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 단독 입수
DJ와 전화통화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잘 되도록 하겠다"
-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조선일보 DB
“DJ 정부 경제팀이 (삼성차를 인수하고 대우전자를 삼성에 내주는) 빅딜을 강요했고, 무산시킨 것도 그들이다. 사재 출연을 포함해 13조원의 자산을 채권단에 맡기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더니 담보로 다 내놓자마자 워크아웃으로 넘겨버렸다. 법정관리로 가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대우자동차를 GM에 헐값에 넘기는 등 진행한 구조조정은 결국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그룹이 해체된 지 15년이 지나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대담 형식으로 지은 책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다.
조선비즈는 오는 26일 출간 예정인 이 책의 초고를 단독 입수했다.
출판사와 인쇄소에서 제공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인쇄소에서 버려진 폐지들을 모아 책을 재구성했고, 이 내용을 최초로 공개하기로 했다.
책을 통해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이 경제관료들에 의해 억울하게 해체됐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그 결과는 한국 경제에 막대한 피해로 돌아왔다고 진단했다. 김 전 회장이 당시 상황에 직접 상세히 증언을 한 것은 1999년 해외로 출국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밖에도 김 전 회장은 노태우 정부 시절 대북 특사로 임명돼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20회 이상 만난 이야기 등 그동안의 비화를 육성으로 밝혔다.
김 전 회장은 IMF 외환위기와 그 이후 대우그룹이 해체된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IMF 사태와 함께 출발한 DJ 정부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맡으며 주요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관료들과 갈등을 겪은 내용도 포함됐다. 김 전 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심성이 많아 여러 의견을 듣길 원해 경제 관련 회의에 종종 참석했다”면서 “금 모으기 운동도 그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책에는 DJ가 김 전 회장의 의견을 듣고 보류하거나 기각하는 정책이 생겨나면서 관료들의 반감이 시작됐고, 특히 김 전 회장의 생각이 ‘IMF 식 구조조정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관료들의 생각과 달리 ‘수출을 늘려 IMF를 벗어나자’는 쪽이어서 갈등이 깊어졌다는 장면들이 묘사돼 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며 대우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고 김 전 회장은 말한다. 한 예로 김 전 회장은 대우자동차에 GM의 투자를 받아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것을 관료들이 막았다고 했다.
“우리 대우를 좋지 않게 보던 정부 관계자들이 GM 사람들에게 안 좋은 얘기들을 해서 협상을 방해했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어요. 유동성 규제를 할 때에도 대우만 겨냥한 조치를 내놓고, DJ에게 우리 부채 상황을 보고 할 때도 ‘밀어내기 수출이다’, ‘외상매출이다’ 하며 수출금융을 해주지 않은 잘못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웠지요. 나중에 삼성과 ‘빅딜’을 할 때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딜이 깨지도록 방해했어요.”
삼성과의 빅딜 역시 정부가 강요했고, 나중에 훼방을 놓은 것도 정부였다고 김 전 회장은 강변한다. 당시 정부와 삼성, 대우 사이에는 삼성차를 대우에 넘기고 대우전자를 삼성에 넘기는 빅딜이 논의됐지만 결국 무산됐다. 김 전 회장은 “대우에게 삼성차는 필요가 없었지만, 정부가 강하게 권한데다 그렇게 하면 유동성 문제를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다”면서 “하지만 경제 관료들은 나중에 오히려 빅딜을 막았다”고 했다. 빅딜이 된 다음에 대우를 망하게 하면 처음부터 빅딜을 잘못 추진한 거라는 비난을 받을 것을 경제 관료들이 우려했다는 것이다.
“(빅딜이 진행되는 동안)이헌재씨를 한두 번 만났는데 ‘대우를 어떻게 부도야 내겠습니까?’라고 말해요. 그러면 회사를 살리는 쪽으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헌재씨가 그런 것은 법정관리로 가는 것을 막고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이어 김 전 회장의 사재 출연을 포함한 13조원 규모의 자구안을 냈지만 결국 뒤통수를 맞았으며 이후 대우 그룹이 해체됐다고 김 전 회장은 증언하고 있다. 1999년 7월 김 전 회장은 사재 출연 1조3000억원을 포함해 13조원을 채권단에 맡기고 자동차 부문과 ㈜대우 등 8개 계열사 회생에만 전력하겠다는 ‘대우 유동성 개선을 위한 자구방안’을 내놨다. 김 전 회장은 이것이 정부가 금융 지원과 8개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서 낸 자구안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는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다시 유동성 위기가 시작됐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관료들이 지분을 다 내놓게 한 뒤 마음대로 대우 계열사를 처리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통상적인 워크아웃에서는 기존 경영진을 인정해주고 경영진과 채권단이 협력해서 기업을 살리면 경영권을 돌려주지만, 관료들이 그렇게 하기 싫었다는 것. 특히 삼성은 법정관리를 허용하고 대우는 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자구안이 나온 당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우중 회장이 말한 퇴진 시한과 관계없이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조만간 손을 뗄 것으로 안다”면서 “이번 발표로 뇌관 제거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순간부터 이미 대우는 해체 수순으로 갔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시각이다.
“법정관리로 가면 법원에서 법절차에 따라 해결하니 자기들 마음대로 못 하게 되지요. 우리가 순진하게 사재도 출연하고 담보를 다 내놓으니까 워크아웃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예요. ‘뇌관을 제거했다’는 것이 채권시장 안정 핑계를 댔지만 결국 나를 대우그룹에서 제거했다는 얘기지요.”
- ▲ 대우그룹 본사 직원들 모습/조선일보 DB
이후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 유럽·아프리카 출장을 떠났다. 여러 경로로 해외에 나가 있으라는 얘기가 들어왔고 DJ에게 전화해서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해서 잘 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주장이다. 이기호 경제수석과도 만나서 다짐을 받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2005년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김 전 회장은 이후 해체된 대우의 각 계열사가 대부분 정상화됐다는 점을 들어 당시 대우를 부실로 낙인 찍은 것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우의 12개 계열사 장부상 자산가치 91조9000억원이 실사 결과 30조7000억원 줄어든 61조2000억원으로 나온 것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 금융감독원 지시를 받은 회계법인이 기계 설비는 고철 값으로 계산하고 공장 건물은 아예 값을 안 치는 등 가치가 있는 자산까지 50% 또는 0%로 평가했다는 것.
