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북한 김영철 주범 천안함 피격(被擊) 시나리오 최초 공개

서석천 2018. 2. 23. 09:12

북한 김영철 주범 천안함 피격(被擊) 시나리오 최초 공개

북한 잠수정, 사흘간 매복하다 수심 30m 지점에서 어뢰 발사

수심 30m 지점으로 잠항한 북한 잠수정은 천안함과 거의 같은 속도로 접근하면서 3km 떨어진 거리에서 어뢰 1발을 발사했다. 어뢰는 천안함을 향해 나아가 가스터빈실 좌현 3m 아래, 수심 약 6~9m 부근에서 근접신관의 감응으로 정확하게 폭발했다. 어뢰가 발사된 후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과 공격에 대한 구체적인 가설 첫 공개
⊙ 북한 연어급 잠수정, 2010년 3월 24일 서해 비파곶 기지 출항
⊙ 천안함, 백령도 좁은 해역에서 ‘8자형 패턴’ 경계 수개월째 반복한 것이 禍根
⊙ 폭발 몇 초 후 물기둥이 함 중앙 치는 모습 보며 명중 확인… 3월 30일 母기지 복귀
                                 
▲ 2014년 12월 4일 오후 경기 평택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열린 ‘천안함 전시시설 준공식’에서 황기철(왼쪽에서 넷째)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관계자, 천안함 희생 장병 유가족들이 전시된 천안함을 살펴보고 있다.
 천안함 피격(被擊) 5주기를 앞두고, 폭침을 일으킨 북한 잠수정의 움직임과 공격 방식에 대한 가설(假說)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내용은 폭침(爆沈) 당시(2010년 3월 26일) 수중 해양환경과 한미(韓美) 군(軍) 당국의 정보, 천안함의 항적자료, 북한의 잠수정 전술 등을 토대로 추정한 것으로 이명박(李明博) 정부 시절, 청와대 국방비서관실(室)이 내부적으로 공유했던 사안이다.
 
  이런 사실은 천안함 폭침 당시 청와 대 국방비서관실에 근무했던 행정관 이종헌(李鍾憲)씨가 1월 말 출간할 《실록 천안함》에 담겨 있다. 《월간조선》은 앞서 원고 일부를 입수했다.
 
  지금까지 북한 잠수정의 구체적인 이동경로나 공격방식에 대한 군 당국의 분석과 판단은 있었으나 그 경로 등에 대한 추정이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처음이다. 앞서 2011년 간행된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에는 피격 발생에서 구조·인양 등 피격 이후의 정부 대응이 중심이었다. 이번에 공개되는 공격 가설은 천안함 피격의 객관적 사실로 단정할 수 없으나 축적된 정보와 자료, 합리적 판단을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밝혀둔다. 천안함 진실규명 노력의 값진 산물이자 결정판이다.
 
  이 전 행정관은 책 출간에 앞서 “지금도 상당수 국민이 북한 공격 사실을 믿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천안함 공격을 북한 전쟁범죄와 도발 목록에 올리는 데 이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지난 5년은 천안함 희생의 탈상(脫喪) 과정이었다. 고귀한 희생을 새로운 남북 화해와 협력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이 일어나기 전부터, 우리 군은 북한 잠수정에 의한 어뢰 공격 가능성을 검토했다. 몇 차례의 전술토의도 진행했다. 당시 군 정보 파트는 북한이 잠수함을 활용해 함정 공격을 연습하고 있다는 첩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2010년 1월, 합참은 북의 잠수함 공격에 대비해 함정의 방향을 자주 바꾸는 등 상황별 대응조치를 지키고 숙달하도록 지시했다. 또 해군도 2월 22일부터 구축함과 초계함, 잠수함 등 각종 대잠(對潛) 전력이 참가한 가운데 북한 잠수함의 함정 공격 상황을 가정한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겨우내 얼었던 북한 서해안의 결빙(結氷)이 풀리던 그해 3월 23일 북한 남포와 비파곶, 해주 기지에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연어급 잠수정, 예비 모선(母船) 등이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하지만 이내 북한 상어급 잠수함(300t급) 2척은 3월 23일부터 28일까지, 연어급 잠수정(130t급)은 3월 24일부터 31일까지 미식별됐다. 하필 비파곶과 남포의 해군기지 등이 구름에 가려져 있어 한미 당국의 감시망은 이들의 기지 이탈과 사라진 ‘순간’을 포착할 수 없었다.
 
