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북을 향한 2대(代)의 충성 |
박지원의 돈문제는 더 캐내어야 한다 |
박지원, 북을 향한 2대의 충성 (4부) (김영완을 미국에서 소환하고, 박연차 게이트의 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장사꾼에게 돈이란 전지전능한 신이요, 만능의 목표다. 장사꾼이 하루를 시작할 때면 반드시 재복(財福)의 신을 부르고, 두 손 모으고 고개를 조아리며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 또한 장사꾼은 밑지고 팔지 않는다. 밑지고 거래하는 장사꾼은 없다는 뜻이다. 밑진다는 것은 장사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장사란 올바른 관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장사꾼은 어떻게든 상대의 호주머니를 노린다. 그러기 위해 동원되는 거짓말은 변함없는 장사꾼의 무기요 동반자다. 온갖 거짓말로 상대를 현혹시켜야만 더 많은 이문(利文)을 더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른 상술이 아니라, 비겁한 상술(商術)을 터득한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고, 속이는 것을 업(業)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박지원이 그토록 그의 과거를 거짓으로 포장하였는가는 그가 박지원은 장사꾼 출신이란 점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 단국대 상과를 나와 가발장사를 하던 그는 분명 남을 속이고 부풀려야만 더 많은 이익이 있음을 배운 장사꾼이다. 그리고 전두환에게까지 빌붙었던 만큼, 출세에 혈안이 되었던 인물이다. 최근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리고 이광재 강원지사를 낙마시킨 박연차 게이트가 완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박연차 게이트에서 완성시키지 못한 나머지 사례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노무현 죽음 직후 묻혀진 박지원 관련 박연차 진술이었다. 박연차의 돈을 받은 인물 속에는 박지원이 있었다. 돈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간다는 장사꾼의 생리로 볼 때, 박지원이 박연차의 돈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해지는 일이다. 정몽준의 죽음에서 드러난 ‘150억원 착복’이라는 혐의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 박지원이다. 그런 그가 공짜돈 마다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2010년 11월 17일 자 시사저널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박연차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갑작스럽게 봉합되었던 당시 수사 내용에 대해 마침내 입을 열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5일 저녁, 기자는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을 만났다. 모임에 참석한 인원은 기자와 이 전 부장을 포함해 10여 명이었다. 이 전 부장은 지난해 5월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지휘했다. 수사 와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수사를 중단했고, 7월에 검사 옷을 벗었다. 25년 만에 검찰을 떠난 것이다. 기자가 이 전 부장을 만났던 당시 시점은 국회 국정감사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전 부장은 ‘노 전 대통령의 차명 계좌 발언’ 파문으로 인해 10월18일에 예정되었던 국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된 상황이었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이날 그는 상당히 울분에 찬 목소리로 민감한 사안들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이 전 부장은 “국감에 (증인으로) 나갈지 안 나갈지 모르겠다”라면서 “(국회) 법사위에 박연차(전 태광실업 회장)로부터 돈 받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박연차 진술이 그랬다. 그런데 나를 (증인으로) 부르다니 참 이해가 안 된다. 국감장에 증인으로 나가게 되면 얘기할 수도 있다. ‘여기 계신 의원님들 중에 두 분이…’”라는 충격적인 말도 토해냈다. 상당히 격한 감정이었고 목소리도 높았다. 자신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한 국회의원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한 셈이다. 그는 “솔직히 박연차 사건이 터지자 대다수 야당 의원이 ‘노무현을 버려라’ ‘굿바이 노무현’이라고 하지 않았나. 야당에서 누구 하나 봉하마을에 가서 (노 전 대통령과) 술 한 잔 하면서 ‘정권이 바뀔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라’라고 했다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라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강한 연민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 후 이인규 씨는 시사저널 기자와 일문일답(一問一答)을 한다. 기자: 박연차 전 회장이 돈을 주었다고 진술한 민주당 의원들은 누구인가? 이인규: 현재 민주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는 박지원 의원과 법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우윤근 의원, 두 사람이다. 기자: 언제, 어디서, 얼마를 받았다는 것인가? 