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여행

붓다의 발길따라 인도' 네팔 불교성지순례

서석천 2015. 2. 5. 12:20

이집트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황하문명과 더불어 세계 4대문명으로 불리우는 인더스문명의 발상지이자, 4대 종교(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의 발상지인 인도! 신광사 교륭스님외 도반들과 불교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2015/1/21~ 02/03

인도의 면적은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넓으며, 인구는 12억 이상으로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고 북동쪽으로는 중국, 네팔, 부탄, 서쪽에는 파키스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남동쪽에는 벵골 만, 남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 남쪽으로는 인도양와 맞닿아 있으며..,
18세기 초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관리하에 들어가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 영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되었지만, 간디에 의해 비폭력주의 독립운동 이후인 1947년 독립을 하게 된 인도는 어떤 생각을 갖고 보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나 낮설지 않는 친근감이 있는나라다.

 

여행도시는 뭄바이,→ 오랑가바드,→ 아잔타,→ 인도르,→ 보팔,→ 아그라,→ 샹카샤,→ 럭나우,→ 샤르나트,→ 바라나시,→ 보드가야,→ 나란다,→ 보드가야,→ 바이실리,→ 케사리아,→ 쿠시나가르,→ 쉬라바스티,→ 피프리하와,→ 룸바니,→ 카트만두 로,

 

 불교의 4대성지☞ *부처님 탄생지(네팔의 룸비니) *부처님 고행지(보드가야) *부처님 첫 설법지(사르나트) *부처님 열반지(쿠시나가르)

이 외에도 4 군데 ☞ *라즈기르(왕사성) *스라바스티(기원정사) *바이샬리(화엄경) *상카시아(도리천)을  합하여 불교 8대 성지 로 삼는다.

이번 여행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설하고 길에서 열반하신 붓다의 발길따라 순례하는 고행길이라 생각하고 갔는데...

향수를 자극하는 풍경에 황제처럼 편안한 여행이였다. 이는 좋은인연으로 만난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더 즐겁고 보람찼다.
불교문화와 역사, 건축물의 조형미에 이르기까지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인솔자인 서부장의 세세한 설명과, 현지가이드는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인도청년 두물의 재치있는 유머와 익살로 긴 이동시간에 피로를 잊은체 웃음을 안겨주었고, 현지 요리사 다부루의 정성은 한국에서 보다 더  맛갈스럽게 조리해 긴 여행기간동안 매번 포식했다. 

자~ 기억을 되살려 여기에 옮긴다.

 

 

                                                               ▲엘로라 석굴
세가지 종교가 혼재해 있는 엘로라 석굴 사원군에서는 특히 힌두교와 자인교의 석굴 사원은 불교 사원군도 훌륭하지만, 아잔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고 아잔타석굴보다 먼저 들렸다. 모두 34개의 석굴 사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엘로라 석굴 사원군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카일라쉬 사원이다. 힌두교 석굴 사원의 금자탑으로까지 인정받고 있다. 

엘로라 석굴군 사진보기

 

                                                      ▲아잔타 석굴
인드야드리 언덕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아잔타 석굴 사원군은 인도 불교 미술의 최고봉으로 불리는곳. 모두 28개의 석굴에 최고 수준의 불교 벽화와 조각품등이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반드시 둘러봐야 하는 곳은 1,2,4,16,17,19,26번 석굴. 참고로 아잔타 석굴사원군에 매겨진 번호는 단지 편의를 위한 일련번호일뿐 조성 시기와는 무관하다
아잔타 석굴군 사진보기

 


▲산치 불교대탑 

보팔 근처 북부에 위치한 산치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불교 조각 예술들 가운데 그 극치를 보여주면서 인도 불교의 발전사를 집약해 놓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18년 한 영국인에 의해 발견되었고, 1912~9년 사이에 존 마샬에 의해 현재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기원 후 1세기 후반 경에 간다라 지방과 중인도의 마투라 지방에서 사리를 모신 스투파(塔)의 형태로 단순한 문양을 조각한 건축양식으로 기념되어 왔던것인데, 이러한 스투파로서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산치에 있는 불탑이다.
산치의 스투파는 크고 작은 것이 20여 개였으나 대부분 파괴되고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산치 대탑이라고 불리는 제1탑과 그 탑을 사방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탑문(塔門) 그리고 제3탑이다.
원래 아쇼카 왕(기원전 286-232재위)이 기원전 3세기에 이 탑을 세웠다고 기록되고 있지만, 그것은 내부에 조그마한 스투파로서 덮여있고,

현재 16m의 높이와 37m의 넓이로 된 모습은 후대에 더욱 확장된 것이다.
이를테면 아쇼카 왕 시대의 작은 탑을 슝가왕조(기원전 2세기) 때에 증축하고 그후 이 원형의 탑을 둘러싼 사방의 탑문이 각각 세워졌고 그 중 남문이 가장 오래된 것인데 이는 안드라 왕조(기원전 2세기-기원 후 3세기)의 초기에 세워진 것이다.

