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개성공단 추진 비화

서석천 2016. 2. 19. 08:05



박근혜 대통령 개성공단 철수...2013년 5월의 경우는?

처음부터 北의 위협으로 시작됐다!

⊙ 개성공단 빌미로 협박 반복해 온 北의 행태
⊙ ‌랄프 코사 美전략국제연구소 태평양포럼 대표, “개성공단은 대화통로가 아닌 원조통로”
⊙ ‌안찬일(安燦一) 박사, “개성공단 대응, 박근혜 정부가 김정은 정권 이겼다”
        

어쩐지 낯설지 않다. 짐도 제대로 못챙기고 개성공단을 떠나는 개성공단 내 한국인 직원들의 황망함한 모습이 눈에 익다. 3년 전이었던 2013년 5월과 똑같은 상황이다. 인공위성 발사가 개성공단에 미친 영향을 두고 각계의 북한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개성공단 완전 철수를 제의했다. 아래는 당시 개성공단의 존재 이유와 앞으로의 정책 방향을 분석한 기사다.

2013년 4월 26일 도라산 전망대에서 본 개성공단. 고요 속에 잠겨 있다.
  개성공단은 남북 화합의 끈을 쥔 옥동자(玉童子)인가, 북한이 남한사회에 내려보낸 트로이의 목마인가. 개성공단 조업 중단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개성공단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보수 진영 안에서도 온도차가 감지된다.
 
  박근혜(朴槿惠) 정부는 지난 5월 3일 개성공단 잔류 인원 전원 철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좌파 진영은 물론 보수 진영 일각에서도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4월 30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기싸움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이 대표적인 예다. 비판의 논의를 살펴보자.
 
  배명복(裵明福)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칼럼에서 “개성공단은 포기할 수 없는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이라며 잔류 인원 철수 결정을 “기싸움에서 밀릴 수 없다는 오기의 산물”이라 표현했다. 정부의 대응을 순진한 발상으로 폄훼하기도 했다. 해당 부분이다.
 
  “박 대통령의 속내를 잘 모르겠다. 이 기회에 북한의 기를 꺾어 길들이기를 하겠다는 것인지, 일단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인지 판단이 잘 안 선다. 몰아붙여서 북한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중략)…천안함과 연평도 사태 속에서도 개성공단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공사를 중단하진 않는다. 개성공단의 문을 닫는 것은 사고 좀 났다고 고속도로 공사를 중단하는 꼴이다. 우리가 먼저 기싸움을 그만둬야 한다. 손은 강자가 먼저 내미는 법이다.”
 
 
  兩非論 펼치는 일부 보수 인사들
 
유호열 한국정치학회 회장은 “개성공단을 이런 식으로 끌고 가느니, 이쯤에서 털고 가는 게 맞다”고 했다.
  정리하자면 개성공단은 남북 교류의 중요한 통로이니 포기하면 안 되고, 이번 사태에서 북한도 잘못했지만 남한도 잘못했으니 남한이 먼저 북한에 손을 내밀자는 말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식의 양비론(兩非論)적 접근이 개성공단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호열(柳浩烈)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봐야 한다. 개성공단 사태의 책임은 100퍼센트 북한에 있다”고 했다. 과연 개성공단 사태를 촉발한 쪽은 남한일까, 북한일까. 개성공단 사태의 일지를 살펴보자.
 
  지난해 12월 12일 북한은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발사했다. 북한은 은하 3호가 인공위성 운반용이라고 주장했지만, 북한 외부에서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체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국제사회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올해 1월 23일 대북제재 2078호를 결의했다. 그 직후 북한은 외무성 명의로 한반도 비핵화 논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성명의 일부다.
 
  “우리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해진 조건에서 세계의 비핵화가 실현되기 전에는 조선반도 비핵화도 불가능하다는 최종 결론을 내리었다.…(중략)…미국의 가증되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으로 말미암아 자주권 존중과 평등의 원칙에 기초한 6자회담 9·19공동성명은 사멸되고 조선반도 비핵화는 종말을 고하였다. 앞으로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 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는 있어도 조선반도 비핵화를 논의하는 대화는 없을 것이다.”
 
  말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북한은 성명 발표 20일 후인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했다. 3월 5일에는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했다. 판문점대표부 활동도 전면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국제사회를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국제사회는 더 강력한 조치로 대응했다. 3월 8일 UN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대북제재 2094호가 그것이다. 2094호는 북한의 자금줄을 차단하고, 북한에 의심스러운 화물이 오가는 걸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행 강도도 높였다. 이전까지는 회원들에게 ‘권고’하는 수준이었지만, ‘의무사항’으로 바꿨다.
 
  같은 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남북 불가침 합의 전면 폐기’를 선언했다.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이미 북한 리스크에 익숙한 한국사회는 북한이 기대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한미 키리졸브 연합 훈련을 빌미로 연일 비난 성명을 내던 북한은 며칠 간격으로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했다. 개성공단 입출경(入出境) 채널로 쓰던 군 통신선을 단절하더니, 통행을 제한하고, 급기야는 북한 근로자들을 전원 철수시켰다. 키리졸브 훈련은 갑자기 올해 처음 한 훈련이 아니다. 5년 전부터 매년 봄이면 해오던 정기 훈련이다. 결국 5월 3일 남한 측 인원이 전원 개성공단에서 귀환했다.
 
  로켓 발사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살펴보면, 개성공단 사태의 책임은 처음부터 북한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한국 정부는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를 선언한 북한에 대화 제의를 하기도 하는 등 사태를 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개성공단 대응, 南이 北 이겼다”
 
2000년 6월 15일 북한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남북 대표단 오찬에서 참석자들이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있다. 당시 발표된 6·15선언의 결과로 개성공단은 탄생했다.
  그렇다면 배명복 위원이 지적한 대로, 개성공단 근로자 철수 결정은 느닷없고 황당한 것일까? 유 교수는 “우리 국민의 신변 보장 문제를 두고 북한의 선의를 기대하면 안 된다”고 했다. 유 교수의 설명이다.
 
  “개성공단은 북쪽 지역에 있습니다. 개성공단 남측 근로자의 신변 안전 문제, 재산상의 문제를 우리 정부가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한 것이죠. 군 당국에서는 인질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인질 구출 작전까지 언급했고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북한이 개성공단의 기물을 몰수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요. 개성공단은 그만큼 위험부담이 높은 사업입니다.”
 
  조영기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우리 측 근로자들이 거기 남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했다. 조 교수의 말이다.
 
  “북한이 개성공단 사태 직전에 내놓은 일련의 조치들을 보세요.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데 우리 국민을 개성에 내어놓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입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북한이 남한의 새 정부를 길들이려다 실패했다”고 했다.
  근로자를 전원 철수시킴으로써, 북한 정권에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새 정부의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했다는 시각도 있다. 안찬일(安燦一)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의 말이다.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박근혜 정부가 북한 정권에 이겼다고 봐야 합니다. 신뢰 프로세스의 핵심이 ‘기본을 지키는 문제’라는 걸 전달한 것이죠. 북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만만하지 않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이번에 우리 정부가 기선제압을 했다고 봐야지요.”
 
  사실 이번과 똑같은 상황은 과거에도 있었다. 2009년 3월 북한은 한미 연합훈련을 빌미 삼아 3차례 개성공단 통행을 제한했다. 심지어 남한 측 직원을 억류하기도 했다. 북한체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무려 136일 동안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북한은 유씨의 생사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김 장관의 ‘인질’ 언급이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심지어 중국 정부도 ‘북한에 투자할 때는 조심하라’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중국 상무부가 지난 2011년 5월 6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국가별 투자협력 지침서-북한 편’에서 “북한은 특수한 나라로 투자환경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투자에 일정한 위험이 따른다”고 경고했다.
 
  “중국의 일부 기업들은 북한의 사정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위험에 대비하려는 의식도 부족해 맹목적으로 대북 투자를 하고 있다”면서 “특히 북한 측 파트너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국유기업을 포함한 여러 개의 중국기업이 북한에서 계약 위반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자 투자지침서에 이러한 경고를 담았다고 한다.
 
