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와 5'18

5공 창출 기획자 허화평 신문조서, "광주사태는 엄연히 폭동"

서석천 2018. 12. 22. 20:19
5공 창출 기획자 허화평 신문조서(上), "광주사태는 엄연히 폭동"

  

"전두환이 대통령 된 것은 민중혁명 추구한 정치인·재야세력 덕분"
"일부에서 전두환 장군이 머리가 나쁘니까 참모들이 계획을 세웠을 것 아니냐라고 추측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 장군이 머리가 나쁜 사람도 아닐 뿐만 아니라, 누차 말하지만 집권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3김 씨가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면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앞으로는 정치발전과 더불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5공 창출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던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의 1차 피의자 신문조서다. 권정달씨의 검찰 진술에 의하면 허화평, 그리고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등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로서 이들이 '전두환 집권의 삼두마차'이며 그중에서도 허화평 비서실장이 삼두마차의 리더였다는 것이다. 허화평씨는 검찰에서 "당시의 모든 정치적 조치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실행된 것인 만큼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김대중씨를 대표로 한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와 군부는 유신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몰아내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수립하자고 학생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사회혼란이 야기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전두환 장군을 도와 군부정권을 창출했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관련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1979년 12.12 사태부터 1980년 봄까지 5공 창출의 기획자 역할을 했던 허화평 씨. 그는 검찰에서 "전두환이 대통령 된 것은 민중혁명 추구했던 정치인과 재야세력 덕분"이라고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허화평

 

허화평 피의자 신문조서(1차) 1995년 3월29일 서울지방검찰청

 

-피의자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재직한 기간과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으로 재직한 기간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1979년 3월부터 1980년 8월31일까지이고,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은 1980년 9월1일부터 1981년 12월23일까지입니다."

-육본 특명검열단에서 일하다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비서실장으로 옮겨간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의 임무가 무엇인가요.

"보안사령관에 대한 행정적 보좌․의전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비서실 직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나요.

"비서실장, 수석부관, 수행부관 등 장교 3명과 10명 미만의 사병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보안사령관이나 참모장이 주재하는 참모회의에 비서실장도 참석하는가요.

"참모회의에 참석합니다."

-비서실장 이외의 참석 멤버가 누구인가요.

"처장들이 모두 참석합니다."

-10․26 사건 뒤 보안사 멤버를 주축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됐는데 피의자는 합수부에서 무엇을 맡았나요.

"전두환 본부장의 비서실장을 맡았습니다."

-10․26 사건 후 정보처를 복원, 보안사 기구를 대폭 확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상황전개에 따라 인적 구성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정보기관입니다. 당시 10․26이라는 중요한 정치상황이 생겨 정보처 역할이 중요해지니까 기구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부마사태 후 1979년 10월27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피의자가 기안한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정부장의 제거 등을 건의하는 내용의 시국수습 대책안을 건의할 예정으로 있었는데 박 대통령 사망으로 무산됐다는데 사실인가요.

"보안사령관은 수시로 대통령을 만나 각종 보고를 할 수 있는 입장이니까 전 장군이 그런 보고를 계획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본인이 그런 안을 기안한 일은 없습니다."

-10․26 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사 내에 보도처가 생기고, 그 아래 보도검열단이 구성되어 신문, 방송 등 모든 언론매체에 대한 보도검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보안사 내에서 공작의 일인자인 이상재 준위를 팀장으로 한 언론대책반을 따로 구성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언론이 중요하다고 판단되니까 그런 팀을 구성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계엄사령관 업무 보좌는 정당

-보도검열단과 이상재를 팀장으로 한 언론대책반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요.

"정보처장이 주관한 일이므로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언론관련 임무에 관한 공식적인 지휘계통은 이희성 계엄사령관→박영록 보도처장→이병찬 보도검열단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안사에서 'K­공작계획'과 '5․17 계엄지역 확대조치 및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 지침'이란 문건을 작성한 다음, 보안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보도검열단에 지침으로 통보했습니다. 보안사령관이 결재해 보도검열단에 통보한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비상계엄 하에서 보안사령관 내지 합수본부장이 계엄사령관의 정보참모로서 업무보좌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보안사령관이 결재를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침범한 월권행위가 아닌가요.

"계엄 하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을 보좌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월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3월24일부터 이상재 언론대책반장이 주축이 되어 이른바 'K­공작계획'을 시행했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요.

"본인의 소관업무가 아니므로 시행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K­공작계획'의 목적인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지속적인 국력신장을 위한 안정세력을 구축함에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군부의 집권, 구체적으로는 12․12 이후 군의 실질적인 최고 실력자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을 염두에 두고 언론공작을 통해 이미지를 구축하고 세력을 결집하여 집권기반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요.

"단순한 계엄사령관 업무보좌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향후 계엄이 선포되는 사태가 또 생길 경우에도 같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계획서 말미의 참고사항을 보면 공작업무 수행과정에서 수정 및 보완을 요할 시엔 사전에 사령관의 재가를 얻은 후 실시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결국 전두환 사령관이 'K­공작계획'에서부터 실행까지 깊숙이 관여했다는 말이 아닌가요.

"보안유지를 생명으로 하는 정보기관의 속성상 해당 참모가 사령관에게만 보고하고 지시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문구가 포함된 것이지 'K­공작계획'을 사령관이 일일이 주도, 간섭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K­공작계획'의 실시 주체나 시기, 구체적인 시행과정 등을 보면 'K­공작계획'이 군부, 즉 전두환 장군의 집권 구상 내지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되는데 어떤가요.

"권력공백 상태에서 혼란이 가중될 염려가 있으니까 영향력이 큰 언론의 협조를 구한다는 차원에서 행해진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중정부장 겸직은 최 대통령 승인사항

-1980년 4월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정부장 서리 겸직과 관련해 보안사에서 1980년 3월 초부터 전 장군 중정부장 겸직을 추진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사전에 어떻게 추진됐는지는 모르지만 본인은 겸직 발표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전두환 장군에게 중정부장 겸직을 건의한 사람이 피의자와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이었다고 하는데요.

"참모들이 건의할 사항이 아닙니다."

-당시 보안사 핵심참모들인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최예섭 기획처장 등이 최 대통령으로부터 전 장군의 중정부장 임명을 언질받기도 전에 이미지 홍보를 비롯해 중정 개편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사전준비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김재규 내란사건으로 중정이 무력화되고 역적집단이 되니까 김재규 추종세력을 제거하고 중정을 본 궤도에 올리기 위한 차원에서 개편작업 등이 추진된 것이지 전 장군의 정권장악 차원에서 이미지 홍보를 하거나 개편작업을 추진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는 3월 중순경 최 대통령에게 민간인 출신을 중정부장에 임명, 정보계통을 양립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전 장군이 3월 말경 중정부장을 겸직하겠다고 말해 반대라고 분명히 말했답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반대했는데도 전 장군이 밀어붙여 중정부장 자리를 차지했다는데요.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장군이 최 대통령으로부터 중정부장 임명을 관철해 낸 구체적인 경위가 어떠했나요.

"전 장군이 중정부장 겸직을 앞두고 누구와 상의했는지, 또 그 분들이 어떤 견해를 표명했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최 대통령이 승인했으니까 겸직이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최 대통령이 당시 전두환 장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슨 사정이 있었거나, 아니면 벌써 국정 운영의 주도권이 신군부로 넘어가 최 대통령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1979년 12월12일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에 따른 재가 과정에서 보듯이 최 대통령은 고집이 엄청 센 사람입니다. 그 분이 일개 소장의 압력을 받아 본인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국무총리나 계엄사령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겸직을 금하고 있는 법정신에 위배하면서까지 중정부장을 겸직한 실질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당시 중정은 주인도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이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군부에 적대적인 언론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국내외 정보를 장악하기 위해 추진한 것은 아닌가요.

"정권장악을 염두에 두고 중정부장을 겸직했다면 전 장군의 세력을 심어야 하는데 중정에 전 장군 인맥이 단 한 명도 옮겨간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중정까지 겸직함으로써 골치 아픈 일만 더 늘어났을 뿐 정권장악에 도움이 될 일은 없었습니다."

-권정달 정보처장의 진술에 의하면 돈 문제도 한 이유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중정 예산도 공금인데, 그 돈을 함부로 사용하기 위해 겸직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전두환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하면서 중정 예산 1백20억원을 가져갔다는데 그 돈은 어디에 사용했나요.

"금시초문입니다."

-당시 보도검열 하에 있던 국내언론은 사실보도밖에 하지 않았으나 일본신문은 '전 장군의 중정부장 겸직은 한국정부 내 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며,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완전히 군부 내의 실권을 잡았음을 확인한 것이다'라고 보도하고, 뉴욕타임스는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령관과 정치 정보기관인 중정부장을 겸직, 2개 정보기관을 동시에 관장하게 됨으로써 최고 실력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지위가 강화됐다'고 논평하는 등 깊은 관심을 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피의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본인이 5년간 미국에 살면서 보니까 뉴욕타임스는 진보성향을 가진 신문으로 군부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며 김대중씨를 비롯한 민주화 세력을 백업(back up)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는 신문입니다. 일본 언론은 기본 논조가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복잡하게 부추기는 입장에 있으므로 그들 주장을 사실화, 객관화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전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함으로써 공직 서열상으로도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어 정부 내 공식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고, 국방장관보다 상위에 올라 군부 내에서 명실상부한 최고 실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 사실이지요.

