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文武大王이 간다!

서석천 2016. 8. 29. 20:33
文武大王이 간다!
百濟, 倭, 高句麗, 唐을 차례로 꺾고 250년 계속된 동아시아의 평화 시대를 연 고대 아시아 最高의 인물로부터 남북통일의 지침을 듣는다. 

중국을 꺾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에게 배울 때다. 

文武大王의 삼국통일을 깎아내리는 것은 植民史觀이나 김일성주의에 물든 바보짓이다! 

백제·고구려를 獨食(독식)한 唐(당)은 신라까지 병합하려 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문무대왕이 唐의 침략군 장수에게 보낸 「答薛仁貴書․ 답설인귀서」는 왜 신라국가가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의 수퍼파워와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천명한 開戰(개전) 문서이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答薛仁貴書」를 한번 제대로 읽어 보아야 한다.

7세기 東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역사의 격동 속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신라였다. 이것을 추동한 힘은 신라 3金 의 인간적 신뢰를 바탕한 팀 파워였다.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3인의 협력이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야성과 결단의 君主 문무대왕이 통일전쟁과 나당 7년전쟁을 지휘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만약 문무왕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백제․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성 좋은 중국에게 먹혀 한반도에 당3군이 설치될 뻔했다.


프롤로그—왜 문무대왕인가
 

동해의 대왕암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7세기의 수퍼파워 唐帝國(당제국)을 꺾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文武大王(문무대왕)은 작지만 강한 나라의 역사적 모델을 제시했다. 문무대왕이 增强(증강)시킨 신라 수군은 海路(해로)를 통한 唐의 兵站線(병참선)을 틀어막아 당 지상군의 南下(남하)를 저지했다. 西域(서역)에서 당시 세계 최대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놓고 전개된 吐藩(토번)의 對唐攻勢(대당공세)를 절묘한 타이밍에 활용해 한반도의 戰勢(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때 대왕이 구사한 전략은 1만5000리 떨어진 중국대륙의 東‧ 西端(동‧ 서단)에서 同時(동시)에 唐帝國(당제국)을 끼고 치는 2對 1 전략이었다. 어떠한 강국도 혼자서는 2正面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왜 羅唐(나당) 7년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일까?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제국은 648년의 비밀협정을 어기고 그 故土(고토)를 獨食(독식)했을 뿐만 아니라 대왕을, 평양에 주둔한 당의 安東都護(안동도호)의 節制(절제)를 받는 鷄林州大都督(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당의 예비동작이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당면한 문무대왕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결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남북통일을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때 대왕이 唐의 극동방면군사령관에게 보낸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弱者(약자)인 신라가 왜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 최강과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闡明(천명)한 감동적인 開戰文書(개전문서)였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문무대왕의 이 개전문서를 제대로 읽어보아야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사코 깎아내리는 것은 단언컨대 日帝(일제)의 植民史觀(식민사관) 혹은 수준 미달의 김일성주의에 오염된 바보짓이다.

그렇다면 대왕과의 時空(시공)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서 가능할 것인가? 역시,東海(동해)로 가서 문무대왕의 水中陵(수중릉)부터 답사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마주 보이는 慶州市 陽北面 奉吉里(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 서서 우리 민족의 결정적 순간을 생각했다. 나당 7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왕은 唐-倭(당-왜) 연합에 의한 침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주변국에 화해의 몸짓을 계속 보내면서도 안으로는 침략전쟁에 철저하게 대비했던 문무대왕의 국가안보 전략.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대왕의 수중릉 앞에 서면 그것은 처절하리 만큼 장엄하다. 대왕릉 쪽 동해바다에서 200m 거리의 奉吉里(봉길리) 해안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의 대행렬…. 그것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나라 지키기에 身命(신명)을 걸라는 대왕의 至上命令(지상명령)이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이 되고 싶다”

봉길리 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2km 거리인 感恩寺趾(감은사지)에 들러 한국 최대의 3층 쌍탑을 관찰했다. 문무대왕이 착공하고, 그의 장남인 神文王(신문왕)이 완공한 感恩寺(감은사)는 이제 그 遺構(유구)만 남아있지만, 감은사의 동‧ 서 3층석탑(국보 제112호)은 1300여년의 風雨(풍우)에도 꿋꿋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지금은 품격 높은 신라예술을 대표한다.

감은사에 가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해룡)이 되기를 맹세했던 문무대왕의 나라 사랑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대왕의 化身(화신)인 해룡이 감은사에 드나들 수 있게 바다와 연결된 通路(통로)가 20년 前 감은사 本堂(본당)의 遺構調査(유구조사)에서 확인되었는데, 필자도 그때 그것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현재, 그 유구는 다시 땅속에 파묻혀 있다. 신라 당시엔 감은사 山門(산문: 절의 바깥문)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4번 국도를 타고 경주시내로 들어와 신라의 都城(도성)인 半月城(반월성) 기슭에 자리 잡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입장했다. 박물관의 현관에는 문무대왕의 陵碑(능비)가 전시되어 있다. 파손이 심한 陵碑文(능비문)이지만, 거기서 新羅金氏(신라김씨)가 어디서 경주로 흘러들어와 어떤 과정을 거쳐 신라국왕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문무대왕 陵碑(능비) 곁에는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도 전시되어 있다. 높이 불과 34c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냇돌에는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신라 花郞(화랑)의 의식구조와 수련 내용이 알뜰하게 새겨져 있다. 신라 화랑이야말로 臨戰無退(임전무퇴)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삼국통일과 韓民族(한민족) 형성을 위한 祭壇(제단)에 피를 뿌린 용사들이었다.

<壬申年(임신년) 6월15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忠道(충도)를 몸소 실행하여 과실이 없기를 하늘에 맹세한다. (中略)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출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1년 전 辛未年(신미년)에는 詩(시), 尙書(상서), 禮記(예기), 春秋傳(춘추전)을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군대에 안 간 장관‧ 국회의원이 수두룩한가 하면, 그런 주제에 대통령을 노리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지 못한 사람은 입장료 1000 원인 경주국립박물관에 가서 임신서기석을 한번 우러러 보고 난 후에 그들의 向後(향후) 거취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역사상 最長(최장) 기간의 亂世(난세)를 극복하고 韓民族(한민족)을 성립시킨 결단과 지혜의 인물이라면 바로 문무대왕이다. 문무왕 16년(676), 대왕은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나당전쟁 승리 후에도 大王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다음은 그의 유언 중 한 대목이다.

<兵器(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위의 대목은 문무대왕의 自負心(자부심)의 발로라 해도 좋다.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이라는 廟號(묘호)도 그냥 그렇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대왕은 馬上(마상)에서 세계제국 唐과의 전쟁을 지도해 삼국통일을 완수했기 때문에 ‘武’ 자를, 신라국가의 律令(율령)완성과 船府(선부) 신설 등 각종 제도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자를 받은 것이다.  

