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탈북자 “북한, 파키스탄에서 1998년 비밀 核실험 성공”
파키스탄의 핵개발과 핵확산, 그리고 A. Q. 칸 박사 (18) / “파키스탄에서 핵기술 수입한 북한, 리비아에 우라늄 넘겼다”
의문의 북한대사관 직원 부인 총격 사건
빌 클린턴 대통령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를 규탄했다. 그는 “핵실험은 파키스탄의 자해(自害)행위이자 위험한 행동”이라고 했다. 또한 파키스탄과 인도 국민들을 “더욱 가난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라고 했다.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오늘 우리는 민족의 원한을 풀었다”고 했다.
1억 4000만(현재 인구는 2억 2000만)의 파키스탄 국민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기뻐했다. 이들은 ‘핵폭탄의 아버지’라는 칸 박사의 포스터를 들고 행진하며 환호했다. 칸 박사는 실험 직후 실시한 언론 인터뷰에서 5월 28일 총 다섯 차례의 핵실험을 했다고 밝혔다. 이들 중 하나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 위력보다 두 배 강력한 30~35킬로톤 규모였다고 했다. 나머지 네 개의 폭탄은 저강도 폭탄이었다고 했다. 칸은 이 저강도 폭탄을 작은 미사일에 탑재해 육상전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파키스탄은 5월 30일에도 한 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루겠다.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강행한 10일 후,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 강태윤의 부인 김사내가 칸 연구소 영빈관 인근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단순 사고였다고 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김사내 씨가 총살 방식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또한 남편 강태윤이라는 인물은 북한대사관의 경제 참사관으로 근무하며 무기를 해외에 내다 파는 창광무역 직원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창광무역은 1994년 파키스탄에 노동 미사일을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칸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강태윤이 자주 이 시설을 방문했다고 증언했다. 1998년 2월 미국 첩보위성은 북한 기술자들이 파키스탄을 방문, F-16 전투기의 폭탄 투하 실험을 참관한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북한이 대포동 1호 시험 발사를 하는 과정에 파키스탄 기술진이 참여한 사실을 파악했다.
북한産 플루토늄彈 대리실험 의혹
미국 CIA는 강태윤 참사관 등 북한 기술진들이 파키스탄의 핵실험을 참관한 것을 확인했다. 파키스탄은 5월30일에 한 마지막 실험은 차가이의 첫 번째 실험장에서 약 100km 떨어진 사막에서 했다. 마지막 실험용 지하시설은 수평갱(坑)이 아닌 수직坑이었다. 이는 경비가 덜 드는 방법이다. 이 마지막 실험에 쓰인 핵폭탄의 폭발력은 작았다. 파키스탄 당국자들은 ‘소형화된 장치’를 썼다고 했다. 미국은 마지막 핵실험 장소 상공으로 정찰기를 보냈다. 이 첩보기는 상공에서 플루토늄을 검출했다. 28일 실시한 다섯 번의 핵실험에서는 우라늄을 사용했으나 30일 마지막 실험에서는 플루토늄을 사용한 것이었다.
미국 뉴멕시코州 로스앨러모스에 있는 국립핵연구소 관계자들은 놀랐다. 파키스탄은 우라늄 농축 방법으로 핵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플루토늄이 검출될 리가 없었다. 로스앨러모스의 核과학자들은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만들 만큼 플루토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있다고 하더라도 핵폭탄을 만들 실력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은 플루토늄이 중국이나 북한에서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리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는, 중국이 파키스탄에 플루토늄을 양도했을 것 같지는 않고 북한産 플루토늄이든지 플루토늄탄(彈)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을 했다. 일종의 대리 실험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사내가 죽은 것은, 핵폭탄 실험에 대한 자료를 미국 측에 전달하려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에 암살된 것이라는 說이 나돌았다. 김사내의 시신(屍身)은 核과학자들이 돌아갈 때 탑승한 보잉 707기에 같이 실렸고 관(棺)엔 우라늄 농축시설의 부품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정보 당국 관계자들의 증언도 나왔다. 원심분리기인 P-1과 P-2를 포함한 여러 설계도면이 실렸다는 것이다. 또한 이 비행기에는 칸 박사가 동승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황장엽 선생의 生前 증언
파키스탄이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언이 있다. 그중 하나는 2010년에 작고한 黃長燁(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의 生前 증언이다. 그는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미국과 한국과 북한 등이 영변 핵시설의 가동 중단과 그 대가로 경수로 건설 제공에 합의한 직후 평양 심장부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고 한다.
