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경재

중국' 일본' 러시아가 보는 北核

서석천 2017. 9. 18. 04:50



北, 水爆 실험 그 이후

중국이 보는 北核

북한의 생존이 중국 북핵정책의 제1목표                            


⊙ “지정학적으로 북한은 중국의 동대문…, 한반도에는 필연적으로 미·일·한(美日韓)을 한쪽,
    북한·중국을 한쪽으로 하는 새로운 냉전구도 형성될 것”(장롄구이(張璉瑰) 중공 중앙당교
    국제전략연구소 교수)
⊙ “손톱과 이빨이 없어진 두루뭉술한 제재안으로… 이것이 북한 제재안에 대한 정책”
    (리바오둥(李保東) 유엔 주재 중국 대표)
⊙ 중국, 핵무기가 있는 북한이 중국 편이 되기를 희망

마중가
1940년 중국 창춘 출생. 중국 지린(吉林)대학 물리학부 졸업, 중국 광저우 지난(旣南)대 역사학 박사 /
중국 하얼빈 공대·중국 칭다오(靑島)대 교수, 대만 정치대·보광(佛光)대·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방문교수,
미국 UC 버클리대 연구교수, 한림대 교수 역임 / 저서 《마중가의 중국》 《중국인과 한국인》
《산동화교 100년》(중문) 《중국원문 칼럼선집》(중문) 《한반도 통일시나리오》(공저) 저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 중공군 고위 장령(將領·장성)은 자기의 회고록에 김일성이 1953년 휴전 후 한 차례의 회의에서 “조선은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가 갖고 있는 무기를 우리도 다 가져야 하며 그중에는 원자폭탄도 포함된다”라고 말했다고 썼다. 그리하여 김일성이 핵무기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중국 고위층 내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1956년 2월 북한은 수백명의 유학생을 소련에 파견하여 핵(核)기술을 배우게 하였고 1959년 9월에는 소련이 북한에 소형원자로를 제공하는 데 동의하였다.
 
  1960년 공산 진영이 분열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에는 중국과 소련의 논전(論戰)이 있었다. 1965년 5월 김일성과 브레즈네프는 극비리에 소련의 항공모함에서 북한 핵무기 발전에 관한 협상을 가졌다. 1965년 10월 김일성은 북한군 고위 간부회의에서 “얼마 안 가 우리는 핵무기를 갖게 된다”고 공언했으며 1967년에는 “지금 우리는 원자탄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1970년 북한 부수상 박성철은 “1972년이 되면 우리는 핵무기 제조에 성공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중국의 대북 환상
 
  1974년,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북중(北中)관계가 수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8년부터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하여 대(對)북한 무상 원조는 거의 사라졌다. 1991년 구(舊)소련은 한국과 수교했고, 얼마 후 해체됐다. 1992년에 한중(韓中)수교도 이루어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냉전구도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때까지 북핵문제는 국제적인 안보문제로의 가치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도 방관자의 역할에 안주하고 있었다. 이 기간을 중국인들은 대북핵 암묵기(對北核 暗默期)라고 표현하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인 1980년대에 중국의 대외(對外)정책은 덩샤오핑(鄧小平)의 28자(字) 방침을 좇는 것이었다. 북핵문제를 포함한 여러 국제 이슈에 거의 오불관언(吾不關焉)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28자 정책은 이렇다. 냉정관찰, 온주진각, 침착응부, 도광양회, 선어수졸, 결부당두, 유소작위(冷靜觀察, 穩住陣脚, 沈着應付, 韜光養晦, 善於守拙, 決不當頭, 有所作爲·냉정히 관찰하되 쉽게 흔들리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며 자기의 재능은 숨기고 드러내지 말며 자신의 치부를 감출 줄 알고 절대 앞장서지 말 것이며 자기의 할 일을 잘해 나가야 한다).
 
  제1차 북핵위기는 1991년 말 미국이 위성사진에 근거하여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은 1992년 5월부터 1993년 2 월까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6차례 부정기 핵검사를 받았다. 그러나 김일성은 IAEA는 미국의 조종하에 있는 기구이므로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이를 두고 이것이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남긴 일종의 정치 유산이라는 평가가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이 세습한 후 미국은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가로 경수로를 건설해 주고 80만 톤의 경유 공급을 약속했으며 북한은 다시 NPT에 가입하였다.
 
  이렇게 제1차 핵위기에서 중국은 암묵기를 지냈으며 방관자의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중국 정부가 북핵문제에 대해 방관자 역할을 한 주요 원인은 중국 언론들의 무지(無知)에서 왔다. 그때 중국의 주요 언론들은 북한의 핵개발 움직임을 중국의 안전과 연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권위 있는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공개적으로 “북한은 핵개발을 할 능력도 없고 할 생각도 없으며, 지금 북핵을 논하는 것은 미국이 만들어 낸 음모”라고 단언하였다. 중국의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심지어 “북핵 개발은 북한이 만들어 낸 가짜 뉴스로서 미국을 협박하기 위한 양공(佯攻)에 불과하고 미국과의 담판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술수”라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언론의 보편적인 인식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북핵에 대해 무사안일주의와 수정주의(修正主義)에 함몰되어 있게 했으며 소극적인 방관자의 입장에 오랫동안 안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대북핵 환상을 여지없이 파탄 나게 한 것이 바로 2006년 10월의 북한 지하 핵실험 성공이었다.
 
 
  “북한은 중국의 동대문”
 
장롄구이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
  2001년 9·11사건 이후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 국가로 지정했다. 2002년 10월 존 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한 후 미국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이유로 중유 공급을 철회했다. 2003년 1월 10일 북한은 성명을 발표, NPT에서 탈퇴하였다. 이렇게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다.
 
  제2차 북핵위기 때부터 중국은 적극적으로 한반도 이슈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중국의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인 중공 중앙당교 국제전략연구소의 장롄구이(張璉瑰)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북한 핵실험이 북중 국경지대에 피해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은 이 기회를 첨단무기를 한국에 도입하여 중국 포위의 MD(미사일방어) 라인을 매듭 짖는 기회로 삼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북한은 중국의 동대문이며 이것은 중국이 북핵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북핵문제는 현실적으로 중국의 안전 위협으로 상존하고 있고 중국은 북핵문제로 인하여 세계 정치의 초점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북핵문제에는 미국의 검은손이 깊숙이 뻗치고 있다. 이제 한반도에는 필연적으로 미·일·한(美日韓)을 한쪽, 북한·중국을 한쪽으로 하는 새로운 냉전구도가 형성될 것이다. 중국은 자국 국익을 위하여 반드시 원칙적인 투쟁을 벌여야 한다.”
 
  중국 정부는 초기에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2불정책(二不政策(不生亂, 不生戰): 혼란을 야기하지 말고 전쟁을 하지 말 것)’을 제출하였다. 그 후 이러한 이불정책은 좀 더 완전한 형식인 ‘3대 원칙’으로 정착되었다. 즉
 
  1. 한반도 비핵화(非核化)
  2.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
  3.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도모
 
 
  중국의 속셈
 
1950년 중국은 ‘순망치한’을 이유로 북한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러한 3원칙은 중국의 절대적인 원칙이며 어떤 경우에라도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이기도 하다.
 
  지금 전 세계가 북한의 무모한 핵개발을 반대하고 있는데 중국은 뜬금없이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마치 남한도 핵개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실은 북한에 중국이 북한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대화와 평화를 거절하는 측은 북한이다. 북한은 그 어떤 비핵화를 선제조건으로 하는 대화는 일절 거절하고 있는데 대화를 통한 평화적인 해결은 도대체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볼모로 끊임없이 도발하는 측은 북한인데 마치 중국과 북한이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구호를 외치고 있다.
 
