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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철 송환 촉구 청원 2006년 초 당시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미얀마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측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가서 살고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는 사실을 확인, 송환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鄭亨根 의원의 소개로 양영태 씨 등 70여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한 송환 촉구 청원서는 "북한은 1983년 미얀마를 방문중이던 全斗煥 전 대통령과 수행범을 암살하기 위해 유례없이 처참한 폭탄테러를 자행했다"면서 "이러한 反인간적 잔혹행위에 대해, 북한은 여태까지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범행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원서는 이어 "북한 공작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민철은 미얀마 당국에 체포돼 복역하며,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는 뜻을 수 차례 밝힌 바 있다"면서 "미얀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석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만큼, 유일한 생존자 테러범을 우리가 송환해 관련 진상을 낱낱이 파헤쳐 온 국민들에게 알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줘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2006년 11월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金萬福씨 인사 청문회가 열렸다.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은 이 자리에서도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行을 원하고 있는데 이를 정부측에서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것 자신할 수 있습니까. 위증죄 됩니다." 鄭亨根: 후보자는 83년 10월 아웅산 폭탄테러 공작원으로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북한 공작원 강민철이 수감 중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金萬福: 예,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본 위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강민철이 한국의 관계기관에 轉向의사를 표시했으며 한국으로의 송환을 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듣고 있습니다. 정형근: 듣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정형근: 국정원은 아웅산 테러사건 이후 면회 등 강민철과 접촉한 내용 및 시기에 대해 외교상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접촉한 사실을 말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요, 밝힐 수 없습니까? 김만복: 아닙니다.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강민철과 접촉한 일이 없다고요? 김만복: 예. 정형근: 그것 자신할 수 있습니까? 위증죄 됩니다. 김만복: 확인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정형근: 확실히 없습니까? 김만복: 그것을 제가 보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정형근: 아니, 본인이 모릅니까? 보고받은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만복: 지금 대답은 ‘모른다’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정형근: 아니, 밝힐 수 없다는 것하고는 다르지요. 면회를 했어요. 면회를 했는데, 지금 오려고 그러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김만복: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은, 북한은 남쪽이 했다라고 그렇게 주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정형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김만복: 그러니까 그 주동자를 남쪽이 데리고 오면 ‘봐라, 너희들이 시킨 사람 이제 너희들이 너희 나라로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라고 북한이 선전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형근: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조사를 갖다가 수년을 해 가지고 斷交까지 한 사례인데, 그것을 안 데려온다면 말이 안 되고요. 그렇다면 왜 KAL기는 과거사에 넣고 이것은 과거사에 넣지 않습니까? 김만복: 과거사는 제기를 해야 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히... 정형근: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아웅산 테러사건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앞으로 정말로 과거사에서 조사 대상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됩니다. 본인이 오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북한 눈치 보고 지금 막고 있는 겁니다. 김만복: 이해관계인이 제기를 해 주면 98개에서 99개로 그 사건을 조사하는 데 넣도록 하겠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당시 아웅산 테러 현장> *강민철, 25년 수감생활 중 사망 지난 5월 AP 통신은 미얀마(버마) 수감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서 25년간 수감 중이던 강민철이 죽었다고 보도하였다. 이 관계자는 강씨가 미얀마 감옥에 수감된 외국인 最長 수형자였으며, 사망 전 간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鄭亨根 의원의 요구대로 강민철을 한국에 데려왔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17명의 원혼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예의였다. 지난 週 일본 정부가 납치된 일본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특별기를 띄워서까기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를 일본으로 모시고 가서 國賓(국빈) 대접을 한 것과 한국 정부의 냉담한 태도가 대조된다.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강창수는 6.25 남침 때 戰死한 강건 장군의 아들. 폭파임무를 맡은 3人1組의 組長은 진모 소좌(생포 후 사형), 組員은 강민철(최근 獄死), 신기철(체포과정에서 사살됨) 상위였다. 세 사람을 태운 배 愛國동건호는 1983년 9월9일 밤 황해도 옹진항을 출항, 8일만인 9월17일 오후 미얀마 랭군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내린 세 공작원은 駐 미얀마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 도착하였다. 세 사람은 이곳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테러 실행 계획을 세웠다. 폭약과 조종장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애국동건호가 입항,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리 탐지, 본부에 보고하였다. 盧信永 안기부장은 全斗煥 대통령에게 미얀마 방문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6일 테러범들은 숙소를 나와 전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였다. 다음날 새벽 세 사람은 全斗煥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아웅산 묘소 건물의 천장에 폭발물(폭탄 3개)을 설치하였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 설치하는 사이에 진모는 밑에서 망을 보았다. 이 폭탄들은 1~2KM 이내에서 원격조종으로 터지도록 했으며 유효 살상 범위는 80m 내였다. 세 사람은 이틀간 묘소 주변 숲속에서 잤다.  <왼쪽 상단이 당시 체포된 강민철. 강민철은 얼마 전 獄死했다.> *天祐信助로 잡힌 두 범인들 10월9일 오전 범행에 성공한 세 사람은 항구로 탈출, 북한 선박편으로 귀환하기로 하고 일단 흩어졌다. 組長 진모는 10월10일 저녁 강을 헤엄쳐 바다로 향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다. 주민들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를 건져냈더니 살아 있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1일 어선에 편승, 항구로 내려 가다가 수상하게 여긴 어부들의 신고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이 초소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수색하려 하자 두 사람은 수류탄을 던지고 응사하면서 달아났다. 신기철은 경비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망쳤다가 다음날인 12일 군인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왼쪽 팔뚝이 날아갔으나 목숨을 건졌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였고 진모는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민철은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강민철은 복역중 한국측 인사를 만나 "한국에 귀국하여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강민철이 몇달 전에 사망한 것이다. 강민철의 한국行을 막은 前 정권의 행태는 國政조사 대상이다.