<강석주(북한측 대표): 과거의 核개발이 걱정이었는데 그건 미국의 갈루치가 덮어주기로 하여 해결이 되었습니다.
황장엽: 5년쯤 지나면 과거 核개발을 미국이 사찰하겠다고 할 터인데 어떡하지요.
강석주: 그건 지도자 동지와 토론했습니다. 그때 가서는 우리가 다른 걸 가지고 나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전병호(무기개발 담당 책임 비서가 황장엽 비서에게): 核폐기물을 땅에 파묻어 놓았는데 그 위에 아무리 나무를 심어도 말라 죽어버립니다. 그 근처에만 가도 계기판이 작동해서 숨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에서 플루토늄을 더 들여와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좀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1996년에 전병호는 황장엽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해결이 되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우라늄 농축 기자재를 수입할 수 있게 합의되었습니다.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의 대화로 미뤄보아 북한정권은 1994년 제네바 협정을 맺을 때부터 다른 카드를 준비중이었던 것 같다. 2011년 北으로 우라늄 농축 기자재를 팔아 넘긴 파키스탄의 核개발 책임자 칸 박사가 전병호의 편지를 공개하였다. 편지는 북한이 파키스탄 군부의 두 실력자에게 뇌물을 주었으니 평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편으로 서류와 설비들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월간조선’은 2016년 2월호에서 황장엽 선생의 생전 육성 녹음 테이프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육성 테이프는 120분짜리 두 개다. 2006년 10월 11일과 2007년 3월 14일자 강연·토론을 각각 녹음한 것이다. 이 육성 녹음 테이프에는 보다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제네바 회담이 끝난 다음에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거기는 체계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신형무기, 핵무기, 미사일 이런 것은 군수공업부가 주관합니다. 그것을 행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제2경제위원회이고 내각에서는 전혀 관계를 안 합니다. 다 만들어져서 군대에 넘긴 다음에는 군대가 관리를 합니다. 그런데 전병호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나를 만날 때마다 그래요. 국제비서가 왜 그렇게 무관심하냐고요. 플루토늄을 좀 사다주지 않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아직도 부족해서 그런가 했더니, 그래도 몇 알 더 만들어 놓으면 좋지요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만큼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김정일도 나한테도 얘기를 했고 거기 중요한 간부들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하루는 회의를 하는데 전병호 비서가 보이지를 않아요. 20일 있다가 왔는데 나보고 그래요. 이제는 플루토늄이 필요 없어요. 구할 필요 없어요. 이제 우라늄 235로 만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했더니 내가 이번에 파키스탄에 가서 다 협정 체결을 하고 거기 기술을 다 넘겨받아서 우라늄 235로 만들기로 했다고 해요. 그것이 1996년 여름인가, 가을인가 그래요.〉
고위급 탈북자 “북한, 파키스탄에서 비밀 核실험 성공”
황장엽 선생은 김정일 때가 아닌 김일성 때부터 핵실험 준비를 했다는 증언도 했다.