  북핵을 대하는 중국의 기본목적이 북한의 생존이 제1 목적이라면 북한의 핵의 보유 유무는 제2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진정으로 북핵 제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가 있는 북한이 중국 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중공군을 파견할 때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명분으로 400만 중공군을 참전시켰다. 지금 중국은 북한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또 한 번 ‘순망치한’ ‘호파당위(戶破堂危·문이 없으면 거실이 위태롭다)’라는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고어를 명분으로 호시탐탐 북한을 엿보고 있다.
 
 
  중국의 김 빼기 전략
 
유엔주재 중국대표 리바오둥.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 2016년 9월 20일 자 사설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미군이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는 것을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미군이나 한국군이 DMZ를 넘어 북진한다면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수많은 해결책을 내놓지만 북한 강역은 한 치도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기본 원칙에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유엔 주재 중국 대표 리바오둥(李保東)은 중국의 신문 매체를 향해 안보리 제재가 통과되기 전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1. 제재안 초안의 회람기간에 초안 중에 있는 조치가 만약 정세 완화에 불리하든가 외교 노력에 불리하면 삭제한다. 더욱이 북한의 민생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면 삭제하든가 어구(語句)를 고친다.
 
  2. 제재안이 통과된다 해도 많은 단서를 달아서 북한의 경제와 대외무역에 피해를 가급적 적게 한다.
 
  3. 어떤 제재안도 일단 중국이 동의한 후에는 손톱과 이빨이 없어진 두루뭉술한 제재안으로 된다. 이것이 우리의 북한 제재안에 대한 정책이다.
 
  중국 유엔협회 부회장 장소안(張小安)은 안보리에서 중국 대표가 대북한 제재안에 동의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1. 확실히 북한이 1718과 1874 등 결의안을 위반했다.
 
  2. 새로운 결의안이 통과되기 이전에 중국 대표는 이미 결의안 속의 예봉을 많이 무뎌지게 한 후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은 절대로 북한 정권이 멸망하든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반대하며, 비록 핵개발은 멈추어야 하지만 정권 자체는 상존(尙存)하기를 희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10월 북한의 제1차 핵실험 후 안보리는 1718호 제재안을 통과시켰다. 중국은 찬성표를 던지고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제재는 목적이 아니다. 중국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6자 회담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며, 이번 제재안의 일부 내용에 대해 동의하지 않음을 선포한다.”
 
  2017년 3월 2일의 2270 제재는 매우 엄격한 제재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 훙레이(洪磊)는 이번 제재안에 대해서도 또 김 빼기 설명을 하였다.
 
  “제재는 북한의 핵개발을 제재하는 것이고 민생과 인도(人道)의 요구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 제재안에는 6자 회담 재개와 정치와 외교 방식으로 동북아 정세를 해결하자는 내용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농간으로 망가진 안보리 제재안
 
지난 2013년 5월 24일 북한의 2인자 최룡해(왼쪽)는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시진핑과 만났다.
  안보리는 북핵을 제지하기 위하여 1695, 1718, 1874, 2087, 2094, 2270, 2321, 2356 등 8차례의 제재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제재의 실질적인 실행은 중국의 비협조로 인해 별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번 9월 3일의 북한의 수소폭탄 시험은 인류에 대한 가장 난폭한 도전이다. 9월 12일 새벽 유엔의 새로운 제재결의안 통과를 앞둔 9월 11일 중국 외교부 겅솽(耿爽) 대변인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중국 측은 유엔 안보리가 북한의 제6차 핵실험에 대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는 안보리 성원들이 공식(共識)을 갖고 대외적으로 단결하여 일치된 소리를 낼 것을 희망한다. 안보리의 내용은 두 가지 뜻이 있는바 하나는 북한에 대한 제재이고, 다른 하나는 6자 회담의 재개이다. 최종 목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한반도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번 북한 제6차 핵실험에 대한 제재 조치도 중국의 간섭으로 초안보다 많이 완화되어 발표되었다.
 
  결의안은 당초 미국이 마련한 초안에 포함됐던 대북 원유 공급 중단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자산동결 조치가 제외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초안이 수정된 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초안은 당초 북한에 대한 원유와 정제된 석유제품, 액화 천연가스의 수출을 금지했으나 수정안은 원유 수출은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석유 수출은 연간 200만 배럴로 제한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국영 항공사인 고려항공에 대한 자산동결 조항은 삭제됐다. 아울러 북한의 해외 노동자 수출 전면금지 조항도 완화됐다. 초안에는 인도주의적 원조, 또는 비핵화 등 안보리 결의의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유엔 회원국들이 북한 국적자에게 노동허가서를 발급하지 못하도록 했다.
 
  가장 중대한 한 차례 대북한 제재가 또 한 번 중국의 농간에 제지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되었다.
 
 
  ‘쌍중단’과 ‘쌍궤제’
 
  최근에 중국은 북핵 해법으로 새로운 방안을 제안하였다. 이른바 ‘쌍중단’과 ‘쌍궤제(雙軌制)’이다. 이는 2017년 3월 8일 중국 외교부장 왕이(王毅)가 중국 국내 언론 브리핑에서 제출한 것으로서 ‘쌍중단’은 한미는 대규모 군사 연습을, 북한은 핵개발을 중단하는 것이다. ‘쌍궤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동시에 추진하자는 제안이다.
 
  한미군사연습을 북핵과 동일시하는 어리석은 중국 외교부장이 가소롭고 중국의 나태와 시행착오로 북한의 핵이 오늘날까지 오게 된 책임을 묻지도 않고 거창하게 그 무슨 한반도 평화체제 운운하는 모습에 곡소부득(哭笑不得)이다.⊙

글 : 마중가 중국문제전문가



北, 水爆 실험 그 이후

김정은과 종북(從北) 최후의 날                                                             

                            
가상 시나리오
김정은이 백령도 공격과 함께 꺼낸 핵카드는 중국의 배신으로 무력화(無力化)되고 남한에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어, 애국자를 사냥하던 반역자 사냥이 시작되는데 북한노동당 정치국은 김정은을 좌경맹동주의자로 규정, 해임한다
김정은은 지난 8월 30일 중장거리전략탄도로켓 ‘화성-12형’ 발사훈련을 현지 지도했다. 사진=뉴시스
  지난 8월 26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선군절’을 맞이해 북한군 특수부대의 백령도 및 대연평도 점령 가상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보도하였다. 김정은은 “총대로 적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리고 서울을 단숨에 타고 앉으며 남반부를 평정할 생각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지난 9월 10일 미국의 NBC 방송은 트럼프 행정부가 포괄적인 북핵(北核) 대책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외교적, 군사적 조치를 종합한 이 안은 사이버 공격, 정보 공작, 감시 강화 외에 전례 없는 내용도 검토 대상이라 밝혔다. 백악관과 국방부 소식통을 인용한 기사였다.
 
  NBC는 미국이 북한을 핵으로 선제공격하는 방안도 검토해 보았지만 여론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최대한 강력한 비군사적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은 미국이 북한을 먼저 공격하면 북한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트럼프 행정부에 통보하였다고 한다.
 
