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1>
마타하리 뺨친 미인계 英첩보원 ‘암호명 신시아’

세계 첩보사에서 미인계하면 단연코 제1차 세계대전 중 활약한 마타하리(Mata Hari·1876~1917)를 손꼽을 것이다. 그러나 마타하리보다 훨씬 탁월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여성 스파이가 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스파이로 활약했던 암호명 ‘신시아(Cynthia·달의 여신)’이다.
신시아의 본명은 에이미 엘리자베스 베티 소프(Amy Elizabeth Betty Thorpe·1910~1963)다. 그녀는 1910년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해병대 장교인 아버지와 주 상원의원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해외 근무로 쿠바 관타모·프랑스 등에 살았는데 그 덕에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1923년 아버지가 해병대 대령으로 퇴역한 이후 변호사 개업을 위해 워싱턴 D.C.에 정착했다. 그녀는 1928년 미네소타주의 여자대학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워싱턴 D.C.에서 딸을 각국의 외교관들이 자주 참석하는 파티에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여기서 미모와 세련된 언행으로 인기를 끌며 여러 명의 외교관들과 친교를 맺고 연애도 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주미 이탈리아 대사관 해군무관이었던 알베르토 라이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많은 외교관들의 구애를 물리치고 19살이나 연상인 미국 주재 영국 대사관의 참사관인 아서 팩(Arthur Pack)과 결혼했다.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는데 그 아이가 팩의 아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1931년엔 칠레, 1935년엔 스페인 등에서 살았다. 결혼 후 남편에게 만족을 못한 그녀는 자신만의 출구를 찾았는데 이는 짜릿한 흥분과 기쁨을 안겨 준다고 생각한 외도와 스파이 활동이었다. 스페인 주재 영국 대사관에 있는 남편의 동료들을 통해 인연을 맺은 그녀는 성직자와 바람을 피웠다. 프랑코 군대의 지도자들을 탈출하도록 지원했고 적십자 의료용품을 프랑코 군대에 제공했다.
1937년 남편이 폴란드 대사관에 근무했을 때 그녀는 영국 정보기관인 MI6(비밀정보국)의 바르샤바 주재 지부장에 접근하여 스파이 업무를 자청한다. 그녀는 당시 탁월한 첩보활동을 전개했는데 대표적 성과가 폴란드 외무장관의 보좌관인 요셉 벡 대령을 미인계로 포섭해 그를 통해 폴란드가 작업 중이던 독일의 암호해독 프로그램(Enigma)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는 영국이 히틀러 나치 정권의 행보를 감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39년 그녀는 남편을 따라 다시 칠레로 갔으나 파경을 맞았고 이혼하게 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영국은 1940년 MI6 소속의 영국안보조정국(BSC·MI6의 미국 비밀지부)을 신설했다. BSC의 수장인 윌리엄 스티븐슨은 그녀의 활약상을 주목하고 그녀를 ‘신시아’라는 암호명으로 워싱턴 D.C.에 배치했다.
그녀는 언론사 기자로 가장해 주미 이탈리아대사관 군사정보국장으로 나와 있던 알베르토 라이스 제독과 재회했다. 라이스는 그녀가 10대 후반에 교류했던 이탈리아 무관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빠져 있던 라이스를 통해 암호담당관을 포섭해 ‘이탈리아 해군 암호문’을 입수했다. 당시 지중해에서 절대적 열세였던 영국 해군은 암호문 해독을 통해 이탈리아 해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와 같은 활약은 1941년 3월 마타판곳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영국이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1942년부터 신시아는 영국 BSC 요원으로 미국 OSS(전략정보국·CIA의 전신)와의 합동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녀의 임무는 프랑스 비시정권(친독 성향의 허수아비 정권)의 암호문을 입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주미 프랑스대사관의 대사에게 접근했으나 암호문 입수에 실패하고, 언론담당관인 샤를 브루세(Charles Brousse·후에 신시아와 재혼)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1942년 6월 자정 그녀는 브루세가 이미 돈으로 출입 협조를 구해 놓은 대사관 경비원의 묵인으로 같이 대사관에 들어가 암호문을 보관하고 있는 금고사무실에 접근해 몰래 창문을 열어 놓고 OSS의 전문요원이 들어와 금고를 열어 암호책을 빼내 근처 비밀아지트에서 촬영하고 새벽 6시 다시 대사관 금고로 되돌려 놓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작전으로 연합국은 독일과 연합한 프랑스 비시정권의 군사전문을 해독해 대응했고,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BSC의 수장 스티븐슨은 “신시아가 연합군 1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브루세와 1944년 재혼해 196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남부의 카스텔누에 있는 성에서 살았다. 그녀는 옛 동료들의 권고로 자신의 회고록을 써 죽기 직전에 원고를 완성했으나 결국 출판하지 못했다.
