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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대에 오른 리더십] 대한민국과 문재인의 충돌 코스

서석천 2017. 11. 15. 07:30



[시험대에 오른 리더십]
대한민국과 문재인의 충돌 코스

⊙ 문재인 대통령, 소설가 한강의 6·25 인식은 이승만·트루먼의 6·25 인식과 정반대
⊙ 문재인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나온 ‘한국전은 내전(內戰)이었다’는 말은 결코 실언(失言)이 아니다
⊙ 한국전, 건국, 통일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관점은 헌법 및 사실과 맞지 않아….
     이런 가치관을 정책화한다면 대한민국과 충돌 코스를 달리게 될 것.
⊙ ‘한국전은 김일성의 남침’이란 말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을 한국인은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그를 견제하고 바로잡는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한다.

       

▲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 미국 뉴욕 UN총회에서 연설하면서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표현했다. / photo by 사진=뉴시스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전쟁은 내전(內戰)이었다”는 말을 들었다. 친북(親北) 세력이나 수정주의 학자들 입을 통하여서도 요사이는 듣기 힘든 용어이다. 냉전(冷戰)이 끝난 이후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폐기된 말이다. 그런데 지난 9월 그 말을 한 사람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고 장소는 유엔총회장이었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停戰)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동북아의 마지막 냉전 질서로 남아 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압도적 기습공격을 받은 한국은 항복을 거부하였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지휘하는 국군과 국민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돌멩이와 막대기까지 들고나와’ 총력전으로 저항하는 사이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이 원군(援軍)으로 도착, 전세(戰勢)를 역전시켰다. 패망 직전에 몰렸던 김일성은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살아났다. 유엔은 북한군의 남침과 중공군의 개입을 ‘침략행위’로 규정하였다.
 
  그 유엔총회장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국전을 내전과 국제전으로 규정한 것이다. 내전과 국제전을 연결시키는 논리는 한국전을 한반도 내의 좌우 대결이 확대된 것으로 해석, 국내 문제에 개입, 국제전으로 만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식이다. 물론 이는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탄된 김일성의 남침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개입에 면죄부(免罪符)를 주려는 억지이다. 냉전이 서방 세계의 승리로 끝나고 한국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 문서가 공개되면서 내전설은 사라졌는데 한국 대통령에 의하여 유엔총회장에서 부활한 것이다.
 
 
  공산주의 팽창 저지한 한국전쟁
 
  미국 조지아 대학의 윌리엄 스톡 교수가 쓴 《한국전쟁-국제사》는 이 전쟁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정리한 명작(名作)이다. 그는 ‘제3차 세계대전을 막은 한국전’이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국제정치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공격에 서방 진영의 반격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큰 규모의 비극이 일어났을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과감하게 대응, 자유세계를 깨어나게 만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펴도록 만든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과 미군 등 자유진영이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는 최초의 군사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면서 미국 편에 서고 독일도 재무장하여 NATO에 편입되어 유럽을 방어하는 데 중심이 된다. 미국은 일시 포기하였던 대만을 지켜주게 되고, 국방비를 세 배로 증액, 본격적인 대소(對蘇) 군비경쟁에 나서서 그 40년 뒤 소련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다.
 
  스탈린은 독자 노선을 선언한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침공 작전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한국전에 미국이 파병하는 것을 보고는 취소하였다. 대만·유고는 한국인의 희생 덕분에 살아난 셈이다.
 
  냉전의 승리는 한국전에서 예약된 것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이들이 클린턴·오바마 등 미국 지도부이다. 그런데 가장 큰 공치사를 받아야 할 한국 대통령이 세계를 구한 한국인의 위대한 성전(聖戰)을 내전으로 폄하한 것이다. 그것도 유엔군을 보내준 유엔총회장에서.
 
 
  공산 측, 전쟁을 내전으로 위장하려 해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 스탈린에게 남침전쟁을 승인해 달라고 졸랐다.
  스톡 교수는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이 한국전의 성격을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한 계급투쟁적 내전’으로 설정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잘 먹혀든다는 원리에 입각하여 북한군이 기습하면 남한에서 좌익들이 봉기, 이승만 정부는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한편,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스탈린은 북한군에 탱크·야포·전투기 등을 지원하고 작전계획까지 짜주었다. 마오쩌둥은 중공군에 소속되었던 수만 명의 조선인을 북한으로 돌려보내 3개 사단을 만들게 하였다. 소련군 대위 출신이고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에게 불려가 면접시험을 본 끝에 지도자로 간택된 김일성은 철저하게 소련의 꼭두각시 역할에 충실하였다.
 
  최근 한강이란 소설가는 《뉴욕타임스》에 쓴 글에서 한국전을 ‘대리전(代理戰)’이라고 했는데, 이는 반만 맞는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대리전을 수행하였지만 이승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전쟁 발발 1년 전 5만의 미군을 철수시켰을 뿐 아니라 6·25 남침 직전까지도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거부, 전투기도 탱크도 없는 군대로 만들어 놓았다.
 
  스탈린과 김일성과 모택동은 한국전을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스탈린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를 찾아온 김일성이 남침 허가를 받으려 하자 이승만이 북침(北侵)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남파(南派) 게릴라전의 강화를 권하였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그해 약 1300명의 무장 게릴라들을 남파시켜 남한에서 활동 중이던 게릴라들과 합동작전을 펴게 하였지만 한국군의 진압 작전에 눌려 버렸다.
 
  스탈린은 소련군 장교들을 시켜 북한군의 남침 작전계획을 짜주고는 장교들을 전선에서 철수시켰다. 김일성은 북침에 대한 반격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자원자들이 북한을 도우러 간 것으로 위장하였다.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이런 술책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트루먼과 이승만, 넘어간 사람은 문재인이란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67년이 흘러. 북핵(北核) 위기에 당면한 문재인 대통령이 반드시 읽어야 할 자료가 있다면 두 대통령의 한국전 지도 방침일 것이다.
 
 
  미국은 속지 않았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국 현지 시각으로 1950년 6월 24일 밤에 고향인 미주리주(州) 인디펜던스의 자택에서 딘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남침 보고를 받았다. 그는 “그 개자식들을 막아야 한다”면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애치슨은 필요한 조치를 취해 놓았으니 위험한 야간 비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권하였다. 다음날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트루먼은 생각에 잠겼다.
 
  〈자유세계의 저항을 받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으로 밀고 들어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작은 나라들은 이웃한 더 강한 공산국가들의 위협과 공격에 맞설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에 저항하지 않고 이 침략행위를 내버려 둔다면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비슷한 경우가 제2차 대전으로 연결되었듯이.〉
 
  워싱턴 내셔널공항에서 내려 영빈관으로 가는 차중에서 트루먼은 “하느님께 맹세코 그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어”라고 중얼거렸다.
 
  트루먼은 김일성의 남침을, 민족 내부의 분쟁, 즉 내전이 아니라 스탈린이 이끄는 국제공산주의 진영의 침략전으로 본 것이다. 트루먼이 주재한 6월 26일 밤 대책회의에서 국무부, 국방부, 합참의 최고위 간부들은 소련이 사주(使嗾)한 전쟁이므로 여기서 선을 그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어느 누구도 남북 간의 내전이므로 개입을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은 남침을 내전으로 보이게 하려고 했지만 미국은 속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2017년의 세계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그것도 침략전의 피해국 대통령이, 그것도 유엔에서 국제적 침략 전쟁을 내전이었다고 왜곡한 것이다.
 
 
  이승만, 김일성 아니라 스탈린 상대
 
  그렇다면 이승만은 남침을 어떻게 보았나?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이라는 논문의 저자(著者) 남정옥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보고를 받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駐韓) 미국대사 무초를 불러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남정옥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통령이 한 말은 한국의 대응 방향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승만은 한국군에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한데, 그중에서 소총이 더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또 총력전 의지를 피력했다. 즉 모든 남녀와 어린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전쟁기간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들이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은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
 
  이승만은 이어서 그동안 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됐던 ‘제2의 사라예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이용,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은 지금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으로 여겼다. 전쟁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벌써 한반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승만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김일성이 38선을 먼저 파기했으니 이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전쟁 당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침략당한 나라의 결사항전 의지만 있었지 김일성이 단독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침공하였다는 내전적 시각을 찾을 수 없다. 내전설이나 대리전설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동격(同格)에 놓음으로써 도덕적 판단을 고의로 기피하거나 침략자를 비호하기 위하여 구사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남침을 당한 이승만이 보지 못하였던 그 무엇을 보고 67년이 지나서 내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자존심이 강한 이승만은 연설에서 김일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스탈린을 주로 공격하였다. 김일성이 스탈린의 앞잡이라는 인식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김일성 대 한민족’ 구도
 
1950년 7월 2일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부대. 스미스부대는 패했지만, 미국은 결국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했다.
  1950년 7월 19일 이승만은 임시수도 대구에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이 대통령은 한국전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한다.
 
