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탄생
<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제국은 70년에 가까운 끊임 없는 정복전쟁의 결과,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하고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전쟁은 초기의 약탈적·파괴적인 성격이 점차로 희석되어 갔고 농경지대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몽골 지배층의 이해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들은 점차 定住 문명의 후원자로 변신하기 시작했고 역사상 전례 엾는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文物이 교류하고 융합하는 場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대여행의 시대’가 가능하게 되었고, 使臣, 종교인, 商人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남북을 종횡으로 누볐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이제까지 無知와 說話의 영역으로만 남아있던 대륙의 가장 먼 지역에 관해서도 소상한 정보를 갖게 해주었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가지 소통의 부족으로 인한 공간의 한계와 시간의 장벽을 비로소 뛰어넘게 되었고, 이것은 세계가 비로소 하나의 실체로 온전하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사의 탄생’이라 불러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김호동 저,《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시아-유럽의 지도를 거꾸로 돌려놓고 북쪽에서 남쪽을 내려다본다. 한반도나 중국쪽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는 농경민족의 시각은 잠시 접어두고, 북방 유목민족의 視角에서 보자는 것이다. 왼쪽 끝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만주-몽골-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카스피海-터키(또는 카스피해-헝가리)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평원. 넘을 수 없는 산맥도 바다도 없는 이 북방 草原은 활처럼 원호를 이루고 있다. 중국·인도·이란 같은 농경국가는 이 원호의 품속에 들어온다. 왼손을 초원의 극동(極東)인 한반도, 오른손을 극서(極西)인 터키에 놓으면 남쪽의 농경 문명권은 유목민족의 사정권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 草原의 주인이었던 유목·기마 민족의 시각에 입각하면 농경사회는 먹음직하기는 하지만 경멸할 만한 後進사회였다.
양떼를 거느리며 말을 타고 광활한 초원을 내닫는 주체적 삶과 땅의 붙박이가 되어 하늘의 造化에 운명을 맡긴 채 매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농경사회의 종속적 삶. 유목민족 문화권에선 중국의 專制왕조 같은 압제가 불가능했다. 그런 전제 군주가 나타나면 말 타고 떠나버리면 되는 것이다. 유목민족 국가는 농경 전제국가보다는 항상 내부적으로는 보다 자유로웠고 대외적(對外的)으로는 개방적·관용적이었다. 다만 전투에 있어서는 철저하고 무자비했다. 항복하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포용했고 저항하면 몰살. 그것은 초원의 법이요 윤리였다. 전쟁·군사 문제는 엄정하게, 통치는 너그럽게―이것이 '야만적'인 유목민족이 세계적인 대제국을 잇따라 건설하여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기마군단은 帝國 제조창
농경민족에 대한 그들의 우월성은 말과 활에서 나왔다. 草原과 말의 결합이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말을 달리면 수 개월만에 도착한다. 민족과 군대의 이동이 지구상에서 가장 신속할 수 있는 몽골 벨트(몽골-중국 북부-중앙아시아-中東(또는 유럽))에선 수많은 왕조·제국·민족·종교가 명멸한 역동적(力動的)인 역사가 펼쳐졌다. 말을 맨 처음 전쟁에 사용한 것도 유라시아 草原의 전사(戰士)들이었다. 인간의 체력에 동물의 체력이 보태지면서 기마군단의 파괴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그 기마군단의 전술 발전 곡선이 피크에 도달한 곳에 징기스칸이 있었다. 몽골-투르크系 유목민족은 '군사=경제' 조직이었다. 평화시에는 유목으로 생활하고 戰時에는 기마군단으로 변했다. 평시에는 목동의 말, 戰時엔 戰士의 말이 된다. 전투병력과 보급부대의 구별이 따로 없었고, 부족 전체가 기마군대의 뒤를 따랐기 때문에, 전·후방의 차이도 별로 없었다. 평시·전시, 군·민간, 전투부대와 보급부대, 전투원과 가족이 뒤섞이면서 한 덩어리가 된 데서 엄청난 기동력·동원력, 그리고 효율성이 생겨났다.
이런 조직과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유목민족은 '움직이는 국가'였다. 그 국가는 군대 속의 국가였다. 騎馬군단이 대제국의 모태였지 국가가 서고 군대가 조직된 게 아니었다. 몽골系에 속했던 투르크族은, 몽골고원을 떠나 서진(西進)하면서 서돌궐(西突厥), 호레즘, 셀주크 터키, 티무르 제국(중앙아시아), 무갈제국(인도), 맘루크王朝(이집트), 오스만 터키 등 세계적 제국을 잇따라 역사 속에 세웠고, 동쪽에 남은 몽골系는 북위(北魏), 위구르, 5胡16國, 遼, 징기스칸 세계제국, 元, 淸제국을 건설하였다.
유목민족국가의 역사를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이런 유동성 때문이다. 유동하고 이동하는 것은 민족뿐이 아니었다. 국가도 왕조도 종교도 이념도 그리고 인종 그 자체도 변했다. 투르크(영어로는 터키)라는 표기법의 원천이 된 돌궐(突厥)제국(서기 6∼7세기)의 투르크 민족은 우리 같은 몽골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선주(先住)정착 이란系 백인종과 혼혈하여 지금은 몽골의 얼굴과 반점까지도 잃어버리고 회교화되었으며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번 취재로 몽골인의 심장까지 버린 것은 아님을 확인했지만….
세계사의 理와 氣
유라시아 草原의 영원한 패자(覇者)였던 몽골-투르크系 유목민족이 건설한 대제국은 세계사의 3大 파워 그룹을 형성했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프랑스-독일-영국-미국系 문화, 중국의 한족(漢族)문화, 그리고 흉노-북위(北魏)-東돌궐-위구르-요(遼)-金-몽골제국-元-淸으로 이어지는 東몽골系 제국 및 西돌궐-호레즘-티무르제국-셀주크 터키-오스만 터키-무갈 제국으로 연속되는 西몽골系(투르크族)의 草原제국.
1996년 초 워싱턴 포스트紙가 징기스칸을 세계사의 1등 인물로 꼽은 것은 동서양을 관통하면서 건설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화를 섞고 교류시킴으로써 세계사를 한 단위로 만들고 그 뒤의 흐름을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몽골族은 세계사의 창조적 파괴자로 존재했고, 농경사회를 항상 긴장시켜 발전하도록 도왔다(문명의 발전은 도전에서 나오므로). 그리스-로마와 중화(中華)문화가 세계사의 이(理)라면 몽골은 기(氣)였다.
한반도의 中華化
남쪽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는 지도 읽기에 익숙해진 한국인은 중화적 세계관인 주자학(朱子學)의 가치관과 서구 역사 학자들의 시각에 세뇌되어 북방 초원을 중국 역사의 부속물 정도로밖에 보지 않는 착각 속에 살아왔다. 중국이나 西歐는 유목민족의 피해를 많이 본 쪽이고 그들의 역사관은 피해자의 역사관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몽골 지역에서 이동해온 北方 기마민족의 후예이면서도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몽골인의 눈이 아닌 피해자의 시각에서 보아왔다는 얘기다. 많은 고분 발굴품은 통일신라 때까지 우리의 조상들은 기마민족의 야성을 유지하면서 다이내믹한 삶을 살고 있었음을 가르쳐준다. 신라에 의한 3국통일의 원동력도 유목-기마문화의 특징인 야성·개방·관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통일신라 이후 본격화된 유교사상과 중국 제도의 유입은 한국 민족의 의식과 제도를 중국화시켜갔다. 그 과정에서 몽골的 전통, 즉 한국인의 원초적 기질과 단절되었다. 그것은 북방초원 문화가 갖고 있는 두 가지 특성―야성과 개방성의 상실을 의미했다. 1000년 이상 계속된 中華化 과정의 끝은, 自力에 의한 근대화의 실패와 식민지化였다. 해방 후 한국의 발전은 탈중화(脫中華)·탈주자학(脫朱子學)의 의미와 함께 해양 문화에의 편입이란 의미를 지닌다. 해양文化도 야성과 개방을 속성으로 하고 있어 바다의 유목文化라 할 만하다. 中華化에 의하여 야성과 개방성을 상실한 韓民族이 해양화에 의하여 민족의 원형과 본능과 저력을 되찾았다는 것이 세계가 경악하는 한민족의 에너지 대폭발의 본질인 것이다.
1. 신강·위구르 자치구역-馬上에서
북경공항의 위구르族
1996년 5월23일 오전 11시에 김포공항을 떠난 아시아나 항공 보잉 767機는 서해를 가로질러 두 시간 뒤 북경공항에 도착했다. 우루무치行(조노목제(鳥魯木齊)로 표기) 카운터 앞은 혼잡스러웠다. 하얀 빵모자를 쓴 위구르 사람들이 이삿짐으로 오인할 만큼 많은 보따리와 가방들을 쌓아놓고 짐 붙이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이란 사람을 닮았지만 체구는 한국인 정도였다. 우리가 보기엔 서양인 같고, 서양인이 보면 동양인 같다고 할 것이다. 동양과 서양이 정확하게 50%씩 피를 섞은 종족이란 느낌을 주었다.
