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스파이 세계] <16>~<20>

서석천 2025. 3. 12. 04:00

독일에 포섭된 미인계 공작의 전설 ‘마타 하리’
▲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2017년 10월13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세계 첩보사에서 미인계의 전설로 불리는 마타 하리(Mata Hari) 사망 100주기를 맞아 ‘100년 후에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마타 하리의 실화’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그녀를 둘러싼 각종 과장된 소문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녀를 비극으로 몰고간 스파이로서의 악명을 재조명하려는 시도였다.
 
마타 하리는 1876년 네덜란드에서 사업가였던 아버지와 인도네시아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마르가레타 게르트루이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고 이후 친적 집에서 살며 라이덴(Leiden)에 있는 교육대학에 다녔다. 19세 때 네덜란드 장교(대위)와 결혼하여 남편의 근무지인 자바섬으로 떠났다. 거기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의 잦은 폭력과 외도로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그러다 아들의 사망을 계기로 결혼생활은 7년 만에 파탄났다. 이혼 후 그녀는 네덜란드로 돌아왔다가 1904년 파리로 갔다.
 
여기서 생계를 위해 ‘물랑루즈’라는 클럽의 무용수로 취직한다. 이때 ‘마타 하리’(인도네시아어 ‘새벽의 눈’이란 의미)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자신을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온 공주인 것처럼 소개하며 미모와 유창한 외국어를 앞세워 사교계를 장악해 나갔다. 이후 폭발적 인기를 바탕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며 숱한 염문을 뿌렸다. 그녀의 일상과 사진은 유럽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악할 정도였다. 수많은 정·관계 고위층 인사 및 군 장교들이 그녀와 사귀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 마타 하리는 세계 첩보사에서 ‘스파이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미인계 공작의 전설로 남아 있다. 필자 제공
 
독일의 정보부는 마타 하리의 다채로운 일상에 주목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 독일 베를린에 있던 그녀는 1916년 독일 정보기관에 포섭돼 암호명 ‘H21호’로 프랑스로 건너가 연합군 고위장교들을 유혹, 군사기밀을 정탐해 독일군에 제공해 왔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러시아의 비행기 조종사인 20세 연하의 마슬로프를 비롯해 수많은 프랑스 및 연합군의 군장교를 비롯해 정치인 등 고위층과 잠자리를 같이하며 스파이 활동을 했다.  또한 마타 하리는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정보당국의 스파이로도 활동하는 등 이중간첩 생활도 했다.
 
마타 하리의 대표적 미인계 공작으로 알려진 사례는 프랑스 최고사령관 모건 장군을 포섭한 건이다. 독일은 영국의 탱크 설계도가 프랑스군 사령부 모건 장군 자택의 비밀금고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타 하리에게 이 설계도를 입수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그녀는 자기 집에서 댄스파티를 열고 모건 장군을 초대해 그에게 접근했고, 결국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해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는 탱크 설계도가 들어 있는 비밀금고를 천신만고 끝에 열었고, 설계도를 독일에 넘기는 데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그녀는 1916년 프랑스를 위해 스파이 임무를 수락했다. 그녀의 연인이기도 한 육군 대장 조르주 라두에게 고용되어 수집한 군사 정보를 프랑스 정부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명백한 이중간첩 행위였다.
 
영국의 정보기관은 외교통신을 해독해 그녀가 독일 스파이임을 특정했다. 1917년 2월13일 마타 하리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엘리제 호텔 방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최소 5만 명의 군인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협의로 비공개 재판을 받았다. 그녀가 독일에 프랑스군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밝혀졌으나 결정적 증거는 제시되지 못했다. 또한 1917년에 독일군 정보를 빼내 프랑스에 제공한 사실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녀는 군사법정에서 검사의 심문에 대해 수많은 군장교들과의 잠자리는 인정했지만
저는 절대 스파이는 아닙니다! 나는 항상 사랑과 즐거움을 위해 살았습니다고 말했다. 1917년 7월25일 프랑스 군사법원은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관은 구체적 증거는 제시하지 못한 채 “마타 하리가 빼낸 군사기밀은 연합군 병사 5만 명 목숨의 가치가 있다”고 판시하며 유죄 사유를 밝혔다.
 