이인규: 구체적으로 언제 돈을 받았다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참여정부 시절이었다. 박대표는 신라호텔 2층에 있는 중식당에서 1만 달러를 받았다. 우위원장이 받았던 돈의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2만 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박대표가 받았던 액수보다는 많았다. 당시 수사팀에서도 우위원장은 의외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박연차는 주로 신라호텔 식당을 이용했다. 기자: 당시 두 의원에 대해 수사를 하지 않았나? 이인규: 박연차가 (지난해)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돈을 건네주었다’라고 진술했던 정치인들 가운데 아직 공개되지 않은 정치인은 이 두 사람이다. 당시 박연차의 진술을 확보해놓은 상태였고, 본격적으로 수사에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수사에 들어가지 못한 채 (수사가) 종결되었다. 기자 : 박지원 대표와 우윤근 위원장 등에 대한 수사가 뒤로 미루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이인규: 박연차에게서 받은 돈의 액수가 다른 정치인들보다 적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수사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기자: 두 사람이 돈을 받았다는 것을 어느 선까지 알고 있나?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 1과장이었던) 우병우(현 대검 수사기획관) 등 수사팀 관계자들은 다 알고 있다. 지금 총장(김준규 검찰총장)과 차장(차동민 대검 차장)도 다 알고 있다.』 이제 박지원은 두 가지의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 하나는 대북송금 과정에서 불거진 150억 수수설 과 박연차가 진술한 금품수수설이다. 이 두 개의 혐의에 대해 대한민국 검찰은 재심 착수에 들어가야 한다. 당시 대북송금사건은 특검까지 이어졌으나 핵심참고인이자 증인인 김영완이 미국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사실상 반쪽짜리 특검이 된 바 있다. 대북송금의 핵심주역이었던 박지원은 현대그룹으로부터 1백50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됐으나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만약 김영완의 신병이 확보되었다면 박지원이 무죄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박연차 게이트 역시 끝나지 않은 사건이다. 박연차의 진술이 있고, 그 돈을 맏았다는 박지원과 우윤근이 버젓이 살아있는 까닭이다. 미국에 도피중인 김영완을 인터폴을 통해 소환해야 하고, 박연차 게이트의 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노무현이 죽었다고 해서 왜 이들의 범죄가 감추어져야 하는가.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인사이드 월드 논설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다음 5부는 ‘장사꾼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박지원의 오늘을 점검해 봅니다 ![]() ▲ 24일 여의도 민주당 간판이 사라졌다. '야반도주 했나?'라는 농담도 기자회견장에서 나왔다. 박지원, 북을 향한 2대(代)의 충성 (1부) 인도하면, 쥐까지 신(神)이 되는 힌두교라는 종교와 호랑이가 떠오른다. 인도는 사람 많고, 신도 많고, 호랑이도 많은 지구상에서 유일한 나라라고 할 것이다. 인도의 호랑이는 벵갈산 호랑이라고 하는, 우리네 백두산 호랑이보다는 체구가 작은 남방계 호랑이다. 흔히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다. 호랑이가 많다 보니, 당연히 호환(虎患)도 많았던 모양이다. 특히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면서 철도를 놓을 때, 서식지를 잃은 호랑이들이 철도 공사 인부를 습격하였고, 이어 오지(奧地)의 배고픈 호랑이들이 근처 마을주민들을 잡아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인도엔 식인호랑이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결국 인도정부는 식인(食人)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전문 포수를 고용하였다. 그런데 이 호랑이 전문 포수들에게는 불문율이 있었다. 식인호랑이를 잡을 때는, 그 호랑이가 암컷일 경우 반드시 새끼까지 사살(射殺)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암컷은 새끼를 기르기 위해 많은 고기가 필요했기에 잡기 쉬운 사람을 선택하여 사냥했고, 그 새끼는 바로 사람고기로 키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람고기에 맛을 들인 새끼는 다시 식인호랑이가 된다는 것이 사살(射殺)의 이유였다. 필자(筆者)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2대(代), 혹은 3대(代)에 걸쳐 북한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새끼호랑이에게 사람고기를 먹여 키우는 식인호랑이처럼, 좌익들은 그 자식을 다시 공산주의자로 키우고 있었다. 필자(筆者)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새삼 식인호랑이 가족을 연상하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자식이 모두 좌익인 집안을 보라. 범민련 소속 붉은 아이들은 자식을 낳으면, 자기 자식을 김정일 초상화 앞에 올리면서 후기수(後旗手)로 키우겠다고 맹세한다고 하였다. 마치 한번 사람고기 맛을 본 식인호랑이처럼, 한번 공산주의 맛에 들인 좌파 혹은 좌익들은 자식마저 붉게 만든다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다. 