  이 방송은 한국이 요청한다면 전술핵 재배치를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는 미국이 지난 30년간 추구하였던 한반도 비핵화 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국은 또 유럽에서 사용하는 지상(地上) 이지스 SM-3 미사일 요격용 시스템을 (한국에) 배치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미국 관리들은 중국 측에, 만약 북한에 대하여 기름을 끊는 것과 같은 더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국과 일본이 자체 핵무기 계획을 추진할 것인데 그럴 경우 미국은 이를 막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백령도 점령 훈련과 전술핵 재배치 검토. 현재로선 가상(假想)이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이 수소탄 실험에 성공한 상황에선 평소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도 실제로 일어난다. 이런 때는 상상력을 동원한 예측을 할 필요가 있다. 다음부터는 가상 시나리오이다.
 
 
  김정은의 불면(不眠)의 밤
 
  김정은은 자신감과 불안감 사이에서 불면의 밤을 보낸다. 3일 전, 버티던 중국까지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안에 찬성, 기름을 끊겠다고 통보해 왔다. 어제는 유엔 안보리가 자신을 반(反)인류범죄자로 규정,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하기로 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체포영장이 발부되면 외국에 나갈 수 없고 나갔다가는 체포된다. 중국은 물론이고 꿈에 자주 보이는 어린 시절의 그 스위스에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유엔 안보리 결의사항을 보고하는 노동당 국제부장부터 분노보다는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었다. 김정은은 측근들이 요 며칠 동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군사에는 무지한 여동생 이외에는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독재자의 절대고독을 실감한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현재 상황을 조용히 정리해 보자고 메모를 하기 시작하였다.
 
  1. 수소탄의 소형화엔 성공하였지만 미국을 때릴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은 재(再)진입 기술 개발이 늦어져 실전(實戰) 배치에는 1년이 더 걸린다.
 
  2. 괌, 오키나와, 일본을 사정권에 둔 중거리 미사일은 핵탄두의 소형화에도 성공, 현재 40기가 전략군에 배치되어 있다. 핵탄두는 분리하여 노동당이 관리한다.
 
  3. 서울 등 한국을 칠 수 있는 단거리 미사일은 100기를 뽑아서 핵탄두 장착용으로 개조하였다. 현재 60개의 핵탄두를 분리, 보관하고 있다.
 
  4. 미사일에 장착 가능한 핵탄두는 모두 100여 개로서 50~150kt의 폭발력을 가졌다. 이를 몽땅 한국에 쏟아 부으면 5000만명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
 
  (김정은은 핵 발사를 명령할 때 쓰게 되어 있는 암호 코드를 외어보았다. 별실의 입력용 키보드를 만질 때마다 쾌감과 함께 전율이 왔다. “이것만 누르면 남조선은 사라진다. 동시에 나도…”)
 
 
  ‘당장 급한 불은 기름 부족’
 
김정은은 선군절(8월 25일)을 맞아 북한 특수부대의 백령도와 대연평도 점령을 위한 가상훈련을 참관했다. 사진=뉴시스
  5. 남한 정세는 늘 그렇지만 복잡하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서 평화협정 논의를 제안하고, “우리 허가 없이는 한반도에서 그 누구도 전쟁을 할 수 없다”면서 미국에 제동을 걸 때는 예상대로 김대중·노무현 다루듯이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뒤 달라졌다.
 
  (문 대통령이 아베와 만나 북한에 기름을 끊어야 한다면서 함께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하기로 하였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사나운 트럼프의 압력에 무너졌군”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평화냐, 전쟁이냐의 구도를 만들면 겁 많은 남조선 사람들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줄 거야”라는 기대는 접지 않았다.)
 
  6. 이미 두 달 전부터 북한노동당으로 들어오는 외화 유입이 크게 줄었다. 미국이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을 제재하겠다고 발표하기 직전 이들 은행에 열어두었던 북한 계좌를 스위스,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싱가포르 등지로 옮기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 은행 제재 때처럼 외화를 싸 들고 다니면서 핵무기 개발 부품을 사들이고 당 간부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사야 할 판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충성은 달러에서 나오는데….
 
  (매일 비행기로 날아오던 파리의 아이스크림 수송도 김정은이 나서서 못하게 했다. 특별 관리 대상 500명에게 주는 벤츠, 롤렉스 선물도 올해엔 어렵게 되었다.)
 
  7. 해외에 나가 있는 약 10만명의 노동자들이 보내는 자금도 차단되었다. 급료가 노동자 본인에게 지급되지 않고 정권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노예노동으로 규정된 탓이다. 연간 약 5억 달러가 날아갔다.
 
  8. 당장 급한 불은 기름 부족이다. 탱크나 항공용으로 6개월 정도는 비축하였지만 인민생활용으로 돌려쓰지 않으면 민심이 흉흉해지고 이게 식량 가격 폭등으로 연결되면 소요 사태의 가능성도 있다. 주민의 80% 이상이 시장에 생계를 의존함으로써 당의 책임이 경감된 것은 다행이지만 물가를 통제할 수 없으면 여론이 악화된다.
 
  (김정은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여론이 무서운 줄 알았는데 시장이 커지니 여기에서도 여론을 신경 써야 하다니”라며 쓴웃음을 짓는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김정은이 이날 밤 내린 결론은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였다. 인민군 총참모부에서 올린 보고서는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결행하는 데 단유(斷油)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 최고사령관의 결단을 청원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군의 인도지나(印度支那) 진주(進駐)에 보복하기 위하여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한다. 그때 일본은 석유 수요의 80%를 미국 석유회사로부터 사들이고 있었다. 석유 비축량은 1년분 정도였다. 미국의 석유 금수령(禁輸令)은 그동안 개전(開戰)에 반대해 왔던 해군을 강경론으로 돌려놓는다.
 
  기름과 돈줄이 끊어진 상태에서 몇 년을 버틸 것인가? 그는 비로소 자신이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북한은 고구려를 민족사의 정통으로 앞세우고, 신라를 민족반역 세력으로 몰아가면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방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왔다. 어느새 북한도 연개소문 시절의 고구려를 닮아 세계최대강국과 불화하더니 고립무원이 되었다. 김정은은 “그럴수록 혁명적 낙관주의에 서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나에겐 핵이 있고, 인질이 된 한국이 있다. 그리고 백령도….”
 
  “그렇다. 백령도 기습 상륙 작전을 벌인 다음, 핵카드를 꺼내 돌파구를 만들자”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백령도 점령 작전 뒤 핵카드 꺼내다
 
북한군 특수부대는 지난 8월 25일 김정은이 참관하는 가운데 국군과 흡사한 복장을 하고 백령도와 대연평도 점령을 위한 가상훈련을 실시했다. 사진=뉴시스
  한 달 뒤 김정은은 막다른 심정으로 백령도 침공 작전을 명령한다. 박헌영 같은 남한의 종북좌파 세력이 협조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기습을 받은 백령도의 한국 해병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날씨가 나빠 공중지원을 받지 못하여 3개 사단의 북한군에 상륙을 허용하고 말았다. 약 3000명의 한국군이 포로로 잡혔다. 수천 명의 주민도 적치하(赤治下)로 넘어갔다. 이때 백령도에 관광차 왔던 중국 국적의 조선족 100여 명이 죽었다. 김정은은 백령도 점령에 성공한 다음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요지는 ‘이로써 서해 북방 한계선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만약 적들이 반격하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겠다’.
 
  김정은은 포로로 잡은 군인과 민간인은 협상을 통하여 풀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3일 뒤 한미군은 합동으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백령도를 점령한 북한군과 대안(對岸)의 북한군 군단 사령부, 잠수함 기지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백령도 수복을 위한 상륙 작전은 미국이 급파하기로 한 두 척의 항공모함이 도착한 이후로 예정되었다.
 
