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서석천 2023. 3. 21. 05:30

 14년간 침묵했던 수사책임자 이인규 대검 전 중수부장, 회고록 통해 정면승부에 나섰다! 문재인 정조준!!!

“이 부장, 시계는 뺍시다. 쪽팔리잖아”(노무현 검찰 출석 때)

문재인은 노무현을 변호하는 의견서 한 장 낸 적이 없고, 자살 직전 7일간 곁을 비운 무책임한 변호인이었다.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으로 검찰을 공격하고 있다.

노무현의 자살은 종북좌파 세력을 되살리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5년간 대한민국을 체제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은 이 사건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보고할 역사적 책임을 진 사람이고 책 쓰기를 통하여 그 책임을 완수한 셈이다.


⊙ “문재인은 노무현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쌓아 대통령이 되었다”
⊙ ‘논두렁 시계’에 대한 오해: 피아제 시계 두 개를 뇌물로 받은 것은 사실이고 노 전 대통령이 ‘밖에 버렸다’고 한 것도 사실
⊙ 박연차로부터 640만 달러 받은 것 확인. 미국 주택 구입 자금으로 100만 달러를 받은 것이 심리적 결정타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은 박연차 불법 로비사건 수사를 조기 종결하고 2009년 6월 12일 서초구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조선DB
  토요일 이른 아침. 휴대폰 벨 소리가 그를 깨웠다. 임채진(林采珍) 검찰총장의 전화였다. 이 아침에 무슨 일일까?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이 부장! 날세. 노 대통령이 새벽에 등산 나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상태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았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떻게 절벽에서 떨어졌습니까?”
 
  “부산지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네. 지금 사무실에서 봄세.”
 
  경호원이 있었을 텐데 절벽에서 떨어지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는 옆에서 잠을 깬 부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사무실에 나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최악의 상황은 없어야 할 텐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부인에게 “별일 없을 거야”라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사실 이 말은 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도망자 프레임
 
  이인규(李仁圭) 대검 중수부장은 2009년 5월 23일 노무현(盧武鉉) 자살 직후 검찰을 떠나 법무법인 바른에서 변호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文在寅)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2017년 5월 10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대표 변호사가 그의 사무실로 찾아와 “세상이 바뀌었으니 로펌을 나가달라”고 했다.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로펌을 그만두느냐”고 거절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캠프 핵심 인사에게 들었는데, 당신은 꼭 손을 보겠다고 합니다. 같이 죽자는 말이오?”
 
  말문이 막혔지만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권에 잘못 보인 죄로 로펌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돌아 국내에서 변호사 활동을 계속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는 중소기업중앙회 법률고문으로 홈앤쇼핑의 주식회사 설립에 관여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홈앤쇼핑의 사외(社外)이사를 지내기도 했었다. 어느 날 중소기업중앙회 간부로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이인규 변호사와 관련된 홈앤쇼핑 자료를 모두 제출해달라’고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홈앤쇼핑 대표이사 강남훈(姜南焄)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강 대표는 경찰 수사를 받는 등 핍박을 받다가 탁월한 경영 실적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회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검찰·경찰은 홈앤쇼핑을 수사해서 이 변호사와 관련된 비리를 찾으려고 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자, 별건(別件)수사로 강 대표를 취업 비리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까지 되었다. 2020년 10월 항소심에서 무죄(無罪) 판결을 받은 데 이어 2021년 4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강 대표는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무고한 사람들이 가깝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보며,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해 2017년 8월 25일 2년 예정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더니 일부에선 그에게 ‘도망자’ 프레임을 씌웠다.
 
  미국에 사는 일부 좌파(左派) 인사들은 그가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하는 장면을 몰래 찍어 한국 언론에 제보하고,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문 앞까지 찾아와 인증샷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거나, 아파트 앞에서 “‘논두렁 시계’로 노무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사를 받으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미국에 유학 중인 딸의 신상털이를 하고 페이스북에 “살인자의 딸, 노 전 대통령을 죽인 대가로 공부하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인규 검사는 〈이러한 광기에 찬 행동들은,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에서 “말투는 공손했으나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고 나에 대해 소위 ‘좌표’를 찍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인규 검사는 당하면서도 글을 썼다. 이 사건 관련 공소시효(15년)가 완성된 직후에 발간하기로 결심했다. 532페이지 책이 되었다.
 
대한민국 검사 이인규
 
  저자 이인규(李仁圭)는 1958년 1월 22일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했다. 경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법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14기)을 수료하고 1985년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검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0년 칠성파 두목 이강환 사건 등을 수사하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수사 유공 표창을 받았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검찰연구관 등을 거쳐 1992년 미국 코넬대학교 로스쿨(LLM 과정)에 유학하고, 워싱턴 주미 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근무하며 1998년 6월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법무부 검찰국 검찰4과장, 검찰2과장으로 근무하며 2000년 12월 한미 SOFA 형사재판권 분야 개정 협상, 2001년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입법 등을 주도했다.
 
  ‘검찰의 황태자’라는 검찰1과장을 거쳐 서울지검 형사9부장과 초대 금융조사부장으로 있으면서 SK 분식회계 사건 등 기업 수사로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2003년 서울지검 출입 기자단이 뽑는 ‘올해의 주임검사’에 선정됐다. 중앙수사부 불법 대선자금 수사 기업수사팀장으로 SK·삼성·LG·현대차·롯데·한화·대한항공 등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실을 밝혀냈다.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검찰미래기획단장을 거쳐 2006년 서울지검 3차장 검사로서 ‘황우석 가짜 줄기세포 사건’ ‘윤상림·김홍수 법조비리 사건’ 등을 수사했다. 2006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대전고등검찰청 차장검사(2007년 검사장 승진), 대검 기획조정부장을 거쳐 2009년 1월 중앙수사부장으로 임명되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포함된 세칭 ‘박연차 게이트’ 사건을 수사했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한 직후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마무리하고 2009년 7월 검찰을 떠났다.
 
  역사를 위한 정면승부
 
  이인규 검사의 이 책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정면승부다. 그 결과로 노무현의 신화(神話)가 무너지고 문재인의 위선(僞善)이 벗겨져도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은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고, 사실보다 위대한 진실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결정한 책 제목부터가 진검승부다.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조갑제닷컴)
 
  그는 책을 쓰면서 실명(實名)을 원칙으로 했다. 동료, 선배를 가리지 않고, 호불호(好不好)를 따지지 않고 사실에 충실했다. 교정과 편집 과정에서 그처럼 철저하게 확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검사 시절의 그를 만난 적이 없는 나는 책을 만들면서 “아, 이런 검사였겠구나”라고 짐작하면서 대한민국이 이런 검사를 24년간 가졌다는 것은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주도한 굵직한 수사들로 해서 이 나라 지도부가 상당히 깨끗해질 수 있었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돈 많은 사람들, 이른바 거악(巨惡)을 수사 대상으로 삼는 특수부 검사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지만 상처가 있다. 이 책은 아직 아물지 않은 그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아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검사 생활을 수필류가 아닌 본격적인 기록물로 정리한 이는 이인규 검사가 처음일 것이다. 한국 부패 구조의 저수지 역할을 해온 재벌과 권력의 결탁을 정조준한 수사로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긴장감이 넘친다. 단편적 언론 보도로는 드러나지 않는 검찰 내부의 수사 비화(秘話)에서는 드라마적 요소도 보였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재벌의 유착(癒着)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국가적 과제이기도 했었다. 이인규 검사가 SK그룹 분식(粉飾)회계 수사를 통하여 단서를 확보, 기획과 실무를 책임졌던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선거를 매개로 한 권력과 재벌의 유착을 단절, 한국의 정치 부패를 몇 단계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두 번째 큰 수사인 노무현 전 대통령 건은 피의자의 자살로 한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강골(强骨) 검사가 2000년대의 시대적 고민을 정면 돌파하면서 상처받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권하에서도 그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약점(弱點)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특수부 검사로 유명하지만 주미(駐美) 한국 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2년여를 근무하는 등 6년 6개월 동안 국제 업무에 종사,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인데 특히 미국 공무원들과 상대하면서 청렴한 공직 자세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회창을 낙선시킨 검찰의 김대업 비호 수사
 
  이인규 검사는 이 책에서 노무현 당선에 기여한 검찰의 수사 비화 하나를 소개한다. 2002년 대선 국면에서 김대중(金大中) 정권 검찰 내 특정 인맥이 사기꾼 김대업 관련 수사로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낙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일종의 폭로이다. 그해 7월 김대중 대통령은 고향이 같은(전남 신안) 김정길(金正吉) 전 법무장관을 다시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민주화 이후 같은 정권에서 두 번 기용된 이는 처음이라고 한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병풍(兵風) 공작을 위한 인사라고 비판했다. 저자(著者)는 법무부 검찰 1과장으로서 인사 실무를 맡고 있었다. 김대업 사건 담당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신안 출신으로 ‘검찰 호남 인맥의 핵심 중 한 사람’이었다.
 