  동시에 예비 모선 여러 척도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피격 당일 3월 26일 해군 2함대엔 ‘또 다른 공작 예비 모선과 연어급 잠수정 1척이 기지를 이탈하여 미식별되고 있다’는 정보보고가 전파됐다.
 
  피격 이후 한미 당국은 모든 감시망을 총동원해 북한 잠수함 기지와 잠수함정을 정밀 추적했다. 이들 미식별 잠수정과 공작선은 3월 31일에야 포착됐다.
 
  이 전 행정관에 따르면, 북한 잠수함정의 미식별 사례는 매우 잦았다고 한다. 수일 또는 수십 일 동안 행적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2011년 6월에도 북한 잠수함 한 척의 행방불명이 예상 외로 길어져 우리 군 당국을 긴장시킨 일이 있었다.
 
  특정한 잠수함의 ‘실종 상태’가 길어지면 한미 군 당국의 긴장은 점점 높아져 간다. 다른 수상함이나 전투기, 탱크와는 달리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길이 없고 또 해안 침투 등 특이하고 다양한 도발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함정 수리 등을 위해 건물 내부로 들어가 있거나 훈련 중인 것으로 믿으며 애써 긴장을 달랜다.
 
 
  수개월째 같은 경계 패턴이 禍가 돼
 
인양한 천안함의 아랫부분을 촬영한 사진. 외부 충격으로 선체가 안쪽으로 눌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잠수함정은 기지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다. 한번 행적을 놓치면 우리 감시망에 다시 잡힐 때까지 어디서 뭘 하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최첨단 군사위성이나 한미연합 영상장비의 어떤 광학 렌즈도 수중(水中)을 탐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상(水上)이 아닌 수중을 찍는 렌즈는 없기 때문이다. 전파도 수중에서는 얼마 나가지 못해 사정은 거의 같다.
 
  특히 매복과 기습을 노리는 수중의 적을 막기란 매우 힘들다. 북한 잠수정은 초계함이나 대잠항공기가 올라갈 수 없는 NLL 이북의 특정 지점에서 잠항(潛航)을 시작해 공해로 나가고, 공해상에서 대기하다 침투하는 전술을 주로 쓴다. 이 전 행정관의 말이다.
 
  “천안함을 공격한 북한 잠수정도 같은 경로를 따랐습니다. 군은 북의 잠수정 예상 침투경로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대잠시설을 설치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숨어드는 적을 탐지하는 것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大靑海戰) 이후 서해 NLL의 백령도 남서방 경계작전은 이미 수개월째 같은 경계 패턴을 유지해 왔습니다. 따라서 경계수역과 대응체계는 이미 북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 전 행정관은 북한 연어급 잠수정이 3월 24일 비파곶 기지를 출항해 서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작 모선과 조우했을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천안함 공격조인 공작 모선과 잠수정이 함께 움직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우리 감시 자산에서 사라졌다. 따로 움직였을 것으로 본다. 따로 움직일 경우 우리의 정보 감시체계를 피할 가능성이 높고 포착되더라도 통상적인 훈련 등으로 위장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작 모선의 역할은 주로 잠수정에 연료나 음식물을 보급하거나 평양으로부터 내려온 작전명령을 전달한다. 당시 잠수정은 공작 모선으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고 스노클(일종의 숨대롱)만 수면에 노출한 채 공해상으로 남하하다 백령도 서남방으로 은밀히 침투, 3월 25일 오후 백령도 서북쪽 천안함 경비 수역 외곽에 도착해 매복에 들어갔다.
 
