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꺾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에게 배울 때다.
文武大王의 삼국통일을 깎아내리는 것은 植民史觀이나 김일성주의에 물든 바보짓이다!
백제·고구려를 獨食(독식)한 唐(당)은 신라까지 병합하려 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문무대왕이 唐의 침략군 장수에게 보낸 「答薛仁貴書․ 답설인귀서」는 왜 신라국가가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의 수퍼파워와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천명한 開戰(개전) 문서이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答薛仁貴書」를 한번 제대로 읽어 보아야 한다.
7세기 東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역사의 격동 속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신라였다. 이것을 추동한 힘은 신라 3金 의 인간적 신뢰를 바탕한 팀 파워였다.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3인의 협력이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야성과 결단의 君主 문무대왕이 통일전쟁과 나당 7년전쟁을 지휘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만약 문무왕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백제․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성 좋은 중국에게 먹혀 한반도에 당3군이 설치될 뻔했다.
프롤로그—왜 문무대왕인가
동해의 대왕암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7세기의 수퍼파워 唐帝國(당제국)을 꺾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文武大王(문무대왕)은 작지만 강한 나라의 역사적 모델을 제시했다. 문무대왕이 增强(증강)시킨 신라 수군은 海路(해로)를 통한 唐의 兵站線(병참선)을 틀어막아 당 지상군의 南下(남하)를 저지했다. 西域(서역)에서 당시 세계 최대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놓고 전개된 吐藩(토번)의 對唐攻勢(대당공세)를 절묘한 타이밍에 활용해 한반도의 戰勢(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때 대왕이 구사한 전략은 1만5000리 떨어진 중국대륙의 東‧ 西端(동‧ 서단)에서 同時(동시)에 唐帝國(당제국)을 끼고 치는 2對 1 전략이었다. 어떠한 강국도 혼자서는 2正面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왜 羅唐(나당) 7년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일까?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제국은 648년의 비밀협정을 어기고 그 故土(고토)를 獨食(독식)했을 뿐만 아니라 대왕을, 평양에 주둔한 당의 安東都護(안동도호)의 節制(절제)를 받는 鷄林州大都督(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당의 예비동작이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당면한 문무대왕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결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남북통일을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때 대왕이 唐의 극동방면군사령관에게 보낸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弱者(약자)인 신라가 왜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 최강과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闡明(천명)한 감동적인 開戰文書(개전문서)였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문무대왕의 이 개전문서를 제대로 읽어보아야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사코 깎아내리는 것은 단언컨대 日帝(일제)의 植民史觀(식민사관) 혹은 수준 미달의 김일성주의에 오염된 바보짓이다.
그렇다면 대왕과의 時空(시공)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서 가능할 것인가? 역시,東海(동해)로 가서 문무대왕의 水中陵(수중릉)부터 답사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마주 보이는 慶州市 陽北面 奉吉里(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 서서 우리 민족의 결정적 순간을 생각했다. 나당 7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왕은 唐-倭(당-왜) 연합에 의한 침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주변국에 화해의 몸짓을 계속 보내면서도 안으로는 침략전쟁에 철저하게 대비했던 문무대왕의 국가안보 전략.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대왕의 수중릉 앞에 서면 그것은 처절하리 만큼 장엄하다. 대왕릉 쪽 동해바다에서 200m 거리의 奉吉里(봉길리) 해안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의 대행렬…. 그것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나라 지키기에 身命(신명)을 걸라는 대왕의 至上命令(지상명령)이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이 되고 싶다”
봉길리 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2km 거리인 感恩寺趾(감은사지)에 들러 한국 최대의 3층 쌍탑을 관찰했다. 문무대왕이 착공하고, 그의 장남인 神文王(신문왕)이 완공한 感恩寺(감은사)는 이제 그 遺構(유구)만 남아있지만, 감은사의 동‧ 서 3층석탑(국보 제112호)은 1300여년의 風雨(풍우)에도 꿋꿋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지금은 품격 높은 신라예술을 대표한다.