  박 부장은 2001년 6월경부터 2002년 2월경까지 사기죄로 복역 중인 김대업을 검찰청으로 불러 수사보조요원으로 병역 비리 수사에 활용했다. 김대업이 병무 비리 수법 등을 잘 알고 있어 수사에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정도(正道)가 아니었다. 김대업은 병역 비리 수사를 보조하면서 수사관 행세를 하기도 했고, 검사실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해 8월 검찰 인사를 앞두고 이인규 검사는 그런 박영관 부장이 대통령 선거라는 민감한 시기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것은 공정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장윤석(張倫碩) 검찰국장과 상의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검사는, 박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이 계속해서 병역 비리 수사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논란거리가 될 뿐 아니라 선배님에게도 좋지 않으니 이번 인사에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박 부장은 “나도 수사에 지쳐 지방에서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기자실에 가서, 이번 인사에서 떠나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면 선배님에 대한 인사가 기정사실화될 것이고, 이번 인사에서 고향 근처에 있는 큰 규모의 지청장으로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박 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 과장, 미안하게 되었는데, 윗사람하고 상의해보았더니 ‘너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고 핀잔만 들었다.”
 
  “제가 선배님께 기자실에 가서 이동 사실을 말해달라고 했지, 윗분들과 상의해서 하라고 했습니까?”
 
  “미안하다. 없던 일로 하자.”
 
  이인규 검사와 김각영 차관은 야당이 박영관 부장을 지목, 공세를 펼치고 있으니 인사발표를 하루 늦추자고 김정길 장관에게 건의했다. 일단 승낙했던 장관은 밤늦게 청사로 돌아와 인사발표를 지시했다. 박영관 특수1부장은 유임되었다. 그는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김대업의 황당한 주장을 수사하는 데 시간을 끌었고 결과 발표도 문제였다.
 
 
 
 
역사에 큰 오점 남긴 ‘병풍’ 수사
 
  2002년 10월 25일 서울지검 정현태(鄭現太) 3차장검사는 김대업이 제기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대해 이를 사실로 인정할 근거와 증거가 없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수사의 출발점이 된 1·2차 녹음테이프에 대한 감정 결과, “성문(聲紋) 분석을 했으나 판독 불능이며, 편집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업은 1999년 3~4월경 녹음테이프에 이회창 후보 아들 이정연에 관한 병역 비리 진술을 옮겨 담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녹음테이프는 1999년 5월 12일과 2001년 10월 10일 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과자가 제기한 근거 없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수사력을 낭비한 것이다.
 
  검찰은, 병풍 의혹에 대해 무혐의로 결론을 내리면서도 김대업을 감쌌다. 한나라당과 김대업 간 맞고소·고발 사건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했으며, 김대업의 사법처리도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특히 발표 과정에서 “이정연이 당시 체중을 고의로 감량한 증거는 없지만 병무청 직원 등과 접촉하면서 체중으로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노력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은 문제였다.〉
 
  증거는 없는데 가능성은 있다? 수사 결과 ‘혐의 없음’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왜 하는가? 저자는 〈이는 검찰이 예단(豫斷)을 가지고 수사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고 비판했다.
 
  수사 결과가 발표된 후에도 한나라당은 ‘병풍 공작’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고 추가 수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민주당은 특검제 도입과 ‘1000만인 서명운동’ 재개 방침을 밝히는 등 정치권의 공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검찰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업의 허위 병역 비리 의혹 제기 및 KBS, MBC 등 언론의 대대적 보도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지지율이 10%p 이상 추락해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2.3%p 차이로 낙선했다. 이 검사는 〈김대업의 의혹 제기는 허위 사실로 국민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를 침해한 사건이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면서 〈박영관 특수1부장은 본인의 검사 경력은 물론 대한민국 역사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고 했다.
 
  그때 박 부장을 교체하고 다른 검사로 하여금 불편부당하게 수사하게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검사는 〈대통령 선거가 김대업의 허위 주장에 영향을 받는 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고 했는데 당락(當落)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한국 정치 부패의 뿌리를 잘랐다
 
  요사이 대기업 간부들을 만나보면 이인규 검사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정하는 게 있다. “그때는 대선자금 수사로 혼이 났지만 그 뒤 돈 달라는 정치인이 없어져 편하다”는 것이다. 2003년 이인규 검사가 대선자금을 준 대기업 수사를 처음으로 밀어붙일 때 “이렇게 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던 이들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정치 부패는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 6년 뒤의 노무현 수사는 대통령의 부패에 대하여 한국 사회의 눈높이가 그사이 달라진 것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2003년 대선자금 수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우리가 받은 돈이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를 넘기면 사퇴한다”고 승부수를 던졌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에선 그런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인규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이던 2002년 12월 YTN 뉴스를 보다가 힌트를 얻어 SK 부당거래 수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SK가 2002년 대선 때 여야(與野)에 불법자금을 준 단서를 잡았다. 그는 SK 수사를 반대하는 노무현 정권 및 검찰 수뇌부와 맞섰는데 송광수(宋光洙) 신임 검찰총장의 결단으로 대선자금 수사를 SK, LG, 삼성, 현대차 등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그는 원주지청장으로 있으면서 대검 중앙수사부 기업수사팀장으로 파견되어 삼성 등 10개 대기업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실을 밝혀냈다).
 
  SK 수사는 검찰 역사상 최초의 재벌 내부 부당거래에 대한 수사였으며,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기업과 국가의 신인도(信認度)를 제고(提高)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재벌의 경영 행태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검찰은 2004년 5월 21일 불법 대선자금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은 823억원이었고, 민주당은 119억원이었다. 기소된 인원은 한나라당 8명(구속 6명), 노 대통령 진영 13명(구속 6명)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받은 불법 정치자금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받은 불법 정치자금의 10분의 1이 넘을 경우 사임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자신들의 계산 방식은 다르다고 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여의도 당사를 팔고 천안에 있는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불법 대선자금 823억원을 해결했다. 새천년민주당은 국가에 변제(辨濟)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뒤의 열린우리당 분당(分黨) 사태 등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대선자금 수사 결과 발표 후 회식 자리에서 안대희(安大熙) 중수부장이 기업수사팀장 직함의 저자에게 “이 수사는 당신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2003년 2월 SK 부당 내부거래 사건에서 비롯된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내 손으로 끝마쳤다”란 감회와 함께 아쉬운 점도 남았다.
 
 
 
 
최후의 勝者는 노무현
 
  여야를 불문한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수사를 통해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약점을 많이 알게 되어 정치적 중립성 및 수사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검찰 수사에 간섭하려고 했다면, 검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혀 파국(破局)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물론 대통령의 절대적 권력을 고려하면 이판사판 검찰 수사에 개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이용해 내 생살을 도려내 주고 정적(政敵)의 목을 칠 요량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야당인 한나라당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2004년 4월 15일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50.83퍼센트를 얻어 156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덮어쓴 한나라당은 40.46퍼센트로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로써 노무현 정권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대법관 출신으로 국민에게 대쪽 이미지로 알려졌던 이회창 후보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재기불능이 되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검찰에 약점을 잡힌 셈이 되어 검찰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令)이 안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적을 죽이기 위해 나의 팔다리를 하나쯤 내어준 것에 불과했다. 바둑으로 치면 ‘위기십결(圍棋十訣)’ 중 ‘사소취대(捨小取大)’에 해당한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라는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이인규 검사는, 노 대통령은 재직 중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는 기소당하지 않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회창 후보는 기소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 불법자금 수수 액수가 더 많은 이회창 후보의 불기소는 노무현 대통령을 의식한 것으로, 그 순간 노 대통령의 처벌도 (퇴임 후에도) 물 건너간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아제 시계와 640만 달러
 
  이 책의 부제(副題)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는 자신을 좌표 찍었던 문재인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머리글에서 〈노 전 대통령 수사는 대한민국의 정의와 법질서 수호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검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당시 수사기록은 영구보존 중이니, 수사를 지휘했던 나 자신의 개인적 명예는 물론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 거짓에 침묵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국민의 알 권리,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라도 이제 진실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다〉고 선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 수수 혐의 등 사건은 본인, 부인 권양숙, 아들 노건호, 딸 노정연, 조카사위 연철호, 총무비서관 등이 관련된 가족 비리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도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억원이 넘는 명품시계를 받고, 아들 등의 사업자금 명목으로 뇌물 500만 달러, 미국에서의 주택 구입 자금으로 140만 달러를 받는 등 개인비리 혐의가 주(主)이다. 수개월간의 수사로 박연차 회장의 진술은 사실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반박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검찰이, 사실을 감추면서 언론전을 펴는 노무현을 상대로 숨바꼭질 같은 수사를 하면서 복잡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 때는 사실관계가 거의 정리되었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이번 책에서 수사의 최종상황을 아래와 같이 요약했다.
 