탑문 중에서도 양쪽 기둥을 가로로 연결하는 3개의 횡량(가로 대들보)인 3층 형태의 아치형 문에는 주로 붓다의 다양한 삶의 에피소드를 그린 자타카(jatakas)가 아름답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이 자타카에는 아직 소승불교의 단계에서 대승불교로 발전하기 전 단계였으므로 붓다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다만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테면 붓다의 탄생을 말하는 연꽃이나 그의 깨달음을 말해주는 보리수, 혹은 그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바퀴(法輪, 차크라)나 그의 현존을 상징하는 발자국 또는 옥좌 등으로 산치 대탑은 인도 불교 예술사 가운데 가장 정교한 형태를 띠고 있는 조각이다. 
 산치대탑 주위 사진보기

 

                                               ▲세계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타지마할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다.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다.
엄청난 건축비용이 들었지만, 하얀 대리석의 웅장한 사원은 한 여인을 향한 한 남자의 간곡한 기념비가 되었다.
타지마할(Tajmahal)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을 가지며,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은 17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명째 아이를 낳다가 1629년 사망한 그의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위하여 1631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653년에 완공을 보았다.

현재 인도 아그라에 소재한 일종의 대영묘. 인도의 대표적 랜드마크이며 인도 건축 예술의 위대한 유산이다.
 이처럼 완벽한 비율과 좌우대칭으로 보여지는 조형미, 주변 경관과의 배치, 빛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외관과 어우러져 해가 뜨고 짐에 따라 그 자태가 변하는 건축물은 오늘날 보기에도 감탄만 나오는 이런 건축물이 17세기 당시 기술로 22년만에 완공되었다는 것은 그저 경이로울 따름.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이 단지 한 황제의 순애보적 집념만으로 그 당대에 착공하여 완성까지 봤다는 점에서 비하인드 에피소드 역시 누누이 회자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특히, 다른 거대 유적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이나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정갈미가 이 건물이 진정 칭송받는 이유다.

타지마할의 건설을 주도한 샤 자한은 17세기 초 재위한 무굴 제국의 5대 황제로, 당시 제국의 국력은 악바르 대제와 자한기르의 치세를 거치며 가히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선대들에 비해 샤 자한은 정복보다 예술을 애호하는 문화 군주로서의 측면이 강했고 또한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그의 치세 중에 제국은 번영과 안정을 누렸고, 반란은 속속 진압되었으며 그의 아내가 죽기 전까지 시민들은 평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애처가이기도 했던 샤 자한은 그가 털끝만큼의 오점도 없다고 형용한 황후 뭄타즈 마할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자, 큰 비통에 잠겼다.
그리고 그로 인한 실의를 장엄하기 짝이 없는 묘역을 조성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다.
그는 곧장 제국 전역에서 막대한 세금과 인력을 징발해 당시까지 쌓아올려진 인도 건축 예술의 포텐셜을 한데 집중하도록 지시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타지마할의 건축 배경이다.

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타지마할이 축조된 22년 동안, 페르시아, 이탈리아, 프랑스등에서 기술자와 장인들을 초빙했고, 이웃한 미얀마는 물론이고 멀리 중국과 오스만 제국, 심지어 이집트에서까지 온갖 건축자재가 수송되었다. 제국의 재정 상태가 휘청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 건물은 딱히 왕족이 주거한다거나 신전 내지는 국방을 위한 요새 따위의 실용성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예술 건축물이었다. 당시로서는 생산성이 전혀 없는 건물을 위해 제국의 국력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서거했다면 중도에 무한성 꼴로 남아버렸을 가능성도 높지만, 다행히 그는 22년의 준공기간 내내 재위했음은 물론이고 완공된 1648년에서 10년이나 더 오래 재위한 장수 군주였다. 아마 폐위되지 않았으면 더더욱 오래 재위했겠지만, 끝내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려 아그라 요새 탑에 가두어버렸다.
 사실, 타지마할의 무리한 축조 탓에 세금을 각출당한 시민의 불만도 굉장했던 터이니 자업자득적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는 탑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위대한 건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1666년 겨울까지 갇혀있다 죽었다.