위구르 사람들은 중국 기록에는 흉노(匈奴)의 먼 후예로 기록돼 있다. 원래 突厥[돌궐·Turk의 어원(語源). 지금 터키 민족의 선조뻘이 되는 종족으로서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서기 6세기에 유라시아 북방 草原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의 통치하에 있던 한 부족이었다. 세계 최대의 담수호(湖) 바이칼로 들어가는 몽골의 세렌가江 상류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종족은 돌궐 제국이 쇠퇴하자 만리장성 이북(漢北)지역을 통일하여 7세기부터는 유목민족 국가로서 등장한다[회흘국(回紇國)].
서기 8세기 중엽 당(唐)의 현종(玄宗)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인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있을 때 안록산(安祿山)(그는 이란 혹은 투르크系 인물로 알려져 있다)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長安(지금의 西安)의 인접도시로서 물산(物産)의 집하지인 낙양(洛陽)을 점령했다. 唐은 위구르 군대를 지원받아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위구르 군대가 당나라의 심장부 도시들을 약탈하면서 돌아다녔고, 唐은 공주를 위구르의 왕에게 시집보내고 막대한 금품을 주는 방식으로써 그들을 달래야 했다.
유목민의 변종
위구르人들은 몽골고원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天山산맥을 넘어 지금의 신강성 남쪽 타림 분지로 이동했다. 이곳을 지배하던 티벳족을 내쫓고 선주(先主) 백인종과 혼혈하기 시작했다. 지금 신강지역(당시 중국기록에서는 서역西域)에서는 現 우즈베키스탄 쪽에서 넘어온 소그드人(백인종)이 '비단길'을 개척, 무역을 하고 있었다. 유목민인 위구르人은 상업人인 소그드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정착민으로 변해갔다. 이란系인 소그드人들의 마니교와 소그드 文字를 배웠다. 영농기술도 배웠고 유목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세웠다. 위구르人들은 위구르제국이 서기 840년에 또 다른 투르크계 부족(키르기스)의 침입에 의해 망한 뒤에도 몽골고원으로 철수하지 않고 지금 신강지역에 남아 유목민족의 전통을 버렸다.
위구르 족은 신강의 오아시스에 토착하여 살고 있던 백인종의 농경민족과 결혼을 통해 동화돼 가면서 그 모습은 脫몽고인化(위구르) 됐던 것이다. 투르크族도 몽골을 근거로 突厥제국을 세웠을 때는 우리와 비슷한 몽골인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唐에 쫓겨 서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이란, 아랍인들과 혼혈하여 서양사람을 더 닮은 지금의 터키 사람들이 되었다. 무역과 전쟁을 통해서 민족이 끊임없이 뒤섞이는 中央아시아는 오랜 민족을 녹이고 새로운 민족을 빚어내는 용광로이기도 한 것이다.
우루무치, 세계에서 가장 깊은 내륙(內陸)
오후 3시에 북경공항을 이륙한 신강민항(新疆民航)(XINJIANG CIVIL AVIATION)의 여객기는 소련제였다. 거의 보잉 747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만원이었다. 여객기는 3시간 30분만에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하였다. 왼쪽 창밖으로는 눈덮인 天山산맥이 장엄한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었고, 산자락이 부채살처럼 드리워지는 곳에는 나무 한 포기 없는 회색의 산맥과 드문 드문 초록색의 목초지, 그리고 눈 녹은 물을 담은 호수와 댐이 내려다 보였다.
우루무치는 '아름다운 초원']이란 뜻의 몽골語이다. 해발 900m에 리잡은 이 도시는 신강-위구르 자치성의 수도로서 인구는 약 150만 명이다. 우루무치는 세계기록을 하나 갖고 있다.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도시(2250km). 이 도시 근방의 투르판은 年中 299일이 맑은 날이고, 여름엔 섭씨 78도를 기록하는 등 혹서·혹한·건조한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天山산맥은 신강성을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는데 우루무치는 그 북쪽 기슭 밑에 자리잡고 있다.
신강성의 넓이는 160만㎢. 중국의 약 6분의 1, 한반도의 약 8배, 프랑스의 약 3배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다. 알래스카와 비슷한 면적이다. 인구는 1600만, 47개 종족으로 구성된 인종종합 전시장이다. 최대종족은 위구르族으로서 720만, 다음이 漢族으로서 570만 명쯤 된다. 아직도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투르크系 카자흐族이 110만 명, 回族이 68만 명, 만주족도 1만8000 명이 살고 있다. 이 만주족은 여진족이 중국을 정복하던 300년 전에 이곳으로 파견된 군대의 후손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기 위해서 우루무치 공항에 나타난 24세의 젊은이는 고언군(高彦軍)이라는 이름을 가진 回族 출신이었다. 중국신강서역국제여행사(中國新疆西域國際旅行社)(중국제일류여행사(中國第一類旅行社))란 명함을 내민 그는 '回族의 선조들은 원래 이란쪽에 살았는데 唐나라에 대한 지원군으로서 이 지역에 들어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부족명으로 돌아갈 回자를 쓴 것은 귀향에의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강성 부근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온 지역이다. 중국에선 西域, 유럽 사람들은 '투르크族의 땅'이란 뜻으로 중앙아시아를 투르키스탄(신강성은 東투르키스탄에 속한다)이라고 했다. 장안(長安)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비단길)가 天山산맥 북쪽을 지나가는 것을 천산북로(天山北路), 남쪽으로 지나는 길은 남로(南路)라고 불렀다. 우리가 발을 디딘 우루무치는 天山北路쪽이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신강지역을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간 수많은 민족 중에서 주연(主演)급에 속하는 종족은 漢, 몽골(흉노, 돌궐=투르크, 위구르, 징기스칸軍), 그리고 이란-아랍系 종족이다.
고선지(高仙芝)의 탈라스江 결전(決戰)
서쪽의 이슬람·기독교 문화, 북쪽의 몽골 초원 유목문화, 동쪽의 漢族 유교문화, 남쪽의 불교문화가 세계사의 십자로인 중앙아시아에서 부딪쳐 만들어진 파란의 역사 속에는 우리의 귀에 익은 사람들도 등장한다. 신라와 손잡고 백제(百濟)를 멸망시켰던 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그 전에 이미 당 고종시절이던 서기 656년 신강성(서역) 지역을 지배하던 서돌궐(西突厥)에 대한 원정군을 지휘하여 이곳을 唐에 복속시킨 뒤, 다시 西進하여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지역까지 진출했던 장군이었다. 이것은 唐뿐 아니라 漢族이 만든 제국으로서는 가장 멀리 서쪽으로 진출한 경우였다.
唐 현종은 서기 750년 고구려 출신의 용장 高仙芝에게 사라센제국 군대의 서역 침입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高仙芝는 고구려가 망한 후 아버지(사계舍鷄))를 따라 당에 들어가 武人으로 출세, 지금의 인도 북쪽·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티벳·파밀고원 지대를 원정했었다. 룩 콴텐(벨기에人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의 명저(名著) '유목민족제국사'에는 高仙芝가 750년에 타슈켄트를 점령, 약탈하자 지금 우즈베키스탄 지역의 도시국가들이 압바시드 칼리프國에 원조를 요청했다고 쓰고 있다. 신흥 이슬람교(敎)로 무장된 이 아랍人 국가는 對唐연합군을 조직했다. 티벳軍뿐 아니라 突厥(투르크)의 카르룩族도 가담, 지금의 카자흐스탄에 있는 탈라스江 유역에서 高仙芝의 唐軍과 결전했다. 唐軍은 대패했다.
이 탈라스江의 대회전은 唐의 영향력이 天山산맥에서 끝나고 지금의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주변)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中國문화의 서쪽 한계를 그은 전투였다. 그 뒤 중앙아시아와 신강지역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敎, 정치적으로는 투르크族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 이 신강지역이 확실하게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은 1884년 청조(淸朝) 때였다. (이슬람)반란군을 쳐부수고 새로 얻은 땅이란 의미로 이때부터 西域 대신 신강(新疆)이라 부르게 되었다. 탈라스江 결전의 또 다른 세계사적 의미는 아랍군대에 포로가 된 唐나라 기술자들에 의해 종이 만드는 기술이 서양으로 전해졌다는 점이다. 高仙芝 장군은 安祿山의 난(亂) 때 한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했다.