그것은 자식마저 김정일의 노예로 바친다는 정녕 슬픈 이야기였다. 박지원은 부친의 좌익 활동에 질문을 던진, 일요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디 증명할 수 있으면 해 보라.”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법. 수많은 진도 주민들의 증언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1976년 2월 25일 발간된 진도 군지(郡誌)의 기록과 진도 경찰서의 해방 이후 좌익과의 전투기록 등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전남경찰청도 6.25 전후 빨치산 토벌기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설마 박지원이 대통령 비서실장과 문화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이 기록까지 변조 혹은 소멸시키지는 않았으리라. 우리는 진도 고군면 전투와 두목격인 박모가 사살되었다는 진도 군지(郡誌)의 기록을 이미 확보하였다. 이제는, 김기일 ․ 곽순배 형사가 참여한 전투 기록이 진도 및 전남도 경찰청 빨치산 토벌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므로, 그 자료만 확보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빨치산 토벌기록, 그것은 국가기록이므로 반드시 존재할 것이지만, 만약 누군가 소멸 혹은 변조시켰다면 중죄(重罪)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뜻있는 분들께서 진도 및 전남도경찰청에 있을 당시 빨치산 토벌 기록을 찾아주셨으면 한다. 필자(筆者)는 이 일을 맡아 주실 애국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록을 찾아 국가보훈처에 제시하고, 박지원 부친의 독립유공자 등록을 삭제하고 보훈 혜택을 철회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원적을 찾아 박지원의 가족사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것이 선량한 유권자들의 올바른 판단을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지원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이 일은 나라의 정의(正義)를 지키고 돕는 일이다. 어찌 북한의 정체를 알면서 2대를 걸쳐 충성하고, 그 새끼를 다시 식인호랑이로 기르는 현실을 모른 척 할 것인가. 인도의 식인호랑이 사냥꾼들처럼 우리도 좌익을 잡을 때는 그 후손까지 잡아야 한다는 역사적 경험과 필요성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왜 연좌제가 필요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필요한 이유에 대한 답을, 좌익들이 판을 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듣고 싶다. 좌익들은 ‘연좌제네, 인권침해네’ 하며 따지겠지만, 그들은 한번 사람고기 맛을 들인 자들이고, 한번 민족의 가슴에 죽창을 꽂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다시 죽창을 드는 것을 막아야 하고, 민족과 동포, 형제에 대한 사람 사냥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너와 내가 오늘을 사는 슬픈 법칙이다. 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인사이드 월드 칼럼니스트,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amistat@paran.com 박지원, 북을 향한 2대(代)의 충성 (2부)(박지원의 언론 매국 활동을 중심으로) 비록 촌부(村夫)라 하여 나라에 대한 걱정마저 없을 것인가. 비록 소인(小人)이라 하여 어찌 나라를 바로 세울 복안이 없을 것인가. 박지원을 비롯한 좌익들은 김대중 이후 이 나라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으로부터 그 반역을 시작하였다.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조작된 정보만 들려주는 북한의 통치법이 적용된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6.15선언을 발표했고, 오찬 자리에서 대동한 당시 박지원 문화부장관은 김정일에게 남측 언론사 사장단을 초청해 달라고 부탁한다. -일설(一說)로는 김정일이 부탁했다고도 함- 김정일은 승락했고, 박지원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제외한 한겨레 최학래, kbs박권상 및 대한민국 신문사 사장과 통신사 사장단 46명을 대동하여 그해 8월에 북을 방문, 1주일간 머물며 "남북언론합의서"란 것을 만들어 낸다. 그 합의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북언론합의문 1.남과 북의 언론사들과 언론기관들은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고 통일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언론 활동을 적극 벌여나가기로 한다. 2.남과 북의 언론사들과 언론기관들은 새롭게 조성된 정세의 흐름에 맞게 민족내부에서 대결을 피하며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저해하는 비방 중상을 중지하기로 한다. 3.남과 북의 언론사들과 언론기간들은 언론. 보도활동에서 서로 협력하며 접촉과 왕래 교류를 통하여 상호 이해와 신뢰를 두터이 해나가기로 한다. 4.남과 북 언론기관들의 접촉은 남측에서는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를 비롯한 주요 언론단체 대표들이 참여하는 ‘남북언론교류협력위원회’가 북측에서는 ‘조선기자동맹중앙위원회’가 맡아 하기로 한다. 5.