이후 1966년 그녀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코드명인 ‘신시아’라는 제목으로 전기가 출판되었다. 그녀가 사망하자 스티븐슨은 1963년 12월20일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를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위대한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신시아의 활약상은 마타하리를 능가하는 미인계 스파이의 전설로 남았다.
유동열 202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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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2>
中 미인계에 넘어가 종신형 받은 대만 장성 뤄센저(羅賢哲)
21일 대만(Taiwan·중화민국) 중앙통신사는 국방부가 전군에 대한 방첩 교육과 보안 조사 및 국가안보 합동방어 메커니즘을 통해 중국 공산당의 간첩 활동을 사전에 탐지했고 이에 안정적 효과를 거뒀다고 보도했다.
실제 올 1월4일 퇴역 해군 소장 샤푸샹(小福祥)과 전 입법위원 뤄즈밍(羅志明)이 중국 공산당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1월10일에는 타이베이 지방법원이 중국 국가안전부에 포섭되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기소된 퇴역 공군 소장 첸야오동(錢耀棟)과 퇴역 중령 웨이셴이(魏先儀)에게 각각 징역 1년 10개월을 선고하고 대만 달러 30만 달러(1262만4000원)와 60만 달러(2524만8000원)를 국고에 납부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심지어 2023년 현역 육군 보병훈련부 주임 샹딘(香姻)이 포섭되어 군복을 입고 중국 공산당에 투항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이 공개되어 대만 사회가 충격에 빠진 적도 있었다. 2021년 7월에는 대만 당국이 장저핑(張哲平) 전 국방부 부부장(차관급)을 체포해 간첩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혀 언론이 ‘대만 사상 최대의 중국 간첩 사건’이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 다만 이 사건은 나중에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이 났다.
대만 국가안전보위부의 추산에 따르면 대만에는 중국 공산당 간첩 50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국가안보부의 스파이 활동에 사용되는 무기는 대표적으로 미인계·돈·협박 등이다.
중국은 대만 현역 장성들을 포섭하기 위해 퇴역 장성들을 활용하고 가족의 안위를 인질로 삼는 등 각종 협박을 일삼는다. 이번 호에서는 여러 사례 중 중국 국가안보부의 미인계 공작에 넘어가 각종 군사기밀을 유출하여 2011년 검거된 대만 현역 장성 뤄센저(羅賢哲) 사건을 소개한다.

뤄센저는 1959년 대만 타이둥현에서 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육군사관학교을 졸업하고 대령으로 제대했다. 뤼센저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신장교로 복무했다. 중령 때 제711통신작전 대대장과 육군본부 통신전자정보부 부단장을 역임했다. 2000년 대령으로 승진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태국 주재 대만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했다. 2005년 귀국해 국방부 국제정보부 부국장을 역임했고, 2008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사령부 통신전자정보처장으로 재직 중 2011년 간첩협의로 체포되었다.
뤄센저는 통신·정보·외교 등에 대한 전문성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포섭 대상이 되었다. 그가 포섭된 것은 태국에서 무관으로 근무할 때였다. 그는 2004년 한 파티에 갔다가 미모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중국 스파이였던 이 여성은 호주 여권을 가진 화교로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접근해 왔는데 결국 부적절한 성적 관계를 맺고 포섭되었다. 뤄센저는 미인계에 빠져 7년 동안 핵심 군사기밀을 누설했다.