天山산맥의 天池
5월 24일 오전 8시30분에 우루무치市內 홀리데이 인 호텔을 출발한 우리 일행 4명(回族출신 안내자 高彦軍씨 포함)은 도요타 밴(VAN) 편으로 天池로 향했다. 세 시간의 드라이브는 天山산맥의 기슭에 발달한 草地를 지나가는 것이었다. 길 양쪽의 키 큰 포플러 가로수 때문에 한국의 시골 국도를 달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성냥갑처럼 납작하고 길죽한 집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낙타와 양떼가 도로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재빨리 횡단한다. 4차선 국도에 중앙선도 횡단로도 없어 우리 운전사는 10초에 한번 꼴로 경적을 누르면서 달렸다. 말을 탄 카자흐人들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떼와 낙타떼를 몰고 가는 카우보이 같은 카자흐人, 그냥 혼자서 자가용 몰듯이 말을 타고 유장하게 길을 가는 이도 보였다.
세 시간 만에 天池에 도착했다. 한계령 같은 산복 도로를 지나 해발 2천m 지점에 다다랐다. 우루무치 동북쪽 약 1백㎞, 짙은 코발트色의 天池가 협곡 사이로 드러나 있었다. 대략 4×2㎞ 크기였다. 그 북쪽 끝은 깎아지른 天山산맥으로서 V자 모양의 협곡이었다. 건조한 바람이 상쾌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저 끝엔 천산산맥 제2의 고봉(高峰)인 보고다峰(5천4백45m)이 만년설을 이고 있었다. 히말라야의 눈덮인 연봉(連峰)과 비슷했지만 보다 친숙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좀더 근사한 조망(眺望)을 위해 말을 빌어 타고 산을 올랐다. 말은 조랑말처럼 작았지만 가파른 비탈을 등산하듯이 아주 요령 있게 올라갔다. [신강부강시천지여유접대참(新疆阜康市天池旅遊接待站) 함력극( 力克)]이란 명함을 보여준 24세의 카자흐人 젊은이가 다른 말을 타고 기자의 말을 앞에서 인도하면서 올라갔다. [할리크]( 力克)는 입만 열지 않으면 그대로 한국 사람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한 얼굴이었다.
馬上에서
말을 타 보니 비로소 북방 草原의 몽골인 유목민들에게 동물이 가졌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馬上에 앉아 이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우월감, 정복욕, 진취성을 북돋운다. 걸을 때보다 약 50㎝ 정도 높아진 시야이지만 세상을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자세를 달리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은 정치적 군사적 동물이요, 소는 경제적 동물이다. 소를 몰아 농사 짓는 사람들은 대체로 馬上의 인간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농경민족 對 유목 기마민족, 평민 對 기사로 구분시켜주는 핵심적 상징물이 말과 소였다. 유라시아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말을 다룰 줄 알게 된 기원전 10세기부터 그 남쪽에 사는 중국 및 中東의 농경 민족들은 편할 날이 없게 되었다. 그 뒤 아시아 역사 3천년은 북방 초원의 기마민족과 남쪽의 농경민족 사이의 힘 겨루기로 전개되었다. 그 불연속 접촉선이 남북으로 오르내리는 사이에서 전쟁과 무역과 건국·망국이 되풀이되었다.
말이 주는 자신감·진취성
이날 3백m 높이의 산비탈을, 말을 타고 1시간30분만에 왕복했다. 걸었다면 4시간은 걸렸을 것이다. 아무리 경사가 심해도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곳은 말이 갈 수 있다. 몽골 기마군단이 저 눈덮인 天山산맥을 넘어 풍요한 오아시스 국가로 [쏟아져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말 때문이겠는데, 말을 타고 산을 넘는 일은 쉽고도 즐거웠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馬上에서 느끼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실천으로 나타날 때는 기동력이다. 말의 타력(他力)을 빌어 빨리, 멀리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기마민족과 이동에 대해선 공포감을 가진 농경민족의 차이!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수 천년 전 고향인 몽골고원을 지나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하고 그 일부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까지 갈 수 있었던 진취성과 자신감도 말에서 나왔을 것이다.
왼쪽으로는 파란 天池가 내려다보이고 오른쪽 저 멀리로는 운산(雲山)이 거대한 병풍을 이룬 파노라마를 해발 2천5백m의 능선 그리고 馬上에서 조감하면서 우리 민족이 야성을 잃은 것은 지도층이 기마민족의 전통을 버리고 말에서 내려버린 데 중요한 계기가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라(新羅) 고분의 발굴 현장에 가보면 피장자의 신분이 높을수록 마구(馬具)가 화려하고 다양하다. 천마총(天馬 )의 천마도(天馬圖)는 말의 배를 보호하는 가리개에 그려진 그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이 보여준 그 야성과 생동감 넘치던 삶의 모습은, 삼국시대 때 유교가 들어오고 고려를 거치면서 중국文化의 영향권 안에 편입되더니 조선(朝鮮)이 개국하자마자 주자학(朱子學)을 통치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이를 절대적 가치체계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사라지게 된다.
말에서 내린 민족의 운명
1894년 한국을 여행한 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란 名著를 남긴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이 책에서 서울시내를 말 타고 가는 양반의 모습을 추하게 묘사했다. 양반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끔 두 명의 종은 엉덩이를 양쪽에서 밀고, 세 번째 종은 고삐를 잡고 간다는 것이다. 天池에서 말을 탄 지 30분만에 혼자서 고삐를 잡고 말을 몰면서 갈 수 있었다. 발걸이와 안장을 3각점으로 하여 몸을 안정시키는 요령을 터득하니 馬上이 그렇게 편안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말의 동작과 심리도 전해 왔다.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는 인마(人馬)의 일심동체감(一心同體感)이었다. 삼국시대의 벽화나 고분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던 거칠고도 힘찬 기마 풍습은 어디로 가고 혼자서는 말도 못타는 양반으로 전락했던가. 한국인의 그런 야성 상실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유교, 그 중에서도 朱子學이었다.
주자학은 중국 宋나라의 주자(朱子)가 기존의 유교분파들을 통합하여 세운 巨大한 사상체계이다. 朱子學은 우주·자연·인간·가족·국가를 관통하는 기본원리로서의 理로 우주·인간의 본질과 작동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 체계의 거대함과 정교함에 있어서 마르크스 이론과 비교될 수 있다. 마르크스 이론은 유물론, 朱子學은 유심론에 근거함으로써 출발점은 정반대이지만 만나는 곳은 같다. 그 접점은 절대화이다. 朱子學과 마르크시즘은 각각의 이념을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려 반론이나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독선적 요인을 내장하고 있다. 이런 경향의 사상이 한 시대, 한 국가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지면 사회는 경직되고 인간의 생동성은 고갈되며 결국은 쇠망으로 흐르게 된다.
朱字學은 만물의 본질이자 원리인 理가 인간에게 들어오면 성(性)이 된다고 했다(여기서 성리학(性理學)이란, 朱子學의 별칭이 생겼다). 性, 즉 인간이 태어날 때(生) 가지고 나온 마음(心)은 [본연의 性]이라 하여 절대선으로 보았다. 이 절대선의 바탕을 가진 인간이지만 개인적인 기질과 반응하여 [기질의 성]이라는 여러 가지 심리적 특징을 나타내게 된다. 4단(端)7정(情)으로 불리는 이런 성격의 발현은 惡일 수도 善일 수도 있다.
朱子學은 여기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인간은 수양을 통하면 4단7정이란 안개를 뚫고서 본연의 性이 지닌 절대적에 이를 수 있다. 이 수신(修身)의 방법은 무엇인가. 朱子學은 독서와 명상을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단아하게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한 곳에서 중국의 고전을 읽으며 수기(修己)에 임하는 선비의 정형(定型)이 등장한다. 이 수신·수기의 목적은 인간의 도덕적 완성이다. 근대정신은 인간이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이론뿐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그 타당성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실증(實證)의 원칙을 가르치고 있다.
그 실천은 보통 사회적 행동, 즉 사회생활과 국가 경영의 형태로 나타난다. 상공업, 전쟁 같은 모습이다. 朱子學은 이런 실천의 學에 대한 별다른 대안의 제시가 없다. 독서와 수양을 최고·최선의 방법론으로 강조함으로써 상업·군사활동을, 문인적(文人的)활동에 비해서 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차별로 나타났다. 이 士는 일본에선 무사(武士)를, 조선조에선 선비를 의미했다. 文武 병존이 아니라 武가 文에 예속되었다. 이로써 朱子學이 뿌리를 깊게 내리는 사회일수록 상무(尙武)정신과 기업정신은 목졸림을 당해 국가의 생산력과 효율성이 고갈될 가능성에 처하게 된다. 조선조가 그런 경우이다. 선비 집단, 즉 사림파(士林派)가 정권의 심장부를, 장악한 선조 때부터 조선조 사회는 국가의 활력과 민족의 야성을 버리고 농경사회 특유의 정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지배층이 馬上에서 내리게 된 탓이다.