"전 장군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정부장을 겸직하지 않더라도 이미 정보가 장악되어 있던 상태이므로 중정부장을 겸직함으로써 국내외 정보를 장악했다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어 국방장관보다 상위에 올라선다고 하는 것은 공직서열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정부장을 겸직한 지 보름 만에 가진 1980년 4월29일 기자회견에서, 전 장군은 '본인이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정치발전에 차질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 억측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런 기우와는 반대로 안팎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긍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정치발전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때 이미 전두환 장군 집권계획이 입안되어 추진되고 있던 시기가 아닌가요.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전 장군의 중정부장 겸직이 추진됐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시국수습방안 작성에 관여하지 않아

-전 장군이 중동순방 중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한 최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안을 보고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사후에 그런 보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80년 5월16일과 5월17일 전 장군이 청와대를 방문한 것을 사실이지요.

"(전 장군은) 12․12 이후 중정부장 겸직 때까지는 보안사령관실에 주로 있었으나 중정부장 겸직 이후엔 보안사령관실에 거의 나오지 않고 대외활동을 했기 때문에 5월 중순 청와대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본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 장군이 시국문제로 최 대통령이나 신현확 총리,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을 자주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전 장군이 최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 확대 등에 관해 보고를 마치고 와서 무슨 지시를 한 일이 없었는가요.

"본인은 보고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고 후 어떤 지시를 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권정달 정보처장의 진술에 따르면 전 장군이 보고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 등은 보안사 정보처 산하 정세분석반이 계획․입안하여 참모들간에 협의를 거쳐 확정됐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문제를 협의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정보처장이 사령관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보고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권 처장이 협의를 거쳤다는 것은 그런 문제를 꺼내 놓고 참모들 간에 논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참모회의에서 일의 진행 경과를 제목 정도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1980년 5월17일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부장관 주재로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실세들의 요청에 따라 위 세 가지 안을 군부 결의로 확정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당시 여러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심각한 시국상황에 대해 중지를 모으자는 뜻에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소집이 추진된 것이지 전 장군 혼자서만 위기라고 생각하고 위와 같은 대책을 검토하거나, 이를 관철시킬 목적으로 회의 소집을 요청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권정달 정보처장이 주영복 장관을 찾아가 세 가지 안을 논의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시 전 장군이 거의 매일 주 장관이나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만나다시피 했으니까 1980년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소집 문제에 관해 사전 논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또 보안사가 혼란수습을 위한 대책으로 어떤 안을 마련했으니까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리는 기회에 그런 안까지 함께 논의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보안사령관 본연의 업무범위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권 처장이 국방부장관에게 그런 논의를 해달라고 한 것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군 병력이 부주의로 국회의원 등원 저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1980년 5월20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5월12일경 계엄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이 합의되어 5월20일 임시국회가 개회될 예정이니까 5월17일로 앞당긴 것이 아닌가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일정은 국방부장관이 결정할 문제이므로 보안사에서 관여할 성질이 아닙니다. 방금 한 말은 이 자리에서 처음 듣습니다."

-계엄확대와 동시에 투입된 군병력이 국회를 점거․봉쇄하여 국회의원의 국회등원을 저지하여 제104회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3김 씨 등을 이런 저런 이유로 제거한 것을 보면 5․17 조치의 핵심은 결국 국회 해산 내지 정치활동 금지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동시에 국회에 배치된 군병력이 부주의로 국회의원 등원을 저지한 것이지 사전계획 하에 국회 개회를 무산시킨 것이 아닙니다. 또 국가적 위기의 배후에 정치인들이 연루되어 있다는 판단에서 김대중씨 등 주요 정치인들을 연행한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5․17 조치가 정치활동 금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장군의 지시를 받아 피의자가 신군부 실세인 노태우, 정호용 장군 등에게 미리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될 세 가지 의제를 통보해 주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아무에게도 통보해 준 일이 없습니다. 노태우, 정호용 장군 등은 전 장군과 직거래를 하는 사람들이므로 본인이 그 분들에게 통보해 줄 이유가 없습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논의 과정을 거쳐 군부의 집약된 의견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계엄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본인은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2․12 이후에는 참모들이 정위치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므로 소관 분야별로 참모들이 사령관에게 보고해 일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계엄확대와 동시에 발포된 포고령 10호에 의해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가요.

"주무자인 이학봉 대공처장의 답변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3김 씨를 체포․구속․연금해 정치활동을 봉쇄하고, 국회를 계엄군이 점령해 국회의원 등원을 저지, 임시국회가 열리지 못하게 마비시킨 것도 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인가요.

"상식선에서 판단하면 계엄확대와 동시에 군이 주요 시설에 배치되어 경계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때 국회에 배치된 병력들이 국회의원을 다른 주요시설에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과 똑같이 취급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해서 국회가 열리지 못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추진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권장악 의도 없었다

-임시국회 소집 무산, 주요 정치인 체포․연행․연금 이외에 별도의 국회 해산 계획이 있었나요.

"주요시설 병력배치 문제는 보안처 소관이고, 임시국회 소집 무산이나 국회 해산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는 정보처 소관이며, 정치인 체포․연행 문제는 대공처 소관입니다. 비서실장인 본인이 관여한 일이 아니므로 그런 내용에 관해서는 답변할 입장이 못됩니다."

-계엄군의 전국 배치, 정치인 등의 체포 등 많은 사전준비가 필요한 조치들을 계획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을 터인데, 실제 그런 계획을 입안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소관분야별로 참모들이 추진한 일이므로 본인은 알 수 있는 입장이 못됐습니다."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연행하는 문제가 참모회의에서 논의를 거치지 않고 어떻게 추진될 수가 있는가요.

"거듭 말하자면 그런 문제는 보안유지가 꼭 필요한 상황이므로 참모와 사령관이 알고 추진하면 될 일이지 여러 사람이 모이는 참모회의에 부쳐 논의할 성질이 못됩니다."

-전 장군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미 중정부장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권정달 정보처장의 통보를 받은 주영복 장관이 회의 시작 전 장관실에 들른 유병현 합참의장에게 그런 의제들을 꺼냈다가 합참의장이 국회 해산과 비상기구 설치 문제를 군 지휘관들이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반대하자 신군부 측에 각본대로 회의가 진행될 수 없음을 알려주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만 논의했다고 하는데요. 피의자가 전두환 장군을 대신해 주영복 장관으로부터 그런 사정을 통보받지 않았나요.

"그런 통보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일부 지휘관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듣습니다."

-당초 계획대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 문제가 결의됐다면 그런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집행, 추진할 생각이었는가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의가 어떤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므로 별도의 대통령 재가나 국무회의 심의 등을 거쳐 추진할 생각이었겠지요."

-군부가 전면에 나서서 국회 해산과 비상기구를 설치하겠다는 것은 결국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전 장군이 헌정을 중단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뜻이 아닌가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그런 계획을 추진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위기관리 차원이지 군부가 정권을 장악할 의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시작될 즈음 전 장군이 청와대로 최 대통령을 찾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를 보고했으나 최 대통령이 전 장군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최 대통령이 반대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최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되지도 않고, 최 대통령이 재가하거나 결단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이미 소집공고된 임시국회 무산조치를 강행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본인이 알기로는 모두 최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받아 집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5․17 이후 추진된 조치 가운데 최 대통령에게 보고가 안 되거나 승인 없이 이루어진 일은 단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영복 장관으로부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과를 언제 통보받았는가요.

"권정달 정보처장이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주영복 장관에게 보안사에서 마련한 안까지 통보했다면 권 처장이 결과도 보고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계엄법에 의하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변경할 경우 국무회의 심의와 대통령 재가만 받으면 가능한데 굳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과정을 거친 이유가 무엇인가요.

"상황이 어려우니까 여러 사람들의 총의를 수렴한다는 차원에서 군 수뇌부가 회의소집을 결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영복 장관이 회의 후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전군 지휘관들이 모여 내린 결론임을 특별히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국무회의에서 제안 설명을 하면서도 군부 의견이라는 점을 강조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데 군부 결의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요.

"비상계엄 전국확대는 중요한 문제이니까 주재자인 국방부장관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군 지휘관을 불러모아 의견을 수렴해 본 것이지, 누구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17일 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심의하기 위한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그 국무회의 소집은 언제 결정된 것인가요.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바로 그 날 대통령의 지시로 소집된 것이겠지요."

-그 때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의 진술에 의하면 중앙청 현관에서 회의장까지 양쪽에 약 1m 간격으로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고 하는데요. 중앙청과 국무회의장 주변의 군병력 배치는 어떤 과정을 거쳐 행해졌는가요.