*황장엽 증언: "김일성은 是認, 김정일은 사건 은폐를 주장" 지난 6월30일에 있었던 黃長燁 선생 출판 기념회에서 黃 선생은 아웅산 테러에 대하여 재미 있는 秘話를 소개하였다. 북한소행임을 확인한 미얀마가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고,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의 對北제재가 들어가자 당황한 북한 수뇌부는 공작원을 원망했다고 한다. "왜 땅을 파고 숨어 있지 않고 나돌아 다니다가 잡혔는가"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어느 날 김일성이 김정일, 황장엽, 허담과 만난 자리에서 말하였다. "야, 이거 국제여론이 너무 나쁜데. 이렇게 하면 안 될까? 밑에서 실무자들이 저지른 일이다. 위에선 몰랐다고 하면 어떨까?" 김정일이 강하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무조건 잡아떼야 합니다"라고 했다. 김일성도 자신의 주장을 밀고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김정일에게 살아 있는 강민철과 김현희는 자신을 겨냥하는 비수였을 것이다. 그 강민철이 미얀마에 살아 있는 동안 한국 정부가 데려오지 못한 것은 '못한 것'이 아니라 김정일을 의식하여 '안한 것'인지 모른다. *"가짜 김정일이 했단 말인가" 한국 정부가 김정일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부터이다.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金在益 수석의 부인 李淳子 교수는 이 회담 직후 이런 글을 남겼다(월간조선 2000년 7월호). 지금 읽어보면 상당히 예언적이다. <1983년 10월9일, 내 남편 金在益(김재익․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全斗煥 대통령의 아세안 국가 순방에 공식 수행원으로 동행중 미얀마(舊버마) 양곤(舊랭군)에서 북한이 획책한 테러사건인 아웅산 묘소에서의 폭발로 순직했다. 테러를 지시한 북한의 金正日은 지난 6월13일부터 15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金大中과 수행원을 평양으로 초청하고, 사흘 내내 우리 언론가 방송으로부터 ‘인간적인’, ‘자상한’, ‘정중한’, ‘합리적인’, ‘겸손한’, ‘세련된’ 등의 修辭를 받았으며, ‘드디어 진짜모습’을 보게 됐다고 흥분하는 全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내 남편을 포함한 열일곱 분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은 ‘가짜’ 金正日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며, 그 5년 뒤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도 眞犯 없는 사건이 되어버린 셈인가. 남편을 잃고 슬픔과 증오를 감내하며 살아왔지만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방송과 언론에 휘둘리며 金正日을 ‘보기’ 시작하는 것만큼 참기 어려운 고통도 없을 성싶다. 23년간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이들이 단 한순간 매스컴에 홀려 國家의 정체성도 잊어버린 채 인공기까지 내거는 모습에 교육자로서 자괴감을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가 젊은이들을 이렇게 교육시켰나. 체제에 대한 분별력을 텔레비전 화면보다 약하게 심어 주었나….> *범행 직후 북한소행이라고 단정한 全 대통령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爆沈의 범인이 밝혀진 것은 민족반역적 범죄에 대한 天罰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적이다.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30분쯤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랭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 외교 사절단은 全斗煥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全 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미얀마 외무장관이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분 늦게 묘소로 출발하였다. 駐 미얀마 한국 대사 이계철씨가 탄 벤츠車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앞서 달렸다. 이 차에 대통령이 탔다고 오인한 것은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북한공작원 세 명이었다. 대사 차가 지나가고 조금 있다가 나팔소리가 묘소에서 울려 퍼졌다. 북한 공작원은 참배가 시작되었다고 誤判,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한국 정부의 장차관급 엘리트 관료 및 취재기자 등 17명이 죽었다. 오전 11시쯤 우산우 미얀마 대통령이 全斗煥 대통령의 숙소로 달려왔다. 全 대통령은 범행을 북한소행으로 단정하였다. 대화록에 의하면 이렇다. "이 테러행위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하고도 집요한 파괴공작의 일환이며 한국, 버바 두 나라의 관계를 갈라놓으려는 폭력사태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취지가 버마(당시 國名) 정부가 발표할 성명서에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우 대통령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자 全 대통령은 자신의 心證을 재차 강조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복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IPU(국제의원연맹)를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오늘과 같은 수법으로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미얀마 군부의 실력자 네윈 의장이 사죄차 방문하였다. 네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보국에서 숙청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경호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책임자가 제대로 체크를 못한 듯합니다. 