당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지속적 공세로 3년간의 전쟁에 지쳐 있었다. 사기가 저하되었고 희생양을 찾고 있던 참에 전쟁 중 군장교 등을 파렴치하게 유혹했던 부도덕한 외국인 즉 마타 하리가 그 대상이 된 것이었다. 일부 간첩행위로 몇 년간의 징역형은 몰라도 사형선고는 과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1917년 10월15일 새벽 파리 외곽 뱅센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녀의 나이 41세 때였다.
 
그녀가 죽은 뒤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독일 정부는 1930년에 공개적으로 그녀의 무죄를 선고했다. 1996년 네덜란드 정부는 마타 하리의 명예를 회복해 주고 그녀를 위한 기념관을 건립해 주었다. 1999년 비밀이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에는 마타 하리가 군사 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결정적 증거가 수록돼 있지 않았다. 2017년 프랑스 정부는 마타 하리 사망 100주년 기념으로 다양한 관련 문서를 공개해 그녀의 결백함을 뒷받침해 주었다. 결국 상당수 유럽인들은 그녀가 전쟁 패배의 희생양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서구사회 일각에서는 마타 하리를 고급 창녀에 불과하다고 폄하하지만, 그녀는 세계 첩보사에서 ‘스파이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미인계 공작의 전설로 남아 있다. 그녀를 소재로 한 소설·영화·음악 공연·음반 제작 등이 줄을 잇고 있는 이유다.
 
유동열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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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7>
英첩보사상 최악의 반역자 MI6 고위 간부 ‘킴 필비’
 
 
1930년대 영국 지성을 대표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 40여 명이 소련 스파이가 되었다. 당시 자본주의·파시즘 등에 환멸을 느낀 학생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자진해서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이들은 조국 영국을 배반하고 소련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하는 것이 세계혁명을 위한 정의라고 여겼다.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케임브리지 5인방’이라고 불리는 킴 필비·가이 버제스·앤서니 블런트·도널드 맥클린·존 케른크로스다. 이들은 영국 및 미국의 대소(對蘇) 간첩 활동, 원자폭탄 생산 계획, 6·25전쟁 군사정보 등 최고 수준의 정보에 실시간으로 접근해 취득한 것들을 소련에 전달했다. 소련 KGB 공작원이었던 유리 모딘은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1994)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들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케임브리지 5인방 중 킴 필비(Harold Adrian Russell ‘kim’ Philby)의 활동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는 영국 등 세계 첩보사에서 가장 악명높은 최악의 반역 스파이로 기록돼 있다. 필비는 1912년 당시 영국령이었던 인도 펀잡주 암팔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영국 외교관 신분(실제는 영국 정보국 협조망원)으로 인도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킴(kim)’은 한 소설의 소년 스파이 이름을 딴 필비의 별칭이다.
 
▲ 케임브리지대 출신 필비는 조국 영국을 배신한 덕에 소련에서 영예(?)를 누리다 1988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필자 제공
 
필비는 영국의 명문인 웨스트민스터 학교와 영국 지식 사회의 기둥이었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이다. 역사학과 경제학을 전공하며 후에 케임브리지 5인방으로 불리는 버제스·맥클린과 교류하며 공산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대학 졸업 후 1934년 오스트리아 빈 등 유럽을 여행하면서 반파시즘 투쟁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앨리스 프리드먼(별명 리치)이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생애 총 4번 결혼을 했는데 그녀가 첫 번째 부인이었다. 
이 무렵 필비는 소련 KGB 공작원 아르놀트 도이치에게 포섭되어 반역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무려 30여 년 동안 소련을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
 
필비는 1937년 영국의 유명 일간지 타임스의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내란을 취재하기 위해 파견되어 친 프랑코 성향의 우파적 기사를 쓰며 자신의 공산주의 사상 흔적을 지웠다. 소련 스파이로 암약하기 위해 일종의 사상 세탁을 한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 1940년 이미 영국 비밀정보부(MI6)에 근무하고 있던 친구 버제스의 도움으로 신원조회를 통과해 MI6에 채용되었다. 초기에 그는 해외방첩부서의 분석직으로 근무하면서 광범위한 정보를 접했다.
 