  그는, 〈위대한 귀국(貴國)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라고 위로했다.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이라면서 〈소련의 후원을 받은 북한 정권이 6월 25일 새벽, 한국군을 일제히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38선을 자유 대한과 노예 북한 사이의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렸습니다〉고 썼다. 이어서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가슴 속에 심어서 키워온 제국주의적 침략의 악성(惡性) 암세포들을 이번 기회에 영원히 도려내야 합니다〉면서 〈이 전쟁은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반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그들이 어디에 살든) 사이의 대결입니다〉고 못 박았다.
 
  두 전쟁 지도자, 트루먼과 이승만은 이 한국전을, 공산제국주의자들의 자유세계에 대한 도전이고 이에 대한 정의로운 응징이라고 정의(定義)하였다. 이승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김일성 집단의 한민족에 대한 반란으로 단정하였다. ‘폭압세력 대(對) 자유세력’ ‘소수의 반역세력 대 한민족 전체’의 구도로 설정한 것이다.
 
  한미동맹이 없었던 시기에 이승만 정권이 소련-북한-중공이 합세한 압도적 기습을 받고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한국인의 결사(決死)항전 의지 덕분이다. 국군은 후퇴는 할망정 소부대 단위조차 항복이 없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돌멩이와 막대기로도 싸우겠다’면서 총력전의 의지를 확실히 한 뒤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다. 지도자, 국군, 국민의 단결이 가능하였던 데는 이승만의 카리스마와 자유를 맛본 한국인의 반공(反共)정신, 공산주의를 체험한 월남자들, 특히 군 장교단의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 미국이 참전할 것이란 기대, 숙군(肅軍)으로 군내의 남로당 세력이 제거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미군이 오산에서 북한군과 최초로 교전하는 7월 5일까지의 10일간 한국인은 소련, 중국, 북한 등 유라시아 대륙의 공산제국과 홀로 맞서 싸웠다.
 
 
  “마셜 플랜 이상의 성공”
 
《가장 추운 겨울》의 저자 핼버스탐 기자.
  젊었을 때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서 월남전을 비판하는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던 데이비드 핼버스탐 기자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죽기 전 《가장 추운 겨울》이란 책의 원고를 끝냈다. 사후(死後) 출판된 이 책에서 그는 한국전에서 자유세계가 공산 침략에 맞선 것은 마셜 플랜으로 서유럽을 구한 것 이상의 성공이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한국전으로 성장한 한국군 장교단이 정권을 잡은 뒤 경제발전까지 성공시킨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자유세계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을 선택한 것은 내전(civil war)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미국과 서구의 다른 나라에 있어서 이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침략전쟁이었다. 이는 서구가 히틀러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2차 대전으로 이어진 점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중국·소련·북한에는 이게 놀라운 관점이었다. 그들은 남침이 한국인들 사이의 결판이 나지 않은 내전의 연장선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북한군의 남침 직후 국군이 무너지고, 이승만이 해외 망명이라도 했다면 김일성은 내전 종식과 민족해방을 선언하고 응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초전에서 버티어냄으로써 내전으로 위장한 침략전쟁의 정체를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유엔군의 파병이 가능해졌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후방에서 좌익들이 들고일어나 정권을 탈취하였다면 유엔군이 개입할 명분은 사라지고 김일성은 신라의 문무왕, 고려의 왕건을 잇는 통일의 지도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피력한, ‘내전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간 것이 한국전이라는 시각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개혁하려던 좌편향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들어 있다.
 
  계급사관으로 써진 이들 교과서는 6·25 직전 38도선에서 잦은 충돌이 일어났다고 강조, 전쟁 책임을 희석시킨 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고 썼다(천재교육). 한 교과서는 중공군의 불법 개입을 ‘중국군 참전’이라 적었고,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였다”고 썼다. ‘감행’은 용감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생명줄인 한미동맹을 만든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하여는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휴전 회담 자체가 결렬 위기를 맞기도 했다”고 비방하였다. 미래엔 교과서는 “남북의 두 지도자 이승만과 김일성은 적개심과 증오심을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 독재체제를 강화하였다”고 썼다.
 
  좌편향 교과서는 북한 정권에 불리한 내용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한국을 끌고 들어가 기계적 양비론(兩非論)으로 물타기를 한다. 학생들에게 생길 정의감과 선악(善惡) 및 피아(彼我) 분별력과 애국심을 애초에 말살하기 위한 교과서로 보인다. 내전설을 믿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교과서를 바로잡는 데 반대했던 것도 자연스럽다.
 
 
  ‘내전론’은 대한민국 부정과 연결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국전을 설명하면서 피해만 강조하였을 뿐 전쟁범죄자에 대한 비판은 물론 거명(擧名)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란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그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이 흥남에서 미군 철수선을 탄 이유가 ‘잠시 피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긴다.
 
  이산가족을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라고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김일성의 남침과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이산가족이 생긴 것이니 간단하게 ‘남침 전쟁의 피해자’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중국과 북한을 책임자로 특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복잡한 설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전을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하였다. 이 또한 전쟁책임자들을 비호하는 간접 화법이다. 전쟁은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지 냉전 구조가 전쟁을 일으킬 순 없다. 그것은 조건의 하나이지 책임자가 아니다. 교통사고가 나는 것은 운전자의 책임이지 ‘자동차 문화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북한의 전쟁 책임을 비호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관과 가치관이 대한민국의 헌법 및 정체성(正體性)과 맞지 않다는 의심을 정당화한다. 김일성의 남침 전쟁에 대하여 내전적 시각을 가지면 선악 및 피아 분별력이 마비되어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 미국에 대한 감사, 조국에 대한 사랑이 무디어질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에서 이런 감정이 느껴진다. 이념은 감정이라고도 한다.
 
 
  문재인 역사인식의 논리적 귀결
 
  대한민국의 존립을 보장하는 두 가지 이념적 기초는,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의 정통국가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민족사적 정통성과 반공자유민주적 정체성이다. 이 정통성과 정체성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건국과 호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피, 땀, 눈물로 형성된 불가침(不可侵)의 성역(聖域)이다. 물론 헌법 개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국체(國體)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전을 내전으로 보는 것과 1948년 건국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을 지지하는 행위는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지만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진 정통성과 정당성의 근거는 정부 수립 과정이 총선-국회구성-헌법제정-정부수립의 과정을 거쳐 민주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수립되었으므로 유엔총회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공인(公認)한 것이다. 북한 정권은 찬반 투표가 불가능한 공산당식의 원천적 부정선거를 통하여 세워졌기에 공인을 받지 못하였다.
 
  민주투사라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러한 민주적 정통성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을 볼 때 그가 말하는 ‘민주’가 과연 헌법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인지, 통진당식의 ‘진보적 민주주의’인지 헷갈린다.
 
  문 대통령은, 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점이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한 국민 참여 없이 세워진 임시정부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선거를 하지 않은 그런 정부는 형식적 선거라도 치른, 그리고 주권, 영토, 국민의 형식적 조건을 갖춘 북한 정권보다도 낮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존립 근거를 흔든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인가, 아니면 임시 국가의 임시 대통령인가?
 
 
  유일 합법성·정통성 포기하려나?
 