朱子學에서 해방되었다
한국인은 말과 배를 양수겸장으로 두루 이용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인류학적 위치에 있었다. 기마민족으로서의 전통과 3면이 바다라는 지리적 조건이 그것이다. 주자학은 이 두 가지 가능성도 말살했다. 기마로 표현되는 상무정신, 배로 표현되는 어업·무역·상업·개방·국제화 등 해양 정신을 우리는 잃어버렸다. 朱子學的 질서는 일제의 식민통치, 해방, 분단, 6·25 동란을 통해서 그 물질적 기반을 상실하였다. 비로소 朱子學的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된 한민족은 해양문화권에 편입된 덕도 보면서 잊었던 야성을 되찾아 유라시아 초원을 달리던 기마민족처럼 세계로 뻗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면에서 朱子學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봉건적 질서의 찌꺼기로서 주자학적인 의식(지나친 명분론, 독선, 위선, 文民 우대, 기업·군대 천시, 사대주의, 권력투쟁)은 현대의 선비·양반 계급인 정치인·검찰·기자·지식인 등 士자 계급의 머리 속에 계속 들어 붙어 있다. 이 성향은 상무·기업·실용정신으로 무장한 대다수 한국인의 활력을 죽이는 방향으로 작동될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金泳三 [文民정부]가 명분론을 정치 무기화하고 실(實)의 경험이 없고 허(虛)의 유경험자들을 중용하여, 우리 민족이 모처럼 되찾은 기업·상무정신을 요절내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권력을 장악한 士자 계급이 주자학적인 찌꺼기의 악취를 계속 뿜어내면서 약진하려는 한국을 뒤로 잡아당기는 현상이 강화되면 21세기의 한국은 어둡다.
반대로 기업·군대·공무원·생활인으로 대표되는 실용파가 수에선 한줌 밖에 되지 않는 관념론자들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때 21세기의 한국은 민족의 야성을 더욱 발전·승화시켜 나가면서 통일을, 한국이 세계 강국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으려면 실용파는 한국 사회의 주류(主流)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고 그 자신감을 객관적·보편적 文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논리를 가져야 할 것이다. 기자가 30분만에 말을 부리면서 가파른 산길을 통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안장과 발걸이 덕분이었다. 특히 양쪽 발걸이는 말 탄 사람의 자세를 안정시켜 말을 탄 채로 활을 쏠 수 있게 만든다. 3국시대의 큰 고분을 발굴하면 거의 어김없이 발걸이, 즉 등자( 子)가 출토된다. ㅎ모양의 쇠붙이지만 이것은 세계사 흐름을 바꾼 발견이었다.
군사력은, 이동 속도의 제곱에 비례
기원전 7세기 이란 북부 카스피海 근방에서 강대국을 만든 스키타이 유목민(이들은 백인종이다)이 기마술에다가 등자를 실용화하여 기사(騎射)전술을 발전시켰다. 이 전술이 북방 초원의 몽골族에게 전파되면서 그들은 남쪽 농경민족에 대하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기마병을 기계화사단, 활을 장거리포에 비교한다면 이 두 기능을 결합시킨 유목민은 기갑사단의 파괴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정치력이었다. 농경정착 사회처럼 권력자가 방대한 인력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정치력에서 유목민족은 열세였다. 징기스칸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거대한 군사 집단으로 뭉치지만 그런 지도력이 사라지면 흩어져 버린다. 말이 기병용으로 이용되면 부대 이동의 속도가 달라진다. 농경민족 군대는 전투병력과 보급병으로 나뉘어진다. 이 군대의 전체 평균 이동속도는 가장 느림보인 보급병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전투병이 홀로 적진 속에 들어갔다가 보급선이 차단돼 장기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섬멸된다.
몽골 기마군단은 전투병과 보급병의 구별을 두지 않고 모두 전투병으로 운영되었다. 원정 땐 한 병사가 여러 마리의 말을 몰고 갔다. 이 말은 보급병일 뿐 아니라 잠 잘 때는 그 체온으로 이불·침대가 되어 주었다. 목이 말라 죽기 직전까지 가면 말의 피를 빨았다. 이러니 몽골 기마군단의 진행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되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대의 이동속도이다.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예상할 수 없는 시기에 군대가 나타나면 기습이 되고, 예상할 수 없는 수의 병력이 순간적으로 모일 때 집중이 되는 것이다. 승전의 3大 요인인 집중·기동·기습은 부대이동 속도의 다른 표현이다. 물리학 공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F(힘)=½M(질량)×V2(속도) 즉 군대의 파괴력은 규모(M)에 정비례하지만 이동속도에는 제곱에 비례한다. 이런 전투의 원리를 극대화한 것이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군단이었고, 그로 해서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다.
박물관의 신라지도
天池에서 돌아와 우루무치 시내에 있는 신강자치구 박물관을 찾았다. 당대(唐代)의 세계지도가 붙어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까지 청색으로 표시하여 唐의 영토로 그려놓은 지도였다. 신라만이 독립국임을 뜻하는 백색으로 돼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당군(唐軍)이 큰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그런 표시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지도를 보면 7∼8세기 최전성기의 唐이 복속시키지 못한 東아시아 대륙의 유일한 나라가 신라로 돼 있다. 소정방(蘇定方)은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귀국, 고종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고종이
『왜 내친 김에 신라까지 정복해 버리지 그랬느냐}고 따지자 이렇게 대답했다(三國史記).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나라가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官·軍·民·지도자가 일치단결한 것이 신라의 對唐 自主독립의 비결이었다는 교훈이다. 김유신(金庾信)은 또 唐이 백제 점령 후 신라 정복의 야욕을 드러내자,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가 {우리를 도와준 唐과 차마 어떻게 싸우겠느냐}고 머뭇거릴 때 이렇게 말한다(三國史記).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다리를 밟으면 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는데 어찌 스스로 구하지 않겠습니까}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무사집단 화랑도의 행동철학을 담은 세속5계에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 있다. 이것을 지은 원광(圓光)법사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승려였다. 그런데도 {나는 불교승려이기 이전에 신라인}이라면서 세속5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국적 있는 종교이념은 自主정신의 기반이며, 종교·이념이 朱子學처럼 사대化되면 내분과 외세개입이 발생한다. 우루무치 박물관의 지도를 보면서 기자는 아직도 고구려 정통론에 빠진 金庾信·金春秋 콤비에 의한 삼국통일을, 외세를 업은 통일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북한과 국내 좌파 역사학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름다운 미이라 女人
신강박물관에는 10구의 미이라가 전시돼 있었다. 1970∼80년대에 신강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3천∼4천년 전 미이라였다. 건조한 사막 기후 덕분에 보존돼 있었을 것이다. 1980년 누란(樓蘭)에서 발굴된 신장 1백57㎝(생존 떄 신장 추정)의 여인은 [누란의 미인]으로 불리는데 날씬한 몸매와 작지만 뚜렷한 윤곽의 얼굴이 시체 상태로도 아름다웠다. 갈색 머리에 새 깃털을 장식용으로 꽂은 이 여인의 혈액형은 O형, 생존연대는 약 4천년 전, 인종적으로는 유럽계통의 백인종. 3∼4천년 전 미이라의 대부분은 백인종인데 예외가 하나 있었다. 체모(且末)란 곳에서 발굴된 3천년 전 여자의 미이라는 백인종과 몽고인종의 혼혈로 판정되었다.
신강지역의 원주민은 백인이었는데, 북쪽 초원에서 내려온 몽골인과의 혼혈이 3천년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몽골족은 흉노·돌궐·징기스칸 제국을 통해서, 이란-아랍계통의 세력은 사라센 등 이슬람 제국을 통해서, 한족은 한·당 제국 때 각각 이 문명의 십자로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오늘날 신강지역은 정치적으론 한족, 종교·문화적으로는 위구르·카자흐족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루무치의 시장, 음식점, 모스크(이슬람 교회당), 노래, 냄새 그리고 분위기는 이슬람적이다. 시장에 갔더니 10여 년 전 쿠웨이트의 시장에 갔던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카페트, 칼, 양고기, 독특한 냄새…. 위구르족은 어디에 가도 눈에 뜨이는데 한족, 만주족은 잘 구별이 안된다.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2大 요소는 언어와 종교인 것이다.
3. 西安)-진시황(秦始皇)의 꿈
답답한 농경사회
오전 9시25분 우루무치 공항 이륙. 서안(西安)까지의 비행은 오른쪽으로는 눈덮인 天山산맥, 왼쪽으로는 회색빛 타클라마칸 사막, 그 사이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1시간30분을 달려도 사막 상공이었다. 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 제2의 넓이를 가진 사막이다. 유입수로(流入水路)의 고갈, 또는 변화 탓인지 옛날에는 호수였던 곳이 바닥이 드러난 채 사막이 돼 버린 곳도 보였다. 우루무치에서 西安(漢唐시대엔 長安)까지의 이 거친 땅에 난 길을 '비단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상당한 시인적(詩人的) 감각이다. 비단길의 출발점인 西安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한 시간의 드라이브는, 잠시 신강의 유목·오아시스 文化에 젖었던 우리로서는 농경사회로의 복귀였다.
