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왔습니다] <16>
참고서는 없고 교과서만 있는 북한의 열악한 교육 환경

할머니가 다려 주시던 옥수수엿
겨울이 오면 얼음판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스케이트와 함께 스스로 만든 썰매를 타느라 손발이 시리고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없이 놀았다.
그런가 하면 연을 만들어 날리고 연싸움을 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 연줄이 끊어지면 연을 잡으러 건너편 마을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팽이도 스스로 깎아 돌렸는데, 팽이는 굵고 단단한 나무로 깎아야 윙윙 우는 소리도 크게 나고 팽이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밤이 제법 많이 달리는 굵은 밤나무 가지를 잘라다 하루 종일 낫으로 팽이를 깎기도 했다. 팽이를 깎으려고 밤나무 가지를 자르다가 마을 어른들에게 야단맞던 게 엊그제 일 같다.
날씨가 몹시 추운 날에는 도끼와 함께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 ‘등걸’을 해 오기도 했다. 등걸은 떡갈나무 뿌리를 일컫는 황해도 방언이다. 황해도에서는 땔감이 부족해 떡갈나무가 뿌리에서 1년 정도 자라면 가을에 낫으로 베어 화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겨울이면 항상 나뭇가지는 없고 뿌리만 앙상하게 땅 위에 솟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등걸이다. 등걸은 겨울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얼어 버리기 때문에 도끼로 힘있게 내리치면 쉽게 부러진다. 산에 가서 등걸을 한 지게 해 오면 할머님이 그것으로 불을 지펴 달콤한 옥수수엿을 다려 주셨다.
등걸은 화력이 강하고 오랫동안 불이 붙기 때문에 옥수수엿을 다리는 데 제격이다. 아직도 내가 등걸을 한 지게 짊어지고 집에 들어설 때 못내 대견해 하면서 그것으로 옥수수엿을 다려 주며 행복해 하시던 할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처럼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도 경험해 보았다. 물론 그 과정에 좀 다치기도 하고 위험한 적도 있었지만, 그 후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능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 어렸을 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문을 몹시 싫어했던 문제 학생
중학교 생활 기간에는 또한 여러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많았다. 나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고 인기도 그만하면 좋은 편이었지만, 선생님들에게는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공부하는 아이들을 충동질해서 수업에 빠지고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등 그리 환영받을 만한 학생이 못 되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문제 학생이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당시 1학년부터 한문을 가르쳤는데, 한문을 가르치는 이유는 역사 연구와 통일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한자 자체가 낯설었고 쓰는 것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았다. 사실 한자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에게 ‘한자는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린다’고 해야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한문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그 어려운 한자를 칠판에 가득 써 놓고 아이들에게 그것을 보고 그대로 쓰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런 한문 시간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한번은 연세 많은 한문 선생님에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한문을 공부하기 싫은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선생님,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쓰지도 않는데 무엇 때문에 한자를 배워야 합니까? 그 시간에 차라리 앞으로 꼭 필요한 다른 지식을 배우는 편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너는 내가 처음 한문 수업을 시작할 때 왜 한문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를 벌써 다 잊었어? 우리나라 역사 연구와 통일을 위해서 한문을 배워야 한다고 했잖아?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썼기 때문에 모든 역사 자료가 한자로 되어 있고, 특히 지금도 남조선에서는 신문이나 교과서 같은 데 한문을 쓰고 있단 말이야. 그래서 역사 연구를 위해서도 그렇고 통일을 한 다음 남조선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면 그들이 쓰는 한문을 알아야 하는 거야. 넌 지금 한문을 왜 배워야 하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쓰기 싫으니까 그런 거 아냐?”

▲ 2001년 6월22일 북한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김부자 혁명역사’ 과목 수업을 받고 있다. 북한은 2000년 10월 청소년들에 대한 사상교육 강화책의 일환으로 동 과목에 대한 학습 시간을 연간 60시간에서 120시간으로 확대했다. 연합뉴스
한마디로 나는 본전도 못 찾았다. 그런데 그토록 한문을 싫어했던 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한자를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남공작부서에서 일하게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공작원으로 소환된 후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갔을 때 중학교 시절 한문을 가르쳤던 선생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던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는 옛 성인들의 충고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음악에 대한 아쉬움
고등중학교 1학년 때는 당시 학교에 새로 생긴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과 클라리넷을 2개월가량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할머님께서 “왜 풍각쟁이가 되려고 하느냐”며 밴드부를 책임진 음악 선생님을 찾아가 “내 손자를 밴드부에서 빼 달라”며 한사코 못 하게 해 하는 수 없이 그만둔 적도 있다.
그 후에 하모니카와 대금 등 다른 악기를 좀 배우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때 악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 다른 건 몰라도 음악만큼은 좀 알아야 한다며 피아노학원에 보낸 적이 있다.
고등중학교 3학년 여름에는 군(郡)청년동맹에서 우리 학교가 토끼 기르기를 잘했다며 야영을 보내 주어 15일간 황해남도 도청소재지 해주시의 수양산 밑에 있는 도(道)야영소로 야영을 다녀오기도 했다. 야영이란 각 학교에서 모인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교육과 함께 등산도 하고 해수욕도 하고 오락도 하면서 보내는 것을 말한다. 잼버리와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해주시로 야영을 갈 때도 과산리에서 해주까지 40km 되는 거리를 걸어서 왕복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야영을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예전과 같이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협동농장에 가을걷이 지원도 나가고, 한편으로는 산에 올라 도토리도 따고 겨울철 난방용 나무를 베기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선생님 놀려 주다 걸린 아이
이런 가운데 고등중학교 3학년 시절 나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잊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해주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배치된 지 얼마 안 되는 처녀 선생님이 가르치는 지리 수업시간에 일이 발생한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온 그는 숙제 검사부터 했는데,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한 명씩 이름을 물어보고 기록했다. 그런데 숙제를 안 해 온 아이들 가운데 한 친구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지리 선생님은 누구에게 할 것 없이 그 친구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지리 선생님은 20대 초반으로 무용수들처럼 가슴을 앞으로 유난히 내밀고 다녀 아이들이 ‘오리가슴’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받지도 않고 무시해 버리는 건방진 행동까지 해서 인기가 없었다.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도 첫 수업 시간부터 기선을 잡으려고 괜히 아이들을 야단치고 말과 행동도 거칠게 하고 숙제도 일부러 많이 내주어 아이들의 불평이 굉장했다.