감은사에 가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해룡)이 되기를 맹세했던 문무대왕의 나라 사랑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대왕의 化身(화신)인 해룡이 감은사에 드나들 수 있게 바다와 연결된 通路(통로)가 20년 前 감은사 本堂(본당)의 遺構調査(유구조사)에서 확인되었는데, 필자도 그때 그것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현재, 그 유구는 다시 땅속에 파묻혀 있다. 신라 당시엔 감은사 山門(산문: 절의 바깥문)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4번 국도를 타고 경주시내로 들어와 신라의 都城(도성)인 半月城(반월성) 기슭에 자리 잡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입장했다. 박물관의 현관에는 문무대왕의 陵碑(능비)가 전시되어 있다. 파손이 심한 陵碑文(능비문)이지만, 거기서 新羅金氏(신라김씨)가 어디서 경주로 흘러들어와 어떤 과정을 거쳐 신라국왕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문무대왕 陵碑(능비) 곁에는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도 전시되어 있다. 높이 불과 34c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냇돌에는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신라 花郞(화랑)의 의식구조와 수련 내용이 알뜰하게 새겨져 있다. 신라 화랑이야말로 臨戰無退(임전무퇴)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삼국통일과 韓民族(한민족) 형성을 위한 祭壇(제단)에 피를 뿌린 용사들이었다.
<壬申年(임신년) 6월15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忠道(충도)를 몸소 실행하여 과실이 없기를 하늘에 맹세한다. (中略)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출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1년 전 辛未年(신미년)에는 詩(시), 尙書(상서), 禮記(예기), 春秋傳(춘추전)을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군대에 안 간 장관‧ 국회의원이 수두룩한가 하면, 그런 주제에 대통령을 노리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지 못한 사람은 입장료 1000 원인 경주국립박물관에 가서 임신서기석을 한번 우러러 보고 난 후에 그들의 向後(향후) 거취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역사상 最長(최장) 기간의 亂世(난세)를 극복하고 韓民族(한민족)을 성립시킨 결단과 지혜의 인물이라면 바로 문무대왕이다. 문무왕 16년(676), 대왕은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나당전쟁 승리 후에도 大王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다음은 그의 유언 중 한 대목이다.
<兵器(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위의 대목은 문무대왕의 自負心(자부심)의 발로라 해도 좋다.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이라는 廟號(묘호)도 그냥 그렇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대왕은 馬上(마상)에서 세계제국 唐과의 전쟁을 지도해 삼국통일을 완수했기 때문에 ‘武’ 자를, 신라국가의 律令(율령)완성과 船府(선부) 신설 등 각종 제도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자를 받은 것이다.
임진강을 韓民族의 방파제로 활용한 대왕
경주 답사 일정을 끝낸 필자는 밤을 도와 臨津江(임진강)으로 北上(북상)했다. 임진강은 韓民族(한민족)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임진강과 그 유역을 水陸(수륙) 양면의 요새로 활용한 君主(군주)가 문무대왕이었다. 漢江(한강) 하류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다 恭陵川(공릉천)의 河口(하구)에 걸린 松村大橋(송촌대교)를 지나면 자라머리[鰲頭‧ 오두]처럼 생겼다고 鰲頭山(오두산)이라 불리는 군사적 요충이 눈에 들어온다. 나당전쟁 당시엔 泉城(천성)이라고 불린 오두산의 부근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고 해서 예로부터 이곳을 交河(교하)라고 불렀다. 나당 전쟁 중 唐의 함대는 군량과 무기를 싣고 交河 바로 북쪽 임진강 河口(하구)로 진입하려 했다. 임진강 중류의 七重城(칠중성)과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 연안의 買肖城(매소성) 등으로 南下한 唐 지상군과 兵站線(병참선) 연결을 거듭 시도했던 것이다. 나당전쟁 때 칠중성과 매소성은 양군 간 쟁탈의 요충이었다.
그러나 공릉천 河口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는 唐 함대의 임진강 진입을 한사코 틀어막았다. 요즘엔 평화전망대가 세워져 있는 오두산은 군사용어로 말하면 瞰制高地(감제고지)이다. 감제(Command & Domination)란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으로부터의 관측에 의한 통제를 말한다.
오두산성은 392년 10월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攻破(공파)당한 백제의 關彌城(관미성)이었다. 그 터엔 3국 쟁탈전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듯 백제, 고구려, 신라의 토기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현재, 오두산 정상엔 임진강 북쪽의 山河(산하)가 내려다보이는 통일전망대가 들어서 있다. 오늘날 남북 대치의 현장인 임진강이 1300 여년 前에는 나당의 결전장이었다. 필자는 임진강 하구의 伴鷗亭(반구정)과 臨津閣(임진각), 중류의 高浪浦(고랑포), 沙尾川(사미천), 瓠蘆古壘(호로고루), 七重城(칠중성), 국군 필승사단의 태풍OP(Observation Post‧ 관측소), 그리고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南岸의 買肖城(매소성) 등지를 답사했다.