임진강을 韓民族의 방파제로 활용한 대왕 

경주 답사 일정을 끝낸 필자는 밤을 도와 臨津江(임진강)으로 北上(북상)했다. 임진강은 韓民族(한민족)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임진강과 그 유역을 水陸(수륙) 양면의 요새로 활용한 君主(군주)가 문무대왕이었다. 漢江(한강) 하류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다 恭陵川(공릉천)의 河口(하구)에 걸린 松村大橋(송촌대교)를 지나면 자라머리[鰲頭‧ 오두]처럼 생겼다고 鰲頭山(오두산)이라 불리는 군사적 요충이 눈에 들어온다. 나당전쟁 당시엔 泉城(천성)이라고 불린 오두산의 부근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고 해서 예로부터 이곳을 交河(교하)라고 불렀다. 나당 전쟁 중 唐의 함대는 군량과 무기를 싣고 交河 바로 북쪽 임진강 河口(하구)로 진입하려 했다. 임진강 중류의 七重城(칠중성)과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 연안의 買肖城(매소성) 등으로 南下한 唐 지상군과 兵站線(병참선) 연결을 거듭 시도했던 것이다. 나당전쟁 때 칠중성과 매소성은 양군 간 쟁탈의 요충이었다.

그러나 공릉천 河口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는 唐 함대의 임진강 진입을 한사코 틀어막았다. 요즘엔 평화전망대가 세워져 있는 오두산은 군사용어로 말하면 瞰制高地(감제고지)이다. 감제(Command & Domination)란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으로부터의 관측에 의한 통제를 말한다.

오두산성은 392년 10월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攻破(공파)당한 백제의 關彌城(관미성)이었다. 그 터엔 3국 쟁탈전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듯 백제, 고구려, 신라의 토기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현재, 오두산 정상엔 임진강 북쪽의 山河(산하)가 내려다보이는 통일전망대가 들어서 있다. 오늘날 남북 대치의 현장인 임진강 1300 여년 前에는 나당의 결전장이었다. 필자는 임진강 하구의 伴鷗亭(반구정)과 臨津閣(임진각), 중류의 高浪浦(고랑포), 沙尾川(사미천), 瓠蘆古壘(호로고루), 七重城(칠중성), 국군 필승사단의 태풍OP(Observation Post‧ 관측소), 그리고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南岸의 買肖城(매소성) 등지를 답사했다.

특히, 매소성은 나당전쟁 중 지상군의 決戰場(결전장)이었다. 태풍OP(264고지) 바로 북쪽인 임진강 상류에는 水攻(수공)이 가능한 북한의 황강댐이 축조되어 있어, 장마철만 되면 우리를 잔득 긴장시키고 있다.

675년 9월29일, 신라군은 靺鞨族(말갈족)을 主力으로 했던 당군 20만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그러나 李謹行(이근행)이 지휘한 말갈군단은 설인귀 함대의 泉城(천성) 전투 패배로 軍糧(군량) 등을 보급받지 못해 전면 퇴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이근행 군단은 戰馬(전마) 3만여 필과 많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매소성 전투 직후 이근행의 군단은 한반도를 떠나 토번군과 싸우기 위해 1만3000리 서쪽의 靑海(청해)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이근행은 나당 7년 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인 敵將이다. 왜 전마를 3만여 필이나 버리고 퇴각했을까? 말은 사람의 12배를 먹는다. 말갈족‧ 거란족 등 기마민족 병사는 원정 때 1인당 3필 정도의 戰馬(전마)를 데리고 다닌다. 따라서 군량이 떨어진 이근행 군단에게 말(馬)은 큰 골칫거리였을 터이다. 매소성 전투가 지상전의 결전이라면 해전의 결전은 기벌포 전투였다. 문무왕 16년(676) 11월, 설인귀의 함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 하구로 진입하려다가 伎伐浦(기벌포: 지금은 충남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와 격돌했다.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한 신라 함대는 첫 교전에서는 패배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해전에서 全勝(전승)했다.

필자는 기벌포 해전의 현장인 금강 하구 長項(장항) 앞바다를 답사한 다음 금강 북안을 따라 東進(동진)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백제 패망 후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던 공주, 백제부흥군의 근거지 周留城(주류성: 충남 홍성군 長谷面)과 任存城(임존성: 홍성군 大興面)을 답사했다.  

“신라는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우리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676년 기벌포 전투 이후 나당전쟁이 재발하지는 않았지만, 당은 틈만 나면 신라를 다시 공략하려고 시도했다. 예컨대 678년 西域(서역)에서 당‧ 토번의 실크로드 쟁탈전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자, 당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고 했다. 이때 시중 張文瓘(장문관)은 중병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당고종에게 나아가 신라와의 전쟁을 확대시키지 말라고 건의했다. 다음은 <<資治通鑑‧ 자치통감>> 의봉 3년(678) 9월 條의 기사이다.

< 고종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侍中(시중) 장문관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 토번이 侵寇(침구)하니 바야흐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또 東征(동정)을 한다면 그 폐해가 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對신라전을) 중지했다. > 

문무대왕은 토번의 서역 공격을 틈 타 수퍼파워 唐을 꺾었다. 위에서 말한 靑海(청해)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제주도 면적 2.5배 크기의 內陸 鹽水湖(내륙 염수호)인 청해호가 있는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을 말한다. 청해호는 太古(태고)의 지각변동에 의해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염수호가 되었다. 나당 7년 전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것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토번‧ 당의 전쟁, 특히 청해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비천이 위치한 청해성의 共和縣(공화현)은 티베트의 라사(拉薩)∼청해성의 省都 시닝(西寧)를 잇는 214번 국가간선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이 도로는 감숙성의 성도 蘭州(난주)를 거쳐 唐제국의 수도였던 長安(장안: 지금의 西安)으로 이어진다. 또 공화현에서는 감숙성의 허리인 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하서주랑)의 요충인 張掖(장액), 그리고 청해성 西部지역인 차이담 盆地(분지)를 거쳐 新疆(신강)의 오아시스路와 연결된다.

2010년 4월9일, 필자 일행 5명은 西寧(서녕‧ 시닝)공항에 착륙했다. 청해성의 省都(성도)인 서녕은 원래 백제부흥군 출신 장수 黑齒常之(흑치상지)가 건설한 군사도시다. 湟水(황수)라는 강을 따라 형성된 서녕은 시가지도 누렇고, 하늘도 누렇고, 산도 누렇고, 강물도 누렇다. 거리엔 이곳의 옛 주인인 티베트族과 흰 사각모자를 쓴 위구르族이 눈에 많이 띄였다. 

나‧ 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大非川 전투.

나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靑海湖(청해호) 남쪽에서 당‧ 토번 간에 전개된 670년 8월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였다. 대비천은 安東都護(안동도호: 극동방면군 총사령관)였던 설인귀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1만3000여 리를 이동, 청해호 남쪽에서 토번군과 싸워 전멸당한 현장인 것이다. 설인귀는 대번에 斬首(참수)를 당할 만한 패장이었지만, 그가 일찍이 홍수의 위기에서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생명을 구한 공이 있었다. 더욱이 설인귀와 同鄕(동향: 山西省)인 측천무후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계속 기용된 것으로 보인다.