<전병호가 나보고 그래요. 지하 핵폭발 장치를 다 해놓고서 지하 핵폭발 실험을 하기로 제의서를 올렸는데 왜 승인을 안 하느냐고요. 그것은 국제관계 때문에 안 하느냐고 물어요. 내가 국제비서라고 해서 나한테 물어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있는가, 두 분(김일성, 김정일)이 토론해서 결론을 줄 것이 아닌가 했어요. 그러니까 이 사실은 김일성이 1994년에 죽었으니까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거든요. 살아 있을 때라는 것은 틀림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그랬거든요. 두 분이 토론해서 결론을 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분명히 말했으니까요. 종래 결론을 안 주었지요. 그러니까 그때는 아직 못했지만 벌써 지하 핵실험은 하기로 장치가 다 되어 있다고 보고를 했어요. 곁들여 얘기하고 싶은 것은 여기 사람들(남한)이 얼마나 건방지고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와서 그래요. 북조선 같은 데서는 지하 핵실험을 하면 전체 지하수가 어떻게 되고 파괴되어 절대 불가능한데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이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것이 큰일입니다.>
북한의 한 고위급 탈북자는 ‘월간조선’ 2006년 9월호에 실린 趙甲濟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파키스탄이 북한의 플루토늄 핵무기를 대리 실험해줬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플루토늄을 파키스탄으로 가져가서 공동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실험 결과로 核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자료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플루토늄 물질을 파키스탄으로 가져가서 실험한 것인지, 核폭탄을 가져간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파키스탄과 북한 사이의 유착관계는 상상 이상이다. 파키스탄은 북한으로부터 核탄두 운반용 미사일 개발 기술을 배우고 북한은 파키스탄으로부터 核개발 기술을 배우는 아주 이상적인 협력체제가 오랫동안 작동해 왔다. 서로 國益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親美정책을 쓰고 있지만 지금도 그런 협조관계는 내밀하게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이 탈북자는 “김사내의 암살은 核개발과는 관계없다. 부부 사이의 문제였다”라고도 했다. “미국 정부도 북한-파키스탄의 공동실험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를 인정했을 경우의 후속(後續) 조치와 여파를 걱정하여 모른 척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 김일성 때부터 핵개발”
황장엽 선생과 고위 탈북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북한은 김일성 시절부터 핵실험을 준비했다. 부토 총리가 김일성과 만난 것은 1993년 12월이었다. 김일성은 1994년 7월에 사망했다. 얼마 후인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은 이른바 ‘제네바 합의’를 맺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고 핵사찰을 허용하는 대가로 미국이 경수로를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다 1998년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강행했고 북한이 이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포착됐다. 당시 미-북 핵협상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인물들이다. 로버트 갈루치 특사, 로버트 아인혼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 게리 세이모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량살상무기 조정관 등이다. 이들은 파키스탄의 핵실험 이후 북한이 플루토늄이 아닌 우라늄 개발 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한 강태윤이라는 인물은 미국과 영국 등의 감시대상에 올라 있는 사람이었다. 영국 개트윅 공항 세관 당국은 1997년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한 브리티시 항공사의 비행기 편에서 마레이징 강철을 찾아냈다. 이 강철은 원심분리기 작동에 필요한 핵심 부품이다. 이 비행기는 영국을 경유해 파키스탄에 있는 강태윤 참사관 앞으로 배송될 계획이었다. 영국 정보당국은 강태윤이라는 북한인이 러시아를 통해 물건을 구입, 파키스탄에 전달해주는 중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1998년 2월 강태윤은 또 한 번 적발됐다. 그는 이번에는 파키스탄에서 평양으로 우라늄 농축 관련 부품을 보내려고 했다. 미국과 영국 정보당국은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칸 박사가 만든 P-1과 P-2 원심분리기는 모두 마레이징 강철을 필요로 한다. 우라늄 농축을 하지 않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부품이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에서 플루토늄 재처리시설 가동 등을 중단한다고 말해 놓고 뒤로는 우라늄 농축에 나서려 한 것으로 봤다.
로버트 아인혼 당시 국무부 차관은 책 ‘디셉션’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1998년부터 파키스탄과 북한의 협력이 미사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파악했다”고 했다. 그는 “핵협력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무기 기술자들이 계속 교류를 하는 것을 알았고 이 중에는 칸 연구소 소속 연구진도 있었다”고 했다. 아인혼 차관은 1998년 1월 기준으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와 평양을 오가는 비행기편이 매달 최소 아홉 번 운행됐다고 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이끌었던 갈루치 특사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그는 “1994년 당시만 해도 북한은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 기술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1997년에 들어 북한이 우라늄 농축 관련 기술을 구입하고 있는 것을 파악했다”고 했다. 그의 증언이다.
