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2000년 46개 언론사 사장단 집단방북

서석천 2025. 10. 23. 07:01

"이제 와서 생각하니.."

2000년 8월, 대한민국 언론사 사장 46명이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방북은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남북 언론 교류 활성화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은 대한민국 언론의 독립성과 품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북한에서 이들 언론사 대표들에게 무슨 향응을 베풀고 무슨 접대를 해줬는지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기준으로는 대한민국 주요 언론사 사장단의 집단 방북은 상당히 이례적인 행태로 평가된다. 

  

김정일의 국빈급 대우, 그리고 머리 숙인 언론

방북단은 한국신문협회(회장 최학래)와 한국방송협회(회장 박권상) 소속 언론사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46명은 7박 8일간 북한에 머물며 김정일과의 오찬, 언론기관 방문, 관광 일정을 소화했다.

북한은 이들에게 봉화초대소 숙소, 국빈용 벤츠 차량, 백두산 초대소 숙박, 기념품 제공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고, 일부 언론인은 김정일에게 “세계 제일이십니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중앙일보 사장의 생일을 김정일이 챙겨주도록 지시했다는 일화도 북한 매체에 실린 것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김정일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당시 남측 언론사 사장단은 북한과 △통일과 민족단합에 도움이 되는 언론활동 전개 △비방 중상 중지 △언론분야 교류협력 추진 △남북 언론접촉 창구마련 △북한 언론기관 대표의 서울방문 등을 합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박지원의 역할은?

당시 방북을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인솔한 인물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다. 그는 6·15 남북공동선언 직후 언론 교류를 명분으로 사장단 방북을 추진했고, 북한과의 접촉을 통해 김정일의 초청을 성사시켰다.  

박 장관은 방북단과 함께 전 일정을 소화했으며, 북한 측과의 조율자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 측은 당시 박 장관이 마치 언론사 사장단의 단장인 양 극진한 대우를 해줬다고 하는 후문도 있다. 

지금 보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언론의 사명은 권력 감시와 진실 보도다. 언론사 사장들이 집단으로 방북해 김정일 앞에서 과도한 예우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남북 교류를 위해 어쩔수 없었다는 변명도 있지만, 언론사 기자들에 대한 향응과 접대가 금지된 작금의 현실과 비교하면 언론사 사장단의 집단 방북 및 향응 제공은 상당히 놀랍다.  

북한 매체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남측 언론은 방북 중 개별 기사 송고를 금지하며 자기검열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이 사건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언론의 독립성과 윤리를 심각하게 훼손한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북한의 체제 선전 코스를 따라다니며 김일성·김정일 신격화 장소를 방문한 점은 언론인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다.

뉴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묘향산에 위치한 ‘국제친선전람관’에는 중앙일보와 한겨레 등 남측 언론사가 북한에 보낸 선물이 전시되어 있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경우 1998년 9월15일 보석이 박힌 고급 손목시계를 선물했고, 한겨레의 선물로는 2001년 2월8일과 9월17일 두 차례 방문 당시 준 나무밥상, 만년필, 한겨레 창간호 동판 등 3점이 진열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언론의 자화상

2000년 언론사 사장단의 집단 방북은 박지원 당시 장관의 기획 아래 이루어진 정치적 이벤트였다. 당시에는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언론의 본질을 망각한 집단적 굴종의 장면으로 남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언론은 권력 앞에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그 권력이 남측이든 북측이든 말이다."라는 목소리가 높다. 

당시 방북 언론사 대표 대부분은 사주가 아닌 당시 사장 또는 대표이사로서 참여한 전문 경영인들이다.. 이는 북한이 언론사 소유주보다 운영 책임자와의 교류를 선호했거나, 남측이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장급으로 대표단을 구성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음은 당시 방북 언론사 명단이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 수정 요청 바람)

방북 언론사 사장(회장) 명단 (2000년 8월)  (출처: 뉴데일리  2011년11월03자 기사) 

KBS 박권상, MBC 노성대, SBS 송도균, EBS 박흥수, YTN 백인호, 한겨레신문 최학래, 경향신문 장준봉, 국민일보 이종대, 서울신문 장명수, 한국일보 장명수, 중앙일보 금창태, 매일경제 장대환, 한국경제 김영용, 문화일보 김진현, 세계일보 송병준, 코리아헤럴드 김경철, 국제신문 이종덕, 부산일보 김상훈, 매일신문 김부기, 영남일보 김경숙, 광주매일 고제철, 광주일보 김종태, 대전일보 윤종서, 경인일보 우제찬, 강원도민일보 안형순, 강원일보 최승익, 충청일보 서정옥, 경남신문 이문행, 제주일보 김대성, 인천일보 신화수, CBS 권호경, PBC 박신언, BBS 김규칠, 부산문화방송 유삼렬, 대구문화방송 신대근, 전주문화방송 장영배, 춘천문화방송 심상수, 부산방송 김성조, 대구방송 이길영, KBS 부산총국 방윤현, KBS 광주총국 김광석, KBS 대전총국 이광호, KBS 청주총국 남선현, 경인방송 표완수.

불참 언론사
조선일보 , 동아일보 , 연합뉴스 , 전북일보 .

2000년 8월11일 위 46개 언론사 사장이 남북한 언론공동합의문에 서명한지 3개월 후인 2000년 11월24일 전국의 신문,방송,출 판,인쇄 등에 매체산업에 종사한 노동자들이 가입한 단일산업노조인 '언론노조'가 창립되었다.  언론노조는 민노총 산하기관이면서 민노총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기구로 평가되기도 한다.  

본지는 2000년 당시 방북한 대한민국 언론사 사장들을 맥락없이 비난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기획은 대한민국 언론이 전반적으로 무너지고, 균형을 잃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버린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언론계에 벌어졌던 주요 사건들을 하나하나 재조명하여 대한민국 언론에 전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인세영 2025.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