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왔습니다] <41> 권위주의 사회 권력의 힘으로 아버지 문제 해결
할머니 돌아가신 것도 모르는 채…
간부 현실체험이 끝난 다음 나는 부서의 승인을 받아 두 번째 휴가를 갔다. 이때는 황해남도 당위원회에서 특별히 볼보 승용차를 내주어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아마도 첫 휴가 때 도당에서 차를 보장해 주지 않아 고생했다는 나의 말을 담당 지도원이 기억하고 있다가 도당에 강조했던 모양이다.
사실 2년 전인 1986년 초에 첫 휴가를 갔을 때 할머니가 몹시 위중한 것을 보고 왔기 때문에 그다음 해인 1987년 초에 다시 휴가를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평안남도 평성에서 간부 현실체험을 할 때 보안 규칙을 어기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도당 초대소로 불러서 만난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할머니께서 1986년 5월14일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할머니의 임종 소식도 모르고 지켜보지도 못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무덤에라도 찾아뵙고 싶어 간부 현실체험을 마치고 돌아온 후 휴가를 신청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할머니 무덤 앞에서 눈물 쏟아
막상 휴가를 받아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동생들이 반겨 맞아 주었지만 당장 문밖까지 달려 나오셨을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 너무도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애지중지 키워 주신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남동생과 함께 할머니 무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의 무덤은 6·25 전쟁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무덤과 함께 조상들을 모신 선산이 있는 내 고향 광탄리에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과산리에서 광탄리까지 지름길을 따라 가면 10km 정도 되는 거리였다. 이용할 교통수단이 부족해 아침에 남동생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 산소에 찾아가 술을 한 잔 부어 놓고 절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평생을 손자들인 나와 형제들을 업어 키우느라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무엇 하나 보답해 드린 것이 없어 눈물이 쏟아졌던 것 같다.
오해로 시작돼 해프닝으로 끝난 결혼 약속
두 번째 휴가 때는 앞에서도 짧게 이야기했지만 첫 휴가 때 잠깐 만나 대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자 동창생과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간 지 3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지난번 휴가 때 동창생 순옥이와 어떤 약속을 하고 갔느냐?”고 물었다.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러냐고 반문하자 “순옥이와 앞으로 결혼하자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냐?”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이었다. 그런 약속을 했으면 부모에게 알렸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섭섭한 표정까지 짓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첫 휴가를 다녀가고 얼마 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모교의 중학교 교사로 임명받아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부모가 평양에 가 있는 당비서 아들과 자기 딸이 결혼을 약속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니며 어머니를 만날 때면 벌써 사돈이 다 된 것처럼 대하더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인 내가 결혼과 관련된 중대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확한 사실관계도 모르면서 무작정 부정하기도 난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편지조차 마음대로 주고받지 못하는 곳에 있으니 확인해 볼 방법이 없어 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2년 전 첫 휴가 때 그와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다 헤어지며 나눴던 말이 생각났다. 헤어질 당시 그가 앞으로 자주 만날 수 없겠다며 서운한 감정을 표시해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 말로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가 내 대답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 마치 내가 자기와 결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부모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자 그의 부모는 평양에 사는 당비서 아들과 자기 딸이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그때 나누었던 대화 내용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 말하며 그런 중요한 문제를 부모님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처리하는 그런 아들은 아니니 마음 놓으시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 후 어머니는 순옥이의 부모를 만나 나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을 들은 그들이 나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 보겠다며 집으로 찾아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직속 부하에게 모함당한 아버지
두 번째 휴가 때는 우리 집안에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신상과 관련된 문제였다.
휴가 기간을 사흘 남겨 놓은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평소와 달리 말씀이 없고 어머니 또한 분명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참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어머니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몇 번 망설이다가 그만두려고 했는데 내가 물어보니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아버지가 지금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써 놓았던 여러 장의 편지를 내놓았다.
편지에는 아버지의 직속 부하인 초급 당 부(副)비서 등 몇몇 사람이 아버지를 모함하려고 했던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편지를 썼다며 그 편지를 도당(道黨)이나 중앙당에 보낼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아버지가 출신 성분이 나쁜 사람들의 문제를 잘못 처리해 보위부와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했고, 그 문제로 상급 기관인 군당에 불려 들어가 추궁을 당하고 경고까지 받은 상태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 큰소리 한번 안 내고 언제나 따뜻한 인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말보다는 솔선수범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지역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던 아버지를 모함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증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선 정말 당장이라도 잡아다 박살을 내 주고 싶을 정도로 분하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버지 문제를 권력으로 해결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내가 편지를 가져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이야기한 다음 휴가를 마치고 초대소가 있는 평양으로 돌아올 때 그 편지를 챙겨서 출발했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평양까지 가지고 와 담당 부부장이나 과장 등 중앙당 간부들에게 직접 전달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큰일을 할 사람이 사소한 문제를 들고 돌아다니며 간부들에게 매달린다고 하는 비난이 돌아올 것 같아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해주에 도착한 다음 도당에서부터 나를 바래다주기 위해 해주역까지 따라 나왔던 도당 11과 부부장에게 열차에 오르기 직전 그 편지를 전해 주며 말했다.
“사실 이 편지를 평양에 갖고 올라가 중앙당 연락부 담당 과장이나 부부장 동지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대남 부문 가족들의 생활 지원을 책임진 도당 11과가 욕을 먹을 것 같아 이렇게 부부장 동지에게 드리니 잘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평양 초대소에 올라가서는 휴가 기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는 간부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내가 집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본연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버지 문제는 그 후 약 1개월이 지나 모두 해결되었다. 아버지가 받은 경고가 해제되었고, 아버지를 모함하려던 초급 당 부비서는 다른 곳으로 전근시켜 아버지가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물론 아버지 문제가 해결되어 좋기는 했지만 이것은 북한에서 노동당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공작조 조원이 되다
두 번째 휴가를 다녀온 후 4월 말경 또다시 다른 공작원과 공작조를 편성했다. 이때 나와 같은 공작조로 편성된 사람은 양강도 보천보가 고향인 김명걸이었다.
김명걸은 당시 나보다 서너 살 많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키가 170cm가량 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본인 말에 의하면 원래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다가 부모님이 너무 아파 병간호를 위해 대학을 자퇴한 후 군(郡) 사로청 지도원을 하다가 공작원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공작원양성반 3년제를 졸업하고 노동 단련을 마친 상태라고 했다. 연락부에서는 김명걸이 사회에서 사로청 지도원을 해 보았기 때문에 간부 현실체험은 생략했다.