  1950년의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 정권의 침략 행위는 문재인식 역사관으로는 어차피 정리되어야 할 임시 국가에 대한 또 다른 임시 정권의 공격이므로 굳이 선악 구분을 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남침보다는 ‘내전’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이는 남북 대결에서 이념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민족사적 정통성의 대결에서 북한에 굽히고 들어가는 자세이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챔피언 국가는 누구인가를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원수(元首)가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성과 유일 정통성을 포기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 정권을 민족사의 정통국가로 올려주고, 반공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국가연합 혹은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방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국가연합은 대한민국 헌법이 국가임을 부정하는 북한 정권을 국가로 인정하는 헌법 위반이고 낮은 단계 연방제는 높은 단계 연방제, 즉 북한 노동당의 규약이 선언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로 가는 첫 단계이다. 이는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 문제를 논의한다’는 6·15선언 제2항(이것도 헌법 위반)의 범위도 넘는 위헌적 발상이다.
 
  한국전, 건국, 통일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관점은 헌법 및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런 가치관을 양심의 자유 영역에 묶어두지 않고 정책화한다면 대한민국과 충돌 코스를 달리게 된다. 그러한 경향이 이미 보인다. 이 정부의 정책 노선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헌법체계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들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 1948년 건국 부정
 
  2. 국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한 국군의 날 변경 움직임
 
  3. ‘한국전쟁은 내전이고 국제전이다’는 유엔 연설
 
  4. 국가반역자 윤이상 흠모(독일 묘소에 부인이 참례 등)
 
  5.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만이 민주정부라는 시각
 
  6. 반(反)체제적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강제
 
  7. 결론이 나 있는 광주사태 발포명령자 및 헬기 사격 의혹 재수사 지시
 
  8.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자고 하고, 한미동맹 해체를 거론한 특보 방치
 
  9. 전술핵 재배치, 핵무장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
 
  10.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를 위험하다고 단정, 백지화를 선언하고, 짓고 있는 신고리 5, 6호기까지 공사중단 시키는 과정에서 관련 법규 위반. 원전(原電)이 폐기되면 자위적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사라진다.
 
  11. 좌파 인사로 하여금 국정원 개혁을 주도하게 만들어 안보기구로서 사실상 폐기 처분
 
  12. 박근혜 정부의 좌편향 국사 교과서 개혁을 중단시키고 개혁을 ‘친일 행위’에 비유하여 적폐라고 규정
 
  13.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전대협, 주사파, 친북 성향’이라 공격해도 논리적 해명을 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사실이라면?
 
  14.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연설에서 자신이 선거로 당선된 점을 무시하고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것처럼 설명
 
  15. 북한 정권과 종북(從北) 세력에 엄정한 태도를 취해온 김관진 전 안보실장을 댓글 사건 연루 혐의로 출국금지
 
  16. 북한의 핵미사일 방어망 건설과 핵방어 훈련에는 무관심하면서, 미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허가 사항으로 지정
 
  17. 북한을 흡수통일하거나 인위적 통일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공언(公言)
 
 
  대한민국과 문재인의 충돌
 
  이렇게 적어 나가 보면 이념적 일관성이 느껴진다.
 
  첫째, 대한민국엔 불리하고, 북한 정권엔 유리하다.
 
  둘째, 대한민국 수호 세력에 대한 적대감과 대한민국 반대 세력에 대한 동정심 혹은 우호감
 
  셋째, 국법, 국군, 국정원, 국가, 애국 세력에 대한 적대감 혹은 경멸
 
  넷째, 중국엔 위축, 미국에는 비판적
 
  이렇게 정리하면 자연스럽게 “아, 계급사관(민중사관)으로 써진 좌편향 교과서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시각(視覺)과 맥락을 같이하는구나”라는 느낌이 온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문재인 정부는 충돌 코스에 진입하였다고 봐야 한다. 1950년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는 열흘간 소련, 중국, 북한의 3대 공산집단을 상대로 홀로 맞서 세계를 구한 한국의 위업을 무효로 돌리는 ‘내전’이란 말은 실언(失言)이 아니라 그의 사고체계와 가치관 및 역사관을 알게 하는 키워드, 즉 진담(眞談)임을 알 수 있다.
 
  유엔총회에서 ‘한국전은 김일성의 남침’이란 말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을 한국인은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그를 견제하고 바로잡는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한다.⊙ 
                                             

    출처 | 월간조선 2017년 11월호. 글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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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대에 오른 리더십]
합법적으로 집권해 ‘혁명’을 추구한 정권들, 그 끝은?


⊙ 독일 - 나치 위험에 무지했던 보수세력이 히틀러 집권의 길 열어줘, 1년 만에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
⊙ 비시 프랑스 - 패전의 와중에 제3공화국의 ‘적폐청산’ 명분으로 비시정권 수립, 민주공화정 전통 훼손
⊙ 칠레 - 아옌데, 미국 중심 질서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혁명’ 추진하다가 쿠데타로 몰락
⊙ 베네수엘라 - 차베스, ‘적폐청산’ 내걸고 포퓰리즘·사회주의·민족주의 혼합된 ‘볼리바르혁명’ 추진 …, 19년 만에 국가파산

       


▲ 합법적으로 집권해 체제변혁을 추진한 지도자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차베스, 아옌데, 페탱, 히틀러.
이른바 ‘최순실사태’가 시작된 지 1년이 됐다. ‘국정농단’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결국 대통령의 탄핵과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새로 들어선 정권은 ‘촛불혁명정권’임을 자처한다. ‘적폐청산’은 국정의 제1과제가 됐다. 사법부에는 ‘개혁적’인 수장(首長)이 들어섰고, 정부·여당의 응원을 받는 방송사 노조는 기존 경영진 보고 물러나라고 파업을 벌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개헌(改憲)논의가 진행 중이다. ‘제7공화국’을 입에 올리는 사람도 있다. 핵무장한 북한의 위협, 안하무인격인 중국의 겁박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일본과의 관계는 자꾸만 소원해지고 있다.
 
  ‘촛불혁명’의 끝은 어디일까? 혹시 ‘어, 어’ 하다가, 우리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을까? 합법적으로, 혹은 합법의 외피(外皮)를 쓰고 정권을 잡은 세력이 체제변혁을 꾀했던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나치 독일 - 보수정치인들의 착각이 전체주의를 부르다
 
  ■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독일에는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섰다. 오랫동안 군국주의적 군주정에 익숙해 있던 독일인들에게 공화국은 생소한 정체(政體)였다. 거기에 바이마르공화국은 독일인들의 자존심을 훼손한 가혹한 베르사유강화조약을 받아들였다는 원죄(原罪)를 안고 있었다. 좌우갈등, 1920년대 초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1920년대 후반의 세계대공황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국민들은 절망에 빠졌고, 민주공화국에 대한 회의(懷疑)는 깊어졌다. 이 틈을 타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대두했다. 몇 차례의 선거를 거치며 나치당은 의회 내 제1당으로 올라섰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후 1년 사이에 히틀러는 독일을 전체주의 1당 독재국가로 둔갑시켰다.
 
 
  나치의 대두
 
  1919년 1월 안톤 드렉슬러라는 뮌헨의 자물쇠 상인이 독일노동자당이라는 작은 정치서클을 만들었다. 그해 9월 바이에른지구 육군사령부 정치부 공보과에 근무하고 있던 하사관 하나가 독일노동자당을 사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하사관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며칠 후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의 초청을 받아들여 당에 입당했다. 당은 1920년 4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국가사회주의(나치즘)’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군국주의, 반(反)유대주의, 사회주의가 어지럽게 혼합된 ‘잡탕사상’이었다.
 
  처음에는 당의 선전을 담당했던 히틀러는 광적인 선전선동 능력과 조직 능력을 인정받아 1921년 7월 당권을 장악했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는 나치당의 준(準)군사집단인 돌격대(SA)를 이끌고 뮌헨의 맥주홀에 난입, 그 자리에 있던 바이에른 주정부의 요인들에게 총기를 들이대고 ‘우익혁명정권’의 수립을 강요했다.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히틀러는 1년간 복역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히틀러는 당 조직을 재건하고, 폭력혁명 대신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20년대 후반 대공황 이후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은 좌우(左右) 할 것 없이 기성 정치세력을 공격하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것 같은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는 히틀러에게 매료됐다. 1930년 총선에서는 640만여 표를 얻어 전체 577석 가운데 107석을 차지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현직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도전했다. 그는 1차 투표에서 30.1%, 2차 투표에서 36.1%를 득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의 지지를 받아 1370만 표를 얻었다. 230석을 차지한 나치는 국회 제1당으로 올라섰다.
 