이후 소련을 전담하는 정보작전부서에서 근무하면서 대(對)소련 방첩부서장으로  승진했다. MI6의 떠오르는 별이 된 그는 MI6이 소련 및 동유럽에 침투시킨 스파이 명단을 빼돌려 KGB에 제공했다. 그 결과 이들 요원이 체포되고 첩보망이 무력화되었다. 1945년 필비는 신분이 발각될 위기에 처했으나 선제적으로 대응하여 벗어났다. KGB 이스탄불 지부장 볼코프가 현지 영국대사관에 망명을 타진하면서 영국 MI6에 침투한 KGB 스파이 명단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였다. 필비는 KGB에 이 사실을 알렸고 볼코프가 소환돼 처형되면서 망명을 막아 위기를 넘겼다.
 
필비는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미 워싱턴 주재 MI6의 지부장을 역임하며 CIA와 MI6 사이의 정보 협력을 조정했다. 그는 CIA의 방첩부서장인 앵글턴과 6년간 교류하며 그의 멘토 역할을 했다. 당연히 필비가 접한 CIA 정보는 고스란히 KGB에게 전달되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1950년 CIA가 알바니아에 반공산주의 무장군을 침투시켜 전복시킬 작전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유출하여 소련과 알바니아 당국에 의해 300명의 반공산군이 사살되었다. 
 
이후 CIA의 소련 통신암호 해독 프로젝트인 베노나 작전에 의해 소련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는 클라우스 푹스 등이 체포되었다. 필비 또한 암호명 스탠리를 쓰는 스파이였지만 자신의 스파이 활동 보고서도 해독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사전에 대응해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다.
 
▲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킴 필비의 묘지. 필자 제공
 
1951년 필비는 MI6 요원인 맥클린과 버제스가 소련으로 망명한 사건으로 수사를 받았지만 철저한 부인과 증거 불충분으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이 무렵 CIA 국장은 MI6 국장에게 필비의 긴첩 혐의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로 인해 결국 필비는 1951년 보직 해임되고 1955년 해고되었다. 1955년 해럴드 맥밀런 외무장관이 영국 하원에서 “필비가 조국의 이익을 배신했다고 결론 내릴 이유가 없다”고 최종 보고한 덕분에 일단 대외적으로는 혐의를 벗었다.
 
1956년 필비는 베이루트에서 언론사 기자로 위장 근무하는 형식으로 MI6에 복직했다. 그러나 필비에 대한 새로운 반역 증거들이 드러나자 MI6은 필비가 자신의 반역행위를 인정하면 사면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설득하도록 필비의 절친한 동료인 엘리어트를 베이루트에 급파했다. 필비의 반역행위가 알려지면 MI6의 위상은 물론 그와 연결된 다수의 고위직 인사들이 곤경에 빠질 것을 우려해 비공개로 조용히 처리하고자 한 고육지책이었다. 필비는 엘리어트에게 사실상 반역 행위를 시인하는 서면 고백서를 남기고 체포 직전에 사라졌다.
 
그의 행방은 소련 신문 이즈베스티야가 1963년 6월3일자에 필비가 모스크바로 망명했다고 보도하면서 파악되었다. 1963년 1월23일 소련 화물선에 탑승해 모스크바로 도주했던 것이다. 6개월 후인 1963년 7월1일 영국 정부는 한동안 비밀에 붙였던 필비의 반역 행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영국뿐 아니아 미국 등 서방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사실 필비는 차기 영국 정보부 MI6의 수장으로 유력했기 때문이다.
 
1965년 필비는 KGB에 대한 공로로 소련에서 붉은깃발훈장과 레닌훈장을 받았다. KGB 대령에서 후에는 장군에까지 올랐다. 1968년 필비는 자신의 반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의 비밀전쟁(My Silent War)’이란 저서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서방에서 20만 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소련에서 20살 어린 부인과 4번째 결혼을 했고 조국을 반역한 덕에 영예(?)를 누리다가 1988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필비 사건은 서방 정보기관에 내부 방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내부자에 의한 반역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유동열 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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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8>
러시아에 비밀정보 판 캐나다 장교 ‘제프리 들라일’
 
 
2001년 미국이 9.11테러를 당하자 캐나다는 테러 및 안보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기존의 정보보안법을 강화하여 재개정했다. 이 법에 의해 최초로 기소된 사람이 캐나다 해군 정보장교 제프리 들라일(Jeffrey Paul Delisle)이다.
 