“경제팀이 잘못 판단해서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고 봅니다. 처음 워크아웃 할 때부터 대우차를 쓰레기 취급했으니까요. GM이 대뜸 우리와 협상하던 가격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값에 사겠다고 한국 정부에 편지를 보낸 것도 그것 때문이지요. GM은 우리가 독자 개발한 모델이 탐났으니까 합작하자고 한 거예요. 남들은 없는 것도 잘 포장해서 비싸게 팔려고 하는데 한국 정부는 그때 우리가 잘 가지고 있는 것도 쓰레기라고 대문짝만하게 얘기해놓고는 이 물건 살 사람 없느냐고 찾아다니고 있었던 셈이지요.”
김 전 회장은 GM이 대우를 거의 공짜로 인수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부실자산 다 빼고 우량 자산만 골라서 가질 수 있게 한데다, 1조원 이상을 투자한 신모델도 그냥 넘겨줬고, 대우중공업에 있던 티코 생산 라인도 대우차 팔 때 함께 줬다는 것 등이 이유다. 김 전 회장은 “GM이 현찰 4억불밖에 내지 않는데 산업은행이 20억불 자금 지원을 해줬다”면서 “정부가 우리를 워크아웃에 집어넣으면서 실사했을 때 청산 가치로 나쁘게 평가했는데도 대우차 자산 가치가 110억불(약 13조원)가량 나온 것과 비교하면 한국 경제가 110억불의 돈을 날린 셈”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 자동차 산업 구도를 봐도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의 2사 체제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독과점 체제가 됐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또 노태우, 김영삼 정부 시절 대북 특사로 임명돼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고 밝혔다. 1993년 1차 북핵위기 때 김 전 주석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했을 당시에도 김 전 회장이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대북 특사로 활동할 당시 김 전 회장은 당시 김일성 전 주석을 20여 차례 만났으며, 인간적으로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했다고 회술했다. 그는 1991년 남북 정부 간 화해와 협력에 대한 첫 번째 합의문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추진했을 당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강하게 반대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김 전 회장은 이같이 북한을 수시로 방문했음에도 자신의 행보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때는 내가 북한에 그렇게 많이 다니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면서 “중국에 가면 거기서 이북 패스포트(passport·여권)받아 VIP 수속 하고,나올 때도 그걸로 수속해서 나왔으니까…”라고 소개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가까웠다”면서 “(한번은)와이프(정희자 아트선재센터 관장)와 함께 갔는데, 김 주석이 와이프의 직선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을 더 좋아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의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우가 수출에 기여한 것 때문에 1969년부터 매년 산업훈장을 받았는데, 나를 좋게 보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 없이 훈장만 주는 데 나한테는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우리 부산공장도 방문하셨다. 그 후 고민이 생기면 일 년에 몇 번씩 청와대로 나를 불러서 얘기를 들으셨다. 비서관 없이 단독으로….”
또 “박 대통령께서는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셨다. 나를 ‘김 사장’이나 ‘김 회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우중아’라고 부르셨다. 나도 박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다”고도 했다.
김 전 회장은 경영관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수 풀어냈다. 예들 들면 IMF 위기 당시 ‘경영의 달인’으로 추앙받던 잭 웰치 GE 회장의 경영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람 잘라서 이익 늘리는 사람을 어떻게 경영자라고 할 수 있나.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직원들을 데리고 어려울 때도 잘 이겨나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경영자다. 일 시킬 때는 같이 열심히 하자하고 경영이 어려워지면 고용 유지 못 한다며 나가라는 건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사람 자르는 건 회사가 망할 때나 할 수 없이 하는 거다.”
김 전 회장은 주가 올리는 것을 경영 목표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했다. 과거 대우의 세계 경영과 관련해서는 “우리나라가 가진 경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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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정부 경제팀이 (삼성차를 인수하고 대우전자를 삼성에 내주는) 빅딜(사업 맞교환)을 강요하더니, 이것이 무산되자 법정관리 신청도 할 수 없게 막았다. 사재 출연을 포함해 13조원의 자산을 채권단에 맡기면 10조원을 지원해주고, 자동차를 포함한 8개 계열사를 경영하게 해줄 수 있다고 약속해놓고서는 담보로 다 내놓자마자 워크아웃으로 넘겨버렸다. 법정관리로 가면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대우자동차를 GM에 헐값에 넘기는 등 진행한 구조조정은 결국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21일 조선비즈가 단독 입수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는 대우그룹 해체 과정과 그 폐해에 대한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 전 회장은 특히 DJ 정부 경제팀과의 갈등 때문에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다 결국 대우그룹이 해체됐고, 그 결과는 한국경제에 매우 큰 손실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우자동차의 예만 봐도 정부가 나서 위기를 조장하며 우량 자산에 헐값이라는 딱지를 붙여놓고는 거의 공짜로 GM에 넘겼다는 것. 이 책의 3장과 4장에 걸쳐 기술된 ‘아시아 금융위기와 대우그룹의 해체’ 편에는 김 전 회장의 이런 시각이 잘 나타나 있다.
- ▲ 김우중과의 대화 책 발췌
◆ “IMF 위기는 금융이 잘못해서 일어난 것”
김 전 회장은 먼저 IMF 위기가 기본적으로 금융이 잘못해서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부와 IMF가 금융과 기업 공동 책임이라고 한 것과 다른 생각이다. 김 전 회장은 “기업이 망한다고 은행들이 다 망하면 제대로 된 은행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외환보유액이 갑자기 줄어서 벌어진 일인데 이것은 정부가 금융기관을 도와주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금융기관에서 돈을 뺀 것도 외국인이지 기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또 IMF 사태 이후에도 1년 정도까지는 대우에 큰 자금 압박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만기가 돌아오는 것 중 일부 연장이 안 되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은행에서 빌릴 수 있었고 어떤 때는 (대출을) 늘려 받기도 했다는 것.