우루무치와 天山산맥에서 느꼈던 이국적이고 개방적이며 발랄했던 분위기는 정체된 듯 가라앉아 있는 西安 교외의 농경사회 분위기와 대조적이었다. 馬上의 草原 戰士들은 이런 농경사회의 삶을 경멸하고, 다만 약탈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안내인 박용길(朴勇吉)씨(24)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흑룡강성 출신의 조선족 청년이었다. 고향을 떠나 西安의 여행사에 취직한 지 여섯 달이라고 했다. 西安시내로 들어오는 고속화도로 왼쪽으로 산 같은 무덤이 나타났다. 朴씨는 '서안 근방에는 73명의 황제가 묻혀 있는데 무덤은 72기(基)랍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라고 했다.
'당 고종(高宗)과 그의 부인이자 중국 최초·최후의 여자 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합장했기 때문이에요. 저 무덤은 한무제(漢武帝)의 무덤입니다.'
漢武帝와 西域
한무제(漢武帝)는 무서운 황제였다. 前漢 5代 황제인 그는 기원전 157년에 태어나 70세를 살았는데 황제로서 재위(在位)기간이 54년이나 되었다. 이 기간에 흉노를 격파하고 서역(신강)을 개척하여 실크로드를 개통시켰다. 서쪽으로 쫓겨난 흉노는 400년 뒤 홀연히 유럽에 나타나(훈족) 게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이 게르만族의 이동이 西로마제국의 붕괴를 유발하였다. 武帝에 의해 궁형(宮刑)(거세하는 벌)을 당한 사관(史官) 사마천(司馬遷)은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 과거의 인간들 이야기를 미래의 우리를 향해 남긴 위대한 기록 사기(史記)를 썼다.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 업적을 많이 남긴 漢武帝는 위(位)에 오르자마자 전례에 따라 자신의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53년간 매년 국민 납세액의 3분의 1을 무덤 건조 및 부장품(副葬品) 매입에 썼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은 높이 46.5m, 4각형인 밑 부분의 둘레는 약 1㎞이다. 원래는 능묘(陵墓) 주변에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어 고관들을 살게 했는데 그 인구가 27만 명에 이르고, 능을 관리하는 인원은 5000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덤은 나중에 약탈되고 도굴되었다. 이 무덤에서 1㎞쯤 떨어진 곳에 武帝가 총애했던 청년장군 藿去病(곽거병)의 무덤이 있다. 24세에 요절한 藿去病은 무제의 황후(皇后)의 남자 동생으로서 18세에 장군이 되어 북방의 흉노(匈奴)를 격파, 서역으로 통하는 회랑을 안전하게 확보, 무역로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가 죽자 무제는 황제의 무덤을 방불케 하는 큰 무덤을 만들게 했다. 변방에 살고 있던 흉노人들을 소집하여 검은 갑옷을 입게 한 뒤 藿去病의 관을 장안에서 이곳까지 호송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무덤 주위를 지키고 있었던 기괴한 짐승 모습의 석상(石像)들은 무릉(茂陵)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흉노를 짓밟고 있는 말' 등 이들 조각품은 기발하면서도 생동하는 모습으로서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품이다. 팽창하던 漢제국의 힘과 국민들의 야성이 담겨 있다.
大宇의 기마군단식 戰法!
이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박재석(朴在錫) 과장으로부터 大宇의 기업文化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는 몽골 유목민의 전략적 시각에서 朴과장의 설명을 듣고, 분석해 보았는데 재미있는 일치점들이 많았다.
▲기동성이 가장 높은 기업이 大宇라고 한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관료적 제약이 약해 속전속결식으로 행동에 옮겨진다는 것이다. 대리부터 회장까지 專決 범위가 넓어 일은 벌이고 보자는 풍토란다. '뛰면서 생각해야지 생각한 뒤 뛰면 늦다'는 주의(主義)다. 이런 풍토는 大宇가 60∼70년代에 무역회사를 모태로 하여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역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유목민처럼 여기 저기 옮겨다니면서 신속하게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므로 타이밍이 중요하다. 유목 기마민족의 전략이나 大宇의 상술이나 시간과 기동성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일치한다.
▲大宇의 업무방식은 박종환(朴鍾煥)식 축구와 닮은 공격 위주이다. '공만 잡으면 하프라인을 넘는다'는다는 식으로 골키퍼만 남겨두고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는 식이다. 逆攻을 당하면 수비에 구멍이 생겨 혼이 나지만 그래도 공격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大宇사람들은 일상적 업무나 내근을 싫어하는 이들이 유달리 많고, 모험적 기질을 높이 사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기마군단의 戰法과 일치한다. 기마군단은 공격하는 군대이지 성벽 뒤에서 수비하는 군대가 아니다. 전원 공격은 농경사회의 보병중심 군대의 개념에는 없다. 대우는 보급부대와 전투부대, 즉 후방과 일선을 가르는 농경군대 방식이 아니라 조직이 일선 중심으로 되어 있어 생산성과 기동성이 극대화 될 수 있는 조직형태라고 한다.
다국적軍의 장점
▲大宇는 다국적軍과 비슷한 조직이다. 22개 계열사 중 반 정도가 인수, 또는 합병에 의하여 大宇 소속이 되었으므로 기업文化가 다른 다양한 조직이 되었다. 이런 다양성이 위화감이 되어 1980년대에는 노사분규로 시끄러웠다. 1990년대에 들어 조용해진 것은 여러 기업 문화가 하나의 질서 속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워 이질감이 아닌 다양성으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우중(金宇中) 회장은 8人의 회장을 중심으로 하여 업무를 맡겨, 일종의 연방제처럼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학연, 지연별 파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유목민족은 전투(기업의 인수·합병에 해당)는 잔인하게 하지만 종교적 차별과 탄압은 하지 않았다. 북방 초원에서 다양한 민족과 싸우고 화해·정복·동화되는 과정에서 개방과 관용의 미덕을 배운 것도 그들이었다.
▲金宇中 회장은 1995년에 200일을, 올해는 5월말 현재 넉 달을 해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세계경영'이란 구호를 내걸고 大宇가 본격적으로 해외기지 건설에 착수한 지 4년, 현재 고용인원은 국내가 10만, 해외가 10만 명, 2년 내로 매출액도 국내와 해외 부문이 대등해질 것이라고 한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외에 흩어져 있는 현지법인을 통합관리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로마, 영국 같은 식민지 宗主국가의 관리방식뿐 아니라 징기스칸 몽골제국의 관리방식도 하나의 시사점을 줄 것이다. 몽골은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군대는 다국적군으로, 식민지 통치는 배후조종식으로 했다고 한다.
다국적군의 장교단과 식민지국가의 지휘부는 몽골족이 차지하고 그 이하의 기층人力은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하여 소수의 인력으로 다수를 통치했다고 한다. 해외 건설현장을 몇 군데 다녀본 기자의 소감은 우리 민족도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처럼 소수의 人力으로 다양한 국적의 다수 인력을 관리하는 장악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군대 경험이 좋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작업 현장을 군대조직처럼 관리, 외국인이 한국어로 '충성!' '안전!'을 외치며 거수 경례를 하도록 훈련시켜 놓고 있었다. 유목文化와 해양文化는 공통점이 많다.
해양국가가 무역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중심세력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만, 징기스칸의 몽골제국도 내부적으로는 칸(황제나 王에 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직접 선출 등 여러 가지로 민주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유목, 해양 문화는 또 무역을 존중·보호했다. 상업이란 것은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인간활동이므로 교조화, 관념화와 같은 경직된 경향성과는 대치된다. 농업위주의 前근대사회에서는 상업이 합리성을 키우는 유일한 기반이 돼 왔었다. 반대로 朱子學이란 관념철학을 종교화한 조선시대에는 士農工商이라 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상업을 가장 경멸스러운 직업으로 놓았다. 근대적 합리성의 씨앗(상업)이 자라지 못했으니 근대화를 내재적(內在的) 사상과 힘으로 해 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 우리는 해양문화권에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유목적=상업적 기질을 회복하여 세계를 草原으로 보고 기업을 말로 삼아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유목민적 기질과 비슷한 기업文化를 가진 大宇가 유라시아 대륙을 800년 전에 먼저 관통했던 징기스칸의 길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5월26일 오전에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80㎞쯤 떨어진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구경했다. 세계 8大 불가사의가 되었다는 병마용은 농경사회에 바탕을 둔 중국식 전제정치의 힘과 잔혹함을 상징한다. 진시황(秦始皇)은 생전에 70만 명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아방궁과 자신의 무덤 여산릉(驪山陵)을 건설했다. 진시황릉의 규모는 높이 115m(지금은 풍화돼 45m로 낮아져 있다), 능의 둘레 2.5㎞, 그 주변에 여러 건물이 숲을 이루었다. 이 부속건물군(群)까지 포함한 능원(陵園)은 한 변이 7.5㎞로서 총면적은 큰 도시와 같은 56㎢였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비탈면은 석류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황량했다. 봉분의 地下에 진시황이 건설한 궁전은 도굴도 발굴도 면한 채 2200년간 잠들어 있다. 청동을 녹여 부어 땅바닥을 굳힌 뒤 수백m 깊이의 지하궁전을 만들고 거기에 진시황이 사후(死後)에도 지하에서 통치할 수 있도록 수많은 시설과 신하들의 조각상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도굴에 대비하여 침입자에게 쏟아 부을 화살과 함정, 수은의 江도 설치돼 있다고 한다. 현존 발굴기술로서는 이 지하궁전을 손댈 수가 없어 후대의 작업감으로 방치하고 있다.