 
  “개성공단은 대화통로 아닌 현금 원조통로”
 
조영기 교수는 “신뢰 프로세스의 조건은 객관성, 합리성,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근본으로 돌아가 보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개성공단은 남북 대화의 채널로 적절한가. 랄프 코사(Ralph Cossa) 미국 전략국제연구소(CSIS, Center for Strategic & International Studies) 태평양포럼 대표는 “개성공단은 대화 창구라기보다는 북한에 현금을 원조하는 통로”라고 했다. 지난 4월 2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의 인터뷰 중 일부다.
 
  “내가 개성에 체류하는 남한 측 근로자라면 당장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다. 이제 비용대비 편익을 분석해야 한다. 개성에 있는 남한 사람이 인질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북한을 계속 지원할 가치가 있는지 재고해야 한다.”
 
  조영기 교수도 “개성공단은 태생적 한계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남북 대화 채널이 되기엔 부적절한 공간”이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의 말이다.
 
  “우리가 처음에 개성공단에 들어갈 때 정경분리 원칙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우리만 정경분리 원칙을 지켰다는 것이죠. 북한은 정경분리 안 했습니다. 북한은 초지일관 비합리적이었는데 우리만 합리적이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개성공단을 남북 대화 채널로 활용한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어요.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이 사업하려고 들어간 거지 남북 대화를 위해 들어간 겁니까? 경제는 경제의 관점에서 봐야지요.”
 
  입주 기업들은 어떤 생각일까. 입주 기업과 교감하며 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IBK경제연구소의 조봉현(曺奉鉉) 팀장은 “개성공단 정상화만 추진할 게 아니라 개성공단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면 하는 게 입주 기업의 생각”이라고 했다. 조 팀장의 설명이다.
 
  “북한은 남북 간 합의사항, 개성공업지구법 등 자기들이 만든 법 자체도 어기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법 자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개성공업지구법을 보면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라는 조항은 있지만 어겼을 경우 어떤 페널티를 물게 되는지 처벌 조항이 없어요. 이참에 법을 바꿔야 합니다. 어겼을 때 어떻게 할 건지를 재정비해야 해요. 장기적으로 보면 개성공단 관련 분쟁이 생기면 국제기구를 통해 중재할 수 있는 장치는 어떨까 싶습니다.”
 
  입주 기업의 피해가 많이 거론되는데, 예상 피해도 입주 기업마다 다르다. 신원 같은 경우는 개성공단 생산량이 총 생산량의 10% 미만이다. 개성공단 사태가 장기화되더라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반면, 개성공단 내 공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업들의 경우는,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조 팀장에 따르면, 123개 기업 중 약 30개 기업은 상대적으로 ‘버틸 힘이 있다’고 한다.
 
 
  北 군부, ‘미사일 1기 팔면 개성공단 1년치 번다’
 
  북한 고위 사정에 정통한 탈북자 A씨는 ‘남한이 북한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A씨의 말이다.
 
  “개성공단이 북한의 ‘달러박스’라는 보도가 남한 언론에서 나왔습니다. 북한으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1년에 9천만 달러 버는 격이니 맞는 측면도 있지요. 그렇지만 북한 내부에도 여러 성격의 집단이 존재합니다. 군부 내부에는 ‘9천만 달러? 그까짓 거 미사일 1기만 팔면 한방에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당이나 다른 집단 중에는 9천만 달러가 꽤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유 교수도 같은 맥락의 지적을 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6·15선언의 옥동자’라고 표현했지요. 이를 예로 들면서 김정일의 약속이니 북한은 개성공단을 지켜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섣부른 생각이지요. 북한 내부에서도 군이나 당은 각자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성공단을 통해 누가 어떤 이익을 보고 있느냐가 변수겠지요. 북한 군부가 아무 수혜도 없는데 개성공단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겠습니까? 우리가 북한을 단순히 한 개의 집단으로 보는 것은 안이한 태도입니다.”
 
 
  “이쯤에서 損切賣하는 게 낫다”
 
2009년 8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방북했다. 이 때 136일 동안 억류되어 있던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가 석방됐다.
  개성공단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안 소장은 “김정은 정권을 바꾸거나 붕괴시킬 생각이라면 개성공단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 북한과 관계 개선을 하면서, 북한이 중국에 경도되는 것을 막을 생각이라면 개성공단 하나 정도는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정부의 전반적인 통일 정책에 따라 개성공단의 앞날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 교수는 “이런 식으로 끌고 가느니, 이쯤에서 손절매하는 게 낫다”고 했다.
 
  “한 달 내지 두 달 정도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기업 입장에서 다시 거기에 들어가 사업을 재개할 인센티브가 있을까요? 그 리스크를 다시 짊어지고 가느니 이번에 보상받고 나오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조 교수는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언급했다.
 
  “신뢰의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객관성, 합리성, 일관성이 그것입니다. 북한은 늘 일관되게 객관성, 합리성이 없었어요. 개성공단 문제도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과연 그 존재 자체가 합리적인가, 따져봐야 한다는 거죠. 현재의 상황은 비합리적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진통일지 모릅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이 버틸 수 있는 물리적 마지노선은 7월 말이라고 한다. 개성공단 공장 내 설비 중에는 온도·습기조절이 필요한 기계들이 꽤 있다. 8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 장마철이 남북 관계의 분수령인 셈이다. 비 온 뒤의 한반도 지형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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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청와대·임동원, 그리고 現代가 국정원 內 개성공단 반대의견 묵살

개성공단 추진 비화- 반대했던 김은성 국정원 차장 증언

“남북한 안보 차원에서 봤을 때 개성공단 우리 측 근로자는 ‘인질’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천 명이 투입될 텐데 전쟁이 나면 죽도록 내버려둘 겁니까. 그들로 인해 軍事작전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겁니다”(金銀星 前 국정원 차장)

⊙ 金大中의 청와대·국정원 그리고 現代가 국정원 內 개성공단 반대의견 묵살
⊙ 2000년 6월 정상회담 직후 林東源, 국정원장실에 개성공단 지도 걸어놓고 사업 챙겨
⊙ 국정원장 앞에서 벌어진 김은성·박모 과장 對 현대 김윤규·이익치의 言爭
⊙ “북한이 문 닫자고 하면 매달릴 필요가 없어… 우리에게 개성공단은 족쇄”
⊙ “우리가 철수한다고 하면 북측이 우리 근로자를 인질로 잡을 것” 
    
       

2013년 4월 제품 생산이 중단된 북한 개성공단 전경.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대북(對北)정책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있다.
 
  필요에 따라 ‘개성공단 폐쇄’ 카드를 내밀었던 북한은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우리를 압박하는 고차원 무기로 개성공단을 활용해 왔다. 물론 북은 완전 폐쇄까지는 가지 않았다. 개성공단이 북한 정권의 ‘돈줄’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지구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총 생산액은 4억6950만 달러이다. 첫 제품이 생산된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 총 생산액은 20억 달러가 넘는다(약 2조2350억원).
 
  ‘달러박스’ 개성공단을 김정은(金正恩)은 이제 걷어찰 작정인가. 그는 ‘폐쇄’ 협박으로 더 큰 이익을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애당초 우리 당국은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生첩보로 올라온 ‘개성공단’
 
김대중 정권 당시 국정원 대공정책실장·국내담당 차장을 지낸 김은성씨.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頂上)회담 당시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국내 정보조직을 총괄 지휘했던 김은성(金銀星)씨는 정상회담 후속 조치였던 남북경협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개성공단과 관련해 “정상회담이 끝난 후 갑자기 개성공단 건설이 주요 이슈가 됐고 이에 대해 당시 국정원 주요 간부는 대부분 반대했다”고 증언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후 두 달 뒤인 2000년 7월 말~8월 초였어요. 현대가 북측과 공동으로 개성 근처에 산업공단을 만든다는 보고서를 처음 접했어요. 생(生)첩보로 올라온 거였습니다. 소속 국장들을 소집해서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한 간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공업지구를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때만 해도 ‘카더라’ 방송 수준이었어요.”
 
  —생첩보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까.
 
  “우리가 북한에 전기를 보내주고 도로를 만들어 개성공단을 건설한다는 얘기였어요. 그때는 개성으로 확정된 게 아니고 개성 근처에 공단을 짓는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국장회의 때 ‘어느 기업이 주로 하느냐’고 물었더니 한 간부가 ‘현대는 당연히 할 거고 나머지는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당시 국정원장은 정상회담 개최에 핵심 역할을 했던 임동원(林東源)씨였다.
 