"어떤 과정을 거쳐 국무회의장 주변에 군 병력이 배치됐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까지 보안사령관과 결부시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 전국확대안에 찬성하지 않으면서 군부의 힘이 무서워 부득이 확대안에 찬성한 것이 아닌가요.

"당시 국정에 참여하고 있는 국무위원들 다수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찬성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최 대통령이 계엄확대를 승인하지 않거나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안이 의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가요.

"대통령이나 전 국무위원들이 반대했다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수 없었겠지요."

 

정치인들의 판단 잘못

-신군부 의도대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더라도 1980년 5월20일 임시국회가 예정대로 열려 계엄해제를 의결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지게 되므로 그에 대한 대책으로 미리 군병력을 국회에 투입, 5월20일 열리기로 되어 있던 임시국회 소집을 무산시킨 것이 아닌가요.

"국회 봉쇄는 상부 의사와는 관계없이 현지 지휘관들이 국회의원들을 일반 공무원과 같이 취급한 데서 나온 우발적인 일로 생각합니다. 계엄이라는 것이 상시적으로 있는 일이 아니니까 현지 지휘관들이 업무범위를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자주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그 당시 피의자 입장에서는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나요.

"예. 본인도 비상계엄을 확대하지 않고서는 혼란수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내 상황이 혼란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판단했나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그리고 남북관계 등에 있어 최악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정치권이나 학생, 근로자들 동향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었는가요.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 대공처장이 충분히 말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당시 학생․정치권이나 재야 일부에서 최 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을 따르지 않고 성급한 요구를 하면서 최규하 정권을 접수하겠다고 덤비고, 일부 국민들이 이에 부화뇌동하니까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초래된 것이지요. 근로자들도 국가나 사용자가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제시해 혼란을 부채질하고, 급기야 사북에서와 같은 공권력 마비사태까지 초래하여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지요."

-1980년 5월 당시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주장 내용이 무엇이었나요.

"학기 초에는 어용교수 퇴진, 학교재단 비리척결, 병영집체 교육반대 등 학내문제를 주요 이슈로 삼았으나 5월부터 급속히 정치문제로 확산되어 계엄해제, 정부 주도하의 개헌반대, 이원집정부제 구상 반대, 유신 잔당 퇴진, 전두환 사퇴 등을 주장했습니다."

-학생들이나 정치권의 비상계엄 해제 주장이 부당한 것이었나요.

"늦어도 새로운 헌법에 따라 선거가 실시되기 전까지는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정치일정이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혼란이 점점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계엄을 해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당시 주요 정치인들이 판단을 잘못한 것이지요. 학생이나 재야세력이 최 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에 따르도록 설득했다면 계엄해제 시기가 빨라졌을 것이고, 또 전 장군이 집권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겠지요."

 

민중혁명에 걸림돌이니까…

-최 대통령이 당시의 헌법절차에 따라 정식으로 취임했고, 학생들도 겨울방학에 들어가 시국이 평온상태를 회복했으며, 그와 같은 판단에 따라 계엄업무 주력부대인 20사단이 서울에 출동했다가 1980년 2월5일 원주둔지인 양평으로 복귀했는데, 그 때 진작 비상계엄을 해제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10․26 이후 혼란 조짐이 계속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 김재규를 민주혁명 투사로 미화하는 마당에 그 사건 재판도 마무리되기 전에 비상계엄을 해제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지요."

-당시 학생들이 전 장군 퇴진을 주장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그 사람들이 의도한 민중혁명에 신현확 총리와 전두환 장군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그런 주장을 제기한 것이지요."

-학생들이 우려하던 상황이 나중에 현실화 된 것은 사실인데 그 때 학생들 주장대로 정권장악 의심을 받고 있는 전 장군이 의심받는 보직에서 물러나고, 비상계엄을 해제, 정치일정을 차질없이 진행하고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했다면 광주사태는 물론 전두환 정권의 출범과 관련된 소모적인 논쟁이 아예 근원부터 생기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는데요.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학생시위의 빌미를 제공해 놓고 혼란의 책임을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요.

"신현확 총리나 전두환 장군이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물러나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하는데, 재야 등 일부세력과 이에 연계된 학생들이 민중정부를 구성할 생각으로 혼란을 조성한 것입니다. 계엄당국으로서는 재야,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처하면서 수동적으로 이런저런 조치를 강구한 것이지 능동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추진한 조치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처럼 체포․구금이나 신문․방송에 대한 사전검열 등 특별조치를 취할 수 있는 군부의 권한을 계속 보유함으로써 정권찬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유지하고 급기야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그 사람들의 일방적인 주장이지요."

-고소․고발인들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뒤이어 정치인 연행․체포, 국회봉쇄, 국보위 설치, 보안사 주도로 이루어진 헌법개정, 신당 창당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 5․17 조치는 군부가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데요.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집권계획의 일환이 아니라 하루빨리 혼란을 수습함으로써 최규하 정권의 임무를 원활하게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정치권 등 일부 세력들이 최규하 대통령이나 전두환 장군 등을 박정희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람들로 판단하고 퇴진을 요구했지만 그 사람들 요구대로 물러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 군부나 국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김재규 사건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군과 사회를 안정시키며, 최 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에 따라 정부를 이양하는 것을 최대의 당면과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란수습을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는데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추진된 정치인 체포 등으로 혼란이 수습되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의 저항만 불러일으켜 광주사태와 같은 엄청난 혼란이 초래됐는데요.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혼란수습을 위해 조치한 것인데 지금 이 사건을 문제삼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 것이지요. 좌파적 운동권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 명수입니다."

-일부 국민들은 5․17 조치가 혼란수습을 위해 취해진 것이 아니라 군부가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협조하지 않은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5공화국 내내 그 정통성을 문제삼았던 것이 아닌가요.

"1980년 당시 혼란 조성에 앞장선 사람들은 대부분 유신 때부터 싸움을 일삼아오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 총리나 전 장군은 유신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람이므로 타도의 대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마당에 전 장군이 뜻하지 않게 대통령까지 되니까 계속 문제를 삼은 것이지요. 전 장군의 집권은 몇몇 사람이 계획을 세워 추진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획을 세워 놓고 그대로 따라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지요."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령됐는데, 정치활동 금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도한 것이었나요.

"일부 정치권에서 재야세력이나 학생들과 연계하여 혼란을 부채질하니까 그런 조치를 계획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군 지휘관들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회 해산 등을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여 그에 대해 아무런 결의를 하지 않았음에도 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것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결의내용과도 어긋납니다. 더구나 계엄확대를 재가한 최 대통령의 재가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정치활동 금지에 대해 최 대통령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 본인이 알 바 아니지만 당시 일부 정치인들이 유신 잔당이라면서 퇴진을 요구하는 등 최 대통령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도록 하니까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정치활동 금지와 같은 중요 조치가 최 대통령의 결심에 반해 추진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포고령에 의한 정치활동 금지조치는 당초 보안사 참모들이 입안․계획했다는 정치활동 규제와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인가요.

"금지냐 규제냐 하는 것은 용어 사용에 관한 문제이지 혼란수습을 위해 일정기간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동일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요.

"최 대통령이 제시한 정치일정에 차질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국회활동 금지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결국 3김 씨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정치판을 개고 이들을 무대 밖으로 몰아낸 다음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판을 짜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요.

"일부 정치인들이 민중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자신들의 시나리오에 다라 무리하게 밀고 나옴으로써 순조로운 정치일정 추진에 걸림돌이 되니까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사람들을 묶어 놓고 본인이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활동 금지에는 국회나 정당의 통상적인 활동도 포함된 것인가요.

"정치인들이 모임 등을 못한다는 것이지 국회의 통상적인 활동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와 같은 조치는 통치권자인 대통령도 통치권 차원이 아니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조치인데,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으로 강행한 것은 결국 군부가 정권장악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활동 금지를 주된 내용을 하는 포고령 10호에 대해 최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하고 승인받았는가요.

"짐작컨대 계엄사령관이 보고해 승인받았을 것입니다."

-1980년 5월17일 22시를 전후하여 김종필, 이후락 등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 등은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체포했는데 이런 조치들은 언제 어떤 경위로 계획하고 결정된 것인가요.

"조금 전에 말한 대로 김대중, 김종필씨 등을 체포․연행하는 문제는 극도의 보안사항이기 때문에 고위층과 참모 가운데는 이학봉 대공처장 정도가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고 다른 참모들은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김대중․김종필․김영삼 등 당시 대권경쟁을 하던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구속․연금하고, 계엄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이른바 집권계획의 일환인 구정치인의 제거 조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구체적인 이유야 책임맡은 참모들이 알고 있겠지만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이학봉 대공처장의 답변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 후 5공화국 헌법 부칙에 정치활동 규제 근거를 마련하고 상당수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위 구정치인 제거조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치활동규제법으로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후 구시대 정치인들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행태를 시정하기 위한 정화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구정치인 제거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임시국회는 자동 무산된 것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국회가 소집공고되어 5월20일 임시국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군병력이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여 국회가 개회되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최근에 그에 관한 시비가 제기되고 나서 알았습니다."

