야간 훈련하면서 신체 리듬이 야간에 맞추어져 있어서 대학에 돌아온 후 최소 1주일 정도는 강의 시간에 졸음이 오기 마련이다.
나 역시 아무리 소대장·중대장이라고 해도 다른 친구들처럼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졸리거나 잠이 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강의실 가운데 열 맨 앞, 그것도 교수님 바로 앞에 앉은 나로서는 노골적으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잘 수도 없고 끄덕끄덕 졸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정말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묘안으로 찾아낸 것이 의자에 앉은 채로 엎드리지도 않고 머리를 끄덕이지도 않고 자는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평소처럼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상태에서 책을 보는 것처럼 머리만 약간 숙인 다음 그대로 눈을 감고 자는 방식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내가 터득한 방식대로 꼿꼿이 앉아서 고개만 숙이고 졸거나 잠을 잤는데 교수님으로부터 거의 지적받은 적이 없다. 이 방법을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출장이나 여행을 다닐 때 종종 써먹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장거리 비행이 남들보다 쉬운 것 같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엄마는 아버지가 불러 주는 노래를 듣는 것이 좋다는 말을 자주 해요. 제 기억에 어릴 적 우리가 여행 다닐 때 차 안에서 듣던 곡들 대부분을 아버지가 알고 있었고 자주 따라 부르기도 했던 것 같은데, 북한에서는 한국 대중가요를 자유롭게 듣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는 그 많은 한국 가요를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아버지: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대중가요는 북한에 있을 때 공작 교육을 받으면서 배운 거야. 남파 공작원들은 반드시 한국의 말과 문화를 완벽하게 숙지하는 ‘적구화(敵區化) 교육’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교육 과정은 한마디로 ‘북한 사람을 남한 사람으로 만들기, 또는 평양 사람 서울 사람 만들기’ 과정이야.
북한 사람인 내가 완벽하게 한국 사람처럼 되려면 한국의 말과 문화를 비롯해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정도의 지식과 상식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는데, 노래도 마찬가지야. 결과적으로 내가 완벽한 한국 사람처럼 되자면 내 또래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노래는 대체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적구화 교육’ 과정에는 물론 초대소에서 생활할 때도 카세트 녹음기에 당시 유행하는 한국 노래 테이프를 하루종일 틀어 놓고 들으면서 가사와 곡을 익히고 따라 불러서 알고 있던 노래를 노래방에서 불렀던 거야.
김동식 2025-03-27
**************************
[평양에서 왔습니다] <29>
혹독한 대학 4년 결실… 드디어 공작원이 되다
졸업시험, 그리고 시험을 통해 배운 인생
특공대 전투 사격 훈련을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1985년 새해가 밝았다. 극한 훈련을 견뎌내는 체력을 바탕으로 여러 테러 기술과 특공 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사상적 무장까지 다지며 4년을 이겨 낸 나는 1985년 2월 국가 졸업시험을 보았다.
북한에서의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다. 필기시험과 구두(구술)시험을 동시에 봐서 평균 점수를 내는 방법으로 평가한다. 물론 평상시 수업 태도도 종합적으로 감안해 최종 점수를 준다. 당시 국가 졸업시험 과목은 김일성혁명역사·김일성 및 김정일 노작·정보학·비합법전술·특공전술 등 5개 과목이었다. 나는 5개 과목 가운데 김일성혁명역사 과목만 10점 만점에 9점을 받고 나머지 4개 과목은 모두 10점 만점을 받았다.
김일성혁명역사 과목은 첫 번째로 시험을 봤기 때문에 다른 과목보다 공부도 많이 했고, 시험도 잘 보았기 때문에 충분히 10점을 받을 수 있었는데 9점을 받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내가 최종 졸업성적증에 기재되는 김일성혁명역사 과목 점수를 9점 받은 것은 졸업시험 성적이 아니라 2·3학년 때 김일성혁명역사 과목 담당 교수와 과제 발표 문제를 놓고 몇 번 언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최종 점수를 깎은 것이었다.