  김은성 전 차장은 김대중(金大中) 정부에서 국정원 대공(對共)정책실장·국내담당 2차장(2000년 4월~2001년 11월)을 지낼 정도로 국정원 실세였음에도 북한 정보에 대해서는 차단돼 있었다. 그는 2000년 6월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 몇몇 대학에서 발생한 인공기 게양 사건과 재독(在獨) 종북학자 송두율(宋斗律) 수사에 단호한 입장을 보였고, 특히 국가보안법 개폐에 강력히 반대해 당시 청와대와 상반된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돈을 댔던 현대그룹은 2000년 8월 14일, 대북사업 전담사(社)였던 현대아산을 통해 “개성에 들어설 서해안 경제특구공단 규모는 4000만 평 규모에 달하며 회사 실무단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합의서를 작성, 곧 (북으로부터) 귀환할 예정”이라며 개성공단 건설 합의 사실을 공개했다.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의 뜻에 따라 현대는 1998년부터 신의주 등 북한지역에 경제특구를 건설하려 했다. 지지부진하던 경제특구 건설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급물살을 탔다. 북한 김정일은 정상회담의 돈줄이었던 현대와 협의, 산업공단 후보지로 개성을 확정했다.
 
  개성공단과 관련해 현대가 주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김대중 정부가 핵심 역할을 했다. 정부 쪽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정원장을 지냈고, 이후 통일부장관·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별보좌역을 맡았던 임동원씨가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현대 쪽에서는 정몽헌(鄭夢憲) 당시 회장을 비롯해 김윤규(金潤圭) 전 현대아산 부회장, 이익치(李益治) 전 현대증권 회장 등이 카운터파트였다.
 
 
  임동원씨, “김정일의 용단으로 개성 결정”
 
2000년 8월 8일 정몽헌 당시 현대아산 회장과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등이 ‘3차 소떼 방북’ 명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이들은 김정일을 만나 개성공단 건설에 합의했다.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현대 측과 개성공단 건설 프로젝트를 긴밀히 협의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우리 측이 해주지역을 후보지로 염두에 뒀으나 김정일의 ‘용단’으로 개성으로 결정됐다고 했다. 임동원 전 원장이 2008년 출간한 《피스메이커》의 한 대목이다.
 
 <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6월 말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이 원산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경협사업 문제를 협의했다. 김 위원장은 산업공단건설 후보지로 우리 측이 원했던 해주지역이 아니라 개성지역을 지정하는 용단을 내렸다. 김 위원장은 ‘개성이 6·25전쟁 전에는 원래 남측 땅이었으니 남측에 돌려주는 셈치고, 북측은 나름대로 외화벌이를 하면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중략) 개성지역이 산업공단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입지조건을 고루 갖춘 지역이기 때문에, 전해 들은 바가 사실이라면 대환영할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두 달 후 현대는 ‘개성지역 산업공단 조성계획’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얻게 된다. 나는 사전에 이 계획을 보고받고, 그 웅장하고 야심 찬 사업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피스메이커》에는 이런 내용도 들어 있다.
 
 < 현대 측은 건설사업이 완성될 경우 필요한 노동력 수요를 35만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과연 노동력 공급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에 김정일 위원장은 ‘그때가 되면 남과 북은 평화공존하며 군축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우리도 군대를 감축하여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전해 들으며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국가 정보기관의 총책임자였던 임동원씨는 적국(敵國) 수장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개성공단은 논의 초기부터 국정원 주요 간부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김은성 전 차장의 증언이다.
 
  “정상회담이 끝나고 나서도 현대 고위 관계자들이 북한을 이웃집 드나들 듯했습니다. 당시 나는 대공정책실장, 외사방첩국장에게 ‘당국에 허락을 받고 가는지, 북에 가서는 무슨 일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우리 쪽 직원들이 현대 사람을 만나 진행상황을 체크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아무튼 현대 고위 관계자들은 ‘국정원 3차장에게 허락을 받고 북한을 왔다갔다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3차장이 북한 정보를 담당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어쨌든 나한테는 관련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김은성 차장은 현대그룹이 자금난에 빠진 사실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개성공단을 만든다는 얘기를 들을 무렵 현대건설 자금 사정은 더욱 악화돼 가고 있었어요. 도대체 현대가 왜 그렇게 돈이 궁한지 모르겠더군요. 여기저기 돈을 쓴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그때 어디선가 현대자동차 주식을 비밀리에 매입한다는 설도 많았습니다. 당시 현대자동차를 인수하면 엄청난 수익을 노릴 수 있었어요. 아무튼 현대건설의 자금 사정은 계속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현대 관련 정보를 대통령에게 직보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현대그룹 자금 사정이 국내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 같아서였습니다. 곧바로 ‘현대1보’라는 제목으로 청와대에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난리가 난 겁니다. 금기(禁忌)사항을을 보고한 셈이었지요.”
 
 
  경제보다 국가 안보가 더 중요
 
  그런 와중에 개성공단 건설 얘기가 김은성 차장의 귀에 들어갔다.
 
  “보고서를 접한 후 2000년 8월 초 임동원 원장이 주재하는 차장회의 때 개성공단 얘기를 꺼냈습니다. ‘지금 개성공단 얘기가 직원들 간에 퍼지면서 반대여론이 많아지고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사실 나는 햇볕정책에 무조건 반대한 사람이 아니에요. 과거 정권도 비슷한 정책을 내놓았거든요. 나는 속도조절론을 내세우며 무제한적 지원을 반대했습니다. 관련 법규와 보안장치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날 원장·차장 회의는 20분 만에 별 얘기 없이 끝나버렸어요. 회의가 끝날 무렵 임 원장이 나더러 ‘잠깐 남으시라’고 하더군요.”
 
  —임동원 원장이 무슨 얘기를 하던가요.
 
  “임 원장은 나를 원장실 내(內) 별도 사무실로 데려갔습니다. 그 방 한쪽 벽면에 대한민국 지도가 하나 큰 게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봤더니 개성지역에 들어설 산업공단이 표시돼 있었어요. 임 원장은 내게 공단 위치와 역할, 효과에 대해 설명하더군요. 나는 원장에게 ‘어느 기업이 참여합니까’라고 했더니 ‘아, 그냥 다 잘될 테니 너무 반대하지 말라’고 합디다. 임 원장은 ‘경제적으로 효과가 크고 인건비도 적게 들어가니까 우리 기업에 이득이다. 경협이 잘되면 남북평화도 빨리 온다’고 했어요. 나는 ‘말씀이야 다 맞는 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북한 안보 차원에서 봤을 때 우리 측 근로자는 인질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수천 명이 개성공단에 투입될 텐데 전쟁이 나면 죽도록 내버려둘 겁니까. 그들로 인해 군사(軍事)작전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겁니다. 심각하게 고려하셔야 합니다’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임 원장은 ‘남북한 간에 상호 이익이 있는데 평화에 기여했으면 했지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며 짧게 답하더군요.”
 
  김 차장은 임 원장에게 정색을 하며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경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가안보, 나라의 운명입니다. 우리 조직은 정보기관입니다. 만약 경제부처가 이런 거 하자고 얘기하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국민들도 좋아할 겁니다. 그런데 국정원의 존재 이유는 안보(安保)입니다.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해요. 안보 조직이 경제 위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임동원 원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북쪽이 전쟁까지는 못할 거라 하더군요. 걱정이 너무 앞선다며 염려 말라고 했습니다.”
 
  김은성 차장은 “다시 한 번 재고(再考)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임 원장은 현대를 비롯해 삼성 등 다른 대기업도 합류할 거라 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삼성이 어떤 회사입니까. 그 사람들 머리 좋습니다. 절대 안 들어올 겁니다’고 했어요. 현대는 정주영 왕회장의 오판(誤判)에도 불구하고 참모들이 어쩔 수 없이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익치씨와 국정원 과장의 언쟁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 개성공단을 포함한 남북경협이 포괄적으로 진행됐다. 정상회담 후 기념 촬영 장면.
  임 원장과의 독대가 끝난 후 김 차장은 2차장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10분쯤 지나자 다시 임 원장이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임 원장이 대뜸 ‘현대 김윤규, 이익치씨가 오후 2시에 오기로 돼 있는데 같이 만나자’고 하더군요.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김윤규, 이익치씨의 얼굴을 몰랐어요. 임 원장에게 ‘만나보겠습니다’고 한 후 머리를 썼지요. 나 혼자 원장실에 가서는 김윤규, 이익치씨에게 밀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시 임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박○○ 경제분석과장을 배석시키겠다’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곧바로 박 과장을 불러 단단히 얘기해 놨지요. ‘내 생각은 개성공단 반대인데 박 과장 당신은 소신대로 말해라. 관련 자료가 있으면 모두 챙겨 회의에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예정된 시각에 현대 사람들을 만났나요.
 