  1.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피아제 남녀 시계 세트 2개(시가 2억550만원)를 받은 사실은 다툼이 없고, 이 시계는 재임 중(2006년 9월경)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뇌물로 전달되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2. 권양숙 여사가 2007년 6월 29일 청와대에서 정상문 총무비서관을 통하여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100만 달러, 그해 9월 22일 추가로 홍콩에 있는 임윙 계좌로 40만 달러를 받은 사실은 인정된다. 박 회장의 진술 등 각종 증거를 종합하면 노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와 공모, 아들 노건호의 미국 주택 구입 자금 명목으로 140만 달러를 수수(收受)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3. 2008년 2월 22일 노무현 대통령 재임 때 아들 노건호, 조카사위 연철호가 박연차로부터 500만 달러를 받았고, 노건호 등이 이를 사용한 것은 다툼이 없다. 이 돈은 박연차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주기로 약속한 환경재단 출연금 50억원을 500만 달러로 쳐서 노건호 등의 사업자금 명목으로 준 뇌물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4. 2006년 8월경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박연차로부터 현금 3억원을 받은 사실은 다툼이 없고 정 비서관은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관여하였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5. 정상문은 2004년 11월경부터 2007년 7월경까지 사이에 자신이 관리하던 대통령의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횡령하고 국고를 손실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단독 범행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과 정 비서관이 공모한 범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6.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인 2008년 3월 20일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이자 연 7%, 변제기한을 2009년 3월 19일로 하여 15억원을 빌린 사실은 다툼이 없다. 차용증 작성 사실에 비추어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7.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소, 유죄(有罪)를 받아낼 수 있는 충분한 물적 증거를 확보했다.
 
 
  “문재인 변호사마저 곁에 없었다”
 
  저자(著者)는 수사기록을 읽어본 적도 없는 문재인 변호사가 무슨 근거로 “수사기록이 부실하다”고 단정하는지 어이가 없다고 썼다. 그는 변호인으로서 무능(無能)했던 문재인이 노무현 자살 직후엔 검찰 수사에 대하여 원망도 비난도 하지 않다가 정치를 결심하면서 돌변, 검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문재인은 노무현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만들어 대통령이 되었다”고도 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무책임했으며 이것이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 한 원인이라고 했다. 문 변호사는, 수사 책임자인 자신은 물론 수사팀 누구도 찾아오거나 연락을 해온 적이 없었고, 노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사실을 주장하고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서 한 장 제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극단적 선택 직전 일주일 동안 문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을 찾지 않았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미국 주택 구입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등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고 하소연할 만큼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른바 진보언론은 그를 가혹하게 비판, 저주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가까운 사람들 모두 등을 돌리고 믿었던 친구이자 동지인 문재인 변호사마저 곁에 없었다. 이것이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비극적 선택을 하기 직전 노 전 대통령은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형국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 검찰 수뇌부의 방침은 ‘불구속 기소’였고 이 방침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알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구속되지 않더라도 남은 것은 법정에서 날카롭고 집요한 검찰의 공격에 구차한 변명을 하는 일뿐이었다. 유죄판결이 날 경우 최소 10년 이상의 징역을 사는 것 외에 뇌물로 받은 640만 달러를 몰수 추징당하고, 뇌물 수수액의 두 배 이상 다섯 배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었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노 전 대통령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이인규 전 검사는, 문재인 변호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일주일 동안 곁을 비운 점을 지적한다. 문재인 변호사는 《운명》에서 ‘굳이 가야 할 현안이 없었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주택을 구입한 사실을 확인하고, 자금 출처 조사를 하고 있었으며, 5월 24일엔 권양숙 여사를 부산지검으로 다시 불러 조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문 변호사는 ‘현안이 없어서’ 봉하마을에 가지 않았고 아무런 변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인규 전 검사는 권양숙 여사에게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몰아붙이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멍에를 씌우는 것이라고 썼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을 권양숙 여사의 탓으로 돌린 노무현의 변호 전술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라고 혹평했다. 그가 2009년 4월 7일 ‘사람세상’을 통하여 “저의 집(주-권양숙)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입니다”고 권양숙 여사의 뒤에 숨은 게 더욱 집요한 검찰 조사를 불러 전직 대통령 자신을 수렁에 깊이 빠뜨린 결정적 전략 미스라고 했다.
 
 
  ‘문재인은 변호를 맡지 않았어야!’
 
  * 문재인 변호사는 노무현이 ‘사람세상’을 통하여 수사 중인 혐의에 대하여 거짓말로 검찰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검찰이 이 거짓말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피의 사실 공표 논란에 휘말리고 더욱 철저하게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은 하지 않았다.
 
  * 이 전 검사는 문재인이 노무현의 죽음 직후인 2009년 6월 1일 《한겨레》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는 검찰 수사를 원망하고 싶지 않다고 해놓고 2년 뒤 《운명》에선 검찰이 증거 없는 수사를 했다는 식으로 표변한 것을 집중 비판했다.
 
  〈도대체 문재인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인으로서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변호전략도 없이 검찰을 비난하고 막무가내로 범죄를 부인한 것밖에 없다. 검찰을 찾아와 검찰의 입장을 묻고 증거 관계에 대한 대화를 통해 사실을 정리해나갔더라면 노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 변호사의 말과 행동에선 검찰에 대한 증오심이 느껴지는데 그렇다면 변호를 맡지 않았어야 한다. 어떻게 증오하는 대상과 수사 관련 문제를 논의하고 선처를 부탁할 수 있겠는가.〉
 
  정상문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기 전 검찰에 “이렇게 부인해서 될 일이 아니다. 변호사를 통해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하는 방안을 건의하겠다”고 말했고, 일이 터진 후 진작 그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힘들어했다고 한다.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저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좋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혐의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지키는 방향으로 진술하였다면 형사처벌 수위도 낮아지고 검찰과 사실관계를 놓고 다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신속하게 수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가장 부끄러운 혐의’가 된 ‘노건호 미국 주택 구입 자금 명목 100만 달러 수수(收受)’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검찰이 굳이 미국에서 집을 샀느냐의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40만 달러를 추가로 받은 사실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100만 달러를, 빚을 갚기 위하여 빌렸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검찰은 “빚을 갚기 위하여 외화를 빌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면서 더 철저한 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주택 구입 과정과 40만 달러 추가 수수까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인규 전 검사는 노무현 죽음 직후 ‘정치적 타살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던 문재인 변호사가 그 2년 뒤의 책에선 ‘정치적 타살이나 진배없었다’고 말을 바꾼 것은 대통령으로 출마,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친구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거 자신의 말까지 뒤집어가면서 검찰에 대해 정치적 타살 운운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고 표현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쌓고 슬픔과 원망과 죄책감을 부추기는 의식(문재인의 《운명》 발간)을 통해 검찰을 악마화하고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에게 ‘정치는 하지 말라’고 했다던 노 전 대통령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의 죽음으로 문재인 변호사가 후에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사의 시작은 국세청의 박연차 조사
 
  이인규 전 검사는 노무현 수사는 검찰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2008년에 있었던 국세청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 세무조사와 이에 따른 검찰고발이 출발점이었다고 썼다. 국세청은, 2008년 7월 30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동원한 강도 높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그해 10월 노건평이 경영하는 정원토건 세무조사로 확인한 박 회장의 세금포탈 혐의를 검찰에 고발하고 수집한 자료를 넘겼다. 박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가 청와대의 지시인지 국세청의 자체 판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청와대는 박연차 회장 고발 사건이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정치인들의 금품 수수 사건으로 확대될 것임은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저자가 2009년 1월 중앙수사부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중수부는 박연차 회장 등을 구속기소한 상태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의 계기는 국세청이 검찰로 보낸 자료 중 ‘500만 달러 송금 지시서’였다. 박연차는, 검찰이 ‘박 회장 아들에게 송금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노 대통령 아들 노건호 등의 사업자금으로 넘겨준 것”이라고 실토했다. 이인규 신임 중수부장은 전임 수사팀으로부터 노 전 대통령의 시가 2억원 상당 명품 시계 수수와 500만 달러 수수 자료를 인계받고 수사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전직 대통령의 재임 중 금품 수수 비리를 발견하고서도 이를 수사하지 않는다면 검사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부장으로 있던 우병우(禹柄宇)를 수사주임 검사로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이 법무부 검찰 1과장으로서 인사를 맡았던 경험상 그가 청렴하고 강직하며 유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법무부는 우 검사를 정책기획단장으로 기용하려고 했으나 이인규 중수부장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는 선동”
 
  저자는, “검찰이 무리한 수사로 압박해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 “검찰이 노 전 대통령 피의 사실을 공개했다” - 노 전 대통령은 수시로 자신의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통해 피의 사실 중요 내용을, 허위 사실을 포함해 공개하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노 전 대통령이 피의 사실을 ‘셀프 공표’했고, 이에 따라 언론이 취재와 보도에 나선 것이다.
 
