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와 5'18

황장엽-김덕홍의 비밀증언: 5.18 북한이 저질렀다

서석천 2013. 4. 23. 19:44

‘황장엽 망명’ 특종 金容三 기자가 이제야 털어놓는 또 다른 특종

“황장엽 망명 직전 또 다른 북한 최고위층 2명과도 접촉 있었다”

⊙ ‌‌황장엽과 뜻을 같이한 2명 중 1명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또 다른 1명은 북한 현직 최고위층
⊙ ‌‌‌황장엽 망명 후 처형당한 북한농업상 서관히는 “뜻을 같이했던 인물”이라고 황장엽이 밝혀
⊙ ‌‌당시 공개 못했던 황장엽 친필서신 중 5·18 광주 관련 발언 내용: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
⊙ ‌‌‘황장엽 리스트’는 애초부터 없었다
⊙ ‌‌황장엽은 아들 황경모를 통해 김정일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
⊙ ‌‌전 국정원 고위 관계자의 충격 증언: “6·15 남북정상회담 후 국정원은 황장엽을 방치하려 했다”

  수요일이었던 1997년 2월 12일 오후. 시사월간지의 제작 일정상 막바지 기사마감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당시 《월간조선》 김용삼(金容三) 기자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텔레비전에서 다급하게 황장엽(黃長燁)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김덕홍(金德弘)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의 망명 소식이 베이징(北京)발(發)로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도를 보는 순간 김 기자는 “이럴 수가… 뭔가 착오가 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김 기자가 ‘착오가 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은 황 비서의 망명 개시 시점을 그해 4월께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김 기자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황 비서와 김 총사장이 망명을 결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 기자가 황장엽, 김덕홍이라는 북한의 두 거물이 남한으로 망명을 꿈꾼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그들이 망명을 결행한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인 1996년 2월 무렵이었다.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의 망명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은 중국 등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이연길(李淵吉·2010년 3월 작고)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이다. 김 기자도 이 단체의 간부인 중앙상임위원을 맡고 있었다.
 
  이 회장은 8·15 광복 후 북한에서 반소(反蘇) 운동에 가담했다. 6·25전쟁 때는 미(美) 극동군 사령부가 운영하는 대북(對北) 첩보부대인 KLO(Korea Liaison Office·일명 켈로 부대) 고트대(KLO 소속의 한 지대) 대장이었다. 이 회장은 생존 시 북한의 유력 세력과 연계해 김정일(金正日)을 제거 또는 암살한 다음 북한에 개방적인 정권을 수립한 후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싸고 안전하다는 철학을 가진 인물이었다. 즉 공작적 차원의 통일을 주창했던 것이다. 이 회장이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를 발족시킨 것도 이런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장이 김덕홍씨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95년 5월경부터였지만 그 당시 김 기자는 이 회장의 김덕홍씨 접촉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황장엽 선생이 보낸 친필서신.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
 
지난 96년 7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황장엽 선생(왼쪽)과 이연길 회장.
  소규모 무역업을 하는 이 회장의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었는데 그 부근 허름한 다방에 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이 많이 모였다. 이 회장은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 조선족 보따리상들은 이 회장 등이 구해준 의복 등을 중국에 가져가 팔았다. 김 기자도 이 회장 요청에 의해 조선족 보따리상들이 중국에 가져가서 팔 물건들을 구해주곤 했다. 그 물건들 중 많은 양이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만든 려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사장에게 건네졌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 회장과 김덕홍씨가 서로 안면을 트게 된 것이다.
 
  서로 친숙하게 지내게 되면서 김덕홍씨는 황장엽 비서의 뜻을 이 회장에게 전하게 된다. 이 회장과 황장엽, 김덕홍 두 사람은 북한의 현실 타개를 위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의기투합하게 된다. 김정일이 남북한 모두에 불행의 근원이라는 점을 함께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첫째, 김정일을 설득해 해외 망명을 유도하거나, 둘째 민중봉기에 의해 김정일과 그의 추종집단을 타도, 셋째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김정일 제거, 넷째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할 경우 자신의 한국 망명을 통해 김정일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이들의 최종 선택은 그 시나리오 중 마지막 고려사항이었던 황장엽 망명으로 귀결된다.
 
  김덕홍씨와 안면을 트기 전 이 회장은 러시아와 중국 등지를 오가며 러시아 벌목공 등 탈북자를 돕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 특수부대 출신들을 훈련시켜 북한에 침투시키는 작업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그의 지론인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던 것이다.
 
  이 회장은 김덕홍씨와의 접촉을 통해 더 쉽고 더 빠른 방법으로 그의 지론인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실천할 방법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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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4.27 18:05 | 수정 : 2013.04.27 19:13


	1996년 7월 중국 베이징의 민가에서 만난 황장엽 당시 노동당 비서(왼쪽)와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
1996년 7월 중국 베이징의 민가에서 만난 황장엽 당시 노동당 비서(왼쪽)와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

1997년 2월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외에도 당시 한국 측과 접촉했던 북한 고위층이 2명 더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아직도 북한 권부(權府) 내에 건재하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같은 사실은 《월간조선》5월호에 실린 김용삼(金容三) 전 《월간조선》편집장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황장엽 망명 당시《월간조선》기자였던 김용삼 전 편집장은 당시 비밀조직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회장 이연길) 중앙상임위원으로 있으면서 황장엽 전 비서의 망명 과정 내막을 지켜볼 수 있었다.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이연길 회장은 6?25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가 운영하던 대북(對北)첩보부대인 켈로(KLO)부대의 한 지대(支隊)인 고트부대장이었다. 이 회장은 북한 내 유력세력과 연대(連帶)해서 김정일을 암살 혹은 제거하고 북한 내에 개방적인 정권을 수립해야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를 만들고, 북한 고위층과 접촉하면서 일종의 사설(私設) 공작망을 구축했다. 다음은 김용삼 전 편집장의 증언.