  “원장실에 갔더니 두 사람이 와 있더군요. 배석하기로 한 박 과장은 서류 뭉치를 한 아름 들고 왔습니다. 자료 분량에 김윤규, 이익치씨가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개성공단 쪽으로 얘기가 전개됐어요. 박 과장은 개성공단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김윤규, 이익치씨가 ‘잘못 알고 있다’며 반박을 하더군요. 김윤규씨는 대화 초기에 꼬리를 내렸는데 이익치씨는 또박또박 자신의 논리를 펴나갔습니다. 박 과장이 그에게 응대했습니다. 어느새 대화는 현대그룹 자금난 쪽으로 번졌어요.”
 
  이 과정에서 김은성·박 과장 대(對) 김윤규·이익치 사이에 고성까지 오갔다고 한다.
 
  “회의가 두 시간가량 진행됐는데 흥분한 이익치씨가 탁자 위에 있던 신문지를 돌돌 말아 탁자를 탁탁 치며 언성을 높였어요. 대단한 위세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선생, 여긴 국가기관이오. 원장님도 앉아 계시고 젊은 간부도 있는데 진정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당당했습니다. 박 과장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현대건설이 금융계에 거액 대출을 요청한 이유는 뭐냐’고 물었더니 이익치씨는 ‘무슨 소리냐. 현대건설 자금은 넉넉하다’며 반론을 폈습니다. 그러자 박 과장이 ‘그렇다면 또 다른 은행에서 돈을 꿔간 이유는 뭐냐’며 제3의 은행까지 거론했지요. 그래도 이익치씨는 ‘문제될 거 전혀 없다’고 했습니다. 그날 회의는 박 과장과 이익치씨의 싸움이 돼버렸어요.”
 
  —임동원 원장은 어떤 말을 했습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더군요.”
 
  그날 회의는 개성공단 건설과 관련해 김은성씨의 이해를 구하려다 오히려 양측이 감정의 골만 상한 채 끝났다고 한다.
 
 
  ‘김은성이 임동원을 체포하려 한다’는 전단
 
김대중 정부에서 두 차례의 통일부 장관, 국정원장,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를 지낸 임동원 대북특사(왼쪽 앞에서 두 번째)는 2002년 4월 4일 개성공단 건설을 포함한 남북경협을 위해 방북,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다.
  묘하게도 그날 밤 엉뚱한 사건이 터졌다. ‘김은성 차장이 임동원 국정원장을 체포하려 한다’는 전단이 서울 여의도 일대에 뿌려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어요. ‘임동원이는 시냇물에 흘러가는 가랑잎이다. 김은성이 임동원을 구속시킬 것이다’라는 거였어요. 사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 다음 날 한광옥(韓光玉) 대통령 비서실장에게서 긴급전화가 걸려왔어요.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달려갔습니다. 한 실장은 나에게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느냐’며 나무랐습니다. 모함이라고 했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국정원 자체 조사 결과 한 실장의 오해는 풀렸습니다만 임동원 원장은 그렇지 않았어요.”
 
  —누가 그런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을까요.
 
  “김은성이는 반(反)현대 인물이라는 소문이 그 당시 돌았습니다. 아무튼 개성공단을 추진하겠다는 쪽에서는 나를 골칫덩어리로 취급했습니다.”
 
  —전단 사건 이후 개성공단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
 
  “자기들끼리 다 하는데 내가 낄 틈이 있었겠습니까. 나는 간접적으로 부하들을 통해 개성공단 얘기를 보고받았습니다. 정책결정에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어요.”
 
  ‘걸림돌’ 김은성이 사라진 후 개성공단은 착착 진행됐다고 한다.
 
  임동원 원장은 이듬해 3월 통일부장관을 거쳐 2001년 9월부터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가 등장할 때까지 김대중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별보좌역으로 개성공단 사업을 챙겼다.
 
  임 원장은 2002년 4월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 자격으로 방북(訪北)해 김정일을 만나 개성공단의 필요성을 직접 설명했다. 그의 자서전 《피스메이커》의 일부분이다.
 
 < 보고가 끝나자 김정일 위원장이 내게 물었다. ‘남측에서는 개성공단을 적극 추진할 의향이 있는가요?’ 나는 개성공단 건설의 중요성과 사업계획 개요를 설명하고 전기·가스·통신망 연결 문제 등 실무계획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나의 요청에 김 위원장은 즉석에서 이명수 작전국장에게 ‘인민무력부장에게 빨리 진척시키라고 전달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이후 남북 당국은 2002년 8월 제7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논의했고, 같은 달 제2차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개성공단 연내 착공 및 개성공업지구법 제정을 합의했다.
 
  북한 당국은 2002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개성공업지구를 선포했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2003년 6월 개성공단은 착공에 들어갔다.
 
  2004년 6월 식기회사 리빙아트, 의류회사 신원 등 15개 기업이 시범단지에 입주했고 해마다 진출 기업은 늘었다. 2004년 12월, 개성공단산(産) 첫 제품인 리빙아트의 ‘통일냄비’가 생산됐다. 2006년 10월, 시범단지에 입주한 23개 기업이 본격적으로 제품 생산에 들어갔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은 2009년 처음 100개를 넘었다.
 
  그러나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이후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對北)조치로 개성공단에 대한 신규투자는 금지됐다. 공단 체류 인원도 평소의 50~60% 수준으로 축소됐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발하면서 개성공단 기업활동은 더욱 위축됐다.
 
  2013년 2월 현재, 개성공단에는 123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국내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다. 업종별로 섬유업체가 72개로 가장 많고 기계금속 23개, 전기전자 13개, 화학 9개 업체 순이다.
 
 
  “우리가 발을 너무 깊게 담가”
 
  착공 후 10년을 맞은 개성공단, 과연 우리는 개성공단을 어떻게 해야 할까.
 
  김은성 전 차장은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그냥 갈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했다.
 
  “우리가 발을 너무 깊게 담갔어요. 북측에 끌려갈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먼저 철수할 수도 없어요. 철수한다고 하면 북측이 우리 근로자를 인질로 잡을 게 뻔해요. 북측은 법규위반이니 뭐니 온갖 이유를 다 갖다댈 겁니다. 그리고 개성공단의 폐쇄 책임도 우리에게 미룰 겁니다.”
 
  2005년 국정원 도청 사건 당시 모든 주요 책임을 짊어졌던 김 전 차장은 수감 도중 셋째 딸을 잃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2006년 6월, 딸 결혼식 참석차 형집행정지를 요청했지만 당시 정부는 이를 불허했다. 그는 그 무렵 무릎 관절염, 천식 등을 앓았으나 적기(適期)에 치료를 받지 못해 현재 오른쪽 다리를 절고 있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들어 몇 번의 복권을 요청했지만 이 또한 거절당했다. 도청이 개인 범죄라 복권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는 “2009년에서야 이명박 정부는 나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도청이 개인 범죄라면 어떻게 국가유공자로 인정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김 전 차장은 “평생 나라를 위해 일해온 나로서는 국가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면서도 “북의 대남(對南)위협이 고조된 현 시점은 개인 신상보다 국가 안위(安危)를 더 걱정해야 할 때”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북정책을 주도했던 천영우(千英宇) 전(前)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개성공단에 대해 한 방송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북한이 문 닫자고 하면 우리가 매달릴 필요가 없다”며 “우리에게는 개성공단이 족쇄”라고 규정했다.
 
