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희에 의해서 1987년 KAL기 폭파사건의 진상이 다시 확인되는 것을 보니, 역사에 대한 인식이 새롭다. 지난 10년 동안 좌익세력에 의한 대한민국 역사 조작과 왜곡이 심각했다. 대한민국은 지난 10년 김정일 하수 좌익정권 하에서도 휘말려들지 않고, 이렇게 용케도 살아남았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방송과 학교와 법원을 장악한 좌익세력의 반역교육, 반란선동, 이적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유민주주의를 살아남게 만들었다. 그렇게 전교조, 언론노조, 좌익단체들이 대한민국 파괴선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건재하는 자유대한민국을 유지시킨 한국의 국민들은 참으로 위대하다.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진실이 확인되는 시기에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김대중 세력에 의한 군중폭란이었던 2008년도 광우사태는 1980년 광주사태를 재조명하게 만든 자극제가 되었다. 광우사태는 한국의 언론인, 교육자, 종교인들이 반란적임을 폭로시키면서, 대한민국 60년사가 심하게 왜곡되었겠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특히 광우사태는 광주사태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반란군과 정부군의 충돌에 억울한 광주시민 200여명이 죽은 광주사태는 군중폭동과 민주투쟁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는 공정하게 평가될 수 없다.
광주사태는 군부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군중폭란으로 평가되거나, 혹은 좌익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찬양될 수 없다. 광주사태는 이제 다시 차분하게 재조명되어야 한다. 특히 "5·18 광주사태 당시에 북한 특수부대 600명 투입설"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북한군이 광주사태에 투입되었다는 주장이 진실하지 않으면 폐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있으면 더 조사를 해야 한다. 2006년 12월 20일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의 '광주사태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 기자회견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날 탈북군인의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은 광주에 북한의 최정예 특수부대원들이 1개 대대 이상 투입 됐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투입된 정황을 증언하기 위해 오복섭 애국청년연합 대표, 최중현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 임천용 공동대표, 요덕 스토리 안무가로 유명한 김용순, 사회안전성 소속 특수부대 군관 출신 탈북자 등이 참여해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특수부대 정치장교였던 최중현 대표가 김일성의 비밀 교시와 인민군 4군단 70정찰대대 출신인 이덕선씨로부터 북한군이 5.18사태에 개입되었다는 자세한 정황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아직도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주장이 '광주사태에 북한군 개입설'이다. 최중현 대표에 따르면 김일성은 5.18의 도화선 중 하나였던 사북탄광사태에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 각층의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또 임천용 대표는 "결국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장갑차를 다루는 수법, 조직적인 총기탈취와 방송국 등 국가주요기관을 능숙하게 파괴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특수전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도 풀지못한 수수께끼이다"라며 당시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광주에 투입됐다 복귀해 현재 인민군 중장으로 근무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봉기군의 3분의 1은 돌아오지 못했다. 각각 괴뢰군(진압군을 의미)과 봉기군으로 나뉘어 투입되었는데 괴뢰군에게 직접 맞아죽은 사람도 꽤 있을 거다"는 주장도 했다.
임천용 대표는 "처음으로 산 사람을 잡아봤다. 맨 정신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도망가는 여자 등 뒤에다 총을 쏘는 게 어려웠다"고 이야기했다고 전했으며, 올해(2006년) 9월 또 다른 북한 특수부대 출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별도의 특수조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와는 다르게 봉기 분위기를 조성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증언했다고 전했다. 북한군이 광주사태에 투입된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그 투입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북한군 개입의 구체적 증거가 없다고 쉽게 무시할 상황이 아니다.
임천용 대표는 "또한 한 대남사업부 관계자에 따르면 5.18 당시 투입된 북한군 특수부대는 모두 600명, 이중 1차로 300명이 귀환했고 2차로 생존자 70명이 사망한 40명의 유품을 가지고 복귀했다고 한다.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사람은 모두 90명. 이때 환송회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사진은 평양 대성구역 지하 2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임 대표와 최 대표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90명이 아직 남한 내에 살아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개연성이 있지만, 확실성이 없는 주장이라서, 더 많은 조사를 하거나 아니면 허구적 주장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육군본부 인사과에 근무했던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본부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참관한 후에 "그때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에서는 호남 출신 장교들로 진압군을 구성해 투입했었다. 그 당시 상황에서 사상범이 수감돼있는 교도소를 습격하고 관공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는 걸 순수한 의도를 가진 시민혁명이라고 볼 수 있겠나? 시민혁명이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볼 때 불순세력이 이용했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이건 4.19나 부마항쟁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튼 광주사태는 순수한 민간인들의 민주항쟁으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체제전복만을 위한 반란으로만 매도하기 힘들다. 광주사태는 우상화하거나 악마시할 수 있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지난해 광우난동이 없었다면, 아마 광주사태는 민주화운동으로 영원히 자리매김하면서 찬양을 받는 쪽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2008년 한국의 국민들은 광화문에서 벌어진 제2의 광주사태인 광우난동사태를 구경했다. 김대중이 '아테네 이후에 최고의 직접민주주의'라고 명명한 광우난동사태는 김대중 추종세력이 만들어낸 제2의 광주사태였다. 좌익세력이 주도한 광우난동사태의 정보조작, 군중선동, 야간폭동 수법은 1980년도 광주사태를 연상시켰다. 2008년도 광화문 광우난동사태는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5.18광주사태를 재평가하게 만든 촉매제가 되었다. 김대중 세력의 광주사태나 광우사태는 마찬가지였다고 국민들은 판단하게 되었다. 이제 국민들은 좌익정권에 의해 비판불가에 절대무오로 우상화된 광주사태를 정치꾼들의 권력투쟁극으로 재평가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의 진실이 확정되는 시기에, 광주사태의 진상과 성격도 공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민주화의 탈을 쓴 좌익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반란사태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너무 심하게 추진되어서, "동의대 화염병 방화 경찰 치사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조작되어서, 반란자가 국가유공자로 둔갑해있다. 이제 좌익반란세력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낸 민주화세력은 각성된 국민들로부터 군부세력보다 훨씬 더 악독한 망국세력으로 낙인찍혔다. 좌익세력은 5.18광주사태는 물론이고, 제주4.3사태나 여순반란사건도 애국운동으로 둔갑시켜왔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정통성를 파괴하는 반역행위에 불과하다. 이제 광주사태에 대한 공정한 역사의 평가를 내려야 한다.
장재균 논설위원/조영환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