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경재

[스파이 세계] <6>~<10>

서석천 2025. 3. 12. 03:16

 히틀러 행진 저지한 전설의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한 사람이 유럽을 횡단하는 히틀러의 행진(소련 침공)을 막았다. 스탈린·처칠·루즈벨트가 아니라 리하르트 조르게라는 소련 스파이였다. 조르게는 가상의 창조물을 능가하는 실존 스파이이자 20세기의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었다.”
 
이는 영국의 저명한 역사작가인 오웬 매튜스가 저술한 ‘완벽한 스파이: 스탈린의 핵심 요원 리하르트 조르게’(An Impeccable Spy: Richard Sorge, Stalin’s Master Agent, 2019)라는 책 리뷰의 첫 문장이다. 독일계 소련 스파이 조르게에게는 항상 ‘전설’ ‘최고’라는 접두어가 따라 붙을 정도로 그 활동이 탁월했다.
 
리하르트 조르게(1895~1944)는 1895년 러시아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에서 독일인 석유 시추 기술자였던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 때 이버지가 석유 회사와 맺은 계약 기간이 끝나 독일로 돌아온 조르게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군 시절 동료와 함께 마르크스사상을 접했고 동부전선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다. 군 병원에서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물을 접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치료 후 철십자 훈장을 받고 제대했다.
 
이후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사로 일하면서 1919년 독일공산당(KPD)에 입당해 당의 선동가가 되었다. 1924년 그는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해 조르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공산당 대회에 참석한 소련 대표단의 경비 업무에 투입되었는데 여기서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고위 간부인 피아트니츠키(Osip Piatnitsky)에게 발탁되어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코민테른 요원으로 국제커뮤니케이션 부서에서 일했다.
 
당시 소련군 총참모부 소속 정보국(GRU)의 국장인 얀 베르진(Jan Berzin)은 조르게의 확고한 공산주의 사상성·외모·외국어(러시아·프랑스어·영어) 능력 등에 주목하고 GRU 요원으로 정식 채용했다. 조르게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독일과 영국 등에 머물며 관련국 정보를 수집해 소련으로 넘겼다. 후에 조르게는 아버지의 조국 독일에는 배신자였지만 어머니의 조국 소련에는 충성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유럽 체류 시절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 영향력 있는 언론에 기고하면서 존경받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위장 경력을 쌓았다.
 
1924년 소련에 돌아와서 소련의 정보기관인 국가정치보안부(GPU·후에 KGB)에서 정보분석요원으로 근무했고 1925년 소련 시민권을 획득했다. 1929년부터는 다시 소련군 정보국(GRU) 소속으로 비밀공작을 수행했다. 중국과 일본 공작에 투입되기 위해 사전에 독일로 가서 철저한 나치와 농민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위장 신분을 획득했다.
 
1930년 중국 상하이로 옮겨 독일 농업신문사 특파원과 농업전문가로 신분을 위장하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에 대한 정보수집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서 일본 아시히신문 특파원 오자키 호츠미(尾崎秀実)를 만나 공산주의 사상을 매개로 포섭했다. 1933년 일본 파견 전에 그는 독일로 가서 나치의 열성당원으로 행세하며 신분 세탁을 했다. 이 무렵 그는 나치 선동가 괴벨스와도 인연을 맺었다. 이때 오이겐 오토(Eugen Otto) 대령(후에 일본 대사)을 소개받았다.
 
그해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지의 도쿄 특파원 신분으로 일본에 도착했다. 조르게는 해박한 학식과 재능을 발휘하며 일본에서 외교·정치·경제·군부·문화계의 명망있는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며 명성을 쌓아 갔다. ‘라무자’라는 암호명을 지닌 조르게는 자신이 구축한 첩보망을 통해 삼국동맹(독일·이탈리아·일본)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총리의 정책 보좌관으로 진출한 오자키 호츠미(아사히신문 특파원 시절 중국에서 이미 포섭)를 통해 일본 정부의 기밀문서를 빼내는가 하면 오이겐 오토 주일 독일대사에게 접근해 고급 정보를 수집했다.
 
1941년 초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으로부터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를 입수해 소련에 전달했는데 스탈인이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독일군에게 대패했다. 또한 그해에 그가 일본이 소련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를 보내 소련은 40만 명의 정예병·1000대의 탱크·1000대의 비행기를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독일 침공으로부터 소련을 지켜 냈다. 이는 유럽 역사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전달하기도 했다.
 