사건은 내부 소행일 수도 있고 외부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全 대통령은 네윈 의장에게도 북한소행이라고 강조하였다. "수사에 참고되는 말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 상황은 의장께서 이해하시기 어려울 만큼 긴장이 고조돼 있습니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키로 된 IPU 총회에 대해 온갖 방해공작을 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총회 개최 10일 전에 대구 美 문화원 폭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수법이 오늘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그때 사건도 북한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네윈 의장은 오히려 미얀마 내부 사정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범죄자를 꼭 잡아낼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복잡한 파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서 긴급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는 物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천인공노할 북괴의 국제테러 집단으로서의 본성을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았다>고 했다. 한편 북한 공작원 3명은 범행 직후 탈출을 기도하다가 신고망에 걸려 들었다. 그들은 범행 다음날인 10일과 12일에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미얀마 경찰에 검거되는 과정에서 自爆, 응사를 하다가 組長인 진모와 組員 강민철이 생포되고 조원 신기철은 사살되었다. 全斗煥 대통령이 자신의 感에 의존하여 단정한 것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대구문화원 폭파 사건에 대한 수사보고를 받고 사용한 폭발물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웅산 테러의 상황과 연결시켜 범인을 적중시킨 예언을 한 셈이다. 全斗煥 장군은 1사단장일 때 제3 땅굴을 발견하였다. 오직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대통령이 되었던 李明博씨는 천안함 爆沈의 범인이 김정일이라고 단정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 軍人 출신 대통령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가운데서 30분만에, 군대 안 간 대통령은 수많은 증거 속에서도 두 달만에 범인을 特定하였다. 다음 대통령은 安保 전문가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임진각 아웅산 테러 殉國者 위령탑 아래서
1983년 10월9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미얀마 랭군의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으로 순국한 17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駐 버마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한경희: 대통령 경호원 정태진: 대통령 경호원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북한쪽이 건너다 보이는 임진각 공원안에 '버마 아웅산 殉國 외교사절단 위령탑'이 서 있다. 全斗煥 대통령이 미얀마에서 급거 귀국하여 국민들에게 발표한 성명서의 한 귀절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아무리 사악한 무리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더라도 우리의 숭고한, 평화와 전진을 향한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北面한 쪽에는 이런 돌판 글도 보인다. <열일곱 塔身으로 높이 솟은 넋들이 원한을 넘어서서 북녘 향해 합장했네 이념의 악몽서 한시바삐 깨어나라 한겨레, 한 울타리, 한 품속에 길이 살자 허공에 메아리치는 저 외침을 못듣는가 님들이 틔워놓은 선진화의 그 한 길을 넓히고 다져가며 줄기차게 나아가서 끊어진 남북의 길도 이어놓고 마오리라.> 惡을 惡으로 갚지 않고 善意로써 녹여버리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웅산 테러와 86년의 김포공항테러, 그리고 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정권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 한 짓이었다.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지 아웅산과 KAL기 테러범들이 현장에서 모두 잡히고 북한정권은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올림픽에 대항하여 주최한 평양 세계청년축전엔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였다. 그들의 惡意는 그들의 목줄을 죄기 시작하였다. 잇단 테러를 당하면서도 보복을 참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던 한국은 북방정책으로 그 성과를 확대하고 韓中수교로 새로운 경제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1983년 全斗煥 정부가 이성적으로, 전략적으로 대응한 결과 북한정권은 망해가고 있고, 한국은 소란속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지난 겨울 임진각에 서니 양지바른 곳에서 殉國기념탑이 파아란 하늘을 이고 다보탑처럼 빛나고 있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한 민족반역자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까지도 제 命대로 산다면 이야말로 민족의 수치란 생각이 들었다.   <1983년 10월 13일,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17명의 외교사절 합동葬>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