그가 빼돌린 기밀은 태국 주재 중국대사관 제1서기로 위장해 나와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첩보공작부서) 린이순(林義舜) 소장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뤄센저는 심지어 린이순을 직접 만나가도 했다. 그리고 정보 제공 댓가로 미화로 1건당 10만~20만 달러(1억3407만 원~2억6810만 원)와 성(性)까지 챙겼다. 그는 대만으로 귀국 후에도 관광 명목으로 출국해 태국 등 동남아에서 중국 스파이를 만나 정보를 건넸다.
뤄센저가 중국에 넘긴 기밀에는 육군 전술지역 통신·전장 영상 데이터 관리 시스템·육군 지하 광섬유 통신 분포도 및 보성시스템(Bosheng System) 등이 있다. 여기서 보성시스템이란 미국이 대만에 판매한 통합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당시 중국군이 군사 통제 및 통근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시스템이었다.
뤄센저의 간첩 행위를 먼저 발견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대(對)중국 반탐 활동 중 태국 대사관에 외교관 신분으로 나와 있는 중국 연락부의 린이순 소장을 추적하다가 대만 무관인 뤄센저가 접촉하는 사실을 포착했다. 이들을 추적하여 양 당사자의 비밀계좌에 대한 금융거래 정보 등을 입수해 뤄센저의 간첩 활동 혐의를 일부 파악했다. 2010년 8월 뤄센저가 미국 하와이에 출장을 갔을 때 FBI는 뤄센저의 간첩 활동을 비밀리에 심문하고 위협하며 미국을 위해 이중간첩 역할을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은 뒤늦게 대만 당국에 뤼센저의 간첩 활동을 통보했다. 그러자 수사에 착수한 대만 당국은 2011년 1월 뤄센저를 간첩죄로 체포했고 2011년 7월 대만 고등군사법원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2012년 4월 대법원은 항소를 기각하고 종신형을 확정했다.
2013년 대만과 중국 정보기관은 포로로 잡힌 양국의 간첩을 교환하기 위해 비밀 협상을 했다, 당시 중국에서 뤄센저를 지명했으나 대만은 그를 석방하면 엄청난 소란과 분노가 일어날 것이며 제2·제3의 뤄센저가 나타날 것을 우려해 거부했다. 이로 인해 간첩 교환 협상이 결렬될 직전까지 갔으나 다른 간첩을 교환하며 마무리됐다. 이는 중국이 얼마나 뤄센저를 높이 평가하는지를 보여 준다. 대만 장성 뤄센저의 간첩 활동 사례는 중국의 대(對) 한국 공작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안전한가?
유동열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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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3>
中국민당 정부 농락한 일본 美女 장교 ‘난조 쿠모꼬’
1942년 4월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외국인 거주지)의 바이러먼(白樂門)이라는 클럽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밤인데도 선글라스를 쓴 그녀가 발을 땅에 내딛자마자 매복하고 있던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권총을 난사했다. 그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사망했다.