-누구 지시에 따라 군인들이 국회의원 등원을 저지한 것인가요.

"누가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국회에 들어간 병력이 어느 부대 병력인지, 어떤 경위로 저지했는지에 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입안, 추진한 보안사 입장에서는 계엄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보안사령관인 전 장군이 군인들을 동원, 국회를 봉쇄한 것이 아닌가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참모로서 이런 저런 건의를 할 수 있는 것인데 보안사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가 검토됐다고 하여 국회의원의 등원저지까지 전 장군이 주도했다고 하는 것은 음해입니다."

-계엄군이 국회를 점령하고 국회의원 국회등원을 저지하여 임시국회를 무산시킨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의사당 안에 국회의원들이 못들어 갔다는 점에 관해서는 동의하지만 군병력 때문에 임시국회가 무산됐다는 점에 관해서는 혼란이 생깁니다. 국회의원들이 계엄해제를 의결하고자 했다면 다른 곳에서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본인은 누가 임시국회를 무산시킨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무산된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포고령 10호를 발령하고 국회에 군병력을 투입해 국회를 봉쇄․점거한 것은 결국 신군부측에서 당초 계획했다는 정치활동 규제 조치 내용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요.

"본인이 관여한 일은 아니지만 정치활동 규제 조치에 국회봉쇄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짐작됩니다."

-당시 사실상 대권경쟁을 하고 있던 3김 씨의 체포․연행․연금조치에 대해 최 대통령에게 사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는가요.

"3김 씨를 체포․연행․연금하는 문제는 대통령의 결심없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김 씨의 체포․연행․연금 등의 조치는 정권장악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감히 추진할 수 없는 조치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정권을 잡을 계획 자체가 없었는데 정권장악을 염두에 두고 그런 조치를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계엄법에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이 행정, 사법사무를 관장하도록 되어 있으나 입법권은 국회 권한에 속하는데 포고령으로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물리력으로 저지, 다수 정치인을 체포․연행․연금하는 등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킨 것은 명백한 헌정중단 조치가 아닌가요.

"대통령이 통치권 차원에서 행한 일이므로 헌정중단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윤흥정이 초기진압 실패

-광주사태 기간 동안 보안사의 최예섭 기획처장과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이 광주 현지에 파견되어 상황종료시까지 광주에 있었다고 하는데, 최 처장과 홍성률 보안부대장의 광주에서의 역할이 무엇이었나요.

"본인은 그 사람들이 내려간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전두환 사령관에게 광주상황을 보고한 사람이 누구인가요.

"처음 며칠간은 권정달 정보처장이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했고, 그 후 사태가 악화되면서부터는 정도영 보안처장이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사태에 대한 대책을 입안․보고한 사람은 누구였는가요.

"광주사태 진압문제는 계엄사 본연의 임무이므로 보안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보안사에서 그런 대책을 입안할 만한 인력도 없었고요."

-광주사태에 대해 전 장군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보안사에서 특별한 조치를 취한 일은 없었습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광주사태 기간 동안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수회 만났다고 증언했는데요. 피의자의 기억으로는 정호용 장군이 광주사태 기간동안 몇 차례나 보안사령관실을 방문했나요.

"전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하면서부터는 보안사에 거의 있지 않았으므로 만났다면 밖에서 만났을 것입니다."

-1980년 5월21일 단행된 20사단의 증강 투입은 전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제안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부대 이동에 관한 문제는 보안사령관이 관여할 일이 아니며, 20사단은 예비부대이므로 당연히 출동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정호용 장군은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1980년 5월27일 도청 진압작전에 필요한 가발을 구하기 위해 보안사령관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는데 보안사에서 가발지원 업무도 취급하는가요.

"가발을 구입하기 위한 돈을 지원해 달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보안사에 가발지원업무를 취급하는 것은 아닙니다."

-광주사태 진압과 관련, 현지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최예섭 기획처장과 현지 보안부대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과 협의해 강경진압을 주도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소요진압은 계엄사령관의 기본적인 임무인데 공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 실질적으로 지휘를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현지 지휘관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책임문제가 줄곧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지휘여부를 떠나 정호용 장군이 광주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수시로 서울에 올라와 보안사령관과 계엄사령관을 만나 대책을 협의하고 현지 지휘관에게 그 결과를 전파했다면 정호용 장군이나 전 장군에게 광주사태 책임이 없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초기 진압에 실패한 윤흥정 장군의 책임이지 정호용 장군이나 전 장군이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태 후 조사를 나간 이광로 장군도 윤흥정 장군이 대처를 잘못했다면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尹장군 문책 건의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사태는 엄연히 폭동입니다"

-피의자는 광주사태 발생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정치적인 상황 등 여러 복잡한 사정이 개재되어 일어난 일이겠습니다만 결국 광주시민들이 한계를 넘어 무리하게 저항한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기 제압과정에서 군의 잘못이 일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공권력과 폭도의 대결이었지요. 광주사태는 엄연히 폭동입니다."

-공수특전부대의 과잉진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데모진압에는 당연히 그 정도 충돌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디 광주에만 공수특전부대가 투입됐나요. 부마사태 때도 공수특전부대가 광주에서와 꼭같은 방법으로 데모를 진압했으나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고소․고발인들은 신군부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국민들 속에 정국안정을 책임질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정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광주사태를 고의로 일으킨 것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그 사람들이 소요를 일으켜 놓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가 심각하게 확대되면서 전 장군이 상황을 잘못 벌인 게 아니냐는 생각으로 몹시 당황해 하자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 허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 이학봉 대공처장 등이 '호랑이 꼬리를 잡고 있다가 놓치면 도로 잡아 먹힌다'는 논리를 펴면서 위기 타개 방법으로 광주사태를 김대중과 연계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광주사태는 조직적인 선동과 정치적인 상황 등이 복잡하게 얼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나오는 바람에 공권력이 마비될 지경의 폭동으로 비화된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김대중씨가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김대중씨 연행 후에 일어난 광주사태를 시간을 거슬러 김 씨의 배후조종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정동년이 김상현 의원의 주선으로 두 차례 김대중씨를 만나 5백만원을 받아 소요자금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닌가요.

"정확한 내용은 모르고 있습니다만 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의자는 김대중씨가 광주사태를 배후조종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가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지 않습니까"

-노태우 보안사령관 시절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신병치료를 빙자하여 미국에 보내는 결정을 할 때 피의자도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경위가 어떠한가요.

"본인이 청와대에서 나와 미국으로 갈 무렵 김대중씨도 미국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이 모여 그런 논의를 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계속)

 



5공 창출 기획자 허화평 신문조서(下), "3김 씨 조금 참고 기다렸어야"

       

"1980년 당시 혼란을 조성한 사람들이 추구한 노선이 민중혁명 노선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최규하 정부나 군부는 유신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몰아내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지요. 그 대표가 바로 김대중입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도중 계엄군에게 연행되는 시민들. 5공 창출의 기획자 허화평 씨는 1980년 봄 당시 1980년 당시 혼란을 조성한 사람들이 추구한 노선이 민중혁명 노선이며, 그 대표가 김대중이라고 검찰에서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도중 계엄군에게 연행되는 시민들.

 

나는 국보위와 관련 없다

-1980년 5월21일 신현확 총리가 사퇴한 것은 신군부에서 신 총리가 국보위 설치를 반대하는 데 불만을 품고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할 듯한 태도를 보이자 신 총리가 그 정보를 사전입수, 지레 겁을 먹고 사퇴한 것이 아닌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1980년 5월27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안이 의결됐는데 신군부 내에서 비상권력기구 설치가 최초로 논의된 때가 언제인가요.

"권정달 정보처장의 소관업무이기 때문에 본인은 알지 못합니다."

-당초에는 4․19기념일이 되면 대규모 소요사태가 일어날 것이므로 그 상황을 타고 국보위를 설치하기로 예정했다가 예상 밖으로 4․19가 조용하게 지나가자 5․17 계엄확대와 동시에 설치하려 했으나, 최 대통령의 반대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단 보류하고 있다가, 광주사태가 생기는 바람에 그 진압을 기다려 5월말 설치를 추진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정보처에서 작업을 해 오픈이 된 다음 참모들도 알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본인이 답변할 입장이 못됩니다."

-국보위, 또는 명칭과 관계없이 비상권력기구 설치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는가요.

"정보처에서 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 계획은 전 장군의 보안사 핵심참모이던 피의자와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등 4명이 주도했고 실무작업은 권정달 정보처장이 정보처 요원과 법조계 인사들을 동원해 추진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설치에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국보위는 이른바 혁명평의회의 성격을 갖는 비상권력기구인데, 합법의 외관을 갖추기 위해 계엄법에 근거한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으로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하는 형식을 밟은 것이 아닌가요.

"본인은 구체적인 진행사항을 알지 못합니다. 만든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요."