특히, 매소성은 나당전쟁 중 지상군의 決戰場(결전장)이었다. 태풍OP(264고지) 바로 북쪽인 임진강 상류에는 水攻(수공)이 가능한 북한의 황강댐이 축조되어 있어, 장마철만 되면 우리를 잔득 긴장시키고 있다.
675년 9월29일, 신라군은 靺鞨族(말갈족)을 主力으로 했던 당군 20만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그러나 李謹行(이근행)이 지휘한 말갈군단은 설인귀 함대의 泉城(천성) 전투 패배로 軍糧(군량) 등을 보급받지 못해 전면 퇴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이근행 군단은 戰馬(전마) 3만여 필과 많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매소성 전투 직후 이근행의 군단은 한반도를 떠나 토번군과 싸우기 위해 1만3000리 서쪽의 靑海(청해)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이근행은 나당 7년 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인 敵將이다. 왜 전마를 3만여 필이나 버리고 퇴각했을까? 말은 사람의 12배를 먹는다. 말갈족‧ 거란족 등 기마민족 병사는 원정 때 1인당 3필 정도의 戰馬(전마)를 데리고 다닌다. 따라서 군량이 떨어진 이근행 군단에게 말(馬)은 큰 골칫거리였을 터이다. 매소성 전투가 지상전의 결전이라면 해전의 결전은 기벌포 전투였다. 문무왕 16년(676) 11월, 설인귀의 함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 하구로 진입하려다가 伎伐浦(기벌포: 지금은 충남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와 격돌했다.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한 신라 함대는 첫 교전에서는 패배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해전에서 全勝(전승)했다.
필자는 기벌포 해전의 현장인 금강 하구 長項(장항) 앞바다를 답사한 다음 금강 북안을 따라 東進(동진)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백제 패망 후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던 공주, 백제부흥군의 근거지 周留城(주류성: 충남 홍성군 長谷面)과 任存城(임존성: 홍성군 大興面)을 답사했다.
“신라는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우리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676년 기벌포 전투 이후 나당전쟁이 재발하지는 않았지만, 당은 틈만 나면 신라를 다시 공략하려고 시도했다. 예컨대 678년 西域(서역)에서 당‧ 토번의 실크로드 쟁탈전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자, 당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고 했다. 이때 시중 張文瓘(장문관)은 중병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당고종에게 나아가 신라와의 전쟁을 확대시키지 말라고 건의했다. 다음은 <<資治通鑑‧ 자치통감>> 의봉 3년(678) 9월 條의 기사이다.
< 고종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侍中(시중) 장문관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 토번이 侵寇(침구)하니 바야흐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또 東征(동정)을 한다면 그 폐해가 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對신라전을) 중지했다. >
문무대왕은 토번의 서역 공격을 틈 타 수퍼파워 唐을 꺾었다. 위에서 말한 靑海(청해)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제주도 면적 2.5배 크기의 內陸 鹽水湖(내륙 염수호)인 청해호가 있는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을 말한다. 청해호는 太古(태고)의 지각변동에 의해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염수호가 되었다. 나당 7년 전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것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토번‧ 당의 전쟁, 특히 청해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비천이 위치한 청해성의 共和縣(공화현)은 티베트의 라사(拉薩)∼청해성의 省都 시닝(西寧)를 잇는 214번 국가간선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이 도로는 감숙성의 성도 蘭州(난주)를 거쳐 唐제국의 수도였던 長安(장안: 지금의 西安)으로 이어진다. 또 공화현에서는 감숙성의 허리인 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하서주랑)의 요충인 張掖(장액), 그리고 청해성 西部지역인 차이담 盆地(분지)를 거쳐 新疆(신강)의 오아시스路와 연결된다.
2010년 4월9일, 필자 일행 5명은 西寧(서녕‧ 시닝)공항에 착륙했다. 청해성의 省都(성도)인 서녕은 원래 백제부흥군 출신 장수 黑齒常之(흑치상지)가 건설한 군사도시다. 湟水(황수)라는 강을 따라 형성된 서녕은 시가지도 누렇고, 하늘도 누렇고, 산도 누렇고, 강물도 누렇다. 거리엔 이곳의 옛 주인인 티베트族과 흰 사각모자를 쓴 위구르族이 눈에 많이 띄였다.
나‧ 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大非川 전투.