특히 정부가 당시 부채 비율 200%를 맞추라는 정책을 쓰는 등 악수를 둬 위기를 키웠다고 평가했다. 선진국과 우리 시스템이 다른데 부채 비율 수치만 놓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당시 관료들이 부채 비율 200%를 가장 먼저 맞춘 삼성이 좋아진 것을 근거로 “잘 된 기준이었다”고 자평하는 것에 대해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잘해서 좋아진 것이지 부채비율을 낮춰서 좋아진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살 때 선진국은 개인이 할부금융을 받지만 우리나라는 자동차 회사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서 할부 판매를 했어요. 개인이 져야 할 빚을 기업이 다 끌어안고 간 것이죠.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정부가 환율 관리를 잘못하고 그걸 기업 부실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큽니다. 환율이 800원에서 1600원 되니까 달러 부채가 하루아침에 두 배가 됐는데 기업 잘못이라고 할 수 있나요?”
- ▲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1997년 11월 21일 밤 정부종합청사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외화조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 DJ와 IMF 위기 극복 함께 상의하는 사이였지만… 관료들과 사이 틀어져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한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권 초기 김 전 회장을 ‘DJ 경제 가정교사’로 묘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전경련 회장이 됐다고 보는 이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 전 회장은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경제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다”면서 “전경련의 경우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미 회장으로 선출되는 것을 전제로 회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DJ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신임을 받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 결정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것은 인정했다. “DJ가 경제 관련 회의가 있으면 꼭 전경련 김 회장을 부르라고 해서 참석했습니다. 당시 ‘금 모으기 운동’도 그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죠.” 김 전 회장은 “우리가 파는 일을 많이 해봤으니 국내에서 금을 모으기만 하면 파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DJ가 김 전 회장을 자주 찾은 것에 대해서는 “조심성이 많은 분이기 때문”으로 묘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 사람 얘기만 듣지 않고 여러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 중에 보류되거나 기각된 정책도 있었다는 게 김 전 회장의 말이다. 관료들이 김 전 회장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김 전 회장은 “DJ가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얘기하라고 했고, 나도 젊을 때니까 나라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에 받아쳤다”고 했다. 하지만 ‘수출을 늘려 IMF를 벗어나자’고 생각한 김 전 회장과 달리 신흥 관료들은 ‘IMF 식 구조조정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종종 격돌하는 관계가 됐다. 김 전 회장은 이런 갈등이 결국 GM의 투자를 받아 외자를 유치하려던 김 전 회장의 구상에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우리 대우를 좋지 않게 보던 정부 관계자들이 GM 사람들에게 안 좋은 얘기들을 해서 협상을 방해했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어요. 유동성 규제를 할 때에도 대우만 겨냥한 조치를 내놓고, DJ에게 우리 부채 상황을 보고 할 때도 ‘밀어내기 수출이다’, ‘외상매출이다’ 하며 수출금융을 해주지 않은 잘못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웠지요. 나중에 삼성과 ‘빅딜’을 할 때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딜(거래)이 깨지도록 방해했어요.”
◆ 처음엔 삼성과 빅딜 하라고 강요하더니…
김 전 회장은 삼성과의 빅딜 추진도 알려진 것과 달리 본인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사업적으로 봤을 때 삼성자동차를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김 전 회장은 “경제규모라고 생각하는 연산 250만대 투자를 다 진행하고 있었는데 삼성차의 20만대를 더하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면서 “삼성이 당시는 자동차에 돈 많이 쓴데다 삼성전자도 별로 좋지 않아 우리를 찾아와서 제안한 것”이라고 했다.
- ▲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7월 1일 청와대로 전경련 회장 등 경제 5단체장을 초청, 면담을 갖기 앞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가장 왼쪽이 김우중 회장/조선일보 DB
김 전 회장은 빅딜에 응한 이유도 “정부가 강하게 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유동성 문제를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다”고도 했다. 이건희 회장과 만났을 때도 이야기는 잘 됐지만, 정부가 덤벼서 스케줄을 만들고 방해해서 잘 안 됐다는 게 김 전 회장의 주장이다. 김 전 회장은 “‘대우가 곧 망할 수 있다’, ‘워크아웃에 들어가야 한다’고 정부 사람들이 나서서 얘기하는데 어떻게 딜(거래)이 제대로 진행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는 빅딜을 막은 것도 정부라는 주장을 이어갔다.
“삼성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빅딜이 깨졌잖아요? 나는 그 사람들이 삼성차의 법정관리를 유도했던지 미리 양해했다고 봐요. 우리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려고 했을 때에는 형사처벌하겠다고 우리 경영진들에게 온갖 협박을 다했어요. 만약 빅딜이 됐다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었을 거에요.”
김 전 회장은 관료들이 스스로 얘기하던 ‘구조조정’과 반대 결과이기 때문에 빅딜을 막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빅딜이 된 다음에 대우를 망하게 하면 처음부터 빅딜을 잘못 추진한 거라는 비난을 받게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빅딜이 깨지는 것이 제일 좋았을 겁니다. 말로는 빅딜만 되면 해결해주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거지요. (빅딜이 진행되는 동안)이헌재씨를 한두 번 만났는데 ‘대우를 어떻게 부도야 내겠습니까? ’라고 말해요. 그러면 회사를 살리는 쪽으로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헌재씨가 그런 것은 법정관리로 가는 것을 막고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 지분 다 내놓게 하고 워크아웃, “뇌관을 제거했다”
삼성과의 빅딜이 무산되고 1999년 7월 김 전 회장은 사재 출연 1조3000억원을 포함해 13조원을 채권단에 맡기고 자동차 부문과 ㈜대우 등 8개 계열사 회생에만 전력하겠다는 ‘대우 유동성 개선을 위한 자구방안’을 내놨다. 김 전 회장은 이것이 정부가 금융 지원과 8개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서 낸 자구안이었지만 결국 뒤통수를 맞았다고 했다.