-전 장군이 5월 중순에 최 대통령에게 보고한 국보위는 설치령에 규정된 대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 성격의 국보위이었나요. 아니면 혁명평의회 성격을 갖는 비상권력기구인 국보위이었나요.

"전 장군이 어떻게 보고했는지 본인은 알만한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만 자문․보좌기관으로 국보위를 설치했으니까 그런 정도로 보고를 했겠지요."

-국보위원 24명 가운데 국무위원 8명, 대통령 비서실장 1명, 대통령 정치담당특보 1명 등 10명은 평소에도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14명은 모두 현역군인들로서 국방분야 이외에는 특별히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데 누가 누구를 어떻게 자문․보좌한다는 말인가요.

"국보위 출범 이후에는 전 장군이 거의 매일 최 대통령을 만나 업무보고를 하고 지침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 점에서 최 대통령에게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무슨 기구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왜 그것이 시비의 대상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 대통령, 전두환과 사이 좋았다

-1980년 2월18일 각계 원료 23명으로 대통령 자문기관인 국정자문회의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자문․보좌기구로 국보위를 설치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것 아닌가요.

"국정자문회의가 구성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구성원들로서는 비상시국하에서 대통령을 자문하기 힘들다고 판단되니까 새로운 자문기구를 구성한 것이겠지요."

-1980년 5월17일 주영복 장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친 후 최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국보위 설치문제를 보고했을 때는 두 분 모두 반대했는데 그 후 어떻게 하여 설치가 승인됐는가요.

"그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보위 설치를 강행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요.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보좌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법적으로는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 형식을 빌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집권을 계획하고 있는 군부가 내각을 지휘하여 국정 장악하고, 장차 집권을 하게 될 군부의 실력자인 전 장군을 상임위원장으로서 내세워 최 대통령을 배제 내지 후선으로 제치고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국보위를 설치한 것이 아닌가요.

"의장이 대통령이고, 국보위 출범 이후 전 장군이 최 대통령을 수시로 만나 열심히 모신 점에 비추어 자문․보좌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 장군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아 최 대통령을 보좌하면서부터는 최 대통령이 상당히 짐을 덜었으니까요. 당시 최 대통령과 전두환 장군의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약 전두환 장군이 다른 데 뜻이 있었다면 두 분 간의 관계가 그렇게 좋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국보위는 사실상 최규하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조치였지요.

"내외에 과시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 당시에는 전 장군이 주어진 직분 내에서도 국정에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인데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같은 타이틀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이전에 이미 신군부에 의해 설치 계획이 입안된 점이나 국보위 설치와 동시에 신군부가 국보위를 통해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장악하는 등 본격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점, 국보위 이름으로 혁명상황이 아니면 추진하기 어려운 과감한 조치들을 추진한 점 등에 비추어 국보위가 5․16 직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혁명위원회 성격의 비상기구 또는 사실상 군정기관이라고 보는 것이 맞지요.

"본인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국보위가 출범했다고 하여 내각이나 계엄사의 기능이 없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 국보위의 이름으로 여러 조치들이 추진되고 집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시행된 것이고 국보위가 전횡한 것은 아닙니다. 최 대통령이 내각을 중시하느냐 국보위를 중시하느냐의 문제는 통치권자의 판단 문제이지요. 최 대통령으로서야 계엄사령관보다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자문받는 것이 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소설입니다"

-피의자가 국보위 분과위원 등의 선정작업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가요.

"일체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허문도의 검찰 수사기록을 보면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이 추천하여 문공분과위원으로 임명됐을 뿐만 아니라 피의자의 요청으로 허만일, 염길정을 추천한 일까지 있다고 진술했는데 어떤가요.

"허문도는 구미 출신의 박재홍 의원 추천으로 전 장군을 처음 만난 사람인데 전 장군의 호감을 사 중정부장 비서실장을 맡았고, 그 인연으로 문공분과위원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분과위원 인선작업은 정보처에서 주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삼수 인사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 등은 국보위 분과위원에 임명됐는데 피의자는 왜 아무 자리도 맡지 않았는가요.

"본인은 사령관실을 지키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0년 6월13일 국보위가 확정 발표한 안보태세 강화, 경제난국 타개, 정치발전과 내실도모,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 확립 등 4대 기본목표와 권력형 비리 등 공직자 축재․부조리 척결과 불신풍조 불식 등 각종 사회악 근절 등 9개 추진 지침의 입안경위는 어떠한가요.

"정보처에서 주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 허문도 중정 비서실장 등 3명이 9개 추진지침을 입안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소설입니다."

-피의자가 국보위 활동과 관련해 안건을 제출하거나 주요 안건에 대해 의견을 제출한 일이 있는가요.

"일체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피의자는 국보위가 설치령에 규정한 목적대로 또 그 범위 내에서 자문․보좌기관으로 운영됐다고 보는가요. 아니면 설치령에 규정된 범위를 벗어나 사실상 비상기구로 운영됐다고 보는가요.

"자문․보좌기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청교육이나 과외금지 등은 잘하는 조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보위 설치령 어디를 봐도 입법기능은 커녕 행정기능을 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없는데 공무원 숙정, 사회악 사범 일소, 과외금지 등 행정과 입법기능을 수반해야 하는 조치들을 국보위에서 어떻게 추진할 수 있는가요.

"대통령이 하겠다면 하는 것이지요. 내각에서도 그런 조치들을 할 수 있겠지만 최 대통령이 국보위에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면 국보위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이 하겠다면 하는 거지요"

-최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는 국보위를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하겠다고 재가를 받아 놓고 실제로는 무소불위의 기구로 운영했는데, 이는 결국 국보위의 성격․역할․권한 등에 관해 최 대통령을 속인 것이 아닌가요.

"최 대통령의 결재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아 공개적으로 진행한 것이므로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 대통령이 6․12 특별담화에서 국보위의 성격 등에 대한 항간의 의구심에 대해 국보위는 자문․보좌기관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 때까지는 국보위의 역할을 자문․보좌기관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대통령의 담화가 누구의 압력에 대해 나온 것이 아니라면 대통령의 말씀 내용을 믿어야지요. 최 대통령의 생각대로 자문․보좌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것으로 평가합니다. 하나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981년 10월 전두환 대통령 명의로 발간된 국보위 백서를 보면 전 대통령이 국보위는 제5공화국 탄생의 산실이었고, 국보위가 추진해온 중요 정책은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고 발간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국보위가 최 대통령의 자문․보좌기관이 아니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집권기구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 아닌가요.

"설치 당시 의도는 자문․보좌기구였지만 대통령직에 오르고 나서 보니 국보위에서 추진한 각종 개혁 조치들이 5공화국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으니까 국보위를 5공화국의 산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자문기구 내지 보좌기관으로 설치한 국보위가 대통령 내지 행정부 소관사항인 위와 같은 조치들을 입안 집행한 것은 월권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초법적 조치라는 주장에 대해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최 대통령이 답변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조치가 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 집행된 것이므로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소․고발인들은 피고소․고발인들이 폭동으로 12․12 사건, 5․18 사건, 5․20 국회 봉쇄 사건 등을 일으켜 국가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킨 후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혁명위원회 성격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후에 이를 입법기관으로까지 변경했으므로 국보위 활동은 내란수행 과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대통령이 통치권 차원에서 행한 일이므로 내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최 대통령이 내란수괴라는 말입니까. 1979년 12월12일 밤 대통령의 재가 지연이라는 소동이 있고 나서부터는 모든 일을 최 대통령에게 사전보고해 결심을 받은 후 집행했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보위에서 추진한 개혁조치들 예컨대 공무원 숙정, 과외금지 조치, 폭력배 검거 등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환심을 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군부가 사회 각 부분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실시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집권과는 관계 없습니다. 비상계엄하에서 여러 가지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대통령 결재를 받아 추진한 것입니다. 국보위에서 그런 조치들을 취한다고 해 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국보위 활동에 국민 호응 대단

-최규하 대통령은 스스로를 위기관리정부․과도정부라고 성격을 규정했고, 과도정부는 정치일정을 차질없이 진행,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것이 그 역할인데 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위와 같은 과감한 조치들을 취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결국 개혁을 빙자해 군부 집권의 당위성, 필요성,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런 조치들을 추진한 것이 아닌가요.

"국보위에서 추진한 조치들은 비상시국하에서 한시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이지 평상시에는 추진하기 어려운 조치이지요. 누가 새 정부를 맡든지 간에 새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판단하에 통치권자가 결심하여 추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통치권자가 비상시기를 이용해 국민의 편에 서서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지요."

-일부에서는 국보위가 추진한 여러 조치들이 최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시행된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는 최 대통령이 능동적으로 그런 조치를 추진했다고는 보기 어렵고 군부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힘으로 밀어붙이니까 힘에 밀려 방임한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최 대통령을 모욕하는 발언입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각종 조치들 가운데 나중에 문제가 안 된 부분이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요.