나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靑海湖(청해호) 남쪽에서 당‧ 토번 간에 전개된 670년 8월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였다. 대비천은 安東都護(안동도호: 극동방면군 총사령관)였던 설인귀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1만3000여 리를 이동, 청해호 남쪽에서 토번군과 싸워 전멸당한 현장인 것이다. 설인귀는 대번에 斬首(참수)를 당할 만한 패장이었지만, 그가 일찍이 홍수의 위기에서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생명을 구한 공이 있었다. 더욱이 설인귀와 同鄕(동향: 山西省)인 측천무후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계속 기용된 것으로 보인다.
669년, 신라 문무왕은 설인귀 군단이 평양을 떠나 靑海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던 듯하다. 670년 4월, 신라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신라에 망명했던 고구려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가 각각 병력 1만 명씩 모두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해 鳳凰城(지역)으로 진출, 말갈군을 공격해 대승했다. 이것이 나당 7년 전쟁의 緖戰(서전)이었다.
2010년 4월10일, 필자 일행은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을 답사했다. 중국인에게는 치욕의 현장이었던 대비천은 이제 沙珠玉河(사주옥하)라는 예쁜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다. 우리 일행은 청해호 연안의 서남단 黑馬河(흑마하)를 거쳐 상피산(4451m)을 넘어 靑海南山(청해남산)의 남쪽 기슭에 펼쳐진 대비천 전투 현장을 둘러보고 자정 무렵에야 서녕 호텔로 되돌아왔다.
신라김씨의 原籍(원적)을 찾는 답사
청해성까지 깊숙히 들어간 우리 일행이 당‧ 토번 전쟁 중 쟁탈의 요지였던 甘肅省(감숙성)의 실크로드 구간인 河西走廊(하서주랑)과 문무대왕의 능비문에서 그의 先祖(선조)라고 밝힌 金日磾(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를 답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4월11일 오전 9시, 필자 일행은 지프를 타고 서녕을 출발, 청해성과 감숙성의 경계지대인 峨堡鎭(아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길가의 식당 모두가 영업을 하지 않았다. 폭설이 휘날려 모두 문을 닫았던 것이다. 폭설로 視界(시계)가 매우 불량한 가운데 겁도 없이 해발 4000m의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넘어 張掖(장액)에 도착했다. 장액의 唐代(당대) 이름은 甘州(감주)다. 장액과 223km 상거한 酒泉(주천)의 唐代 명칭이 肅州(숙주), 두 곳의 머리글자를 따서 甘肅省(감숙성)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4월22일은 폭설이 내린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쾌청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프를 타고 장액에서 酒泉을 거쳐 明代(명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嘉峪關(가욕관)을 향해 河西走廊(하서주랑)을 신나게 달렸다. 왼편에는 눈부시게 하얀 눈을 봉우리에 이고 있는 기련산맥, 오른쪽으로는 바딘지린(巴丹吉林) 사막이 펼쳐져 있다. 구름은 기련산맥의 허리에 걸려 있었는데, 하서주랑은 그곳보다 高度(고도)가 오히려 높다. 말을 타고 이 하서주랑을 달리면 雲上人(운상인), 바로 ‘구름 위의 사람’이 된다. 신라 화랑들이 왜 雲上人을 그렇게 憧憬(동경)했는지,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문무대왕의 능비문의 기록이 맞다면, 그 선조의 原籍(원적)은 감숙성인 것이다.
慶州(경주) 대릉원의 天馬冢(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障泥: 국보 제207호)에도 구름 위를 달리는 天馬를 그려놓았다. 말다래는 말이 달릴 때 진흙이 말의 허벅지와 배에 튀는 것을 막는 馬具(마구)로서 천마총의 말다래는 북방의 한랭한 삼림지대에 自生(자생)하는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천마총의 주인은 우리 역사인물들 중 陽物(양물)이 가장 컸다는 智證麻立干(지증마립간)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는 지증마립간의 陰莖(음경)의 길이가 1척5촌이라고 전하고, 그가 반려자(왕비)를 찾는 스토리를 인간 냄새 물씬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1척은 약 20cm, 1척5촌이라면 30cm인 것이다.