그래서 나는 한번 골탕 먹어 보라는 심정으로 지리 선생님의 등 뒤에서 그 친구의 이름이 아닌 그의 별명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지리 선생님은 자신이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숙제 검사를 곧바로 중단하고 “방금 별명을 부른 학생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아이들은 나이가 어려 순진한 때였으므로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별명을 큰 소리로 외친 나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를 눈치 챈 지리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네가 방금 별명을 불렀지?”
“네, 제가 그랬습니다.”
“일어나서 교실 앞으로 나와.”
그런데 당시 나에게는 옆에 앉았던 친구가 집에서 가져다준 고구마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고구마를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나가면 불쑥 튀어나와 망신스럽다는 생각에 그것을 꺼내 친구에게 맡겨 두고 교실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지리 선생님이 언제 보았는지 친구에게 다가가 고구마를 빼앗은 다음 교실 앞에 서 있는 내 주머니에 고구마를 넣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고구마가 들어간 내 상의 주머니가 불룩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주머니가 불룩한 모양으로 아이들 앞에 서 있자니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참으로 그 당시에 느낀 모멸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도였다. 아마도 당시 내가 명색이 학교 소년단 조직의 총책임자인 소년단위원장(전교회장)이었기 때문에 더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나는 2학년 때까지 우리 반의 소년단 조직을 책임진 분단위원장이었고, 고등중학교 3학년은 소년단 가운데 가장 상급 학년이어서 3학년 학생 가운데 학교 소년단위원장을 선출하는데 내가 거기에 뽑힌 것이다.
그런데 수업시간이 절반가량 지나갔는데도 지리 선생님은 나를 그냥 그 자리에 세워 두었다. 그러다가는 틀림없이 수업이 끝난 다음 교사들이 모두 모이는 교무실로 끌고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학교의 모든 선생님에게 망신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기가 막혔다.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그랬겠지만 정말 더 이상의 치욕과 수치는 없을 것 같았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아버지와 엄마가 유일하게 저와 동생에게 시키셨던 사교육은 태권도도장과 피아노학원이었어요. 그 덕분에 좋았던 점은 가족여행을 정말 많이 다닐 수 있었고 집에서든 밖에서든 놀고 싶을 때마다 놀 수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아쉬웠던 점은 학원으로 다 가 버린 친구들 탓에 레고나 건담을 가지고 놀거나 아니면 동생이나 사촌누나들이 그나마 가장 오래동안 같이 놀아 줄 친구였다는 것….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 차 타고 학원에 다녀 보는 게 소원일 때도 있었어요. 그때 정말 궁금했던 것이, 아버지는 저와 동생에게 다른 거 말고 왜 태권도와 피아노 두 가지만 배우라 하셨을까 하는 거였어요.
아버지: 내가 한국에 살면서 보니까 여기는 자기가 공부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어. 내가 북한에서 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밖에 없었거든. 참고서는 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북한에는 ‘학원’이나 ‘과외’라는 말조차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를 했잖아.
그래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학원에 가야만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머리가 되면 굳이 학원에 다니지 않더라도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교재와 참고서만 가지고도 충분히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 엄마에게 국어나 수학·영어 등을 가르치는 학원에는 보내지 말자고 했던 거야.
다만, 너희들을 태권도 도장에 보낸 것은 남자가 최소한 자신은 물론 여자친구 정도는 보호해줄 수 있는 능력(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피아노학원의 경우에는 내가 살아오면서 보니까 음악을 알면 보다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음악을 배우라고 보냈던 거야.
물론 내가 어렸을 때 악기도 다루고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할머니 반대로 할 수 없었던 데다, 살아오면서 ‘음악을 좀 더 알았으면 삶이 더 풍족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피아노를 배우라고 한 것도 있었지.
김동식 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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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17>
北에선 안 쓰는 말 ‘사춘기’… 고약한 반항 성장통
‘사춘기’라는 것도 모른 채 시작된 반항
그래서 나는 그대로 망신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지리 선생님이 돌아서서 칠판에 글을 쓰는 사이에 몰래 주머니에 있던 고구마를 꺼내 교실의 제일 앞에 앉은 친구에게 무작정 넘겨주었다. 사춘기 반항의 시작이었다. 북한에는 ‘사춘기’라는 단어가 없다. 그만큼 청소년 교육에 관심도 없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고등중학교 3학년 때 처녀 선생님을 놀리는 등 반항 아닌 반항을 했던 것이 ‘사춘기 반항’이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 와서 살면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 고구마를 넘겨받은 친구는 자기 뒤에 앉은 친구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을 받은 친구는 세 번째 줄에 앉은 친구에게 또다시 건네주었다. 그런데 세 번째 줄에 앉은 친구가 후환이 두려웠던지 고구마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두 번째 줄에 앉은 친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자기 책상 다리와 교실 벽 사이의 공간에 고구마를 그냥 놓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수업을 이어 가던 지리 선생님은 한참 후에 비로소 내 주머니에서 고구마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나에게 고구마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답할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서 있자 화가 난 지리 선생님은 수업을 아예 중단하고 없어진 고구마를 찾기 시작했다. 제일 앞줄에 앉은 아이들부터 한 명씩 주머니와 책가방·책상 서랍을 뒤지고 검사가 끝난 순서대로 아이들을 모두 교실 앞에 세워 놓았다.
그러나 고구마가 책상 다리 옆에 놓여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세 번째 줄 아이들까지 검사하면서도 고구마를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수업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휴식시간까지 아이들을 붙잡아 놓고 이미 고구마가 있는 곳을 지나쳐 찾지도 못할 고구마를 진땀까지 흘려 가며 찾고 또 찾았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고구마를 찾지 못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지리 선생님은 나를 망신시키려다 반대로 자기가 아이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2교시였던 지리 수업이 끝나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업간체조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이 지리 선생님 때문에 체조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었다.