  다음날, 김정은은 북한군 최고사령관 이름으로 최후통첩을 한다.
 
  “현 위치에서 휴전하자. 계속 도발하면 우리는 한국의 한 도시를 핵으로 공격하겠다. 미군이 개입하면 괌과 오키나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김정은은 북의 통첩이 공갈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핵실험을 한다. 서해의 무인도를 향하여 50kt짜리 핵탄두 실물을 장착한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 실제로 파괴한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 유엔 회원국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응징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
 
 
  한미, 전술핵 사용 가능성 선언
 
지난 6월 24일 오후 ‘6·24 사드 철회 평화 행동’ 참가자들은 사드배치에 반대하며 서울 종로구 미국대사관 포위 행진을 벌였다.
  한국과 미국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에 대한 북한의 침공을 미국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 공동 대응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두 대통령은 또 북한이 핵사용으로 위협하였으므로 미국도 확장억지 정책의 원칙에 입각, 북한에 대하여는 핵무기 사용 권한이 있음을 선언하였다.
 
  두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에 전술핵이 이미 배치되어 있음을 공개한다. 두 나라가 비밀리에 미군기지 안에 전술핵을 반입하였고, 전시(戰時) 상태인 지금부터는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한국에 배치된 전술핵은 150kt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수소탄으로서 전폭기에 의한 정밀 타격이 가능하고 지하를 뚫고 들어가 터지므로 김정은이 숨어 있는 지하시설에 대한 파괴력을 최대화시키는 반면 민간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어 방사능 오염도 줄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설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 있는 20만명의 미국인을 대피시키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는 “북한군이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징후를 30분 전에 포착할 수 있고 그때는 선제공격으로 파괴할 것이다. 이 위기는 인류 전체의 문제이므로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비장하게 말하였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일본 정부는 유엔군 후방사령부의 관리하에 들어간 7개 주일(駐日) 미군기지로부터 발진하는 항공기와 군함이 한국에서 작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였다. 이때 만주 지역에 배치된 중국군이 압록강 접경지대로 전진,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현지에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중국, 김정은에게 최후통첩
 
  백령도 침공 6일 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직접 텔레비전에 나타나 입장을 표명한다.
 
  “우리는 수개월 전에 이미 북한이 무력 공격을 당하면 북한을 지원할 것이고 북한이 먼저 공격을 하여 반격을 당할 경우엔 중립을 취할 것임을 미국 측에 알렸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는 한반도 사태에 무력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북한 당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선언을 취소하고 백령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중국은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음을 선언한다. 한국에는 약 100만명의 중국 국적자가 머물고 있음을 북한 당국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의외로 차분하게 반응하였다. 국제사회가 신속하게 대응하고 한미군(韓美軍)이 백령도 수복 작전을 시작한 데다가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선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비상계엄은 계엄사령관이 국방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다. 행정뿐 아니라 사법(司法)도 계엄사령관 지휘로 넘어간다.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이 장성 중에서 추천, 대통령이 임명한다. 국방장관은 육군참모총장을 추천하였다. 합참의장은 연합사령관과 함께 대북(對北) 전략을 지휘해야 하므로 육군총장이 맡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행정과 사법까지 계엄사령관 지휘하로 넘어가고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을 통하여 보고를 받아야 함으로 자연스럽게 계엄사령관이 권력의 새 축이 되었다.
 
  일부 종북 시위대가 반전(反戰) 시위를 하려다가 군대가 출동하기 전에 시민들의 뭇매를 맞고 흩어졌다. 좌파 시위꾼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에는 핏발이 돋았다. 한국의 좌파가 벌여온 관념의 유희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였다. 그는 “지식인은 전쟁이란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 궤변을 끝없이 늘어놓을 수 있다”고 했다. 전쟁에 직면하면 생존투쟁을 에너지로 하는 애국심이 계급투쟁론을 누른다는 말이 실증(實證)되는 순간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한국의 자칭 진보 세력은 생활 좌익으로서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은 살길을 찾아 숨는 길을 선택하였다. 남로당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북한군이 남침하면 20만명의 좌익들이 궐기, 전쟁을 일찍 끝낼 수 있다고 장담하였으나 전쟁이 나자 소멸되었던 현상의 재판(再版)이었다. 종북 세력에 기대를 걸었던 김정은의 계산은 허탕이었다.
 
 
  계엄사령관의 결단
 
  계엄사령관이 맨 처음 취한 조치는 반국가 활동자 예비 금속령이었다. 그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기무(機務)사령관을 불러 지침을 내리는 자리에서 북한의 핵개발을 도와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주문하였다.
 
  “나는 기무사령관을 지낼 적에 먼 데서나마 종북 세력의 발호를 걱정하면서 이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국의 반역자들이 돈, 정보, 정책으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미국은 1953년에 율리우스 로젠버그 부부를 간첩죄로 사형 집행하였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형된 유일한 경우입니다. 과학자인 로젠버그는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 정보를 수집하여 소련 정보기관에 제공했었죠.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한 어빙 코프먼 판사는 준엄하게 논고했습니다. 이런 요지였습니다.”
 
  계엄사령관은 쪽지를 꺼내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악질이라고 간주한다. 살인은 피해자만 죽이지만 당신들은 소련이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년 먼저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벌여 5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100만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으로 더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 피고인들의 반역은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꾸어놓았다. 우리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증거이다.
 
  율리우스 로젠버그가 주범(主犯)임은 분명하나 처(妻) 에델 로젠버그도 책임이 있다. 성년(成年)의 여자로서 남편의 추악한 범죄를 막기는커녕 격려하고 도왔다. 피고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한 신념을 위하여 자신들의 안전뿐 아니라 자녀들도 희생시켰다. 목적 달성을 위한 사랑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보다 앞섰다.’
 
 
  ‘가장 큰 적폐는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적폐’
 
  계엄사령관은 이런 날이 올 때를 오래 기다린 사람 같았다. 그는 쪽지를 뒤집더니 뒷면에 메모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의 바탕인 자유민주주의의 존립 그 자체를 붕괴시키는 행위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뻐꾸기는 뱁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고, 이를 모르는 뱁새는 정성껏 알을 품어 부화시킨다. 그러나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뱁새의 알과 새끼를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낸 뒤 둥지를 독차지하고 만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그 전복을 꾀하는 행동은 우리의 존립과 생존의 기반을 파괴하는 소위 대역(大逆) 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통진당을 해산시킬 때 안창호·조용호 재판관이 결정문의 보충의견에 써넣은 문장이었다.
 
  계엄사령관은 수사 책임자들과 악수를 하고 헤어지면서 의미 있는 말을 덧붙였다.
 
  “적폐 중 가장 큰 적폐는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적폐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적폐를 제쳐두고 반역자가 애국자를 사냥하는 것을 적폐 청산이라면서 도와준 검사·판사는 없는지 모르겠네요. 간첩을 골키퍼로 세워놓고는 축구를 할 수 없잖아요?”
 
  검찰총장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력감에 사로잡힌 김정은
 
  백령도 도발을 명령하였던 김정은은 중국이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무력 개입을 예고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서울 등 대도시에 중국 국적자가 100만명, 미국 국적자가 20만명, 일본 국적자가 6만명이나 체류 중이란 사실을 간과하고 핵사용을 운운한 것이 결정적 패착이었음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백령도 점령 작전을 기획한 부서에선 한국에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고려 대상에도 넣지 않았던 것이다. 핵사용 위협이 바로 중국에 대한 위협이 된다는 것도 알 리가 없었다. 김정은은 처음으로 무력감(無力感)에 휩싸였다.
 