이 여성이 바로 중국에서 활동한 최초의 일본인 여성 스파이로 알려진 미나미츠쿠리 쿠모꼬(南造雲子)다. ‘난조 쿠모꼬’로 더 많이 불린다. 그녀의 활동에 대해 당시 일본 당국이 절대 보안을 유지한 탓에 일본에서는 거의 생소한 인물이며 중국을 통해 그녀의 존재가 일부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난조 쿠모꼬는 1909년 일본 본토가 아닌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南造次郞)가 상하이 소재 학교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어 교사는 위장 직업이고, 사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위장 스파이였다. 그녀는 13세 때 아버지의 지시로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에 있는 스파이 학교에 다녔다. 사격·승마·화장술·가무뿐 아니라 중국어·영어 등 외국어와 그 나라의 문화를 익혔다. 그녀는 일본의 전설적 스파이인 도이하라 켄지(土肥原賢二)로부터 특별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조 쿠모꼬는 4년 후 스파이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다렌(大連)의 일본 관동군 본부로 파견되어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에는 신분을 위장하고 난징(南京)에 있는 국민당 간부 전용 휴양소인 탕산온천여관(Tangshan Hot Spring Guest House)에서 봉사원으로 일했다. 이곳에서는 국민당 비밀군사회의가 자주 열렸다. 그녀는 20대 초반 젊은 나이의 미모에 노래·춤 및 세련된 태도로 국민당 간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바로 미인(美人)계 공작이 본격화되었다. 그녀는 국민당 고위 간부들을 유혹하여 중요한 군사정보를 수집했다. 그녀가 얻어 낸 정보는 일본군이 상해 등 중국에 침략했을 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난조 쿠모꼬의 최대 성과는 장개석(將介石) 국민당 최고군사령관의 핵심 비서인 황준(黃浚)을 포섭한 것이다. 황준은 그녀에게 매료되어 깊은 관계를 가진 후 손쉽게 포섭되었다, 어느 정도 친숙해지자 그녀는 황준에게 자신이 일본군 특무대 요원임을 밝히며 노골적으로 기밀정보 절취를 요구했고 그는 적극 협조했다. 나중에 황준의 아들까지 포섭해 일본군 특무대의 정보원 격으로 삼아 활용했다. 황준은 국민당 정부 입장에서 보면 더할 수 없는 반역자였다.
1937년 7월28일 국민당은 일본이 상하이에 대규모 공격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장개석 주관으로 비밀 군사회의를 열어 논의했다. 최종 회의에서는 일본군이 양쯔강 유역을 공격하기 전에 이 중 가장 좁은 수역에 장애물을 설치해 수로를 봉쇄하기로 결정했다. 이 작전은 일본 해군이 양쯔강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쯔강에서 일본 선박을 포위하고 전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이 누설됐고 일본군에 대한 작전은 무산되었다.
1937년 8월13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한 사건(일명 8.13사변) 전후에 난조 쿠모꼬는 황준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한 군사정보를 가지고 국민당을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상하이 전투에 대응해 국민당은 비밀군사회의를 소집했는데 회의록을 작성한 사람이 바로 황준이었다. 회의 내용이 고스란히 일본으로 넘어갔으니 일본군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2건의 장개석 암살 미수사건도 그녀의 정보에 의한 것이었다. 회의에서 장개석이 직접 상하이로 가서 전선을 시찰하겠다고 밝혔는데 황준이 이를 바로 그녀에게 알렸다. 일본은 장개석 암살을 위해 특별 작전계획을 세웠다.
다만 장개석이 다른 일정으로 시찰 계획을 변경해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빠진 채 원래 계획대로 난징에서 상하이로 가던 영국 대사의 차가 일본기의 공습으로 피격되었고 영국 대사는 중상을 입었다.
그해 8월30일 국민당은 난징 중앙군사학교 강당에서 중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장개석이 여기 참석해 연설할 예정이었다. 집회를 앞두고 괴한 두 명이 행사장에 차를 몰고 들어왔다. 다행히 장개석이 행사장에 입장하기 전이었다. 결국 괴한 2명은 사살됐는데 이들에게서 무성 권총과 폭탄이 발견됐다.
일련의 사건에 대해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고 내부에 스파이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은밀히 색출 작업을 전개했다. 여기에 기밀을 취급하고 있는 황준도 수사 선상에 올랐다. 결국 황준과 난조 쿠모꼬는 꼬리가 잡혀 체포되었다. 황준과 그의 아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난조 쿠모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난징 근처의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이후 교도관을 미모로 꾀어 탈출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난조 쿠모꼬는 상하이 주재 일본군 특무대 과장으로 부임한다. 그녀는 상하이의 영국과 프랑스의 조계지를 무대로 국민당의 방첩기구인 ‘군통’(軍統·국민당 군 조사통계국) 요원과 12개 조직을 와해시켰다. 이로 인해 군통에서는 암살조를 편성해 난조 쿠모꼬를 추적하게 된다.
