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려한 휴가"의 주인공인 민우(김상경 분)는 부모없이 동생과 둘이 살면서 광주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택시운전사다. 광주사태가 시작되던 날 마을 사람들은 TV가 있는 집에 모여 ‘전설의 고향’을 보고 저마다 무섭다고 야단들이었다. 택시기사 민우, 그의 동생 진우, 민우의 친구인 또 다른 택시기사, 신부 등 10여명의 사람들이 야외에 나가 야유회를 즐겼다.
그런데 이런 설정은 픽션 소설에도 끼일 수 없는 허구이다. 도대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뭐가 그리도 겁나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고3학생 진우로 등장시키는가?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고3학생으로 등장시키면 이것은 더 이상 광주사태의 스토리가 아니다. 그 한 예가 진우의 실제인물 박관현의 절친한 친구였던 신계륜(훗날 노무현의 비서실장을 역임한 인물)의 광주사태 경험담이다. 5월 18일 신계륜이 광주에서 박관현(진우)을 찾았으나 광주에 없었다. 광주사태 기간 내내 박관현(진우)은 광주에 없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야유회를 즐기고 있으니 픽션의 가치조차 없는 허구이다.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예비모임으로서 5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총?생회장단 연석회의가 소집되었었는데, 광주에서는 따로 준비하느라 전남대 학생회장단은 참석치 않고 서울대 및 고려대 학생회장단이 전남대 박관현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해 봄 김대중 세력이 주요 대학교 학생회장 선거에 개입하였으며, 서울대에서도 고대에서도 광주출신이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음.) 그날 5월 16일 대학생 중 몇명이 김대중 내란 음모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건네주자 그 다음날 수배가 시작되었는데, 5월 17일 밤 서울대 학생회 사무실로부터 누군가가 전남대 학생회 사무실로 전화걸어 피하라고 했다. 서울대에서 박관현에게 이미 연락을 취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당시 고대 총학생회장 심계륜은 5월 18일 광주로 내려가 박관현을 찾느라 혈안이었다. 따라서, 만약 한홍구가 박관현에게 전화걸었던 장본인이었는지만 밝혀주면 광주사태 발단의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다.
518광주폭동의 기폭제는 5월 18일 광주를 뒤덮은 "박관현 사망설"이었다. 그 다음날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광주로 달려오게 한 유언비어도 "박관현 사망설"이었으며, 힌츠페터는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유언비어가 사실인 줄로 속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모 학생으로부터 피하라는 전갈을 받은 박관현이 5월 18일 아침 일찍 윤상원을 찾아가자 윤상원도 광주 외곽 산장에 가있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박관현이 출발한지 5시간 후 윤상원은 "박관현 사망설"을 퍼뜨렸으며, 그 유언비어에 선동된 시위대가 파출서들을 파괴하고 순경들을 인질로 납치하자 광주시 당국이 광주향토사단에 치안 유지 협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MBC PD 수첩의 거짓말도 들통이 날 때가 있다. 그렇다면,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퍼뜨렸던 "박관현 사망설"은, 즉 "광주경찰이 박관현을 죽였다"는 유언비어는 28년이 지나도록 들통이 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만약 28년이 지나도록 "박관현 사망설"의 진위를 확인해 보지 않았다면 그 당시 일으킨 폭동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과연 멀쩡히 살아있는 인물에 대하여 죽었다고 유언비어 퍼뜨렸던 주동자들의 거짓말이 민주화운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과연 그 유언비어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은채 선동되어 무기를 손에 들었던 시위대의 행동 또한 민주화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신계륜은 5·18 묘역에 가면 윤상원과 박관현의 묘역은 꼭 들른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박관현의 묘역이 거기 있는가? 윤상원(민우)은 박관현(진우) 사망설을 퍼뜨리고, 광주사태 당시 산장에서 생활하느라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박관현의 인생은 그 사기꾼들의 유언비어에 희생되었다. 518사기꾼들은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박관현의 이름을 팔았으며, 본래 가족이 없었다는 박관현은 그 유언비어에 희생되어 떳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지 3년째 되는 해 병을 얻어 병원에서 숨졌다.
멀쩡히 살아있던 인물의 이름을 판 사망설 유언비어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거니와, 그를 망월동 묘역에 안치한 것은 또 다시 그의 이름을 판 행위였다. 518측은 박관현에게 허락받고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었는가? 그리고, 그때는 광주경찰이 박관현을 죽였다고 했다가 지금은 외국인들에게 뭐라고 거짓말을 하는가? 국군이 박관현을 죽였다고 사기치는가? 전두환이 박관현을 죽였다고 사기치는가? 광주사태 당시 박관현이 광주에 없었으며, 시민군도 아니었다는 사실의 증인인 신계륜은 도대체 뭐하고 있는가? 그리고,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박관현을 진우라는 시민군으로 등장시키는 것 또한 역사적 실존인물의 이름을 가명으로 파는 행위이다.