  〈수사 진행이 검찰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 것이다. 검찰의 당초 계획은 모든 수사를 다 마친 후에 마지막으로 노 전 대통령 수사를 하려고 했던 것인데 스텝이 꼬인 것이다. 더 이상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미룰 수 없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보안을 우려해 박 회장의 진술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특별하게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고 있었다. 검찰이 갑자기 바빠졌다.〉
 
  * “검찰의 정치적 수사였다” - 검찰이 인지(認知)한 수사가 아니고 국세청이 박연차의 탈세 혐의 조사 중 발견한 증거들을 검찰에 넘김으로써 수사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수사 초기부터 이인규 중수부장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불구속 수사 방침을 지시했고 “총장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는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 “망신 주려고 ‘논두렁 시계’ 지어냈다” -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2억원이 넘는 고급 시계 2개를 선물한 것은 사실이다. 노무현이 그 시계를 밖에 버렸다고 한 것도 사실이다. 검찰 수사 기록 어디에도 ‘논두렁 시계’라는 표현은 없다. 이것은 최초 보도한 SBS가 처음 쓴 말로, 그 배후에 국정원과 이명박 청와대가 있을 개연성이 매우 크나, 당사자인 SBS는 취재 경위를 밝히지 않고 있다.
 
  * “신문(訊問)을 직접 담당한 우병우 중수1과장이 ‘노무현 당신은 대통령도 아니고…’ 운운하며 모욕했다” - 신문에 함께한 문재인 당시 변호인이 노 전 대통령 타계 직후 인터뷰에서 “조사하는 검사들도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충분히 했다”고 인정했고, 2017년의 기자간담회에서도 “그런 발언은 없었다”고 재확인했다. 2009년 4월 30일의 피의자 신문 과정은 고스란히 CCTV로 녹화되어 영구보존 중인 수사기록에 첨부됐다.
 
 
  “이 부장, 시계는 뺍시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09년 4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 조사 과정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대검 7층 집무실 앞에서 노 전 대통령을 맞아 안으로 안내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먼 길 오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 안타깝습니다”고 인사한 뒤 부산 근무 시절의 인연을 꺼냈다고 한다.
 
  “1983년 겨울 제가 부산지방검찰청에서 검사직무대리로 수습 중일 때, 대통령님께서 제가 맡은 업무상과실치사사건의 변호인이셨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사무실로 찾아와 수사기록을 열람하고 돌아가신 일이 있었지요….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는 저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고 한다.
 
  “이 부장! 시계는 뺍시다. 쪽팔리잖아.”
 
  저자는 당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무어라 답변해야 좋을지 난감했다고 한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집무실 컴퓨터에 연결된 CCTV 화면으로 11층 특별조사실에서 우병우 검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신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검사들은 신문 과정에서 ‘대통령님’이라 했고 철저히 준비하여 ‘심리적으로 압도했다’고 썼다.
 
  우 검사가 “왜 생활비를 달러로 빌렸습니까? 100만 달러를 어디에 사용하였는지 내역을 제출해주실 수 있습니까? 100만 달러를 (과테말라행) 출국 전날 받았고, 원화가 아닌 달러로 받은 것으로 보아 빚을 갚기 위해 빌린 것이 아니라 노건호의 미국 주택 구입 자금으로 받은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노무현은 충동적 답변을 한다.
 
  “검사님! 저나 저의 가족이 미국에 집을 사면 조중동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시계는) 처가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9월 27일 형 노건평을 통하여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2억원대 피아제 시계 두 개를 받은 혐의에 대하여 ‘퇴임 후 형 노건평의 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사실을 4월 22일 KBS 9시 뉴스 보도 후 아내로부터 들어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박 회장이 노건평을 통하여 대통령 생일선물로 준 시계를 노건평의 처가 1년 5개월 동안 갖고 있다가 퇴임 후 전해 주었으며 권 여사는 이 사실을 1년 넘게 남편에게 숨겼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인규 부장이 보기엔 “너무 작위적이어서 설득력이 없었다”.
 
  이인규 중수부장은, 퇴임 후에 받은 것으로 만들어 직무 관련성을 흐리려는 거짓말로 본 것이다. 우병우 검사는 “박연차 회장이 2007년 봄경 대통령 관저 만찬에서 노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감사 인사를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해도 “그런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
 
  곁에 있던 문재인 변호사는 “김해공항 검색 직원 등을 조사해보면 노건평이 시계를 가지고 비행기에 탔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는데 이 장면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저자는, “어이가 없었다”고 썼다. 노건평도 검찰에서 권양숙 여사에게 시계를 전달했고, 동생에게도 이 사실을 말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우병우 검사는 같은 종류의 시계 사진을 보여주며 “이 시계가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우 검사가 “시계를 제출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노 전 대통령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처가 이 사건 수사가 시작된 후 겁이 났던지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고 했다. ‘논두렁’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감옥 가면 통방합시다”
 
  2009년 4월 30일 오후 11시경 조사가 거의 끝날 무렵 우병우 과장이 “대통령님과 박연차 회장 두 사람의 진술이 중요 부분에 차이가 있어서 대질하겠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질을 거부했다. 문재인 변호사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도 아니고,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거들었다.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는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오히려 대질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피의자 입장에서는 대질신문을 거부할 경우 수사기관에 무엇인가 숨기고 거짓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어, 특별히 불리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질 거부는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이인규 부장은, 우 과장에게 메신저로 지시했다.
 
  “대질은 무산되었지만,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을 만나게라도 하라.”
 
  노 전 대통령은 이것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웠는지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잠시 후 박 회장이 변호인인 공창희(孔昌喜) 변호사와 함께 조사실로 들어왔다. 박 회장은 뒷짐을 진 상태로 걸어 들어오면서 원망 섞인 목소리로 노 전 대통령에게 말했다.
 
  “대통령님! 우짤라고 이러십니까!”
 
  “박 회장! 고생이 많습니다. 저도 감옥 가게 생겼어요. 감옥 가면 통방합시다.”
 
 

  저자는 노무현의 대응전략이 그 자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누구의 조언을 받았는지 몰라도(물론 그 자신이 변호사이기도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피의자 방어권’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구차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시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포기하라는 것도 아니다. 부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검찰의 수사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인정할 것은 인정했어야 한다. 국민 앞에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했어야 한다. 형사처벌을 받게 될 위험에 처할 수 있었을 것이나 적어도 비굴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인규 변호사는 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큰 책임이 이른바 진보언론의 저주에 가까운 비판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개인 홈페이지 ‘사람세상’에서 수사내용을 ‘셀프 중계’한 후부터 검찰에 출석해 수사를 받고 돌아간 직후까지 계속해서 그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는데, 특히 《미디어오늘》 《한겨레》 《경향》 등 이른바 진보언론의 강도가 훨씬 셌다.
 
  〈“지도자답게 산화하라” “당신이 죽어야 이 땅에 민주주의와 사회정의가 부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노 전 대통령의 자진(自盡)을 강요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한때 자신들이 지지했던 사람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잔혹할 수 있는지, 인간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한 좌파 신문은, “노무현 당신 패밀리가 한 일로 민주화 세력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받았으니, ‘알았느니 몰랐느니’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사라지라”고 했다. 저자는 묻는다. 칼럼의 마지막 문장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적에게 받는 것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에게서 받는 비난이 더욱 가슴 아픈 법이다. 이들의 언사는 비판을 넘어 인격 모독이요, 저주였다. “노무현 당신 때문에 우리(진보 세력)가 망하게 생겼으니 죽어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인규의 역사적 책임 완수
 
  자살 이후 그를 비판했던 이른바 진보 세력이 표변, 노무현 우상화에 골몰하고 있는 데는 비뚤어진 죄의식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책의 끝에서 ‘사실보다 위대한 진실은 없다’는 제목을 달고 문재인 변호사의 책임을 재차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자살을 막지 못한 문 변호사가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으로 검찰을 공격하고 있다.〉
 
  이인규 전 검사는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선택이었다〉고 썼다. 후세를 위해서도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진국에선 수사받던 피의자가 자살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택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동정부터 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에도 수사는 계속되었으나 박연차 회장은 더 이상 협조하지 않았고 법무부와 청와대에서도 조기(早期) 종결하라고 압박했다. 2009년 6월 12일 이인규 중수부장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혐의는 인정되지만 사망하여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였고 수사기록은 영구보존물로 지정한다.〉
 
  2009년 7월 14일 이인규는 24년 6개월 동안의 대한민국 검사 생활을 끝내고 퇴임하였다. 그는 퇴임사에서 “부정부패 척결은 당위의 문제일 뿐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부정부패에 관대한 사회는 문명사회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불의와 부정부패에 대한 투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검찰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인규 변호사는 〈내가 떠난 후 힘든 여건 속에서도 우병우 검사가 최선을 다하여 기소된 21명 중 19명에 대하여 유죄가 확정되었다〉고 썼다.
 