어쨌든 그가 1986년 가을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했으니 당연히 나보다 1년 이상 후배였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입학 연도를 따지면 나보다 2년 후배였다. 그러나 담당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서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에서 사로청 간부를 했던 경력을 내세워 그를 공작조 조장으로 임명했고 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또다시 공작조의 조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북대천 9호 초대소에 있었는데, 그곳은 내가 있던 북대천 10호 초대소로부터 약 300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공작조가 편성되면서 내가 조장 김명걸이 생활하고 있던 9호 초대소로 이사 갔다. 그로부터 약 2개월 동안 9호 초대소에서 생활했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초등학교 때 체험학습 신청서를 저만큼 많이 제출한 친구가 드물었을 정도로 아버지는 저희와 많은 시간을 보내 주셨어요. 하지만 또 반대로 어린 저와 동생에게 엄격한 규칙들도 만들어 놓으셔서 어떨 땐 그걸 피해 보려고 잔머리 굴리다 더 무서운 엄마에게 걸려 엄청 혼난 적이 많았습니다. 제가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된 후 제 자식들이 ‘자유’에 대해 물어 온다면 어떻게 정의를 해 주어야 할까요? 아버지 삶의 절반은 ‘자유’가 없는 곳에서, 나머지 절반은 저희 아버지로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오셨는데, 저에겐 아버지가 정의 내려 주시는 ‘자유’가 그래서 더 의미 있고 소중합니다.
아버지 : 내가 살아오면서 ‘자유’라는 단어처럼 소중하게 생각한 건 없는 것 같아. 네 말처럼 나는 자유가 전혀 허용되지 않는 북한 땅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고, 인생의 후반기는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살았으니까….
일반적으로 자유는 ‘양심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지금 생각하는 자유는 ‘사람 또는 사회로부터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자유’라고 하는 철학적·정치학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가 쉽지는 않아. 그렇지만 북한 김정은 체제는 생존권을 비롯한 인간의 기초적인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하는 사회이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시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주는 사회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김동식 202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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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42>
적구화 교육 통과… 완전 ‘한국 사람’으로 개조
또다시 받게 된 종합판정 훈련
공작조를 편성한 지 1개월가량 되어 나와 김명걸은 종합판정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종합판정 훈련은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한 후 처음으로 함경북도 청진과 나남 지역에서 했던 비(非)합법 훈련과 반(反)합법 훈련, 훈련 종반에 진행한 100리 강행군과 사격·태권도 등과 같은 방법으로 했다. 훈련 지역이 평안남도 양덕과 함경남도 함흥으로 바뀌었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명걸이 종합판정 훈련에 처음으로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종합판정 훈련은 공작원 개개인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공작조가 편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공작원들이 각각 개인별로 참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김명걸은 처음으로 종합판정 훈련에 참가하는 데다 자신감도 없었는지 공작조 차원에서 훈련에 참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나와 같이 행동하게 되었다. 원래 모든 종목의 훈련을 혼자서 해내야 하는 종합판정 훈련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김명걸은 어떻게 하든 쉽게 훈련하려고 잔머리를 썼던 것이다.
종합판정 훈련이 처음인 조장과 함께 악천후 속 산악 행군
우리가 비합법 훈련을 했던 평안남도 양덕군 일대의 산은 북한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곳인데, 험한 산악지역에서의 비합법 훈련 마지막 날에 일이 발생했다. 원래 계획에는 훈련 마지막 날 밤에 산악 행군으로 양덕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아침 양덕역에서 열차를 타고 반합법 훈련 장소인 함흥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밤 많은 비와 짙은 안개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다 손전등에 들어가는 건전지까지 다 떨어져 지도를 전혀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산이 너무 험해 자칫 벼랑에서 떨어질 위험도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정해진 코스로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냥 다음 날 아침까지 날이 밝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양덕에서 열차를 타고 다음 훈련 장소인 함흥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훈련 담당 지도원들이 정해 준 코스를 따라 가든지, 아니면 훈련 코스를 주동적으로 변경시켜 일단 목적지까지 이동한 후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다음 훈련을 차질 없이 실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전자를 택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숙영을 하고 날이 밝은 다음 움직이면 될 것이지만, 후자를 택한다면 가던 방향을 바꾸어 산에서 내려간 뒤 밤새도록 걸어야 하므로 육체적으로는 힘이 드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한 방안이었다. 당시 훈련 일정은 하루 간격으로 여러 개의 공작조가 릴레이로 출발해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처럼 한다면 마지막 날 훈련은 물론 다음 공작조들까지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자를 택한다면 마지막 훈련은 약간의 차질이 생기더라도 다음 훈련이나 다른 공작조들은 모두 차질 없이 종합판정 훈련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며 조장으로서 빨리 결심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끝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우리는 산꼭대기에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양덕읍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양덕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훈련담당 지도원들은 정해 준 행군 코스를 이탈하더라도 날이 밝기 전에 왔어야 다음 훈련도 차질 없이 보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신분 노출하지 않고 모르는 여성의 신상 털기
그 후 함흥 시내에서 접선 및 무인포스트 매몰·발굴, 증명서 없이 열차승차권을 구매해 열차로 이동하거나 다른 사람 집에 들어가 숙박하는 등의 반합법 훈련을 실시했다. 물론 나는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라 비교적 쉽게 훈련 내용을 소화해 냈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신분을 전혀 노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정해 주는 전혀 낯선 사람의 신원 정보를 파악해 오는 훈련이었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이 훈련을 할 때는 제약 조건이 있는데 본인의 신분을 공작원은 물론 당 간부나 보위부 또는 안전부(경찰) 요원으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함흥시 성천강 구역 당위원회 청사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훈련 담당 지도원이 만나고 돌려보내는 사람의 신상을 파악해 오는 것이었다.