669년, 신라 문무왕은 설인귀 군단이 평양을 떠나 靑海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던 듯하다. 670년 4월, 신라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신라에 망명했던 고구려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가 각각 병력 1만 명씩 모두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해 鳳凰城(지역)으로 진출, 말갈군을 공격해 대승했다. 이것이 나당 7년 전쟁의 緖戰(서전)이었다.

2010년 4월10일, 필자 일행은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을 답사했다. 중국인에게는 치욕의 현장이었던 대비천은 이제 沙珠玉河(사주옥하)라는 예쁜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다. 우리 일행은 청해호 연안의 서남단 黑馬河(흑마하)를 거쳐 상피산(4451m)을 넘어 靑海南山(청해남산)의 남쪽 기슭에 펼쳐진 대비천 전투 현장을 둘러보고 자정 무렵에야 서녕 호텔로 되돌아왔다.

신라김씨의 原籍(원적)을 찾는 답사

청해성까지 깊숙히 들어간 우리 일행이 당‧ 토번 전쟁 중 쟁탈의 요지였던 甘肅省(감숙성)의 실크로드 구간인 河西走廊(하서주랑)과 문무대왕의 능비문에서 그의 先祖(선조)라고 밝힌 金日磾(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를 답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4월11일 오전 9시, 필자 일행은 지프를 타고 서녕을 출발, 청해성과 감숙성의 경계지대인 峨堡鎭(아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길가의 식당 모두가 영업을 하지 않았다. 폭설이 휘날려 모두 문을 닫았던 것이다. 폭설 視界(시계)가 매우 불량한 가운데 겁도 없이 해발 4000m의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넘어 張掖(장액)에 도착했다. 장액의 唐代(당대) 이름은 甘州(감주)다. 장액과 223km 상거한 酒泉(주천)의 唐代 명칭이 肅州(숙주), 두 곳의 머리글자를 따서 甘肅省(감숙성)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4월22일은 폭설이 내린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쾌청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프를 타고 장액에서 酒泉을 거쳐 明代(명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嘉峪關(가욕관)을 향해 河西走廊(하서주랑)을 신나게 달렸다. 왼편에는 눈부시게 하얀 눈을 봉우리에 이고 있는 기련산맥, 오른쪽으로는 바딘지린(巴丹吉林) 사막이 펼쳐져 있다. 구름은 기련산맥의 허리에 걸려 있었는데, 하서주랑은 그곳보다 高度(고도)가 오히려 높다. 말을 타고 이 하서주랑을 달리면 雲上人(운상인), 바로 ‘구름 위의 사람’이 된다. 신라 화랑들이 왜 雲上人을 그렇게 憧憬(동경)했는지,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문무대왕의 능비문의 기록이 맞다면, 그 선조의 原籍(원적)은 감숙성인 것이다.

慶州(경주) 대릉원의 天馬冢(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障泥: 국보 제207호)에도 구름 위를 달리는 天馬를 그려놓았다. 말다래는 말이 달릴 때 진흙이 말의 허벅지와 배에 튀는 것을 막는 馬具(마구)로서 천마총의 말다래는 북방의 한랭한 삼림지대에 自生(자생)하는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천마총의 주인은 우리 역사인물  陽物(양물)이 가장 컸다는 智證麻立干(지증마립간)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는 지증마립간의 陰莖(음경)의 길이가 1척5촌이라고 전하고, 그가 반려자(왕비)를 찾는 스토리를 인간 냄새 물씬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1척은 약 20cm, 1척5촌이라면 30cm인 것이다.

麻立干(마립간)은 17대 奈勿王(내물왕: 재위356∼402))으로부터 21대 智證王 4년(503)까지 사용된 신라의 王號(왕호)이다. 大陵園(대릉원)은 마립간 시대의 왕, 왕비, 왕족 무덤이다. 그래서 천마총에 가면 우리 古代史(고대사)의 暗號(암호)가 풀린다. 경주 대릉원의 무덤은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은 스키타이族, 匈奴族(흉노족) 등 기마민족의 무덤양식이다. 스키타이族이라면 기원전 6세기∼기원전 3세기 黑海(흑해) 연안에서 번영했던 유목기마민족의 元祖(원조)이다. 흉노족은 기원전 3세기∼5세기 몽골 및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활동한 유목기마민족으로서 전성기에는 아시아대륙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감숙성의 서쪽 끝인 敦煌(돈황)은 동서교류의 보물창고인 莫古窟(막고굴)로 유명하지만, 필자가 2004년 타클라마칸 사막의 天山南路(천산남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路 구간)를 답사할 때 이미 들렀던 곳이어서 가욕관에서 오던 길로 뒤돌아서 河西走廊(하서주랑)을 東進(동진)하기로 했다. 가욕관 동쪽 21km에 酒泉(주천)이 있다. 주천은 스무 살의 소년장수 藿去病(곽거병)이 BC 121년 여름 흉노족을 쳐부수고 나서 이곳 호수가에서 戰勝(전승) 파티를 했다. 이때 곽거병이 가진 슬이라고는 漢武帝(한무제)로부터 하사받은 단 한 병뿐이었는데, 그것을 물이 솟아오르는 구멍에 부은 다음, 술+물을 섞은 ‘칵테일’한 잔씩을 병사들과 나눠 마셨다고 해서 이후 이곳이 酒泉(주천)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주천에서 장액까지는 223km. 장액에서 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까지는 212km. 필자 일행은 그 중도의 山丹(산단)에서 기련산맥 기슭 쪽으로 진입해 50여km 정도 길을 헤맨 끝에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가 곽거병에게 사로잡히고, 그의 아버지 休屠王(휴저왕)이 피살된 焉支山(언지산)을 찾아갔다.

언지산은 흉노의 24 王將(왕장) 중 1人인 渾邪王(혼야왕)의 근거지였다. 혼야왕과 휴저왕은 漢軍(한군)에게 거듭 패전해 흉노의 大선우인 伊稚斯(이치사)가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소환명령을 내리자 목이 달아날 것을 겁내, 가만히 漢武帝(한무제)에게 急使(급사)를 날려 항복을 청했다.

한무제는 BC 121년 늦가을, 혼야왕과 휴저왕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곽거병을 급파했다. 곽거병의 기마군단이 언지산으로 시시각각 접근해오자, 휴저왕은 최종단계에서 항복을 망설였다. 이에 혼야왕은 휴저왕을 살해하고 그의 무리를 빼앗았다.

언지산에 들이닥친 곽거병의 기마군단은 그때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는 흉노병 8000 명을 참살하고, 귀순자 4만여 명을 데리고 長安(장안)으로 개선했다. 귀순자 4만 명 중에는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와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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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中陵과 感恩寺에서 통일대왕과 만나다

文武大王이 간다(2)/감동적 유언에서 드러나는 위대한 人格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수중릉(水中陵) 

문무왕과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에 가면 가능할 것인가? 역시 奉吉里(봉길리: 경주시 陽北面) 앞바다에 위치한 그의 수중릉(水中陵)부터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곳을 그의 뼈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라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좋다. 어떻든 그곳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大王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뇌했던 민족사 최고 영웅과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인간들 사이에 血脈(혈맥)의 마디마디를 이어주는 민족 정체성(正體性)의 현장이기도 하다.