결국 1942년 4월 그녀는 33세의 나이로 국민당 군통 요원들에게 암살당한다. 난조 쿠모꼬의 일본 측 기록은 거의 공개되고 있지 않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미인계 공작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를 농락한 일본군 고위 정보장교이다. 100여 년이 다 된 일본의 스파이 공작에 대해 끝까지 함구하고 있는 일본 당국의 기밀유지 정신에 감탄(?)할 따름이다.
유동열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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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4>
40년 이상 中간첩으로 암약한 CIA 간부 ‘친우타이’
1985년 11월22일 오후 미국 워싱턴 D.C. 알렉산드리아의 한 주택에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여기서 간첩 등 17가지 혐의로 긴급 체포된 사람은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간부이며 퇴직 후에도 CIA 자문역으로 활동해 온 친우타이(金無怠)이다. 미국 이름은 래리 우 타이 친(Larry Wu Tai Chin). 그는 미 육군과 CIA에 근무하면서 무려 40년 넘게 중국 공산당 스파이로 암약해 왔다.
친우타이(1922∼1986)는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1943년 푸져우(福州) 미군연락소 통역원으로 선발되었다. 이 무렵 친우타이는 중국 공산당 정보국에 포섭되어 관련 정보를 중공에 넘기고 있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옌칭(延慶)대학(현 베이징대)에 다녔다. 이후 상하이 유엔구호국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군부대 통역관 근무 경력을 인정받아 1948년 상하이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1949년 결혼한 후에는 홍콩 주재 미영사관에 파견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한국으로 파견되어 1년 동안 미 육군연락사무소(ALO)에서 포로로 잡힌 중공군에 대한 신문 과정에서 통역과 신문자료 번역을 담당했다. 이때 그는 고의로 오역을 함으로써 미군이 반격 기회를 놓치도록 했다. 또한 신문 과정에서 귀순 의사를 밝힌 수천 명 중국 포로의 신원 정보를 중공 측에 제공했다.

친우타이는 1952년 홍콩영사관으로 복귀해 미국 국무부(실제는 CIA 소속) FBIS(해외방송정보국)의 오키나와 지부에서 근무했다. 이곳에서 CIA는 중국 남부지역을 대상으로 방송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1965년에 친우타이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는 CIA 중국 분석가로 승진해 중요 비밀에 접근할 수 있었다.
초기에 CIA에서 그가 수행한 주 업무는 중국에서 나오는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정보)의 번역 업무 총괄이었다. 직책을 이용해 그는 당시 중국 내에서 암약한 CIA의 비밀공작원이나 현지 협조자들이 보내온 온갖 민감한 정보와 CIA에 포섭된 대만인들이 제공한 고급 정보 보고서 등을 쉽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는 휴가 때마다 홍콩으로 가서 공작관인 지창성을 접선하여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다. 정보 제공의 대가로는 거액의 현금과 값비싼 음식·미녀들과의 데이트 등이 제공되었다.
이후 그는 CIA 내 동아시아 정책 연구실 국장으로 승진하여 중국·대만·일본·한국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 국가에 대한 정보분석을 담당했다. 그리고 여기서 접한 핵심 기밀을 중국에 빼돌렸다. 1981년 7월 CIA에서 퇴직했고 CIA로부터 봉사메달을 받았다. 퇴직 후에도 그는 계약직인 CIA의 자문관으로 계속 일하며 관련 정보를 접했다.
친우타이의 스파이 행각이 포착된 것은 1982년 9월경이다. 당시 FBI 중국방첩국 책임자인 스미스(IC Smith)는 CIA로부터 미국 정보기관에 침투한 중국계 간첩에 대한 첩보를 받았다. 이 첩보의 원천은 중국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코드명 ‘플레인즈맨’이었다. 1983년 4월 미국 해외정보 감시법원은 FBI가 신청한 감시·추적·조사 권한을 승인받아 ‘독수리 발톱 작전’이라는 스파이 색출 공작에 본격 착수했다. 그 결과 친우타이가 중국에 몇 건의 비밀을 누설하는 증거를 포착했다.