내가 함흥시 성천강구역 당위원회 청사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훈련 담당 지도원이 50대 아주머니를 만나고 돌려보내면서 눈짓으로 그를 따라가 신상을 파악해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대로 나는 아주머니를 미행해 그가 가는 곳까지 몰래 따라갔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부터 알아야 그의 신상을 파악할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함흥지함공장의 당비서 아주머니
약 20분가량 아주머니가 가는 곳까지 따라가니 마지막에 한 공장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정문 앞에서 뛰어놀던 어린 학생들에게 이곳이 무슨 공장인가를 물었는데 그중 한 아이가 ‘함흥지함공장’, 즉 종이박스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어서 내가 또다시 방금 들어간 아주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옆에 있던 아이가 당비서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단 내가 신원을 확인해야 할 임의의 여성이 함흥지함공장 초급당비서라는 정도까지 파악한 후 구체적인 신상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나는 사로청 간부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결심했다. 얼마 전까지 사로청 간부를 역임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어떤 대화를 해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로청 지도원·‘노동청년’ 기자로 위장, 임무 수행
그래서 나는 일단 사로청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 금성정치대학을 졸업한 후 함경남도 사로청위원회에 배치받은 지도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함흥지함공장 사로청위원장을 만나 사로청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적당한 틈을 봐서 당비서의 신상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으로 그 아주머니의 성명과 나이·집주소 등을 알아냈다.
그런 다음 북한의 대표적인 일간지 중의 하나인 ‘노동청년(현재는 청년전위)’ 기자로 위장해 취재를 구실로 당비서 아주머니의 집에 찾아가 그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부인인 당비서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훈련이 끝난 후 초대소에서 과장·지도원 등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훈련 결과를 결산했는데, 나는 훈련을 비교적 잘했다고 평가받았다.
적구화 교육… 검증된 공작원들의 마지막 과정
대학 졸업 후 3~4년간 기초교육 단계로부터 노동 단련 및 간부현실 체험과 초대소에서의 사상이론 및 실무 교육, 그리고 종합판정 훈련과 수영·잠수·통신 등 여러 단계의 어렵고 힘든 교육과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검증된 공작원들이 마지막으로 받는 것이 ‘적구화교육’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공작원들이 받는 적구화 교육을 ‘이남화 교육’이라고 하는데, 북한 공작부서에서는 대남 공작원들이 적지(敵地)인 남한의 말과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교육이라는 의미에서 ‘적구화(敵區化) 교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한마디로 북한 사람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교육이 바로 적구화 교육이다.
사실 공작원에게 있어서 모든 교육·훈련 단계가 검증 과정의 연속이지만 공작원 교육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적구화 교육 단계까지 왔다고 해서 검증(테스트)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는 없다. 굳이 표현한다면 적구화 교육까지 받으면 일단 공작원으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내가 거친 여러 단계의 검증 과정 중 기초교육은 그 첫 단계로 앞으로 공작원으로서 임무를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해 담당 부서 입장에서 직접 판단하는 일종의 검증 성격을 띤 단계이고 이후 이어지는 나머지 과정 역시 실천을 통한 검증 단계이다.
따라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양성반 과정을 이수하든 전투원양성반 과정을 졸업하든, 이와 같은 기초교육 과정을 마친 후 공작원으로 임명된 전체 인원 가운데 적구화 교육 과정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3~4년 동안 80% 이상의 공작원들이 제대(전역)해 집으로 가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적구화 교육을 받는 인원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
실제로 나와 같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전투원양성반 교육 과정을 졸업하고 연락부 공작원으로 임명되었던 인원은 총 6명이었고, 같은 시기에 공작원 교육 과정을 졸업한 공작원이 5명, 여기에 1년 선후배까지 합치면 대략 30명 정도였지만 2~4년 사이에 대부분 제대(전역)하고 마지막까지 공작원으로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3·4명에 불과했다. 이 중 1995년 당시 실제로 남파된 공작원은 나를 포함해서 2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10%도 안 되는 인원이 최종적으로 남아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물론 대남 공작을 하는 부서마다 구체적인 임무가 다르고 연락부 내에서도 해당 과들의 특성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검증 형식과 방법이 동일할 수는 없다.
필자가 여기에 언급한 것들은 중앙당 연락부(현재 문화교류국)에서도 대남공작전담과를 기준으로 얘기한 것이고, 앞서 내가 거친 검증 과정과 기간 역시 같은 과의 공작원이라고 해서 같은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나는 여러 계기를 통해 대남공작담당과의 과장·부부장 등 간부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키워 내려는 간부들의 의도로 남들이 받지 않은 교육 과정을 거친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같은 교육 과정이라도 상대적으로 더 힘들게 넘기기도 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께서 저와 동생에게 지난 삶에 대해 우리에게 직접 말해 주시기 전, 이미 발간된 아버지의 자서전을 엄마가 저희에게 건네주시며 “아버지의 이야기이니 먼저 읽어 보고 남은 궁금한 것들은 아버지께 직접 듣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버지의 삶이 반드시 진실로 남아 있어야 할 대한민국 분단 역사의 하나라는 것을 그 책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면서 자식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아버지 삶을 알려야겠다고 따로 계획하셨던 적이 있으신지요? 그런 일이 발생해서도 안 되고 또 앞으로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자식들로부터 아버지의 삶이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신 적은 없으셨나요?
아버지 : 내가 너희 엄마와 결혼하고 너희들을 낳아 키우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너희들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아버지인 나의 존재와 과거에 대해 알려줄까에 대해 엄마와 함께 고민하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어.
물론 북한을 떠나온 탈북인들 중에는 자식들에게 일부러 자기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숨기고 사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해. 그러다가 자식들이 성인이 돼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 좋고, 아니면 그냥 방치해 둔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지만 나와 너희 엄마는 너희들에게 아버지인 나의 존재와 과거에 대해 반드시 알려 주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식에 대한 도리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어. 다만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떤 식으로 너희들에게 나의 존재와 과거를 알려 줄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고민이고 숙제였어.
나와 너희 엄마는 너희들이 너무 어렸을 때 내 존재와 과거를 알려 주면 괜히 위축되거나 자신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사춘기 때 알려 주면 방황하거나 엇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
결국 너희들이 너무 어릴 때는 알려 주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정도 자라서 스스로 생각할 나이가 되면 알려 주자고 엄마와 결론을 내렸지. 그러던 중 내가 2013년 자서전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출간할 때 엄마와 상의해 너희들이 중학교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아버지를 이해할 나이가 됐다고 판단하고 자연스럽게 너희들에게 알려 주되, 본인인 나보다는 엄마가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엄마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한 거지.