필자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陽北面 奉吉里) 해변에서 동해 바다와 마주섰다. 포효하는 파도의 물결이 계속 밀려왔다 포말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진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는 자연 바위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1996년의 답사 때만 해도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뱃삯을 지불하고 모터보트를 타면 주변 해역을 한 바퀴 빙 돈 뒤에 대왕암에 下船(하선)할 수 있었다.

대왕암은 멀리서 보면 바위섬이지만, 막상 그곳에 올라가 보면 바닷물이 드나드는 작은 못의 둘레에 자연 암석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못의 바닥에는 길이 3m 가량의 편평한 돌이 얹혀 있다. 사방이 열십자(十) 형으로 트인 좁은 수로(水路), 그 동쪽 수로를 통해 흘러들어온 동해의 바닷물이 서쪽 수로의 턱을 슬쩍 넘어서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그날, 대왕암 바깥에서는 파도가 제법 거세게 쳤지만, 대왕암 안쪽의 바닷물은 의외로 잔잔했다.

혹시, 못 속의 편평한 바위 밑에 유골함을 안치했던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나 않을까? 필자는 바닷물 속에 얼굴을 파묻고 바위 밑바닥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그런 것이 들어갈 만한 人工(인공) 구조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문무왕은 나당전쟁에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우리 민족사의 대영웅이다. 그렇다면 그의 후계자는 왜 대왕의 능을 번듯하게 지어 모시지 않고, 하필이면 동해구(東海口)의 바위 속에다 장사를 지냈던 것일까? 역사의 기록(三國史記)에 따르면 수중릉에 문무왕의 유골을 모신 것은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문무왕의 유언은 참으로 산뜻하다.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吳王: 孫權·손권)의 北山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주(魏主: 曹操·조조)의 西陵(서릉)은 동작(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에 만기(萬機)를 총람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사서(史書)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혼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문무왕은 합리적이고 겸허했다. 그는 매머드급(級) 무덤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노역으로 모는 것이 후세의 비판거리이며, 무덤 주인공인 자신을 위해서도 부질없는 일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實用主義(실용주의) 노선이 아니었다면, 삼국통일의 완수는 불가능했고, 지금 한민족(韓民族)은 중국의 50여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사 최대의 역사발전 

삼국통일은 한국사 최대의 역사 발전이었다. 우선, 사람의 해골로 산야가 뒤덮혔던 300년의 난세를 치세(治世)로 바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켰다. 삼국통일로 坐食者(좌식자), 즉 놀고 먹던 사람이 최소한 30% 이상 격감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 다르면 고구려에는 좌식자의 수가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좌식자는 거의 전문전사(專門戰士)들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 영토는 백제+ 신라보다 5배 넓었지만, 당시의 첨단산업인 쌀 생산량은 한반도 남부지역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후세(조선왕조 영조 시기)의 지리지인《擇里志》(택리지) 등을 참고한 필자의 추정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으로, 간소한 장례를 거듭 당부했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 아니다. 숨을 거두면 바깥 뜰 창고 앞(庫門外庭)에서 나의 시신을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輕重)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문무왕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지시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君主(군주)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그 유골이 동해바다의 자연바위 안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서도 당-왜 연합을 경계한 문무대왕

《三國遺事‧ 삼국유사》에 인용된 감은사사중기(感恩寺寺中記)에 의하면 문무왕은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왕암 건너편 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별세했고, 죽어서는 동해의 해룡(海龍)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제국 당과의 7년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그런 그가 사후(死後)에 호국룡(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럴 만큼 신라에게 왜국은 겁나는 존재였을까?

이 점에 대해선 뒤에서 상술(詳述)할 것이지만, 당시의 수퍼파워 唐과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였고, 문무왕의 임종 시점(681년)까지 나·당 간의 긴장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배후의 일본이 엄청 겁나는 존재였다. 비록 당군이 압록강 以北의 요동(676년)→무순 지역으로 철수하기는 했지만, 당시 급변하던 西域(서역)의 정세에 따라서는 언제든 한반도에 대한 再침략의 가능성이 있었다.

전쟁 재개의 결정권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가 아니라 아직도 東아시아 최강국인 당이 보유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당과 일본이 제휴한다면 신라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병력상의 절대 우위에다 공성전(攻城戰)에 능숙한 당군, 기마전에 숙달된 말갈군·거란군, 그리고 배후에서 침략군의 병참 지원이 가능한 일본군이 연합한다면 신라는 단 몇 달도 견뎌낼 수 없었을 터였다.

나당전쟁 전후(前後)의 신라-왜국 관계를 추적하면 문무대왕은 당-왜 동맹을 깨기 위해 혼신의 외교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왜국에 친선의 메시지를 계속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당-왜 연합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가전략―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마주 대하면 그것은 사무칠 만큼 장엄하다. 그는 피맺히게 고뇌했던 인간이었다.

한국 역사상 그처럼 파란만장한 亂世(난세)를 극복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의 유언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과 마주했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원근(遠近)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遺訓)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베풀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676년 11월, 문무왕은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이후 5년간 그는 당의 재침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이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天壽)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문무왕은 재위 21년 만인 681년 7월1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훨씬 후세인 조선왕조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만큼 문무왕이 단명(短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시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데 一身(일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한 탓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政事)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古今)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감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東宮)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잊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내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문무왕)이라는 시호(諡號)는 그냥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상(馬上)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고, 세계제국 당과의 7년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武 ’라는 글자를, 신라국가의 각종 제도 개혁 및 민생 개선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이란 字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유언은 다음 구절로 끝을 맺는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州(주)·郡(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오, 법령과 격식(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어서 알릴 것이며, 원근에 선포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태자는 왕이 되어 이를 시행하라! > 

봉길리 바로 북쪽 감포(甘浦) 해안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利見臺(이견대)로 올라갔다. 이견대에서 동해 바람을 맞받으면 오장육부가 시원해진다. 이곳은 문무왕의 화신인 해룡을 앞바다에서 보았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82년 5월, 신문왕(神文王)은 이곳에서 해룡으로 화한 선친(先親) 문무대왕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피리는, 그것을 불기만 하면 천하가 화평해진다 하여, 신라 국보로 삼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려고 간절히 서원(誓願)했던 인물이다.  