병마용(兵馬俑)
진시황릉 동쪽 1.2㎞에 위치한 병마용(兵馬俑)은 1974년에 한 농민에 의하여 우연히 발굴된 것이다.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1개 사단 규모의 병사·전차·軍馬가 진형(陣型)을 갖추고 무기를 들고 말을 탄 채 실물 크기의 조소상(彫塑像) 모습으로 파묻혀 있었다. 이들은 원래 큰 건물 속에 들어 있었다가 진시황의 死後 내란이 일어났을 때 불에 탔고 방치된 뒤 땅속에 묻혀 버린 것이다. 시커멓게 불에 타고 흙 속에 파묻힌 서까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약 7000 坪의 면적에 3개의 陣(左·右軍과 지휘부)이 있었고 고대의 포진법에 따른 병력의 배치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秦나라 군대의 부활이며, 당시의 병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자료이다.
발굴된 군인들의 얼굴은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다. 그 표정은 한결같이 위풍당당하다. 북방 草原의 흉노 기마민족과 맞서 만리장성을 쌓은 秦始皇의 신임을 받을 만한 힘과 기개를 느끼게 해준다. 실물 크기대로 만들어진 말은 높이 1.54m, 길이 2m인데, 기자가 天山산맥에서 탔던 말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은 황하의 서쪽, 즉 西域지방에서 나는 말이라 하여 하서마(河西馬)라고 했다. 군마용(軍馬用)으로서는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고 사서(史書)에 적혀 있다. 콧구멍이 큰 것은 폐활량이 커 멀리 달릴 수 있다는 증거이다.
제주도 조랑말과 흡사한 이 말은 몽골馬로서 신강, 몽골, 카자흐스탄 지방에서 볼 수 있었다. 속력은 아랍말에 뒤떨어지지만 지구력과 운반능력이 뛰어나 기마군단의 실전용으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西安에서 구한 秦始皇 관련책자는 진시황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법률과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한 것은 역사를 진전시킨 것이며 이에 반대한 수구세력인 유생(儒生)들을 파묻고 책을 불태운 것은 개혁작업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한국 관광객은 교양이 부족'
5월26일 오후 4시30분에 西安을 떠난 중국민항(中國民航) 보잉 767은 1시간40분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1년5개월만에 다시 찾은 북경은 또 달라져 있었다. 도시는 더 높게 올라가고, 더 깨끗해져 있었다. 조선족 출신 중국 국적의 안내인은 경북 안동 출신 집안의 27세 청년이었다. 요녕성에서 북경으로 와서 月11만원짜리 방 한 칸 아파트를 빌어 獨身생활을 하면서 여행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아주 예절이 바르고 얌전하게 보이는 그는 한국인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일본 관광객에 비교해서 가이드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더군요. 가이드가 설명을 잘못한 경우, 일본인들은 끝까지 들은 뒤 조용히 따로 불러 물어보는데, 한국인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중단시키고 창피를 줍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가이드에 대한 손님들의 신뢰가 떨어져 여행이 참 어렵게 됩니다. 한국인들은 사람 차별을 하는 것 같아요.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아요. 저희들을 거지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자는 안내인에게 '물론 그런 한국인도 있겠지만 조선족의 경우에도 얼굴도 같고 말도 같은 한국인에게 同族이라고 너무 기대하고, 때로는 맞먹으려 하여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해주었다. 안내인은 '그래도 자존심이 상해서…'란 말을 계속했다. 하여튼 한국인에게서 이 자존심을 빼면 무엇이 남을지? 이 자존심으로 해서 경제가 발전하고, 이 자존심으로 해서 마음도 상하고, 이 자존심으로 해서 열등감과 자만심이 자라나고….
밤늦게 캠핀스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6∼7세쯤 돼 보이는 눈 먼 소년을 안고 있는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10元짜리(1000원에 해당)를 주었다. 이걸 시작으로 하여 어둠 속에서 거지아이들이 하나씩 나타나 돈을 받아 갔다. 2∼5원씩 주다가 다섯번째 꼬마에게 10원짜리를 주었다. 이걸 본 다른 꼬마는 갑자기 달려오더니 내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나도 10원을 달라'는 뜻으로 엉겨 붙었다. 길을 건너는 데 엉엉 소리 내 울면서 따라 왔다.
'사람은 가난은 견디지만 불공평은 못 견딘다'는 중국 선현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통일기에 우리 민족이 당면할 최대 과제도 결국은 불공평과 자존심이란 말이 될 것이다.
◎ 鄭鍾旭 대사 인터뷰
정종욱(鄭鍾旭) 駐 中國 대사는 '지난 4년간의 한국-중국 협력관계는 '연간 무역 규모 170억 달러, 연간 여행인구 50만(한국→중국이 40여 만, 중국→한국이 약8만), 한국기업의 중국內 투자 20억 달러'의 단계에까지 왔으나 요즈음은 냉각기에 접어든 느낌이다'고 말했다. 鄭대사는 '한국인들도 이제는 중국의 해안지방에서 내륙과 서부지역으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강택민(江澤民) 주석, 이붕(李鵬) 총리를 만나보면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이 21세기에 강대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강대국이 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방의 성장(省長)들도 모두가 기업체 회장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해외투자를 유치, 지방의 소득을 일으키느냐 하는 문제에 열성이 대단해요. 중국 전체가 하나의 巨大한 붐타운입니다. 지금 중국은 21세기를 향해 3大 국책사업을 추진중입니다. 양자강의 상류를 막는 삼협댐 건설, 북경-구룡반도 철도건설, 남수북인(南水北引), 즉 양자강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오는 일종의 대운하(大運河)공사가 그것인데 이런 프로젝트에 한국기업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참여했으면 합니다.'
鄭대사는 또 '50여 개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같은 처지의 미국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했다.
'미국은 바다에 의해 고립돼 있으므로 자국내의 민족분쟁을 자극하는 외부세력이 없으나 중국은 사방이 외국으로 둘러싸여 있어 영토보존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최근의 대만사태가 그런 예이다'라고 했다. 鄭대사는 또 '중국의 인권문제를 자꾸 거론하는데 천안문(天安門) 사건 이후 그들도 노력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 나라의 선결문제는 기본적 생활의 보장이란 점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중 관계가 이렇게 밀접해졌는데도 중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전통적 우방, 한국과의 관계를 협력 관계로 정의 내리고 있음을 눈여겨보면서 대처해야 한다' 고 주의를 주었다.
기자가 북경에서 만난 상사맨과 기업인들은 거의가 '올 때보다 나갈 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상이 나빠진다'고 했다. 한 상사 주재원은 '중국사람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4. 몽골高原-징기스칸 시스팀 연구
5월27일 오후 3시 북경공항을 출발한 몽골항공사(MIAT) 여객기는 사막과 황무지를 3시간 동안 날아간 뒤 시골역 같은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해 주면서 통역을 맡게 될 두 몽골 여성을 만났다. 몽골 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엘덴바트 바예르체체 교수와 駐韓 몽골대사관에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와 서울에서 4년간 생활했다는 S 살룰라양(孃)이었다. '몽고의 하늘이 어디로 갔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초원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아 연기 때문에 맑은 하늘이 흐리게 보인다'는 대답이었다. 연기가 안개와 섞임으로 해서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가까운 러시아 공항에 내린 비행기도 많았다고 한다.
20代인 두 몽골 여성의 한국말은 발음, 어휘선택, 말의 리듬에서 거의 완벽하였다. 일부러 정신을 차려야 한국인이 아니라는 눈치를 챌 정도였다. '한국말은 몽골語와 문법과 어순(語順)이 거의 같기 때문에 단어를 대입만 하면 돼 쉽게, 빨리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뒤 3일 동안 이 두 사람의 통역을 통해서 여러 몽골 관료-학자·유목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외국인과 이야기한다는 긴장감이 풀어지고 의사전달이 쉬웠다. 정보가 공통된 감정의 흐름을 타고 교류될 때 상호이해가 빨라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몽골語, 투르크語, 만주語, 한국語, 日本語는 같은 알타이어군(語群)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 언어를 쓰는 민족들이 한때 인접공간에서 살다가 갈라졌다는 뜻이다. 언어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은 사고방식과 감정, 그리고 그 표현방법이 비슷하다는 얘기이다. 기자가 이번 여행에서 접촉해본 몽골人, 카자흐스탄人, 우즈벡人, 터키人의 민족성은 여러 모로 한국인과 비슷했다.