- ▲ 대우전자 빅딜에 반대하는 근로자들의 명동 집회 모습/조선일보 DB
“정부가 처음 약속대로 10조원을 지원해줬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4조 원만 돈을 줘요. 그것도 1주일간 시간을 끌다가. 그러니까 시장에서 아무 인정을 못 받고 똑같은 형태로 (유동성 위기가)다시 시작됐어요.”
그는 이것이 지분을 다 내놓게 한 뒤 관료들 마음대로 대우 계열사를 처리하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상적인 워크아웃에서는 기존 경영진을 인정해주고 경영진과 채권단이 협력해서 기업을 살리면 경영권을 돌려주지만, 관료들이 그렇게 하기 싫었다는 것. 특히 삼성은 법정관리를 허용하고 대우는 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생각이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자구안이 나온 당일 기자간담회에서 “김우중 회장이 말한 퇴진 시한과 관계없이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조만간 손을 뗄 것으로 안다”면서 “이번 발표로 뇌관 제거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순간부터 이미 대우는 해체 수순으로 갔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시각이다.
“법정관리로 가면 법원에서 법절차에 따라 해결하니 자기들 마음대로 못 하게 되지요. 우리가 순진하게 사재도 출연하고 담보를 다 내놓으니까 워크아웃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예요. ‘뇌관을 제거했다’는 것이 채권시장 안정 핑계를 댔지만 결국 나를 대우그룹에서 제거했다는 얘기지요.”
강봉균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튿날 “구조조정이 끝나면 김 회장의 지분은 모두 없어진다”면서 “소유권을 포기한 것과 같다”고 했다.
강 전 장관이 “선택은 시장의 신뢰를 잃은 부실기업이 부도를 내고 파산하느냐 아니면 부실경영의 책임을 물어 경영주를 퇴진시키고 채구무조를 재조정해서 채권금융단의 관리체제로 가느냐의 길 뿐이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사재와 담보를 내놓으면 10조원 자금을 지원해주고 8개 계열사를 경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그렇다면 처음부터 지키지 않을 약속을 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면서 “워크아웃으로 몰아가려고 맘은 먹고, 거짓말로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사재와 담보를 받아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 유럽·아프리카 출장을 떠났다. 여러 경로로 해외에 나가 있으라는 얘기가 들어왔고 DJ에게 전화해서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해서 잘 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주장이다. 이기호 경제수석과도 만나서 다짐을 받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은 2005년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 대우차 헐값에 GM에… 한국 경제에 피해 입혀
김 전 회장은 이후 해체된 대우의 각 계열사가 대부분 정상화됐다는 점을 들어 당시 대우를 부실로 낙인 찍은 것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대우의 12개 계열사 장부상 자산가치 91조9000억원이 실사 결과 30조7000억원 줄어든 61조2000억원으로 나온 것에 강한 불만을 표했다. 금융감독원 지시를 받은 회계법인이 기계 설비는 고철 값으로 계산하고 공장 건물은 아예 값을 안 치는 등 가치가 있는 자산까지 50% 또는 0%로 평가했다는 것.
대우 측 실무진들은 12억 달러(약 1조5000억원)짜리 파키스탄 건설공사를 100% 손실처리한 것, 리비아 원유수출대금 1조원을 100% 손실처리한 것, 1조원 들여 자동차 3종 개발한 것도 무형자산 인정하지 않은 것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김 전 회장은 특히 대우자동차를 GM에 헐값에 넘긴 것을 가장 큰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 ▲ 1999년 1월 8일 대우차 빅딜에 반대하며 구미공장 이직원들이 차량 시위를 벌이는 모습/조선일보 DB
“경제팀이 잘못 판단해서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고 봅니다. 처음 워크아웃 할 때부터 대우차를 쓰레기 취급했으니까요. GM이 대뜸 우리와 협상하던 가격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값에 사겠다고 한국 정부에 편지를 보낸 것도 그것 때문이지요. ‘기술 자립이 어려웠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에요. 그러면 GM이 왜 우리와 다시 합작을 하자고 제안합니까? GM은 우리가 독자 개발한 모델이 탐났으니까 합작하자고 한 거예요. 남들은 없는 것도 잘 포장해서 비싸게 팔려고 하는데 한국 정부는 그때 우리가 잘 가지고 있는 것도 쓰레기라고 대문짝만 하게 얘기해놓고는 이 물건 살 사람 없느냐고 찾아다니고 있었던 셈이지요.”