"국보위가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것이니까 무조건 부정하는 바람에 문제가 야기된 것이지 당시에는 국민들의 호응과 참여가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조치들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국가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조치들은 후임 정부에 미루고 군부가 집권을 계획할 것이 아니라, 과도 정부가 정치일정을 차질없이 진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한정했다면, 지금과 같은 소모적인 논쟁이 근원부터 생기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그런 이야기는 거듭 말하지만 민중혁명을 도모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입니다. 정치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그들인데 지금와서 군부의 역할에 시비 거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보위 출범 후인 1980년 6월12일 최 대통령,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신두영 감사원장 및 전 국무위원과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등이 배석한 가운데 국가 기강 확립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그 때 1980년 10월 말까지 개헌안 확정, 1981년 상반기 선거, 1981년 6월 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정치일정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공공질서 확립과 사회 안정이 이룩된다면 학원정상화 및 정치활동의 재개를 포함, 우리나라의 경제․사회발전에 상응하는 정치발전을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의 뜻이 좌절되어 중도에 하야하고 전 장군이 두 달 후에 집권했는데 위와 같은 담화를 발표한 배경을 알고 있는가요.

"일부 정치권에서 정치일정을 가지고 계속 시비를 제기하니까 그런 담화를 발표한 것이겠지요."

 

최 대통령 하야는 본인의 결심

-최 대통령이 전 장군의 집권의도를 눈치 채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그것은 본인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군부가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아니면 최 대통령이 위와 같은 담화를 발표한 것은 자신의 주도하에 정치일정을 추진, 정부를 이양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 때는 이미 3김 씨가 이런저런 이유로 배제된 마당이므로 과연 어떤 생각에서 어떤 세력을 염두에 두고 이런 담화를 발표한 것인가요.

"3김 씨에 대한 체포 조치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정상대로 갔다면 새 헌법에 따른 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계엄해제 등 모든 조치가 이루어졌겠지요."

-박 대통령의 사망으로 어느 날 갑자기 공석이 된 권좌를 적어도 3김 씨에게는 물려줄 수 없다는 점에 최 대통령과 신군부 간에 의견 합치가 있어, 그에 따라 3김 씨가 아닌 신군부에 정권을 이양할 생각으로 이런 담화를 발표한 것은 아닌가요.

"그 문제는 최 대통령과 전 장군 등 몇몇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최 대통령이 1981년 6월 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구체적 정치일정을 공개적으로 밝혔음에도 신군부가 최 대통령을 담화 발표 후 3개월도 안된 시점에서 하야케 할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는가요.

"최 대통령의 하여 부분에 대해서는 참모들에게 물어보아야 해답이 안 나옵니다. 그것은 최 대통령의 결심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최 대통령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요."

-군부가 집권을 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시기는 결정하기 않고 있던 중, 최 대통령이 1981년 6월 말 이전이라는 정치일정을 제시하자 군부 내에서 집권 시기에 관해 의견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집권 일정을 앞당기기로 결론이 나서 1980년 8월16일 최 대통령을 하야시킨 것이 아닌가요.

"그런 중대한 사안은 군부 내에서 여러 사람들이 관여해 협의할 성질이 아닙니다."

-1980년 9월29일 국보위 설치령을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령으로 개정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병규 정무수석비서관이 주도한 일이므로 본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5공화국 헌법 개정안에서 처음에는 국보위가 국회권한 대행기구로 되어 있었으나 최종단계에서 우병규 정무수석비서관의 아이디어로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국보위는 설치 당시부터 비상권력기구로서 5․16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이 입법권한도 행사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닌가요."

"본인의 관심 밖의 일입니다."

-1980년 10월27일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같은 날 삼청동 국보위 사무실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대리한 남덕우 국무총리 주재로 첫 회의를 열어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심의 통과시켰다고 하는데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입법권한을 갖게된 근거가 무엇이었는가요.

"법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국보위 설치 직후부터 국보위 법사분과위원회에서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 때는 국보위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고 있었으므로 참모들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국보위에서 헌법개정 작업을 하기 전에도 보안사 한용원 정보1과장이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피의자의 요청으로 유신헌법을 대신할 헌법개정 방향을 검토한 일이 있다는데 그 내용이 어떠했나요.

"본인은 한용원 정보1과장에게 그런 지시를 한 일이 없습니다. 한용원은 권정달 정보처장의 휘하 사람이므로 본인이 일을 시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전문위원을 역임한 우병규의 진술에 의하면 이 위원회에서 대통령, 국회의원의 선출시기 등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전문, 본문 121조, 부칙 7조로 된 헌법 개정안을 마련, 조문화까지 마친 상태에서 계엄포고령 10호로 사실상 국회가 문을 닫고 정치활동이 금지됨으로써 백지화됐다고 합니다. 국회에서 마련한 개정 헌법안을 잘 이용하면 되는 것이지 몇몇 사람이 모여 또 다시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국보위에서 헌법개정 작업을 추진한 법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헌법개정 문제가 당시 현안이었으니까 역시 대통령을 자문․보좌하는 차원에서 작업이 된 것이겠지요."

 

대통령 직선제 원했다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국보위에 헌법개정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도록 했다는 것은 전두환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집권에 뜻을 두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한 명백한 증거로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국보위에서 은밀히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국보위에서 추진하는 모든 일들이 최 대통령에게 보고됐기 때문에 이 문제도 당연히 보고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헌법 개정안 골격이 마련된 뒤인 1980년 7월15일경 전 장군이 피의자와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그리고 중정의 이종찬 총무국장, 허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을 사령관실에 소집한 다음 노태우 장군을 모셔오라고 해 권정달 정보처장이 개헌안의 골격을 설명한 일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대통령 임기 문제에 관해 논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노태우 장군은 안정론을 내세워 간선제를, 허삼수 인사처장은 국민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직선제를 주장하여 논란을 벌이다 전 장군이 간선제에 낙점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과 허삼수 인사처장이 나서서 국민들에게 바로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만 결론은 다르게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국민적 합의가 직선제였고, 대부분의 법사위원들도 직선제를 선호하고 있었다는데 미국식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참모들이 직선제를 건의할 수야 있지만 결론은 보안사령관 등 상부에서 결정하는 일이니까 구체적인 이유까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대통령 임기와 관련해 당초 신군부 내의 합의는 6년이었으나 전 장군의 주장으로 7년으로 연장됐다고 하는데 그 경위가 어떠한가요.

"5년, 6년, 7년 등 여러 안이 검토된 것으로 아는데 최종적으로 어떻게 7년으로 결정이 됐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피의자가 우병규로부터 임기연장 사실을 통보받고 굉장히 화를 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본인은 우병규로부터 그런 통보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 때 최 대통령이 1980년 6월12일 특별담화에서 밝힌 정치일정은 곤란하므로 일정을 앞당기는 문제, 최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문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선거 준비 및 신당 창당 문제 등에 관해서도 논의가 됐다고 하는데 결론이 어떻게 났는가요.

"대통령 선출방법과 임기 문제에 관해서만 논의가 됐지 대통령 하야나 신당 창당 등은 거론된 바가 없습니다."

-5공화국 헌법 부칙으로 기존의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키고 정치활동 규제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구정치인들의 바람직스럽지 못한 정치행태를 정화하기 위한 조치로 알고 있습니다."

-5․17 계엄확대 조치, 포고령에 의한 정치활동 금지 조치, 군 병력에 의한 국회 점령과 국회의원의 국회 등원 저지, 김종필․김대중․김영삼 등 이른바 3김의 체포․구속․연금 등 제거조치로 사실상 국회와 정당 기능이 마비되고 정치인을 제거한 상황을 사후에 헌법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닌가요.

"본인이 헌법개정 작업에 관여한 일이 없으므로 구체적인 사정을 알지 못합니다만 정치인 정화차원에서 일시적으로 묶어두기 위한 조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안사에서 신당 창당 작업을 진행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권정달 정보처장 주도하에 신당 창당 작업을 진행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에 개입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전두환 대통령 취임 이후로서 당시 권정달 정보처장은 현역 신분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당 창당에 관여 안 해

-신당 창당 과정에서 전두환, 정호용 장관과 가까운 권익현, 김윤환 의원이 신당 창당과 관련한 작업을 시작했으나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이 그 사람들을 밀어내고 보안사에서 신당 창당을 주도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권익현, 김윤환 의원이 신당 창당 작업에 관여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신당 창당과 관련, 일부에서는 공화당을 등에 업을 경우 언젠가 제기될지도 모를 정동성 시비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정권장악에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으므로 공화당 숙정을 전제로 한 존속을 주장했는데, 피의자와 허삼수 인사처장, 한용원 정보1과장 등이 18년간의 집권기간 중 공화당이 극도로 무기력해졌고, 유신의 모태라는 이미지를 씻기 어려우며, 당 간부들이 부패했다는 점을 들어 공화당 해체와 신당 창당을 주장, 결국 신당을 창당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이나 허삼수 인사처장은 신당 창당에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나 허삼수 인사처장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원기 부총리 증언에 의하면 1980년 초여름 무렵 전 장군 요청으로 국무회의를 소집, 예비비에서 1백억 원을 지원했다는데 그 돈이 신당 창당에 사용되지 않았나요.