김동식 20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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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43>
남조선 사람 되기… 외국어보다 어려운 서울말
적구화 교육이란 한국인화 교육
공작원들이 공작 활동 지역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것은 임무 수행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이것은 제3국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해외 공작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조선, 즉 대한민국을 공작 활동 무대로 삼고 있는 대남 공작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남 공작원이었던 나에게도 남조선 사람이 되기 위한 적구화 교육, 즉 한국인화 교육은 중요한 의무이자 과제였다.
수십 년 동안 분단되어 살아오면서 남북 간에 언어는 물론 문화와 풍습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는 엄청난 문화적 차이로 나타났다. 북한의 언어와 문화가 상대적으로 토속적이면서 러시아와 중국 등 사회주의권이나 북방의 영향을 받았다면 남한의 언어는 외래어가 많고 서양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공작원들에 대한 적구화 교육을 실시할 때 외래어를 따로 암기하도록 했다.
사실 나를 비롯한 새세대 공작원들은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이론적으로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런 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본 적 없는 북한의 학자들이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 보고 분석한 자료에 기초해서 작성한 일반상식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특히 남북 간 언어와 생활풍습 등 문화적 차이가 상당히 심각해 남한을 공작활동 무대로 하는 대남 공작원들은 남한의 말과 생활 풍습·행동 방식·사회 환경 등을 제대로 모르고서는 공작임무 수행은커녕 남한 지역에서 한 발짝도 옮겨 놓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적구(敵區)에 침투하기 위한 ‘한국인화 교육’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작원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북한 출신 새세대 청년들이 대남 공작원 집단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서 과거 남한 출신 공작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던 적구화 교육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따라서 북한 출신 공작원들에게 있어서 적구화 교육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언론에서는 대남 공작원들의 적구화 교육을 ‘이남화 교육’이라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한국인화 교육’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남파됐다”고 하지만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적구에 간다” 혹은 “적구에 침투한다”고 하므로 ‘적구화(敵區化) 교육’이라는 단어 자체가 말해 주듯이 공작원들을 적 지역 사람, 즉 한국 사람처럼 만드는 교육인 것이다. 그래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적구화 교육’이란 용어를 공식 사용한다.
남조선 사람이 되어라
이러한 적구화 교육은 1980년대 초에는 기간도 6개월 쯤으로 하고, 그 수준도 간단한 대화나 며칠간 임시로 생활할 수 있는 정도로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교육 기간을 8개월~1년으로 늘리고 교육 내용도 남한에서 중·장기적으로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는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남한 현지인들의 의심을 받지 않게 하고, 생활방식이나 남한의 문화에 대해서도 최대한 숙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때 대남공작부서에서 공작원들에게 요구했던 적구화 교육 수준은 남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일반인이 알고 있는 수준의 상식을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보통 18개월 이상의 적구화 교육을 받는다고 하며, 그 수준도 대학생 정도의 상식을 갖추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남한 사람보다 남한을 더 잘 아는 대남 공작원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나는 1987년 가을부터 1988년 여름까지 8개월 동안 사상교육도 체력 훈련도 잠시 중단한 채 오직 적구화 교육에 집중했다.
한국 표준어 서울말을 배워라
적구화 교육에서 기본은 어디까지나 언어이다. 남한의 생활방식이나 풍습·사회 환경 등 문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몰라도 어느 정도 용서가 될 수 있지만 북한 말을 그대로 쓰거나 북한 지역에서만 쓰는 사투리가 나오면 절대로 용서될 수 없다.
말하자면 남한의 문화나 상식 같은 것을 모를 경우에는 책을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언어에 문제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북한 사투리를 그대로 쓰다가는 금방 노출·신고되어 남한에서의 공작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만큼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울말·경상도말·전라도말 중 하나에 통달해야
한국말은 남한의 여러 지방에서 쓰고 있는 서울말 또는 표준어, 경상도말, 전라도 말 등 세 지역 언어 가운데 공작원이 속한 부서의 요구에 따라 특정 지역의 언어를 선택해서 배운다. 각 지역 언어를 가르치는 강사는 해당 지역에서 살다가 월북한 사람들이거나 강제로 납북된 남한 사람, 즉 한국인들이었다.
남한 출신 강사들은 공작원들과 하루 24시간 초대소에서 함께 지내며 해당 지역의 언어와 함께 춤과 노래까지 남한 사회 전반에 대한 학습을 책임지고 지도했다. 교육 방법은 강사들이 만든 교재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처럼 강사의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따라 하고 녹음해서 들어 보면서 수정하는 방식과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나운서·탤런트들의 말을 반복해서 따라 하는 방식으로 했다.
나는 공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말(표준어)을 배우게 되었다. 공작원들이 어느 지역 말을 배우느냐는 전적으로 담당 부부장 등 간부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나 역시 스스로 서울말을 배우겠다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공작부서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서울말 강사는 용산 출신 박 선생
당시 나를 담당한 서울말 강사는 ‘박 선생’이었다. 박 선생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 출신으로 당시 명문고인 용산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공군에서 통역 장교로 근무한 뒤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유학하다 월북한 엘리트였다.
나는 박 선생으로부터 두음법칙 등 한국말의 일반적 특징에 대한 강의를 듣고 그에 기초해 서울말 교재를 보면서 그의 발음을 직접 따라 하고, 그것을 녹음해 들어 보면서 수정·보완하는 방법으로 서울말을 배웠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숙련된 다음에는 TV에 나오는 아나운서·탤런트 가운데 말하는 스타일이 비슷한 대상의 말을 반복해서 따라 하는 방법으로 했다.
외국어보다 더 어려웠던 서울말
서울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같은 ‘조선말(한국말)’인데도 남과 북에서 쓰는 어휘와 발음·억양 등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근사하다’는 단어를 북한에서는 ‘비슷하거나 유사하다’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지만 서울에서는 그러한 본뜻 이외에 ‘아름답다·멋지다’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20년 이상 써 오면서 완전히 몸에 밴 북한말을 버리고 같은 ‘조선말’이면서 발음과 억양만 약간 다른 서울말을 하려다 보니 오히려 전혀 모르는 외국어를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한두 마디 흉내내는 정도야 잠깐이면 할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으로 익히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외국어도 6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배우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데, 같은 나라의 언어를 8개월씩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리라. 더욱이 발음과 억양을 고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쓰던 북한의 고유한 사투리를 버리고 해당 지방의 고유한 언어(방언)와 외래어까지 새로 배워야 하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사실 처음에는 남한 TV를 보면서 아나운서나 배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해되지도 않았다. 발음과 억양이 달라서 귀에 들리지 않았고, 그나마 알아들은 것도 외래어나 서울에서만 쓰는 말이어서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물론 이런 어려움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 문제는 남한 사람들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고 그들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힘들었다.