麻立干(마립간)은 17대 奈勿王(내물왕: 재위356∼402))으로부터 21대 智證王 4년(503)까지 사용된 신라의 王號(왕호)이다. 大陵園(대릉원)은 마립간 시대의 왕, 왕비, 왕족 무덤이다. 그래서 천마총에 가면 우리 古代史(고대사)의 暗號(암호)가 풀린다. 경주 대릉원의 무덤은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은 스키타이族, 匈奴族(흉노족) 등 기마민족의 무덤양식이다. 스키타이族이라면 기원전 6세기∼기원전 3세기 黑海(흑해) 연안에서 번영했던 유목기마민족의 元祖(원조)이다. 흉노족은 기원전 3세기∼5세기 몽골 및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활동한 유목기마민족으로서 전성기에는 아시아대륙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감숙성의 서쪽 끝인 敦煌(돈황)은 동서교류의 보물창고인 莫古窟(막고굴)로 유명하지만, 필자가 2004년 타클라마칸 사막의 天山南路(천산남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路 구간)를 답사할 때 이미 들렀던 곳이어서 가욕관에서 오던 길로 뒤돌아서 河西走廊(하서주랑)을 東進(동진)하기로 했다. 가욕관 동쪽 21km에 酒泉(주천)이 있다. 주천은 스무 살의 소년장수 藿去病(곽거병)이 BC 121년 여름 흉노족을 쳐부수고 나서 이곳 호수가에서 戰勝(전승) 파티를 했다. 이때 곽거병이 가진 슬이라고는 漢武帝(한무제)로부터 하사받은 단 한 병뿐이었는데, 그것을 물이 솟아오르는 구멍에 부은 다음, 술+물을 섞은 ‘칵테일’한 잔씩을 병사들과 나눠 마셨다고 해서 이후 이곳이 酒泉(주천)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주천에서 장액까지는 223km. 장액에서 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까지는 212km. 필자 일행은 그 중도의 山丹(산단)에서 기련산맥 기슭 쪽으로 진입해 50여km 정도 길을 헤맨 끝에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가 곽거병에게 사로잡히고, 그의 아버지 休屠王(휴저왕)이 피살된 焉支山(언지산)을 찾아갔다.
언지산은 흉노의 24 王將(왕장) 중 1人인 渾邪王(혼야왕)의 근거지였다. 혼야왕과 휴저왕은 漢軍(한군)에게 거듭 패전해 흉노의 大선우인 伊稚斯(이치사)가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소환명령을 내리자 목이 달아날 것을 겁내, 가만히 漢武帝(한무제)에게 急使(급사)를 날려 항복을 청했다.
한무제는 BC 121년 늦가을, 혼야왕과 휴저왕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곽거병을 급파했다. 곽거병의 기마군단이 언지산으로 시시각각 접근해오자, 휴저왕은 최종단계에서 항복을 망설였다. 이에 혼야왕은 휴저왕을 살해하고 그의 무리를 빼앗았다.
언지산에 들이닥친 곽거병의 기마군단은 그때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는 흉노병 8000 명을 참살하고, 귀순자 4만여 명을 데리고 長安(장안)으로 개선했다. 귀순자 4만 명 중에는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와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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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수중릉(水中陵)
문무왕과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에 가면 가능할 것인가? 역시 奉吉里(봉길리: 경주시 陽北面) 앞바다에 위치한 그의 수중릉(水中陵)부터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곳을 그의 뼈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라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좋다. 어떻든 그곳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大王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뇌했던 민족사 최고 영웅과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인간들 사이에 血脈(혈맥)의 마디마디를 이어주는 민족 정체성(正體性)의 현장이기도 하다.
필자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陽北面 奉吉里) 해변에서 동해 바다와 마주섰다. 포효하는 파도의 물결이 계속 밀려왔다 포말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진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는 자연 바위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1996년의 답사 때만 해도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뱃삯을 지불하고 모터보트를 타면 주변 해역을 한 바퀴 빙 돈 뒤에 대왕암에 下船(하선)할 수 있었다.
대왕암은 멀리서 보면 바위섬이지만, 막상 그곳에 올라가 보면 바닷물이 드나드는 작은 못의 둘레에 자연 암석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못의 바닥에는 길이 3m 가량의 편평한 돌이 얹혀 있다. 사방이 열십자(十) 형으로 트인 좁은 수로(水路), 그 동쪽 수로를 통해 흘러들어온 동해의 바닷물이 서쪽 수로의 턱을 슬쩍 넘어서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그날, 대왕암 바깥에서는 파도가 제법 거세게 쳤지만, 대왕암 안쪽의 바닷물은 의외로 잔잔했다.