  압록강을 넘어 진격할 태세를 갖춘 중국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휴전선에 배치된 70만 병력 중 30만명을 빼내어 북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만큼 서울에 대한 장사정포(長射程砲) 타격 능력이 약해진다. 김정은은 이제 문명세계가 자신을 포위망에 가두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허수아비들을 데리고 전쟁놀이를 해왔음도 알게 된다. 전쟁은 군인이 일으키는 경우보다 전쟁을 모르는 독재자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다. 전쟁을 정말 두려워하는 이는 군인이다. 전쟁의 무서움을 잘 알고 전쟁이 났을 때 피해를 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지휘부도 그런 점에선 다른 점이 없었다.
 
  중국군이 압록강 도하(渡河) 준비를 마친 날 저녁 북한중앙방송은 북한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이름으로 ‘중대 보도’를 내놓았다. 아나운서는 군복을 입은 남자였다. 발표 요지는 이러하였다.
 
 
  김정은 해임
 
작년 2월 김정은의 대전차유도무기 현지 시찰을 수행한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원 안). 사진=뉴시스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조국을 위기에 빠트린 작금의 사태에 책임을 물어 김정은을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기로 결의하였다. 백령도 작전은 김정은이 정치국의 동의 없이 혼자서 결정한 좌경맹동주의적 과오였다. 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수령이 선포하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조선노동당 정치국은 조선인민군이 백령도에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으며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약속한다.”
 
  한미연합사는 백령도에서 북한군이 철수하는 것을 허용하고 이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세계 언론은 김정은의 생사(生死)에 대하여 추측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한국과 미국 정보기관의 소식통을 인용하는 글이 많았는데 대체로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겸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주동한 궁정 쿠데타로 그림을 그렸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흐루쇼프가 비밀경찰 두목 베리아를 제거할 때처럼 황병서가 직접 권총을 들이대어 김정은을 체포하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며칠이 지나도 김정은의 생사 여부와 행방에 대하여는 확인된 정보가 잡히지 않았다.
 
  쿠바 미사일 사건 이후 처음 전개된 핵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세계 사람들이 안도하는 가운데 주식 시장은 과열 조짐을 보였다. 바쁜 곳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였다. 북핵을 도운 적폐 세력 수사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의 수사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사건의 명칭에 ‘적폐’라는 말을 넣을 것을 지시하였다. 대통령은 수사가 일단락될 때까지 계엄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북한군이 백령도에서 철수한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긴급 전화 회담을 갖고 한반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새로운 6자 회담을 제안하였다. 공동 발표문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양국 정상(頂上)은 한반도의 미래가 통일되고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이기를 바란다.”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이란 말을 넣고 싶었으나 시진핑 주석이 반대하였다. ‘자유롭고’라는 말을 받아주었으니 ‘강력하고’는 빼자는 것이었다. 통일 한국의 핵무장을 경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


北, 水爆 실험 그 이후

일본이 보는 北核

미・일(美日) 공동 미사일방어체계 구축 … 미・북(美北) 간 타협 경계                            

⊙ 내년도 방위비, 사상 최대 규모인 5조2551억엔(미화 약 500억 달러)
⊙ ‘한국·일본·대만이 핵무장을 하면, 중화패권주의 붕괴’라고 생각하기 시작
⊙ 한국에 대한 호감도 바닥, “중국은 미운(보기 싫은) 나라, 한국은 건방진 나라, 북한은 나쁜 나라”

홍형
1954년생. 육군사관학교 졸업(26기) / 주일(駐日)한국대사관 참사관·공사 역임.
와세다대 현대한국연구소 객원연구원
2013년 10월 27일 사이타마(埼玉)현 아사카(朝霞) 훈련장에서 열병식을 하는 육상자위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앞에 일본은 국방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8월 하순, 한일(韓日) 양국에서 공습경보가 울렸다. 한국의 공습경보는 연례 을지훈련 기간 중의 민방위훈련이었다. 서울보다 일주일 후(8월29일)에 일본에서 울린 미사일 공습경보는 실제상황이었다. 북한의 중거리탄도탄(화성-12형)이 일본(홋카이도) 상공을 통과한 때문이다.
 
  김정은은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능력을 과시한 5일 후인 9월 3일, 대륙간탄도탄 장착용 핵탄두 실험인 6번째 핵실험을 강행했다. 오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 일본 방위대신은 북측의 핵실험 폭발력을160kt으로 발표, 히로시마형(型) 원폭의 10배 이상인 수소폭탄임을 인정했다.
 
  북한의 핵무기체계의 완성, 즉 핵미사일 실전 배치는 한일 두 나라에 더없이 심각한 공통의 위협이다. 이에 대한 한일 양국의 대응은 양국의 국민성만큼이나 다르다.
 
  지금 한일 양국이 목도하고 있는 사태, 즉 트럼프와 김정은의 대결은, 어느 쪽이 이기든 한반도의 현상(‘1953년 체제’) 변경을 의미한다. 이 엄청난 역사적 현상 변경 과정에서 한일 양국은 과연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갈 것인가? 함께 갈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근래 한미(韓美)동맹이 겉돌고 있는 데 비하여, 일본정부는 미국과 긴밀한 정보 공유를 통해 북한의 도발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대처하고 있다.
 
 
  재난국가 일본의 핵 대비
 
  한일 양국은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현상 변경을 앞두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다. 양국은 국가 목표가 다르다. 한국은 북쪽의 공산 전체주의 체제를 제거하는 것이 생존은 물론, 궁극적 국가 목표이다. 일본은 군사적으로 자신에게 가해질 공격, 즉 공습과 상륙을 거부하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 목표, 군사력 건설의 목표이다.
 
  한국이 분단 후 72년간 전쟁 속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동안, 일본은 평화를 누려 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일본사람들도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일본이라고 하면 지진을 떠올릴 정도로 거대한 자연재해로부터 일상을 지키기 위해 전쟁 대비 이상의 노력을 해 왔다.
 
  전쟁국가 한국엔 병역의무가 있지만, 일본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자연재해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교육훈련이 철저하다. 양국이 지금 직면한 핵 위협에 대해, 한국은 너무나 오래 지속된 전쟁 때문에 오히려 공포에 둔감하고 대범해진 반면, 일본은 거대 재해의 공포에 핵 위협이 더해진 꼴이다.
 
  문재인 정권이 북한의 수폭 완성, 즉 한반도의 현상 변경에 무지·무책(無知·無策)인 반면, 일본사회는 태평양전쟁 이래 잊어 왔던 국방·안보를 위한 총력체제 구축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에도 유명해진 J-Alert라는 공습경보 시스템은 전쟁보다 더 큰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지진과 쓰나미 등 자연재해 대비 시스템을 발전시킨 것이다.
 
  현재 일본은 1000년에 한 번이라는 동일본대지진(2011년 3월 11일)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엄청난 국가적 고통과 부담을 강요하고 있다.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던 자민당이 예상외로 빨리, 더 강한 정권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당 정권이 거대 재해 앞에서 보여준 무능과 한계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0년에 한 번 대규모의 해저지진과 쓰나미가 30년 내에 인구와 산업이 밀집된 태평양 연안을 덮칠 것이라는 예고가 일본을 전율시키고 있다. 일본에 이런 가공할 자연재해에 비하면 북핵은 오히려 대응하기 쉬운 문제일 수 있다.
 