조르게는 1941년 10월18일 일본당국에 체포됨으로써 스파이 활동의 막을 내렸다. 그는 가혹한 고문에도 소련과의 연관성을 부인했고 소련도 조르게를 자국 요원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당국은 조르게와 소련에서 붙잡힌 일본 스파이와의 교환을 시도했지만 소련 정부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이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1942년 11월 소련 당국은 조르게의 아내 카탸를 체포하고 5년의 유배형을 선고해 시베리아로 보냈다. 그녀는 치료를 받지 못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소련을 위해 헌신한 스파이 조르게를 대하는 소련 정부의 태도를 보아 스파이 세계의 냉혹함을 확인할 수 있다. 조르게는 1944년 11월7일에 일본의 한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20년이 지난 1964년에서야 소련 정부(흐루시초프 시절)는 그동안 부인했던 조르게의 실체를 인정하고 ‘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하며 그를 기렸다. 
 
유동열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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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7>
美 핵 개발 프로젝트 소련에 넘긴 ‘클라우스 폭스’
 
 
1949년 8월29일 카자흐스탄의 사막지대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에 소재한 소련의 비밀 핵 실험장에서 거대한 굉음·화구(Fireball)와 함께 버섯 모양의 불기둥이 하늘을 덮었다. 소련의 첫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미국과 서방세계는 원자폭탄 후발 주자인 소련이 불과 4년 만에 미국을 따라잡은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면서 미국 등 서방 정보기관들은 내부에 스파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됐고, 이를 추적 끝에 한 달 뒤인 그해 9월 클라우스 푹스를 소련에 핵 개발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했다.
 
클라우스 푹스(Emil Klaus Fuchs·1911~1989)는 미국의 핵 관련 정보를 소련에 제공한 스파이다. 푹스는 1911년 독일에서 루터교 성직자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신학 교수로 있던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한 후 독일 사민당(SPD)에 가입했다가 1932년 독일공산당(KPD)에 입당한 사실에서 보듯이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독일 국적자였던 그는 나치가 집권하자 1933년 영국으로 이주했고, 에든버러대학에서 양자역학을 전공하여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적국(독일) 인사라는 이유로 맨섬과 캐나다에 억류되었다가 1941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영국의 원자폭탄 프로젝트 ‘튜브 앨로이스(Tube Alloys)’에 참여하게 된다. 영국의 방첩기관인 MI5(SS·Security Service)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41년 말 자진해서 소련군 정보국(GRU)의 스파이가 되었고 암호명 ‘레스트’(REST)로 활동하고 있었다. 푹스는 후에 “나는 러시아의 정책을 완전히 신뢰했다. 그리고 서방 연합군이 고의적으로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허용했다고 믿었다. 따라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고 회고했다.
 
▲ 클라우스 푹스는 미국 핵관련 정보를 소련에 제공한 스파이 혐의로 1950년 2월 체포돼 14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9년 가석방됐다. 유튜브 캡처
  
1943년 12월 푹스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비밀사업인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를 지원하도록 차출된 영국 과학자의 일원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처음에는 콜롬비아대학에서 ‘기체 확산’에 관해 연구했다. 당연히 그는 이 연구의 내용을 뉴욕의 소련 요원에게 전달했다. 1944년 8월에는 로스알라모스(Los Alamos)의 비밀연구소로 옮겨 내파폭탄(내폭·內爆) 설계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했다. 당시 연구 책임자였던 한스 베테(Hans Bethe )는 푹스를 “내 부서에서 가장 귀중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푹스는 플루토늄 무기의 내파 장치와 설계·임계 질량·폭탄의 구성 요소와 치수 등의 핵심 정보를 통째로 소련에 전달했다.
 
MI5는 “폭스가 제공한 정보와 다른 출처에서 얻은 정보를 결합해 소련은 미국의 원자폭탄 설계를 효과적으로 모방하여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다른 출처’란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어도어 홀·로젠버그 부부·데이비드 그린글래스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소련에 협조하였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통해 소련은 1949년 8월29일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1946년 여름 푹스는 영국으로 돌아와 원자력 연구기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체포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소련에 비밀정보를 전달했다. 영국 MI5는 푹스를 스파이라고 의심했지만 그는 첫 심문에서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1941년부터 8년에 걸친 그의 스파이 행각은 1950년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이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VENONA) 작전’을 통해 드러났다.
 