2교시가 끝나면 평소처럼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오리라고 생각한 담임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우리반이 서야 할 위치에 서서 기다리다가 아이들이 나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 명도 보이지 않자 교실로 들어왔다.
교실문을 열고 보니 절반가량의 아이들이 교실 앞에 나와 서 있고 나머지는 앉아 있는데, 지리 선생님은 무엇을 찾는지 아이들의 몸과 책가방·책상 서랍을 뒤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담임선생님은 화가 나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문을 쾅 닫았는데, 정신없이 가방을 뒤지던 지리 선생님은 ‘쾅’ 소리를 듣고서야 하던 행동을 멈추고 아이들을 그냥 세워둔 채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교실 문 밖에서 한참 동안 담임선생님과 대화를 했다. 아마도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 선생님 두 분이 교실로 들어오더니 지리 선생님은 교수안과 출석부 등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고 담임선생님만 남았다. 그때 이미 담임선생님의 얼굴색과 모습은 극도로 흥분되어 정상이 아니었다.

사랑의 매
중학교 1학년에 진학한 후부터 담임이었던 정연복 선생님은 20대 중반의 총각이었고 경력도 지리 선생님에 비하면 한참 선배인데, 갓 대학을 졸업한 후배에게 자기가 담당한 아이들이 잘못해서 지적받았으니 충분히 화가 날 만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엄청나게 화가 난 것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담임선생님은 교실 앞에 서 있던 아이들에게 자리에 돌아가 앉으라고 하더니 교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교실 뒤편 구석에는 친구들이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대금을 만든다며 잘라서 가져다 세워 놓았던 직경 5~6㎝, 길이 2.5m가량 되는 오동나무가 있었다. 그는 오동나무를 발로 밟아 절반으로 부러뜨린 다음 1m가 좀 더 되는 한쪽 부분을 가지고 교실 앞으로 다시 돌아와 제일 먼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바지를 걷어 올리라고 한 다음 오동나무로 내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이었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두 번째 만에 몽둥이가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또다시 남은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 내 종아리를 다시 내리쳤다. 처음 가격한 나무가 부러질 때까지만 해도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두 번째 굵은 몽둥이로 내리칠 때는 그만 참아내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사실 정연복 선생님은 내가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처음부터 우리 반을 담임했었는데, 1학년 가을에는 나무를 베다가 낫으로 무릎을 찍어 많은 피를 흘리고 걸을 수 없게 된 나를 업고 먼 길을 달려가 치료해 준 분이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나를 많이 사랑해 주고 아껴 주던 분이었고, 그래서 내가 무척 존경하고 따르던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당시 수학 과목을 가르쳤는데, 붓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등 다재다능한 분이었고 인정도 남달리 많은 분이었다. 그래서 매를 맞는 그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반감보다는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나를 매 맞게 만든 지리 선생님이 얄밉다는 생각이 더 컸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혼내는 것만으로는 쌓인 화를 풀기에 부족할 만큼 너무도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년단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있던 10여 명의 다른 아이들을 불러내 그들에게도 오동나무 세례를 안겼다. 그렇게 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반에서 조금이라도 책임을 맡은 아이들을 모두 불러내 그들에게도 왜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했느냐며 몽둥이 세례를 안겼다.
두 번째 몽둥이가 부러져 나갈 때까지 한참동안 화풀이를 하고 난 담임선생님은 나를 혼자 따로 불러내더니 학교로부터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멍든 종아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그토록 믿어 왔는데 어쩌면 그렇게 내 믿음을 저버릴 수 있어?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해도 말렸어냐 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담임선생님의 이 말씀에 나는 몽둥이로 맞은 것보다 더 큰 자책감을 느꼈다. 따라서 맞은 것이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담임선생님에게 너무도 죄송하다는 생각이 앞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선생님, 정말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계속되는 사춘기 반항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지리 과목 수업 시간만 되면 의도적으로 잠을 자거나 옆에 앉은 아이들과 떠들어 주위를 산만하게 해 수업에 지장을 주었다. 나중에는 아예 아이들을 끌고 나가 지리 수업에 불참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지리 선생님을 골탕먹이는 등 학생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까지 무지막지하게 했다.
사실 그래봐야 나만 손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당시 나이 어린 내 머릿속에는 오직 지리 선생님에 대한 나쁜 감정과 반발심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를 골탕먹일까 하는 못된 생각만 하고 있었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당시를 생각해 보면 굳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당시 나이가 어려 사고의 폭이 좁았던 내 수준과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충동적인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 선생님은 나를 좋게 봐 줄 수 없었고, 나는 나대로 지리 과목 노트 정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학기말이나 학년말에 과목마다 해당 과목 담당 선생님이 기말 시험 성적과 평소 학습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주는 최종 점수를 높게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른 과목은 모두 10점 만점을 받았는데 지리 과목만 낙제 점수인 4점 이하를 받을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자 내가 받은 지리 과목 성적에 대해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고 신경을 쓰는 사람은 담임선생님이었다. 그는 내가 말썽을 피울 때는 나를 불러 자기의 체면을 봐서라도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결과적으로 내 지리 과목 성적이 엉망으로 나오자 나에게 다른 아이들의 노트를 보고 노트 정리라도 제대로 해서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담임선생님의 요구를 거역할 수 없어 며칠 안에 지리 과목 노트 정리를 깔끔하게 해서 가져다 드렸는데, 그걸 가지고 지리 선생님에게 선처를 호소했는지 성적증에 기재되는 최종점수를 6점을 받아 낙제 점수를 겨우 면하게 되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어릴 적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공원에 나가 운동을 할 때면, 아버지는 거의 모든 스포츠에 대해 잘 알고 저희에게 심지어 규칙에 대한 것들도 직접 가르쳐 주셨던 기억이 나요. 특히 동생이 어린이야구부에 들었을 땐 함께 미국 메이저리그를 봐 가며 선수들의 이름이나 특징들, 포지션까지도 자세히 설명해 주실 때가 많았는데, 북한에서는 이런 스포츠를 접할 기회가 없지 않았나요?