감은사의 쌍탑은 오후 3시쯤에 더욱 빛난다  

이견대를 출발해 서쪽 1.5km 거리의 감은사지(感恩寺址)에 일부러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이 시각이면 감은사지의 쌍탑이 햇볕을 정면으로 받아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삼국통일을 이룩해 낸 신라인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감은사 터의 동·서 3층 석탑은 우리 국보 제112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감은사는 신문왕(神文王)이 부왕(父王)인 문무대왕의 뜻을 이어 완공했던 절이다. 처음, 이곳에 절을 세우려 했던 창건주는 문무대왕이었다.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고 정했다. 그러나 대왕은 절이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

생전에 문무대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래서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해룡으로 환생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구조를 했다. 1996년, 필자는 보수공사 중인 감은사 금당(金堂) 바닥 아래에 높이 1m의 석조(石造) 통로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감은사의 山門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춰보면 그 의미가 심장하다. 과연, 석조 통로로 해룡이 드나들었지는 신심(信心) 차원의 문제인 만큼 필자로서는 거론할 영역이 아니다. 감은사는 황룡사·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이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에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신라 석탑 중에서 비교적 초기 형태지만, 조형미는 최고 수준이다. 높이는 각각 13.4m이며,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1959년 서쪽 3층 석탑이 해체 복원되면서 왕이 타는 수레 모습의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一堂雙塔)의 가람으로서 남북 회랑(回廊)의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조된 점과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 지은 행랑)을 둔 점이 특이하다. 동·서탑의 중앙부 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金堂)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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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庾信의 기획으로 탄생한 金法敏

文武大王이 간다(3)/망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은 신라 왕족 김춘추를 누이에게 소개하여 혼인을 하게 한다. 신라 가야의 연합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다.

김유신이 기획했던 政略결혼과 김법민의 탄생 

그렇다면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문무대왕 金法敏(김법민)은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해서 578년 왕위에서 쫓겨난 眞智王(진지왕)의 손자 金春秋(김춘추)다. 어머니는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왕 仇衡(구형)의 손자인 金舒玄(김서현)의 막내딸이자 金庾信(김유신)의 누이인 文姬(문희)이다. 다음은 <<삼국사기>> 문무왕 즉위연도(661)에 실린 그의 출생과 관련한 유명한 스토리이다.

<언니(宝姬․ 보희)의 꿈에 西元山(서원산) 정상에 앉아 오줌을 누니 그 오줌이 국내에 가득 찼었다. 깨고 나서 아우(文姬․ 문희)에게 꿈 얘기를 하니 아우는 농담으로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고 하고,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庾信(유신)은 春秋公(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 집이 다행히 근처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달자” 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술상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 꿰매게 하였다.
그의 맏누이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그 아우(문희)가 나와 옷고름을 다는데, 그녀의 수수한 단장과 가벼운 옷맵시는 사람을 환히 비추었다. 춘추가 기뻐하면서 이내 청혼하여 대례를 갖추었는데, 곧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가 바로 법민이다.> 

위의 <<삼국사기>>의 인용문에서 김춘추와 김문희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의문 해소는 신라 당시의 기록인 金大問의 <<花郞世紀‧ 화랑세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김춘추의 조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하여 재위 3년만에 폐위된 신라 제25대 임금인 眞智王(진지왕)이다. 김춘추의 生父(생부)는 진지왕의 장남으로 早死(조사)한 이찬(관등 제2위) 金龍樹(김용수)이고, 養父(양부)는 용수의 동생인 龍春(용춘)이다.

김문희는 신라에 패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임금인 仇衡(구형)의 증손녀이다. 문희의 조부는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군) 전투에서 백제 聖王(성왕)을 전사시킨 新州(신주)의 軍主(군주)였던 金武力(김무력)이다. 김무력의 아들이 蘇判(소판: 관등 제3위) 김서현이다. 김서현은 신라 왕족인 萬明(만명)과 눈이 맞아 변경(지금의 충북 진천군)으로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했었다. 만명은 肅訖宗(숙흘종: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갈문왕)의 딸이다. 葛文王(갈문왕)은 왕의 동생 등에게 붙여준 존호였다.

아무튼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는 폐위당한 임금의 손자, 어머니 김문희는 신라에 패망당한 금관가야 구형王의 후예였다. 김법민의 父系(부계)나 母系(모계)가 그러했던 만큼 김춘추-김법민 父子의 등극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필사본 「花郞世紀(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15世 風月主(풍월주), 김춘추는 18世 풍월주다. 풍월주는 요즘 육군사관학교의 「대표화랑」쯤에 해당하지만, 그들에 대한 신라사회의 기대와 聲望(성망)은 대단했다.

김춘추-김문희 정략결혼의 기획자는 망국의 후예로서 신분상승의 비원(悲願)을 품은 가야김씨 庾信(유신)이었다. 그는 8세 연하(年下)의 신라김씨 춘추(春秋)를 유인해 그의 여동생 문희와 婚外情事(혼외정사)의 분위기를 만들었음은 앞에서 썼다. 유신의 첫째 여동생 寶姬(보희)는 달거리 중이어서, 바느질을 사양했다. 이때 둘째 여동생 文姬가 앞으로 나아가 춘추를 모시고 바느질을 하게 되었다. 유신은 일부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지나 문희의 배가 불러왔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당시 춘추에게는 이미 寶羅(보라)라는 미색(美色)의 정실부인이 있었다. 보라는 「프리섹스의 化身」이었던 美室(미실)의 손녀였다. 美室은 일찍이 제5世 풍월주 金斯多含(김사다함)의 연인이었고, 그가 전사한 후에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雲雨(운우)의 情을 나누면서, 화랑 조직을 움직인 배후의 실력자였다.

더욱이 김춘추와 보라 사이에는 이미 古陀炤(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 춘추는 보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감히 文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김유신은 결혼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한 최후의 이벤트를 감행했다. 김유신은 그의 집 뜰에 땔감을 잔득 쌓아 놓고 “처녀가 애를 뱄다”고 외고 펴면서 짐짓 文姬를 불사르려고 했다. 이때 김춘추는 선덕공주(善德公主)를 따라 남산에서 노닐고 있었다. 선덕공주가 연기 나는 곳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좌우 신하들이 자초지종을 고해 바쳤다. 선덕공주가 김춘추에게 말했다.

『당신이 상관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소!』

김춘추는 곧장 南山에서 내려와 문희를 구하고, 혼례 올릴 것을 사당에 고했다. 그 얼마 뒤 보라宮主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문희는 뒤를 이어서 정실부인이 되었다. 이처럼 김법민은 철저한 정략결혼의 산물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대왕의 妃는 慈儀王后(자의왕후)인데, 파친찬 金善品(김선품)의 장녀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품은 신라 화랑의 대표인 풍월주(21世) 출신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용모가 매우 잘 생겼고, 언행이 지극히 아름다웠으며, 문장을 좋아하고, 仙道(선도)와 佛道(불도)에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上等(상등) 골품의 인물이었다.>

그는 선덕여왕 10년(641)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당나라에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 36세의 나이로 早死(조사)했다. 태종무열왕이 마음 아파하고 아찬(관등 제6위)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의 딸 자의가 문무대왕의 왕후가 되자 파진찬(관등 제4위)으로 추증되었다. 선품공의 차녀는 體元(체원: 20世 풍월주 역임)에게 시집가서 아들 吳起(28世 풍월주)를 낳았고, 그의 3녀 夜明(야명)은 문무대왕을 섬겨 宮主(궁주: 왕의 소실)가 되었다.  