  이때 천안함은 기상악화 때문에 경계수역을 이탈해 대청도 서방에 닻을 내리고 피항 중이었다.
 
  잠수정이 어뢰를 발사하기 위해서는 6노트 이상의 속도로 기동해야 하고 발사침로 유지를 위해서는 5노트 이상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또 조류 속도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수면 근처보다는 최소 30m 이상 수심이 깊은 곳에서 어뢰를 발사해야 한다. 이 전 행정관의 말이다.
 
  “북한 신형 잠수함정의 탐지거리는 우리 초계함(PCC) 소나(음탐장비)에 비해 너무나 월등했습니다. 북한 잠수정에 장착된 어뢰의 사거리는 12km 이상으로, 천안함 소나의 탐지거리보다 몇 배 이상 길었어요. 잠수정은 천안함이 탐지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숨어서 멀리서 보고 어뢰를 쏠 수 있었어요.”
 
 
  북한 잠수정, 천안함 가까이에 접근해 ‘에이치아워’ 기다려
 
천안함 피격 4주기인 2014년 3월 27일 인천시 옹진군 46용사 위령탑에서 열린 ‘천안함 46용사 참배’에 참석한 군 장병들이 희생자들의 부조 앞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다음은 구체적인 천안함 폭침 가설이다.
 
  피항 중이던 천안함은 3월 26일 오전 8시30분 임무수역에 복귀했다.
 
  3월 26일 백령도 앞 파고는 3.5m로 매우 높았다. 북한 잠수정은 25일 오후 천안함 경비수역 외곽에서 매복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천안함은 합참의 ‘잠수함 대응지침’에 따라 1~3마일 정도마다 침로를 급격히 바꾸며 불규칙하게 기동했다.
 
  3월 16일 평택항을 떠나 이 좁은 해역에서 11일째 8자형의 유사한 패턴으로 돌며 경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거의 제자리에 붙박이로 있는 아주 쉬운 표적이었다.
 
  북한 잠수정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천안함은 오전 11시, 오후 1~2시30분, 오후 5시와 7시 등 여러 차례 수심 50m 이상 수역으로 진입했다가 다시 백령도 인근으로 들어갔다. 이날 비운(悲運)의 천안함은 오후 2시부터 포상휴가를 내걸고 함내 승조원들의 ‘도전 골든벨’ 행사를 열고 있었다.
 
  주간의 기습은 위험하다. 발각될 위험이 높고 은밀한 도주가 용이하지 않다. 잠수정은 끈질기게 에이치아워(H hour·공격 개시 시각)를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북한 잠수정은 남동쪽으로 흐르는 조류를 타고 모든 소음을 죽인 채 잠항하며 경비구역 안으로 파고들었다. 공격 대기 지점은 백령도 서방 5마일 지점이었다. 드디어 밤이 되었다. 이날 밤은 월광(月光) 81% 수준. 표적 탐지 및 식별도 비교적 쉬웠다.
 
  밤 8시부터 천안함은 먼바다로 나오지 않고 백령도 연안과 3.5km 정도 거리를 두고 152도 방향으로 동남진을 시작했다. 천안함은 밤 9시5분 백령도 쪽으로 45도 변침(變針)하면서 속력을 높였다.
 
  일반적으로 배가 항로를 바꾸는 순간 파도를 배 옆쪽으로 받게 되면 배가 많이 흔들리게 된다. 천안함은 파도의 영향을 최소화해 덜 흔들리게 하기 위해 속력을 9.4노트로 올렸다. 변침이 완료되자 속력은 5.2노트로 떨어졌다.
 
