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국민들이 햇볕정책의 말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한 이래 수십년간 외쳤던 구호가 "고려연방제 통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자 애국 국민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고려연방제"를 햇볕정책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이 단어를 살짝 다른 말로 포장하였다고 해서 그의 음흉한 "연방제" 통일의도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노무현이 햇볕정책을 계승한다고 할 때 무엇을 계승하는 것인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의 "연방제 통일" 음모를 표면화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007년이 한반도 운명을 엇갈리게 할지 모르는 해이며, 국민이 연방제 사변을 막아야 하는 이유는 연방제 통일이란 바로 적화통일이기 때문입니다.
연방제 통일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김대중이 "고려연방제 통일"을 주장하여 왔으므로 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만큼 그의 연방제 통일안이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연방제 통일을 막으려면 광주폭동은 국가 전복을 노렸던 폭동이었다는 진실을 말하여야 합니다.
중국은 1980년 5월 20일에서 5월 22일 사이에 군부에서는 김재규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김일성이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남침하려 한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에 통보하였으며, 일본 정부는 즉시 그 사실을 한국 정부와 중앙정보부에 그리고 미국 정부에 통보하였습니다. 김일성이 남침 전에 먼저 중국에 알려야 했는데(조중 상호방위조약 때문에), 당시 중국 경제의 목을 핑퐁 외교에 달고 있었던 중국은 다시 한국전이 발발하여 모처럼 30년만에 찾아온 미국과의 외교 정상화 기회가 물거품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통보한 것이요, 일본 정부는 즉각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 알리고 미국은 즉각 항공모함 두 대를 한국에 보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최규하 대통령의 회고록이 발간될 때 좀 더 소상하게 밝혀지겠지만 더 늦기 전에 광주사태의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한국 언론은 김대중의 간첩 경력에 대해서 이상스러울 정도로 관대하였다. 1972년이 김대중이 일으키려 하였던 군사쿠데타를 유신이 막자 김대중은 일본에 건너가 조총련 산하단체 한민통 두목이 되었으며, 북한에서 보내주는
공작금으로 정치 활동을 하였다. 적국에서 자금을 받아 정치활동을 하였을 때 다른 나라의 기준으로는 간첩이건만 한국 언론은 민주화 운동가로 미화시켰으니 전세계가 한국인의 좌익 미화에 속아넘어갔던 것이다.
김대중은 해방정국 때 공산주의자였지만 북한과의 첫 연결고리는 1973년 결성된 한민통이었다. 비록 허수아비였을망정 김대중은 한민통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바로 이 한민통이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단체요, 광주 녹두서점에 북한 사상서적들을 공급하다가 1980년 5월에 미리 입국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였던 단체였다.
1972년 김지하 시인 등 민간 좌익과 오죽회 등 군부 내 좌익을 끼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세우려 하였던 이종찬 1980년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이종찬이 중앙정보부에서 김대중을 또 만났다. 그런데 김대중 내란 사건 총책임자였던 이종찬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을 김대중이 대통령되자마자 국정원장에 임명하였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김대중의 음흉한 거짓말들을 하나하나 양파껍질 벗겨내듯이 벗겨내려면 과거사진상위는 광주사태 당시 도대체 이종찬과 김대중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여러 주동자들이 괴전화를 받았다고 증언한다. 누군가가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고 국가 기밀을 전화로 누설하기도 했다. 광주 녹두서점 주인 동생은 부산항에 미항공모함이 입항해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으며, 한국 뉴스는 이 특종기사를 보도하고 싶어했으나 5.17 비상국무회의는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보도치 못하게 하였으며, 폭동 주동자들은 미국이 폭동을 지지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고 대자보를 붙여 광주시민들을 속였다.
(훗날 운동권이 미국 문화원들에 불을 지르며 반미하게 된 이유가 광주사태 때 미항공모함이 시민군을 지원하지 않은데 대한 보복이었다.)