아버지: 사실 내가 어렸을 때 북한에서 접하거나 본 스포츠는 육상과 축구·농구·배구·송구(핸드볼) 등 구기 종목과 배드민턴·테니스·유도·레슬링 등이 전부였어. 특히 당시 북한에는 정말 재미있는 야구는 물론 당구나 골프도 없었어. 심지어는 그런 종목이 있는지조차도 몰랐어. 그만큼 스포츠 분야에서는 후진국이었지.
그런데 내가 남한에 침투하기 전에 적구화교육(북한 사람을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받을 때 86아시안게임 관련 자료를 많이 봤는데, 스포츠 종목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어. 처음 접한 것이 야구였는데 내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했던 ‘볼치기’ 놀이와 비슷했는데, 경기룰을 하나도 모르니까 재미가 없더라고….
그런데 강사로부터 야구 룰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보니까 반대로 야구가 엄청 재미있는 거야. 그래서 당시 선동열·최동원·이만수·김성한 등 유명한 야구 선수들 이름까지 외우며 야구를 열심히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어. 또 한국에 정착해 살면서 박찬호가 나오는 미국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면서 야구를 더 즐기게 됐지.
결과적으로 야구나 당구·골프 등 북한에서 접하지 못했던 스포츠 종목의 경우 룰을 모르니까 보고 싶은 생각도, 재미도 없었는데 룰을 알고 보니까 그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너희들에게도 스포츠를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스포츠 종목과 그에 따르는 룰을 알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너희들이 자라면 스포츠를 보거나 즐길 텐데, 기왕이면 즐겁게 보고 즐기라고 스포츠 종목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룰을 알려 준 거야.
김동식 20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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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18>
사려 깊고 대범하셨던 할머니… 내 삶의 ‘참 스승’
할머니는 나의 스승
그런데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몽둥이로 한 대씩만 때렸는데 그때 맞은 친구 한 명이 부모님께 그 사실을 이야기해서 그 부모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군(郡)안전부(경찰서)에 찾아가 “학생들을 몽둥이로 때리는 것은 일제통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며 담임선생님을 강력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여러 학부모가 관련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담임선생님에 대한 비난이 더욱 고조되었다. 여기에다 담임선생님이 중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떠들며 법적으로 문제를 삼겠다는 안전부의 압력으로 담임선생님은 어깨가 축 늘어져서 다니다가 결국 1년 만에 교사직을 자진사퇴하고 자기 형이 살고 있던 개성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개성으로 가시기 전 어느 날, 할머니가 그 일을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집에 들어서자 아무 말씀도 없이 무작정 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셨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몽둥이에 맞은 자리가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때에는 이미 몽둥이에 맞아 생겼던 멍이 없어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여서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맞은 적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같은 동네에 사는 선생님으로부터 구체적으로 들어서 다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집에서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귀하게 키운 자식인데, 감히 누가 남의 귀한 자식에게 손찌검을 하느냐?”며 몹시 분해 하셨다. 그러면서 당장 법기관에 신고해서 문제삼겠다고 펄쩍 뛰셨다. 그때 마침 집에 들어와 계시던 아버지가 “저 녀석이 맞을 짓을 해서 선생님이 손을 댔지 아무려면 말 잘 듣는 아이에게 매를 들었겠느냐?”고 하시면서 말려서야 할머니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할머니는 담임선생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개성으로 이사간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식에게 매를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자식을 가르친 스승”이라고 하시며 북한에서는 귀한 손님들에게만 대접하는 떡을 손수 만드신 다음 담임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정성껏 대접하셨다. 정말 사려 깊고 대범하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스승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승이란 결코 대학을 나오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며, 또한 결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할 뿐 나의 가까운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가 중요한 까닭
담임선생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가신 것은 나에겐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 하나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선생님께서 교단을 떠나게 됐으니 그보다 더 큰 죄악은 없을 것 같았다. 당시에도 죄책감을 느꼈지만 아마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죄책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담임선생님이 떠나신 이후 나의 행동이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나는 담임선생님께서 떠나신 이후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른 과목 공부는 잘하면서도 지리 과목만큼은 마지못해 겨우 노트 정리나 해서 낙제 점수를 면하는 정도로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한반도 지리는 물론 세계 지리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결국은 나 혼자만 손해를 본 것이다.
그리고 학교 내에서 다른 선생님들에게는 만날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도 유독 지리 선생님에게만은 마주쳐도 인사를 하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거나 머리를 빳빳이 들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몰상식한’ 행동을 했다. 계속해서 그렇게 행동했더니 나중에는 지리 선생님도 화가 나서 이렇게 얘기했다.
“너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 본다. 앞으로 네가 커서 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보자.”

나도 이에 질세라 앞뒤 생각하지 않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지리 선생님이 저에게 잘되라고 해서 제가 특별히 잘될 것도 없고, 또 잘못되라고 빈다고 해서 제가 할 일을 못하거나 잘못될 것도 없으니 실컷 따라다니면서 보십시오.”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으로서 대단히 건방진 태도였는데, 그때 내게 무슨 배짱이 있고 생각이 있어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뒤에 휴가차 고향에 간 기회에 동창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때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친구들에게 지리 선생님의 근황을 물었더니 그는 내가 고향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고, 결혼 후에는 해주시에서 빵 장사를 하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아마도 그때 지리 선생님이 나에게 앞으로 얼마나 잘되는지 보자고 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더욱더 그가 보란 듯이 더 잘해야 되겠다는 오기가 발동되어 그 후에도 무슨 일에서든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지리 선생님과의 관계로 발생한 일은 그 후에 알게 모르게 나의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사춘기 시절 철 없는 행동에 대해 지금이라도 지리 선생님께 사과드리고 싶다.
그만큼 감수성이 풍부하고 신경이 예민한 청소년기, 사춘기에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학생들의 행동과 장래를 결정하는 데 참으로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삼봉약수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에 사로청(현재 청년동맹)에 가입한 나는 4학년에 올라가면서 대부분 5학년 학생들이 하는 학교사로청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사로청은 15~30세의 남녀 청년 가운데서 노동당원을 제외한 북한의 모든 청년이 가입하는 청년 조직이다.