어떤 친구는 자기 점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며 담당 교수를 찾아가 따지고 싸웠다는 얘기도 들렸지만, 나는 자존심이 상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나와 같이 졸업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19기 동기생 170여 명 가운데 5개 과목 모두 10점 만점을 받은 10점 최우등생이 3명이었다. 나는 김일성혁명역사 과목(9점) 하나 때문에 결국 10점 최우등생 집단에 끼지 못해 상당히 아쉬웠다. 그러나 나는 시험 점수가 곧 그 사람의 모든 능력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또 김일성혁명역사 과목 평가에서 10점이 아닌 9점을 받고 보니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머리 좋고 공부 잘하고 일 잘하는 것 못지않게 대인관계를 잘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도 얻었다.
1월부터 2월 중순까지 졸업시험이 끝나면 보통 2월 말에 졸업하는데, 우리 19기생은 바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3월 초~5월 말의 3개월간 대학 교직원용 아파트 건설 노동에 동원되어 일을 했다. 당시 평양시 용성구역 중심부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교수들이 살 아파트 짓는 데 동원된 것이다.
이 기간에 평양 시내 관광을 했다. 그때 대성산유원지에 놀러 갔다가 안전원(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싸움이라야 동기생 서너 명이 1개 소대 정도 되는 안전원들을 일방적으로 때린 것이다. 그 사건이 곧바로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보고되어 대학에서 며칠 동안 사상투쟁을 했다. 아울러 당시 우리를 인솔했던 교관은 그 책임을 지고 처벌받아 6개월간 무보수 노동을 하기도 했다.
대학 4학년생 노동당에 입당하다
나는 대학 4학년 과정을 거의 마무리하던 무렵인 1985년 2월 국가 졸업시험 기간에 노동당 후보당원으로 입당했다.
원래 북한에서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대학에 입학(‘직통생’이라 함)하는 경우 아무리 대학 성적이 좋아도 대학 재학 중에 노동당에 입당시키는 경우가 없다. 그러니까 대학 재학 중에 입당할 수 있는 것도 김정일정치군사대학만의 특권이고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19기 동기생 170여 명 가운데 노동당에 입당한 학생은 10% 정도였다. 내가 소속된 소대에서는 나와 소대장 강용구·부소대장 박세현·1분대장 김대성 등 4명만 입당했다. 나는 2월 중순 소대에서 추천을 받아 대학 초급당위원회 심의를 거쳐 노동당 작전부 당위원회에서 최종 심사를 받고 후보당원으로 입당했다.
그런데 노동당원 입당 심사 과정에 노동당 규약에 제시된 당원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10대 원칙)은 무조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통째로 외워야 하는 건데 건성으로 외웠다가 중앙당 작전부 사로청(청년동맹) 심사 과정에서 틀리게 답변해 담당자로부터 난생 처음 심한 욕을 먹은 적이 있다.
그렇게 심한 욕을 먹으니 오기가 생겨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서 그것들을 모두 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북한에서는 노동당에 입당시킬 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후보당원으로 먼저 입당시켜 1년간의 조직 생활을 통해 검증한 다음 정당원으로 입당시킨다. 처음에 후보당원으로 입당하기가 어렵지 일단 후보당원이 되면 특별한 잘못을 범하지 않는 한 1년 뒤 거의 정당원으로 입당한다. 따라서 일단 후보당원이 되면 정당원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공작원으로 임명된 다음 해인 1986년 2월 정당원 자격 심사를 받고 정당원으로 입당했다.
최종 면접,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다
내가 동기생들과 평양 용성 구역에서 교직원 아파트 건설 노동을 한창 하고 있던 5월 중순 어느 날, 중앙당 작전부와 연락부·조사부 등 대남공작부서 인사담당 간부들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방문해 전체 졸업생들을 상대로 1:1 면접 심사를 했다. 이때의 면접 심사는 나에게 있어 공작원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마지막 관문인 셈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에 입학할 때 데려다주면서 “4년 후에 봅시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던 중앙당 연락부(현재 문화교류국) 인사담당 부과장과 면담했다. 면접 당시 그는 대학 4년간 나의 생활과 학업·훈련 성적, 건강 상태와 앞으로의 결심 등을 간단히 물어본 다음 돌아갔다.
사실 연락부에서 선발해서 위탁교육을 시키다가 다시 데려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아 졸업 직전에 진행하는 면담은 굉장히 신경 쓰인다.