  일본 언론들은 한반도에서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듯이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일본정부에 군사적 대비를 주문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부가 미국과 연대 혹은 역할분담을 통해 대북 압박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북 석유 수출 제한 ▲북한 노동인력 수출 제한 ▲중국은 물론, 러시아와도 협력 ▲한반도 전쟁 회피 등 국내외적으로 많이 거론된 내용이다.
 
 
  국방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지난 2014년 4월 일본을 방문한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왼쪽)과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방위대신. 마치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 들어가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진=뉴시스
  안보문제는 일반 국민들의 감각을 일본정부가 그대로 정책에 반영할 수는 없다. 일본사회에는 일본의 미사일 요격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처럼 북핵은 미국이 해결할 문제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거의 체념 수준이다.
 
  그러나 일본 지도층의 생각은 확고하다. 특히 미사일방어체계를 동맹국 미국과 공동 구축하기로 했다. 미·일(美日) 통합방어체제 속에서 이미 보유 중인 이지스함(현재 6척)의 SM-3 및 PAC-3 요격체계(36개 포대) 개량에 더하여 ‘이지스 어쇼어’ 도입도 정해졌다. 일본은 이러한 시스템을 비싸더라도 동맹국 미국에서 도입한다. 그게 동맹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는 2019년도부터 5개년계획으로 ▲조기경보위성과 독자적인 GPS위성 체계 구축 등 정보력과 군사력이 결합된 군사력 건설 ▲적(敵)기지 공격능력 등 정비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진다.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까지 늘리는 문제도 검토됐다고 한다. 지난 8월 입각(入閣)한 오노데라 방위대신은 바로 입각 전까지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문제는 돈이다. 방위성이 요구한 내년도 방위비는 금년 대비 2.5% 늘어나 사상 최대 규모인 5조2551억 엔(미화 약 500억 달러)이다. 복지예산의 6분의 1이다. 이렇게 늘었어도 내년도에 적기지(북한 미사일기지 등) 공격을 위한 예산이 반영되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인 이들이 많다.
 
  일본은 방위비를 미국이 나토국가에 요구하는 수준인 GDP 2%까지 늘릴 수 있을까? 이론상 매년 7.2%씩 늘려 가면 10년 후에는 방위비가 두 배가 된다.
 
  상속세를 대폭 올리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증세(增稅)는 정치인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다. 매상세(부가가치세, 현재 8%)를 당초 계획대로 10%로 올리는 것도 경제상황을 살펴야 한다. 고령화에도 복지지출을 억제하는데 국방강화를 위해 증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경제성장을 하면 세수가 늘지만 그것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의 인구동태로 볼 때 30년 후인 2050년경 인구는 지금보다 2000만명 안팎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미국의 대북 군사작전에 협력할까
 
  일본정부는 현재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대북(對北)제재 강화를 미국과 함께 주도하고 있다. 때문에 평양 측과의 대화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부정한다.
 
  미·일동맹은 미국의 최대 전략자산의 하나다. 일본은 지금 소위 ‘해석 개헌’ 및 안보 관련 법제를 정비하여 전쟁이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미국이 김정은을 징벌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할 때는 미국은 일본의 협력을 전제로 한다.
 
  미국이 북한 핵 능력 및 김정은 제거를 목표로 대북 군사작전을 전개할 경우, 일본은 미군을 지원할 것인가? 일본정부 당국자들은 원론적으로는 “미·일동맹 체제에서 일본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일관계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戰犯國)으로 취급, 핵무장을 허용치 않는다. 반면에 일본의 많은 정치인과 전문가들은 늘 제2의 닉슨 쇼크(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전격적인 중국방문으로 인해 일본이 받은 충격)를 우려한다.
 
  미국이 혹시 장래에 미·일관계보다 미·중관계를 우선시키지는 않을까? 미국이 대북 강경책을 펴다가 북한과 극적으로 타협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에 대한 그러한 의구심 때문에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TV토론 등에서 “일본은 미·북 간의 중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일본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후에도 냉전 상황 아래서 꾸준히 북한과 접촉하면서 수교를 모색해 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는 데 북한의 위협을 이용해 왔다. 19년 전(1998년 8월 31일)에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열도 상공을 넘어 태평양에 떨어졌을 때, 일본정부는 불과 4개월 만에 정찰위성 도입을 결정했다. 일본은 2003년부터 정찰위성을 운용하고 있다.
 
 
  국방력 강화 공감대 형성
 
  일본인들 중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왜 김정은을 제거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악(惡)으로 보고, 레짐 체인지와 제거를 언급할 때, 일본인들은 ‘악의 제거’라는 개념, 목표에 동의하는 게 쉽지 않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악이나 ‘악의 체제’에 대해 증오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선진국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기독교 문명 내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이 없는 것과 관련이 있다. 아베 총리의 재집권 초기에 회자되던 ‘가치관 외교’라는 구호는 어느 틈엔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일본을 깨운 것은 무모한 김정은과 이를 부추기고 이용해 온 중국이다. 그들이 미국의 보호에 안주해 온 일본을 결정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배치를 계기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서, ‘일본인들은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강해지고 있다. 지금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와 일본을 압박하는 데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방력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에 언제까지 의존할 수만 없으므로, 나토국가 정도의 국방비 부담은 각오하는 것 같다. 결국 일본의 국방비는 지금보다 대폭 늘어날 것이다.
 
  재작년 정도까지만 해도 “평양 측이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폐기했으므로 한국도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말하면 이질분자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일본 자신은 당장은 정치적 역사적 경위 때문에 핵무장하기가 어렵지만 한국·일본·대만 등이 모두 핵무장을 하면, 중화패권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보통사람들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관계도 강화하고 있다. 일본의 새로운 동맹에는 호주·인도·동남아 국가들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동맹군들이 대개 영연방국가들이라는 점이다. 메이 영국 총리의 일본 방문을 보며 영·일동맹이 한 세기 만에 다시 부활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조선신보》, 북핵실험 마지못해 보도
 
일본 도쿄에 있는 조총련 본부건물.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일본 내 조총련의 입지가 위축되고 있다.
  김정은의 ‘한반도 현상 변경’ 도전과 문재인 정권의 반미(反美) 반일(反日) 노선은 재일 한국인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있다. 한국에 반일 정권이 들어서서 한일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면 재일 한국인들은 유·무형의 압박을 받게 된다. 한국의 친중(親中)반일 노선은 일본사회에서는 바로 한중(韓中)의 반일 연합전선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주위의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말을 아낀다. 혹시 불필요한 마찰로 발전할까 봐 조심하거나 아예 말을 섞기 싫다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는 여론조사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예 묻지도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연히 들은 이야기다. 일본인들끼리 있을 때 남북한과 중국을 어떻게 말하느냐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했다. “중국은 미운(보기 싫은) 나라, 한국은 건방진 나라, 북한은 나쁜 나라(憎い中国 生意気な韓国 悪い北朝鮮)”라고 말한다고 한다.
 
  일본에서 한국·한국인에 대한 호감도는 서울올림픽 때가 가장 높았다. 그 후 지속적으로 떨어지다가, 김대중 정권이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우호적 연출을 했을 때 일시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후 한국정부에 대한 신뢰는 계속 떨어져 지금은 5공 때보다 못한 것으로 느껴진다.
 