金法敏(김법민)은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나이 27세에 아버지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즉위로 인해 갑자기 왕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자란 태자나 왕자는 미식(美食)과 미색(美色)으로 흐믈흐믈해지게 마련이다. 운동 부족에 의해 야성(野性)을 지니기도 어렵다. 세계제국 唐나라와 싸워야 했던 결단과 투쟁의 시기에 野性(야성)을 지닌 문무대왕이 재위(在位)했다는 것이야말로 신라의 축복이며,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법민은 본디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 그는 23세의 약관에 역사의 전면(前面)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4년(650) 6월 조에는 『왕은 비단에 五言詩(오언시)인 太平頌(태평송)을 써서, 이를 春秋(춘추)의 아들 法敏(법민)으로 하여금 唐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송은 겉보기에 아부의 극치이다. 

<위대한 大唐 王業을 열었으니/ 드높은 황제의 앞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五星이 만방에 도는구나/……/ 三皇과 五帝의 덕이 하나가 되어 大唐을 밝게 비추리로다.>

650년이라면 唐고종 즉위 다음 해인 永徽(영휘) 원년이다. 그렇다면 태평송에 대한 唐고종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는 『高宗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大府卿(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통일의 실질적 지휘자 문무왕의 奮鬪

문무대왕이 간다(4)/백제, 왜, 고구려, 당을 차례로 꺾고 250년간의 대평화 시대를 연 영웅의 인간성

3면 포위 공격받은 신라

진덕여왕이 당의 고종에게 바친 태평송을 음미하면 신라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신라의 저자세 외교(外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왜국이란 3面의 적에 대처해야 했다. 이런 국가존망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 원인에 대해 약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왕 이래 신라는 고구려를 섬겨 백제, 가야, 왜국의 3面 포위공격에서 살아남았다.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압록강 北岸의 국내성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놓고 남진정책을 감행하자, 신라는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 고구려의 침략에 맞섰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고구려군의 침략을 받아 수도 漢城(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은 사로잡혀가 지금의 워커힐 뒷산(아차산)에서 참수(斬首)되었다. 신라는 이때 원병 1만 명을 파견했지만, 漢城(한성: 풍납토성+몽촌토성)이 이미 攻破(공파)당한 후였다. 이때 개로왕의 동생 文周(문주)는 지금의 공주로 남하해 웅진백제 시대를 열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더욱 굳어진다.

드디어 551년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난 기회를 이용해 백제-신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한강유역에서 몰아냈다. 백제는 자신의 옛 수도권인 한강 하류지역의 6郡(군)을 탈환했고, 신라는 죽령과 조령을 넘어 주로 산악지대인 한강 상류(남한강) 지역의 10郡을 차지했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속성상 강 하나의 유역을 나눠 가지는 동맹체제가 지속될 리 만무했다. 553년 7월, 신라는 기습공격을 걸어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고,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신주의 軍主에는 김유신의 조부인 金武力이 임명되었다.

백제는 신라의 배신에 보복해야 했다. 백제 聖王(성왕)은 3만 명의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 영토의 허리를 누르기 위해 管山城(관산성: 지금의 충북 옥천)에 진주시켰다. 554년 7월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비롯한 3만 병이 전멸하고, 오직 왕자 餘昌(여창: 후일의 위덕왕)만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신라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와 수도 사비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62년 1월, 신라는 가야연맹제국의 마지막 맹주 대가야까지 먹었다. 이제 신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낙동강· 한강 유역을 차지해 농업생산력이 급증하고,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던 唐과 직통할 수 있는 南陽灣(남양만)의 黨項城(당항성: 경기도 화성시)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신라국가에게는 미증유의 위기를 불러왔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 왜국에게 공동의 적이 되었다. 어떤 국가도 3面 공격에는 견딜 수 없다. 640년, 백제 무왕에 이어 의자왕이 즉위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국경지역의 40여 성을 점령했다. 8월에는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해 서해안의 당항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특히 백제군 1만여 명은 신라 수도권의 요새 大耶城(대야성: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때 대야성 城主이며 김춘추의 사위인 品釋(품석)과 고타소(김춘추의 딸) 부부가 자결했다.

642년 대외정세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642년 10월, 고구려의 동부대인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대신 100여명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즉위시켰다. 그 자신은 절대권력자인 대막리지가 되었다. 이보다 1개월 전인 9월, 당은 변경을 침입한 西돌궐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同盟을 찾아나선 金春秋— 648년 羅·唐 비밀협약 

김춘추는 신라에 대한 3면 포위를 풀기 위해 자신의 신명을 걸었다. 642년 11월, 김춘추는 고구려로 들어가 對백제 군사동맹을 제의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막 집권한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신라가 점령한 竹嶺(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逆제의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때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어 목숨까지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어 647년, 김춘추는 宿敵(숙적) 왜국으로 건너가 對백제 견제외교를 전개했다. <<日本書紀‧ 일본서기>>에는 이때 김춘추의 모습에 대해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했다(美姿顔善談笑)』라고 기록되어 있다. 회담의 결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왜국은 그들 선조가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전에 살았던 가야諸國(제국)을 병합했던 신라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는 동맹국이 필요했다. 648년, 김춘추는 唐에 건너가 唐태종을 만났다. 이때 唐태종은 김춘추에게 『내가 두 나라(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에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이른바 「648년 밀약」이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고구려-백제-왜국의 南北동맹과 신라-당의 東西동맹으로 니눠져 대립했다. 결과론이지만, 남북동맹은 동서동맹에 비해 느슨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병사하고 후사가 없자 和白(화백) 회의는 처음엔 上大等(상대등: 귀족회의 의장) 金閼川(김알천)을 밀었지만, 백제·고구려의 공세를 자신의 실력으로 막아 온 김유신의 위엄에 눌려, 김춘추를 만장일치로 후계왕으로 추대했다. 김춘추-김유신 동맹의 승리였다.

김춘추의 등극 후 장남 金法敏(김법민)은 곧 태자가 되었고, 병부령(지금의 국방부 장관)을 겸임했다. 660년 7월, 당의 신구도행군총관 蘇定方(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13만 대군을 이끌고, 남양만으로 들어오자 태자 김법민은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덕적도에서 당군을 접응(接應)했다. 7월13일, 羅唐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 김법민은 의자왕의 왕자 扶餘隆(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나(고타소)를 죽여 옥중에 파묻어, 나는 이 일로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김법민으로서는 백제 왕가에 대한 해묵은 私怨(사원)을 통쾌하게 풀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승자의 태도는 결코 전략적이지는 않았다. 7월18일, 熊津城(웅진성: 지금의 공주)으로 도주했다가 사비성으로 되돌아와 항복한 의자왕도 치욕적인 모욕을 당했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전승축하연에 불려나가 勝將(승장)들의 술잔을 채워서 올려야 했다. 승자의 오만이 저지른 두 사건은 백제부흥군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천하대란의 馬上에서 즉위한 문무왕

661년 6월, 金馬郡(금마군 지금의 익산)에서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돌연 사망했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8년(661) 조에 따르면 “6월에 大官寺(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金馬郡(금마군)의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나 되었다. 왕이 돌아가시니…” 라고 되어 있다.