 
  나치, 침몰 위기에 처하다
 
히틀러에 앞서 바이마르공화국 총리를 지낸 프란츠 폰 파펜(왼쪽)과 쿠르트 폰 슐라이허(오른쪽).
  당시 독일 정치는 알게 모르게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11년 동안 9명의 총리 아래서 내각이 17번이나 바뀌었다. 일종의 2원집정부제이던 바이마르헌법 아래서 내정의 책임은 의회 다수당에서 배출한 총리(이를 ‘의회 총리’라고 한다)가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930년부터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자신에게 부여된 총리 임명권과 비상대권을 이용해, 의회 다수당의 지지에 의지하지 않고 총리를 임명하기 시작했다(이를 ‘대통령 총리’라고 한다). 단독으로 내각을 구성할 수 없었던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기독교민주당의 전신) 등은 이런 상황을 묵인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1932년에 이르러 힌덴부르크는 측근인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 등을 잇달아 총리로 임명했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승리한 히틀러는 힌덴부르크가 자신을 ‘대통령 총리’로 임명해 주기를 바랐다. 히틀러는 부총리로 입각하라거나, 나치당에 장관 자리를 몇개 나누어 줄 테니 정부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이런 히틀러에게 실망한 유권자들이 돌아섰다. 1932년 11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넉 달 전에 비해 200만 표를 잃었다. 의석도 196석으로 줄어들었다.
 
  1933년 정초 《프랑크푸르트차이퉁》은 신년 사설에서 ‘마침내 민주국가에 대한 나치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썼다.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은 ‘히틀러의 부상과 침몰’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나치당은 크게 흔들렸다. 후원금과 당비 납부가 급감해 미국 금융회사에 돈을 빌려달라고 해야 할 정도로 재정난이 심해졌다. 히틀러의 리더십에 반발한 그레고르 슈트라서 등 고참 당원이나 일부 지역 돌격대 대장들이 이탈했다.
 
 
  모리배들이 나치를 살리다
 
  하지만 그달이 가기 전에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로 임명됐다.
 
  여기에는 힌덴부르크의 측근정치와 보수우익세력의 오판(誤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힌덴부르크는 참모인 슐라이허 장군의 조언에 따라 1932년 7월 무명의 국회의원인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임명했다. 파펜은 힌덴부르크에게 아부해서 순식간에 그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당초 파펜을 자기의 허수아비로 생각했던 슐라이허는 공작을 꾸며 파펜을 실각시키고 그해 12월 총리가 됐다. 친구였던 파펜과 슐라이허는 원수가 됐다. 여전히 힌덴부르크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파펜은 슐라이허를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슐라이허를 미워하던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기회주의적 관료인 대통령 비서실장 오토 마이스너도 여기에 가담했다.
 
  파펜은 히틀러를 명목상의 총리로 하고 자신은 실세(實勢) 부총리가 되는 보수우익 연립정권을 제안했다. 파펜의 제안에 히틀러는 11명의 각료 자리 가운데 3자리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나치 중에서는 빌헬름 프리크가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이 무임소장관 겸 프로이센주 내무장관으로 입각했다. 보수정당인 국민당 당수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경제장관 겸 농무장관, 프로이센주 경제장관 겸 농무장관이 됐다. 파펜과 후겐베르크는 자기들이 얼마든지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 정권이 출현하는 데 보수정치인인 김종필씨가, 노무현 정권이 출현하는 데 정몽준씨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을 정비하는 데 김종인씨가 힘을 빌려주었던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전통적으로 국회 내에서 다수세력이었던 사회민주당과 가톨릭중앙당은 히틀러의 집권을 방조했다. 슐라이허 내각 마지막 1주일 동안 그를 지지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두 정당은 의회 내 다수 의석을 확보한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 것이, 군사독재 정권이나 대통령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임명한 ‘대통령 총리’ 정부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파펜이나 후겐베르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히틀러가 그동안 국내외 문제에 대해 온갖 거친 언사를 내뱉었지만, 정권을 잡으면 책임감을 갖게 되고 제도의 틀 안에서 순치(馴致)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민들은 오랜 혼란이 그칠 수도 있다는 은근한 기대 속에서 히틀러 정권을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국회방화 사건
 
1933년 2월 27일 일어난 국회의사당 화재 사건을 계기로 나치는 공산당을 탄압하고 독재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기대들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사이에 나치는 독일을 완전히 다른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히틀러 집권 초기, 히틀러를 지지하는 의회 세력은 나치당과 후겐베르크의 국민당을 합쳐 247석에 불과했다. 과반수에서 36석이 모자랐다. 히틀러는 3월 5일 새로운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하기로 했다. 파펜과 후겐베르크에게는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내각 개편을 하지 않겠다고, 즉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경찰은 판 데르 루베라는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를 범인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은 나치 돌격대가 정신이 약간 모자라는 루베를 이용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다음 날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비상명령’을 받아 냈다.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공산주의자의 폭력행위에 대한 방위조치’라는 설명이 붙은 이 비상명령에 따라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통신의 자유가 제한되고, 영장 없이 체포·수색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4000여 명의 공산당원, 사회민주당원, 자유주의자들이 체포됐다. 나치의 준군사조직으로 거리의 불량배였던 돌격대(SA)는 보조경찰이 되어 날뛰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볼셰비키혁명을 막기 위해서는 나치에 투표해야 한다고 여기게 됐다.
 
 
  민주주의 해체
 
  선거 결과 나치는 1722만여 표를 획득, 유권자의 44%의 지지를 얻었다. 나치는 286석을 차지, 후겐베르크의 국민당 52석과 합쳐 원내 과반수를 간신히 넘어섰다.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 공산당은 의석의 증감이 있기는 했지만, 원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차지했다.
 
  히틀러가 원하는 것은 원내 과반수가 아니라 ‘독재권력’이었다. 그는 내각에 4년간 국회의 입법권을 위임하는 ‘수권법(授權法)’을 요구했다. 표결을 하기 전에 공산당 국회의원 81명이 대통령 비상명령에 따라 국회에서 축출되고, 10여 명의 사회민주당 의원이 경찰에 억류됐다. 히틀러는 “정부는, 절대로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만 권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결국 수권법은 찬성 441표, 반대 84표로 가결됐다. 이 법은 이후 히틀러 독재권력의 법적 근거가 됐다.
 
  독일의 유서 깊은 연방제도와 지방자치제도도 무너졌다. 나치는 3월 9일 바이에른 주정부를 접수한 것을 시작으로 주정부를 차례로 파괴했다. 집권 1주년이 되는 1934년 1월 30일에는 ‘독일재건법’을 공포, 지방자치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정당들도 차례로 해산됐다. 1933년 7월에는 사회민주당이 내무장관의 명령으로 해산됐다. 같은 달 보수계 정당인 가톨릭중앙당(기독교민주당의 전신), 바이에른의 가톨릭인민당(기독교민주당의 자매정당인 기독교사회당의 전신) 등이 자진 해산했다.
 
  히틀러에게 협조했던 후겐베르크는 1933년 6월 사임했고, 그의 정당도 얼마 후 해산됐다. 7월 14일 나치당을 독일의 유일한 정당으로 선언하는 법률이 공포됐다.
 
  노조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도 해산됐다. 모든 노조는 1933년 5월 2일 해산되고, 노조 간부들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유서 깊은 체육단체나 여행단체, 청소년단체, 여성단체 등도 모두 해산되고 나치 산하조직으로 재편됐다.
 
  언론의 자유도 완전히 무너졌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비상명령에 따라 많은 언론사들이 폐쇄됐다. 이후 자유언론을 대신한 것은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였다. 신문과 방송, 출판은 철저히 국가에 예속되어 선전선동 기구로 전락했다.
 
 
  ‘긴 칼의 밤’
 
힌덴부르크 대통령(오른쪽)은 히틀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측근들의 꼬임에 넘어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는 아직도 도전자가 있었다. 하나는 250만명의 병력을 가진 나치스 돌격대였고, 다른 하나는 전통을 자랑하는 군부였다. 돌격대 참모장(대장) 에른스트 룀은 ‘국가사회주의’의 ‘사회주의’적 측면을 대변하는 자였다. 룀은 돌격대를 주축으로 하는 ‘인민군’을 창설, 나치스혁명을 수호하는 무장세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룀의 야심을 경계했다.
 