나보다 1·2년 선배 중에도 대학에 입학할 때는 연락부에서 선발해 위탁교육생으로 들어왔는데 졸업할 때는 연락부에서 데려가지 않고 그냥 작전부 산하 연락소에 전투원으로 배치된 사례가 여럿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공작원으로 임명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보다 당연히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공작원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해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자존심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졸업 전에는 자신의 진로 문제가 어떻게 결정될지 몰라 상당히 신경을 쓰기 마련이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 후 5월 말에 대학 졸업식을 했다. 그날 비로소 대학 교무과 지도원으로부터 내가 연락부 공작원으로 정식 임명되었다는 것을 통보받게 되었다.
나를 면접했던 연락부 부과장은 그날 저녁 벤츠 승용차를 타고 와서 나와 함께 4년간 같은 소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생활했던 친구 명수와 나를 태우고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연락부 산하 중구 1호 초대소로 갔다.
이렇게 나는 전투원양성반에서 위탁교육을 받은 후 연락부 공작원으로 정식 임명되었고 그때부터 공작원으로서의 본격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4년 과정은 체제와 이념을 떠나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 생활 4년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해도 얼마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강한 의지·자생력 등을 배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이후 나의 모든 생활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밑천이 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전향하신 후 아버지께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임무 중 접선했던 고정간첩,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렸던 ‘봉화1호’ 혹은 아버지가 느끼기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먼저 연락을 해 온 적은 없었나요? 아무리 괜찮다고 하시지만 사실 엄마나 저희들은 아버지의 신변 안전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가 힘듭니다.
아버지 : 내가 전향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오는 동안 공작 임무 수행 중 접선하거나 포섭했던 사람(고정간첩)들이 찾아오거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연락해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아마 그들이 나를 찾아오지 않은 것은 자신들이 했던 간첩 행위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를 만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간첩 행위를 인정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는 나를 ‘배신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야. 배신자를 만나면 자신들도 배신자로 취급받을 수 있으니까….
다만 나를 죽음의 함정에 빠뜨린 남파 공작원 ‘봉화1호’(자운 스님)는 다른 사람(대공 수사 관계자)들을 통해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 온 적이 몇 번 있었어. 처음에 그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점잖게 거절했는데, 그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번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오더라고….
하도 그래서 나중에 “도대체 봉화1호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단순히 자기 가족의 안부를 알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얘기했지.
“당신 가족만 중요하냐? 나는 당신 가족보다 내 가족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내 가족은 내가 검거된 후 숙청되었다. 그런데 내가 검거된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당신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검거되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내 조원 광남이가 희생됐다는 것이다. 광남이가 사망했을 때 서너 시간 동안 내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 친구가 왜 죽었나? 바로 당신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을 만나면 나도 사람인지라 나도 모르게 욱해서 당신에게 폭행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당신은 연세가 많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졸지에 살인자가 될 거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내가 비록 전향해서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내가 전향해서 사는 것과 당신과는 관계없는 별개의 문제니까 더 이상 나를 만나려고 하지 마라. 나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랬더니 더 이상 ‘봉화1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엔가 그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김동식 2025-04-01
************************
[평양에서 왔습니다] <30>
반(半)군인 신분 대남 공작원… 권한은 ‘장관급’
공작원의 길, 공작원이 되기까지
옛말에 ‘아버지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 구실 하기는 힘들다’는 말이 있다. 어떤 직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공작원의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나 역시 4년간 대학을 어렵게 졸업하고 공작원으로 임명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 후 공작원 구실을 하기까지는 더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사실 공작원이 되기까지는 어쩌면 내 노력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대남공작부서 책임자들의 판단과 대학교수들의 가르침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진정한 공작원으로서의 구실을 하기 위해 외부와 단절된 채 많은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는 노력을 해야 했다. 죽음의 공포에도 정면으로 맞서야 했으며 10년이라는 긴 시간도 투자해야 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사람을 혁명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학습과 조직 생활, 그리고 혁명적 실천을 통한 단련 등 세 가지 교육 방법을 적절히 배합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아마도 지금 국내 종북주사파 내부에서 회자되고 있는 의식화·조직화·실천 투쟁의 배합 구호도 근본은 여기서 출발했을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는 ‘당 사업의 기본은 사람과의 사업’이라고 하면서 사람과의 사업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들을 강조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사람을 믿고 검열하는 원칙이다. 즉 사람과의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의심부터 앞세우면서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고 믿음을 주고 일을 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검열(검증)을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작원이 되기까지는 이와 같은 요구와 원칙에 따라 끊임없는 학습과 당조직 생활·실천을 통한 단련 등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수양하는 동시에 공작원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끊임없이 검증받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에는 태산이라도 떠서 옮기고 어떤 임무든 맡겨 주기만 하면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막상 현실에 부닥치고 보니 그러한 내 생각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대남 공작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전투원, 즉 안내요원들처럼 위험하기는 하지만 비교적 단순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투원들은 공작원들을 목적지인 남한까지 몰래 데려다주고 데려오거나, 공작 장비 등을 운반하고 필요한 대상물을 정찰하거나 테러를 감행하는 등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들이다.