  민단과 조총련 사회의 반응이 흥미롭다. 민단은 얼마 전에 모처럼 평양과 조총련에 대한 규탄 활동을 전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조총련과 한통련 등 재일반국가단체 구성원들의 본국 자유입국 허용 방침을 밝히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위원으로 강종헌 등 민단 파괴에 앞장서 온 반국가단체 간부와 외국 국적자까지 위촉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총련 조직의 반응은 더 흥미롭다.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인터넷판 4일자는 평양이 발표한 수폭실험 성명을 눈에 잘 띄지 않게 게재했다. 《조선신보》(종이신문)는 수폭실험 5일 후인 9월 8일자에야 수폭실험 성공 소식을 1면에 넣었다. 평양의 지시 때문에 마지못해 게재한 것 같은 분위기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때문에 일본 전국에 공습경보 훈련이 실시된 것은 조총련으로서는 15년 전에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는 바람에 조총련 조직 전체가 뿌리째 흔들렸던 악몽의 재현이다.⊙

글 : 홍형 전 주일공사

*************************************************************

北, 水爆 실험 그 이후

러시아가 보는 北核

푸틴의 부국강병책,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과 일맥상통                             

⊙ 푸틴의 세력 확장 정책, 극동지역과 북극까지 포함돼
⊙ “북한은 풀뿌리를 먹는 한이 있어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 스트롱맨 ‘푸틴’ 통해 김정은 통제해야

박종수
1957년생. 서강대 정외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박사(경제학) /
러시아 상트페트르부르크국립대 초빙교수,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 역임.
현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정책위원, (사)GEPI 소장 /
《러시아와 한국 : 잃어버린 백년의 기억을 찾아》 《21세기 북한과 러시아 : 신화, 비화 그리고 진화》
《북방에서 길을 찾다 : G7통일한국을 향한 신북방정책, 2017》 등 저술
문재인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9월 6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9월 6일 한·러 정상회담에서도 어김없이 지각했다. 그 다음 일정은 보나마나다. 러·일 정상회담은 17분으로 단축됐다. 푸틴의 상습 지각은 불치의 악습인가? 아니면 의도적 전략인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창의적 상상력을 동원해 본다.
 
 
  지각왕 푸틴의 야심
 
  푸틴은 현대판 차르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연속 4년간 선정한 세계 영향력 1위의 인물이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후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위기 속에서도 푸틴 지지도는 80%의 고공행진을 했다. 서방에서는 관제언론을 동원한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푸틴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왜 그럴까?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남한 면적의 173배이고 국경선은 총연장 2만km로 1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총 329회의 전쟁을 치렀고 주로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한 편이었다. 제2차 대전 때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독일군에 의해 900일간 봉쇄당했다. 1일 125g의 빵으로 연명하고 인구 3분의 1를 잃었다. 제2차 대전의 전체 희생자 5000만명 중에서 2600만명이 러시아인이었다. 러시아인들은 빵 한 조각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지만, 대국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것은 참지 못한다. 소련해체의 장본인 고르바초프의 우유부단함에 분노했고 술주정뱅이 옐친의 무능에 분통을 터뜨렸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지도자가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그는 법학도의 치밀함과 유도선수의 날쌤과 정보요원의 은밀함을 갖춘 인물이다. 전투기를 타고 체첸 전쟁터로 날아가고 잠수함으로 바닷 속을 유영하며,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팝송을 부르기도 한다. 푸틴은 대통령보다 상위개념인 왕중왕 차르다. 러시아 국민들은 세계 지도자들이 푸틴에게 쩔쩔매는 듯한 모습을 TV 앞에서 지켜보면서 대리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단일 패권국가인 미국 대통령도, 러일전쟁에서 패배를 안겨 준 일본 총리도, 신의 대리인인 로마 교황도 차르 푸틴을 장시간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러시아는 부국강병(rich & strong state)을 지향하지만, 굳이 양자택일을 한다면 ‘부유한 국가’(rich state)보다는 ‘강한 국가’(strong state)를 더 원한다. 푸틴의 지각습관도 이러한 국민정서에 대한 화답일 수 있다. 물론 협상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1998년 한·러 외교마찰 때 프리마코프 외무장관은 회담 시작 전 박정수 외교장관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면서 기선을 제압하던 외교비화가 있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향수
 
푸틴 대통령의 롤모델인 표트르 대제.
  푸틴의 롤모델은 제정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다. 자신이 표트르의 혼을 간직한 페테르부르크 출신임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여러 면에서 두 지도자는 닮았다. 다만 표트르 대제는 203cm 장신이고 푸틴 대통령은 165cm 단신이다. 푸틴은 표트르식 ‘부국강병’을 지향한다. 구 소련권을 다시 결속시키는 데 진력하고 있다.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출범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유럽과의 갈등을 뒤로하고 외교 나침판을 이젠 동방으로 돌린다.
 
  물론 세계경제의 트렌드가 유럽·아메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옮아가고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표트르 대제가 최서단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유럽으로 향한 창’으로 삼았듯이, 푸틴은 최동단 블라디보스토크를 ‘아시아로 향한 창’으로 전진기지화한다. 푸틴의 신(新)동방정책은 2012년 집권 3기부터 본격화됐다. 그해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전담 부처인 극동개발부를 신설했다. 2014년부터 매년 9월초 동방경제포럼을 개최하며, 선도개발구역·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법·극동1헥타르법 등 통큰 개발정책으로 국내외 투자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푸틴의 세력 확장은 극동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소리 없이 북방을 향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2007년 전 세계에서 최초로 북극해 대륙붕에 자국의 깃발을 꽂았다. 당연히 인접국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10년 후인 지난 3월말에 푸틴은 전격적으로 북극을 방문했다. 이는 자원이 풍부한 북극해의 장악력을 키우기 위한 행보였다. 러시아 정부는 북극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재확인하는 프로젝트를 정부의 최상위 추진과제로 설정했고, 유엔에도 영유권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대(對) 남북한 정책 그리고 속내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환영 평양시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일성. 뒤편의 소련군 장성들이 김일성 정권이 소련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소련은 2차대전 말 미국의 끈질긴 권유로 대 일본 전쟁에 참전했다. 예상과는 달리, 일본 관동군이 쉽게 무너지면서 파죽지세로 내려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했다. 미국은 당황한 나머지 38선 분할을 서둘러 제안했고 소련이 이를 수용했다. 북한정권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일체가 소련에 의해 건설됐다. 김정은의 조부 김일성은 스탈린의 철저한 비호하에 양육된 정치·군사적 양자였다. 부친 김정일은 시베리아 땅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맹조약이 없어도 스탈린은 6·25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했다.
 
  시대적 상황과 지도자의 성향에 따라 비록 부침은 있었지만 러·북간 공생관계는 적어도 1990년 한·소수교 직전까지 지속되어 왔다. 북·중관계가 형제관계라면, 북·러관계는 부자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소수교 및 소련해체 과정에서 러·북간 공식관계는 최소한의 명맥만 유지했다. 소북동맹조약도 만료시점에서 한국정부의 압력과 설득으로 재연장되지 않았다. 수교 직후 러시아의 대 남북 관계에서 남한이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러시아 조야에서는 남한 편향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특히 1994년 북핵 1차위기 해결을 위한 4자회담에서 러시아가 배제됨으로써 적잖은 자존심의 상처를 경험했다. 공교롭게도 러·북관계가 악화된 배경에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몫했다. 고르바초프는 1980년 소련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시절에 제6차 조선노동당대회에 대표단장으로 방북할 계획이었으나 북측으로부터 격이 낮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옐친의 경우도 1984년 스베르들로프스크 주지사 시절에 모스크바 방문길에 하룻밤을 머문 김일성을 환대하기 위해 바냐(전통사우나) 일정을 준비했으나 거절당했다. 정치학자 라스웰이 말한 ‘사적동기의 공적 전위’라고나 할까.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러시아의 대북관계 복원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푸틴은 취임 직후인 2000년 6월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개념’ 발표에서 대 한반도 정책방향을 간결하게 제시했다. 즉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러시아의 동등한 참여 보장과 남북한과의 등거리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전격적으로 방문했다. 김정일은 답방 일환으로 2001년과 2002년 연속 2년간 러시아를 방문했고, 2001년에는 거의 한 달간 특별열차로 러시아 전역을 누볐다. 푸틴의 실용적 신(新) 등거리 노선은 남한 공략의 한계성과 북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명료한 인식에 기초하고 국익 스펙트럼 확대의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출발했다. 러·북 신 우호조약을 토대로 북한과는 정치·안보적 유대를 더욱 강화했다. 한국과도 다차원적 경제협력을 증진시켜 경제적 실익을 확보해 나갔다. 이러한 러시아의 대 남북한정책 기조는 현재까지도 변함 없이 지속되고 있다.
 