  노무현의 자살은 종북좌파 세력을 되살리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5년간 대한민국을 체제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은 이 사건의 진실을 국민들에게 보고할 역사적 책임을 진 사람이고 책 쓰기를 통하여 대한민국 검사로서의 책임을 완수한 셈이다.
 
  그렇다면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답은 독자들의 몫이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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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사건 당시 소위 진보언론을 보니…

“청렴성만큼은 믿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가슴엔 대못을 박았다”

글 : 김세윤  월간조선 기자  

⊙ “이제 그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는 것”《경향신문》
⊙ “떳떳하게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국민의 자존심만이라도 살려줘야”《한겨레》
⊙ 노무현 사망하자 ‘처음부터 정치보복 냄새 진동했던 노무현 사건’이라며 ‘정치검찰 책임론’ 제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을 당시 《한겨레》 《경향》 등 이른바 진보언론 등은 사설과 만평, 속보 등을 통해 비판적인 보도를 쏟아냈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했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은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큰 책임이 이른바 진보언론의 저주에 가까운 비판에도 있다”면서 “노 전 대통령이 개인 홈페이지 ‘사람세상’에서 수사내용을 ‘셀프 중계’한 후부터 검찰에 출석해 수사를 받고 돌아간 직후까지 계속해서 그에 대한 언론의 비판이 쏟아졌는데, 특히 《미디어오늘》 《한겨레》 《경향》 등 이른바 진보언론의 강도가 훨씬 셌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랬을까? 당시 소위 진보언론들의 사설들을 찾아보았다.
 
 
  《한겨레》, “기만당한 국민의 분노만 자극할 뿐”
 
  2009년 4월 8일 《한겨레》는 “노 전 대통령, 국민 가슴에 대못 박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사과문을 게재한 직후였다. 《한겨레》는 “그의 시인은 오히려 국민을 참담한 심정에 빠뜨렸다. 자존심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이었지만, 청렴성만큼은 믿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가슴엔 대못을 박았다”면서 “기만당한 국민의 분노만 자극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형은 ‘돈 먹는 하마’에 ‘막가는 브로커’로 확인됐다. 자신도 비록 차용증을 썼다지만 파렴치한 기업인으로부터 돈을 빌려 썼고, 부인 역시 그로부터 돈을 받아 썼다. 그의 오른팔 왼팔 하는 측근들도 지저분한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거나, 이미 실형을 살았다. 이제 더 지킬 것도 없는 셈이다”라면서 “떳떳하게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국민의 자존심만이라도 살려줘야 하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한겨레》는 “사실 부인이 수억원을 빌렸다고 한 것도 의심스럽다. 퇴임 당시 그의 재산은 9억원이 넘었다. 그 정도는 갚을 수 있었다”면서 “더는 그처럼 불행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것을 당장 털어놓기 바란다”고 질타했다.

  《경향신문》도 4월 9일 “노 전 대통령은 먼저 국민에게 진상 밝혀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직후였다.
 
  《경향신문》은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사법처리될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게 됐다”면서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는 사과문을 보면 아직도 일말의 미련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책임을 지겠다는 식의 각오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박 회장에게서 돈을 받은 이유가 ‘미처 갚지 못한 빚 때문’이라고 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재임 중에는 급여를 거의 다 저축하고 퇴임 후에는 관련 법률에 의해 연금을 받는 대통령 부부가 무슨 연유로 그런 거액의 빚을 지게 됐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경향신문》, ‘굿바이 노무현’
 
  며칠 뒤인 4월 16일 《경향신문》에는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다소 거친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부인 권양숙 여사(4월 11일)와 아들 건호씨(4월 12일)가 각각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이후다.
 
  이 사설은 먼저 “누가 돈 달라 했고, 누가 돈을 썼는지 지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시하고 전달하고 받은 이들은 모두 노무현의 가족이라는 점이다. 남편·부인·형·아들·조카. 그리고 그들을 돕는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들, 그들이 한 일이다. 노무현 패밀리가 한 일이다”라고 직격했다. 이 사설은 “노무현은 범죄와 도덕적 결함의 차이, 남편과 아내의 차이, 알았다와 몰랐다의 차이를 구별하는 데 필사적이다”라면서 “그러나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참여정부의 실정으로 서민들이 가난해지는 동안 노무현 패밀리는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재벌 개혁을 다짐하고는 삼성에 국정을 의탁하고, 특권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고는 스스로 특권층이 되고, 시장 개혁 대신 시장 만능의 우상을 퍼뜨림으로써 노무현을 통해 세상의 낡은 질서를 바꾸려 했던 그 열정을 싸늘한 냉소로 바꾸어놓고, 절망 속에 빠진 서민을 버려두고 자기들은 옥상으로 피신해 헬기 타고 안전지대로 탈출하려 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 사설에는 노무현 정권의 도덕적 파산으로 인해 이른바 ‘민주화 운동 세력’이 느끼는 위기의식도 잘 나타나 있다.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집권한 그는 민주화 운동의 인적·정신적 자원을 다 소진했다. 민주화 운동의 원로부터 386까지 모조리 발언권을 잃었다. 그를 위해 일한 지식인들은 신뢰와 평판을 잃었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개혁이든 노무현이 함부로 쓰다 버리는 바람에 그런 것들은 이제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다. 낡고 따분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이름으로는 다시 시민들의 열정을 불러 모을 수가 없게 되었다. 노무현이 다 태워버린 재 속에는 불씨조차 남은 게 없다. 노무현 정권의 재앙은 5년의 실패를 넘는다. 다음 5년은 물론, 또 다음 5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당선은 재앙의 시작이었다고 해야 옳다. 이제 그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한겨레》, “법적 책임은 당연”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은 서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됐다. 다음 날 《한겨레》에 “피의자 노무현”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사설은 노 전 대통령이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사설은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은 면목이 없고 실망시켜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국민의 실망은 그 이상이다”라면서 “희망과 기대로 정치를 바로 세울 힘과 자신감을 찾는 일은 이제 그로 인해 더 어려워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질책했다. 사설은 “그는 자신의 법적 책임을 대부분 부인해왔다”면서 “돈을 준 쪽이 노 전 대통령을 보고 줬다고 하고 가족이나 측근이 별 죄의식 없이 돈을 받았다면, 그렇게 되도록 만든 노 전 대통령에게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당사자들이야 서로 가족 같은 사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런저런 이권과 편의가 오가는 비리 구조였을 뿐이다. 노 전 대통령에겐 법적 혐의 말고도 개혁을 말하면서 이런 구태에 안주한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사설은 “그의 혐의가 확인된다면 그에 맞는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면서도 “그러나 그의 잘못이 대놓고 직접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챙겼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잘못과 동일시될 순 없다. 검찰도 자식이나 아내가 받은 돈을 노 전 대통령이 몰랐을 리 있겠느냐는 정황만으로 법적 책임을 추궁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5월 14일 《경향신문》은 “‘전직 대통령의 아들’ 멍에 때문이라니”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들의 미국 뉴욕 집을 마련하기 위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4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비판했다. 사설은 “돈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과 별개로 노 전 대통령 측이 밝힌 경위는 절망감마저 안겨준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의 부인이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아들의 ‘정치적 망명’이라도 꾀했다는 말인가. 후속 설명도 가관이다” “검찰과 국민을 상대로 숨바꼭질하는 듯한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안쓰럽기조차 하다”고 질타한 후 “뉴욕 집에 대한 새로운 의혹과 노 전 대통령 측 대응을 보노라니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하는 기대마저 허물어져 가는 듯하다. 이러고도 자신은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할 셈인가”라고 물었다.
 