김 전 회장은 GM이 대우를 거의 공짜로 인수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부실자산 다 빼고 우량 자산만 골라서 가질 수 있게 한데다, 1조원 이상을 투자한 신모델도 그냥 넘겨줬고, 대우중공업에 있던 티코 생산 라인도 대우차 팔 때 함께 줬다는 것 등이 이유다. 김 회장은 “GM이 현찰 4억불밖에 내지 않는데 산업은행이 20억불 자금 지원을 해줬다”면서 “정부가 우리를 워크아웃에 집어넣으면서 실사했을 때 청산 가치로 나쁘게 평가했는데도 대우차 자산 가치가 110억불(약 13조원)가량 나온 것과 비교하면 한국 경제가 110억불의 돈을 날린 셈”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 자동차 산업 구도를 봐도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의 2사 체제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독과점 체제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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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정상회담 막후 추진
"김정일 국방위원장,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에 반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아버지 같은 분…특혜는 없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노태우, 김영삼 정부 시절 대북 특사로 임명돼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했다고 밝혔다. 1993년 1차 북핵위기 때 김 전 주석이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했을 당시에도 김 전 회장이 막후에서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대북 특사로 활동할 당시 김 전 회장은 당시 김일성 전 주석을 20여차례 만났으며, 인간적으로 깊은 신뢰관계를 형성했다고 회술했다. 그는 1991년 남북 정부 간 화해와 협력에 대한 첫번째 합의문인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추진했을 당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강하게 반대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21일 조선비즈가 단독 입수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에서 김 전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나와 같은 민간인이 북한과 먼저 접촉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나를 아예 특사로 임명해서 북한에 다닐 수 있도록 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총무처에서 관인 찍어 특사 임명장을 받고, 그걸 (북한에)제시하고 협상을 시작했다”면서 정부측으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은 특사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 ▲ 북한을 방문중인 김우중 대우그룹회장과 수행원등 일행 10명이 1992년 김일성을 만나 찍은 사진. 앞줄 한가운데의 김일성 왼쪽이 김우중 회장이다/조선일보 DB
그가 처음 북한을 방문했을 때는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1980~1988년)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1988년~1993년), 김영삼 대통령(1993~1998년) 재임기 동안 북한을 다녔다고 밝혔다. 정부 공인 특사 역할을 한 것은 노태우 정부 때다. 그는 방북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한 번은 유럽 정부의 안보담당 보좌관 하던 친구가 ‘북한에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해왔는데, 정부에 얘기했더니 다녀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은 정부 특사로 활동한 것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결을 추진했을 때부터라고 소개했다. 그는 “남과 북이 다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2년 반 넘게 열심히 일했다”면서 “내가 그 바쁜 중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북한에 다녀왔다”고 회술했다. 그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추진했던 과정에 대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세 명이서만 스무 번 이상 만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당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반대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떠올렸다. 김 전 회장은 “김 위원장 측은 (남북대화에)반대했다. 김 주석은 하려고 했는데...”라면서 “합의서를 하는 데 문제가 생기니까 김 주석이 화가 나서 한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시위를 벌인 모양”이라고 전했다. 김정일 전 위원장 측의 반대 의지를 꺾기 위해 김일성 전 주석이 칩거했고, 그 결과 김 전 위원장이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에 합의했다는 게 김 전 회장의 설명이다.
김 전 회장은 노태우 정부 당시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발판 삼아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됐었다는 비화(秘話)도 공개했다. 그는 “(당시)정상회담을 전제로 기본합의서를 추진했다. 성사되면 역사상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되는 거였다”고 떠올렸다. 그는 “(기본합의서가 체결된 뒤)노태우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하러 북한에 가시라고 권했다”면서 “그런데 결정이 계속 지연됐다. 북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노 대통령이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알지 못하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떠올렸다.
김 전 회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뛰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때는 특사 같은 직함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역할을 한 것은 없지만,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을 하겠다는 언질을 받아놓은 게 있어서 YS가 정상회담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전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 사망 직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중재로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된 과정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은 “내가 북한에 들어가 있을 때 카터가 왔다”면서 “그래서 김 주석에게도 카터와 잘 하셔야 한다고 얘기하고 나는 겉에 드러나지 않는 걸로 했다”고 전했다. 이어 “나는 김 주석에게 빨리 정상회담을 하자고 설득했다”면서 “그래서 카터를 핑계 대서 정상회담을 하게 됐다. 나는 카터가 (북한을) 떠난 뒤 (남한에)돌아왔다”고 덧붙였다.
김 전 회장은 이같이 북한을 수시로 방문했음에도 자신의 행보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 때는 내가 북한에 그렇게 많이 다니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면서 “중국에 가면 거기서 이북 패스포트(passport·여권)받아 VIP 수속 하고,나올 때도 그걸로 수속해서 나왔으니까…”라고 소개했다.
- ▲ 책 '김우중과의 대화'의 일부/강도원 기자
그는 김일성 주석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가까웠다”면서 “(한번은)와이프(정희자 아트선재센터 관장)와 함께 갔는데, 김 주석이 와이프의 직선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을 더 좋아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다만, 그는 “그 때가 동구권이 무너지던 때였는데 김 주석을 만나보니 국내(남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데 해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면서 김 주석이 국제정세에는 어두웠다고 떠올렸다. 또 그는 “남한이 민주화 등으로 흔들리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남한상황이)된다고 하길래 ‘그런 것이 아니라 남한을 버드나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바람이 불면 한쪽으로 가고 바람이 그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아 그러냐?’고 했다. 밑에서 (김일성에게) 보고야 굉장히 유리한 쪽으로 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김 전 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는 “김 주석은 (남북관계를)어떻게든 잘하려고 했는데 김정일 위원장은 달랐다”고 회상했다. 그는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의 차이이기도 하고, 기본적인 철학도 달랐던 것 같다”면서 “거기 사람들은 김 위원장을 더 무서워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김 위원장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더 관심이 많았다”면서 “그쪽 사람들 하는 얘기가 김 주석은 기분 좋으면 다 해준다고 하더라. 김 위원장측은 그게 무서운 거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박 전 대통령과의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우가 수출에 기여한 것 때문에 1969년부터 매년 산업훈장을 받았는데, 나를 좋게 보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 없이 훈장만 주는 데 나한테는 이것 저것 물어보시고...우리 부산공장도 방문하셨다. 그 후 고민이 생기면 일 년에 몇 번씩 청와대로 나를 불러서 얘기를 들으셨다. 비서관 없이 단독으로..”