<칸 박사는 엄청나게 바쁜 사람이었다. 우리는 북한과 파키스탄이 미사일 관련 협력을 하는 것과 우라늄 농축 관련 협력을 하는 것에 대한 차이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군부도 당연히 이를 눈치챘을 것이다. 파키스탄은 원심분리기 기술을 팔려고 했고 북한은 이를 사들였다.>
아인혼에 따르면 1998년부터 미국과 파키스탄의 협상팀은 매년 최소 두 차례 만났다. 아인혼은 파키스탄이 북한에 핵기술을 이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압박했다. 파키스탄 협상가들은 아인혼의 이런 주장에 얼굴을 붉히며 매우 화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아인혼은 미국 정부의 협상 방침상 미국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공개하며 압박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일부 파키스탄 당국자들은 미국이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허풍을 떠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미국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속여 파키스탄이 제 발로 공개하게끔 하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 CIA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대놓고 행동에 나설 수 없었다. 아인혼은 미국 정부가 샤리프 총리에게 직접 연락을 해 북한 원심분리기 기술을 돕지 말라고 압박했다고 했다. 샤리프는 정확하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해보겠다고 했다. 시간을 버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무샤라프의 등장
이 즈음 파키스탄 내부에서는 칸 박사를 견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파키스탄 핵개발에 가장 중요한 자산이지만 자만심에 너무 가득 차 통제 불능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고위 인사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칸의 할 일은 끝났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핵 프로그램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칸보다 이름이 덜 알려진 사람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핵실험 성공으로 국가가 들떠 있던 1998년 또 한 번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오사마 빈 라덴이 후원하는 알 카에다가 그해 8월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에 폭탄 테러를 했다. 200명 이상이 숨지고 수천 명이 다쳤다. 임기 후반을 맡고 있는 클린턴은 입지가 약해지고 있었다. 이른바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져 탄핵 절차를 밟는 대통령이 됐다. 그해 12월 샤리프 총리는 워싱턴을 방문했다. 클린턴은 파키스탄이 F-16 전투기 구매 비용으로 지급했으나 전투기를 전달받지 못해 보관한 금액 4억 7000만 달러를 되돌려주겠다고 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칸 박사가 이끄는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협력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또 한 번 아프가니스탄이 중대한 위협으로 떠오르자 파키스탄이 필요해졌다.
파키스탄에서는 또 한 번 고질적인 문제가 되풀이됐다. 샤리프 총리와 군부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1999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참모총장의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로 샤리프 총리는 실각했다. 무사랴프는 군부가 행정을 책임지는 임시 군사정부를 출범시켰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샤리프 총리는 2000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무샤라프는 2001년 6월 20일 정식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무샤라프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클린턴 대통령에게 칸 박사의 위험한 행동을 멈추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샤라프는 정보당국에 지시해 칸의 불법 활동이 있는지 조사했다. 이들은 여러 방면에서 조사를 벌였는데 그중 하나는 1998년 핵실험 이후 칸 박사가 북한에 타고간 C-130 수송기와 관련돼 있었다. 과연 핵 관련 기술을 몰래 비행기에 싣고 가져갔는지를 조사했다. 무샤라프는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칸이 사전에 조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는지 그가 불법적 활동을 했다는 명확한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다”고 했다. 일부 파키스탄 정부 인사들은 이런 수사 및 발표 내용은 모두 미국에 보여주는 용도였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2000년 11월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됐다. 그는 외교안보팀을 ‘드림팀’으로 꾸몄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副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딕 체니 부통령 등이었다. 이들은 군대와 정보 분야 경험을 두루 갖춘 베테랑들이었다.
“파키스탄에서 핵기술 수입한 북한, 리비아에 우라늄 넘겼다”
부시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01년 봄. 조지 테닛 CIA 국장은 정부 최고위급 관료들을 불러 비공개 브리핑을 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기술을 사들이고 있다는 내용이 논의됐다. 파키스탄과 이란 사이에도 협력 관계가 이어지고 있으며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이라크에 판매한 정황도 다뤄졌다. 파키스탄이 리비아에도 핵 관련 기술을 팔았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는 점도 주요 의제였다.