 
  현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한겨레》)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압박해왔던 소위 진보언론들은 이명박 정권을 향해 필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5월 25일 《한겨레》는 “처음부터 정치보복 냄새 진동했던 노무현 사건”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이 사설은 먼저 노 전 대통령의 유서에 나오는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는 말을 소개한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에 나오는 이 두 줄에서 그가 퇴임 뒤에 겪어야 했던 압박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설은 “비리가 먼저 있고 징벌이 뒤따르는 것이 상례이지만, 박씨 사건은 철저하게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면서 “‘노무현 제압하기’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권력기관이 일제히 나서 십자포화를 날리는 식으로 사태가 전개된 것이다. 시중에 현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평가가 파다한 것도 국세청과 검찰 등 권력기관이 박씨 사건과 관련해 벌인 ‘이상한’ 행태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주장했다. 사설은 “박씨 사건에는 이른바 3대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검찰, 국세청, 국가정보원이 모두 관여했다”면서 “이명박 정권 들어 급속하게 이뤄지고 있는 권력기관의 사유화 현상으로 볼 때, 이들 기관의 움직임이 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핵심부의 뜻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는 “이런 점에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죄보다 사람을 미워한’ 현 정권이 만들어낸 최대의 비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권력기관을 앞세운 정치보복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다.
 
 
  ‘정치검찰 책임론’ 무겁게 받아들여야(《경향신문》)
 
  《경향신문》도 5월 26일 “‘정치검찰 책임론’ 무겁게 받아들여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내며 노 전 대통령 죽음의 책임을 검찰로 돌렸다. 《경향신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검찰의 책임론이 확산되고 있다”면서 “검찰의 수사가 마구잡이 식으로 진행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심신을 파탄지경에 이르게 하고, 결국 막다른 선택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도 검찰의 여론몰이식 수사에 불만을 토로해 왔기에 이는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은 “검찰이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면서 과연 추호의 정치적 고려도 없이 중립적으로 검찰권을 행사했는지에는 의문이 든다”면서 “중대한 사안을 놓고 검찰은 큰 원칙과 틀을 세워놓기보다는 일반 형사범 수사하듯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진행한 인상이 짙다”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노 전 대통령을 검찰에 소환한 뒤 3주일이나 끌면서 사법적 처리를 지연한 것도 수사 상식에 어긋난다. 이 기간 노 전 대통령은 형사처벌보다 더 가혹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면서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해 제기되고 있는 책임론을 검찰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처음부터 정치보복 냄새 진동했던 노무현 사건’에 즈음해 자기들도 ‘형사처벌보다 더 가혹한 비난’을 가했고, ‘현 정권에 의한 정치적 타살’에 일조했다는 데 대한 자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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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의 이인규 前 대검 중앙수사부장

출처 : 2023.4.10. 조선일보

“지금이 이재명 정권이었어도 책을 출간했겠느냐”고 묻자, 이인규 전 중수부장의 미간이 살짝 패었다. “물론입니다. 팩트잖아요. 이걸로 제가 시달릴 수는 있어도 저를 십자가에 매달 순 없습니다. 출간하지 않을 거면 제가 왜 5년 동안 이 책을 썼겠습니까.”

 

 

이인규(65)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지난달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조갑제닷컴)는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란 부제가 암시하듯,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수수 의혹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관련자들의 실명(實名)과 함께 공개해 파문이 일었다.

 

2억짜리 명품 시계를 비롯한 노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가 대부분 사실이었고, 노 대통령을 사망에 이르게 한 책임이 문재인 당시 변호사에게도 있다고 주장해 노무현재단과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정치 검사의 2차 가해” “유족을 두 번 죽이는 일”이란 비난을 받았다.

 

지난 5일 만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좌파 언론과 민주당 정치인들은 지금까지도 ‘논두렁 시계’ ‘망신 주기’란 말로 검찰이 모욕을 줘 노 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선동한다. 인터넷에는 온갖 억측과 허위 사실이 진실인 것처럼 떠돈다. 국민의 알 권리, 올바른 역사의 기록을 위해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은 가족의 금품 수수 사실을 몰랐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권양숙 여사가 노 대통령 모르게 박연차 회장에게 금품을 요구하거나 받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책은 출간 2주만에 4만3000부를 찍고 종합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유족 위해 공소시효 끝난 뒤 출간”

 

-부제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가 사실상의 제목이다.

 

“지난 14년간 끊임없이 저와 검찰을 향해 조작 수사, 망신 주기 수사로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공격하며 자신들 정치에 이용해 온 세력에 대한 반박 질문이다. 진짜 누가 대통령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는지 따져보자는 심정으로 붙였다.”

 

-집필을 결심한 건 언제인가.

 

“대선을 앞둔 문재인 후보가 자서전 ‘운명’을 출간한 2011년이다. 문재인 당시 변호사가 노 전 대통령 장례식 직후인 2009년 6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는 ‘검찰을 원망하거나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정치 보복에 의한 타살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고 했다가 2년 뒤 자신의 책 ‘운명’에서는 ‘(검찰엔) 언론을 통한 모욕 주기와 압박 외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 타살이나 진배없었다’고 말을 바꿨다. 그때 바로 반박할까 생각했으나 공소시효가 남아 있어 그만뒀다. 다만 그날 기사를 오려두었다가 ‘운명’과 함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번 책에 인용했다. 수사 개요를 부록으로 붙인 건 이걸로 (그간의 논쟁을) 끝내자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 1년 시점에 책이 나와 말들이 많다.

 

“책 말미에 노 대통령 수사 개요를 부록으로 첨부했다. 이것이 공개됐을 때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면 우파 진영에서 대통령의 유족을 기소하라는 요구가 강하게 나왔을 것이다. 이 경우 유족은 물론 검찰도 입장이 난처해질 거라 판단했다. 유족을 사법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공소시효(2023년 2월21일)가 끝난 뒤 책을 냈다. 윤석열 정부와는 아무 관련 없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정치 검사가 검찰 정권에 바친 글”이라고 비난했다.

 

“책에는 노 전 대통령 수사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검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가감 없이 적었다. 내가 정치 검사였다면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유리한 내용만 썼을 것이다. ‘검찰 정권’ ‘검찰 공화국’ 하는데 문재인 정권 때는 적폐 청산한다고 임기 내내 얼마나 많은 수사를 했나. 그때 수사는 로맨스이고 지금 하는 수사는 불륜인가. 검찰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 검찰 공화국인가.”

 

-사자명예훼손 등 법적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 공무상 비밀누설에 해당한다는 시각도 있다.

 

“사자명예훼손죄는 허위여야 하는데 내 책에 허위 사실은 들어 있지 않다. 공무상비밀누설죄는 기밀 자체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 누설에 의해 위협받는 국가 기능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공소권 없음’ 처리된 사건의 수사 내용을 공무상 비밀로 인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건의 수사 내용에 대해서 국가가 비밀로 유지해야 할 아무런 이익이 없다. 또한 대한민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국민의 알 권리보다 우월한 가치는 없다. 모든 비난과 책임은 감수할 것이다.”

 

-유시민 전 이사장은 ‘윤석열·한동훈 검찰에 사건을 줘야 하므로 고소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수사기관은 검찰만 있는 게 아니고 경찰, 공수처도 있다. 그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책 내용은 수사 기록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고소를 할 경우 사실 여부 확인을 위해 수사 기록 공개가 불가피해지니 고소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된다.”

 

-법조계에서조차 ‘피의자의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 수사 지휘자가 사건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출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비판을 수용한다. 그러나 역사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권양숙 여사, 형 노건평씨, 아들 노건호씨, 딸 노정연씨, 조카사위 연철호씨, 그리고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은 사건 내용을 잘 알고 있다. 유족 측에서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논두렁 시계는 검찰에 씌운 올가미”

 

-노 전 대통령 측은 ‘박연차 회장의 진술 말고는 (검찰이) 아무런 증거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박연차의 진술을 배제하고 사건을 설명해 보겠다. 명품 시계 수수에 관해 형 노건평씨는 ‘2006년 9월 27일 박 회장으로부터 노 대통령 회갑 선물로 2억원 상당의 피아제 남녀 명품 시계 1세트를 받아 청와대 관저에서 열린 가족 모임에서 노 대통령 내외에게 전달했으며, 박 회장에게 노 대통령 내외의 감사 인사를 전해 주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자신의 진술과 다른 노 전 대통령의 주장을 전해 듣고도 기존 진술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권양숙 여사가 시계를 받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회갑일 청와대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노건평씨의 처가 1년 5개월간 보관하고 있다가 퇴임 후 봉하마을 사저에서 전달했으며, 권 여사는 이러한 사실을 1년 이상 숨겼다가, KBS 보도 후 권 여사가 밖에 내다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다. 시계 수수 후에도 봉하마을 사저 부지 매매, 미국 주택 구입 자금 140만달러 수수, 아들 사업 자금 500만달러 수수는 물론 퇴임 후에도 노 대통령이 직접 15억원을 빌리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권 여사가 그런 박 회장의 선물을 대통령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

 

-권 여사가 박 회장에게 100만달러를 받아 미국 뉴저지에 주택을 구입한 사실은 노 전 대통령이 모를 수 있지 않나.