중학교 3학년 후반기가 되면 사로청에 가입시키는데 소년단 조직처럼 반에는 초급단체, 학교에는 초급사로청위원회가 조직되어 각각 위원장을 선거한다. 그래서 반의 책임자는 초급단체위원장, 학교의 책임자는 학교사로청위원장(또는 초급사로청위원장)이라고 부른다.
그해 여름에 군(郡)사로청 주최로 관내 모든 학교 사로청·소년단 책임자들의 강습이 삼봉약수터에서 1주일간 진행되었다. 나도 우리 학교 10여 명의 사로청·소년단 간부들을 책임지고 여기에 참가했다. 강습은 약수가 나오는 산골짜기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면서 노래와 춤·운동경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캠핑 또는 교육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다. 강습 기간이 비록 길지 않았지만 인상에 깊이 남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가 여름이어서 땀띠가 생긴 아이들도 많았으나 3일가량 삼봉약수로 밥을 지어 먹고 아침저녁 약수물로 씻으니 거짓말처럼 땀띠가 없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설익은 밥을 먹어도, 잠을 잘 때 배를 내놓고 자도 배탈 나는 친구가 없었고 소화가 굉장히 잘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삼봉약수는 피부병과 위장염에 아주 특효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삼봉약수터에 위장병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요양원까지 생겨났다. 아울러 삼봉약수를 외국에까지 수출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북한에도 행복과 자유 그리고 인권과 같은 말들의 정의나 아니면 인문철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나요? 어려서부터 아버지는 세계지리나 서양철학부터 사상·물리나 화학 심지어 한국 역사까지 저희가 질문하는 대부분을 동생과 제가 잘 이해하게 설명을 해 주셔서 북한 교육과정에서도 그런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가 보다 생각했었거든요. 그리고 특히나 한국 역사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요.
아버지: 사실 북한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김씨 가문의 역사와 그들이 말한 내용을 ‘교시’ ‘말씀’이라며 가르치는 거야. 김씨 가문의 역사는 유치원과 소학교(초등학교)에서 한 번, 고등중학교에서 한 번, 대학에서 한 번, 이렇게 세 번을 반복에서 가르쳐. 그러니까 북한의 모든 주민은 김씨 일가 역사에 대해서는 전부 외우고 있어.
북한의 대학에서도 철학 과목을 가르치기는 하는데 주체사상에 대한 내용을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행복과 자유·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개념에 관한 이론은 거의 가르치지 않아.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인문학적으로 상당히 메마른 것이 사실이야.
남한이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가르치는 학문 가운데 북한에서만 가르치지 않는 과목이 있는데, 바로 정치학과 사회학이야. 정치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북한에서 정치가는 김씨 일가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 주민은 정치학을 배울 필요도 없고 배우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이야. 사회학은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나 병폐를 해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북한은 ‘인민이 주인인 살기 좋은 나라’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나 병폐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재미있는 것은 북한이 언론매체를 통해 사회적인 문제·부정적인 문제들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북한이 선전선동에서 내세우고 있는 소위 ‘긍정감화교양’(주민들에게 긍정적인 내용을 알려주어 그대로 따라 하도록 하는 것) 원칙 때문이야.
특히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말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북한은 한국 역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는 인민대중의 투쟁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바탕으로 과거 우리 선조들이 외세에 반대해 투쟁하거나 왕조 체제에 반대 또는 반발해 일으켰던 봉기나 폭동 위주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어. 이와 함께 ‘미국과 일본은 100여 년 전부터 조선을 침략해 왔다’며 반미·반일 교육을 강화하고 있어.
또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 500년 역사’에 대해서도 ‘왕의 아들이면 무조건 왕이 되는 세습 체제’였다며 상당히 비판적으로 가르쳐. 그런데 ‘조선은 혈통에 의해 왕권이 계승되는 세습 체제’라며 그토록 강력하게 비판했던 북한이 그대로 과거 조선의 역사를 답습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
그리고 6·25 전쟁의 경우에도 북한이 소련의 사주를 받아 남한을 공격함으로써 발생한 남침 전쟁인데, 반대로 미국과 남한이 먼저 일으킨 북침 전쟁이라고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어.
김동식 202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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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19>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 때문에 공작원 되다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는 지도원 말에 눈앞 캄캄해져4년간 금성정치군사대학서 공부한다는 말에 엄청난 충격
‘죽으려고 여기까지 왔나’…평범한 삶 대신 운명의 소용돌이로
천리길 답사
중학교 4학년 여름에는 우리 학교 아이들과 함께 ‘배움의 천리길’ 답사를 가게 되었다. 김일성이 12살 되던 1923년 겨울 중국 국경 지역인 임강에 살다가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배우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외가가 있던 평양 만경대 구역(당시는 평남 대동군) 칠골까지 왔었는데, 당시 걸어서 이동한 거리가 1000리(400㎞)가 된다고 하여 김정일이 ‘배움의 천리길’이라고 명명하고 1975년 처음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전체적인 노정과 매일 걷는 거리는 당시 김일성이 걸었던 거리로 했다고 하며, 교통 수단 역시 그대로 이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임강의 맞은 편인 양강도 후창(지금의 김형직군)에서 출발해 10여 일가량 매일 평균 70~80리(28~32㎞)씩 걷고 어떤 날에는 100리(40㎞)도 걷는다. 자강도 화평과 강계·전천과 희천을 거쳐 묘향산이 있는 평안북도 향산과 구장을 지나 평안남도 개천에 도착한 다음 기차를 타고 안주를 거쳐 평양까지 간다. 그리고 평양에 도착해서는 3·4일간 시내 관광을 한 다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전체적인 답사 일정이 마무리된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5명의 선생님과 1~4학년 남녀 학생 70명으로 답사단을 구성해서 갔는데, 나는 이때에도 학교 사로청위원장으로서 전체 학생들을 책임지고 갔었다.