혹시, 못 속의 편평한 바위 밑에 유골함을 안치했던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나 않을까? 필자는 바닷물 속에 얼굴을 파묻고 바위 밑바닥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그런 것이 들어갈 만한 人工(인공) 구조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문무왕은 나당전쟁에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우리 민족사의 대영웅이다. 그렇다면 그의 후계자는 왜 대왕의 능을 번듯하게 지어 모시지 않고, 하필이면 동해구(東海口)의 바위 속에다 장사를 지냈던 것일까? 역사의 기록(三國史記)에 따르면 수중릉에 문무왕의 유골을 모신 것은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문무왕의 유언은 참으로 산뜻하다.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吳王: 孫權·손권)의 北山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주(魏主: 曹操·조조)의 西陵(서릉)은 동작(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에 만기(萬機)를 총람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사서(史書)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혼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문무왕은 합리적이고 겸허했다. 그는 매머드급(級) 무덤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노역으로 모는 것이 후세의 비판거리이며, 무덤 주인공인 자신을 위해서도 부질없는 일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實用主義(실용주의) 노선이 아니었다면, 삼국통일의 완수는 불가능했고, 지금 한민족(韓民族)은 중국의 50여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사 최대의 역사발전
삼국통일은 한국사 최대의 역사 발전이었다. 우선, 사람의 해골로 산야가 뒤덮혔던 300년의 난세를 치세(治世)로 바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켰다. 삼국통일로 坐食者(좌식자), 즉 놀고 먹던 사람이 최소한 30% 이상 격감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 다르면 고구려에는 좌식자의 수가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좌식자는 거의 전문전사(專門戰士)들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 영토는 백제+ 신라보다 5배 넓었지만, 당시의 첨단산업인 쌀 생산량은 한반도 남부지역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후세(조선왕조 영조 시기)의 지리지인《擇里志》(택리지) 등을 참고한 필자의 추정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으로, 간소한 장례를 거듭 당부했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 아니다. 숨을 거두면 바깥 뜰 창고 앞(庫門外庭)에서 나의 시신을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輕重)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문무왕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지시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君主(군주)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그 유골이 동해바다의 자연바위 안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서도 당-왜 연합을 경계한 문무대왕
《三國遺事‧ 삼국유사》에 인용된 감은사사중기(感恩寺寺中記)에 의하면 문무대왕은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왕암 건너편 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별세했고, 죽어서는 동해의 해룡(海龍)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제국 당과의 7년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그런 그가 사후(死後)에 호국룡(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럴 만큼 신라에게 왜국은 겁나는 존재였을까?
이 점에 대해선 뒤에서 상술(詳述)할 것이지만, 당시의 수퍼파워 唐과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였고, 문무왕의 임종 시점(681년)까지 나·당 간의 긴장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배후의 일본이 엄청 겁나는 존재였다. 비록 당군이 압록강 以北의 요동(676년)→무순 지역으로 철수하기는 했지만, 당시 급변하던 西域(서역)의 정세에 따라서는 언제든 한반도에 대한 再침략의 가능성이 있었다.
전쟁 재개의 결정권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가 아니라 아직도 東아시아 최강국인 당이 보유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당과 일본이 제휴한다면 신라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병력상의 절대 우위에다 공성전(攻城戰)에 능숙한 당군, 기마전에 숙달된 말갈군·거란군, 그리고 배후에서 침략군의 병참 지원이 가능한 일본군이 연합한다면 신라는 단 몇 달도 견뎌낼 수 없었을 터였다.
나당전쟁 전후(前後)의 신라-왜국 관계를 추적하면 문무대왕은 당-왜 동맹을 깨기 위해 혼신의 외교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왜국에 친선의 메시지를 계속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당-왜 연합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가전략―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마주 대하면 그것은 사무칠 만큼 장엄하다. 그는 피맺히게 고뇌했던 인간이었다.
한국 역사상 그처럼 파란만장한 亂世(난세)를 극복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의 유언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과 마주했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원근(遠近)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遺訓)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베풀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676년 11월, 문무왕은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이후 5년간 그는 당의 재침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이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天壽)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문무왕은 재위 21년 만인 681년 7월1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훨씬 후세인 조선왕조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만큼 문무왕이 단명(短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시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데 一身(일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한 탓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政事)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古今)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감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東宮)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잊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내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문무왕)이라는 시호(諡號)는 그냥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상(馬上)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고, 세계제국 당과의 7년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武 ’라는 글자를, 신라국가의 각종 제도 개혁 및 민생 개선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이란 字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유언은 다음 구절로 끝을 맺는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州(주)·郡(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오, 법령과 격식(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어서 알릴 것이며, 원근에 선포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태자는 왕이 되어 이를 시행하라! >
봉길리 바로 북쪽 감포(甘浦) 해안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利見臺(이견대)로 올라갔다. 이견대에서 동해 바람을 맞받으면 오장육부가 시원해진다. 이곳은 문무왕의 화신인 해룡을 앞바다에서 보았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82년 5월, 신문왕(神文王)은 이곳에서 해룡으로 화한 선친(先親) 문무대왕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피리는, 그것을 불기만 하면 천하가 화평해진다 하여, 신라 국보로 삼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려고 간절히 서원(誓願)했던 인물이다.