들라일은 1971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예비군으로 해군에 입대했고 2001년 정규군으로 전환했다. 2006년 이후 캐나다 군사정보국과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며 안보위협 분석을 다루는 중요 직책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돌연 2007년 7월 캐나다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들어가 자신의 해군 신분증을 보여 주며 러시아 군정보국(GRU)에 비밀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며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다. 이때부터 스파이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수년간 누적된 경제 파탄 상황에서 두 자녀의 교통사고가 발생하고 치료비 부담에 시달리던 중 결정적으로 부인의 외도를 직접 목격하게 됐는데 이 모든 것이 경제적 궁핍에서 비롯된 것이라 잘못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는 간첩 활동을 통해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들라일은 2008년 캐나다 장교를 양성하는 왕립군사대학에 입학했고 그해 7월 소위로 임관한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2009년 스파이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으나 러시아 GRU 요원이 딸 사진을 보여 주며 협박하여 계속 스파이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들라일은 2011년 8월 핼리팩스에 위치한 다국적 해군 정보 및 통신센터에 배치되었다. 이 센터는 5개국(캐나다·미국·영국·호주·뉴질랜드)의 정보공동체인 일명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의 정보 데이터뱅크 기지로 다국적 특급 군사기밀시설이다. 또한 위성·드론·수중 장치를 통해 캐나다 해역에 들어오고 나가는 선박을 추적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비밀자료에도 접근할 수 있는 기지다.
 
▲ 캐나다 군사정보국과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며 안보위협 분석을 다루는 중요 직책을 맡았던 제프리 들라일은 러시아 군정보국(GRU)에 비밀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며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다. 필자 제공
이에 주목한 러시아는 들라일에게 브라질로 휴가 갈 것을 지시했다. 2011년 9월 들라일은 휴가를 가장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가서 GRU 공작관 빅터와 접선하여 5만 달러(캐나다달러)라는 거액의 공작금을 수령하고 새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의 귀국 때 국경관리청(CBSA)은 검색과정에서 통상 장기휴양지인 브라질에서 수일 만에 귀국한 점과 거액의 달러를 소지하고도 신고하지 않은 점을 발견하고 이를 군 당국에 통보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들라일의 변명에 넘어가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파이브 아이즈와 나토의 군사정보가 러시아 쪽으로 유출되는 것을 포착하고 추적 중 이의 발원지가 캐나다 해군 정보장교 들라일이라는 것을 특정했다. FBI는 즉각 캐나다 정보기관인 캐나다 보안정보국(CSIS)에 이를 통보했다. 그러나 CSIS는 이를 파악하고도 내부 절차를 이유로 캐나다 연방경찰인 왕립기마경찰(RCMP)에 사건을 이관하지 않고 지체했다.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 등 파이브 아이즈의 1급 정보가 줄줄이 빠져나가는데도 캐나다 정보당국이 이를 신속하게 차단하지 않자 FBI는 분통을 터뜨렸다. 뮐러 당시 FBI 국장이 캐나다 CSIS 국장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차선책으로 미국은 들라일을 미국으로 유인하여 체포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결국 2011년 12월2일 FBI는 CSIS를 제치고 직접 캐나다 연방경찰 RCMP에 들라일의 스파이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이러한 사실은 FBI 방첩국장을 역임한 프랭크 피글리우치의 언론 인터뷰로 알려졌다. 캐나다 CSIS 정보조사 시스템의 중대한 결함이 원인이었다.
 
들라일의 기밀 유출에는 첨단수법이 동원되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플로피디스크 사용이 중지되자 컴퓨터에서 플로피드라이브에 보안장치가 미설치된 점을 악용하여 보안 조치된 컴퓨터에서 플로피디스크에 기밀을 저장한 후, 일반 컴퓨터에서 플로피디스크 내 자료를 USB에 복사하여 외부로 반출했다. 들라일의 기밀 전달 수단은 사이버공간이었다. 러시아 GRU는 2007년 8월 중동지역에 서버를 둔 웹사이트(gawab.com)에 이메일 계정을 개설하고 들라일과 공유했다. ‘문서 임시저장’ 기능을 활용해 들라일이 작성한 기밀을 30일 단위로 접수 후 해당 내용을 바로 삭제하는 방식을 사용하며 이른바 ‘사이버 드보크’ 즉 온라인상 간첩 장비 매설 장소를 운영했다.
 