남측 언론사 대표단은 북측에서 초청한 데 대한 답례로 북측 언론기관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초청하였으며 북측은 앞으로 적당한 기회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한다. 2000.8.11 한국신문협회회장 최학래 노동신문책임주필 최칠남 그러니까, 이 합의문은 한겨레 최학래를 동원하여 남한의 언론을 북에 넘긴 요물(妖物)인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반북(反北) 反 김정일 보도금지 2.반통일(反統一)보도금지 3.반화합(反和合)보도금지 4.반민족(反民族)보도금지였으니, 이후(以後) 대한민국은 북한 김정일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합의서 서명 후, 김정일과의 오찬간담회 석상에서 박지원 및 언론사 사장단은 김정일에게 이 합의내용을 확실하게 이행할 것을 다짐했고, 이어 김정일의 장황한 훈시를 듣게 된다. 이러한 남북언론합의서 후부터 북 김정일을 놓고 대한민국의 방송이나 신문들은 "위원장"이라는 칭호를 깎듯이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합의문은 남한 언론의 항복문서였던 것이다. 박지원은 이 항복을 선도하였고, 항복문서를 솔선하여 북에 바친 것으로 보인다. 방송과 언론에 이렇듯 재갈을 물려버린 것이 당시 문화부장관 박지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후일(後日) 이 합의서로 인하여 대한민국 언론은 김정일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개탄하는 진정한 언론인도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 가고나인 것은, 이 합의서를 실천 이행할 창구로 북에서는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회(위원장 노동신문책임주필 최칠남)를 내세웠고, 남에서는 ´남북언론교류협력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를 전국언론노련(현 전국언론노조)에 맡겼다는 점이다. 전국언론노조란, 지난 촛불폭동에 적극 가담함은 물론 언론 공공성 사수투쟁을 빙자한 MBC PD수첩 살리기, 최시중 퇴진 투쟁, ‘YTN 구본홍 저지 투쟁’을 벌이면서 ‘정연주 구하기’에 걸림돌이 되는 KBS 노조위원장을 징계하는 등 횡포를 부렸던 단체다. 박지원은 바로 이곳에다 남북언론합의문 이행을 독려 감시하는 기능을 준 것이다. "민주언론실천을 위한 언론개혁, 민족의 평화통일 활동,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목적사업으로 명시하고 있는 전국언론노조의 규약은 그들이 바로 노동자 좌익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 후로 한국 언론은 김일성의 가짜 혁명역사와 김정일의 학정(虐政)을 한 줄도 다루지 못했고 북에서 굶어죽고 맞아 죽는 북한동포의 참상과 인권문제마저 눈을 감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한 내에서 벌어진 반김․반핵 국보법사수 애국운동에 대한 사실보도조차 꺼렸다. 그러니까 필자(筆者)가 그토록 피를 토하며 논하던 전교조 문제가 한번도 다루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필자(筆者)는 전교조 고발대회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어느 지상파 방송이나 신문에서 전교조에 대한 공과(功過)를 다루는 특집이 다루어진다면, 우리는 좌익으로부터 승리하여 나라를 탈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려 20여년을 방송과 언론은 전교조 문제를 덮어두고 있었다. 이제 전교조를 다루지 못한 그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바로 언론노조의 감시와 방해 때문이었던 것이다. 진정 목에서 피를 토할 일이지만, 아직도 이명박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전교조가 나타난 지 무려 20여년.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 속에서 그 어떤 단체도 언론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나, 오직 전교조만은 이 언론노조의 보호를 받고 건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전교조의 폐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남북언론합의서로 인하여 한국 언론은 ´노동신문책임주필 최칠남´을 검열본부장으로, 김정일 휘하의 ´노동당선전선동부´ 수중에 들어간 격이 되고 말았다. 이를 존경하는 백승목 기자는 2000년 8월 11일을 한국 언론 치욕의 날인 ´언치일(言恥日)´로 삼고, 김대중, 박지원, KBS 박권상, MBC 김중배, 한겨레 최학래를 庚辰(2000)언치오적(言恥五賊)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대한민국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면, 과거 좌익들의 족적(足跡)을 찾아 하나씩 제거하는 일이다. 가장 시급한 일은 김대중과 김정일, 그리고 박지원이 추진했던,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 남북언론합의서를 폐기하고 언론노조를 해체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글/정재학(IPF국제언론인포럼 편집위원, 시인정신작가회 회장, 데일리안 편집위원, 인사이드 월드 칼럼니스트,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펌글- |
'"종북'핵'안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재오 이력서' (0) | 2011.03.01 |
---|---|
언론과 정치권이 덮어준 김대중 시절 國情院의 행각 (0) | 2011.02.27 |
김정일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흉계는 (0) | 2011.02.07 |
金萬福 전 국가정보원장 서울대 特講 강의록 (0) | 2011.02.05 |
김정일집단+광우난동세력=사기폭력단! (0) | 2011.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