  히틀러는 권력을 안정시키려면 군부와, 군부의 대부인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가 필요했다. 히틀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군비 확장, 돌격대 축소와 함께 육·해군만을 독일 내 유일한 무장세력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군부는 그해 5월 16일 히틀러를 힌덴부르크의 후계자로 승인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히틀러는 그해 6월, 돌격대에 대한 숙청을 감행했다. 하인리히 히믈러의 친위대(SS)와 괴링의 게슈타포(비밀경찰)는 룀 등 돌격대 지휘부를 사살했다. 전 총리 슈라이허, 나치당 내 히틀러의 라이벌이었던 그레고르 슈트라서 등 히틀러의 정적(政敵)들도 무참하게 학살됐다. 나치 정권은 모두 71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사망자가 1000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이 사건을 ‘긴 칼의 밤’이라고 한다. 힌덴부르크의 지원을 받아 조심스럽게 히틀러를 견제하려고 했던 부총리 파펜은 주오스트리아공사로 쫓겨났다.
 
  이와 함께 사법부의 독립도 무너졌다. 히틀러는 ‘긴 칼의 밤’ 당시 자신이 ‘독일 국민의 최고심판관’이라고 선언했다. 독일제국 최고 법률지도자 한스 프랑크는 법관들에게 “국가사회주의에 대립하는 ‘법의 독립’이란 것은 없다”면서 “판결 때마다 ‘총통이 자신의 입장이라면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를 스스로 반문해 보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이 있자, 나치는 반역죄를 전담하는 인민재판소와 정치범을 처벌하는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히틀러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는 대신 스스로 총통(F¨uhrer) 겸 총리가 됐다. 이후 히틀러는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을 향해 질주했다.
 
 
  나치의 교훈
 
  히틀러 정권은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1933년 1월 중순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몰락해 가는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를 기사회생(起死回生)시킨 것은 힌덴부르크 측근의 소수 기득권세력이었다. 미국의 역사가 헨리 애슈비 터너2세는 “사실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당시 독일의 운명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을 주었다”고 말한다.
 
  독일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의 가장 큰 실책은 히틀러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 점이다. 그들은 히틀러가 다른 정치세력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며, ‘절대악(絶對惡)’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히틀러가 저서와 연설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민주공화정치의 파괴와 전쟁이라는 것을 수없이 공언했지만, 그들은 이를 무시했다. 경찰의 사찰기록들이 나치의 주장과 한계를 분석해 놓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1933년의 독일과 2017년의 대한민국을 비교할 때, 가장 흡사한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의 실정(失政)과 혼란에 질린 독일 국민들이 나치의 본질을 놓치고 그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품었던 것처럼, 작년 10월 이후 우리 국민들도 ‘종북주사파(從北主思派)’는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이어온 대한민국의 가치(價値)와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치혁명’이라는 외침을 독일 국민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처럼, ‘촛불혁명’이라는 외침에 담긴 의미를 너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개헌(改憲)’ 논의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터너2세는 이렇게 말한다. “나치 독재자의 역정이 남긴 것은 부정적인 유산밖에 없지만, 그것은 후대에 인류가 창조한 가장 강력한 제도, 그렇기에 또한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제도인 근대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을 선택할 때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2. 비시 프랑스 -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배신한 ‘적폐청산’ 시도
 
  ■ 역사적 배경
 
  1940년 6월 22일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항복했다. 국토의 5분의 3이 독일군 점령하에 들어갔다. 나머지 지역에는 필립 페탱 원수가 이끄는 비시정권이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지 불과 20여년 만에 참담한 패배를 맛본 프랑스인들은 그 원인을 제3공화국 시절의 국론분열과 정치체제의 실패에서 찾았다. 레지스탕스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프랑스인들, 특히 우익성향의 프랑스인들은 비시체제를 그러한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비시정권은 ‘국민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체제변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혁명 이래 추구해 온 공화국의 가치를 부정하고, 나치독일에 협력하는 반역의 길이었다.
 
 
  1930년대 프랑스
 
페탱의 ‘국민혁명’을 선전하는 포스터. 자본주의, 공산주의, 유대인 같은 적폐들 때문에 기울어진 프랑스(왼쪽)를 대신해 노동·가족·국가의 기치 아래 프랑스를 재건하자는 내용이다.
  1930년대의 프랑스는 침체된 사회였다. 앙드레 모로아는 《프랑스사》에서 당시 프랑스 사회를 이렇게 묘사했다.
 
  〈프랑스의 보수파인 우익은 영국의 보수당처럼 현행 헌법을 준수하는 합법정당을 결성하지 못하고 전혀 가망성이 없는 구체제에의 역행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 행동파인 좌익도 단결력이 없었고 특히 재정방면의 과오를 범했다. 프랑스 국민은 … 시민의 임무와 납세의 의무에 대한 용기가 오래 전부터 약화되었고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려 하지 않았다. … 생산시절을 갱신할 기본조차 없고 새로운 모험을 감행할 만한 미래에 대한 신념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나아갈 바를 두고 좌우 분열이 심화됐다. 부패하고 무능한 의회정치에 대한 환멸이 깊어졌다. 우익 일부는 군주제와 유사한 권위주의 체제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독재체제를 원했다. 1936년에는 레옹 블룸이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섰다. 블룸 정부는 복지 면에서 몇 가지 업적을 남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세력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국내적 문제에 발목이 잡힌 프랑스는 히틀러의 집권과 나치 독일의 라인란트 점령,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패전
 
1940년 7월 24일 히틀러와 만난 페탱(왼쪽). 이후 페탱은 ‘협력의 길’로 나가게 된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기갑부대와 급강하 폭격기를 앞세운 독일군의 전격전(電擊戰) 앞에 프랑스군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폴 레이노 프랑스 총리는 항전(抗戰)의지를 고무하기 위해 5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덩전투의 영웅인 필립 페탱 원수(元帥)를 부총리로 영입했다. 레이노의 기대와는 달리 페탱은 내각 내에서 주화파(主和派)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자신감을 잃은 프랑스군 수뇌부도 항복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정부를 압박했다.
 
  6월 16일 레이노 총리가 사임했다. 르브랑 대통령은 페탱 원수를 총리로 임명했다. 페탱은 독일에 휴전협상을 제안했다. 6월 21일,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던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는 항복했다.
 
  항복 조건은 가혹했다. 알자스-로렌지방은 독일에 할양되고,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영토의 3분의 2가 독일군 점령 아래 들어갔다.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역’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정부의 관할권 아래 놓였다.
 
  1940년 7월 10일 프랑스 남부의 온천관광도시 비시에서 국회가 열렸다. 이날 모인 상·하 양원 의원들은 페탱 총리에게 ‘프랑스 국가의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전권을 부여했다. 찬성 569표, 반대 80표, 기권 17표의 압도적 찬성이었다.
 
  페탱정권은 형식적으로는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페탱은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에 의해 합법적으로 총리에 임명됐다. 7월 10일에는 국회가 압도적 다수로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많은 프랑스 국민들은 정권 초기만 해도 페탱을 신뢰하고 지지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프랑수아 미테랑도 처음에는 비시 정부에서 하급 공무원으로 근무했었다. 당시에는 오히려 영국으로 망명해 ‘레지스탕스’를 호소한 샤를 드골 장군이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미국·캐나다·중국 등 40여개 국가가 비시 프랑스를 승인했다.
 
 
  페탱의 ‘국민혁명’
 
  전권을 넘겨받은 페탱은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국호가 프랑스공화국(R'epublique Française)에서 프랑스국('Etat français)으로 바뀌었다. 국가의 표어는 프랑스대혁명 이래의 자유·평등·박애에서 노동·가족·국가로 바뀌었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 이래 반동적 극우세력이 끈질기게 주장해 온 공화주의와의 결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국’은 유사(類似) 전체주의 국가였다. 모든 사회질서는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으로 바뀌었다.
 
  국가원수인 페탱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진행됐다. 페탱의 초상화가 도처에 나붙었고, 페탱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페탱은 잔다르크나 나폴레옹 등의 뒤를 잇는 국가적 영웅으로, 국부(國父)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메시아’로 추앙받았다.
 