그러나 나는 공작원 생활을 시작한 다음에야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대남 공작원은 남한에 침투해서 장기적으로 거주하거나 생활하면서 맡겨진 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면 육체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적구화 교육’ 등 많은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면서 공작원·공작 임무에 대한 나의 단순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결국 대남 공작원으로 임명된 후 공작원 역할을 할 수 있느냐를 검증받는 데만 꼬박 3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더 나아가 대남 공작원의 구실, 즉 공작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뒤 계속해서 공작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보다도 훨씬 기나긴 시간과 값비싼 고행이 뒤따랐다.
사실 어떤 직무·직책이든 그에 상응하는 구실(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통상 수년이 걸린다. 하물며 적(敵)이 통치하는 구역, 즉 ‘적구(敵區)’에 침투하여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뒤 독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존재인 공작원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는 일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새삼스럽게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잘 알 것이다.

공작원은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반(半)군인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남파 공작원은 군인인가요, 아니면 민간인인가요?”
북한에서 노동당 대남공작부서 소속 공작원은 참 애매한 신분이다. 민간인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군인이라고 하기에는 더더욱 뭔가 좀 이상하다. 공작원을 민간인이라고 하면 비록 계급장은 없지만 훈련할 때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현역 군인들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공작원을 그만둘 때 예비역 장교 계급을 부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또 군인이라고 한다면 군에 입대한 적도 없고, 훈련할 때 군복을 입었다지만 계급장이 없는 이유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공작원은 어떤 신분일까. 북한에서는 출신 성분이나 사회 성분 등 ‘성분’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간부이력서 양식에 출신 성분과 사회 성분을 기록하는 칸이 별도로 있을 정도다. 출신 성분은 본인이 태어날 때 아버지가 어떤 직업(성분)에 종사하고 있었느냐를 의미하는 개념이고, 사회 성분이라는 것은 본인이 노동당에 입당할 당시의 신분(직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성분을 기록할 때 노동·농업·군인·사무 등으로 기재한다. 바로 여기서 성분이 군인인지 군인이 아닌지가 확실하게 구별된다.
그런데 공작원들은 사회 성분을 기재하는 칸에 ‘혁명가’라고 적는다. 그러므로 공작원은 민간인도 아니고 군인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점은 공작원들도 내부적으로는 군 계급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장교 계급이다. 이런 것을 보면 공작원을 반(半)군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1993년 가을, 당 간부 현실 체험을 할 때 당시 평양시 동대원구역당 조직부 지도원으로 일 하고 있던 과거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 출신의 40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이야기 도중 그가 자신의 계급이 예비역 소장(우리의 준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계급이 높으냐고 물었더니 공작원을 그만둘 때 대좌(우리의 대령에 해당) 계급으로 제대했는데 1992년 북한군 창건 60주년을 맞아 예비역 장교들의 계급을 한 계급씩 높여 주는 조치에 따라 졸지에 장성(장군)이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공작원들에게는 공작원 근무 연한과 공작 임무 수행 과정에서의 공적에 따라 계급이 부여된다. 보통 대남 침투 경험이 있고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공작원은 제대할 때 예비역 대령 또는 준장의 계급을 받는다.
내가 만났던 여자 공작원도 대외정보조사부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할 때 제3국을 거쳐 남한에 침투한 후 용산 호텔(하얏트 호텔 추정)에 묵으면서 국방부와 한미연합사령부 등을 촬영해 간 공로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고 제대한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공작원들이 공작원으로서의 활동을 그만둘 때는 ‘해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모두 ‘제대’라는 표현을 쓴다. 결과적으로 공작원은 민간인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운 셈이다.
공작원의 권한은 장관급
공작원으로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담당 지도원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공작원은 시·군(구역) 당위원회 책임비서와 맞먹는 상당히 높은 권한과 지위를 갖고 있다.”