황해도 말과 비슷한 서울말, 그래서 조금은 쉬웠던 ‘서울말 배우기’
나는 고향이 황해도였기 때문에 내가 어려서 쓰던 말이 서울·경기 지역 말과 억양과 발음이 비슷해 그런대로 조금 나은 편이었다. 또한 내가 살아온 세월이 다른 공작원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20년 남짓한 기간이었고, 영어도 어느 정도 배웠기 때문에 나이도 많고 고향이 함경도이거나 평안도인 다른 공작원들보다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당시 나와 함께 적구화 교육을 받은 조장 김명걸은 고향이 양강도(과거의 함경도)여서 억양이 강했다. 그런 관계로 부드러운 서울말을 배우느라 무척 고생했다.
또한 1990년 내가 처음으로 남파되었을 때 공작조 조장으로 함께 활동했던 권중현의 경우에는 40대 말의 나이에 적구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40년 이상 써 온 말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말을 다시 배워 쓰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게다가 고향이 평안도인 그가 상대적으로 억양이 강한 경상도 말을 배우려다 보니 적구화 교육을 두 번씩 반복해서 받으며 고생했다는 얘기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고졸 학력의 남한 일반인 수준의 소양 갖추기
적구화 교육은 단순히 남한에서 쓰는 말을 배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말을 배우는 목적은 공작 임무 수행을 위한 것이며, 이 공작 임무는 남한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할 때만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말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작원들은 한국말 학습과 함께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교육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와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과 더불어 남한 사람들의 생활방식·풍습 등에 대해서도 강의를 듣고 각종 자료를 보면서 연구한다.
또한 배운 것에 기초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상황에 따라 실제로 말과 행동을 해 보는 실습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함으로써 남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일반인 수준의 소양을 갖추는 것이 목표였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는 북한에서 어떤 스포츠 활동을 하며 학교 생활을 하셨나요? 한국에서처럼 다양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북한에도 체육 시간은 따로 있을 거 같아요. 영어로 된 말들을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스포츠’라는 말은 어떤 말로 대신해서 사용하는지도 궁금해요.
아버지 : 북한에서는 ‘스포츠’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한자어라고 할 수 있는 ‘체육’이라는 용어를 써. 북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은 그렇게 많지 않아. 물론 평양이나 대도시 아이들은 시골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하겠지만, 그것도 경제 사정 때문에 학교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은 한정되어 있어. 아이들이 가장 쉽게 많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축구와 농구·육상·기계체조, 그리고 태권도 정도일 거야.
내가 1970년대에 학교 다닐 때는 축구공이 없어서 축구도 못 했고, 기껏 한다는 운동이 철봉·평행봉 정도였어. 그때는 태권도 종목도 북한에는 도입되지 않았을 때였거든. 물론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과외 교육시설인 ‘학생소년궁전’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엘리트 양성을 위해 자기 지역에서 잘할 수 있는 종목의 스포츠 클럽(북한에서는 일본식 표현인 ‘구락부’라는 표현을 사용)을 운영하면서 각 스포츠 종목에서 특별히 잘하는 아이들을 선발해 유도나 레슬링·축구·농구·배구·사격·예술체조 같은 종목의 엘리트들을 양성하고 있기는 해.
김동식 202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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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44>
적구화 강사는 남한 출신… 정치권도 손금 보듯
적구화, 즉 한국인화를 위해 사용하는 자료는 여러 가지다. 주로 사용하는 것은 남한의 전반적인 사회 실상과 생활방식·풍습 등에 대해 월북자들과 남한 연구자들이 쓴 각종 서적과 참고서 등인데 이와 함께 남한 TV에서 방영하는 각종 프로그램을 녹화한 테이프와 일간지·주간지·월간지 및 남한에서 출판된 소설과 관광자료 등 각종 서적이 있다.
나는 적구화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한국 TV 드라마를 보았다. 당시 대표적으로 교육에 활용된 프로그램은 KBS와 MBC에서 방영했던 메인 뉴스와 드라마·각종 쇼·스포츠 프로그램 등이었다. 지금도 그때 시청했던 드라마 중에 ‘사랑과 야망’ ‘도시의 얼굴’ ‘서울뚝배기’ ‘사랑이 뭐길래’ ‘서울의 달’ ‘숙희’ ‘여울목’ 등과 그 후에 봤던 ‘모래시계’를 비롯해 일일 및 주말 드라마 제목이 생각난다.
무삭제본으로 남조선 TV 프로그램 섭렵
그리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등의 오락 프로그램, 각종 다큐멘터리, ‘가요대제전’ ‘10대 가수 가요제’ ‘강변가요제’ ‘가요무대’ 등의 가요 프로그램과 야구ㆍ복싱 등 각종 스포츠 녹화본도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다.
남한 TV 녹화는 대외연락부 산하 314연락소에서 하고 있는데, 적구화 교육을 받는 공작원 교육용 녹화 테이프는 보통 실제 방영일보다 2~3일 정도 늦게 전달된다. 녹화 테이프는 뉴스같은 데서 김일성·김정일이나 북한 체제를 비난하는 내용만 삭제하고 오락물 등 나머지는 하나도 삭제하지 않고 무삭제로 며칠 분씩 편집해 넘겨주었다.
그 후에는 강사가 “지금 저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KBS 류근찬, MBC 백지연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으로 테스트도 진행되었다.
대중가요 100곡 이상은 불러야 공작원이다
한편, 강사들은 남조선 대중가요 100곡을 부르고 유명 가수 이름을 줄줄 외워야 공작원 자격이 있다며 한국 대중가요가 녹음된 테이프를 되풀이해서 틀어 주었다.
나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등을 비롯해 배호·윤항기·남진·나훈아·서유석·혜은이·주현미·이은하·이선희 등 1960~80년대 대표적인 가수들의 이름과 히트곡을 외워서 불렀다. 당시 적구화 초대소에는 일본 가라오케 시설이 있어서 실제로 가라오케에 카세트를 넣고 음악을 틀어 놓은 다음 노래를 부르며 연습할 기회도 가졌지만, 이상하게도 팝송은 학습 목록에 없었다.