감은사의 쌍탑은 오후 3시쯤에 더욱 빛난다
이견대를 출발해 서쪽 1.5km 거리의 감은사지(感恩寺址)에 일부러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이 시각이면 감은사지의 쌍탑이 햇볕을 정면으로 받아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삼국통일을 이룩해 낸 신라인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감은사 터의 동·서 3층 석탑은 우리 국보 제112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감은사는 신문왕(神文王)이 부왕(父王)인 문무대왕의 뜻을 이어 완공했던 절이다. 처음, 이곳에 절을 세우려 했던 창건주는 문무대왕이었다.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고 정했다. 그러나 대왕은 절이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
생전에 문무대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래서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해룡으로 환생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구조를 했다. 1996년, 필자는 보수공사 중인 감은사 금당(金堂) 바닥 아래에 높이 1m의 석조(石造) 통로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감은사의 山門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춰보면 그 의미가 심장하다. 과연, 석조 통로로 해룡이 드나들었지는 신심(信心) 차원의 문제인 만큼 필자로서는 거론할 영역이 아니다. 감은사는 황룡사·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이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에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신라 석탑 중에서 비교적 초기 형태지만, 조형미는 최고 수준이다. 높이는 각각 13.4m이며,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1959년 서쪽 3층 석탑이 해체 복원되면서 왕이 타는 수레 모습의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一堂雙塔)의 가람으로서 남북 회랑(回廊)의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조된 점과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 지은 행랑)을 둔 점이 특이하다. 동·서탑의 중앙부 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金堂) 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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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기획했던 政略결혼과 김법민의 탄생
그렇다면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문무대왕 金法敏(김법민)은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해서 578년 왕위에서 쫓겨난 眞智王(진지왕)의 손자 金春秋(김춘추)다. 어머니는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왕 仇衡(구형)의 손자인 金舒玄(김서현)의 막내딸이자 金庾信(김유신)의 누이인 文姬(문희)이다. 다음은 <<삼국사기>> 문무왕 즉위연도(661)에 실린 그의 출생과 관련한 유명한 스토리이다.
<언니(宝姬․ 보희)의 꿈에 西元山(서원산) 정상에 앉아 오줌을 누니 그 오줌이 국내에 가득 찼었다. 깨고 나서 아우(文姬․ 문희)에게 꿈 얘기를 하니 아우는 농담으로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고 하고,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庾信(유신)은 春秋公(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 집이 다행히 근처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달자” 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술상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 꿰매게 하였다.
그의 맏누이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그 아우(문희)가 나와 옷고름을 다는데, 그녀의 수수한 단장과 가벼운 옷맵시는 사람을 환히 비추었다. 춘추가 기뻐하면서 이내 청혼하여 대례를 갖추었는데, 곧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가 바로 법민이다.>
위의 <<삼국사기>>의 인용문에서 김춘추와 김문희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의문 해소는 신라 당시의 기록인 金大問의 <<花郞世紀‧ 화랑세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김춘추의 조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하여 재위 3년만에 폐위된 신라 제25대 임금인 眞智王(진지왕)이다. 김춘추의 生父(생부)는 진지왕의 장남으로 早死(조사)한 이찬(관등 제2위) 金龍樹(김용수)이고, 養父(양부)는 용수의 동생인 龍春(용춘)이다.
김문희는 신라에 패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임금인 仇衡(구형)의 증손녀이다. 문희의 조부는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군) 전투에서 백제 聖王(성왕)을 전사시킨 新州(신주)의 軍主(군주)였던 金武力(김무력)이다. 김무력의 아들이 蘇判(소판: 관등 제3위) 김서현이다. 김서현은 신라 왕족인 萬明(만명)과 눈이 맞아 변경(지금의 충북 진천군)으로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했었다. 만명은 肅訖宗(숙흘종: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갈문왕)의 딸이다. 葛文王(갈문왕)은 왕의 동생 등에게 붙여준 존호였다.