① 부모와 상사에 대한 존경과 복종심
② 감정적 행동양식
③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것
④ 외래인에 대한 친절
⑤ 솔직성
⑥ 가족중심주의 등이 공통점이리라.
西安에서 만났던 서북대학교(西北大學校) 주위주(周偉洲) 교수(西域史 전문)는 '한민족이 몽골人이라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 중국 漢族과의 혼혈이 더 많았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였었다. 기자는 '우리는 몽골반점이 있지만 漢族들은 그런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었다. 몽골에 와 보니 몽골人과 한국人이 같은 종족이란 것은, 복잡한 논리 이전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본능적 차원의 문제였다. 몽골인과 한국인 사이는 표현의 電流가 통하는데 중국인과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韓民族의 고향은?
이날 밤 두 교수를 인터뷰했다. 몽골 국립사범대학의 세계적인 언어학 교수인 D 투물토구 교수와 역사학 교수인 투물 오치르 남질 교수. 두 교수는 몽골인으로서는 드물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초원에 사는 몽골인들은 푸른 초원과 하늘, 그리고 멀리 보면서 생활하는 덕분에 視力이 4.0까지 나갈 정도이다. 두 교수는 고비사막에서 태어나 학자가 된 뒤에는 벽과 빌딩, 그리고 책만 읽다가 시력이 나빠졌다고 했다.
남질 교수는 '몽골고원에서 퍼져 나간 인종들이 세계를 정복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몽골人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에 넓게 분포돼 있다'면서 '세 번에 걸쳐 몽골族의 대이동이 있었는데, 한반도에 들어간 몽골인들은 두 번째 이동의 파도를 타고 4천년 前까지 대략 이주를 끝낸 것으로 본다'고 했다.
한국인의 선조가 된 부족들은 지금의 바이칼湖 남동쪽에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남질, 투물토구 두 교수는 징기스칸의 대제국 건설은 몽골부족이 갖고 있었던 우수한 사회·군대조직에 의하여 가능했었다는 주장을 폈다. 몽골군 기마군단은 10人을 기본단위로 하여 백인대장, 천인대장(千人隊長), 만인대장(萬人隊長)식의 피라미드型으로 조직되었다.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징기스칸이라 부를 때의 칸(王)이 있었다. 몽골 기마군단이 타민족(또는 부족)을 점령하면 적의 우두머리만 처리한 뒤 정복된 군인들을 똑같은 조직원리로 흡수 통합해 버렸다. 몽골 기마군단은 정복지가 넓어질수록 병력 수에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 눈덩이처럼 구를수록 커지는 몽골 기마군단의 폭발성으로 초원지대에서는 대제국(대군단에 의해 지탱되는)이 홀연히 일어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다국적군을 한 덩어리로 묶는 것은 엄격한 군율과 장교-사병의 차별이 없는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끈끈한 인간관계 및 약탈에 의한 노획물의 공평한 분배였다. 몽골 기마군단이 이동할 때는 그 가족들이 뒤를 따랐다. 이 가족은 보급부대의 역할을 했으므로 따로 그런 부대를 둘 필요가 없었다. 군인들은 항상 가족 속에 있으므로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는 이점(利点)이 있었다. 軍民일체의 이런 조직은 全주민을 全군인으로 쓸 수 있는, 동원력이 극대화된 조직으로 볼 수 있다.
연대책임에 기초한 軍律
징기스칸의 세계제국을 가능하게 한 3大요소는 인간, 말, 초원이란 자연적 조건과 이 조건을 효율적으로 결합시킨 그의 지도력이었으리라. 징기스칸의 일대기(一代記)인 원조비사(元朝秘史)를 읽으면 논어(論語)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낄 때가 있다. 징기스칸이 몽골인들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君主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친구·형제·戰友에 대한 의리, 그리고 정직성이다.
<예 : 밤에 보초를 서다가 잠을 잔 두 명의 기병이 붙잡혀 왔는데 그들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여 처형되었다. 이를 본 한 페르시아人이 자신들이 처형될 것을 알면서도 왜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였는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몽골인 지휘관은 '너희 타지크人들은 그런 경우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몽골人은 천명의 목숨이 달려 있더라도 거짓말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했다>([라츠네프스키 저(著) 징기스칸])
평등과 충성심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한 이후에 '요순' '야싸'라는 법령을 발표했다. 여기서 규정된 군율은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엄격하다. 10인대(隊)에서 4명 이상 달아나면 나머지 6명도 사형, 공격 또는 퇴각시 앞사람이 떨어뜨린 무기·안장을 줍지 않아도 사형, 10인대에서 포로가 생겼을 때 구해내지 못한 생존자는 사형…. 몽골군대 안에서 장교는 사병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 장교로서의 명예와 권한은 지녔으되 특권은 없었다고 한다. 부족내에서의 간통은 사형이지만 다른 부족과의 간통은 묵인되었다.
징기스칸은 또 자신을 지키는 친위대원에 대한 처벌권을 독점하여 다른 장군들이 손대지 못하게 했다. 끈끈한 인간관계와 엄격한 군율이 몽골군의 충성심과 전투력의 기반이었다. 몽골유목사회에는 또 노예나 귀족 신분이 없고 이웃만 존재했다고 한다. 남질 교수는 이런 특성은 유목생활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유목생활의 기초단위는 가족이다. 가족내의 윤리도 중요하지만 이웃 가족과의 상호부조는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모으는데 꼭 필요하다. 남질 교수는 [한국과 몽고의 가정에 대한 연구]라는 책을 쓰고 있다. 그는 가정의 구성, 방의 배치, 가정內 교육법이 매우 닮았다고 했다.
세계제국의 건설이 군사력 하나만으로 될 수는 없다. 징기스칸의 군사력을 뒷받침한 정신력은 몽고인이 가지고 있었던 가정과 부족내의 인화·화목·질서·단결에서 나왔던 것이다. 3일간 몽골에서 몽골사람들과 접촉한 결론은 '이 사람들은 바탕이 착하다'는 것이었다. 고마워해야 할 때 고마워하고, 미안해해야 할 때 미안해하며, 수줍어해야 할 때 수줍어하는, 인간의 기본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려는 사람들 같았다. 행동이 다소 거칠고 덜 세련돼 보일 때도 있지만 인구의 40%가 아직 유목생활을 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 서구식의 에티켓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이런 몽골사람들 때문에 다소 부족하고 불만인 점들이 보여도 덮어주고, 변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것이었다.
'중국은 싫다'
몽골공화국의 넓이는 한반도의 8배다. 신강성과 비슷한 156만㎢. 인구는 220만 명. ㎢당 1.4명 꼴이다. 세계에서 가장 희박하다. 초원의 불을 끌 만한 人力을 모으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약 40%는 목축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산아제한이 아닌 산아 증가 정책을 쓰고 있는데도 1가구당 평균 가족수는 4명이란 점이다. 흉노제국 시절에도 그랬다고 한다. 1호당 4명이 초원의 섭리에 알맞는 단위인 셈이다. 350만 명의 몽골인은 중국의 외몽골 자치구에 살고 있고 50만 명은 러시아에 살고 있다. 남질, 투물토구 두 교수는 러시아보다 중국을 몽골사람들이 더 싫어한다고 했다.
'중국사람들과 제일 많이 싸워 본 몽골人들이 아마도 그들을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두렵지 않지만 그들의 정책은 두렵습니다. 중국인이 싫고 무서운 것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투물토구 교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일본에서 4년간 연구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우리 몽골人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았다'고 했다. 울란바토르에서는 가끔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오인 당해 뭇매를 맞는 수가 있어 택시를 타면 먼저 '나는 솔롱고스 사람이다'고 말한다고 한다.
草原을 달리다
유럽 아시아 대륙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유라시아 草原은 만주에서 헝가리까지 연속적으로 뻗어있다. 장애물이 거의 없다. 이 초원의 북쪽은 시베리아의 동토(凍土)가, 남쪽은 다양한 地形(강, 산맥, 밀림)과 文化가 장벽이 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라시아 草原은 같은 지형, 같은 생활방식(유목), 거기서 생긴 비슷한 문화로 해서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동질적인 文化를 유지해 왔다. 그런 동질성을 가능하게 했던 매개체가 말(馬)이었다. 5월28일 오후 우리는 지프를 타고 울란바토르를 빠져나와 북동쪽, 즉 징기스칸이 태어난 고향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초원은 완만한 곡선이다. 산과 강물, 자작나무와 양·소·말, 그리고 말을 타고 가축을 모는 소년들….