6대 일간지·주간지·월간지로 남조선 정세 파악
당시 6대 일간지였던 조선일보·한국일보·서울신문·경향신문·동아일보·중앙일보도 구독하며 남한 시사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주간조선과 주간경향·선데이서울·주간한국 등 주간지, 신동아·월간조선·월간중앙·말·길·낚시춘추 등 월간지도 남한 정세와 사회상을 파악하기 위한 교육에 활용되었다.
위에 언급한 내용 가운데는 1980년대 말에 방영되었거나 출판된 것이 아닌 것들도 있다. 적구화 교육은 정해진 기간에만 하는 게 아니라 일반 초대소 생활 기간에는 물론 남파되기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본 것들을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았다.
북한에는 없는 야구… TV 보며 선수 이름도 외워
또한 정치인과 10대 재벌 그룹 회장의 이름을 외우고, 가전제품·화장품·의류·신발류·식료품은 어떤 회사 제품이 유명한지 등도 암기했다. 이 밖에 스포츠·군대·대학·백화점·재래시장·숙박업소·교통수단·술집·카바레 등 남한 사람으로 위장하는 데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익혔다. 북한에는 없는 야구의 경우는 TV를 보며 야구 규칙을 습득하며 이만수·선동열·최동원·김성한 등 당시 유명했던 선수들 이름도 외웠다.
이와 함께 한국에서 출판된 각종 연감과 최인호의 ‘고래사냥’, 황석영의 ‘꼬방동네 사람들’ 같은 소설도 읽었다. ‘한국의 여로’ ‘뿌리 깊은 나무’ 등 관광 자료·서울시 도로 교통지도 등 내가 북한에서 적구화 교육 등 공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본 자료를 여기에 다 나열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참고통신’ ‘자료통신’ 등… 간부용 자료
북한에서 간부들에게 보급하는 대표적인 대남 관련 자료로는 ‘참고통신’ ‘자료통신’ ‘참고신문’ ‘남조선 조사연구 자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참고통신’은 남한의 방송 내용 가운데 정치·사회 및 사건·사고 등 일부 중요한 내용만을 녹취해 A4 용지에 프린트한 인쇄물이다.
‘자료통신’은 남한 방송의 시사 해설이나 세계 각국의 방송 내용을 그대로 녹취해서 일자별로 묶어 참고통신 자료처럼 A4 용지에 프린트한 인쇄물이다. ‘참고통신’과 ‘자료통신’은 모두 조선중앙통신사에서 발행하는데 대남부서 간부들과 군당 책임비서 이상의 고위간부들에게만 배포된다.
한국 정치권 동정을 손금 보듯이
또한 중앙당 부부장 이상 간부들에게만 배포되는 자료로 ‘8호통신’과 ‘9호통신’ 등의 제목을 붙인 것도 있다. 이 자료들은 한국의 대통령과 주요 인물 등 정치권 동정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출판물 역시 조선중앙통신사에서 발행하며, 공작원이라면 모두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참고신문’은 중·하위급 간부들을 대상으로 배포되며 그 내용은 위의 ‘참고·자료통신’에서 주요 내용만 발췌해서 격일간으로 발행하는 일종의 신문이다. ‘남조선 참고신문’은 대외연락부 산하 314연락소에서 남한의 주요 일간지들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스크랩한 다음 그것들을 편집해 만든 ‘짜깁기’ 신문이다. 이 신문은 2~3일에 한 부씩 발행하며 주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재학생들이나 대남부서에서 일하는 일부 사람만 보게 되어 있다.
‘남조선 조사연구자료’와 ‘남조선 조사자료’ 등은 314연락소와 통일전선부 산하 남조선 연구소에서 남한의 1차 자료를 분석, 가공한 자료이기 때문에 적구화를 위한 자료로는 사용되지 않고 남한 정세를 연구하거나 침투준비를 할 때 활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적구화교육에는 북한 내부에서 만들어진 자료와 함께 강사들이 특별히 만든 서울말 교재와 상용 어휘집·외래어 사전 등이 이용되고 있다.
적구화 교육은 공작원들이 남한에서 현지 주민들과 어울려 대화하고 생활해야 하므로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남한에 사는 일반인이 알고 있는 내용을 모두 다룬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익힐뿐 아니라 실제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실습을 하는 등 완전 습득을 목표로 한다.
공작원 세대교체로 남한 출신 필요해져
공작원들의 적구화 교육을 담당한 강사들은 모두 남한 출신이다. 그중에는 자진해서 월북한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납북자였다. 나는 그것을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 대남공작부서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한마디로 ‘공작원 세대교체’라고 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북통일이 비교적 단기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하에 6·25전쟁 전후로 월북한 수많은 남한 출신 가운데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공작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남한의 말과 문화를 잘 아는 남한 출신을 공작원으로 활용하면 교육 시간도 절약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북한 출신은 배제하고 남한 출신들만 공작원으로 활용했다. 다시 말하면 장기전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1970년대를 지나면서 나이가 많아 고도의 육체적 훈련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어렵고 힘든 대남공작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작원들에 대한 세대교체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된 것이다.
남로당·빨치산 2세 데려다 공작원으로 양성하라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고심하던 대남공작부서에서는 손쉬운 방법으로 남한 사람들을 공작원으로 쓰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게 된다. 순수 북한 출신을 선발해 공작원으로 양성하는 경우 남한의 말과 문화를 잘 몰라 그것을 가르치려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현지인, 즉 남한 사람은 공작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만 시키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공작원으로 양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과거에 남로당원이었거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자녀를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월북시킨 다음 공작 교육과 훈련을 시켜 대를 이어 남조선 혁명가로 양성해 다시 남파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께 처음 술을 배웠던 날이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생활하실 당시 그곳에서도 음주는 자유로웠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버지도 저처럼 할아버지로부터 술을 배우신 건지 궁금해요. 또, 지금도 생각나는 북한만의 전통주가 있나요?
아버지 : 나는 어린 나이에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술을 배운 적은 없어.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는 대학에 가기 전에는 드러내 놓고 술을 마시지 않는 문화가 있었어.