푹스는 1950년 2월에 체포되어 14년 형을 선고받고 영국 국적을 박탈당했다. 당시 영국은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으나 일반 형사범에 해당하는 기밀준수 위반죄를 적용해 징역 14년을 선고했다. 미국의 소련 암호 해독작전인 ‘베노나 작전’이 노출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해독된 전문을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없어 푹스의 자백을 통해 스파이 활동의 실체를 밝힌 것이다.  당시 영국 정보기관 MI6의 미국 측 연락관 킴 필비(소련 포섭 간첩)는 양국의 암호해독 작업에 대해 소련에 알려 주었지만 소련은 이 정보를 활용하면 필비의 정체가 둘통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른 척했다.
 
푹스는 9년을 복역한 뒤 모범수로 인정받아 1959년 석방되어 동독으로 건너갔다. 그는 동독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원자력 기술연구소 책임자로 근무했다. 1979년에 칼 마르크스(Karl Marx) 훈장을 수여받았고 수많은 영예를 누리다가 동독 해체 전 해인 1988년 1월28일 사망했다. 
 
푹스는 수감 당시 “원자 연구에 대한 지식은 어느 한 국가의 사유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인류의 이익을 위해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한다”며 자신의 간첩 활동을 정당화했다. 푹스는 저명한 물리과학자이지만 스파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소련에 빼돌린 정보가 인류의 역사를 바꿀 만큼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동열  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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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8>
시리아 국방차관까지 오른 이스라엘 요원 ‘엘리 코헨’
 
1965년 5월18일 새벽 3시35분 시리아 다마스커스 중심가에 있는 ‘마르제 광장’(Al Marjeh Square·순교자의 광장)에 모인 수만여 명의 분노한 군중은 카밀 아민 타베스(Kamil Amin Tabeeth) 전 국방부 차관의 교수형을 지켜봤다. 교수형을 당한 당사자는 바로 이스라엘 비밀정보부 모사드(Mossad) 소속의 전설적 스파이 엘리 코헨(Eli Cohen)이었다. 시리아 국영TV에서 이를 생중계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와 그의 가족도 오열 속에 이를 지켜봤다.
 
엘리 코헨(19241965)의 본명은 엘리야후 벤 샤울 코헨(Eliahu ben Shaoul Cohen)으로 1924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시리아 알레포에서 이집트로 이주해 온 유대인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이듬해 코헨의 부모와 형제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당시 코헨은 카이로의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학업을 마치기로 결정해 이집트에 잔류했다. 그러나 실제는 코헨이 이스라엘 정보망원으로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해외 이주와 시오니즘(유대민족국가 건설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과 1955년 체포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고, 1956년 수에즈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는 유대인 추방 정책을 전개했고 코헨도 이스라엘로 귀환했다.
 
1957년 코헨은 이스라엘 군 정보국인 아만(Aman·당시 188부대로 호칭)에 발탁되었다. 아랍인 특징이 있는 외모와 아랍어·프랑스어·히브리어에 대한 언어 능력 덕분에 코헨은 이스라엘 군 정보국의 방첩 분석업무에 종사했다. 이후 모사드(Mossad)에 두 번 지원했으나 탈락하여 잠시 보험회사를 다니다가 1960년 결국 모사드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 엘리 코헨(왼쪽)과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더 스파이’의 한 장면. 넷플릭스
 
코헨은 1년간의 훈련과 현장 시험 등을 통과하여 시리아 정치군 엘리트층에 침투할 현장 요원으로 임용됐다. 1961년 2월 코헨은 카밀 아민 타베스로 신분을 세탁하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침투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대규모 아랍 공동체와 시리아 난민의 주요 인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타베스란 이름으로 위장한 코헨은 현지에서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아 장사를 해 큰돈을 번 부유한 사업가로 고국 시리아로 돌아가 이스라엘에 대항하고자 하는 꿈을 가진 ‘시리아 이민자’로 행세했다. 여기서 1년을 보내며 많은 아랍계 정치인과 외교관과의 교류를 통해 사교계 인사로 명성을 쌓았다. 당시 그가 교류한 인사 중에는 아랍 세계 잡지 편집장인 압델 라티프 하산(Abdel Latif Hassan)과 아르헨티나 주재 시리아 대사관 무관이며 훗날 시리아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된 아민 엘 하페즈(Amin el-Hafez) 등이 있다. 이들을 통해 코헨은 시리아 입국을 위한 추천서를 받는 데 성공한다.
 