1980년 5월 18일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는 1979년 10월 부마사태와 1987년 6.10 항쟁의 중간선상에 있는 사건이었다. 1979년 10월 부마사태 때는 윤상원이 YH여공들을 부추기자 정말로 여공 한 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그 자살 사건이 부마사태 태풍을 일으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10.26사태로 이어졌다. 1987년에도 경찰에 책임을 물을 만한 이한열군 사망사건이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라는 태풍을 몰고온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는 작금의 광우병 괴담 못지 않게 어이없는 유언비어였을 뿐이다. 더구나 만약 당시 80만 광주시민 인구 중 그 누구도 그 유언비어의 진위를 알아보자고 하지 않았다면 별로 명예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
5월 17일 서울대 학생회 사무실로부터 전남대 학생회 사무실 박관현에게 걸려온 전화의 내용은 "주동자 명단이 치안본부로 넘어갔으니 빨리 피하라"였다. 박관현이란 인물은 분명 어질고 순박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단지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영화에서 택시기사 민우)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그는 전혀 죄를 지을 의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가 도대체 뭐였기에 서울대 학생회 사무실로부터 빨리 피하라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그 말대로 그는 피했으며, 1987년의 이한열처럼 경찰에 연행되지 않았다.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는 김대중이 5월 22일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 하야시키고 임명할 예비내각 명단까지 갖고 있었던 엄청난 음모였으며, 일단 발각되자 서울대 운동권처럼 고려대 신계륜도 줄행랑쳤다. 신계륜이 제일 먼저 광주의 박관현을 찾은 것으로보아 박관현에게 은신처 도움을 요청하려 했던 듯하나 박관현은 신계륜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광주를 떠나 멀리 가 있었다. 이처럼 학생 운동권은 음모가 발각되자마자 일시에 해체되었으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를 광주 노동계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윤상원은 피하지 않고 예정대로 밀고 나갔다.
윤상원이 그날 5월 18일 오후 한시경 금남로에 약 300명의 시위대를 불러모았으나 도무지 시위 열기가 일지 않았다. 학생들은 박관현 학생회장도 없는데 모인 목적을 모르겠다며 해산하려 하였을 때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을 죽였다"고 외쳤다. 그 소리에 인근 행인들이 자극되어 금방 시위대 수가 3천명으로 불어나 파출서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으며, "박관현 사망설"이 퍼져나갈수록 시위대 수는 크게 불어났다. 첫날에는 화염병과 돌만 던지던 시위대가 다음날부터 무장하기 시작하여 시민군이 편성되었는데, 광주사태 내내 시민군은 "박관현 사망설"을 사실로 여기고 있었으며, 시민을 선동 자극하는 또 다른 악성 유언비어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지금 두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광우병 괴담 폭동과 비교하면 광주사태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는지 아래 사진을 보라. 5월 18일 시위대의 시위장비는 주로 화염병과 돌이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아래 사진처럼 중무장하고 도청을 향해 돌격하는 시민군이 등장했던 것이다.

인터넷 영상 매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광우병 괴담 폭동은 좌익과 우익 양편에서 사진 찍고 동영샹 올리면서 과격시위냐 강경진압이냐를 따진다. 그러나, 광주사태 때는 시민군 편에서만 사진을 찍었으며, 시민군쪽에 불리한 사진은 압수하였기에 군인이 애매한 누명을 써왔다. 그러나 한 사진 작가가 포착한 아래 장면을 보라.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동심은 군인 아저씨를 향하여 아장아장 걸으며, 아직 의경이 없던 시대에 의경 대신 치안유지를 위해 동원된 군인도 아기를 마주 바라보며 근무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비록 광주사태 때처럼 이틀 만에 무장시민군이 등장한 것도 아니요, 지금은 시위진압을 전담하는 의경이 있는 시대이나, 그럼에도 작금의 광우병 괴담 폭동의 본질은 제2의 광주사태이다. 광주사태에 대한 진실이 이제라도 밝혀지기를 기대하는 국민의 염원을 무시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518행사에 참석하던날 무슨 일이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었던가. 아래 문건을 보라. 그날 광주에서 이 대통령 연설을 듣던 청중 중 다수는 5.18 28주년을 계기로 광우병 괴담 폭동을 일으켜 이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몰아낼 결의를 하던 청중이었다. 아래 문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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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일정
* 5월 18일에 결성한다.
⑶ 대중투쟁과 사업
반이명박 촛불문화제를 통해 대중들의 투쟁에 서서히 불을 붙이다 5.18을 계기로 전체 진보진영이 집중하는 광주에서 반미반이명박 투쟁의 포문을 열고 이를 통해 대중투쟁을 분출시켜 5.31에는 전체 대학생들이 서울에 결집하는 계기를 살려 범국민 촛불문화제를 개최, 서울을 비롯 각지에서 반이명박 투쟁을 폭발시켜 이명박 정부를 쓸어버리고 이 흐름으로 6.15에 민족통일대축전을 성사시킨다.
② 주요 투쟁
ㄱ. 5.18 광주항쟁 28주년
- ‘반미 반이명박 / 남북공동선언 이행 결의대회(가칭)’ (5월 17일)
* 6.15 실천단의 첫 전체 집중 투쟁으로 반미, 반이명박의 내용과 함께 6.15, 10.4 선언 이행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3자 조직이 결의대회를 진행하여 투쟁 방향을 제시한다.
* 타 단체 일정 등과 협의를 통하여 구체적인 일정을 조정할 수 있음.
- ‘반미반이명박 운동본부 결성식’ (5월 18일)
* 6.15 실천단의 정식 지도부를 구축하며 실천단 1차 조직화 목표인 300명을 총화하는 자리
- ‘5.18 전야제’, ‘5.18 기념식’
2시기 : 분출기 (5월 1일~5월 18일)
전 기층 단위에서 촉진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간담회, 강연회를 계속하며 6.15 실천단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고 조직된 6.15 실천단부터 투쟁을 일궈가며 5.18을 계기로 대중투쟁을 분출시키는 시기.
- 6.15 실천단 300명 조직
- 유인물 20,000부 배포
- 서명운동 2,000명
5월 1일 ‘노동절 노동자대회’
5월 17일 ‘반미 반이명박 / 남북공동선언 이행 결의대회(가칭)’
5월 18일 ‘반미반이명박 운동본부 결성식’ 및 광주항쟁 28주년 투쟁 (
http://cafe.daum.net/issue21/3Fdk/2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