  백령도 방향으로 나아가던 천안함은 밤 9시10분쯤 327도 북서 방향으로 최후의 대(大)변침을 실시했다. 천안함은 백령도 ‘두무진’ 해안선과 나란히 6.7노트로 움직였다. 잠수정은 밤 9시17분쯤 마침내 공격이 용이한 수심 50m 지점으로 접어들었다. 이때 잠수정은 천안함의 8시 방향에 있었다. 천안함은 함의 좌현을 잠수정에 그대로 드러낸 채 북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좁은 해역, 8자형 패턴의 悲劇
 
미국의 민간 상업 위성 구글어스에 찍힌 북한 남포기지에 정박 중인 연어급 잠수정. 2011년 6월 촬영됐다.
  좁은 해역 내 8자형 패턴의 움직임은 잠수정이 천안함의 함 중앙을 공격할 수 있고 명중률이 극대화된 최적의 각도를 노출시켰다. 북한 연어급 잠수정은 28m 크기로, 좌우 발사관에 직경 54cm, 총 길이 7.35m, 무게 1.7t의 어뢰(CHT-02D) 2발을 장착하고 있었다.
 
  자체 소나로 천안함의 항적을 추적하던 북한 잠수정은 수심 40m 지점에서 공격 대기를 하다가 수심 10m로 부상해 잠망경을 꺼내 최종 목표를 식별했다.
 
  다른 변침 없이 10여 분째 북서 방향으로 움직이는 천안함 불빛이 확인됐다. 그리고 다시 수심 30m 지점으로 잠항한 후 천안함과 거의 같은 속도로 접근하면서 3km 떨어진 거리에서 어뢰 1발을 발사했다.
 
  수심 30m 지점에서 유속 2.89노트의 썰물을 가르며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비스듬히 상승했다. 어뢰는 천안함의 추진기와 엔진으로부터 방사되는 소음을 탐지하여 가스터빈실 방향으로 진입했다. 어뢰는 천안함을 향해 나아가 가스터빈실 좌현 3m 아래, 수심 약 6~9m 부근에서 근접신관의 감응으로 정확하게 폭발했다. 어뢰가 발사된 후 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폭발 몇 초 후 물기둥이 함 중앙을 치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명중임을 확인한 잠수정은 서해 쪽 공해상으로 도주했다. 피격 1시간20분 후 대북 경계와 도주로 차단을 위해 속초함이 현장에 도착했다. 속초함은 북쪽 NLL 방향을 수색하다가 레이더에 걸린 특이물체를 탐지하고 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이미 잠수정은 우리 군의 서쪽 작전경계선 AO(작전지역·Area of Operations) 바깥 공해상으로 도주한 후였다. 그리고 이 잠수정은 3월 30일 모(母) 기지로 복귀했으며 31일 식별됐다.
 
 
  탄로난 北의 거짓말
 
2014년 4월 구글어스가 북한 남포 상공에서 촬영한 연어급 잠수정. 북한은 여러 차례 “연어급 잠수정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천안함 폭침 이후 북한은 진상공개장에서 ‘우리는 알루미늄 합금이 아닌 강철합금 재료로 만든 주체식 어뢰를 쓴다’며 피격 현장에서 수거한 통칭 ‘1번 어뢰(CHT-02D 어뢰)’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번 어뢰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프로펠러의 성분은 알루미늄-규소합금(Al 86%, Si 14%)이었으나 고정타와 축은 철로 되어 있었다.
 
  북한이 수출용으로 전 세계에 뿌린 CHT-02D 어뢰 소개 자료를 살펴보면 ‘어뢰의 외피는 알루미늄, 마그네슘 고강도 합금’으로 명시되어 있다. 북한의 강철어뢰 주장이 곧바로 허위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북한은 ‘연어급 130톤짜리 잠수정은 없다’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금세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다른 군사용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을 제시할 필요도 없이, 상업용 민간위성인 구글어스 영상에 이 연어급 잠수정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북한은 총 70여 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으며 천안함을 공격한 연어급 잠수정은 10여 척을 가지고 있다. 북한 서해 해군기지 중 잠수함정을 운용하는 곳은 황해북도 초도와 비파곶, 그리고 황해남도의 옹진 사곶과 해주이다. 또한 대동강 하구 서해갑문 안쪽의 남포항에는 북한 서해함대사령부와 특수임무를 띠고 활동하는 잠수정 기지가 있다. 초도에는 9전대, 비파곶에는 11전대가 있다.
 