▲ 2013년 캐나다 연방법원은 러시아에 비밀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들라일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으나 7년 후 그는 가석방됐다. 필자 제공
 
2012년 1월13일 캐나다 RCMP는 정보보안법 위반 혐의로 해군 중위였던 들라일을 체포했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캐나다뿐 아니라 미국 등 파이브 아이즈 동맹국들은 경악했다. 자국의 핵심 정보가 동맹국에 의해 유출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캐나다의 허술한 기밀 보안시스템에 분노했다. 2013년 캐나다 연방법원은 들라일에게 4년에 걸쳐 11만 달러(캐나다달러)를 받고 러시아에 비밀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019년 3월 법원은 재범 가능성이 낮다며 들라일의 가석방을 허가하고 석방했다. 그는 20년 형기 중 겨우 7년만 복역하고 나온 것이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다.
 
최근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서도 국가안보보다 인권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간첩 활동자들이 낮은 형량을 선고받거나 줄줄이 가석방이나 사면되는 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스파이 활동에 관한 사법 시스템의 정비가 시급함을 보여 준다. 바야흐로 스파이 천국 시대다.
유동열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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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9>
소련 최고 여성 스파이는 평범한 주부 ‘소냐’
 
 영국 정보부(MI5)는 2차 세계대전 중 시작된 소련 암호통신 해독작전인 ‘베노나작전’팀으로부터 런던의 소련국 정보국(GRU)기지 본부에서 모스크바로 전송된 암호전문에서 매번 등장하는 암호명 ‘소냐(Sonia)’에 관한 자료를 제공받아 추적했다. 1959년에서야 15년간 GRU 스파이로 암약한 ‘우슬라 마리아 쿠친스키’(Ursula Maria Kuczynski)를 찾아냈다. 그리고 1959년에야 15년간 GRU 스파이로 암약한 ‘우르술라 마리아 쿠친스키’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녀가 1950년 동독으로 도주하기 전까지 영국 경찰은 여러 차례 간첩 신고를 받았으나 두 아이를 양육하느라 찌들어 있는 너무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을 보고는 현장 조사를 하고도 발길을 돌렸다. 또한 그녀에게 원자폭탄 정보를 제공했던 클라우스 푹스(본지 스파이세계 제7회 연재)와 또 다른 하부망인 알렉산더 푸트가 검거되어 1947년 그녀의 정체가 드러났는데도 MI5의 무능으로 그녀는 수사망에서 빠져나갔다.
 
▲ 암호명 ‘소냐(Sonia)’로 암약했던 우르술라 마리아 쿠친스키. 필자 제공
쿠친스키는 ‘루스’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그녀가 회고록(1977)과 어린이 동화를 집필했을 때 사용한 필명이다. 
 
그녀는 1907년 독일 베를린에서 유복한 폴란드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로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경제학을 강의한 저명한 교수였다. 그의 6명 자녀 중 5명이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열혈 공산주의 집안이었다. 쿠친스키는 중학교 다닐 때 좌파 노동단체 활동을 했고 18세 되던 1926년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쿠친스키는 뉴욕의 서점에서 일을 했다. 거기서 건축학을 전공한 첫 남편(루돌프 함부르크)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베를린에 돌아온 그녀는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도서관을 설립하고 당 기관지인 ‘적기’(赤旗·Rote Fahne)에 글을 쓸 정도로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다.
 
1930년에 남편이 상하이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중국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녀는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조르게(Richard Sorge·본지 스파이 세계 제6회 연재)와 연결되어 GRU 요원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게 된다. 1934년에는 아들을 시댁 부모에게 맡기고 3개월간 모스크바로 가서 GRU 스파이교육을 이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녀의 암호명은 ‘소냐(Sonja)’였다. 그녀는 소련의 지령에 따라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비밀 회합을 주선하고 각종 무기를 지원하고 중국공산당원을 은닉시켜 주는 등의 활동을 했다. 또한 엄청난 분량의 각종 정보를 수집해 소련에 송신했다.
 
쿠친스키는 폴란드·스위스 및 영국으로 이동하며 스파이로 암약했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 단치히를 점령하자 그곳에 급파되어 스파이 활동을 전개했다. 그 공으로 소련이 붉은 깃발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는 소련의 유럽 정보네트워크인 ‘레드 오케스트라’의 영국망과 ‘루시 스파이 링’의 스위스망을 구축했다.
 