결정적 단서는 1985년 중국공산당 국가안보부에서 미국 정보업무를 총괄하던 북미정보국 국장 지창성이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 나왔다. 그는 직접 친우타이를 포섭해 오랫동안 지도·감독하던 상급 공작관이었다. 그를 통해 CIA는 자기 조직에서 암약하던 친우타이의 실체를 파악했다. 또한 미국에서 암약하던 중국 핵심 스파이망을 파악해 와해시킬 수 있었다.
미국 의회는 지창성의 안전을 보호하고 그의 신원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 법안을 즉시 통과시켰다. 또한 FBI는 친타우타이의 암호명과 중국 국가안보국과의 통신 증거를 확보했다. CIA 아시아 지역 총책임자였던 친우타이가 40여 년간 중국 스파이로 암약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친우타이가 중국에 넘긴 수많은 정보 중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1960년대 CIA는 중국 국민당 출신 조종사를 활용해 U2 정찰기로 중국 본토를 정찰했는데 정찰 계획이 누설되어 번번이 중국에 의해 격추당했다. 1972년 미국과 중국의 수교 당시 중국 공산당 정부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의 대중 정책을 사전에 파악해 손바닥에 올려 놓고 협상을 했다. 친우타이는 1960년대 미국의 중국 정책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중국 공산당과 수교하려는 닉슨 대통령의 희망에 대한 정보 등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중국 공산당에 계속해서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미국·홍콩·토론토·마카오·베이징 등을 여러 차례 방문해 중국에 각종 비밀문서와 사진 등의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스파이 행위의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총 1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챙겼다. 그러고는 라스베이거스 등 카지노를 들락거리면서 도박으로 돈의 출처를 숨겼다. 1985년 11월22일 체포된 친우타이는 1986년 간첩 등 17개 혐의 모두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선고일(3월4일)을 10여 일 앞둔 2월21일 63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자살했다.
친우타이가 체포되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중국 공산당 외교부는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날조된 것이라며 친우타이의 존재를 부정했다. 2019년이 되어서야 중국 정부는 중국공산당 중앙문학사연구소의 기관지 ‘세기(世紀)’를 통해 친우타이가 ‘조국(중국)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하며 그의 업적을 인정했다. 그의 스파이 행각은 1997년 제프리 리첼슨이 저술한 ‘세기의 스파이’에 잘 기록되어 있다.
유동열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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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15>
25년간 美에 정보 제공한 蘇군정보부 ‘폴랴코프 장군’
2001년 6월24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완벽한 스파이의 죽음’이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25년간 미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소련 군정보국(GRU) 폴랴코프 장군의 활동을 소개하며 그를 기리는 내용이었다. 그는 다른 스파이들처럼 돈이나 미인계·협박 등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신념을 위해 미국에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드미트리 폴랴코프(Dmitri F. Polyakov)는 1921년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 우크라이나에서 회계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장교로 참전해 훈장을 받았다. 소련 최고의 군사 아카데미인 프룬제(Frunze) 군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군정보국(GRU) 요원으로 선발되어 정예 스파이 훈련과정을 이수했다.
1951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폴랴코프는 미국 뉴욕에 소재한 유엔본부에 있는 군사위원회에 소련 대표로 파견됐다. 외견상 외교관 신분이나 실제는 미국 내 소련 스파이들을 감시·관리하는 직책이었다. 이때 그는 서방세계의 풍요함과 자유를 경험했으나 조국에 대한 충성심엔 변함이 없었다. 1956년 유엔 근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소련의 핵심 스파이 거점인 독일 베를린에 배치되어 대(對)서독 스파이 활동을 지도·감독했다. 탁월한 활동을 인정받은 그는 1959년 38세의 나이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폴랴코프는 1959년 다시 유엔본부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됐다. 물론 주 임무는 관리하는 스파이들을 통해 미국 정보기관에 허위정보를 흘리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치열한 첩보전쟁을 전개했고 상대방 정보기관에 자국 간첩을 위장 귀순시키거나 이중간첩을 이용해 허위정보를 제보하여 상대방 정보기관을 기만·교란시키는 이른바 전향간첩·이중간첩 공작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는 1960년 초 자신을 감시하는 미 연방수사국(FBI) 방첩요원과 가벼운 인사를 했고, 그 후 외교관 파티장에서 만난 FBI 방첩요원과 접촉하면서 정보제공 의사를 밝혔다.