  비시정권은 이러한 체제변혁을 ‘국민혁명’이라고 불렀다. 페탱을 비롯한 극우세력에게는 이것이 프랑스를 쇠약하게 만든 공화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적폐를 청산하고 프랑스를 재건하는 길이었다. 이는 1871년 이래 군부와 가톨릭, 왕당파 등 프랑스 우익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페탱은 1940년 10월 24일 히틀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6일 후 페탱은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오늘 나는 협력(collaboration)의 길로 들어선다”고 선언했다. 이후 ‘협력(collaboration)’이라는 말은 ‘점령자에 대한 부역(附逆)’을 의미하는 말이 됐다.
 
  페탱으로서는 나름 명분이 있었다. 그는 나치에 대한 협력을 통해 가혹한 휴전협정을 완화시키고, 독일에 억류된 프랑스군 포로들을 조기 송환하며, 점령지역과 자유지역 간의 자유로운 왕래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치 독일이 패권(覇權)을 차지한 유럽 신질서 아래서 프랑스가 독일에 버금가는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942년 11월 비시정권이 관할하던 자유지역까지 점령했다. 뭐라고 변명하건 이후 비시정권은 날이 갈수록 독일의 ‘괴뢰’로 전락했다. 이와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도 활발해졌다.
 
  비시정권은 레지스탕스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특별재판소를 설치하고 민병대(Milice Française)를 만들었다.
 
  르네 부스케가 지휘하는 프랑스 경찰은 프랑스 주둔 나치친위대와 협정을 맺고 유대인 학살에 협력했다. 특히 유명한 것이 1942년 7월 일어난 벨디브 사건이다. 1만3152명의 유대인이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동계경륜장(벨디브)에 수용되었다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학살된 사건이다. 이들을 포함해 7만6000여 명의 프랑스 유대인들이 나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들 중 3%만이 살아남았다. 비시정권은 이에 앞서 나치가 제정한 것과 흡사한 ‘인종법’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추방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프랑스공화국이 표방해 온 자유·평등·박애라는 가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공화주의 제도에 대한 침해’ 처벌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후 페탱은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러한 행위들은 프랑스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이후 철저히 응징되었다.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인 1944년 6월 26일 ‘부역행위 처벌에 관한 명령’을 공포했다. 이 명령 제1조는 ‘1940년 6월 16일과 해방일 사이에 기존 형법을 위반한 행위’ 특히 ‘모든 종류의 이적(利敵)행위’를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기존의 형법만으로는 부역자들을 처벌하는 데 한계를 느낀 드골은 8월 26일 ‘국민부적격죄’라는 죄를 신설하는 명령을 공포했다. ‘국민부적격죄’는 ‘1940년 6월 16일 이후에 프랑스 국내외에서 자발적으로 독일이나 그 동맹국들에게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국민통합 혹은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저지른 자들의 공민권을 박탈하도록 했다.
 
  이 명령이 적용되는 기점(起點)이 된 1941년 6월 16일은 페탱이 총리가 되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드골은 이날을 프랑스의 정체성이 훼손되기 시작한 날로 본 것이다. 나치 독일에 대한 협력 행위는 물론 ‘국민통합 혹은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다스리도록 한 것은, 바로 ‘프랑스공화국’의 가치를 훼손한 행위에 대한 처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중에 부역 공직자들을 숙청할 때에도 ‘공화주의 제도에 대한 침해’가 중요한 판단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됐다.
 
  부역자 재판이 시작된 후 12만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어 약 9만800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500여 명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나치로부터 해방된 직후, 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도 약 9000명에 달했다. 2만1000여 명의 공무원과 5700여 명의 공기업 직원, 1만5000명 이상의 군인이 숙청됐다. 언론인, 문화예술인, 기업인들도 숙청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비시정권을 이끌었던 페탱 원수는 종전 후 재판에 회부됐다. 전쟁 전 인민전선의 총리를 지냈던 레옹 블룸은 법정에서 “페탱이 (자신에 대한) 도덕적 신뢰를 남용한 것이 곧 반역”이라고 규탄했다. 페탱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종신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대서양의 고도(孤島)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51년 사망했다.
 
  1930년대 프랑스가 앓고 있던 병리(病理)현상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흡사하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 적폐를 패전의 와중에 성립된 권위주의적 비시정권의 ‘국민혁명’을 통해 단숨에 청산하려 했다. 우리나라는 지금 최순실사태를 기화로 들어선 정권이 ‘촛불혁명’을 외치고 있다. ‘촛불혁명’이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비시정권이 남긴 교훈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회라고 하더라도 민주공화국의 가치나 의회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입법이나 결의를 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한 위정자는 반역으로 처단된다는 교훈 말이다.
 
 
  3. 칠레의 아옌데 정권 - 설익은 반미, 성급한 개혁으로 몰락을 자초하다
 
  ■ 역사적 배경
 
  칠레는 남미에서는 보기 드물게 1932년 이후로 의회민주주의의 전통이 유지되어 온 나라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극단적인 양극화, 구리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좌파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는 구리 광산의 국유화, 빈민을 위한 복지의 확대 등 일련의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국과 필요 이상으로 각을 세웠고, 분출하는 민중의 욕구를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1973년 9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아옌데는 목숨을 잃었다.
 
 
  민주국가 칠레
 
거리를 누비는 아옌데 지지 시위대. 아옌데 집권기는 ‘정치 과잉’의 시절이기도 했다.
  쿠데타가 빈발하는 남미 대륙에서 칠레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1818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제정된 헌법은 이후 100년 넘게 유지됐다. 1920~30년대에 몇 차례 쿠데타를 겪기는 했지만, 군대는 곧 병영으로 복귀했다. 1940~50년대에는 공산주의자들도 내각에 참여할 정도로 ‘열린 사회’였다.
 
  하지만 칠레 역시 다른 중남미 국가들처럼 고질적인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수의 대지주들이 전체 농지의 5분의 4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 국민의 40%가 영양부족으로 고통받았다.
 
  칠레 경제의 기반은 구리 수출이었다. 1970년 구리는 칠레 총 수출액의 80%를 차지했다. 구리 생산의 80%를 미국 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다.
 
  1964년 집권한 중도 우파 기독교 민주당의 에두아르도 프레이는 ‘자유 속의 혁명’을 내걸고 구리 광산 국유화, 농지개혁 등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개혁에 반발한 보수세력은 떨어져 나갔고, 민중은 미진한 개혁에 분노했다.
 
  1970년 9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가 승리했다. 아옌데는 36.3%를 득표했다. 차점자인 호르헤 알렉산드리와의 표차는 3만9000여 표에 불과했다.
 
  의사 출신인 아옌데는 1933년 사회당의 창당에 참여한 이래 하원의원, 상원의원, 복지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대통령 선거에 세 차례 출마한 바 있다. 1970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는 ‘세계 최초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옌데는 충실한 의회주의자였지만, 문제는 그의 반미적(反美的) 언설이었다. 후보 시절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미국의 구리회사들이 칠레로부터 취하는 이득은 전체 국민소득과 맞먹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 회사들은 우리 국민의 손으로부터 칠레 전체를 약탈해 왔습니다. … 칠레는 종속된 식민지 국가입니다.”
 
  당시는 냉전(冷戰)시대였다. 쿠바에 카스트로 정권이 들어선 이래 한껏 신경이 곤두서 있던 미국은 자신의 뒷마당인 남미에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용인할 수 없었다. 아옌데가 당선되자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무책임한 국민들에 의해 한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왜 멍하게 서서 지켜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멍하게 서서’ 지켜보지 않았다. 군부와 우익 정당·단체들을 움직여 아옌데의 취임을 저지하려 하는가 하면, 헌정 질서에 충성하는 참모총장 슈나이더 장군을 암살하도록 사주(使嗾)했다.
 