사실, 광주사태 당시 정부 내에 폭동 지휘부와 내통하는 간첩이 있었을 가능성은 5.18측에서 먼저 제시하여야 한다. 5.18 검찰은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광주사태 진압에 털끝만치도 관여한 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폭도들이 파출서를 파괴하며 순경들을 묶어놓고 각목으로 때리는 폭동이 일어나자 전남도지사와 광주시장과 광주경찰서장이 당시 30사단(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이었던 정웅 소장이 폭동 진압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장교 군번이 1950년 군번으로 당시 장성 중 가장 선임이었던 정웅 소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주영복 국방부장관 외에는 없었다. 정웅 장군은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폭동 진압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지금 노무현 독재정권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사태에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하여 전국을 몇년간 뒤졌어도 여전히 아무런 것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5.18 검찰이 발표한 대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사태에 관여한 적도 없었고, 군대 행정상 관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민군은 전두환이 진압하였다고 주장하여 왔다. 어떻게 알았는가? 문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전두환은 광주사태 진압과 관련하여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5.18측이 광주사태 진압은 전두환이 하였다고 주장하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밝혀야 한다.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광주향토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던 공수부대원들을 풀어 폭동 진압을 하였음에도 전두환이 진압하였다고 주장하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미개인들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냥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사기꾼들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1980년 5월 10일 중국은 일본 정부에 두가지 사실을 알렸다. 5월 20일 경 김재규 사형 집행을 기해 군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며, 때를 같이하여 김일성이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남침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으며, 일본은 그 사실을 즉각 미국과 한국 정부에 알렸다. 그래서 당시 석유위기 때문에 5월 10일 중동 석유외교를 떠나셨던 최규하 대통령께서 일정을 취소하고 갑자기 귀국하셨으며, 신현확 총리가 5.17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였으며, 미국의 항공모함 두 대가 급히 부산과 제주도에 입항하였던 것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였던 이종찬을 최규하가 영국 무관으로 발령냈기 때문에 최규하는 이종찬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과 이종찬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의 회고록이 공개될 때 어쩌면 놀라운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규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발간되는 것을 김대중은 무척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김대중의 모든 거짓말들이 탄로날 때가 되었다.
김대중은 박정희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주장해 왔으며, 그 거짓말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대통령이 되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노무현 독재정권의 과거사조사위는 김대중의 주장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다. 교통사고는 단순 교통사고였다. 그리고, 교통사고 당했다며 지팡이 짚고 다니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가 지팡이 버리고 걸어다닌 사실에 대하여
과거사조사위가 밝혀내야 할 것이다.
1973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현해탄 납치사건 역시 말 그대로 단순납치사건이었다. 이후락이 사람을 죽일 만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죽일의도도 필요도 전혀 없었다 (월간조선 2월호). 김지하 시인 자서전에 보면 1972년에 중앙정보부의 이종찬과 김지하 시인과 오죽회 등 군부 내 좌익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이 집권하려 하였다. 3공화국은 직접선거로 탄생되었는데 비해 김대중 일당은 선거 없이 쿠데타로 집권할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그 경우 만약 쿠데타가 성공하였으면 좌익이 4년 후에 그냥 물러났을까? 쿠데타 음모가 사전 발각되어 이종찬은 영국으로 발령나고, 김대중은 수상한 자금을 받으며 일본에서 조총련 산하단체 한민통에서 대한민국 전복을 목적으로 반국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후락 정부가 그를 본국으로 데려와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다 주는 것이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김대중은 박정희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노무현 독재정권의 과거사조사위는 오히려 박정희는 그런 납치사거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음을 밝혀냈을 뿐이었다.
1974년 8월 광복절 행사 때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다가 육영수 여사만 암살하였는데, 그가 속한 단체가 바로 훗날 광주사태 선동의 한 배후였던 한민통이요, 김대중이 반국가 공작금을 받으며 왕초 노릇하던 바로 그 단체였다. 문세광이 1년간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훈련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현해탄 납치 사건 이전에 이미 한민통은 대한민국 전복을 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준비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대중이 (비록 조총련 꼭둑각시였지만) 한때 우두머리 감투를 쓰고 있었던 한민통 단원 문세광과 김대중의 관계에 대하여 과거사조사위가 밝혀내야 할 문제이다.
글/역사학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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