그때가 한여름 장마철이어서 그런지 비가 자주 많이 내려 거의 매일 비를 맞으며 걸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리고 10살이 갓 지난 아이들로부터 17세에 이르기까지 나이도 다양하고, 또 남학생은 물론 여학생들까지 섞여 있어 걱정은 되었지만 모두 모범생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는 그때 전체 학생들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어 모든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지금도 그들과 함께 찍었던 흑색 기념사진이 우리 집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걸어 다니는 팔자를 타고났는지 어려서부터 하루에 100리쯤 걸어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고, 특히 그 후에도 인간의 생에서 결코 짧은 기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15년 동안 훈련의 절반 이상을 걸어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직업 남파공작원으로 활동했다.
배움의 천리길 답사를 다녀온 후 고등중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준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에 입대해 군당 민방위부에서 주관하는 약 1주일간의 군사훈련과 함께 실탄사격을 했다. 당시 실탄사격은 AK소총을 가지고 100m 거리의 목표를 향해 3발을 쏘는 방식으로 했는데, 나는 30점 만점에 26점을 받았다.
평범함 때문에 공작원으로 선발되다
4학년 여름에는 군(郡)에서 주관하는 수재 선발을 위한 예비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다. 그날은 우리 반이 체육 수업의 일환으로 광탄천으로 수영하러 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나는 전날 친구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쑤어 먹기로 약속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 가지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나를 사무실로 부르시더니 수영하러 가지 말고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번 시험은 수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기 때문에 영광으로 생각하고 시험을 잘 보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수재 시험을 잘 봐서 정말 수재로 선발되면 죽을 때까지 하기 싫은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험을 보기 싫었다. 여기에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려고 만반의 준비까지 다 해 왔는데 못 가게 되었으니 시험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께 공부도 못 하는 내가 어떻게 수재 시험을 보겠느냐며 투정도 부리고 시험을 안 보면 안 되냐며 억지도 부리다가 야단을 맞고서야 할 수 없이 대여섯 명의 다른 아이들과 시험을 보았다. ‘비둘기 마음 콩밭에 가 있다’는 속담도 있듯이 내 마음은 이미 강가에 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공부가 싫은데 수재 시험을 잘 보면 앞으로 평생 공부만 해야 될 거라고 생각하니 도대체 시험을 잘 봐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욕이나 먹지 않을 정도로 건성으로 시험을 보았다.

▲ 2003년 3월16일 평양 만경대를 향해 량강도 포평을 출발한 전국학생소년들이 ‘배움의 천리길’ 답사행군대를 하고 있다. 배움의 천리길은 김일성이 1921년 중국 바다오거우(팔도구)에서 만경대 칠골로 걸어서 유학온 길이다.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이다. 평양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그렇게 시험을 봤는데도 점수가 괜찮게 나왔던지 그 후에 또다시 읍에 가서 군(郡)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 놓고 보는 수재 시험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내 머릿속에는 시험을 잘 보았다가는 앞으로 평생 공부를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그런 생각으로 시험을 봐서 그랬는지 다음부터는 다시 수재 시험을 보라는 얘기가 없었다.
고등중학교 5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에는 전국의 고등중학교 졸업생들을 상대로 실시되는 국가판정시험(일종의 수학능력시험)을 보았는데, 이 시험 성적에 따라 중학교 졸업 이후의 진로가 결정되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을 봤다. 그 결과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군(郡) 내에서 10위권 내에는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고등중학교 생활 전 기간 나는 지리 선생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훌륭하신 부모님과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디에서든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고,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최우등생이었다. 그리고 줄곧 내가 속한 반과 학교에 전체를 대표하는 소년단·사로청 조직의 책임자로도 활동했다. 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동생들 역시 모두 학과 성적에서는 항상 최우등생이었고, 각급 조직의 책임자를 역임했다.
이처럼 나의 부모님은 유명한 사람도 아주 높은 간부도 아니었고, 나 역시 뛰어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평범함 때문에 내가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는지 모른다.
최종 선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내 운명 ‘대남 공작원’
내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평양 대동강역에 도착한 시간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 6시경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후 개찰구를 빠져나와 마중 나오기로 한 중앙당 지도원을 기다리는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황해북도 신계에서 온 명수가 서 있었다. 명수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면접 및 신체검사 때 우리를 안내했던 중앙당 지도원이 다가왔다. 오느라고 수고했다며 우리에게 인사를 건낸 그는 안전원(경찰)들이 회수해 간 나와 명수의 신분증을 찾아가지고 나와 우리를 승용차에 태우더니 평양 시내 중심으로 향했다.
승용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양 시내 중심 인민문화궁전 맞은 편에 위치한 10층짜리 아파트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아파트의 맨 위층으로 안내되었다. 후에 알게된 것이지만 당시 우리가 들어갔던 아파트는 일반 아파트가 아니라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서 사용하던 공작원 전용 초대소였다. 미리 연락부 부과장이 나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연락부 부과장은 그곳에서 우리와 저녁식사를 함께 한 다음 나와 명수를 각각 한 명씩 면담실로 불렀다. 그는 내가 발급받아 가지고 간 식량정지증명서와 군사이동증을 비롯한 서류와 주머니에 있던 돈과 증명서·사진 등 소지품까지 꺼내 놓으라고 한 다음 종이봉투에 집어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소지품들은 앞으로 필요할 때 주겠소. 오늘부터 동무는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4년 동안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소. 금성정치군사대학은 남조선 혁명가들을 양성하는 대학이오. 동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높은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의해 남조선 혁명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소. 이야기가 끝나면 나하고 대학까지 같이 갑시다.”
부과장으로부터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되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죽으려고 여기까지 왔나?!’
‘대남’과 ‘죽음’을 동일시하고 있던 평범한 나에게 ‘남조선 혁명가’라는 표현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데 과연 펄펄 날아 다닌다는 대남 공작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됐다. 여기에다 단 한 번도 입학시험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시험도 안 보고 들어가는 이런 이상한 대학도 있나, 공부가 하기 싫어서 대학을 가지 않았으면 했는데 결국 대학에까지 가게 되었으니 충격은 더 컸다.