아우랑제브는 죽은 아버지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뤄주지 않은 후레자식 이었지만, 샤 자한의 유해는 뭄타즈 마할과 마찬가지로 타지마할에 공동 안장하였다. 딸에 의해서

타지마할 사진보기

 

▲꿈의계단' 아쇼카 석주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을 그리며 설법을 하신 곳이다. 저승과 이승을 잇는 장소로, 신통제일 목련존자를 통해 도리천에서 3개월 만에 부처님이 하강하신 곳이며 ‘꿈의 계단’이 있다. 언덕 아래에는 훼손된 아소카 석주와 작은 사당이 있었는데, 사당 안에는 부처님께서 하강하실 때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금빛 유물이 놓여있다.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로 알려져있는 아쇼카 왕은 "마우리아 왕조"를 옹립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로 집권초기 왕은 수많은 군사 정복을 벌려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 하였으나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깨닿고 이후 불교를 융성해 비 폭력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며 석가모니의 정법에 의한 도덕과 윤리에 의한 통치를 맹세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는 석주, 주두등 많은 불교 상징물을 만들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상징물 중 하나가 "아쇼카 석주"이다. 아쇼카 석주의 모양은 거대하고 길쭉한 기둥위에 동물이 얹혀진 모습이다.
석주는 바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지지대로 또는 세계축의 의미를 갖고있으니, 기둥을 세운곳을 세계의 축으로 해석한다면 석가모니의 정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중심축이라 해석된다.

 

 

                                                            ▲샤르나트(녹야원)

사르나트(Sarnath, Sarnetha)는 인도의 작은도시 로 녹야원(鹿野園)으로도 불린다. 바라나시의 북방 약 10 km에 위치해 있다.

보드가야에서 깨닮음을 얻은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을 한 장소로 불교 4대 성지중 한곳이다.
최초의 설법이 행해진 곳이라는 의미로 "초전 법륜지"라고도 부르며 사슴이 많이 살던 곳이라 해서 우리말로 "녹야원"이라고 많이 부른다.
불교가 번성했을 때는 많은 사원과 불탑이 세워졌으며, 우리나라의 혜초 스님도 순례차 들렸었다고 한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을 한 땅이다.

사르나트 유적지 뒤편에 현대적인 탑이 하나 보인다.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탑을 본따서 만든 이 탑이 스리랑카 사원이란다.

&녹야원 사진보기

 


                                                           ▲갠지스강


힌두명 강가(Ganga)인 갠지스강은 티벳-인도 국경지역 히말라야산맥 남부, 고마크(Gaumakh)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모여 2,510 km에 이르는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어 중국, 인도, 네팔과 방글라데시 등 4개국에 거쳐 흐르고 있다.

산 자는 축복받기 위해 오고, 죽은 자는 떠나기 위해 온다고 하는 힌두교도들이 일생에 한번이라도 오기를 꿈꾸는 곳,

바라나시는 힌두교도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갠지스강이 도시 전체를 감싸며 흐르고 있는 곳이다. 강가로 가려면 관광버스로는 초입까지밖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려서 릭샤를 타고 인파를 헤집고 30분 정도 들어간 뒤 여기서도 수십명씩 관광객을 따라붙는 어린 거지들에게 둘러싸여 10분 정도 더 가야 한다.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발 디딜 틈 없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는 바라나시의 갠지스강가. 거기서 우리는 ‘성지’를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온갖 다양한 모습들을 만나게 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강물에 몸을 담그고 경건히 기도하는 이들은, 한눈에 보아도 오염이 심해 보이는 그 강물에서 기도문을 외우다가 물을 몸에 묻히다가 먹기도 하는데, 그 옆에서는 이에 아랑곳없이 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고, 한켠에서는 시체를 화장하는 불길이 끊이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모든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물을 물통에 넣어 집에 보관해두면서 각종 의식을 행할 때 쓰고, 죽으면 화장하여 갠지스강물로 돌아가야 좋은 세상에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갠지스강 주변 사진보기

 

                                                        ▲마하보디 대탑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도시로 알려진 보드가야는 불교4대 성지중 가장많은 순례객이 찾는 곳이다.