훗날 공개된 정보자료에 따르면 2000년 9월 기준 리비아는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분리기 P-2 두 개를 전달받았다. 또한 원심분리기를 직렬과 병렬로 연결해 작업하는 캐스캐이드를 만들기 위해 원심분리기 1만 개에 필요한 부품을 추가로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심분리기에 약 100개의 부품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총 100만 개의 부품을 주문한 것이다. 2001년 초 기준으로 리비아는 육불화우라늄 1.87톤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원심분리기에 주입해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필요한 물질이다. 리비아가 정확히 어느 경로를 통해 육불화우라늄을 구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북한이 이 물질을 제공했다는 설(說)도 있으나 정확한 경로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주요 언론은 2004년 미국과 유럽 정부 당국자들을 인용해 ‘북한이 리비아에 넘겼다는 증거가 포착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2001년 봄, 무샤라프는 A. Q. 칸을 거세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는 칸을 범죄행위로 엮을 경우 국민들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언론 플레이를 통해 칸의 영향력을 서서히 약화시키기로 했다. 칸과 관련된 언론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칸 연구소의 직원들이 공무용 차량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다는 폭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칸 박사가 칸 연구소의 회계 부정 사태의 책임을 지고 은퇴할 것이란 전망성 기사도 나왔다. 칸 박사도 반박에 나섰다. 그의 연구소는 인공위성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미사일에 그 어느 나라보다 큰 규모의 핵탄두를 부착하는 기술을 실험하고 있다고 했다. 국가 발전에 자신이 전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사라진 농축우라늄 보관 용기
무샤라프는 칸보다 한 발 먼저 행동에 나섰다. 그는 칸 박사가 근속 25주년을 끝으로 칸 연구소(KRL)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칸 박사에게는 ‘KRL 특별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장관급이지만 실제 권한은 아무것도 없는 직책이었다. 칸은 이런 직책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언론과 사람들은 여전히 칸을 ‘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무샤라프는 각종 연설을 통해 칸을 치켜세웠다. “칸, 당신은 국가적 영웅이며 미래 세대에 귀감을 줬다. 어느 누구도 당신의 공(功)을 빼앗아갈 수 없으며 역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칸을 정신적으로 힘들게 했다. 겉으로는 칸을 영웅으로 묘사하며 실제로는 그가 자의(自意)로 은퇴할 수밖에 없게끔 하고 있었다. 칸의 공식 퇴임일은 그의 63번째 생일인 2001년 4월 1일로 예정됐다. 칸의 후임자로 지목된 것은 자비드 미르자였다. 미르자는 칸과 함께 오랫동안 근무를 해왔고 핵무기 수출 프로젝트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무샤라프는 미르자 정도의 인물은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무샤라프는 대통령직에 오른 뒤 KRL에 대한 감사를 실시했다. 미국에 선의(善意)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감사팀은 KRL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농축우라늄을 보관하는 스테인리스 전용용기인 ‘캐니스터’를 집중 조사했다. 이들은 감사 과정에서 캐니스터가 일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캐니스터는 암시장에서 수천만 달러에 거래될 정도로 핵무기 개발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감사팀은 캐니스터 40개가 없어진 것을 파악했다. 당시 정보당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총 120개의 캐니스터가 있어야 했으나 80개밖에 찾지 못했다. 칸 박사만이 이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무샤라프는 칸 박사에게 관련 사건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칸은 ‘나는 이미 은퇴했다’고 지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파키스탄 정보국은 일부 캐니스터가 북한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부는 이란이나 리비아에 갔을 수도 있다고 봤다고 한다. 무샤라프는 이런 사실을 미국에 차마 알릴 수 없었다. 없어진 캐니스터의 고농축우라늄을 사용하면 ‘더티밤’ 1000개는 만들 수 있었다. 핵무기 개발 기술이 있다면 핵무기도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고농축우라늄이 파키스탄에서 사라진 것이다.
다행히 미국은 KRL 감사 결과에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국은 겉으로는 관심을 갖지 않는 척했으나 우려할 만한 정보를 계속 입수했다. 2001년 4월 칸의 퇴임 얼마 후 평양 외곽에서 파키스탄의 C-130 수송기가 포착됐다. 미국이 위성사진으로 분석한 결과 미사일 관련 제품들이 수송기에 실어졌다. 미국 정보당국은 파키스탄의 핵기술과 북한의 미사일 기술이 교환되는 현장인 것으로 봤다. 칸 박사는 떠났지만 핵확산은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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