“우물물이 피가 되고 땅에서 피가 흘러…”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에 따라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태종무열왕이 백제무흥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 하지만, 필자는 위인의 죽음을 예고하는 하나의 레토릭(修辭‧ 수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튼 태종무열왕이 재위 8년 만에 죽고, 태자 김법민이 신라 30대 국왕으로 승계했지만, 문무대왕 김법민이 당면한 대내외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문무왕 원년(661) 6월, 당고종의 곁에서 宿衛(숙위)를 하던 문무대왕의 동생 金仁問(김인문)이 귀국해 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

“당 황제가 이미 소정방을 보내어 35道의 수․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드디어 (문무)왕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라고 하니 비록 喪中(상중)이라 할지라도 황제의 勅命(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 

문무대왕은 그해(661) 가을 7월, 김유신을 대장군, 仁問 眞珠(진주) 欽突(흠돌)을 大幢將軍(대당장군)으로 삼고,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총관, 진흠 중신 자간을 하주총관으로 삼는(…… ) 등 북벌군을 일으켰다. 신라는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내친 김에 신라까지 먹으려는 唐의 속셈이 이미 드러났고,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치열했으며, 고구려와 왜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662년 9월, 왜국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扶餘豊(부여풍)이 백제부흥군의 지도자 福信(복신)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백제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왜왕 덴지(天智)는 장군 사이노 무라지(狹井連)와 에치노 다쿠쓰(朴市田內津)에게 병력 5000 명과 선박 170여 척을 주어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화살 10만 개 등 전쟁물자도 지원했다.

부여풍은 周留城(주류성: 충남 홍성군 대흥면 鶴城‧ 학성)을 백제부흥군의 지휘본부로 삼고, 福信(복심)· 道琛(도침)과 왜장들을 이끌고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백제부흥군은 한때 200 성을 탈환할 만큼 맹위를 떨쳤다. 웅진도독부가 공주-부여 일원만 겨우 장악하고 나머지 백제 고토가 모두 백제부흥군의 수중에 떨어졌던 것이다.

663년 왜군은2만7천은 3회에 걸쳐 규슈를 거쳐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때 문무대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豆陵尹城(두릉윤성 청양군 定山面)과 백제부흥군의 지휘본부인 주류성을 攻破(공파)했다. 나당 연합군은 수륙으로 병진해 白村江(백촌강)에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읋 제압했다. 백촌강 전투에 대해 중국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군은 왜와 4회 싸워 모두 이겼다. 전투에서 왜의 전선 400척을 불태웠다. 연기는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663년 9월의 白村江 전투로 백제부흥군이 패망하자, 당고종은 백제의 옛 영토를 지배하는 식민기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에게 당의 괴뢰인 웅진도독 부여융과의 會盟(회맹)을 강요했다. 문무왕은 아직 對고구려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던 만큼 당 측의 무리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665년 8월, 문무왕은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금강 부근 就利山(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당의 장수 劉仁軌(유인궤)가 작성한 서명문에 따라 양측의 화해를 서약했다.

연개소문 세 아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멸망한 고구려 

666년 5월,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병사하고, 그의 맏아들 淵男生(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아버지의 독재 권력을 승계했다. 그러나 남생은 두 아우인 男建(남건)‧ 男産(남산)과 권력다툼 끝에 패해 당나라로 도망쳤다. 이 해 겨울, 당고종은 李勣(이적)과 薛仁貴(설인귀) 등을 보내 고구려 치게 했다. 고구려는 회복불능의 내분에 빠졌다. 문무왕 6년(666)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淵淨土(연정토)가 심복부하 24 명, 12개 읍성의 소속민 등 3543 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667년 겨울, 이적의 부대가 먼저 新城(신성)을 함락시키자, 압록강 북쪽의 고구려의 성 16곳도 잇달아 함락되었다. 이때 당에 망명했던 연남생이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당군에 붙어, 오히려 조국을 쳐부수는 데 앞장섰다. 668년 봄, 唐將 이적의 부대가 扶餘城(부여성)을 함락시킨 뒤, 그 근처 40여 성으로부터 항복받고, 남건이 보낸 군사 5만 중 3만을 죽이고 대행성을 함락시켰다. 압록강 이북 지역의 戰力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당장 이적은 다른 방면으로 고구려에 침입한 당군까지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鴨綠柵(압록책: 의주에 설치했던 방어용 울타리)에서 고구려군을 쳐부수고, 잇따라 辱夷城(욕이성 청천강 북안)도 함락시켰다. 668년 6월27일, 문무대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북상했다. 이때 고령의 김유신은 풍병을 앓아 출전하지 않고, 수도 서라벌을 지켰다. 당군의 南下와 신라군의 北上에 의해 그해 9월21일 나-당 양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포위했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포위한 지 한 달 남짓해서 보장왕은 男産(남산: 연개소문의 제3자)에게 수령 98 명과 함께 성 바깥으로 나가서, 이적에게 항복하게 했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만은 항복하지 않고, 항쟁을 계속했지만, 번번이 패배했다.

이때, 남건으로부터 군사에 관한 일을 위임받은 信誠(신성)이라는 승려가 몰래 적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고, 급히 적군을 맞아들이자, 남건은 칼로 자결하려다 실패하고 당군에게 사로잡혔다. 668년 겨울, 당의 장수 이적은 항복한 보장왕을 비롯해서 남건‧ 남산, 그리고 신료와 백성 등 20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개선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28왕 700여년 만에 멸망했다. 당고종은 보장왕을 비롯해 고구려 유민들을 모두 사면했지만, 남건만은 워낙 미움을 샀기 때문에 黔州(검주: 사천성)라는 곳으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평양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안동도호 설인귀가 고구려 고토를 다스리게 하고, 그 밑에 새로이 편성된 9도독부, 42州, 100 縣(현)에서는 옛 고구려의 장수로서 당군에 협조한 적이 있는 자들이 중국인과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668년 11월5일, 문무대왕은 사로잡힌 고구려 사람 7000 명을 데리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다음해(669년) 2월, 문무대왕은 群臣(군신)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에 가로막혀 북쪽(고구려)에서 치고, 서쪽(백제)에서 침범하여 잠시도 편한 세월이 없었다. 전사들의 白骨(백골)은 原野(원야)에서 쌓여 있고, 몸과 머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략) 이제, 두 적국이 평정되고 사방이 편안하니 싸움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었고, 전사한 영혼들에게는 冥資(명자: 벼슬)을 추증하였다. >

이상까지는 당연한 論功行賞(논공행상)의 시행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교서의 내용이 문무왕의 범상치 않은 통치력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문무대왕의 지시는 명확했다. 