보드가야는 성도의 땅이다.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 곳, 붓다 석가모니의 첫 일성이 울려 퍼진 곳이다.
어쩌면 인도 불교 성지순례에서 가장 뜻 깊고 중요한 장소인지도 모른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앞에 대탑을 세우고 사원을 지었다.
그곳이 지금의 마하보디사원이다. 보드가야에 들어서자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52m 대탑의 꼭대기가 멀리서도 보인다.

생사의 문을 넘나드는 극한 고행이 참된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느낀 싯다르타는 우유죽으로 기운을 회복하고 네란자라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 커다란 보리수 그늘 아래 앉았다.

‘어느 세상에서도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에서 죽어도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

그리고 어느덧 새벽, 동녘하늘에서 태양이 솟아오를 때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었다.

“번뇌는 모두 사라졌다. 번뇌의 흐름도 사라졌다. 더 이상 태어나는 길을 따르지 않나니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하노라.”

석가모니부처님의 선언이 세상에 울려 퍼졌다. 바로 여기 마하보디사원으로부터. 대지와 강물은 기쁨으로 요동쳤고 구름처럼 모여든 천인들이 뿌린 꽃잎이 흩날려 무릎까지 쌓였다.

그날은 싯다르타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지 35년, 왕의 자리를 버리고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지 6년이 되던 기원전 589년 12월8일이었다.
그로부터 칠일 동안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다. 바로 여기 마하보디사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이후로 마하보디사원은 전 세계 모든 불자들에게 최고의 불교성지로 추앙받고 있다.
아쇼카왕은 이곳에 사원을 세웠고 불자들의 순례와 경배가 끊이지 않았다.
사원과 대탑은 세월에 따라 보수를 거쳤고 현재의 사원은 11세기와 19세기 후반에 각각 복원되었다.
하지만 사원 주변에는 기원전 2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난간 등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들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보드가야 주변 사진보기

 

                                                     ▲염화미소의 정법안장을 하신 영축산
영축산은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흰 연꽃을 받아 들고 염화미소의 정법안장을 하신 곳이다.
독수리 바위를 지나 산 정상에 도착한 불자들은 제단을 향해 예불을 정성껏 올리고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염송한다.

 

영축산에 오르기전 불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순례한다. 라즈기르에는 죽림정사의 터가 있어나 아직 발굴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깨달음을 이룬 붓다는 이듬해 라즈기르를 찾았다. 당시 그는 36세였다. 붓다에겐 가섭이란 제자가 있었다. 그의 나이는 120세였다.
라즈기르 사람들은 "새파란 젊은이가 어떻게 숱한제자를 거느린 120세 노인을 가르친단 말인가"라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때 가섭은 "나는 80년 동안 바람과불, 해와달의 신에게 제살를 지내며 기도를 했지만 얻은게 없었다.
그런데 붓다를 만난 뒤 비로소 편안함을 얻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죽림정사 인근에 영축산이 있다.

독수리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는 붓다가 머물렀던 여래향실과 아난다의 시자실 터도 남아있다.

붓다가 꽃을 들자 제자 중 가섭만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일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또 한곳,  빔비사라왕 감옥터를 방문했다. 사방 60m 정방형의 감옥터만 남아 있었다. 빔비사라왕은 왕은 죽기 전 감옥 창문을 통해 영축산을 바라봤다고 한다. 왕은 부처님께 예배드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영축산,죽림정사, 빔비사라왕 감옥터등 사진보기

 

                                                         ▲나란다 대학
나란다대학은 세계최초 최대의 규모로 부지가 가로5km, 세로11km에 이르며 7세기에 중국의 삼장법사 현장법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1만명이나 되는 학승이 있었으며 교수는 1천5백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을 거쳐간 신라의 고승들로는 혜업, 현태, 현각스님 등이 있는데 이들은 고승전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5세기에 세워진 이 대학은 12세기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슬람군의 방화로 6개월 동안이나 화염에 휩싸였을 정도로 탓다니 거 규모는 상상하기 어렵다.
무성한 보리수나무사이 곳곳에 유구한 세월의 풍상에 씻기면서도 벽돌로 튼튼하게 지은 기단과 벽은 아직까지도 의연히 남아 그 시절 학문의전당 이였음을 말해주고있다.