그런데 내가 졸업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는 일반 사회대학과 달리 특별히 설날(1.1), 김정일 생일(2.16), 김일성 생일(4.15), 노동당창건 기념일(10.10), 이렇게 1년에 네 번 연회(파티)를 베풀어 주는데 이때마다 1인당 맥주 2병씩을 식탁에 올려 놔 줘. 그리고 파티에는 대학교 총장·부총장·학과장·교수·지도원 등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모두 참석해 같이 어울려 맥주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음주문화를 접하게 돼.
이렇게 대학교 총장부터 교직원들이 전부 참석하는 파티에서 학생들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거나 싸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결국 친구들 대부분이 조용히 안주와 함께 술을 마신 다음에는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침실로 돌아가 잠을 자는 방식으로 당시 대학의 술 문화가 형성되었고, 내가 술을 마시는 습관도 그때 생긴 거지.
대학을 졸업한 후 공작원으로 일하면서는 대학교 총장보다도 직급이 높은 장관·차관들과 술을 마시니까 더더욱 조심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었고, 집에 가서는 아버지와 같이 마시니까 또 조심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술 마시는 습관이 만들어지다 보니 지금도 나는 술 마실 때 조용히 마시는 편이야.
그리고 북한에는 각 시·군마다 자기 지역의 물로, 자기 지역에서 나오는 특산물을 가지고 술을 만들기 때문에 술 종류가 많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시·군 단위에서 만드는 술은 대체로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만 배급하고 다른 지역에는 유통시키지 않아서 어느 지역 술이 좋은지 모르는 게 사실이야. 다만, 평양에 있는 이름난 술 제조업체에서 만드는 술이나 일부 지역에서 옛날부터 만들어왔던 술 가운데 괜찮은 술은 노동당 고위 간부들이 가져다 마시는데, 그런 술 종류를 ‘명주’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
노동당 고위 간부들이 주로 많이 마시는 술 가운데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인삼주(개성)·대평곡주(남포 강서 대평)·용성술(평양시 용성)·백로주(자강도 강계)·인풍술(자강도 강계)·양덕술(평남도 양덕)·동양술(평남도 양덕)·들쭉술(양강도 혜산) 정도야.
이 가운데 양강도에서 나오는 들쭉술을 남북 관계가 좋을 때 일부 장사꾼들이 남한에 들여와 판매한 적이 있는데, 그 들쭉술은 평양에서 내가 마셨던 오리지널 들쭉술이 아니었어.
김동식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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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45>
공작원 세대교체… 충원 위해 현지인 납치도
공작원 보충 위한 무작위 납치
다른 한편으로는 남로당이나 빨치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납치하여 공작원 교육 및 훈련을 이수하도록 한 다음 다시 남파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1970년대 중·후반 과거 남로당 관계자들이나 빨치산 자녀들이 행방불명되고 수많은 남한 어선이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귀환하면서 일부 어부들이 북한에 억류된 채 돌아오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납북되었던 어부들은 실제로 공작 교육과 훈련을 받은 다음 남파되었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이재근 씨 같은 납북 어부가 본인이 북한에 있을 때 공작원 양성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한 것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현지인 납치해 적구화 교육 강사로
중요한 것은 1970년대에 발생한 고등학생 납치나 일본인 납치 등도 바로 이러한 북한의 공작원 세대교체에 따른 대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납치당한 현지인들이 남파 간첩 또는 대남 침투를 위한 공작원 적구화 교육에 강사로 동원된 아픈 역사다.
내가 잘 아는 김관섭 연락부 지도원은 1970년대에 고교생 납치 등에 직접 가담했던 인물로, 1995년 당시 대외연락부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침투 요원으로 활동할 당시 현지인 납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화국영웅 칭호와 함께 김일성의 명함이 새겨진 스위스제 고급 금시계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를 직접 받고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에 대한 납치를 상부에서 주도한 인물이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중앙당 조사부의 부장 임호군과 부부장 이완기·강해룡 같은 인물이다. 이들은 한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신상옥과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최은희 등을 납치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북한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 내가 아는 분들을 소개하려 한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밝혀 둘 것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 정확한 신상을 밝힐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모르는 건 알려고 하지 마라”
대남공작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불문율인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신상이나 나와 관계없는 업무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서 물어봐서도 안 되고 절대로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소개하려고 하는 남한 출신의 적구화 교육 강사들의 신상에 대해 정확하게 밝힐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불문율과도 같은 원칙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의 본명·납북 경위 등은 보안상 비밀에 해당되기 때문에 알고 있으면서 얘기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작원은 보안이 첫째… 신상 공개하지 않고 가명 사용
공작원들이 늘 생명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비밀, 즉 보안이다. 그래서 대남공작부서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가명부터 부여해 준 다음 비밀을 어떻게 준수할 것이냐에 대한 비밀 교육(보안 교육)을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사항이 본인의 신상이나 다른 업무에 대해서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신상 등 업무와 직접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어보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남공작부서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받는 교육이며 모두가 알고 있는 기초 상식이다.
따라서 수년 동안 같은 공작조에서 조장과 조원으로 생활하는 공작원들의 경우에도 본인이 자진해서 신상을 얘기하면 몰라도 절대로 먼저 다른 공작원의 신상을 물어보지 않는다. 만일 다른 공작원에게 본명이 무엇이며 고향이 어디냐는 등의 개인 신상에 대해 물어볼 경우 오히려 물어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물어보더라도 질문을 받은 공작원은 본인의 정확한 신분을 절대로 얘기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내부의 규정 때문에 나 역시 적구화 교육 당시 강사들에게 신상을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일부 강사들의 원래 성씨나 이름까지 여기에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히도 그들이 직접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거나, 남한에 검거된 후 공개적인 출판물에 소개된 정보를 보고 기억해 냈던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남한 출신 적구화 교육 강사는 대부분 자진 월북자
적구화 교육을 담당한 남한 출신 강사들은 그들의 생김새나 출신 지역이 다양한 것만큼이나 입북하게 된 경위도 다양하다. 하지만 휴전선이나 해상 또는 제3국을 거쳐 자진 월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남한 사회 전반에 대한 학습을 책임지고 공작원들을 지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강사들 가운데는 고기잡이 중 NLL(북방한계선)을 넘거나 공해상에서 조업 중 북측 경비정에 나포된 뒤 납북되어 지금까지 북한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남한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여름에 해안이나 섬으로 피서갔다가 납치된 고등학생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한’씨 성을 가진 부산 출신 강사가 있었다. 그는 1970년대까지 대남공작 일선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1980년대 말 그의 나이가 50대 후반 정도였으니 아마도 6·25를 전후해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구화 교육 당시 그는 부산의 지리와 문화 등 지역적인 특성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
경상도 말 강사를 했던 ‘최 선생’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전직 남파 공작원이었다. 나와 함께 1차로 남한에 침투했던 권중현에게 경상도 말을 가르쳤던 강사가 바로 최 선생이다.