FBI는 폴랴코프에게 ‘탑햇(Tophat)’이란 코드명을 부여하고 비밀리에 그와 접선하며 핵심 정보를 수집했다. 폴랴코프 자신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반인륜적이고 폭압적인 공포정치가 지배하는 부패한 조국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며 단호히 자신의 신념을 표출했다. 결정적 계기는 있었다. 궁핍한 생활고에 더해 중병을 앓던 장남이 미국 병원 치료가 필요해 상부에 호소했으나 거부당했던 것이다. 아들이 결국 사망하면서 폴랴코프는 소련 공산체제의 모순을 절감하고 자신의 스파이 활동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폴랴코프가 유엔 근무를 마치고 복귀하자 FBI는 해외공작은 CIA의 관할권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관리 권한을 CIA에 이관했다. 그는 버마 랑군(1965~1969)과 인도 뉴델리(1973~1976·1979~1980)에서 GRU 지부장으로 근무했고 1974년 장군(소장)으로 진급했다. 폴랴코프는 CIA·FBI와 접촉하며 본국으로 소환될 때까지 핵심 정보를 계속 미국에 넘겼다.
1980년 소련은 돌연 폴랴코프를 소환했고 그는 결국 GRU에서 퇴직했다. 하지만 1986년 GRU에 체포됐다. 그가 체포된 것은 본지에 연재하고 있는
‘스파이 세계’ 제3회(2024.1.23.)에서 소개한 소련 간첩 CIA 간부 올드리치 에임즈(Aldrich Ames)의 제보 때문이었다. 에임즈는 당시 25명 이상의 소련 내 미국 스파이 명단을 소련에 넘겼다. 이 중 폴랴코프가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은 1980년 소환 때 이미 폴랴코프의 간첩 활동 사실을 파악하고도 6년 후에야 체포했다. 그 이유는 제보자인 CIA 반역자 에임즈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폴라코프는 1987년 11월27일 사형을 선고받고 1988년 67세의 나이로 처형됐다. 소련이 그의 체포 및 처형 사실을 극비에 부쳐 미국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의 모스크바 정상회담 때 양국에 수감된 스파이의 교환을 제안하며 폴랴코프의 인도를 요청했다. 그때 고르바초프는 “그가 이미 두 달 전에 처형됐다”고 말했다. 1990년 1월 소련 국영신문인 프라우다가 폴랴코프를 미국 간첩으로 체포했으며 국가반역죄로 처형했다고 발표하고서야 서방세계와 러시아 국민은 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폴랴코프는 1961년부터 미국에 25개의 파일 서랍에 해당하는 비밀을 제공했다. 그 내용은 소련을 위해 일하는 미군 스파이 명단, 중·소 관계 강화에 관한 정보,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 정보, 소련이 불량 국가들과 맺은 은밀한 군사거래 내역 등이다. 미국은 그의 정보를 바탕으로 소련의 인적정보(Humint)를 파악하고 색출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 비밀정보부(MI6) 요원으로 소련에 정보를 판 보사드의 적발이다. 폴랴코프의 정보로 미국은 25년간 19명의 소련 스파이와 이들과 협력한 50명의 외국인 및 1500명의 서방 협력자를 체포하거나 감시할 수 있었다.
CIA는 폴랴코프를 금전이 아닌 신념에 따라서 행동한 ‘존경할 만한 이중스파이’로 평가했다. 실제 그가 정보 제공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받은 것은 연간 3000달러 정도의 보수가 전부였으며 그것도 대부분 전동 공구·작업복·낚시 장비 및 산탄총 등의 현물로 전달됐다. 이는 CIA 반역자 에임즈가 1985년부터 KGB로부터 260만 달러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미국은 폴랴코프의 신변 보호를 위해 여러 차례 미국으로 공개 망명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했다. “나를 기다리지 말라. 나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이 일을 한다. 나는 러시아인으로 태어났고, 러시아인으로 죽을 것이다.”
유동열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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