나란다 대학 주변 사진보기

 

                                                      ▲대림정사 중각강당
석가모니가 입멸 석 달 전에 비야리국 대림정사에서 아난다, 가섭, 미륵 등의 물음에 대답하여 설법한 것으로, 죄를 참회하는 법과 참회한 뒤의 공덕을 설명하였던 곳, 부처님 사리탑지 등의 유적이 있고 또 부처님이 3개월 후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 것을 예고한 땅이자, 당대 최고의 기녀 암나팔리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아름다운 망고동산을 보시한 지역이다.
그리고 불교사적으로도 부처님이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웠던 양모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500명의 여인들의 출가를 허락, 비구니 승단이 시작된 곳이다. 특히 불멸 후 100년 경 2차 결집이 이루어진 중요한 성지다.

대림정사는 가뭄으로 릿차비국에 큰 재앙이 들었을 때 부처님이 직접 제자들과 방문하자 비가 내려 가뭄과 전염병이 사라진 데 대해 감사의 표시로 왕과 백성들이 보시한 불교역사상 세 번째 사원이다.

대림정사, 열반당 등 주변 사진보기

 

                                                  ▲열반당

부처가 열반에 드신 곳, 불교 4대성지중 가장 슬픈 곳이다. 속세 나이로 여든이 넘은 부처는 제자들과 함게 열반(涅槃)의 땅으로 정해진 쿠시나가르를 향하여 가다가 파바성에 있는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의 집에서 버섯요리 음식공양을 받고 병에 걸리고 만다.
쿠쉬나가르까지 24Km에 무려 25번이나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워 했다고 전해진다. 쿠시나가르에 도착한 부처는 결국 이 병이 원인이 되어 열반에 드시게 되는데 아난다 존자에게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 자리를 펴라고 하시고는 머리를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고요히 누우셨다. 그리고는 아난다에게 오늘 밤 열반에 들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펴시게 된다. 그때 쿠쉬나가르에는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살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허둥지둥 찾아 왔으나 아난다는 부처가 아프다는 이유로 그를 가로 막는다. 부처는 그를 막지 말라 하며 가까이 불러 설법을 들려주고 수바드라는 그자리에서 제자가 되었으니 그가 마지막 제자이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나의 모든 제자들은 정법을 서로 전하고 이어 받으며, 여래의 법신이 상주하여 항상 사라지지 않게 하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는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남겼으니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시기전 아난에게 마지막 남긴 유훈(遺訓)을 간략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열반송(涅槃誦)"을 남기셨다.

 

▲룸비니동산

인도에서 국경을 넘어 네팔땅에 입국하여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 참배한다. 입구 안내판엔 룸비니는 "세계 평화의 원천"이라 젹혔다.

그렇지! 불교는 종교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단 한번도 피를 흘린적이 없으니 평화의 원천이지!,
 이곳에는 수백년 넘은 고목과 아쇼카왕의 석주가 순례자들을 반긴다.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는 그다지 넓지 않은 구역이다.

붓다 왕자가 태어나 처음 몸을 씻고, 마야 부인이 태자를 낳고 씻었다는 푸스카리니 연못이 있고, 무우수가 있고,
룸비니 마야 데비 사원 외부에 아소카 석주가 있다. 현장의 기록에는 말의 형상이 상단부에 있다지만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룸비니가 붓다의 탄생지로 증명된 것은 이 아소카 석주 덕이다.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소키왕"은 즉위 20년이 지나 이곳을 참배했다. 이곳에서 붓다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도록 했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됐음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며, 아소카왕은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하고 추수세는 생산물의 1/8만 거뒀다.

룸비니동산 사진보기

 

                                            ▲네팔 최대의 불탑인 보다나트

 네팔은 인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카트만두가 수도이며 약 3,000만 명에 육박하는 국민 중 힌두교가 대부분이다.
1인당 GDP 600불도 안 되는 나라로 우리나라 60~70년대의 경제환경의 나라이지만 행복지수는 높은 국가이다.

순례 마지막 여정으로 동양에서 가장 큰 불탑인 보다나트 참배다. 예로부터 티베트 불교인의 주요 순례지로 예전에 카트만두와 라사를 잇는 히말라야 교역이 성행했을 때에 티베트의 상인과 순례자들은 반드시 이곳을 들러 무사히 히말라야를 넘은 것을 감사하고 안전히 돌아가기를 빌었던 곳이기도 하다. 중국이 티벳을 점령한 후.. 티벳인들은 네팔과 인도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불탑은 티벳인 이주마을의 중심에 있다.

여기서 간단한 쇼핑과 휴식을 취한후 공항으로 이동 하여 카트만두 공항헤서 KE696편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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