언젠가 권중현으로부터 최 선생의 원래 성씨가 ‘최’씨가 아니고 ‘권’씨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북한으로 들어가 대남 공작원이 된 좌익 2세
최 선생은 항상 자신의 고향인 포항을 자랑하며 여름철에 바다에서 수영하며 놀았던 기억을 되새기곤 했다. 부친이 남로당과 빨치산에 참여했으나 희생되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를 북한으로 들여보낸 것은 부친의 동료들이라고 한다. 그에게 대를 이어 남조선혁명을 하라며 의도적으로 월북시킨 것이다. 원래 1~2년 정도 북한에서 공작 교육 및 훈련을 받도록 한 다음 다시 남한에 침투시켜 북한이 부여한 공작 임무를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와 같은 계획이 실행에 옮겨져 최 선생이 실제로 남한에 침투한 적도 있다. 한번은 그가 남파되었을 때 고향인 포항에 가서 어머니와 누나가 사는 모습을 먼 곳에서 보기만 하고 돌아왔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이 끝난 후 적어도 한 번 이상 남파된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한번은 해상을 통해 남한으로 침투하던 중 엄청난 파도를 만나 북한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생겼는데, 그때 그는 배에서 넘어져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고 한다. 그 후유증으로 대남 침투는 물론 공작원 활동을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되어 결국 후배들을 가르치는 적구화 교육 강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서울말 강사는 프랑스 유학파 서울 샌님
서울말(표준어) 교육을 전담했던 박 선생과 하 선생은 모두 서울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박 선생은 나를 적구화 교육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직접 담당해서 가르친 분이다. 박 선생은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로서 적구화 교육 강사들 중에서도 가장 학력이 높았다. 당시 그는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독일어·스페인어·일어 등 5개 국어를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정말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성격이 부드럽고 온화하며 겸손한 데다 아는 것도 많아 ‘박사’로 불리기도 했다. 전형적인 서울 사람, 서울 샌님이었다.
그는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에 입학해 졸업했으며 군에 입대해서는 공군본부에서 프랑스어 통역 장교로 근무했다고 한다. 군 제대 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있는 종합대학에서 유학하다가 1970년대 말에 월북했다. 4·19때 외국어대학 1학년이었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1960년에 입학한 것으로 보이며 1940년이나 1941년생쯤 될 것이다. 그가 어떤 이유로 월북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른다.
5개 국어 ‘술술’… 미술·역사에도 정통했던 박 선생
그러나 그의 원래 이름이 ‘오태식’이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 정부 기관에 근무할 때 외국어대학 출신 동료가 가지고 있던 외국어대학 총동창회 명부를 보니 60학번 가운데 ‘오태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아마도 60학번 오태식이 박 선생일 것이다.
박 선생은 당시 공작원들의 적구화 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평양에 있는 조선 중앙역사박물관과 미술박물관에 가서 자료를 정리하고 학자들의 연구를 돕는 자문위원 활동도 활발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박물관에 갔을 때 그곳 연구사들과 해설 강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미술박물관에서 신사임당의 가지 그림 등을 보면서 신나게 설명해 주던 그의 해맑은 미소가 잊혀 지지 않는다.
수심에 찬 모습, 과묵했던 하선생은 납북 어부 출신
서울말을 가르치는 강사 중에는 ‘하 선생’이라 불리는 이도 있었는데, 그는 당시 30대 후반으로 키가 175cm 정도로 큰 편이었다.
내 생각에는 언행이나 지식 정도로 보아 대학은 졸업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에게서 서울말을 배우면서 친해졌다.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성격이었고 항상 수심에 찬 모습으로 자기 신상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아 그의 고향이 정말 서울인지 아니면 경기도인지조차 모른다. 다만 서울말을 가르쳤기 때문에 서울 사람 또는 경기도나 인천 출신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남한에서 살면서 2005년 2월 2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오대양 61·62호 선원 24명과 휘영37호 선원 12명 등 납북 어부 36명이 묘향산 관광을 기념해 찍은 사진을 보다가 그들 가운데 있는 하 선생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가 납북 어부 출신이라는 사실을 중앙일보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그가 묘향산에 가서 사진을 찍었을 때가 1970년대 초반이고 내가 그를 만난 시점이 1987년이었으므로 10년 이상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모습은 여전했다.
▲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대한민국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경제 활동을 해서 모은 돈을 저축을 하든 투자하든 내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어요. 말하자면 저축이나 부동산 매입 등의 방법으로 개인이 재산을 모으거나 증식하는 게 자유롭지요.
아버지께는 어이없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사적 소유가 허용되지 않는 북한에서도 일을 해서 번 돈을 개인이 전부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해요.
아버지 : 북한도 직장이나 회사에서 일을 해서 번 돈은 전부 개인이 소유할 수 있어. 다만, 북한은 사적 소유가 허용되지 않고 모든 것이 국가 소유로 되어 있는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토지와 건물·주택을 비롯한 부동산과 철도와 전기·기계 등 중요 산업 및 생산 수단은 일체 개인이 소유할 수 없어.
어떤 사람들은 북한에서도 돈을 주고 아파트나 단독주택을 사고팔고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이런 말은 북한 체제를 정확히 모르고 하는 말이야.
앞서 얘기했듯이 북한은 사적 소유가 일체 허용되지 않고 모든 것은 국가가 소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사고파는 것은 아파트나 주택의 소유권이 아니라 ‘거주권’ 또는 ‘이용권’이라고 보면 돼.
북한 주민들이 소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건 텃밭에서 생산한 소량의 농산물, 일하고 받은 돈, 집에서 기르는 닭이나 토끼·염소·양 같은 동물, 그리고 자기 돈으로 산 가구와 생활필수품 등이라고 보면 정확할 거야.
김동식 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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