"본인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비서실 운영에 들어가는 돈에 대해서만 집행할 뿐입니다."

-1980년 8월16일 최 대통령이 하야했는데, 신군부 내에서 처음으로 최 대통령 하야를 논의하고 방안을 검토한 때가 언제인가요.

"최 대통령 하야 문제는 참모들이 일체 관여한 일이 없으므로 언제 그런 검토가 시작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최 대통령이 국보위가 출범한 이후인 1980년 6월12일 특별담화를 통해 국보위를 자문․보좌기관으로 규정하고 1981년 6월 말 이전 정권이양이라는 정치일정을 밝히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 구체적으로 최 대통령 하야 문제를 검토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이 그런 문제에 관여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참모들과 검토할 사항이 아니지요."

-국정운영의 주도권이 신군부 쪽으로 넘어와 있었으나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끌어내릴 수도 없어 최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압력을 가해 고립시키는 한편, 원로들을 동원, 설득전을 펴는 양면작전을 구사해 최 대통령을 하야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그런 방침이 있었는지 여부를 알만한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신군부측에서 최 대통령 하야를 설득해 줄 원로로 신현확, 김정렬 전 국무총리를 선정하고, 노태우 장군이 고교 선배인 신현확 총리에게 최 대통령의 하야를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신 총리가 거절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금시초문입니다."

어떻게 대통령을 협박할 수 있습니까?

-신 총리가 거절하자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군 등이 1930년 동경유학 시절부터 최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인 김정렬에게 하야를 설득하도록 요청, 金 전 총리가 밀사로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본인도 들었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김정렬 전 국무총리가 최 대통령의 하야를 위해 설득에 나섰을 때 최 대통령이 "국민들은 군인들이 나서는 것보다 나 같이 별 의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 과도정권을 끌고 가기를 원한다."며 하야를 거부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김재규 내란사건과 관련하여 전 장군과 육본 검찰부장 전창열 중령이 1979년 12월1일 22시경 최 대통령을 조사하면서 1979년 10월26일 밤 최규하 국무총리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 대처를 하지 않아 내란방조 혐의가 있는 듯 진술했으나 김 비서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조서를 정리해 준 일이 있었는데요. 최 대통령이 김정렬의 수회에 걸친 하야 설득을 거부하자 다시 이를 문제삼아 구속 등 사법조치까지 검토했다는데 사실인가요.

"12․12 사건으로 최 대통령이 조사를 받은 것은 본인도 알고 있지만 그때 일을 문제 삼아 사법조치까지 검토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1980년 7월30일 청와대 접견실에서 김정렬 전 국무총리가 무려 5시간 동안 최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 끝에 최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결심을 받아냈다는데 그 때 설득을 했나요. 아니면 내란방조 등의 혐의를 문제 삼아 협박을 했나요.

"김정렬 전 국무총리가 사망했으니까 최 대통령에게 물어보면 당시 사정을 알 수 있겠지요."

-최 대통령이 사법조치도 불사하겠다면서 끝까지 하야를 거부할 경우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떻게 대통령을 협박할 수 있겠습니까"

-김정렬 전 총리가 최 대통령 하야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초대 민정당 대표를 권했으나 본인이 사양하자 5공 말기에 국무총리로 임명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김정렬씨가 국무총리를 할 때 본인은 한국에 없었으므로 그 배경을 알 수 없습니다."

-1980년 7월31일 최 대통령이 전 장군을 청와대로 불러 하야 결심을 밝히면서 "내 자리를 대신 맡아 달라"고 했으나 전 장군은 이를 사양했다는데, 하야를 하라고 해놓고 사양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설령 사양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요."

 

전두환, “내가 언제 대통령 되고 싶어 대통령이 됐느냐”

-피의자는 최 대통령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하야했다고 생각하는가요.

"당시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자신이 계속 국정을 이끌고 가는 것이 역부족이라고 판단,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980년 8월8일 전 장군이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지 10개월도 되지 않았다. 나에 대해 1979년 10월26일 이전에는 군대 밖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민들도 나를 몰랐고 국제사회도 나를 몰랐다. 그 때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어려운 문제들이 닥쳐왔고 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 나는 국민들의 주시를 받게 됐다. 한국에서의 지도력은 단순히 본인이 원한다거나 야망만 가지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의 섭리나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명에 맡겨야 한다. 한국은 명백히 군부의 리더십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라고 말해 집권의지를 분명하게 공표했습니다. 이 때는 이미 최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결심을 통보받은 이후인가요. 아니면 하야 결심을 미루고 있는 최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한 것인가요.

"언제 전 장군이 그런 회견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내가 언제 하고 싶어서 대통령 했느냐, 상황에 밀려서 대통령이 된 것일 뿐이다. 대통령 자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느냐는 말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1980년 8월11일 전 장군이 MBC TV와 특별회견을 하고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표로 민주복지국가의 건설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신군부가 창출하고자 했던 새 공화국의 지도이념 성안 작업은 이미 1980년 3월 말경 허문도의 소개로 전 장군을 만난 김영작이 허문도의 부탁으로 착수했던 것이며, 처음에는 창조적 민족주의가 새 공화국의 지도 이념으로 제시됐다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민주복지국가로 낙착됐다는데 사실인가요.

"창조적이라는 말은 허문도가 자주 사용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허문도와 김영작이 지도이념 성안작업에 참여했다는 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듣습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민주복지국가 건설이나 정의사회구현 등의 구호는 국보위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0년 8월21일 군 지휘관들이 모인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 장군의 대통령 추대를 결의했는데, 그 모임은 누구의 요청에 따라 소집된 것인가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의 소집 문제는 우리 선에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니까 주재자인 국방부장관이 소집한 것이겠지요."

-군 지휘관들이 모여 현역 대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 결의할 수 있는 것인가요.

"특수상황에서 발생된 일이라고 봅니다."

-10․26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80년 9월1일 전 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로 뜻을 모으고 그것을 위한 방안을 처음 검토하기 시작한 때는 도대체 언제인가요.

"정권장악에 뜻을 두고 그 방안을 검토한 일이 없었습니다."

 

전두환 집권의욕의 단서들

-1980년 1월 하순경 최영희 전 유정회 의장이 김종필씨를 밀어주도록 설득하기 위해 전 장군을 만나 "계엄당국이 이렇게 시국을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빨리 가닥을 잡고 수습해야 하는데 유일한 대안이 김종필이다. 공화당 기반과 행정부, 군부가 김종필을 도와주면 아무리 야세(野勢)가 강해도 이길 수 있다. 全사령관이 나서서 김종필을 밀어달라"고 했더니 전 장군은 "국민들이 김종필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부패비리 등 흠이 많아요. 김종필뿐만 아니라 3김 씨 모두 안됩니다."라고 3김 불가론을 펴, "그렇다면 군이 택할 길은 두 가지뿐이지 않는가. 3김 씨가 아닌 다른 누구를 옹립하든지 아니면 직접 나서든지 해야 하는데 어느 쪽인가. 당신이 직접 나서겠는가"라고 되물었더니, 전 장군이 "그래서 고민입니다. 여러 가지를 놓고 생각 중입니다."라고 대답해 직감적으로 전 장군의 집권욕을 읽었다는데요. 그 때 이미 집권을 위한 검토가 시작된 것 아닌가요.

"본인도 그런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소설입니다. 위와 같은 말을 할 정도라면 친분관계가 있어야 하는 데 두 분 사이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분이 바깥에서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기억으로는 최영희 전 의장이 보안사령관실을 방문한 일이 없었습니다."

- 1980년 3월 초순 무렵 강창성 전 해운항만청장이 보안사령관실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났을 때 전 장군이 "김종필은 흠이 많고 경솔하며, 김영삼은 아직 어려서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김대중은 사상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라면서 3김 불가론을 제기하자, 강 청장이 "이번만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직접 뽑은 문민 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라고 응답했고, 전 장군은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군이 당분간 정권을 맡아주어야 한다고 졸라댑니다. 심지어 야당 정치인까지 저를 찾아와 당신이 직접 대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강 청장이 또 다시 "전 장군이 군인으로서 정권을 잡는다면 박 대통령 이상 가는 실패나 불행을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느냐"고 말하자, 전 장군이 "최 대통령은 참 멍청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사람은 그대로 놔두고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뒤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발언해 집권할 뜻을 표명했답니다. 그 때 벌써 집권 의사가 서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강창성은 전 장군과 사감(私感)이 많은 사람입니다. 강창성은 윤필용 사건 때 하나회 제거문제로 전 장군과 앙금이 생긴 이래 해운항만청장 재직 때의 비리문제로 구속되자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 장군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창성이는 절대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창성이 보안사령관실에서 전 장군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절대 보안사령관실을 방문한 일이 없었습니다."

 

민간인들이 보안사령관실 자주 다녀가

-12․12 사건을 주도한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장군 등이 전 장군에게 집권을 설득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그 사람들이 자주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대화내용은 모르는 일이지요."