당시 그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공작원들은 북한의 시·군(구역) 당위원회 책임비서(시장·군수급)는 물론 노동당 중앙위 부장(장관급)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작원들은 입당 결정권은 물론 당 조직을 만들 권한까지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에서 사람들을 입당시킬 때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은 집체적 협의체인 시·군(구역)당 위원회가 행사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해당 당위원회 책임비서와 조직비서·선전비서 등으로 구성된 시·군(구역)당 비서처 회의에서 당원의 입당 및 출당을 결정한다.
아무리 책임비서라고 해도 혼자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작원은 남한 현지에서 포섭한 대상을 노동당에 입당시킬 수 있는 독립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 공작원들은 실제로 공작 지역에 파견될 때 현지에서 포섭한 대상을 입당시킴과 동시에 그에게 당원증 번호에 해당하는 연계대호를 부여한다.
또한 북한에서 당 조직을 구성하고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가 갖고 있다. 물론 김정은의 재가를 받아야 당 조직을 구성 또는 해산할 수 있지만 공작원들은 비록 지하당 조직이기는 해도 당 조직을 결성하고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활동한다.
북한의 주요 명절·기념일에는 각 기관·기업체 단위로 김정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축전을 작성해 발송하거나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 모임을 한다. 그런데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공작원들은 공작조 단위 혹은 단독으로 김정일에게 축전을 발송하고 선서 모임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공작원들은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작원이 갖고 있는 위와 같은 권한은 특수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관계로 특별히 활동기간에만 부여하고 위임받게 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시·군(구역)당위원회 책임비서는 물론 중앙당 부장(장관)이 갖고 있는 권한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공작원의 권한이 장관급이라고 해서 대우까지 장관급으로 해 주는 것은 아니다. 공작원 개개인의 공작 업적과 경력에 따라 장관급 대우를 받는 공작원도 있고 그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설명할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제가 군 복무할 당시에는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제대가 얼마 안 남았을 무렵 겨울철이었는데 인근 부대에서 운전 중 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장병들이 사망하고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장병으로서 마음이 너무나 무거운, 무척이나 안타깝고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대 후 군 관련 사건 사고를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어요. 이제 곧 동생도 군 복무를 해야 하기도 하고, 사실 남자로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라의 부름에 응해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북한은 상황이 더욱 열악할 것이기 때문에 군 복무 중 사고나 사망사고가 많을 텐데, 그런 일이 발생하면 가족에게 알려는 주나요? 보상이나 혹은 부상병 치료 등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 : 네가 말한 것처럼 북한은 상황이 워낙 열악해서 각종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 특히 북한 군인들은 훈련보다는 도시 건설이나 터널 공사 등 각종 건설 노동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정말 사망사고가 많이 발생해.
나의 오촌 당숙 되는 분도 김씨 일가를 경호하는 호위국에 입대해 근 10년 만에 군관(장교)으로 임관해 소대장으로 근무했는데, 터널 공사를 하다가 폭발 사고로 공사 중이던 터널이 무너지면서 사망했어. 그런데 시신도 찾아 주지 않고 사망했다는 통지서와 함께 훈련 중 사망했다는 ‘전사증(戰死證)’ 한 장 달랑 보내 주는 것으로 끝났어.
오촌 당숙은 유복자였기 때문에 작은 할머님은 어렸을 때부터 자식을 정말 귀하게 키우셨고, 군에 입대한 다음에는 아들 하나 바라보면서 사셨는데 사망한 아들 시신도 보지 못하니까 너무너무 가슴 아파 누워 계셨어. 그러다가 결국 작은 할머님도 아들이 사망한 지 1년 만에 돌아가셨어.
지금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군인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군인들에게는 해외에서 훈련한다며 거짓말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보내 놓고 전투하다 사망하면 시신을 불태우고, 부모님에게는 훈련 중 사망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전사증’ 한 장 보내 주고 별도의 보상도 해 주지 않는 곳이 바로 북한이고 김정은이야.
김동식 2025-04-02
'"종북'핵'안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훈부, 연평해전 용사들 25년 만에 국가유공자 비해당 판정 (0) | 2025.03.30 |
---|---|
커지는 ‘중국인 경찰’ 의혹 공론화할 때다 (0) | 2025.03.28 |
"이태원참사, 분노 분출시켜라" (0) | 2025.03.26 |
트럼프 - 젤렌스키, (0) | 2025.03.26 |
우크라 核 벗어던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의 교훈 (0) | 2025.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