쿠친스키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경력의 공산주의자였던 영국인 비어튼과 재혼하며 영국 국적을 획득했다. 남편 비어튼은 영국 공군의 부사관이었다. 그녀는 옥스포드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영국 상류사회와 교류하고 있던 아버지로부터 고급 정보를 입수했고 또한 미국 OSS(전략정보국·CIA의 전신) 요원이 된 오빠 위르겐(항공분석가)으로부터 각종 정보를 빼내 소련에 보고했다. 또한 1941년경 독일계 영국 핵 과학자인 클라우스 푹스를 포섭해 원자폭탄 핵심 정보를 소련에 제공했다. 그녀의 정보는 로젠버그 부부가 제공한 정보보다 훨씬 가치있는 핵 정보였다고 평가된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소개받은 영국 공군장교·잠수함 레이더 전문가·OSS 요원·핵과학자들로 하부 정보망을 구축해 운영했다.
 
소련은 그녀의 정보를 기반으로 1945년 훈련된 스파이들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낙하산으로 침투시켜 전쟁 장비와 무기 체계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무선으로 작동되는 통신기를 통해 지상에서 공중으로 폭격 지점을 송출하도록 함으로써 공중 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 쿠친스키는 1977년 ‘소냐 보고서’라는 자서전을 발간했다. 필자 제공.
1946년 GRU는 쿠친스키의 정체가 드러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와의 연락을 단절했다. 쿠친스키는 1947년부터 MI5의 조사를 받았다. 그녀의 하부망인 클라우스 푹스와 알렉산더 푸트의 정체가 드러나 수사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 당시 그녀는 일관되게 두 아이의 양육과 가사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주부 코스프레 연기를 해냈고, MI5는 그녀가 소련과  연계되어 있음을 파악했음에도 그녀의 역할에 회의를 품고 사법처리를 하지 않았다. 
 
1950년 3월 그녀는 드보크(간첩장비 비밀 매몰지)에서 GRU의 도피 암호 메시지를 발견하고 영국에서 도주했다. 그 후 서베를린을 통해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그곳에 안착했다.
 
그녀는 1931년부터 1946년까지 약 15년에 걸쳐 소련 GRU 요원으로 암약했다. 소련은 중국·폴란드·스위스·영국 등에서 첩보망을 구축·운영하며 성공적으로 첩보 업무를 수행해 온 쿠친스키를 GRU 역사상 가장 뛰어난 최고의 여성 스파이로 평가했다. 그 공으로 그녀는 소련 최고 군사훈장인 ‘붉은 깃발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고, GRU 대령으로 추대되었다.
 
쿠친스키는 1977년 ‘소냐 보고서’라는 자서전을 발간했다. 이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를 저술해 작가로서 인기를 누렸다. 그녀는 2000년 7월7일 베를린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2002년 7월23일자에 그녀의 사망기사를 보도했을 정도로 유명한 스파이였다. 
 
한 정치평론가는 그녀를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공산주의에 일생을 바친 마지막 세대의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통상 여성 스파이하면 미인계 공작을 떠올리지만 쿠친스키는 키 작고 뚱뚱한 평범한 외모의 주부로 신념에 따라 충실히 스파이 업무를 해 온 세계 최고의 여성 스파이 중 하나이다.
 
유동열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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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20>
美 최초 간첩죄로 사형된 민간인 ‘로젠버그 부부’
 
1953년 6월19일 저녁 미국 뉴욕주 오스닝 소재 싱싱교도소에서는 원자폭탄 기밀을 소련에 넘긴 혐의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로젠버그(Rosenberg) 부부의 형이 집행되었다. 미국 역사상 민간인이 간첩 행위로 사형당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들 부부는 사행 집행 전까지 간첩 혐의를 부인했다. 체포 당시부터 수사와 재판 내내 무죄를 주장했고, 죽음 앞에서는 진실해진다는 속설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 부부는 마지막 말도 거짓이었다.
 
남편인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1918년 5월 뉴욕에서 가난한 유대계 이민자 부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15년 9월 태어난 부인 에델 그린글래스도 유대계였고 가정 형편이 비슷했다. 줄리어스는 뉴욕시립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며 공산주의 학생운동에 열중했다. 에델도 비슷한 시기에 회사에 다녔다. 1936년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국제선원노동조합의 파업 현장에서 줄리어스를 처음 만나 1939년에 결혼했다. 1940년 줄리어스는 자신의 공산당 경력을 숨기고 육군신호부대에 민간인 기술자로 채용되어 레이더 장비를 연구했다. 에델과 그녀의 남동생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도 열성 공산당 지지자였다. 1945년 줄리어스는 공산당원이란 이유로 육군 신호부대에서 해고당했는데 그때도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 미국 역사상 민간인이 간첩행위로 사형당한 최초의 사례가 된 줄리어스·에델 로젠버그 부부. 이들은 사행 집행 전까지 끝내 간첩 혐의를 부인했다. 필자 제공
  