초원의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풍경과 흡사했다. 동행한 두 몽골 여성에게 물어보았더니 한국의 자연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몽골에서 느끼는 것과 매우 비슷하더라고 했다. 異國에 온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몽골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고향 몽골을 연상시키는 어떤 느낌을 발견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반도에서 터키까지 몽골系 인종이 살고 있는 자연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기질에 맞는 땅을 선택하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
말을 탔다. 초원에서 말을 타는 느낌은 天山산맥에서 타던 것과는 또 달랐다. 달리고 싶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안장 위에서 선 기분으로 말을 달려보았다. 초원의 그 부드러운 곡면, 서쪽 끝에서 바예르체체 교수가 말을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혼자서 초원을 질주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름답고 장엄했다.
바예르체체 교수는 '말을 타면 왠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고 지구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몽골족이 북미, 남미, 인도, 시베리아, 한반도, 일본, 헝가리, 중동까지 뻗어나간 것은 초원과 말에서 연유하는 어떤 본능적 역마살(驛馬煞)과 관계가 있으리라. 馬上에 오르면 지구가 좁게 보인다는 이 심리상태가 유목민을 세계사의 매개자, 또는 창조적 파괴자로 만들었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말은 몽골인에게는 제2의 가족이고 인격적으로 대한다. 바예르체체 교수는 '저녁에 말을 타고 돌아오면 말을 휴식하게 한 뒤 급한 일이 아니면 다시 타지는 않습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갑니다'라고 했다.
말에게 근무시간을 보장해 줄 정도란 얘기다. 망아지 시절에 마차용, 승마용, 비육용으로 구별함으로써 탈 말을 끄는 말로 부리는 자존심 상하는 일도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남질 교수는 몽골말의 우수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차세계대전 때 몽골말을 소련군에 제공했습니다. 사료를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초원의 풀을 뜯고 눈을 마시면서 베를린까지 갔습니다. 징기스칸이 사마르칸트쪽으로 원정할 때 20萬 마리의 말을 끌고 갔습니다. 말 두 마리를 옆으로 엮고 그 위에 나무판자를 놓아 무기를 운반하였습니다.'
'별일 없습니까'
말을 타고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는 100∼200㎞이다. 순간 시속 40㎞도 가능하지만 평균속도는 시속 10∼20㎞ 수준이다. 이 말 덕분에 초원에서 인간의 이동은 빨라졌고, 따라서 정보의 이동도 빨랐다. 요사이 말로 하면 초원은 고대에도 정보화 사회였다. 몽골사람들은 초원에서 처음 만나 인사한 다음 두 번째 질문은 반드시 '별일 없습니까'라고 한다. 이 '별일'은 영어로 번역하면 뉴스인데 몽골어의 신문은 '별일'이란 단어를 제호로 사용하고 있다. 투물토구 교수는 '우리는 옛날부터 '新聞 없습니까'라고 인사할 정도로 정보에 민감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징기스칸의 전법에서 신속한 정보수집과 심리전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스파이를 파견하여 몽골軍의 잔학성을 퍼뜨려 공황상태를 유발하기도 했다. 駐 몽골 한국대사 김정순(金正舜)씨는 '미국·일본이 중심이 된 對몽골원조사업단이 구성돼 올해의 경우 2억10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도 40만 달러를 냈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과의 무역액은 3800만 달러로서 한국에서 수출한 것이 약 2000만 달러, 수입이 1500만 달러였다. 보따리 장수에 의한 무역은 통계로 잡히지 않아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울란바토르 시내에서는 스텔라 택시를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신라택시라는 한국회사가 가져온 50대(120대 목표)에 속한다. 지입제로 하여 사납금을 하루 20달러씩 거두고 있는데 잘 걷히지 않는다고 한다. 삼일무역이란 회사에선 지방버스 노선에 쓸 버스 5대를 가져올 계획이란다. 모세, 시온사라는 2개 봉제 회사도 가동중이다. 金대사가 마련한 현지교민 및 대사관 직원 회식자리에 초대돼 갔더니, 몽골 사람들에 대한 친근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몽골사람들은 밤에 바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자도 끄떡없을 정도로 자연과의 친화력이 강하고 비가 오면 옷을 돌돌 말아 꼭 끼고 앉아서 몸으로 옷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7월에 열리는 '나담'이란 축제에 와서 말달리기 대회를 보아야 몽골기마군단의 위용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천 마리의 말이 뛰는데 초원에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과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는 정말 가슴을 뛰게 합니다.'
문화부차관 인터뷰 : '박정희를 배운다'
몽골 공화국의 다그바돌진 체렌돌 문화부차관은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는 40代로서 그의 말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어떤 열정이 느껴졌다. 한국에는 네 차례 왔었다고 한다.
'지난 겨울에 제주도에 가 보았는데 몽골과 한국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때 1만 명의 몽골병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주도 조랑말은 영락없는 몽골말이더군요. 돌하루방도 우리 나라에 있는 것하고 똑같고, 무엇보다도 우리 두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가치판단의 감각이 같은 것 같아요.'
차관은 '한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 아래에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발전해간 경험은 우리에게 커다란 자극과 용기를 준다'고 했다. 그는 朴正熙의 발전전략을 길게 설명하면서 '정책에 관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정희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특히 경제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개발을 해간 과정과 朴正熙가 교육에 관심을 가진 점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그는 도지사 다음 자리에 교육감을 앉힐 정도로 교육자를 존경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박정희의 지도에 의해 한국인들은 오늘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서울에 가서 본 한국인들은 부지런하고 가만있지를 못하며, 자기 일에는 성실하고 주인의식이 강하니 나라가 발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자가 '나는 박정희의 전기를 쓰고 있다'고 말하면서 '박정희의 가장 중요한 결정은 수입대체 정책이 아니라 수출입국 정책을 채택하여 처음부터 세계시장에 팔 수 있는 우수한 상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고 했다. 차관은 '그러니 지금 한국에선 외국상품이 잘 안팔리고 한국제만 팔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국내시장만 겨냥하여 적당히 만들지 않고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다가 보면 제품의 질이 높아지고 이제는 국내 시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죠'라고 라고 말했다. 오는 7월11∼13일 울란바토르에서는 몽골제국 건국 790주년 행사가 여러 가지 축제·경기와 함께 대규모로 열린다. 차관은 '이런 행사가 열리게 된 것은 지난 10년간 노력한 결과이다'라고 했다. 몽골이 淸의 지배下로 들어가면서부터 징기스칸에 대한 기념행사는 금지되었다. 1921년 소련 영향下에서 공산국가로 독립한 몽골에서도 징기스칸을 거론하는 것은 민족주의자로 몰리는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징기스칸 기념일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 당 간부는 反혁명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다는 것이다. 1990년 몽골의 자유화 이후 비로소 몽골은 징기스칸을 복권시킬 수 있었다.
1992년에 [元朝秘史] 발간 750주년 행사가 치러졌고, 올해엔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건국 790주년 행사조직위원회를 구성,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朴正熙는 징기스칸의 후손?
차관은 '징기스칸은 전설상의 영웅이 아니라 실재했던 영웅이며 아직도 그 영향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역사를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 그 형식을 달리하여 되풀이되고 있는 점을 찾아내 교훈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고 했다.
기자가 덧붙였다.
'박정희와 징기스칸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 민족이 가진 특성과 잠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여 큰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한 점에 있어서는 몽골인 출신의 두 지도자는 비슷하고 두 사람을 비교연구하면 새로운 것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차관은 '우스개로 받아주십시오'라면서 말했다.
'1206넌 징기스칸이 몽골제국의 창건을 선언한 직후 주변 국가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고려에서는 징기스칸 제국을 승인한다는 뜻을 담아 공주를 보냈습니다. [흘랑]이라는 이 여인이 징기스칸의 네 왕비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그 자손인지 누가 압니까.'
지난해 몽골을 찾은 한국인은 약 6000 명. 그 중 1000 명은 공식 방문, 나머지는 주로 관광객들이었다. 이 숫자는 몽골과 고려가 가까웠을 때의 年교류 인원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몽골에선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투물토구 교수는 [무지개가 뜨는 동쪽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솔롱고스
몽골국립대학 역사학과 과장 후켄바타르 교수는 '[솔롱고스]란 말의 뿌리를 찾아올라 가면 [새벽의 밝은 빛], 즉 朝鮮이란 말뜻과 만나게 된다'면서 흥미 있는 주장을 했다.
'고구려와 동쪽 몽골 지역은 접경하고 있었습니다. 몽골족과 고구려 사람들이 서로 결혼을 하여 [미르키트 송골로스] 부족이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종족은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영토 안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쪽으로 원정을 갈 때 동원돼 볼가江 남쪽의 초원에 정착했습니다.'
후켄바타르 교수는 '몽골과 한국의 관계는 서기 13∼15세기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끊어졌다가 1990년 이후 다시 연결되니 참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최근 두 나라 관계가 정상화 된 이후 역사적으로 두 나라의 교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졌으므로 새로운 발견이 많이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그도 '인종적으로 몽골과 가장 가까운 종족은 거란·여진도 아닌 한국인이라고 본다'고 했다. 전날 밤에 만났던 투물토구 교수는 '한글을 만들 때 몽골문자 드루찐의 모양을 참고로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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