  “우리가 개성공단을 문 닫자고 할 필요는 없지만 북한이 문 닫자고 하면 우리가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개성공단이 남북 간에 중요한 창구 역할을 하는 좋은 점도 있지만, 앞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강화될 수밖에 없어요. 그 대북제재를 우리가 따라가려고 해도 개성공단이 우리에게 큰 족쇄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나라한테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게 강한 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미국, EU, 일본이 다 물어보는 것이 ‘당신들 개성공단은 어떻게 할 것이냐’이고 그게 사실 우리의 제일 약점이었습니다.”⊙
 
개성공단 연혁

 
 
2000년
 
  ㆍ08월 현대아산, 북한 아태·민경련과 「개성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 체결
 
 
 
2003년
 
  ㆍ06월 개성공단 착공
 
 
 
2004년
 
  ㆍ04월 공장구역 1단계 100만 평 부지조성공사 착수 (협력사업 승인)
  ㆍ06월 시범단지 15개 업체 입주업체 선정 및 계약 체결
  ㆍ10월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개소
  ㆍ12월 시범단지 분양기업 첫 반출
 
 
 
2005년
 
  ㆍ09월 본단지 1차 24개 업체 입주업체 선정 및 계약 체결
  ㆍ12월 통신 개통
 
 
 
2006년
 
  ㆍ07월 기술교육센터 착공
  ㆍ09월 본단지 1차 분양기업 첫 반출
  ㆍ11월 북측 근로자 1만명 돌파
 
 
 
2007년
 
  ㆍ01월 입주기업 생산액 1억 달러 돌파
  ㆍ06월 10만kW 송변전시설 준공식
  ㆍ06월 1단계 2차 분양업체 선정
 
 
 
2008년
 
  ㆍ07월 북측 근로자 3만명 돌파
  ㆍ11월 입주기업 생산액 5억 달러 돌파
 
 
 
2009년
 
  ㆍ05월 입주기업 생산액 6억 달러 돌파
  ㆍ05월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남측 직원 한 명 북한 당국에 억류
  ㆍ09월 북측 근로자 4만명 돌파
 
 
 
2010년
 
  ㆍ01월 개성공업지구 종합지원센터 준공입주기업 생산액 8억 달러 돌파
  ㆍ09월 개성공업지구 입주기업 생산액 10억 달러 돌파
  ㆍ11월 누리미 아파트형공장 가동
 
 
 
2011년
 
  ㆍ09월 공업지구 출퇴근버스 통합 운영
  ㆍ12월 개성공업지구 입주기업 생산액 15억 달러 돌파
 
 
 
2012년
 
  ㆍ01월 종합지원센터 입주 북측 근로자 5만명 돌파
 
 
 
2013년
 
  ㆍ04월 북, 개성공단 폐쇄 협박

출처 | 월간조선 2013년 6월  글 | 김성동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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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개성공단 중단' 시비 말 되나?
▲ 개성공단 철수가 시작된 11일 오후 1시 한 입주기업의 트럭이 검문소를 통과해 통일대교 남단을 빠져나오고 있다./파주= 전효진 기자
개성공단 전면중단에 대해 야당 사람들은 일제히 비판적인 논평들을 쏟아냈다. 야당의 소임은 비판하는 데 있다는 원칙 자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선 당연한 것이고, 이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비판에 대해 비판하는 것 역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당연한 관행일 것이다.

문재인 전(前) 더민당 대표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 필자는 자칭 ‘진보’ 야당에서 왜 아직 이 말이 나오지 않나 하고 내심 신기해했다. 그런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나오고 말았다. 과연! 이 말은 그쪽 동네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임에 틀림없다.

그럼 히틀러가 아무리 ‘지랄발광’ 흉측한 짓을 했어도 처칠은 일체 대적(對敵)하지 말고 떡 주고 돈 주며 살살 어루만져주고 달래주기만 했어야 하는가? ‘문재인 기준’대로라면 처칠은 평화에 역행한 전쟁광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핵 대국 소련을 해체하게 한 레이건도 평화에 역행한 전쟁광인가? 그리고 고모부룰 고사총으로 쏴 죽인 김정은은 히틀러보다 결코 덜한 폭군이 아니다.

안철수 국민의 당 공동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이후 개성공단 폐쇄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개성공단 폐쇄라는 정부의 대응에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박 대통령의 대응은 당장은 강력하게 보이지만 시기적으로 적절한 것인지, 우리 국민과 국익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안철수 대표는 한반도 긴장 고조의 원인으로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함께 ‘개성공단 폐쇄’를 동시에 꼽은 셈이다. 시간적-논리적 배열에 있어서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것’을 ‘개성공단 폐쇄’보다 먼저 꼽고는 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렇게 말해선 곤란하다. 그가 진실로 더민당보다는 그래도 단 10 센티미터(cm)라도 더 오른 쪽에 있다면, 그는 한반도 긴장의 원인을 거론할 때 당연히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우리의 개성공단 중단보다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요소로 두드러지게 비난했어야 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한민국 역대 정부들은 그 동안 남-북 간의 평화정착, 공존교류. 화해협력, 공동번영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만 그런 게 아니라 이명박, 박근혜 정권도 어떻게 해서든 남북 대화를 성사시키고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고 그 이상의 교류협력도 하고 싶어 했던 게 사실이다. 다만, 북한이 핵 폐기를 약속하고 각종 도발에 대해 시인-사과-재발방지 약속을 하기 전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와 같은 대대적이고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대북지원만은 유보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상호성 요구는 인간세상의 보편적인 풍습이다.

안철수 대표라고 해서 화성에서 온 남자가 아닌 이상엔 그간의 이런 경위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쩌자고 더민당의 김종인 위원장보다도 더 왼쪽에 선 것 같은 견해를 표명했는지, 그럴 바에야 왜 ‘운동권 프레임‘을 마다하고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말했었는지, 전혀 앞뒤가 맞질 않는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고조된 한반도 긴장 앞에서 그런 북의 소행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똑같이, 또는 더 돋으라지게 나무란다는 것은 ’온건 합리‘와 ’중도적 진보‘라는 국민의 당, 창당명분과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안철수 대표는 개성공단 폐쇄로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시기적으로도 적절했는지, 그것이 국익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의문이다”라고 한 것 역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 어법이다. 따라서 “의문도 가지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은 가해자인 북한의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더 불안해하는가, 피해자인 우리 정부의 반응에 더 불안해하는가? 안철수 의원,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 국민은 애국적인 국민이다. 우리 젊은이들은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때 전역 날자를 연기해 달라고까지 하면서 북한의 도발에 감연히 맞섰다. 이런 가상한 국민의 애국심과 용기에 깊은 신뢰는 표하지 못할망정 “개성공단 폐쇄에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따라서, 국민에 대한 일종의 모독이 될 수 있다. 안철수 대표 자신은 혹시 불안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 애국적 국민은 북한의 파렴치한 도발 앞에서 우리 정부의 대응조치를 향해 “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느냐?”고 항의할 것이라고 필자는 보지 않는다.

그렇게 항의할 부류도 물론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천안함-연평도-목함지뢰-김정은 공포정치’를 목격한 이후의 우리 국민의 의식은 그 이전의 경우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주류는 이제 자유민주주의-공화주의-문명개화 시대의 각성된 개인들로 거듭나고 있다.

이종걸 더민당 원내대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선거를 앞둔 북풍(北風) 전략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사람은 자신이 도달해 있는 만큼의 말밖엔 할 수 없다. 매사 그런 식으로밖엔 말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고만큼밖엔 안 된다는 걸 말해 줄 뿐이다. 그의 눈에는 어째서 여의도 선거정쟁 따위만 보이고 동북아시아의 미-일-중-러와 한반도 남-북 사이에서 일고 있는 국제정치의 큰 추세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인 국면이다. 이 세계사적인 정세에 비하면 이종걸 차원의 정쟁과 관심사 같은 건 그야말로 하찮은 것이다. ‘이종걸 식’대로라면, 그렇다면, 김정은 역시 우리 쪽 선거를 앞두고 더민당 등 야권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했다는 것인가?