 
1962년 아르헨티나를 떠나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잠시 귀국해 시리아 침투 계획을 완료한 다음 제노바와 베이루트를 경유해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이주했다. 코헨은 아르헨티나에서 구축한 인맥을 활용해 바트당 지도부의 구성원들과 교류했고 시리아 국영방송의 대(對)남미 지역 방송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군 장성과 장교 및 권력층과 교류하며 막대한 정치자금을 풀고 미인계 공작을 벌였다. 그는 아르헨티나 체류 시절 인연을 맺은 하페즈 알 아사드 장군이 대통령 격인 군사평의회 의장이 되자 이를 배경으로 고위 군부 인사·당 간부들과 인연을 쌓는다. 자신의 아파트에 고위 인사와 상류사회 미인들을 불러들여 파티 장소를 제공했다. 집권 바트당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그 인연으로 당에서는 그를 국방부 차관으로 추천했다.
 
코헨은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시리아의 주요 핵심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64년에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물 공급원인 긴네렛 호수를 차단하려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자 코헨은 이를 이스라엘에 알렸고 이스라엘 공군이 관련 장비와 시설을 폭격하여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이스라엘 남서부에 있는 골단고원의 군사시설은 이스라엘에 직접적 위협이 되었다. 코헨은 민간인 신분으로 골단고원의 군사보안시설을 세 차례나 방문하여 부대 배치 현황과 무기체계 등을 파악해 고스란히 이스라엘에 알렸다. 동시에 그는 군인들을 태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요새 근처에 유칼립투스를 심을 것을 제안하여 시리아 벙커가 눈에 띄게 되었다. 이것은 1967년 이른바 6일 전쟁 시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여기에 코헨은 탱크 트랩 위치·시리아 조종사 명단·다양한 무기 스케치 등 핵심 정보를 입수하여 제공했다.
 
시리아 방첩 당국은 연이어 핵심 정보가 누설된 것에 의심을 갖고 무선 전파를 추적했으나 실패했고, 소련 방탐 당국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로 전송되는 전파의 발송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결국 1965년 1월24일 코헨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체포됐다. 당시 시리아 당국은 권력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지위에까지 오른 코헨이 이스라엘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코헨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해 5월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코헨 체포 이후 이스라엘은 막대한 자금 제공과 함께 억류하고 있는 시리아 스파이 10명과 교환하자는 등의 제안을 했으나 실패했다. 코헨 사망 40주기를 맞아 아리엘 샤론 당시 총리는 “혼자 사자굴에 들어가 전설이 된 투사”라고 그를 평가했다. 2019년 넷플릭스는 코헨을 소재로 ‘더 스파이(The Spy)’라는 제목으로 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했다. 
 
유동열 20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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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9>
KGB 미남계에 넘어간 ‘노르웨이 총리 부인’ 베르나

 

1993년 옛 소련의 비밀정보기관인 국가안보위원회(KGB) 간부였던 두벤스키(Bogdan Dubensky) 장군은 1945년부터 1965년까지 세 번이나 노르웨이 총리를 역임한 에이나르 게르하르센(Einar Gerhardsen·1897~1987)의 부인인 베르나(Werna)가 KGB에 의해 포섭된 스파이였다고 폭로했다. 
 
1997년 미국의 군사·정보 전문가 노먼 폴마와 토머스 앨런은 영국에서 ‘스파이 백과사전’(Spy Book: Encyclopedia of Espionage, 1997)이란 저서를 발간했다. 이들은 KGB의 소장 파일을 추적하여 여러 사례 중 하나로 베르나의 스파이 활동을 책에 상세히 소개했다.
 
당시 KGB의 비밀 공작활동은 러시아 국립현대사기록보관소(RGANI·Russian State Archive of Recent History)에 소장되어 있는데, 게르하르센 총리와 그 부인 베르나에 관한 기록이 무려 721쪽에 달한다.
 
베르나의 풀네임은 ‘베르나 줄리 코렌 크리스티(Werna Julie Koren Christie·1912~1970)’이다. 소련에서는 그들 발음으로 ‘피오나’라고 한다. 베르나는 1912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1932년 남편과 결혼하면서 이름이 ‘베르나 줄리 게르하르센’이 되었다. 그녀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노동당 정치인으로 이념적 성향은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사회민주주의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상황은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정치적·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냉전 구도였다. 당시 소련은 게르하르센 노르웨이 총리가 나토에 가입했지만 적극적이 아니며 소련에도 적대적이지 않은 사실에 주목하고 먼저 게르하르센 총리 부인 베르나를 포섭하기 위한 유혹 공작에 나선다. 스파이 세계에서는 미남계 공작을 통상 ‘허니 팟’(honeypot·꿀덫)이라고 하는데 베르나가 여기에 말려든 것이다.
 