소규모 무역업을 하던 이연길 회장은 1995년 5월경 려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사장을 알게 됐고, 김 사장을 통해 황장엽 비서와 접촉하게 됐다. 황장엽 비서 망명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은 사실인데, 이연길 회장은 우선 황장엽 비서의 아들 황경모를 통해 김정일 암살을 구상했다. 황경모는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현재 북한의 최고실세로 알려진 장성택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당시 북한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던 황경모는 김정일 정권의 타락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군부와 호위총국 내에 두텁게 형성돼 있는 인맥을 활용해 김정일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경모와 그의 동지들은 거사 자금 마련을 위해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를 빼내 해외에 내다 팔려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북한 반탐(反探)기관이 이 사실을 포착했다. 조카사위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된 장성택은 간염을 핑계로 황경모를 급하게 군병원에 입원시켰다. 황경모는 장성택이 만들어준 알리바이 덕분에 위기를 넘겼지만, 아버지가 망명한 후인 1999년 비밀리에 처형됐다.

1996년 7월 3일 중국 베이징의 한 민가에서 이연길 회장과 비밀리에 만난 황장엽 비서는 “그쪽(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북한) 사람이 박혀 있다(북한 첩자가 한국 권력층에 침투했다는 뜻이다).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덕홍 사장은 그 전날 이연길 회장에게 “지난 6월 15일 황장엽 비서 동지가 출근길에 평양에 있는 내 사무실에 들러 봉투에 든 서류를 꺼내보라고 하기에 내가 꺼내보았다. 그 내용을 본즉 남한의 청와대 비서실장 김광일이 제보자와 나눈 대화록이었다”면서 “김광일과의 대화자가 바로 북한에 이런 내용을 제보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청와대 내에도 불순세력이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여 김광일 비서실장 주변을 조사했고, 김광일 비서실장도 이 문제로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광일 실장은 자기 친구이자 재일교포인 김00(정확한 이름은 밝혀지지 않음)이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만나 북한에 보고된 내용과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연길 회장은 김덕홍 사장의 요청으로 우리 정보기관을 통해 입에 넣고 깨물면 터지는 자살용 극약 앰풀(황장엽에게 전달됨)과 자살용 만년필 독침(김덕홍이 소지함)을 구해서 건네주기도 했다.

황장엽 비서는 1996년 말 김덕홍 사장을 통해 1996년말 북한 최고위층 두 사람의 대리인을 이연길 회장에게 소개해 주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2003년 6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 전 대남담당 비서였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은 아직도 북한 최고위층 인사로 건재하다.
황장엽 비서와 김덕홍 사장은 원래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 체제 전복을 꾀했으나, 감시가 심해지면서 망명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한국으로 들어온 후 1980년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했다. 《월간조선》김용삼 기자와 인터뷰(1998년 7월호 게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김덕홍 사장은 “조선노동당 대남 부서가 있는데 그 부서에 소속되어 있던 상당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국정원이 “광주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니 기사화되면 정말 큰일 난다”면서 강력하게 보도 자제 협조 요청을 해오는 바람에 이 증언은 기사화되지 못했다.

과거 논란이 됐던 ‘황장엽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연길 회장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선 후 임복진 전 의원(당시 국민회의 안보특별위원장)에게 황장엽 망명 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이 회장은 “황장엽 리스트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는데, 안기부는 마치 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처럼 흘려 대선을 앞둔 야당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면서 “《조선일보》가 황장엽 망명사건의 전 과정과 본질을 사실 그대로 보도함으로써 안기부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가 사전에 봉쇄됐으며 결국 이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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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엽-김덕홍의 비밀증언: 5.18 북한이 저질렀다  

국정원보다 먼저 황장엽을 통한 작전을 민간 차원에서 최초로 주도했던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상이 2013.4.22. TV조선 ‘신율의 시사열차’ 출연하여 5.18에 대한 그야말로 충격적인 내용을 공개했고, 이 내용은 군 정보당국에도 전해주었지만 군은 침묵했다한다. 이런 내용은 진행자가 신율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1996년 11월 10일, 김용상이 자세히 확인한 내용은 이러했다.

황장엽: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을 (남한에) 전가한 일”

김덕홍: “조선노동당 대남부서에 소속된 사람들 상당수가 광주민주화운동 끝난 후에 일제히 훈장 받았다

 

황장엽과 김덕홍이 김용상에게 알려준 내용은 탈북자들 대부분이 진술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더 이상 무슨 정보가 더 있어야 5.18을 북괴가 일으킨 폭동이었다는 사실을 납득한다는 것인가?

 





http://blog.daum.net/smj4210/15718522

 

동영상 (TV조선 신율의시차열차)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22/20130422902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