천정배 국민의 당 공동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 “대북 포용정책, 햇볕정책의 산물인 금강산 관광, 개성관광, 남북 열차운행 등이 이명박 정부 들어 중단됐고, 박 정부가 개성공단마저 폐쇄해 남북관계는 한-미-일과 중-러가 격돌하는 1970년대 냉전시대로 회귀한 듯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는 왜 남북 관계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 원인-즉,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가? 했는데 신문이 그걸 자세히 보도하지 않은 탓인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박왕자 씨 피살-천안함-연평도-목함지뢰‘가 없었더라면 금강산 관광, 개성관광, 남북 열차운행, 개성공단은 아직도 지속됐을 수도 있다.
박지원 무소속 의원은 또 이렇게 말했다. "남북경협 자금, 핵 개발에 쓰였다는 증거 없다" "중-러가 경제 제재 동참하지 않으면 효과 없다"

남북경협 자금인지, 개성공단 수익금인지, 대북 뇌물인지의 70%가 당(黨)에 상납돼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김정일 비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주장도 있으니, 정히 그렇다면 20대 국회가 소집되면 김대중-노무현 이래의 일체의 대북 지원에 대한 대대적인 국회청문회를 열었으면 한다. 그 청문회엔 당연히 박지원 당시 문화부장관이자 청와대 비서실장이 아주 막중한 증인의 한 사람으로 출석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개봉(開封)박두, 걸기대(乞期待)다. 관람객 천만 명 쯤은 거뜬히 넘길 것이다.

박지원 의원이 말한 대로 중-러가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 대단히 불완전한 제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미국 상-하 양원이 마련한 독자적 대북 제재만으로도 북한은 골병들 수 있다. 일본도 독자 제재 방안을 마련했다. 박지원 의원은 그래서 “북한이 별로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마냥 낙관만 하진 않는 게 안전할 것이다.

야당이 정부를 비판하고 다른 주장을 펴는 자유와 권리는 100% 존중한다. 그러나 말 되는 말을 해야 존경을 받고, 표현의 자유가 가진 본연의 가치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글 | 류근일 언론인, 전 조선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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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 "개성공단 임금 99%는 김정은이 갈취… 노동자들은 6000원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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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개성공단에 지급된 달러가 핵개발 자금으로 쓰인 증거를 대라며 정치공방을 벌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북한은 모든 것이 최고통치자인 김정은에게 보고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김정은이 결론하지 않으면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이를 지키지 않으면 그가 누구이든 처벌과 처형대상이 된다는 건 북한의 세 살 난 아이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달러도 당연히 김정은에게 집중됩니다. 아무리 북한 상황을 몰라도 그렇지 핵개발이라는 엄중한 안보상황까지 정쟁(政爭)의 도구로 삼으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지난 12년간 자유북한방송을 이끌어 온 김성민 대표의 말이다. 그는 “개성공단에 유입된 달러의 용처에 대해 ‘핵개발 자금의 증거가 있느냐’는 일부 언론과 야당의 주장은 북한의 실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북한에서는 민간단체에서 고아원에 주는 빵 한 조각까지도 ‘장군님의 위대성’과 ‘장군님의 배려’와 연계시킨 후 아이들에게 제공합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원조 물자는 체제강화를 위한 ‘사상적 재가공’ 단계를 거칩니다. 남한의 종교단체들에서 아이들을 위해 공급하는 빵 한 개, 사탕 한 톨을 놓고도 이럴진대 하물며 금(金)보다도 귀하다는 달러가 김정은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돈이 어떻게 사용되겠는가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김 대표는 “그동안 우리 탈북자들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의 든든한 자금창구 역할을 하는 개성공단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줄곧 주장해 왔었다”면서 “이는 '호박 쓰고 돼지우리에 들어가는 꼴'(스스로 제 죽을 구덩이에 찾아 들어가는 미련한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개성공단 중단 조치 소식을 듣고 “‘이제야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성에 살면서 공단을 자주 드나들었던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개성공단 임금 99%는 북한 당국이 가져가고, 노동자들에게는 쌀 1㎏을 살 수 있는 6000원 정도(우리가 지급한 임금의 100분의 1, 1달러에도 못 미치는 금액)를 지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단 노동자들은 몰래 빼낸 휴지, 비누, 천쪼가리(조각)를 장마당에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제 그마저도 끊기게 생겼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당국이 공단 내 노동자들의 수익금을 전부 강탈해 온 것”이라며 “지난 정부는 물론이고 현 정부도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체하고 있다가, 일이 이 지경(4차 핵실험)에 와서야 비로소 조치를 취한 거 아니냐”고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국제사회에 북한의 제재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해왔고, 북한 인권개선을 위해 북한인권법을 만들겠다고 하는 마당에 한 머리에서는 계속해서 현찰을 김정은이 호주머니에 꽂아줬습니다. 실제 국제사회는 우리의 이 같은 모순적 행동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남북관계의 대표적인 모순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 칼을 댔으니 이제라도 다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 미국 워싱턴 존스홉스킨대학에서 진행된 북한인권관련 세미나 이야기를 했고 당시 만났던 미(美) 하원 애드로이스 외교위원장과 ‘새롭고 강화된 북한제재법(HR757) 초안 작성에 깊숙이 관여한 조스 아 스탠튼 변호사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그들은 모두 북한에 대한 보다 강도 높은 금융 및 경제 제재의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동시에 김정은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개성공단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힘겨웠던 지난 6년의 시간
 
-자유북한방송의 사정은 현재 어떻습니까?
 
“관심 있는 분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모아준 돈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탈북자 110명(운영위원) 정도가 매월 1만원의 회비를 내는데, 이 돈이 자유북한방송 운영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여전도회와 과천제일교회가 방송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후원을 해주고 있고, 미국에서는 자유연합 수잰 숄티 대표가 후원회를 통해 도와주고 있습니다. 일본에도 동경기독교대 니시오카 쯔토무 교수를 중심으로 한 자유북한방송 후원회가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직접 회비를 내어 운영하고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지난 1월 중순 임대료를 좀 더 줄이기 위해 방송국을 새로 옮겼습니다. 가장 힘들었을 때가 6년 전 미국 국무부에서 지원 자금이 끊겼을 때입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자유북한방송이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결국은 지켜냈습니다. 지난 6년간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견디고 방송을 지켜냈다는 것과, 함께 해준 탈북 동료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제는 누가 도와주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유북한방송이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고, 활성화가 되었다는데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김 대표는 2010년 미국 국무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자 ‘아시아민주인권상’으로 받았던 10만 달러(1억원)와 국경 없는 기자회로부터 받았던 ‘올해의 매체상’상금, 7년간 부었던 적금을 깨 자유북한운영자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자유북한방송은 노무현 정권 당시 ‘대북방송 중단’이 선포되면서 태동한 민간 대북방송입니다. 정부로부터 지원은커녕 ‘중단’의 압박을 수도 없이 받아왔습니다. 방송시작 초기에 북한은 ‘중단을 약속한 방송을 남한정부가 탈북자들을 내세워 진행하려 하고 있다’며 정부와 방송을 압박했습니다.
 
북한의 메시지를 기다렸다는 듯이 남한 내 대표적 친북세력인 한총련 ‘통일선봉대’며 ‘통일연대’가 방송국을 찾아와 ‘방송중단’을 외쳐댔고 이를 견디다 못한 건물주는 결국 우리를 건물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방송개시 1년도 못돼 네 번이나 스튜디오를 옮겨야 했습니다. 소위 우파 정부가 들어서서도 무관심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 주민에게 자유와 진실의 소리를 전하기 위해 하는 일인데, 이 넓은 서울 한복판에서 기댈 곳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정말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방송이 하루 한 시간 정도 나가는 걸로 아는데, 그걸로 충분한지요.
 
“아시다시피 방송을 하려면 외국의 민간방송 주파수를 임대해야 하는데 방송 시간이 곧 돈입니다. 방송의 1분 1초를 소중하게 쓰고 있습니다. 또, 올해 목표를 하루 2시간 방송진행에 못박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현재 탈북자들 중심으로 된 100여명의 운영회원 숫자를 일반인까지 포함해서 300명 정도로 늘릴 계획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자유북한방송 후원회원들에게도 저희의 목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미국으로부터 지원금이 끊긴 후 힘겨운 6년을 보냈는데, 그 나날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하면서 “하루에 12번도 더 접을 생각을 했지만, 결국 이겨낸 것에 자긍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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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2일, 대북전단을 보내려던 박상학 북한민주화추진연합회 대표가 경찰에 저지당하자 허공에 전단을 뿌리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조선DB

기대가 컸던 우파정권 출범, 그러나…
 
-좌파정권에서야 그렇다고 쳐도 우파정권 출범 후에도 서운한 점이 많았겠네요.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서울시장 시절 식사도 함께하고 보신각 타종행사에도 참여하면서 자유북한방송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드렸고, 국회의원시절 박근혜 대통령과도 여러 번 만나 북한의 민주화를 위한 탈북자들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면 탈북자들과의 약속을 잊고 사는 듯 해 허탈한 심정이었습니다.”
 