1954년 가을, 베르나가 노르웨이 당 청년단체인 프랑필킹겐(Franfylkingen)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다. 이때 그녀는 모스크바뿐 아니라 이란과 터키 국경에 있는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수도 예레반을 방문했다. KGB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예브게니 벨야코프(Yevgeny Belyakov)라는 젊고 잘생긴 요원을 청년단체와 베르나의 접대에 투입시켰다. 벨야코프는 자신의 집으로 위장한 KGB 안가로 베르나를 초대해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는 도청 장치 및 적외선 폐쇄회로 TV(CCTV)가 설치되었고 그들이 벌이는 애정 행각이 고스란히 녹화되었다. 베르나는 소련에서 귀국한 이후에도 벨야코프에 대한 연정으로 잠을 못 이루었다. 당시 그녀는 세 자녀의 어머니였으나 게르하르센 총리와 나이가 15살이나 차이 났다.
 
▲ 노르웨이 총리 부인 베르나(왼쪽)와 소련 KGB 요원 예브게니 벨야코프. 러시아 국립현대사기록보관소(RGANI) 소장 KGB 파일. 필자 제공
 
베르나는 남편을 설득해 1955년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당연히 그녀는 벨야코프와 재회했다. 게르하르센 총리는 당시 나토 회원 국가 중 소련을 방문한 최초의 국가 지도자였다. KGB의 베르나 공작 코드명는 얀(Yan)이었다. KGB는 ‘얀’ 공작을 위해 요원 벨야코프를 아예 노르웨이 주재 소련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했다. 베르나와 벨야코프는 ‘친밀한 접촉’을 이어 갔다. 그 결과 노르웨이의 나토에 대한 역할과 지위·유엔에서의 역할·국회의 권력구조 변화·노르웨이의 정치 상황 및 유럽 관련국 정보들이 줄줄이 소련으로 건너갔다. 이들의 애정 행각을 찍은 사진 등이 KGB 비밀 문서보관소에 차곡차곡 보관되었음은 물론이다.
 
1960년 5월1일 소련 상공에서 미국의 정찰기 U2기가 격추된 사건으로 미국과 소련 간에 긴장이 격화되었을 때 게르하르센 노르웨이 총리가 역할을 해 양국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베르나와 벨야코프의 관계는 3년 만에 KGB가 벨야코프를 모스크바로 소환하면서 막을 내렸다. 벨야코프의 지나친 음주벽으로 보안 누설을 염려한 조치였다.
 
베르나는 1970년 57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KGB 두벤스키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KGB는 본부 청사 비밀장소에 이례적으로 베르나의 빈소를 설치하여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이 사실만 보아도 베르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베르나의 스파이 활동은 그녀가 죽은 지 23년 만에 KGB 간부이자 ‘얀’ 공작의 지휘자였던 두벤스키 장군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이 증언은 러시아 국립현대사기록보관소에 소장된 기밀 해제 KGB 비밀파일로 확인할 수 있다. 노르웨이 국영방송인 NRK는 게르하르센 총리의 장남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해 관련 기록을 열람했다. 비밀에 묻혀 있던 베르나의 스파이 활동이 역사의 장으로 나온 것이다. 베르나의 사례는 스파이 세계에서 비밀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었다. 
유동열  202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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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0>
87세에 노출된 영국의 KGB 요원
 
 
1999년 9월11일 토요일, 영국 런던 남동부에 위치한 벡슬리히스(Bexleyheath)의 한 주택 정원에서 87세의 할머니가 수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거의 40년 동안 소련의 스파이로 일해 왔음을 당당히 인정해 영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기자들이 그녀의 집으로 몰려든 것은 당일 아침 영국의 최대 일간지인 타임즈(The Times) 1면에 소련 스파이의 정체를 폭로한 기사 ‘미트로킨 아카이브’(The Mitrokhin Archive)에 그녀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파이 활동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거듭된 질문에 “같은 상황이 된다면 나는 같은 일을 다시 할 것이다”고 답했다.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반역자’라고 외치며 분노했다.
 