 
  구리광산 국유화
 
  이런 방해 공작은 아옌데의 대통령 취임을 막지 못했다. 그는 체 게바라와 호찌민의 사진을 흔들면서 열광하는 군중들 앞에서 “제국주의적 착취를 타도하고, 독점을 없애며, 진정하고 충분한 농지개혁을 실행할 것이며, 은행 등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아옌데는 취임하자마자 경제·사회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정부의 명령으로 1년 반 사이에 최저 임금은 35%가 올랐다. 물가는 동결되었다. 빈민들에게 우유와 의약품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농업노동자 조합 결성,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 농지개혁 등이 추진되었다. 공업생산은 14.6%로 증가한 반면, 실업률과 인플레율은 떨어졌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아옌데는 구리광산 국유화를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제안했다. 칠레 국회는 1971년 이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아옌데는 이를 ‘제2의 독립’이라고 환영하면서 ‘국민 존엄의 날’을 선포했다.
 
  아옌데는 구리광산을 국유화하면서 “이미 칠레에서 과도한 부(富)를 수탈해 갔다”는 이유로 보상 없이 미국 회사들의 지분을 몰수했다. 이는 시장경제의 원칙과 국제법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아옌데는 집권 후 2년 남짓한 기간 중 산업시설의 35%, 농지의 40%를 국유화했다.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미국은 ‘아옌데는 공산주의자’라는 확신을 굳혔다. 미국은 세계은행의 차관(借款)을 봉쇄하는 등 경제제재를 가하는 한편,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칠레 경제를 교란했다. 1972년 10월에는 개인트럭 운수사업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CIA가 이 파업을 배후 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트럭운송업자들의 파업과 상인들의 매점매석(買占賣惜)으로 물자부족 사태가 심해졌다. 기층 민중들은 규찰대를 조직해 물류창고들을 접수해 물자를 배급했다.
 
  아옌데 집권 후 민중들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극좌(極左)단체인 혁명좌파운동(MIR)의 선동 아래 지주(地主)들의 땅을 무단 점유해 온 도시 빈민들은 자신들이 점유한 지역 내에 자치행정기구와 인민재판소·무장 민병대를 설치하고 공권력에 맞섰다.
 
  공장을 접수한 노동자들은 허구한 날 정치집회를 열어 ‘사회주의혁명’을 외쳐댔다. 아옌데 시절을 미화한 파트리시오 구스만의 다큐멘터리 영화 〈칠레전투〉를 보면, 이 시기 정치에 날을 지새우는 칠레 노동자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수도 산티아고 인근 공장지대의 노동자들은 MIR 등 극좌단체들의 지원을 받는 무장 민병대까지 만들었다. 이러한 일들은 군부를 자극했다.
 
 
  반미 외교로 상황 악화시켜
 
쿠바의 카스트로(왼쪽)는 칠레를 방문해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추진하는 아옌데(왼쪽)를 격려했다.
  1972년 말부터 경제지표들이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것 같아 보이던 칠레 경제는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제재, 구리가격 폭락, 공업생산성 저하 등이 원인이었다. 인플레율은 1972년 말 160%, 1973년 전반기에는 300%에 달했다.
 
  위기의 상당 부분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옌데는 미국과 척지는 행동을 계속했다. 1971년에는 쿠바의 카스트로가 칠레를 방문했다.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독특한 과정이 칠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계급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에 의해 결정된 바로 그 법을 사용해서 혁명가들이 합법적이고 합헌적인 방법을 써서 평화적으로 수행하려는 혁명적인 과정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아옌데는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미국의 경제제재를 돌파하려 시도했다.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아옌데에게 편지를 보내 “혁명을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쿠바·중국에 접근하는 아옌데의 외교정책은 미국의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할 뿐이었다.
 
  아옌데의 사회주의적 정책에 대해 우익세력은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1971년 12월에는 수도 산티아고에서 약 5000명의 중산층 주부들이 ‘빈 냄비들의 행진’을 벌였다.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로 비롯된 물자부족 사태에 대한 항의였다. 가톨릭대학 학생들과 ‘조국과 자유’ 등 우익 청년단체들도 거리로 나와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좌익 정당·사회단체, 노동자들도 거리를 행진하면서 “아옌데! 아옌데! 우리가 그대를 지켜 주리라!”고 외쳐댔다. 아옌데는 시위장소에 나와 “우리의 혁명은 어디까지나 법과 민주주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도 “사회주의혁명은 계속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73년 8월 22일 300여 명의 장교 부인들이 국방장관 겸 참모총장 프라츠 장군의 집 주변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프라츠의 부관은 “이는 군부가 장군을 불신임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프라츠는 사임했다.
 
아옌데 정권을 타도한 칠레군 수뇌부들. 왼쪽부터 세자르 멘도사 경찰군 사령관, 호세 메리노 해군참모총장,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 구스타브 레이그 공군참모총장.
  아옌데는 후임 참모총장으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을 임명했다. 피노체트는 그해 6월 29일 있었던 군사반란 때 현장에 나와 반란군을 진압했던 장군이었다. 아옌데는 피노체트를 헌정질서에 충성하는 장군으로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육군·해군·공군·경찰군이 모두 참여한 전군(全軍) 쿠데타였다. 아옌데는 카스트로가 선물한 기관총을 들고 대통령궁(宮)에서 쿠데타군에게 저항하다가 죽었다.
 
  이후 피노체트는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 1996년까지 군 총사령관으로 칠레에 군림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약 3200명이 살해되고, 1200명이 실종됐다.
 
 
  국제현실을 무시한 죄
 
  아옌데는 나름 충실한 의회민주주의자였다. ‘혁명’을 외치면서도 ‘법과 절차’를 강조하면서 혁명적 민중들을 제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민중들을 제어하는 데 실패했다.
 
  아옌데가 추진한 경제·사회 개혁은 다소 급진적이긴 했어도 요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당시의 국제정세였다. 냉전하에서 미국은 서반구(西半球)에서 그 정도 수준의 마르크스주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옌데의 행동은 미국의 국익과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은 CIA와 미군을 통해 칠레를 흔들었고, 결국 쿠데타를 지원해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켰다.
 
  정치·경제·사회 개혁은 단순히 국내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국제질서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국제질서 속에서 관계의 틀을 바꾸는 것은 국내 개혁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아옌데는 이 점을 망각했다. 그의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4. 베네수엘라
 
  ■ 역사적 배경
 
  베네수엘라는 1958년 주요 정당들이 맺은 ‘푼토피호 협정’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 왔다. 1970~1980년대에는 유가(油價) 급등에 힘입어 호시절을 누렸다. 그러는 사이에 기득권 정당들은 부패했고, 빈부격차는 확대됐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에 대한 항의가 잇달았다. 1992년 불발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우고 차베스는 1998년 ‘적폐청산’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2013년 사망할 때까지 포퓰리즘과 사회주의, 반미(反美)민족주의가 혼합된 ‘볼리바르혁명’을 이끌었다. 의회민주주의는 사라졌다. 2013년 차베스가 사망한 후 니콜라스 마두로가 권력을 승계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는 극심한 궁핍과 정치적 충돌,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푼토피호 협정
 
1958년 10월 31일 라파엘 칼레라(기독교사회당), 호비토 비야바(민주공화동맹), 로물로 베탕쿠르(민주행동당)는 푼토피호 협정을 맺었다(왼쪽부터).
  1958년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장군의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저항으로 무너졌다. 그해 10월 31일, 민주행동당, 민주공화동맹, 기독교사회당 등 베네수엘라의 3대 정당은 ‘푼토피호 협정’을 맺었다. 공산당은 배제하고, 어느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건 나머지 정당은 이를 지지하면서 정부에 참여해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는 약속이었다. 이 협정의 배후에는 남미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으려 고심하던 미국이 있었다.
 
  덕분에 베네수엘라는 30년간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성 정당들의 담합(談合) 결과 베네수엘라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렸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특히 석유 이권을 둘러싼 부정이 끊이지 않았다.
 
  1970~198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세계 제1위의 석유 부존국이자 5위권의 석유수출국인 베네수엘라는 흥청거렸다. 하지만 1986년 이후 유가가 급락하면서 경제는 엉망이 됐다. 1989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유가와 교통비가 급등하자 수도 카라카스에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군대의 발포로 287명(공식집계)이 사망했다. 이 시위를 ‘카라카소’라고 한다.
 