- ▲ 책 '김우중과의 대화'의 일부/강도원 기자
그는 또 박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께서는 나를 아들처럼 아껴주셨다. 나를 ‘김 사장’이나 ‘김 회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우중아’라고 부르셨다. 나도 박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다”면서도 “박 대통령께 내가 부탁한 것이 실질적으로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하는 박정희 정부와의 유착설(說)에 대해서는 “우리가 (박 대통령)정부와 가까웠던 것은 맞는 얘기”라면서도 “그런데 그게 정부가 골치 아파하는 일들을 해줬으니까 그런 거지 우리가 로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같은 언급은 1970년대 대우가 한국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대우조선공사 옥포조선소(현 대우조선해양), 새한자동차(구 대우자동차, 현 GM대우) 등을 인수하며 중화학공업으로 진출한 것이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시책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내가 중화학산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면서 “정부가 나한테 떠맡기다 보니까 수의계약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경제발전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들이 합심해서 잘해야 된다”면서 “합심해서 노력하는 걸 놓고 ’정경유착‘이라고 매도하면 안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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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는 대리에게 2000만달러 계약할 수 있는 자율권 줬다"
“사람 잘라서 이익 늘리는 사람을 어떻게 경영자라고 할 수 있나.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직원들을 데리고 어려울 때도 잘 이겨나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경영자다. 일 시킬 때는 같이 열심히 하자하고 경영이 어려워지면 고용 유지 못 한다며 나가라는 건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사람 자르는 건 회사가 망할 때나 할 수 없이 하는 거다.”
21일 조선비즈가 단독으로 입수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초본에서 김 전 회장은 IMF 위기 당시 ‘경영의 달인’으로 추앙받던 잭 웰치 GE 회장의 경영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웰치 회장은 매년 하위 10% 직원은 잘라내고 상위 20% 직원에게는 스톡옵션 등으로 인센티브를 더 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GE의 시가총액은 웰치 회장이 부임한 1981년 140억 달러에서 2004년 4100억 달러로 30배 가까이 뛰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IMF 직후 대기업들이 대규모 정리 해고를 하고 경쟁력 강화를 위해 웰치식 경영을 받아들인 바 있다.
- ▲ 대우차 정리해고 반대 집회 모습/조선일보 DB
김 회장은 이를 전면 반박했다. 그는 “직원들이 잘릴 게 무서워서라도 열심히 일하도록 하겠다는 건 비인간적이다. 직원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것”이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업 이익만 늘리겠다고 하면 그런 식으로 할 수 있지만, 고용을 줄이지 않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지 먼저 잘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아무리 불황이어도 성장하는 분야나 성장하는 지역이 있다”며 “가장 큰 상생과 복지는 기업이 고용을 유지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근로 시간을 줄이고 일자리 셰어링(공유)을 먼저 해야 한다
- ▲ 김우중과의 대화 회고록 중 일부
김 회장은 “직원을 막 잘라서는 국가 경제도 좋을 수가 없다”며 “고용도 유지 못 하고 억울하게 직장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회에 불만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주가 올리는 것을 경영 목표로 세워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IMF 때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주식 투자자 위주로 시스템을 만들어 대주주들이 (장기 기술개발) 투자를 제대로 못 하고 있다”며 “처음부터 주가만 쳐다보는 경영은 기업을 제대로 키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단기 이익을 원하는 주식 투자자들은 투기꾼이다. 주식을 오래 들고 그 회사를 내 것이라고 살피는 사람이라야 주인으로 대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경영자들에게도 일갈했다. 그는 “명예를 위해 일하는냐 돈을 위해 일하느냐 여기에서 차이가 난다”며 “돈을 벌기 위해 (향락, 부동산 투기, 중소기업 영역 침범 등) 모든 것을 하겠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어느 정도 되면 돈은 언제든 벌 수 있다. 그 시기가 빨리 오면 그 후 명예 지키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말했다.
- ▲ 김우중과의 대화 회고록 중 일부
한편 김 회장은 과거 대우의 세계 경영과 관련해 우리나라가 가진 경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미국 등 선진국 회사들 가보면 1년에 절반밖에 일하지 않고 하루에 8시간만 일하고 정신적으로 해이해져 있다”며 “일이 너무 분리돼 있어 연구하는 사람은 연구만 하고 현장에 적용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리고 결재라인이 단계마다 있다 보니 밑에 사람들은 책임지고 일하려 하지 않고 위에다 올려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GM도 엉성한 게 많다. 차 하나 만드는데 3~5년씩 걸리고 디자인 하나만 붙잡고 그렇게 오랜 시간 보낼 필요가 있나”라며 “㈜대우는 대리에게 2000만불(약 205억원)까지 계약할 수 있는 자율권을 줬다. 본인들도 책임의식을 갖고 일이 빨리 처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과의 경쟁 문제에 대해서는 우선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리비아 같은데 우리가 먼저 해외건설을 개척해서 나가면 그 후에 로비해서 뚫고 들어오는 회사들이 있었다”며 “다른 데서 우리 대기업 간에 덤핑하는 것도 문제였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그런 일이 있으면 대우가 웬만하면 양보했다. 한국 기업들이 해외에 많이 진출하고 같이 잘되면 나라에 좋은 거라고 실무자들을 설득했다”며 “해외에 나가서도 국익에 대한 개념을 갖고 사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IMF 이후 정부 경제정책이 산업계 등 실물경제 논리와 거리를 두고 금융시장의 논리대로 실행된 것이 최근의 양극화 등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금융과 산업의 균형이 파괴됐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과거 정부가 조직 개편을 잘못했다. 예전에는 상공부에서 산업발전에 관한 목소리를 내고 재무부가 금융 쪽 목소리를 내고 경제기획원이 균형을 맞춰줬다”며 “하지만 YS(김영삼 전 대통령) 때부터 재정경제원에 권한을 다 주니 은행들 좋은 방향으로만 정책이 만들어졌고 은행들이 원하는 대로 가계대출, 카드대출, 주택담보대출을 많이 늘려 중산층이 몰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경제 한다면서 실제로 한 것은 금융기관들 좋은 쪽으로 한거다”며 “경제 기획원처럼 경제 정책을 전체적으로 총괄하는 부서를 만들어 산업 쪽과 금융 쪽 이야기를 같이 듣고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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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육성증언’을 15년만에 세상에 끄집어낸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기업인 김우중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사업가는 아니었다는 게 신 교수의 평가다. “신흥국에서의 사업은 단순히 비즈니스 대 비즈니스의 시장 거래가 아니라 정부, 정치인, 관료들을 상대해야 하고, 이들에게 경제발전의 정신과 수단을 함께 제공하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김 회장은 한국에서 이미 수출 선도, 중화학산업 부실해결 등을 통해 경제발전과 사업발전을 함께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신흥국을 상대할 때에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 교수는 김 전 회장에게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라는 타이틀을 붙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1일 조선비즈가 단독 입수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이 압축된 ‘철학서(書)’다. 신장섭 교수와 김우중 전 회장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 수출전사와 부실기업 해결 청부사 ▲2장 아프리카 공략, 국제 중재인, 그리고 ‘세계경영’ ▲3장 아시아 금융위기와 대우그룹의 해체 ▲4장 아시아 금융위기와 대우그룹의 해체-다시보기 ▲5장 ‘세계경영’의 노하우와 리더십 ▲6장 기업발전과 상생, 그리고 국가발전 ▲7장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등으로 구성됐다.