  사곶과 해주에는 주로 고속정과 어뢰정을 운용하고 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아 소형 잠수정이 드나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행정관의 말이다.
 
  “사건 발생을 전후해 서해에서 기동했던 주변국의 잠수함정은 모두 식별됐고 그 위치도 확인됐어요. 다만 북한의 잠수함정은 식별되지 않고 있었어요. 여기에 연어급 1척과 공작 모선 1척이 공격 전에 모 기지를 이탈했으며 공격 후 복귀했던 겁니다. 당시 시계불량 등의 이유로 추적하지 못해 행방을 놓쳤던 잠수함정 중에서 연어급 1척이 실제 공격에 참여한 것입니다.”⊙
출처 | 월간조선 201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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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주범 김영철, 2009년 "우리 설정 해상경계선 지키려 무자비한 군사조치” 협박

군부가 대남공작 주도권 장악, 대남공작이 전투화(戰鬪化)될 것


⊙ 작년 초 노동당 작전부, 35호실 등이 국방위 정찰총국 산하로 들어가
⊙ 군부가 대남공작 주도권 쥐었던 1967~1970년 대남 도발 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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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지난 3월 26일 해군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한 이후, 원인을 놓고 다양한 주장이 제기됐다. 정확한 원인은 천안함 인양 후 국내외 공동조사단의 정밀조사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북한 잠수정에 의한 어뢰공격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에 의한 도발이라면, 우리는 북한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느 부서에서, 왜 이런 도발을 자행했는지에 대한 배경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향후 우리 정부의 대응방향과 수위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도발배경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것은 ‘대남(對南)전략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을 정확히 이해해야 북한의 의도와 향후 행동방향을 예측해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천안함 도발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남전략의 관점에서 ‘2012년 강성대국론(强盛大國論)’과 2009년에 단행한 대남공작부서의 대규모 개편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북한은 2008년 1월 1일 신년공동사설에서 ‘김일성(金日成) 출생(1912년) 100주년이 되는 2012년까지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겠다’고 공포한 이래, 각종 행사, 언론보도 등을 통해 이를 독려해 오고 있다.
 
  북한에 의하면, ‘2012년 강성대국 실현’이란 사상강국·군사강국·경제강국의 달성으로 실현된다. 북한이 말하는 강성대국의 완성이란 궁극적으로 전조선혁명(사회주의혁명 실현, 즉 적화통일)으로 완수되는 것인데, 결국 2012년 적화통일의 문을 열겠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서 2010년은 강성대국 실현을 위한 교두보를 대내외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중요한 해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대남전략과 하위체계인 대남공작도 이의 연장선에서 매우 공세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북한 대남공작부서의 전면 개편과 의미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 실현(적화통일 완수)을 위해 2009년 초 대남공작 기구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의 내용은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정찰총국’을 신설하고 산하에 작전국(舊 노동당 작전부), 정찰국(舊 총참모부 정찰국), 해외정보국(舊 노동당35호실) 등을 두었다. 노동당 대외연락부도 225부로 명칭이 바뀐 후, 정찰총국 소속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 통일전선부는 축소했다. (표 참조)
 
  이와 같은 대남공작기구 개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대남공작의 주체가 ‘당(黨·조선노동당)’에서 ‘군(軍·국방위원회)’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이 지난 60여 년간 전개해 온 당 중심의 대남공작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 사후(死後) 김정일(金正日) 통치시대에 들어서 ‘군’을 최우선시하는 선군(先軍)노선을 강조하고, 2009년 4월 9일 북한 헌법 개정시 선군사상을 주체사상과 함께 북한의 지도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국방위원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권력기관으로 규정한 연장선에 있다.
 