김 대표는 탈북자들이 우파 정권에 대한 기대가 컸다며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들여주었다.
 
“지난 대선 후 어느 날 방송국 사무실 전자키 번호가 1219로 바뀌었습니다. 직원들이 바꾸어 놓은 것이죠. 그래서 제가 갑자기 번호는 왜 바꾸었고, 새로 정한 1219라는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직원들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날인데 그걸 왜 대표란 사람이 모르는가’하며 서운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만큼 그대가 컸다는 의미죠. 그 무렵 직원 두 사람이 방송국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 된다며 다른 일터를 찾아 떠나갔습니다.”
 
김 대표는 “탈북자들은 소위 ‘고향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연다’는 심정으로 방송도 하고 삐라도 뿌린다”며 “주위의 온간 험난한 비난까지도 자칭 ‘애국심’으로 묵묵히 이겨내 왔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의 온갖 협박도 뒤따랐습니다. 우리를 ‘인간쓰레기’라고 하면서  ‘죽이고’, ‘불사르고’,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용서치 않겠다’고 협박해도 오히려 이를 운동의 동력으로 삼을 정도로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황에 따라 변하는 정부의 대북정책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 때는 정말 가슴 치며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 대표는 “그럴 때는 ‘해도 너무 한다’는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나온다”며 “탈북단체들이 대북전단을 살포하려고 할 때마다 경찰이 막아 나선 걸 한번 보라”고 말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박상학 자유북한운동대표가 이를 비판하는 대북전단을 보내려 하자 경찰이 저지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너무나 실망한 박상학 대표가 박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썼는데 최초의 제목이 ‘대통령님, 해도 너무하십니다’였습니다. 탈북자들의 심정을 대변한 편지였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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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방송이 북한 내부의 정보원들로부터 입수한 각종 북한 관련 원문자료들. 자유북한방송은 이런 1차 원문 자료를 통해 최대한 정확하고 신속하게 북한 관련 정보를 분석 보도하고 있다.

대북 방송의 효과
 
-라디오가 보급되지 않은 북한에서 자유북한방송이 큰 효과가 있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큰 효과를 바라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2004년 2월, 당시의 노무현 정부가 대북 심리전과 방송을 중단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우리라도 해야겠다고 시작했던 방송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유일한 외부정보 유입의 통로였고, 그래서 반드시 있어야 할 대북방송이라는 생각과 절대로 대북방송의 맥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사명으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라디오는 보급되지 않는 게 아니라 북한당국이, 그 ‘위험성’ 때문에 생산 자체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대북방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도 탈북단체들과 운동가들에 의해 수많은 단파라디오가 풍선을 타고, 혹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끊임없이 북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방송을 듣고 탈북을 결심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당장의 가시적 효과는 없다 할지라도 방송을 듣고 북한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할 용기를 가졌더라는 사람은 반드시 늘게 될 것입니다. 북한과 중국 등지에서 민간 대북방송에 정보를 보내주는 통신원들이 많은데, 이런 인적(人的) 네트워크가 있어 북한의 내부 소식을 빠르고 정확하게 확보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김 대표님 자신도 예전에 대북방송을 듣고 월남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북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들었던 한국의 사회교육방송, 미국의 소리방송은 탈북을 결심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북한에서 소대장을 하다 남한에 온 어느 탈북자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하더군요. 이 친구(소대장)가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 너무나 황폐해져 생지옥으로 변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자신이 장교 출신인데도 굶주림을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산에서 약초를 캐고, 잣나무에서 떨어진 잣(이삭)을 주어 연명했다고 하는데, 하루는 산에서 주워온 잣을 보안원이 빼앗으려고 하더랍니다. 이 과정에서 보안원의 폭행에 맞서 거칠게 항의했더니 ‘민간인 반란자’라는 죄목으로 그를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감옥에서 군관생활까지 했던 내가 도대체 무슨 꼴을 당하고 있나를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군 생활 시절 들었던 ‘남조선방송’이 귓전에 맴돌더라는 겁니다. ‘인민군장병들이여,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지키는 병사들이고, 무엇을 위해 청춘을 불사르고 있는가…’ 그는 결국 탈북을 결심했고 결행했습니다. 남조선방송이 탈북을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김 대표는 “이런 사례를 보면, 방송을 듣고 당장 탈북을 결행하거나, 체제에 반하는 행위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인생의 중요한 계기를 맞거나 비관 등에 빠진 사람들은 자연히 남조선방송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되고 북한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며 “그런 의미에서 대북방송은 북한주민들의 마음을 외부와 연계시키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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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와 탈북자들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수잰 숄티(Suzanne Scholte) 미국 디펜스포럼재단(DFF) 회장. / 영상미디어 김종연

"북한 4차 핵실험 사전 정보도 먼저 입수"
 
-지난 10여 년 동안 자유북한방송이 한 북한관련 특종이 셀 수없이 많은데요. 정보의 신뢰성은 어떻게 확보하는지요.
 
“크든 작든, 북에서 나오는 정보는 모두 다 귀한 정보라는 생각을 고수해 왔습니다. 나중에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는 정보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기준으로 통신원들의 정보를 사전에 배제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실수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신뢰할 수 있는 방송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내부 통신원들 스스로 정보의 교차확인과 객관성을 중요시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근래에는 1차 정보라고 하는 사진, 동영상, 강연자료 등 가공되지 않은 자료 수집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최근의 북한 4차 핵실험 때도 사전에 정보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지난 1월 6일 오전 10시경에 남한 방송들에서 북한 쪽의 인공지진이 관측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한 것이죠. 그 전날 내부 통신원들이 ‘풍계리로 들어가는 모든 도로가 차단되었다’는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핵실험이 박두했구나’ 하고 기사를 준비했지만, 그 전 과정이 너무 조용했었기 때문에 기사를 써 놓고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12시 핵실험을 했다는 북한의 중대발표가 나오더군요. 써 두었던 관련 기사를 급히 타전했습니다. 그나마 당시 북 핵 관련 내부 소식으로는 우리가 첫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김 대표는 “최근의 모란봉 악단 북경 공연 취소, 김양건 통일선전부장의 교통사고 사건 등도 자유북한방송의 보도 후 중구난방이던 국내 언론의 방향이 바뀐 경우”라며 “이처럼 북한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정보를 사전에 확보한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런 정보의 취합은 하루 이틀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5~10년간 우리가 구축한 인적네트워크와 ‘북한주민들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 있는 정보가 신속히 들어올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우리와 연을 맺고 있는 정보원들도 처음에는 돈을 요구했고, 정보를 팔았으나, 이제는 신뢰를 바탕으로 정보를 제공합니다. 우리와 일하는 과정에서 이들도 사명감이 생긴 것이죠. 그 결과 평양시 ‘주민등록자료’, ‘북한의 전자도서자료’ 최고사령관 명령서를 비롯한 ‘3백여 건의 내부 강연자료’등 우리가 필요한 자료를 모두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정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으면 안돼"
 
-북한인권법 통과를 두고 여야가 계속 진통을 겪고 있는데요.
 
“북한인권법의 목적은 북한 독재정권에 의해 주민들에게 자행되고 있는 잔인한 인권유린행위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민주당은 ‘북한인권증진노력을 한반도평화정착과 함께 추진한다’는 문구를 조항에 넣자고 요구했고 결국 여야 합의가 결렬됐습니다. 더민주당 주장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소리인 동시에, 할 거면 김정은 정권도 돕자는 이야기가 됩니다.”
 
김 대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더민주당은 탄압의 대상인 북한주민들의 인권증진을 도모하자면서 동시에 타도대상인 독재자와의 평화증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늘 해온 이야기지만 더민주당은 한마디로 우리가 도와줘야 할 대상과 적을 구분할 수 없는 무용지물인 법을 만들자는 겁니다. 더민주의 주장은 한마디로 적·아를 혼동케 하는 ‘우리 민족끼리 정신’의 복사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런 법은 없는 게 낫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북한주민이 아니라, 독재자의 편에 서게 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민주는 북한주민을 위한 인권법을 더 이상 훼손시키지 말고 차라리 ‘김정은 지원법’을 새로 만드는 게 나을 상 싶습니다.”
 