이 87세 할머니가 바로 멜리타 노우드(Melita Stedman Norwood·19122005)이다. 그녀는 1912년 영국 남부 해양도시인 본머스에서 라트비아 출신 제본업자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결혼 전 본명은 멜리타 시르니스였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그녀는 1930년 사우샘프턴 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가서 반파시스트 활동에 참여했다.
 
▲ 자신의 스파이 활동을 인정하는 멜리타 노우드. 필자 제공
  
1932년 영국으로 돌아온 노우드는 좌파 정당인 독립노동당(ILP)에 가입했고, 영국비철금속협회(BNFMRA·British Non-Ferrous Metals Research Association)에서 비서로 근무한다. 국가공무원 신분이었다. 당시 이 기관은 원자폭탄 설계의 핵심기술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1935년 노우드는 화학교사이자 공산당원인 힐러리 누스바움과 결혼했다. 이후 영국공산당(CPGB·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에 비밀당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당시 그녀는 독일 공산당원이자 소련 스파이로 포섭된 앤드류 로스타인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추천으로 소련 정보기관인 NKVD(KGB의 전신)의 정보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에 정식 요원이 되었다. 그녀의 암호명은 ‘홀라(HOLA)’였다. 그녀는 소련에 영국의 핵개발 정보를 지속적으로 넘겨 왔다.
 
1943년 노우드는 영국의 원자폭탄 비밀 프로젝트 ‘Tube Alloys(튜브 합금)’에 참여했던 BNFMRA의 이사인 베일리(G.L.Bailey)의 보좌역을 맡았다. 그녀는 베일리가 사무실을 비울 때면 몰래 들어가 금고를 열고 안에 있는 비밀문서를 촬영하여 KGB 런던 요원에게 넘겼다. 1945년 3월 BNFMRA가 ‘Tube Alloys’ 계약을 따내자 노우드는 고온에서 우라늄 금속의 가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에 기여했다. 그녀는 1967년에 영국의 무기 제조에 대한 광범위한 과학·기술 및 기타 정보를 수집·제공할 코드명 ‘헌트(Hunt)’라는 새로운 스파이를 교육시켜 KGB에 알선하기도 했다.
  
▲ 20대 시절의 멜리타 노우드.
노우드의 스파이 활동은 1972년 60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9년 노우드 부부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소련 정부는 그녀에게 비밀리에 ‘붉은깃발 훈장’을 수여했다. 당시  노우드는 거액의 금전적 보상에 대해 자신의 활동은 신념에 의한 것이지 돈 때문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KGB 파일엔 “암호명 ‘홀라’가 헌신적이고 신뢰할 수 있도록 훈련된 가장 중요한 요원”으로 기록되었다.
 
 
2000년 영국 정보·보안위원회(ISC: Intelligence and Security Committee)의 ‘미트로킨 조사보고서’(The Mitrokhin Inquiry Report)에 의하면, 영국 보안부(MI5)는 거듭되는 핵 정보 누설로 추적에 나섰고 1945년 노우드도 처음으로 조사를 받았다. MI5는 그녀가 공산주의자이며 핵 기밀 누설에 관여했을 것이라 의심했지만 이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부족해 사법처리를 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이후 그녀를 국가기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1949년·1951년·1962년에 심사가 거부되었다. MI5는 1965년 노우드의 간첩행위에 대한 추가첩보를 입수했다. 조사 결과 노우드가 1940년대 스파이였다는 상당한 의혹이 있었으나 이 역시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노우드의 정체가 드러난 계기는 1992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 요원 바실리 미트로킨(Vasili Mitrokhin)이 제공한 막대한 분량의 KGB 공작파일이었다. 영국인 스파이 명단에 ‘홀라(Hola)’라는 요원의 이름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노우드라는 사실은 수년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정밀 분석한 결과 밝혀졌다. 문제는 미트로킨이 자필로 기록한 KGB 파일과 노우드의 자백에도 50년 전의 스파이 활동을 하나씩 찾아 기소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영국 사법당국의 고뇌였다. 
 
결국 영국 정부는 87세의 은퇴한 스파이 노우드를 불기소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을 위해 40년간 활동한 가장 오래된 스파이인 멜리타 노우드는 7년간 더 자유롭게 살다가 2005년 94세를 일기로 암과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민주주의 체제의 멍청한(?) 사법시스템이 반역을 야기시킨다는 분노한 영국 국민의 비판이 꼭 들어맞는 사례들이 최근 한국의 간첩 사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유동열 입력 2024-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