대우그룹 해체 과정과 김우중 회장의 남북 특사 활동 등이 처음으로 소개돼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지만, 이 책의 중심 테마는 ‘세계경영’이다. 제목을 통해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을 많다’고 외치는 이유다. 자본금 500만원짜리 섬유제품 무역상에서 출발해서 수출과 해외건설을 통해 개발도상국 출신 다국적기업 1위(해외자산 규모 기준)에 오른 과정을 반추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대학을 졸업하고 한성실업을 통해 무역업과 인연을 맺고, 1969년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도중에 대우실업을 창업해서 불과 10년만에 한국 최대 수출기업으로 발돋움한 스토리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대우의 세계경영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이지만, 김우중 전 회장의 도전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1976년부터 비(非)수교 국가인 수단에서 타이어를 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당시 수단 정부와의 협상에 대해 “우리가 투자도 하고 당신네 제품을 마케팅 해서 해외에 제값받고 팔아주고, 국내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들여오겠다고 했다”면서 “그래서 서로 합의해서 바로 영사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고 소개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수단의 경제개발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자세로 나섰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우중 전 회장은 수단에 진출하며 대통령 영빈관을 지어주며 수단산(産) 원면을 구입했다. 또 수단 최대 타이어공장을 지어주기도 했다. 수단 정부는 타이어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 날(1980년5월29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영빈관 건설과 타이어공장 등을 건설하는 데 약 1억달러가
소요됐는데 대우가 20%, 현지사업가가 20%, 나머지는 한국수출입은행 대출과 상업차관으로 충당했다. 김 전 회장은 이에 대해 “수출입은행 자금 지원받고 현지에서 필요한 돈은 옛날 재일교포 재산을 한국에서 반입하던 형식으로 현지에 물건을 들여와 팔아서 만들었다. 공사해서 벌고 공사비 마련하기 위해 들여온 물건 팔아서 벌고, 양쪽으로 크게 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대우의 수단 시장 진출은 우리나라 정부와 수단의 수교로 이어졌다. 수단을 발판삼아 대우는 나이지리아. 알제리, 모리타니,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4개국에 진출했고, 대우의 진출은 이들 4개국과 우리 정부의 수교라는 결실을 맺었다.
‘성공신화’로 불리는 리비아 사업은 김우중식 세계 경영 철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우중 전 회장은 리비아에서 건설사업을 하며 당시 국가수반이었던 무하마르 알 가다피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다피 국가수반은 당시 대우가 우조 비행장 건설 사업을 할 때 열흘 가까이를 공사 현장에 머무르기도 했다. 가다피는 우조 비행장 건설 현장을 방문 한 뒤 “대우야 말로 리비아가 녹색혁명을 이룩하는 데 참된 우군”이라고 극찬했다. 이같는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대우는 리비아에서 1981년 이후 약 100억달러의 공사 수주를 했다.
김 전 회장은 “가다피와는 리비아에 진출하고 한참 지나서 개인적으로 가까워졌다”면서 “가리우니스 의과대학 공사에 입찰한 것이 첫번째 진출(1977년)이고, 우리가 우조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을 때 카다피가 현장을 방문했고(1980년), 미국에 제재를 받은 뒤(1982년)에는 나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고 떠올렸다. 그는 “가다피가 정권을 잡고 한 일이 학교 짓고, 도로 닦고, 집 짓고 그런 일이었는데, 우리는 그쪽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면서 같이 사업을 키운다는 생각을 했다. 돈을 벌어도 다 갖고 가지 말고 절반은 그쪽을 위해 쓰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김우중식 세계경영은 국제분쟁의 중재자 역할도 했다. 리비아의 각종 대형 건설공사에 대우가 진출하며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적대적인 관계였던 미국과 리비아 간 중재에 나선 것이다. 1979년 리비아 시위대가 트리폴리 주재 미국 대사관을 불태운 이후 1982년 미국 정부가 리비아산(産) 원유 금수조치를 내리자, 가다피 국가수반은 김 전 회장에게 만남을 청했다. 김 전 회장은 “(가다피가)나한테 ‘미국과 관계가 좋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아주 좋다’고 하니까 (미국과)‘금수조치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데 중간에서 연결시켜줄 수 있냐’고 물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가다피의 요청을 받고 투자은행 라자드의 미국 은행장 등을 통해 미국 정부 고위층을 접촉했다. 김 전 회장의 중재를 통해 미국과 리비아의 특사들이 한국의 대우그룹 회장 사무실에서 만나기도 했다. 미국측은 김 전 회장을 통해 가다피 집을 폭격하기 전에 관련 정보를 전달해 가다피가 폭격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김 전 회장은 선진국 기업만 세계경영에 성공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선진국 기업은 능력이 많고 후진국 기업은 능력이 적다. 그래서 세계적 경영은 선진국 기업이 하고 후진국들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면서 “내가 일찍부터 일본, 미국 등 선진국에 있는 회사들을 가봤는데 그렇게 능률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선진국 기업들은)일단 1년에 절반밖에 일하지 않는다”면서 “하루에 8시간 일하고 휴가도 길다. 정신적으로도 해이해져 있는 것 같고...”라고 말했다. 그는 대우그룹의 세계경영의 핵심을 ‘주인 의식과 책임감’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우리는 처음부터 중간 관리자나 대리급들을 믿고 그 사람들에게 많은 책임을 줬다”면서 “(주)대우에서는 대리에게 2000만달러까지 계약할 수 있는 자율성을 줬다. 그러니까 본인들도 책임의식을 갖고 일이 빨리 처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남북 통일에 대해서도 ‘세계경영’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옛날부터 동북3성(지린성·랴오닝성·헤이룰장성)에 함께 진출해서 양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서 “북한을 직접 개방시키는 노력도 하고, 동북 3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개방시키기도 하고. 동북3성에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서 북한 사람들을 많이 데려다 쓰면 북한이 개방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북 3성 인구가 1억5000명인데, 남북한을 합치면 이 지역에 인구 4억명의 시장이 생긴다”면서 “북한 사람들이 아침에 동북 3성에 출근하고 저녁때 퇴근하도록 하는 등 이 지역에 진출하게 되면 북한 정부가 폐쇄하려고 해도 통제가 어려워진다”고 설명했다.