부과장은 내가 정신 차릴 여유도 주지 않고 이번에는 대남 공작원이 된다는 사실이 실감나도록 말을 이어 갔다.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는 본명을 사용하지 말고 대신 가명을 사용해야겠소. 우리가 지은 이름인데 ‘박승국’ 이라는 가명을 쓰시오. 그리고 조금 전에 회수한 돈이나 사진 등 소지품은 우리가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대학을 졸업한 뒤 필요하면 그때 가서 그대로 돌려주겠소.”
당시 나와 명수에게서 회수했던 돈과 사진 등 소지품은 부과장이 얘기한 대로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한 다음 다시 돌려주었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들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다녔던 대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실 잘 와닿지 않았던 적이 많았어요. 여기선 상상조차 힘드니까….
제가 군대에 입대해 생활하면서는 꼭 아버지의 아들이어서라기보다 청춘 시절의 남자 대 남자로서 아버지를 생각해 볼 시간이 많았어요. 혹시 아버지가 저처럼 이런 젊은 시절에 해 보거나 누리지 못해서 후회스러운 것들이 있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버지: 글쎄, 나는 후회스럽다고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가급적이면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이야. 대신 후회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지.
그런데 내가 평양에 소환된 다음 간부들로부터 남조선 혁명가, 즉 대남 공작원으로 임용되었고 공작원이 되기 위해서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해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도중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여기까지 안 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 그리고 괜히 노동당에서 하라는 대로 해서 이렇게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잠깐 후회한 적도 있고….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후회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아예 후회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
그리고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해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생활했던 4년간을 돌이켜볼 때 별로 후회되거나 아쉬운 것은 없어.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떠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일이고 나를 낳아 키워 주신 부모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훈련을 했으니까….
다만,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이 연애를 한창 할 나이인데 나는 ‘슬프게도’ 연애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연애를 못 했다는 아쉬움마저도 느낄 수 없었어.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나의 대학 시절은 ‘비참하고 슬픈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지!?
김동식 20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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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20>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용광로… ‘인간 병기’ 제조 공장
대남 공작원에 대한 두 가지 선입견
일반적으로 북한 사람들은 대남 공작원에 대해 두 가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대남 공작원이라면 무술을 잘해 한 번에 수십 명씩 쓰러뜨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펄펄 날아다니는, 그야말로 귀신과 같은 존재라고 여긴다. 또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남’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나뿐만 아니라 북한 남자 대부분이 대남 공작원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싸움을 아주 잘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또 과거에 남편이 대남 분야에서 일하다가 사망해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여성을 주위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었으므로 ‘대남’과 ‘죽음’을 동일시한 것이다.
결국 내 머릿속을 강타한 것은 ‘내가 과연 몇 사람씩 때려눕힐 정도로 싸움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인 대남 공작원이 되었다는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대남 공작원’이라는 명칭과 ‘죽음’을 동일한 의미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충격과 함께 실망이 겹쳤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저는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대남 공작원을 못 하겠습니다”라거나 여타 다른 변명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전에도 그랬지만 바로 한 달 전 면접과 신체검사를 하러 평양에 왔을 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 간부들에게 큰 목소리로 “저는 당에서 바라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고 대답했었으니까….
그동안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집에서 태탄읍과 해주 그리고 황해도와 평양을 오가며 내 머릿속으로는 다른 지역 또래 아이들과 경쟁했던 지난 1년여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부과장은 곧이어 명수와 면담했다. 면담이 끝난 후 우리는 초대소에 올 때 타고 왔던 승용차를 다시 타고 대학으로 향했다.
이렇게 1981년 3월18일은 철없는 소년이던 내가 대남 공작원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날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세 갈래 갈림길에서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조종사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군대학이 아니라 전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가장 위험하고 힘든 대남 공작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남공작원이 된 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대남 공작원이 된 것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인생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후회스럽다고 해서 다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인간 병기’ 제조공장 김정일정치군사대학
1985년 6월 금성정치군사대학(현재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공작원으로 정식 임명되어 초대소에 처음 입소했을 때 초대소 요리사들은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용광로를 나오셨군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어떤 이유로 그렇게 얘기하냐고 물었더니 “일단 군복을 입은 선생님은 전투원 양성 과정을 마친 분들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선생님들은 누구보다 더 힘들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잖아요. 무쇠가 용광로에서 강철로 변하듯 혹독한 훈련을 받은 선생님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얘기한 거예요”라며 추켜세워 주었다.
그들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군복 입은 모습을 보고 내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당시는 금성정치군사대학) 전투원반 교육 과정을 졸업한 공작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작원반 졸업생들은 모두 사복을 입고 초대소에 입소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전투원 양성 과정은 그만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명하다. 초대소 요리사들까지 어떤 쇠든지 모두 녹여서 강철로 만들어 내는 ‘용광로’에 비유할 정도로 북한에서도 힘들고 어렵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다. 그래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그들의 표현대로 ‘용광로’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강철 체력, 철저한 주체사상 신봉, 군사·기술적 지식, 포섭 능력까지도 완벽하게 갖춘 최고급 대남 공작원을 육성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대학으로, 요리사들의 표현대로라면 ‘용광로’,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쉽게 표현하면 ‘인간 병기’ 제조 공장이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북한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노동당에서 직접 관장하는 대학인 동시에 당시 북한에서 살아 있던 김정일의 이름을 명칭 앞에 처음으로 붙인 대학이기도 하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과 봉화정치학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북한 유일의 대남 공작요원 전문 양성기관으로 1957년 1월3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학교’(약칭 중앙당정치학교)라는 명칭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 분교 형식으로 설립되었다. 김일성고급당학교는 북한 최고의 노동당 고급간부 양성 기관이다.
아마도 대남 공작원들이 수행하는 임무가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고 지도하는 비합법적인 당 사업이기 때문에 당 간부와 동일한 양성기관처럼 취급해 김일성고급당학교의 분교로 설립한 것 같다. 당시에는 남한 출신 월북자들이 주로 중앙당정치학교 학생으로 차출되어 대남 공작 교육을 받았다.
중앙당정치학교는 1970년대 후반 평안남도 강서에 위치하고 있던 전투원(흔히 대남 침투요원) 훈련 및 교육기관인 686훈련소를 흡수 통합하면서 명칭을 ‘금성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했다. 이때부터 대남 공작원과 대남 침투전문 전투원 양성을 동시에 담당하게 되었고, 남한 출신뿐만 아니라 북한 출신도 선발해 전투원 또는 공작원으로 양성했다.