  둘째, 기존의 당 중심의 대남공작 체제로는 적화통일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군 중심으로 대남공작 체제를 개편한 것이다. 김정일은 대남공작의 궁극적 목표가 ‘전조선혁명의 완수(적화통일 실현)’인데 당의 대남공작부서가 이를 달성하지 못한 책임을 묻고, 군을 통해서 이른바 ‘수령의 조국통일 유훈’(적화통일)을 관철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셋째, 향후 대남공작의 방향은 기존의 방식에 추가하여 대남테러, 제한적 무력도발 등 전투화(戰鬪化)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정권수립 이전부터 지금까지 대남공작에 진력해 왔다. 당이 모든 사업을 지도하는 체제의 특성상 대남공작을 담당해 온 것도 노동당이었다. 그런데 대남공작의 주도권이 잠시 군부로 넘어간 시기가 있었다. 그때가 1967~1970년이다.
 
  당시 북한군이 주도권을 장악했던 대남공작은 후에 군사모험주의, 좌경맹동주의(左傾盲動主義)라고 자체비판을 받을 정도로 초강경 일변도였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비타협적인 대남테러 도발을 자행하였던 이 시기 대남공작의 특징과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군부가 대남공작 주도권 쥘 경우 강경화
 
  첫째,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 부서들은 김일성의 환갑이 되는 해인 1972년까지 적화통일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대남공작을 전개했다. 이는 북한이 2008년부터 김일성 출생 100주년인 2012년까지 강성대국을 달성하겠다는 ‘적화통일 스케줄’과 대비된다.
 
  둘째, 그동안 민간출신이 당에서 담당했던 대남공작 부서를 군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김창봉 민족보위상(우리의 국방장관에 해당)이 대남공작의 지휘권을 가지고 노동당 대남총국을 대남사업총국으로 개편하였다. 당 대남총국장이자 연락부장이었던 리효순을 숙청하고, 현역군인인 허봉학(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대남사업총국장에 임명했다. 또 군 대남침투공작 부서인 특수정찰국을 특수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하고, 국장에 민족보위성 부상(副相·국방차관)인 김정태(북한 부수상과 인민군 전선사령관을 지낸 김책의 차남)를 취임시켰다. 당시 특수정찰총국은 124군 부대, 283부대, 837부대 등 무장소조(小組) 형태의 연합특수부대를 신설, 운용하며 1·21 청와대 기습사건 등 각종 대남도발을 일삼았다.
 
  이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 라인은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 - 김창봉 민족보위상 - 김정태 특수정찰총국장 및 허봉학 당 대남사업총국장으로, 명실상부하게 군부 중심으로 대남공작 부서가 재편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북한의 대남도발 사례를 보면, ▲청와대 기습사건(1968년 1월 21일 북한 특수정찰총국 소속 124군 부대 소속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시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사건) ▲1968년 11월 울진-삼척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사건(120명 침투) ▲미국 해군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1968년 1월) ▲동해안 공해 상공 미국 해군정찰기 EC121기 격추사건(1969년 4월) ▲KAL기 납북사건(1969년 12월) ▲해군경비함 56호 격침사건(1967년 1월, 해군사망 11명, 실종 27명, 부상 23명) ▲열차폭파사건(운정역 미군 화물열차, 초성역 열차, 문산 철도 폭파사건 등) ▲무장공비 침투사건(정읍, 임실, 진안, 제천, 단양, 괴산 침투) ▲한국군(12사단, 28사단, 7사단) 및 미군2사단 기습 ▲미군59항공대 헬기 피격(1969년 8월) ▲서해상 승용호, 동해상 어선 부성호 등 20여 척의 어선나포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대남공작 기구 개편 이후 군부 주도의 전투적인 대남공작이 다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방위 정찰총국 소행 가능성 높아
 