  1992년 2월 4일 공수부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지휘자는 우고 차베스 중령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볼리바르주의를 지향하는 군부 내 비밀조직 볼리바르운동-200(MBR-200)을 이끌고 있었다. 쿠데타는 14명의 사망자와 130명의 부상자를 내고 실패로 끝났다. 차베스는 방송에서 “단지 지금으로서는 실패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그는 기성체제 아래서 절망하고 있던 민중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2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차베스는 1994년 ‘제5공화국운동(MVR)’을 조직했다. 그는 ‘푼토피호 체제’ 아래 안주해 온 기성 정치·경제 세력을, 과거 남미를 지배했던 스페인과 다름없는 ‘적폐세력’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자신을 스페인에 맞서 남미를 해방시킨 영웅 시몬 볼리바르에 비견했다. 1998년 12월 실시된 대선에서 차베스는 56.2%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차베스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대놓고 기존 헌법질서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나는 신(神)과 나의 친애하는 민중 앞에서 이 끔찍한 헌법에 따라 새로운 공화국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대헌장을 갖도록 필요한 민주적 변화를 추진할 것을 맹세합니다.”
 
 
  국기 속 말머리도 좌향좌(左向左)
 
2006년 베네수엘라 의회는 차베스의 지적에 따라 말이 오른쪽으로 달리면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던 문양의 국장(國章)을, 말이 왼쪽으로 달려가는 형태(오른쪽)로 바꾸었다.
  차베스는 기성 정치세력들이 지배하는 의회와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1999년 4월 25일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들은 88%의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7월 25일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차베스를 지지하는 ‘애국파’는 125개 의석 중 95%를 차지했다. ‘푼토피호 체제’를 지탱해 왔던 3대 정당은 6석을 얻는 데 그쳤다.
 
  8월 12일 제헌의회는 사법부임시위원회를 소집, 190명의 판사를 부정부패 혐의로 제명했다. 사법부 장악이 시작된 것이다. 야당은 ‘독재로 가는 길’이라며 반발했지만 소용 없었다.
 
  제헌의회는 대통령의 임기를 기존 5년 중임에서 6년 3연임으로 늘리고,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 등을 부여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1999년 12월 22일 통과됐다. 2000년 8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차베스는 59.8%의 지지를 얻어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베네수엘라공화국의 국호도 ‘볼리바르베네수엘라공화국’으로 변경했다. 2006년에는 국기(國旗)와 국장(國章)도 바꾸었다. 종래에는 말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차베스가 “부자연스럽다”면서 왼쪽을 향하도록 바꾼 것이다.
 
  2000년 11월 차베스는 의회로부터 ‘수권법’을 얻어냈다. 의회의 입법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령(令)만으로 신속한 개혁정책을 가능하게 해 주는 법이었다.
 
  ‘수권법’이라는 칼을 손에 쥔 차베스는 2002년 4월에 노조의 반정부 파업을 부추겼다는 이유로 베네수엘라석유공사(PDVSA) 경영진을 전원 축출했다. 비판적인 보도를 해 온 5개 TV 방송사도 폐쇄했다.
 
  석유공사노조의 파업 와중에 군대의 발포로 시위대 9명이 사망했다. 이를 빌미로 4월 1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차베스는 구금됐다. 쿠데타 세력은 상공회의소 회장 페드로 카르모나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곧 차베스 지지자 수십만 명이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차베스 복귀를 요구했다. 차베스는 권좌에 복귀했다. 이 어설픈 쿠데타는 차베스의 독재정권을 강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코뮌 국가’ - 사회주의 거부하면 공공서비스 배제
 
  이후에도 베네수엘라의 정정(政情)은 안정되지 못했다. 차베스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의 충돌이 계속됐다. 야당은 2003년 대통령소환 국민투표를 요구했지만, 차베스는 이듬해 국민투표에서 압승, 상황을 반전(反轉)시켰다. 2005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도 차베스의 ‘제5공화국운동’은 투표자 89%의 지지를 얻어 167개 의석을 석권했다.
 
  2006년 차베스는 ‘제5공화국운동’과 ‘볼리바르혁명운동’을 합쳐, 통합사회주의당을 만들었다. 그해 12월 대선에서 차베스는 3선에 성공했다.
 
  선거에 승리한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외쳤다. 그는 ‘사회주의의 혁명적 직접민주주의’를 달성한다는 명목으로 ‘코뮌국가’를 제안했다. ‘코뮌국가’는 기존 행정구역을 넘어서는 지역단위(코뮌)로 공동체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 공동체위원회가 사회주의를 거부할 경우, 해당 코뮌은 국가로부터 승인을 얻지 못하고 ‘사회주의법’이 제공하는 각종 공공서비스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차베스는 이를 위한 헌법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하지만 차베스는 이를 무시하고 각종 사회주의적 입법을 통해 부결된 헌법개정안에 담았던 내용들을 실천에 옮겼다. 대통령 직속 기구가 된 대법원은 차베스에게 유리한 헌법해석을 통해 이런 상황을 뒷받침해 주었다.
 
  지방선거를 포함하면 거의 매년 실시된 각종 선거에서 차베스는 늘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선거가 얼마나 공정한 선거였는지는 의문이다. 선거에서 투·개표 조작 같은 선거부정이 있었다는 고발은 없었다.
 
  하지만 야당 후보들은 후보자 등록 과정에서부터 관계 당국으로부터 차별과 방해를 받고, 차베스 지지세력의 협박과 폭행에 시달린다는 고발은 수없이 많았다. 방송은 차베스와 여당 후보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국영석유공사의 자원이 여당 후보들을 위해 풀리고, 각종 선심성 복지혜택이 펼쳐지는 것은 아예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야당 후보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남미 좌파연대 구축
 
2013년 2월 19일 차베스가 입원 중인 군병원 앞에서 지지 시위를 벌이는 지지자들. 차베스는 그해 3월 5일 사망했다. 사진=뉴시스
  차베스는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의료 및 복지 혜택을 확대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해 온 세계 각국의 좌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무현 정권 시절 KBS에서는 차베스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고, 베네수엘라혁명연구모임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석유수입에 의존하는 이런 포퓰리즘이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차베스는 국제적으로는 남미 좌파연대(連帶) 구축에 앞장섰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멘토로 여겨 자주 방문하면서 친분을 다졌다.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쿠바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쿠바 의사들을 수입해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활동에 투입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좌파 정권인 에보 모랄레스가 이끄는 볼리비아에도 석유와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5년에는 인디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벌여 온 ‘뉴 트라이브 미션’이라는 미국 시민단체를 ‘CIA의 간첩’으로 몰아 추방하기도 했다.
 
  차베스는 201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베네수엘라를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의 신생 강국’으로 변모시키고, 이를 통해 ‘우주의 평형’ 및 새로운 국제적인 지정학 구축에 기여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2013년 차베스가 죽고 4년이 지난 지금 베네수엘라는 ‘우주의 평형’은 고사하고 ‘국내의 평형’, 아니 ‘일상생활의 평형’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버스운전사 출신인 니콜라스 마두로는 차베스를 파는 ‘유훈(遺訓)통치’로 근근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차베스 통치 아래서 기득권 세력이 된 군부와 관료, 그리고 포퓰리즘의 단물을 빠는 데 익숙해진 민중들이 마두로 정권을 떠받치고 있다. 지난 3월 이후 마두로 정권에 항거하는 시위가 계속되면서 1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마두로는 지난 7월 대통령의 독재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제헌의회 선거를 강행했다.
 
  그러는 동안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IMF는 베네수엘라의 연간 물가상승률이 금년에는 1660%, 내년에는 2880%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유일한 소득원이던 국제유가가 떨어지면서 퍼주기식 복지 시스템도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됐다. 작년 한 해 동안 유아 사망률은 30%, 산모 사망률은 65% 증가했다. 여성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환자들은 약을 구하지 못해 대체의학과 기도에 의존하고 있다. 식량난이 심화되자 얼마 전에는 도시농업장관이 ‘토끼 먹기 캠페인’에 나섰다가 국제적인 우스개거리가 됐다. 카라카스는 인구 10만명당 살인 119건으로 전쟁지역을 제외하면 살인율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2015년 기준).
 
  그것이 지난 19년간 ‘적페청산’을 앞세워 포퓰리즘과 민족주의, 사회주의가 잡탕이 된 ‘볼리바르주의’를 실험해 온 베네수엘라의 성적표이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