 

“아내, 딸, 아들, 친구 정상문 비서관, 김만복 국정원장, 박연차 회장 등 주위 사람은 미국 주택 구입을 알거나 인식하고 있는데 노 대통령만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노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서 100만달러는 미처 갚지 못한 빚이 있어 빌린 것이며, 미국에 집을 사지 않았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박 회장 최측근인 모 사장은 노 대통령이 IOC 총회 참석차 과테말라로 출국하기 3, 4일 전인 2007년 6월 100만달러를 보내달라는 정 비서관 요청에 따라 직원 130여 명을 급히 동원해 100만달러를 환전한 뒤 출국 전 청와대에 전달했다. 이는 정상문도 검찰에서 진술한 바다.”

 

-노건호, 연철호 등이 박 회장으로부터 사업자금 500만달러를 받아 쓴 것도 두 사람이 박 회장에게 사업을 설명하고 받은 투자 자금으로 노 대통령은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투자 대상, 이익 배분, 투자 회수 방법 등도 정하지 않았고 투자 계약서도 없다. 박 회장 지분은 하나도 없음이 확인됐다. 500만달러 중 일부를 사용해 노 전 대통령이 개발한 인력 관리 프로그램 ‘노하우 2000′을 업그레이드해 봉하마을에서 시연까지 했다. 500만달러를 송금한 태광실업 최모 전무는 ‘어차피 주기로 한 돈인데 따지지 말고 송금해 주라’는 박 회장 지시를 받고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가 있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대가 없이 준 것이라고 명백히 진술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박 회장이 500만달러라는 큰돈을 사업 경험도 없는 노건호, 연철호에게 주었을까. 대부분의 혐의에 관여돼 있는 정상문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검찰에서 ‘(금품 수수를 포함한 모든 혐의에 대해) 이렇게 부인해서 될 일이 아니다. 변호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에게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대(對)국민 사과를 하는 방안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권양숙 여사에 굴레 씌우는 건 가혹”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가장 억울한 이는 권양숙 여사인가.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권 여사가 정상문 비서관에게 부탁해 빌렸다고 주장하는 3억원 외에 노 대통령 모르게 박 회장에게 금품을 요구하거나 수수한 사실은 없다. 권 여사에게 남편을 죽게 만든 사람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은 가혹하다. 노 전 대통령도 바라지 않으실 거다.”

 

-문제의 ‘논두렁 시계’ 논란을 촉발한 SBS 보도에 격분했다. 배후에 이명박 정부와 국정원이 있다고 주장했다가 고소도 당했다.

 

“‘논두렁 시계’는 좌파 정치인들이 검찰에 씌운 프레임이자 올가미다. 문재인, 전해철 변호사는 노 대통령 조사 당시 입회해 시계 관련 발언의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 내외가 명품 시계 받은 사실은 감추고 ‘밖에 내다 버렸다’고 한 노 대통령의 검찰 진술이 ‘논두렁에 내다 버렸다’고 잘못 보도된 것을 빌미 삼아, ‘논두렁에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마치 시계 및 금품을 받지 않은 것처럼 교묘하게 논리를 만들었다. 더구나 이는 청와대와 국정원이 명품 시계 수수와 관련한 KBS와 SBS 보도에 개입한 바람에 생긴 것이라 더욱 화가 났다. ‘논두렁 시계’를 보도한 SBS는 취재원 보호라는 명분으로 거짓 내용을 흘린 사람을 끝내 밝히지 않았고, 내가 SBS ‘논두렁 시계’ 보도의 배후에 국정원이 있다고 발표하자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검찰은 그 사건을 4년이나 방치하다가 나에 대한 소환 조사도 없이 2022년 10월 무혐의 처분했다.”

 

-노무현의 죽음엔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책임도 크다고 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기 직전 7일 동안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극단적 선택 다음 날인 5월 24일 권 여사에 대한 조사가 예정돼 있음에도 ‘현안이 없었다’면서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서 한 장 제출한 적이 없으며, 검찰과 접촉해 수사 내용을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의 솔직한 입장을 묻고 증거와 사실을 정리해 나갔더라면 대통령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진 않았을 것이다.”

 

-진보 진영과 진보 언론도 노무현을 가혹하게 비난하면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썼다.

 

“비판을 넘어 인격 모독,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한 것은 사람보다 진영 논리를 우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랬던 그들이 노 대통령이 서거하자 검찰에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노무현 정신을 외치며 상주 코스프레를 했다. 그 모습에 제일 당황한 이는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고 유언한 노 전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그는 친구이자 동지인 문재인이 자신의 주검 위에 거짓의 제단을 만들어 대통령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을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된 2017년, 왜 미국으로 떠났나. 문 정권이 두려웠나.

 

“일하던 로펌에서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7년간 변호사로 일했는데 즐겁지 않았다. 로펌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원망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권은 두렵지 않았다.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며 출국을 결심했다. 홈앤쇼핑 강남훈 대표는 고교 동창으로 둘도 없는 친구다. 경찰과 검찰은 홈앤쇼핑을 수사해 나와 관련된 비리를 찾으려고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제가 출국한 뒤에도 강 대표를 취업비리로 기소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구속됐으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하지만 강 대표는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생사를 넘나드는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는 민간인 사찰의 DNA가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위선이 가증스럽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자서전 ‘운명’에서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좌표’를 찍은 뒤 당신은 물론 가족이 악플에 시달렸다. 미국 유학 중이던 딸의 페이스북에 ‘살인자의 딸’, ‘노무현을 죽인 대가로 공부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같은 댓글도 달렸다.

 

“추적해 보니 댓글을 단 사람은 미국 버지니아 애난데일에서 에어로빅 강사를 하는 미씨 USA 소속 우리나라 교포였다.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또한 무지해서 그런 일을 벌인다고 생각하고 참아 넘기기로 했다. 그러나 딸은 예상치 못한 신상털이와 황당한 인신공격에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고, 아내는 자식들이 고통 받는 걸 보고 가슴 아파했다. 잘 이겨내 준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권력 하명받아 수사한 적 없다”

 

-이인규는 정치 검사인가.

 

“정치 검사의 뜻이 뭔가. 정권의 하명을 받아서? 자기의 출세를 위해 수사? 맹세코 나는 권력의 하명을 받아서 수사한 적이 없다. 출세는 하고 싶었을 거다. 총장도 되고, 장관도 되고 싶고. 그렇다고 누구의 구미에 맞춰 수사를 하는 건 검사가 아니다.”

 

-책 출간 후 한 언론은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시 이인규가 삼성·LG·롯데 등에게 ‘부당내부거래’를 수사하겠다고 겁을 주어 대선자금 진술을 받은 것을 ‘협박 수사’라고 비판했다.

 

“불법대선자금 수사의 핵심 과제는 삼성·LG 등 거대 재벌로부터 여야 정치권에 대한 대선자금 제공 진술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 내에 그들의 입을 열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업 공시 내용에서 ‘부당내부거래’로 의심되는 내용을 지렛대로 사용한 것이다. 불법적인 내용이 있었다면 그쪽 변호사들이 가만히 있었겠나. 제 책에는 1991년 해당 신문사 기자가 삼성반도체통신 뇌물 공여사건 수사와 관련해 저에게 삼성그룹을 대신해 돈 봉투를 전달하려 했다고 기술한 내용이 나온다. ‘협박수사가 자랑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나를 과하게 비판한 것은 이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윤석열 정부를 검찰 정권이라고 한다.

 

“문재인 정권 당시 적폐 수사라는 이름으로 전 정권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수사를 했다. 그때의 문 정권도 검찰 정권이었나. 검찰이 수사를 많이 하는 건 부패한 정치인, 고위 공직자, 재벌 등 ‘거악’이 많아서다. 그들이 죄를 짓지 않으면 검찰이 수사할 일이 없다.”

 

-그러나 검찰 개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현재 검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진영화 조짐이다. 현 정권 검사들이 지난 정권 검찰이 한 수사를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 준사법기관인 검찰 조직이 진영화되고 있다는 증좌다. 이는 문재인 정권의 잘못된 검찰 인사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문 정권은 소위 ‘빅4′라는 서울중앙지검장, 대검 반부패수사부장, 공안부장, 법무부 검찰국장을 경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코드 인사로 채웠다. 그들은 분에 넘치는 자리를 준 문 정권에 보은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는 다 아는 대로다.”