미국은 1942년부터 원자폭탄 개발 비밀사업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했고, 이에 소련은 원자폭탄 정보를 빼내기 위해 다방면에 스파이망을 구축했다. 그 스파이 중 한 명이 독일계 영국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본지 스파이세계 제7회 연재)였다. 푹스의 간첩 활동은 미국과 영국의 소련 암호통신 해독사업인 ‘베노나(Venona) 작전’을 통해 드러났다. 푹스는 1950년 2월에 체포되었고 그의 상부 연락책인 화학자 해리 골드도 검거되었다. 해리는 미 연방수사국(FBI) 수사에서 ‘맨해튼 프로젝트’ 조직에 기밀유출자가 한 명 더 있다고 자백했는데, 그가 바로 에델의 남동생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였다. 
 
데이비드는 육군 상사 출신의 기계공학자로 맨해튼 프로젝트 수행 연구소인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원자무기연구소)’에서 18개월 동안 근무했다. 당시 누나와 매형이 원자폭탄에 대해 관심이 많아 설명해 주었고 이후 매형의 소개로 해리 골드를 만나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해리 골드는 이들에게서 핵 개발 정보를 빼내 뉴욕 주재 소련 부영사로 위장한 소련 정보기관 KGB의 요원 아나톨리 야코블레프에게 전달했다.
 
1950년 7월17일 줄리어스 로젠버그가 체포되었고 뒤에 부인 에델도 체포되었다. 1951년 3월29일 로젠버그 부부는 간첩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았고, 그해 4월5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어빙 카프먼 판사가 선고한 유죄 사유 중 하나로 한국전쟁(6·25 전쟁)에 미친 영향을 들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본인은 피고들의 죄가 살인죄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에 원자폭탄을 넘겨준 피고들의 행위는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야기시켰고 그로 인해 이미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고들은 반역 행위로 역사의 흐름을 미국에 불리하게 바꿔 놓은 것이 명백하다.”
 
당시 로젠버그 부부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유럽 각국에서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에 반대하는 청원이 잇달았다. 공산주의자였던 유명 화가 파카소와 철학자인 사르트르뿐 아니라 반공주의자인 교황 피우스 12세도 이들 부부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다.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미국 대통령에게 사형 철회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직접 핵 개발 정보를 넘긴 푹스가 14년, 데이비드가 15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로젠버그 부부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은 너무 잔인하다고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러나 로젠버그 부부의 사형은 결국 집행됐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로젠버그 부부 사건에 대한 새로운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가 로젠버그 부부에게서 핵 개발 정보 도움을 받았으나 소련의 핵 개발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언급한 녹음 내용이 공개되었다. 또한 1995년 기밀이 해제된 소련 암호통신 해독(베노나) 문서에 따르면 로젠버그의 암호명은 ‘안테나(Antenna)’와 ‘진보주의(Liberal)’였다. 다만 그가 빼돌린 기밀은 주로 전파탐지기 관련 정보였고 원자폭탄 정보도 일부 있었다. 
 
핵 기밀을 소련에 전달한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30년형을 선고받았던 머튼 소벨의 증언도 결정적이었다. 그는 1969년에 형기를 앞당겨 18년 만에 석방되었는데 계속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가 2008년 뉴욕타임스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소련의 스파이였음을 인정했다. 나아가 2011년 ‘위클리 스탠더드’와의 대담에서는 자신이 로젠버그 및 다른 2명과 함께 기밀문서들을 복사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로젠버그 부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1973년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죄와 명예 회복을 주장하다가 2008년에야 아버지의 간첩 혐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까지 어머니의 무죄와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로젠버그 부부의 옥중편지가 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사랑은 죽음을 넘었어라’(들불·1989)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로젠버그 부부 사건에 대해 당시 미국 및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연계하여 스파이 조작 사건이라고 선동 공세를 벌였지만 소련 붕괴로 각종 기밀이 해제되고 관계자의 증언이 나오는 바람에 진실로 밝혀졌다.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진보로 위장한 종북좌익 분자들의 거센 가짜뉴스 공세에 엄중히 대처해야 하는 이유다.
 
유동열 202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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