 
  러시아의 북핵문제에 대한 입장
 
  러시아는 북핵 공여국이면서도 피해 대상국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북한정권 초기부터 핵개발을 위한 이론·기술·인원·시설·재료 일체를 지원했다. 1946년 김일성대학 설립 시 핵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물리수학부가 동반 개설됐다. 1980년대에 오직 영변에만 핵관련 시설을 100개 이상 건설했고, 소련해체 직전인 1990년까지 두브나핵연구소를 거쳐 간 북한 전문가들은 무려 250명이었다. 물론 전제조건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었다.
 
  러시아 해외정보부(SVR)는 1993년 북한이 일정기간 경과 후 핵을 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 후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해 외과수술식 타격을 검토한 적이 있었으나 1994년 10월 미·북 간 제네바합의로 철회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 붕괴의 혼란기를 틈타 핵·미사일 전문가와 장비·기술을 불법적으로 반입해 갔다.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의도하지 않게 북핵 개발을 지원한 셈이다. 또한 러·북 간 국경선은 39.1km에 불과하지만 국경 너머 광활한 극동시베리아 땅과 풍부한 수산자원의 태평양 연안이 있다. 이 청정지역이 제2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는 2003년 1월 6자회담 출범 직전에 일괄타결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최근 중국이 제시한 쌍궤병행·쌍중단과 동일한 개념이다. 유감스럽게 6자회담 참여국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이 반대하고 중국과 한국은 침묵했다. 결국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러시아 측에는 2시간 전에, 중국 측에는 20분 전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지난 9월 3일 6차 핵실험 때도 북한은 2일 전에 러시아 측에 통보했으나 중국 측에는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미국이 2005년 동결시킨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김정일 비자금 2500만 달러를 13개월 만에 북한에 다시 되돌려 주기로 했다. 대북 반환문제를 놓고 중국조차도 미국의 눈치만 살폈다. 마침내 러시아가 나서서 2008년 3월 자국의 스베르방크를 통해 북한에 송금했다. 그 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연평도에 포격을 가할 때도 6자회담국 중에서 유일하게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러시아는 유엔의 대북제재에 동참하면서도 북한과의 관계는 지속 강화시켜 왔다. 2012년 러·북 간 최대의 걸림돌인 110억 달러 경협차관을 ‘90% 탕감·10% 경협기금’에 합의함으로써 협력의 물꼬를 텄다. 2001년에 합의한 북한의 철도 개·보수 사업은 2014년 ‘승리 프로젝트’로 본격화됐다. 아울러 러시아와 북한은 유엔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제3국을 통해 원유를 거래하고 심지어는 공해상에서도 비공식적인 교역을 지속해 왔다.
 
 
  푸틴의 ‘고약한 아우’
 
지난 2014년 2월 7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만난 푸틴. 푸틴과 김정은의 정책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사진=뉴시스
  푸틴과 김정은은 동병상련의 브로맨스 관계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때 국제사회의 제재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권력을 물려받았다. 집권 초기 풋내기 지도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은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모부 장성택을 화염방사기로 불태우고 권력을 틀어쥐는 그의 표독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연실색했다. 푸틴도 크림반도 병합 후 서방의 제재로 정치적·경제적 난관에 봉착했지만 전폭적인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은 푸틴의 부국강병책과 일맥상통한다.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를 개발하고 경제도 살린다는 전략이다. 400개 이상의 장마당을 통해 주민들의 돈맛을 자극한다. 주민들은 30%의 소득세를 국가에 바치고도 70%의 개인소득을 챙길 수 있다. 배급제에 익숙했던 주민들에게는 세금을 납부하고도 상당액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했을 것이다. 김정은도 국가는 마냥 시혜자의 입장인 줄만 알았는데 세금을 거둬들여 핵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급기야는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시키고, 미국 본토 도달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면서 스트롱맨 트럼프를 쩔쩔매게 한다.
 
  역사적으로 핵을 개발해 보유한 정권이 스스로 포기한 사례가 없다. “북한은 풀뿌리를 먹는 한이 있어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는 푸틴의 지적을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김정은은 조금만 더 버티면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이제 북핵문제는 개발을 중단시킬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러시아의 활용가치
 
  이제 북한의 핵도발을 저지하기 위해 포괄적인 전략과 전술이 요구된다. 남북한 간 ‘우리민족끼리’ 노닥거리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고도의 외교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주변국을 설득할 수 있는 가용자원을 총동원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고, 북핵 관리와 확산 방지에 협력해야 한다. 주체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첫째, 지금 우리는 한반도의 운전대를 잡고 명실상부한 중심축 국가(Pivot state)로 자리매김할 때다. 코리아패싱(한국왕따)의 위기는 오히려 코리아리딩(한국주도)의 기회로 전화위복될 수 있다. 한국은 경제규모 12위 중진국이다. 서세동점기의 소용돌이 속에 함몰됐던 구한말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을 순기능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은 전통 우방이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새 우방이다. 미·일의 해양세력과 중·러의 대륙세력간 갈등을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승화시키는 외교적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의 사드배치로 인한 중국과 러시아의 기회비용을 보전할 수 있는 협상카드가 마련돼야 한다.
 
  둘째, 한·러관계는 1990년 수교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견고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대북관계도 한반도 비핵화 선언 및 유엔 동시가입 등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다만, 북한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새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로 하여금 친북으로 회귀하는 우를 범했다. 이제 다시 친한(親韓)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호 신뢰회복이 급선무다. 더 나아가 당사국들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견인하는 협력 메커니즘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 북방정책의 요체다. 일본의 아베가 미국의 대 러시아 경제제재에 동참하면서도 외교력을 발휘해 러시아에 대규모로 투자한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셋째, 안보와 경제를 선순환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한·러 정상회담에서 경제협력을 통한 북핵 해결 등 군사적 긴장해소와 평화체제 정착에 방점을 두었다. 역내 국가들이 경제공동체를 형성하고 안보공동체로 발전시킨다는 개념이다. 아울러 푸틴이 제안한 남북한·러 3대 메가프로젝트 등 경제 현안들도 북핵 해결과 연계시켜 풀어 나가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의 경우를 감안해 볼 때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끝으로, 러시아 푸틴의 인적 환경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는 주요국의 스트롱맨들과 전례 없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퍼 스트롱맨 김정은과는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동병상련의 처지다. 그가 중재자로 나서 우선적으로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고 스트롱맨들을 협상테이블에 앉힐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조속히 출범시켜 일사불란한 신 북방정책의 업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 만약 이대로 방치하면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는 가속될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글 : 박종수 경제학박사, 전(前) 주러시아 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