 

-정치에 뜻이 있어 책을 출간했나.

 

“저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람이지 정치에 맞는 사람이 아니다. 요즘 정치를 보면 마치 프랑스혁명 전 앙시앵레짐을 보는 것 같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진영 논리만 넘쳐난다. 원칙과 품격은 사라지고 권모술수가 난무한다. 젊고 합리적인 분들이 정치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530쪽 분량의 회고록에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수사 때 막내 검사로 활약한 한동훈 현 법무장관에 관한 일화도 나온다.

 

“저는 저보다 뛰어난 후배 검사를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동훈 장관도 그런 검사였다. 머리가 정말 좋고.”

 

-국회의원들에게 또박또박 말대답을 해서 지적을 많이 받던데.

 

“옛날에도 그랬다(웃음). 상사에게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스타일이) 갑자기 바뀌겠나. 시대가 바뀌었다. 팩트로 반박하고 논쟁이 이뤄져야 정치도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불법대북송금 사건을 비롯해 김대업 병풍(兵風) 수사와 관련된 검찰 비리,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에서 시작된 제16대 불법대선자금수사의 전말 등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수사 관련 정치인들과 검찰, 국정원 관계자들의 이름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실명(實名)으로 등장한다.

 

“책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분들은 공인(public figure)들이다. 공인들은 역사와 국민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명을 썼다. 그 분들로 하여금 잊고 싶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다.”

 

-노무현 수사로 천직으로 여겨온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억울한가.

 

“다 잊었다. 책을 탈고한 뒤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가겠는가.

 

“2009년 1월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다.”

 

김윤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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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14년 만에 공개한 ‘노무현 수사’… 진실은?

3월 18일 서울 한 대형서점에서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의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가 판매되고 있다. [뉴스1]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를 검사장으로 승진시켜준 사람이고 퇴임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전임 대통령을 수사해야 한다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다.”

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의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책 부제는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다.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하기 전까지 그를 수사했던 이 전 부장의 회고가 담겼다. 이른 아침 노 전 대통령의 투신 소식을 듣고 “눈앞에 있던 거대한 성벽이 한순간에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던 그는 왜 14년 만에 펜을 들었을까. 책은 “2023년 2월 21일로 노 전 대통령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도 모두 완성됐다. 이제는 국민에게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의 진실을 알려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SK그룹 수사에서 대선자금 단서 나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있기 전 검찰은 여러 대형 수사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진행했다. 시작은 2003년 시작된 SK그룹 분식회계 의혹 수사다. 당시는 이 전 부장이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을 지내던 시기다(표 참조). 이 전 부장은 형사9부에 대해 “특수부보다 활발한 인지수사를 벌였다”고 회고했다. SK그룹 분식회계 사건 수사 역시 이 전 부장이 YTN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에 대한 의혹 보도를 보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본격화한 것이었다.

SK그룹 수사가 정치권으로 확대된 배경에는 정치인들의 압력이 있었다. 당시 민주당 이상수 사무총장은 “검찰이 새 정권에 대항하려고 SK에 대한 수사를 벌였다. 이런 검찰은 단두대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부장은 2003년 3월 8일 박영수 당시 서울지검 2차장에게 정치권으로 수사 범위를 확대하자는 의견을 냈다. 정치권이 이처럼 반발하는 데는 켕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책에서는 이 전 부장이 최태원 회장과 거래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이 전 부장이 “최 회장에 대한 수사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을 테니, SK그룹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 제공한 불법 정치자금 내역을 밝혀줄 수 있겠나”라고 묻자 최 회장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다만 최 회장은 “사후에 보고만 받았다”며 “세부 내용은 김창근 구조조정추진본부장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김 본부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 여야 정치권에 준 정치자금은 물론, 16대 대선 과정에서 거대 양당에 전달한 선거자금에 대해서도 진술했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100억 원, 민주당에 25억 원을 줬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 측근에게 12억 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쟁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 누구인가로 좁혀졌다. 당시 김 본부장은 12억 원 상당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받아간 사람에 대해 진술을 흐렸다. 이 전 부장은 김 본부장이 언급한 인상 착의와 당시 노 대통령의 부산 선거캠프 구성 등을 고려해 용의자를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1년 후배인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으로 좁혔다. 최 전 비서관의 사진을 출력해 김 본부장에게 보여주자 체념한 듯 관련 사실을 적고 지장을 찍었다고 한다.

“조심스러워 적지 않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 30일 포괄적 뇌물 수수 혐의로 소환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동아DB]

당시 김 본부장이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삼성은 300억 원, LG는 200억 원이다. SK는 100억 원은 내야지 않겠나’라고 말했다”고 진술해 SK그룹에 대한 수사는 여타 재벌 기업으로 확대됐다. 다만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12월 14일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하면서 쟁점은 양당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로 비화했다. 2004년 5월 21일 대검 중앙수사부는 불법 대선자금 액수가 한나라당 823억 원, 민주당 119억 원이었다고 발표했지만 계산 방식을 수용할 수 없다며 사퇴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과 이 전 부장의 인연은 박연차 게이트로 이어진다. 이 전 부장은 2009년 1월 13일 대검 중수부장으로 부임해 박연차 당시 태광실업 회장의 불법 로비 의혹에 대한 수사를 이어갔다. 같은 해 2월 23일 사안이 급속도로 진전됐다. 과거 상관이던 박영수 변호사가 박 회장의 변호를 맡았다. 박 변호사는 박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치인 등의 명단이 담긴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를 검찰에 제출하며 “조심스러워서 명단에는 적지 않았는데 박 회장이 2007년 6월쯤 노 대통령에게 아들 노건호의 미국 주택 구입 자금으로 100만 달러를 줬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전 부장에 따르면 당시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 측에 △청와대 경비 명목으로 3억 원 △회갑 선물로 피아제 남녀 시계 1세트(2억550만 원 상당) △미국 주택 구입 자금 명목으로 100만 달러 △사업자금 명목으로 500만 달러 △차용금 명목으로 15억 원 등 다섯 가지 금품을 제공했다고 진술했다.

‘동아일보’는 2009년 3월 30일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틀 전인 2008년 2월 말 박 회장의 홍콩 APC 계좌에서 노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의 계좌로 500만 달러가 입금돼 친인척 투자용으로 사용됐다”고 보도했다. “노건호의 계좌가 아니라 조카사위 연철호에게 건네졌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이 전 부장은 이를 두고 “보도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다”고 회고했다. 검찰 내부에서 누가 수사 내용을 제보했는지 찾으라는 지시가 나왔지만 그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고 평가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0일 관용 버스를 타고 서울로 상경해 검찰조사를 받는다.

“대통령님! 우짤라고 이러십니까”

“이 부장! 시계는 뺍시다. 쪽팔리잖아.”

노 전 대통령이 이날 이 전 부장을 만나 했다는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12일 개인 홈페이지 ‘사람사는세상’에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참 부끄럽고 구차하다”면서도 “몰랐던 일은 몰랐다고 말하기로 했다”고도 밝혔다. 이 전 부장은 “노 전 대통령의 발표 내용은 박 회장의 진술과 정면으로 배치됐고, 검찰 증거와도 맞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9년 3월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이 “노 전 대통령이 전직 검찰 총장을 만나 검찰 수사에 대해 자문하면서 ‘500만 달러는 어떻게든 설명을 해보겠는데, 100만 달러는 창피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는 일화도 공개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검찰 조사 당일 박 회장과 노 전 대통령이 불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검찰 조사를 마치고 검찰 요청으로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이 잠시 만났는데, 해당 자리에서 박 회장이 “대통령님! 우짤라고 이러십니까”라며 원망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나도 감옥 가게 생겼다. 감옥 가면 통방하자”고 답했다고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회고록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은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고, 그 상황에서도 그(박연차)를 위로했다”고 회고했는데, 이는 당시 분위기와 달랐다는 것이다.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노무현재단) 측은 책 출간 계획이 알려지자 즉각 비판 입장을 내놨다. “공개된 법정에서 변호인의 반대신문 등을 통해 진실성이 검증된 문서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야 시계 존재를 알고 폐기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정상문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이 박 회장에게 100만 달러를 빌린 것은 사실이나 노 전 대통령이 몰랐던 일”이라고 주장했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역시 3월 20일 유튜브 방송에서 “형식은 회고록이지만 내용은 정치 팸플릿”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형사고소를 하게 되면 윤석열·한동훈 검찰에 사건을 줘야 하기 때문에 고소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주간동아 최진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