<다만, 저 감옥 속에는 이러한 은혜를 입지 못하고, 칼을 쓴 고통은 새 세상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일을 생각할 때 침식이 편치 않으니 국내의 죄수들을 특사하여 총장 2년(669) 2월21일 새벽 이전에 五逆(오역: 임금‧ 부모‧ 조부모를 죽인 죄)을 범한 자 이하로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풀어주고, 이전의 대사령 이후에 죄를 범하여 관직을 삭탈당한 자도 모두 복직케 하라.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배상할 재물이 없는 자는 한도액까지 배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빌려 먹은 자로서 작황이 좋지 않은 곳에 사는 자는 본곡과 이자를 갚지 않아도 되게 할 것이며, 만약 작황이 좋은 곳에 사는 자는 금년 추수기에 원금만 반환하게 하고 이자는 받지 말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이 달 30일 안으로 해당 관청이 집행하라 하였다.>  

21세기의 북한 정권은 집단농장에서 쌀을 훔친 농민들을 공개 처형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개처형장에는 어린이들까지 강제동원해 사형 장면을 보여 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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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軍 사령관 薛仁貴의 협박 편지

문무대왕이 간다(5) 설인귀라면 645년 唐태종의 안시성 공격 때부터 참전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안동도호를 역임한 歷戰(역전)의 인물이었다. 그가 문무왕에게 최후 통첩을 보낸 것이다.

고구려 멸망 후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총사령관(都護‧ 도호)으로서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던 薛仁貴(설인귀)는 왜 돌연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일까? 669년 9월, 吐藩(토번: 지금의 티베트)이 실크로드(天山南路)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평양에 주둔 중이던 설인귀는 급거 병력을 이끌고 西域(서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토번은 현재 靑海省(청해성)에 위치한 白州 등 18개 州를 점령했다. 실크로드의 허리를 끊어 버린 토번의 전격작전이었다. 唐으로서는 반격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격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670년 7월, 설인귀와 郭大封(곽대봉)이 지휘한 당군은 靑海湖(청해호) 남방 大非川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때 설인귀는 혼비백산해 자신의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이 전투 직후에는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 휘하 4鎭이 토번에 함락되었다. 安西4鎭이라면 지금 신강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쿠차·카슈가르·호탄·카라샤르에 있던 오아시스路)의 군사거점도시였다. 당의 서역 방면 총사령부인 안서도호부는 西州(서주: 지금의 투르판)로 물러났다.

唐의 서역 경영에 있어 최대의 적수는 吐藩(토번)이었다. 토번은 662년부터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唐軍에 도전해 왔다.

670년 3~4월, 신라의 압록강 도강 작전과 봉황성 전투는 안동도호부의 主力이 서역으로 대거 이동한 상황에서 그 虛(허)를 찔렀던 선제공격이었다.

670년은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5월, 唐은 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行軍摠官(동주도행군총관: 한반도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월,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점령하고, 唐의 관리와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그 직후, 고간이 지휘한 기병 1만과 이근행(부총관)이 지휘한 거란·말갈병 3만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성에서 퇴각했다.

문무대왕은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이 이끌고 남하하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지금의 전북 익산시)로 집단 이주시켜 당의 괴뢰였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때 웅진도독부는 백제 유민들을 포섭해 對신라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문무대왕은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화의를 요청하는 유화전술을 구사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백제 故土 강점작전에 들어갔다.

7월, 신라군은 唐軍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거점에 대한 일제 공세에 나섰다. 3개 방면에서 전개된 이 전격작전에서 신라군은 82개의 大小 성곽을 점령함으로써 백제 고토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또 그 주민들을 대거 內地(내지: 신라 영토)로 이주시켰다. 병력과 노동력 확보를 위한 徙民(사민)정책이었다.

8월1일, 문무대왕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高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군량미 2000섬과 비단 등을 지원했다. 문무대왕은 고안승이 일본과 교류하는 것도 직·간접으로 지원했다.

문무왕 11년(671)은 백제 고토 강점작전이 마무리되던 해였다. 1월, 신라군은 웅진도독부의 治所(치소)인 공주 남쪽 근교에서 唐軍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幢主(당주: 부대장) 金夫果(김부과)가 전사했다. 이때 신라의 국경을 침범한 말갈군과의 전투에서 적병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6월, 金竹旨(김죽지)는 웅진도독부의 병량공급처인 부여 근교 加林城(가림성: 임천면 성흥산성) 주위 耕地(경지)를 불태웠다. 이때 唐軍과 石城(부여∼논산 사이에 위치함)에서 싸워 적군 5300 명의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2명과 唐의 果毅(과의: 고급장교) 6명을 사로잡았다.

문무대왕은 웅진도독부의 통치지역을 점령해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하고, 그 治所(치소)를 부여에 두고 백제 고토에 대한 통치력을 확산시켰다.

7월26일, 문무대왕은, 西域(서역)에서 한반도 전선으로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薛仁貴(설인귀)로부터 신라의 反唐(반당) 군사활동을 힐책하는 편지를 받았다.

설인귀라면 645년 唐태종의 안시성 공격 때부터 참전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안동도호를 역임한 歷戰(역전)의 인물이었다. 唐의 체제하에서 안동도호라면 唐고종이 문무왕에게 내렸던 계림대도독보다 상위의 관직이다. 도호부는 휘하에 3∼5개의 도독부를 관할했기 때문이다.

 

文武大王에게 보낸 薛仁貴의 협박장

이 장문의 편지는 『행군총관 설인귀는 삼가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본인은 육로 만리와 해로 삼천리를 지나 이 땅에 왔습니다』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西域 戰線(서역 전선)으로부터 한반도 戰線으로 복귀해 왔음을 밝힌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은혜를 저버리고 군비를 강화해 백제의 故土를 강점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이어 그는 당에 대한 신라의 저항능력을 다음과 같이 輕視(경시)했다.

<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며,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태종무열왕)의 말씀을 어기며, 天時(천시)를 업신여기고, 이웃나라와 우호를 깨트리면서, 한 궁벽한 작은 땅(신라)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싸움을 걸면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적장 薛仁貴는 그의 편지를 통해 ‘젊은 과부와 어린 아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거국일치)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당제국과 정면대결도 불사하는 신라국가의 처절한 모습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젊은 과부’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내, ‘어린 아이’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이어 그는 문무왕의 고구려부흥군 지원과 高安勝(고안승)에 대한 고구려왕으로의 책봉에 대해서도 힐책하고 있다.  

<고구려의 安勝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인귀의 樓船(누선: 대형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外援(외원)을 구하며 나에게 대적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설인귀의 편지는 사뭇 위협적이다. 唐의 압도적인 軍勢(군세)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했다.

<고간 장군이 거느린 漢(族)의 騎兵(기병), 이근행이 거느린 藩兵(번병), 吳· 楚(오‧ 초)의 용감한 水軍과 幽州(유주)· 幷州(병주)의 惡少(輩)들이 사방에 운집하여, 兵船(병선)이 열지어 내려가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貴國(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할 수 없는 病痛(병통)이 될 것입니다.> 

설인귀의 편지는 항복을 권유하는 문구로 매듭짓는다.

<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로 원칙으로 돌아가 大唐(대당)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血食(혈식: 나라를 보존함)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계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軍陣(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왕의 휘하에 있는 승려 임윤 편지를 맡겨 몇 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필자는, 문무왕의 反唐 행위를 ‘배신행위’로 규정한 한 일본 학자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설인귀의 편지를 얼핏 보면 羅唐同盟(나당동맹) 균열의 歸責事由(귀책사유)가 마치 신라에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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