그리고 학제도 1~2년에서 3년제로 늘어났다. 대학 명칭 가운데 ‘금성’이라는 단어는 김일성의 청년 시절 별명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하며 ‘정치군사대학’은 말 그대로 정치와 군사를 동시에 배우는 대학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대학 명칭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정치학교’라고 개칭하고 학제도 4년제로 늘려 일반 사회대학과 같이 대학 졸업장도 수여하는 등 대학 졸업 학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사실 3년제일 때까지는 일반 대학과 달리 ‘양성기관’이라는 용어를 써서 특별 취급했다.
그러던 중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었던 오극렬이 중앙당 민방위부장을 거쳐 대남 공작부서인 작전부장으로 부임한 1990년대 초반 김정일의 허락을 얻어 대학 명칭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했다. 학제도 예비과정 6개월에 본 과정 5년제로 확대 개편해 명실상부 종합대학이 되었으며 격술연구소와 연구원(대학원) 과정도 신설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내부적으로 ‘130연락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대외적으로는 ‘695군부대’라는 군부대 명칭도 사용한다. ‘130연락소’는 대학 창립 일자(1월30일) 및 대학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때 김일성이 대학을 방문했다는 의미에서 대남공작부서 예하 기관에서 흔히 사용하는 ‘연락소’ 명칭 앞에 ‘130’을 붙여 부르는 명칭이다. ‘695군부대’는 대외적으로 군부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 명칭이다.
한편, 1990년대 초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전투원 양성만 담당하게 되었고 공작원 양성은 따로 분리·독립된 교육기관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공작원들을 별도로 양성하기 위해 새롭게 설립한 교육기관이 ‘봉화정치학원’이다.
봉화정치학원은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력통일을 위해 남한 각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간부들을 양성하던 강동정치학원의 맥을 이어 ‘조국통일의 봉화를 지핀다’는 의미로 붙여진 명칭이기도 하다.
당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노동당 작전부 직속 교육기관이었지만, 봉화정치학원은 노동당 대외연락부 직속 기관이었다. 직접적으로는 대외연락부 교육담당과에서 담당하였으며 교육기간은 기본이 3년제이고 대상의 수준에 따라 1년제·2년제가 있다. 봉화정치학원을 ‘112연락소’라고도 하는데, 이는 봉화정치학원을 새로 창설할 때 김정일로부터 인준을 받은 날짜가 1월12일이기 때문에 그 날짜를 앞에 붙여 명칭을 정한 것이다.
공작원이 된 사람들
공작원으로 임명된 사람들의 경우 사회에 있을 때의 직업이나 직책·학력·경력 등은 모두 다르다. 나처럼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작원으로 선발된 경우도 있고,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종합대학·평양외국어대학·의과대학·사범대학 등 일반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혹은 졸업과 동시에 선발된 경우도 있다. 또한 대학을 졸업한 후 청년조직이나 노동당 간부를 역임하다가 소환되어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에는 전직과 경력·나이에 관계없이 금성정치군사대학 공작원반(후에 봉화정치학원)에 입학해 공작원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기 위한 기초교육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교육기간이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0년대 초반까지 금성정치군사대학에는 전투원 양성과정과 공작원 양성과정의 2개 과정이 있었다. 전투원 양성과정을 일명 금성정치군사대학 ‘전투원반’이라 하고, 공작원 양성과정을 ‘공작원반’이라고 불렀는데, 공작원 대부분은 공작원반에 입학해 교육받는다.
공작원 양성 과정에는 1년제·2년제·3년제 등의 학제가 있었는데, 기본은 3년제로 해당 공작부서에서 선발된 공작원 대상의 학력이나 경력 등을 감안하여 적절한 학제를 선택한 후 기초교육을 받도록 한다.
1990년 5월 내가 처음으로 남파될 때 함께 침투했던 공작조장 권중현은 40대의 나이에 평양시 낙랑구역당 조직비서라는 고위급 당 간부를 역임하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되었는데, 1년제 공작원 양성과정을 졸업했다. 급히 파견해야 할 공작원의 경우 6개월간 통신 연락 등 기초적인 교육만 받는 단기속성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하기도 한다.
1985년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 같은 공작조장을 했던 박철만의 경우에는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있는 지질대학 7년제 과정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공작원으로 소환돼 2년제 공작원 양성과정을 마쳤다. 1995년 2차로 침투하는 나와 함께 남파되었던 조원 박광남은 함흥의학대학 3학년에 재학하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된 후 3년제 공작원 양성과정을 밟았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통일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족 빼고는 주변 친구들과 해 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군에 입대해서는 달랐지만요….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때가 온다면 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제외하고 어딜 가장 가 보고 싶으세요?
아버지: 글쎄,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때가 온다면 고향을 제외하고 특별히 가 보고 싶은 곳은 없어. 너도 전방에 근무하면서 휴전선 너머에 있는 북한 땅을 봤으면 알겠지만 북한의 산들이 대부분 민둥산이야. 왜냐하면 북한 주민들이 난방과 취사용 연료가 없어 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기 때문인데, 다니다 보면 민둥산만 계속 보일 것 같아서 솔직히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게 사실이야.
그나마 가 볼 수 있는 데가 명산이라고 알려진 백두산이나 금강산·묘향산 등인데,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금강산에는 두 번, 백두산도 세 번 가 봤기 때문에 그곳은 다시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사실 내가 북한에서 1995년 2차로 남한에 침투하지 않았다면 그해 가을에 묘향산 관광을 가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때 가 보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해. 그래서 가능하다면 묘향산이나 한번 가 보고 싶고, 그다음에는 황해도의 명산 구월산에도 한번 가 보고 싶어.
그래서 통일이 되면 뭘 본다며 돌아다니기 전에 가스화를 먼저 실현해 북한 주민들의 취사 및 난방용 연료를 해결해 주고 나서 그다음에 나무를 심어 민둥산을 숲이 우거진 제대로 된 산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야.
김동식 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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