북한의 대남공작 총책인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왼쪽)과 정찰총국장 김영철(오른쪽).
  금번 천안함 침몰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북한의 정규 해군이 자행한 것이 아니라 국방위 직속의 대남공작 부서인 정찰총국이 자행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1800톤의 로미오급 잠수함과 300톤 상어급(SSC) 소형 잠수함은 백령도 해상의 수심(水深)을 감안할 때 작전이 용이치 않다. 따라서 북한이 사용한 잠수정은 80톤 유고급 잠수정(SSC)과 반(半)잠수정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반잠수정에 장착된 어뢰는 경(輕)어뢰로 파괴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 결국 중(重)어뢰를 장착할 수 있는 유고급 잠수정(유고제 잠수정을 개량)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고급 잠수정은 북한 해군이 아닌 국방위 정찰총국이 대남침투 및 공격용으로 여러 척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천안함 사건을 정찰총국 소행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난 1998년 6월 22일 동해안 양양에서 꽁치그물에 걸려 좌초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을 보면,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 강화플라스틱(FRP)으로 외부도장을 했고 소나(음향탐지기)를 피하기 위해 하이스쿠르프로펠러(HSP)와 특수 소음감소팬(PBCF)을 장착했으며, 어뢰관 2문과 기뢰부설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현재 북한의 대남공작 지휘라인을 보면 김정일(국방위원장)-오극렬 대장(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대남담당)-김영철 상장(上將·정찰총국장)으로 이어진다. 오극렬(79)은 공군사령관·총참모장 등을 역임한 후 1989년부터 대남공작원 양성과 대남침투를 담당하는 부서인 당 작전부장을 20년간 지냈다. 2009년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영철(64) 정찰총국장은 1968년 미(美)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당시 인민군 소좌(우리의 소령에 해당)로 판문점 군사정전위 연락장교를 맡았다. 그는 인민무력부 부국장, 남북고위급회담 북측대표, 남북군사분과위 북측위원장, 남북장성급 군사회담 북측대표를 역임한 대남통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12월 국방위 정책실장(당시 인민군 중장) 자격으로 개성공단을 방문, 상주(常駐)인원 제한 등을 강요한 12·1 조치 이행 상황을 점검한 바 있다. 작년 12월 13일에는 남북장성급회담 대표로 “우리가 설정한 해상경계선만 있다. 지금 이 시각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의 무자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이라고 협박한 바 있다.
 
 
  북한의 도발 저의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했다면, 그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단편적으로는 작년 11월 10일 대청해전의 보복성격이 강하다. 북한은 3월 8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담화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대남군사위협과 보복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혀 왔다. 1·2차 연평해전 패배를 복수하기 위한 3차 교전에서조차 패배한 북한군(해군)의 자존심을 대남공작 전문부서인 국방위 정찰총국이 만회해 준 것이다.
 
  둘째, 지난 좌파정부와는 달리 북한에 휘둘리지 않으며 남북관계에서 나름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위협이다. 비밀리에 대남무력도발을 자행해 우리 내부의 안보위협을 높여 남남(南南)갈등과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궁극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관리 기반을 무력화(無力化)하려는 것이다.
 
  셋째, 북한정권의 목표인 적화통일, 특히 2012년 강성대국 실현을 위한 혁명역량 강화의 일환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선체 인양 후 공동조사단이 북한이 자행했다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북한은 결코 이를 인정치 않을 것이다. 향후 북한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보복공격, 북한선박의 제주항로 통행 금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북한을 압박할 경우, 북한은 더 강하게 대남위협을 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협박에 우리가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사태해결 혹은 다른 명목으로 당국자회담을 제의하면서 상당한 정도의 대남유화책을 구사할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 남북관계가 어느 정도 진척되더라도 북한 김정일은 정권목표인 적화통일 실현을 위한 대남공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적화혁명에 앞서 대남공작 자체가 김정일 체제 생존의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글 | 류동열 치안정책연구소 안보정책실 선임연구관. 출처 | 월간조선 201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