-1980년 초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장군 등이 보안사령관실을 자주 방문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보안사령관실을 자주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전 장군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기 전까지 가끔 온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 이유를 본인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피의자를 비롯한 허삼수, 권정달, 이학봉, 김진영, 장세동, 이현우 등 실세 대령들도 수시로 모여 현실정치를 비판하면서 전 장군이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이 알기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1980년 초에 보안사령관실을 방문한 야당 정치인이 있었는가요.

"민간인들이 많이 다녀간 것은 사실이나 구체적으로 누가 다녀갔는지에 대해선 기억에 없습니다."

-관련자들의 진술과 지금까지 질문한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적어도 1980년 1월경에는 군부집권 방안 검토가 시작됐고, 1980년 3월경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로 결론이 나 그에 필요한 집권시나리오 내지 집권계획을 기획․입안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요.

"군부에서 집권계획을 기획․입안한 사실이 없습니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는 마당에 집권계획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구체적이고 명확한 계획은 없었다 해도 대강의 구상이라도 서 있었을 것이 아닌가요.

"그런 구상도 서 있지 않았습니다."

-한용원 보안사 정보처 정보1과장은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3김 씨와 그 측근을 배제하고, 언론을 조종하며, 노동을 통제한다면 정권장악이 가능하다고 보고, 소요사태가 확대․심화되어 정정이 불안해지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화대 선포하고, 계엄업무 수행병력을 증강 배치해 3김 씨 및 그 측근의 배제작업과 더불어 국보위를 설치, 국정전반에 걸친 개혁으로 정권기반을 구축하기로 집권 시나리오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한용원이가 무슨 문제가 있어 장군 진급을 못하고 중도 하차하니까 악의적으로 그런 주장을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용원과 강창성이는 동일 티켓으로 보면 됩니다."

 

집권 시나리오는 없었다

-권정달 정보처장은 오래 전부터 정권장악을 구상했지만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고, 최 대통령이 밝혀온 정치일정에 맞추어 간다는 것이 기본입장이었으나 소요사태가 심해지고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내부에서도 최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갈 중심이 될 수 없다는 회의론이 강하게 제기되어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장군 등이 전 장군에게 조기 집권을 권유했고, 보안사 참모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일을 추진했다는데 어떤가요.

"오래 전부터 정권장악을 구상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시로서는 최 대통령이 밝혀 온 정치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피의자의 주장대로 군부가 적극적으로 집권할 계획을 가지고 추진한 것이 아니라 해도, 혹시 있을지도 모를 군부 집권에 대비해 대책이라도 세워 두었을 것 아닌가요.

"그런 대책도 세운 일이 없었습니다."

-계획도 없고 대책도 없었는데 어떻게 집권을 하게 됐는가요.

"10․26 이후 전 장군이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김재규 수사 등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민중혁명 노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혼란 수습 과정에서 취해진 각종 조치들로 인해 전 장군이 자연스럽게 실력자로 부상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광주사태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나는 등 최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터지자 하야를 포함해 거취문제에 많은 고민을 하다 결국 하야하게 되니까 전 장군이 상황에 떠밀려 권좌에 오른 것이지요.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된 것은 시나리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민중혁명을 위해 혼란을 조성한 정치인이나 재야세력의 덕분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몇몇 사람이 모여 시나리오를 만들어 추진할 수 있습니까.

또 전 장군이 집권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됐는데 어떻게 각본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습니까. 만약 집권계획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이라면 단시일 내에 해치울 일이지 오랫동안 질질 끌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12․12 사건으로 전 장군에게 힘이 쏠려 있었는데 힘이 없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했겠습니까. 지금 와서 보면 모든 일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추진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단연코 시나리오는 없었습니다."

-피의자가 집권계획을 기획, 입안함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피의자의 구체적인 분담 임무가 무엇이었나요.

"일부에서 전두환 장군이 머리가 나쁘니까 참모들이 계획을 세웠을 것이 아니냐라고 추측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두환 장군이 머리가 나쁜 사람도 아닐 뿐만 아니라 누차 말하지만 집권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피의자가 한용원 정보1과장에게 5․16에 관한 연구를 지시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집권계획을 입안하기 위한 사전준비 조치가 아니었는가요.

"한용원에게 그런 지시를 한 일이 없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연상케 하는 국보위 구성이나 전 장군의 4성 장군 예편, 집권 후 서둘러 미국을 찾아간 점 등은 박정희 장군 등장 때와 유사한데 이것이 5․16을 연구한 결과 아닌가요.

"역사는 결코 되풀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5․16을 연구할 시간도 없고, 연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처음 구상대로 되지 않고 상황 변화에 따라 변경이 있었다 해도, 어쨌든 집권 시나리오 내지 집권계획을 핵심들이 논의, 검토, 입안했을 터인데 이에 누가 관여했나요.

"집권계획에 관해 논의하고 검토한 일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터질 때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한 것이지 집권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취한 조치들이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처럼 비쳐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당시에 취한 조치들이 적절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지요."

-집권계획의 입안․추진에 보안사 소속이 아닌 사람들도 관여한 사람이 있는가요.

"당시 여러 사람들이 전 장군에게 이런 저런 말들을 많이 했겠지만 집권계획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조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의자를 비롯한 허삼수, 권정달, 이학봉, 정도영 등 보안사 5인방이 수시로 노태우, 정호용 등 12․12 주도세력과 모임을 가지면서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면서, 일부에서는 혁명의 성격으로 추진하자고 주장하고, 또 일부에서는 법적 모양새를 갖추자고 주장하여 결국 후자의 방법으로 결론이 났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논의가 있었던 일은 절대 없습니다."

-집권계획의 종착점은 결국 최규하 대통령이 자리를 물러나고 그 자리를 군부가 추대하는 인물이 차지하는 것인데, 그에 대한 계획은 어떠했나요.

"최 대통령의 하야 문제가 집권계획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 결코 아니라고 봅니다."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거쳐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이는 처음 계획대로 진행된 것인가요.

"계획에 따라 추진된 일이 아니라 최 대통령이 갑자기 하야하니까 당시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전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전면에 나서 집권을 해야 했던 당위성 내지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군이 나서서 국가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 장군이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어 집권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3김이 조금 참고 기다렸어야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김종필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김대중과 그의 추종세력을 소요배후조종 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에 이어 강제 은퇴시킨 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3김 씨를 포함한 구정치인 8백53명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는데, 아무리 처해진 국가상황이 긴박을 요하는 중대국면이라 하더라도 정치인의 세대교체 내지 정치질서 재편은 국민의 심판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진리 아닌가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당연히 국민의 심판에 맡겨야겠지만 위기상황에서는 부득이한 면이 있지요."

-군부의 정치개입에 대해 피의자는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요.

"정상이 아니지요. 3김 씨가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면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정치발전과 더불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전두환 정권과 관련하여 제도로서의 군부가 정치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인맥을 중심으로 한 파벌이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도당적 이익추구에 급급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전두환 대통령이나 그 주변 사람들의 도덕성 문제 때문이겠지요."

-박정희 장군이 집권한 과정과 전두환 장군이 집권한 과정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박정희 장군은 군사작전을 통해 집권한 전형적인 혁명이고, 전두환 장군은 군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떠밀려 집권한 것이므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피의자가 전 장군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쯤인가요.

"전 장군이 소령일 때, 그러니까 본인이 중위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비서실장을 맡기 전에는 보안사에서 일한 적이 없었는가요.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대공과에서 근무한 일이 있습니다."

-보안사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최강의 권력기관으로서 때로는 국민 위에, 때로는 정당 위에, 때로는 군부 위에 군림해 왔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업무영역이 광범위하다 보니까 그런 주장이 제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보안사의 존립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군부 쿠데타 방지인데, 이런 임무를 띠고 있는 보안사가 직접 정치개입을 계획, 추진할 경우 막을 방법이 없지 않는가요.

"보안사가 정치개입을 계획, 추진한 일이 없었습니다."

 

역사는 역사에 맡겨 두어야

-고소․고발인들은 신군부 세력들이 행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보위 설치, 최 대통령 하야 등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 내란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피의자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일부에서 집권과정을 문제삼고 있지만 결국 모든 조치들이 최 대통령의 결재과정을 거쳐 시행된 것이므로 내란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부분적으로 잘못이 있다 해도 그런 점만 부각시켜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장군이 대통령이 된 과정에 대해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내란행위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검찰이 그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피의자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요.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을 수사기관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 주장에 대하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요.

"5․6공 정권과 관련하여 손해를 본 소수가 있는 반면, 이익을 본 다수가 있으므로 손해를 본 몇몇 사람들 주장에 귀 기울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 번에 걸친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국민 심판이 내려진 마당에 사법처리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진술 도중에 여러 차례에 걸친 민중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1980년 당시 혼란을 조성한 사람들이 추구한 노선인데, 한 마디로 말하면 최규하 정부나 군부는 유신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몰아내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지요. 그 대표가 바로 김대중입니다."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나 사실이 있는가요.

"역사는 역사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전두환 정권이 국가발전에 여러 가지 기여를 한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본인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