-국사 교과서 문제는 어떻게 보시나요.
 
“북한을 말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도 예전에는 공산당은 머리에 뿔난 사람이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판에 박힌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과거 정권의 반공정책을 탓하면서 ‘우리 민족끼리 정신’으로 나가야 한다는 북한의 논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민족끼리’는 감성적 민주주의에 기대 김정은과 백성들을 혼동시키는 노동당의 전략적 용어입니다. 북한 주민을 억압하는 김정일과 노동당 간부도 모두 우리 민족이니까 협력해야 하고, 반대로 미국은 외세니까 몰아내야 한다는 이른바 ‘자주적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김 대표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북한의 이 같은 주장에 동조하면서 우리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며 “대한민국 헌법상 반란 수괴 집단의 국기가 서울 한복판에서 펄럭이고, 정체불명의 한반도기가 통일의 상징처럼 등장한 것이 그 사례”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오늘날 북한의 모든 모순이 김일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과하는 남한 사람들이 많다”고 우려했다.
 
“남한 국사 교과서에 김일성이가 한 토지개혁, 남녀평등, 일제청산 등을 미화해놓았는데, 이 모든 것은 김일성이 자신의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김일성은 소위 3대가 내려가도 끄떡없는 지독한 세습독재국가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이것이 북한 정권의 본질이며, 오늘날 김정은이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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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정책으로 잃어버린 대북정책 20년...김정은 붕괴 방법은?

"김정은의 목숨줄, 중국이 아니라 북한 인민이 쥐고 있다"


▲ 조선중앙TV 캡처
북한이 핵실험에 이어 인공위성을 가장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는 핵실험에도 정신 못 차리고 미국과 유엔에만 의지해 대북제제만을 운운해온, 모든 문제를 중국 탓으로만 돌려온 대한민국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다.

북한의 핵-미사일은 지난 수십 년 간의 대한민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설정했던 가설이 거의 완전하게 허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능주의적 낙관론 또는 낙관적 기능주의의 붕괴다.
우리가 선의(善意)를 가지고 공존-교류-협력-지원을 열심히 하다보면 그 정성이 북한 권력자에게 먹혀서 남과 북의 대등하고 호혜적인 평화체제, 상호불가침, 공동번영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가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이 가설과 전제는 순전한 헛발질이었다. 북한의 권력자들은 생물학적으로는 물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의식(意識)의 차원에서는 우리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종류다.

햇볕론자들이 탈북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면, 황장엽 비서의 경고를 소중히 여겼다면 오늘 같은 똥밭에 넘어지는일은 없었을 것이다. 패착은 북한수령독재정권의 태생적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1차 2차 3차 핵실험을 강행하는데도 수령독재정권의 명줄이 되어주는 개성공단은 계속해서 유지되었고,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박왕자 피살과 같은 도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도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비겁한 변명들이 난무했다.

그래서 새해 벽두부터 연이어 터진 김정은의 도발은 대한민국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북한의 수령독재 정권에 대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의를 가지고 열심히 정을 베풀면 저들도 바뀔 것"이라고 설정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짓이다. 그래서 김정은에게는 선의로만은 안 되고 '법치'가 불가피하다.

첫째 '월등한 군사적 응징력' 확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월등한 군사적 응징력'은 고사하고 우리는 지금 '핵 보유국' 북한에 비해 '핵 없는 2류 국가'로 나가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당국자들은 툭하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혹독한 대가? 어떻게? 맨날 얻어터지기만 하면서도 보복 한 번 딱 부러지게 못 한 주제에 혓바닥 하나만은 돈 안 든다고 멋대로 쉽게 놀리고 있다.

둘째 중국 탓만 하지 말고 문제의 중심이 우리에게 있다는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북한의 김정은 수령독재 정권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만 하는 악마의 근원이라는 문제의식이 말이다. 우리는 대화하고 타협하려 하면서 남에게 압력을 가해달라고 하는 것처럼 비겁한 것이 또 어디있는가?

북한의 김정은 정권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것은 중국만이 아니다. 김정은 정권의 목숨줄은 북한주민도 쥐고 있다. 오히려 북한주민이 쥐고 있는 목숨줄이 중국보다 더 강력한것이다.

셋째 전략 전술의 문제다. 북한의 김정은 수령독재 정권을 어떻게 붕괴시킬까? 북한의 도발이 터질 때마다 요술방망이처럼 등장하는 한미군사적 시위는 김정은 수령독재정권에게 그 어떤 압력도 되지 못 한다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아는 사실이다.

한미동맹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보검이지 북한문제를 해결하는 요술방망이는 아니다. 이번 북한의 도발에 한미군사훈련에서 북한수뇌부 참수작전도 함께 진행한다고 한다.

정부의 비겁함과 국민우롱에 분노를 넘어 조소(嘲笑)를 보낸다. 북한을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 알카이다의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이 생각하는 무지의 결과라 생각은 하지만 어쩌면 저렇게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는지 정부의 비겁함이 너무나 한심하다.

그렇다면 군사적 방법으로도, 참수작전으로도, 경제봉쇄로도 붕괴시킬 수 없는 김정은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북한내부에서의 혁명이다.

대한민국은 북한내부가 변화할수 있는, 북한주민의 저항의식이 싹틀수 있는 귀중한 20년을 햇볕의 망령으로 잃어버렸다. 북한주민의 의식이 수령우상화에서 수령증오로 바뀔 때 한미동맹의 군사력도, 김정은 참수작전도, 경제봉쇄도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자, 늦었다고 생각할 때 가 시작이다. 이제부터도 김정은과 북한의 2,300만 인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 김정은은 반드시 제거 (除去)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북한문제를 풀어야 한다.

어제 정부가 개성공단 중단을 결정한 것에 박수를 보낸다. 기능주의적 낙관론 에 빠져 잘못된 전략전술을 하다가 똥 밭에 넘어졌으니 똥이 더럽다고 말만하지 말고 과감하게 똥을 짚고 일어서야 할 때다.

북한문제의 가장 중요한 열쇠 북한주민의 의식변화, 독일처럼 쿠바처럼 못하겠으면 비공식적으로라도 해야 한다. 장담 하건 데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가 3만명이 아니라 30만명이 된다면 북한의 수령독재 정권은 무너진다.

3만명의 탈북자가 년간 북한에 비공식적으로  송금하는 돈이 100억원을 넘고있다. 이 돈은 지금 북한의 장마당경제를 이끌고 있고 주민의식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탈북자가 30만명이 된다면 년간 1000억원의 돈이 북한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햇볕론 자들이 독재자의 주머니에 쑤셔 넣은 비겁한 돈이 아닌, 정말로 북한주민의 의식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진정한 햇볕이 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돈만 가는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풍요와,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도 함께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남한내 탈북자들이 북한과 남한내 종북세력의 온갖 위협과 방해에도 10여년간 끊임없이 행동해온 대북라디오 방송과 대북전단 등 모든 심리전을 확대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정은 수령독재 정권은  스스로 붕괴되게 되어 있다.

중국이 아무리 북한 수령독재정권을 보호하여 저들의 방패막 으로 하려고 해도 대의명분에서 할 수 없게 된다. 한미동맹이 군사행동에 나서고 김정은 참수작전을 강행해도 북한을 위해 함께해줄 우방은 없게 된다는 말이다.

9일 방영된 SBS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신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유생들 문제를 태종 이방원이 해결하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고려라는 절대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정몽주를 쳐내고, 두문동에 불을 질러버리는 태종이방원.

이방원은 이렇게 말한다. “ 똥밭에 넘어졌는데, 어떻게 똥을 짚지 않고 일어설수 있겠습니까? 똥을 짚어야 일어날수 있는 것이지요. 삼봉선생과 아버지의 방식이 아닌 나는 내방식대로 세력을 만들겁니다.”

백성의 절대악이 되어버린 고려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정몽주와 고려유생들을 설득해서 함께 새나라건국을 도모하겠다는 정도전의 기능주의적 낙관론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신조선을 있게한 태종 이방원식, 전략전술 리더쉽이 오늘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되는 장면이었다.
글 | 김국평 탈북자/전 자유북한 방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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