아무튼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는 폐위당한 임금의 손자, 어머니 김문희는 신라에 패망당한 금관가야 구형王의 후예였다. 김법민의 父系(부계)나 母系(모계)가 그러했던 만큼 김춘추-김법민 父子의 등극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필사본 「花郞世紀(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15世 風月主(풍월주), 김춘추는 18世 풍월주다. 풍월주는 요즘 육군사관학교의 「대표화랑」쯤에 해당하지만, 그들에 대한 신라사회의 기대와 聲望(성망)은 대단했다.
김춘추-김문희 정략결혼의 기획자는 망국의 후예로서 신분상승의 비원(悲願)을 품은 가야김씨 庾信(유신)이었다. 그는 8세 연하(年下)의 신라김씨 춘추(春秋)를 유인해 그의 여동생 문희와 婚外情事(혼외정사)의 분위기를 만들었음은 앞에서 썼다. 유신의 첫째 여동생 寶姬(보희)는 달거리 중이어서, 바느질을 사양했다. 이때 둘째 여동생 文姬가 앞으로 나아가 춘추를 모시고 바느질을 하게 되었다. 유신은 일부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지나 문희의 배가 불러왔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당시 춘추에게는 이미 寶羅(보라)라는 미색(美色)의 정실부인이 있었다. 보라는 「프리섹스의 化身」이었던 美室(미실)의 손녀였다. 美室은 일찍이 제5世 풍월주 金斯多含(김사다함)의 연인이었고, 그가 전사한 후에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雲雨(운우)의 情을 나누면서, 화랑 조직을 움직인 배후의 실력자였다.
더욱이 김춘추와 보라 사이에는 이미 古陀炤(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 춘추는 보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감히 文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김유신은 결혼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한 최후의 이벤트를 감행했다. 김유신은 그의 집 뜰에 땔감을 잔득 쌓아 놓고 “처녀가 애를 뱄다”고 외고 펴면서 짐짓 文姬를 불사르려고 했다. 이때 김춘추는 선덕공주(善德公主)를 따라 남산에서 노닐고 있었다. 선덕공주가 연기 나는 곳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좌우 신하들이 자초지종을 고해 바쳤다. 선덕공주가 김춘추에게 말했다.
『당신이 상관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소!』
김춘추는 곧장 南山에서 내려와 문희를 구하고, 혼례 올릴 것을 사당에 고했다. 그 얼마 뒤 보라宮主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문희는 뒤를 이어서 정실부인이 되었다. 이처럼 김법민은 철저한 정략결혼의 산물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대왕의 妃는 慈儀王后(자의왕후)인데, 파친찬 金善品(김선품)의 장녀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품은 신라 화랑의 대표인 풍월주(21世) 출신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용모가 매우 잘 생겼고, 언행이 지극히 아름다웠으며, 문장을 좋아하고, 仙道(선도)와 佛道(불도)에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上等(상등) 골품의 인물이었다.>
그는 선덕여왕 10년(641)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당나라에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 36세의 나이로 早死(조사)했다. 태종무열왕이 마음 아파하고 아찬(관등 제6위)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의 딸 자의가 문무대왕의 왕후가 되자 파진찬(관등 제4위)으로 추증되었다. 선품공의 차녀는 體元(체원: 20世 풍월주 역임)에게 시집가서 아들 吳起(28世 풍월주)를 낳았고, 그의 3녀 夜明(야명)은 문무대왕을 섬겨 宮主(궁주: 왕의 소실)가 되었다.
金法敏(김법민)은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나이 27세에 아버지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즉위로 인해 갑자기 왕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자란 태자나 왕자는 미식(美食)과 미색(美色)으로 흐믈흐믈해지게 마련이다. 운동 부족에 의해 야성(野性)을 지니기도 어렵다. 세계제국 唐나라와 싸워야 했던 결단과 투쟁의 시기에 野性(야성)을 지닌 문무대왕이 재위(在位)했다는 것이야말로 신라의 축복이며,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법민은 본디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 그는 23세의 약관에 역사의 전면(前面)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4년(650) 6월 조에는 『왕은 비단에 五言詩(오언시)인 太平頌(태평송)을 써서, 이를 春秋(춘추)의 아들 法敏(법민)으로 하여금 唐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송은 겉보기에 아부의 극치이다.
<위대한 大唐 王業을 열었으니/ 드높은 황제의 앞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五星이 만방에 도는구나/……/ 三皇과 五帝의 덕이 하나가 되어 大唐을 밝게 비추리로다.>
650년이라면 唐고종 즉위 다음 해인 永徽(영휘) 원년이다. 그렇다면 태평송에 대한 唐고종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는 『高宗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大府卿(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