- ▲ 김우중 회장과 YBM 프로그램 참여 학생들이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 DB
최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고 있는 김 전 회장은 2012년부터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청년사업가 양성사업(GYBM)에 매진하고 있다. 1기에 이어 2기 수료생 전원이 베트남 현지 취업에 성공하면서 현지 기업의 반응이 뜨겁다. 지난해 시작된 3기부터는 정부의 해외취업 지원사업인 ‘K-Move’와 연계해 지원금도 받고 있다. 선발 규모도 크게 늘었다. 연봉 수준도 평균 3000만원 전후에서 4000만원 사이로, 베트남 현지에선 최고 수준이다. 4기부터는 파견 지역을 베트남뿐 아니라 미얀마로 확대한다. 김 전 회장은 젊은이들을 향한 조언을 구하자 이렇게 말했다. “신의를 지켜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정도되면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예를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돈을 버는)시기가 빨이 오면 그 후 명예를 지키는 시간이 훨씬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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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간에 걸친 잠복 취재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20일 오후 3시, 5톤 크기의 빨간 폐지 수거 트럭이 이슬비를 맞으며 인쇄소 정문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인쇄소 맞은편에서 폐지 수집 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40분쯤 지났을까. 짐칸에 폐지를 가득 실은 트럭이 텅 빈 인쇄소 마당을 뒤로하고 정문을 빠져나왔다.
트럭에 실린 여러 자루 중 분명 어딘가에 책 내용이 담긴 폐지들이 섞여 있을 터. 트럭을 쫓았다. 경기 파주를 출발, 수색역 주위를 돌던 트럭은 고양시 용두동에 위치한 한 폐지수거장에 멈춰 섰다.
트럭에서 내리는 운전기사를 붙들고 폐지 자루를 확인해 보고 싶다 부탁했다. ‘별사람 다 보겠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사이로 “마음대로 하시라”는 대답이 나왔다. 일일이 부댓자루를 열어 폐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폐지수거장은 최근 계속된 궂은 날씨에 이미 진흙밭이 돼 있던 상황. 비를 맞아가며 1시간을 뒤졌다. 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운전기사에게 달려가 남은 자루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자루 한 개가 남았다며 트럭 뒤를 가리켰다. 72시간의 기다림 끝에 김우중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의 내용이 담긴 폐지 뭉텅이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 ▲ 김우중 대화록 내용이 담긴 폐지로 가득한 자루 모습이다./박성우 기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회고록 입수 과정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일명 뻗치기라 불리는 밤샘 잠복취재는 물론, 비를 맞아가며 폐지수거장을 뒤져야 했다. 찾아가는 사무실마다 귀찮은 불청객이 왔다는 듯, 면박을 주기도 했다. 조선비즈는 72시간을 매달린 끝에 책 대부분을 복원할 수 있었다.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 대한 김우중 전 회장의 입장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만큼, 세간의 이목이 이 책 한권에 쏠려 있다. 저자 측은 책이 공개됐을 때 경제계는 물론, 정치권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책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심지어 출판사도 공개하지 않았다. 조선비즈는 하루라도 빨리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책을 입수키로 하고 취재에 들어갔다.
입수 작전은 저자 측에서 책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지난 18일부터 시작됐다. 책 유통과정을 알기 위해 출판사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서점조합연합회에 전화해 검색만으로 출간예정도서의 출판사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결과 출판사는 A사였다. ‘대우학술총서’와 ‘대우고전총서’를 출간한 업체다. 사무실 위치는 서울 남대문로 대우재단빌딩.
A사를 찾아가 먼저 책을 구매하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오히려 출판사는 영업방해라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세 차례나 찾아갔지만 결국 책은 구할 수 없었다. 대신 A출판사와 거래하는 인쇄업체 7곳이 적힌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책을 확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를 마련한 셈이다.
인쇄업체 7곳을 차례로 돌았다. 서울 충무로에서 경기 파주까지 120㎞ 가 넘는 거리를 다녔다. 물어보는 인쇄소마다 우리가 아니라며 손사래 쳤다. 단서는 우연한 곳에서 나왔다. 파주 출판단지 내 위치한 B인쇄소에서 버린 폐지에 ‘대통령’, ‘대우 해체’ 등의 단어가 박혀 있었다. 담당자를 만나 폐지를 사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인쇄소 담당자는 난색을 표했다. 결국 폐지 수거 차량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김우중과의 대화 책 모습
조선비즈는 지난 19일 밤부터 인쇄업체 근처에서 잠복 취재를 시작했다. 종일 차 안에 갇혀 폐지 수거 차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끼니는 물과 초콜릿으로 대신했다. 생각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몰래 잠입해 폐지를 들고 나올까 하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취재 윤리와 법을 어기면서까지 책을 구할 수는 없는 일.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20일 오후 5시 무렵 폐지수거장에서 책 내용을 인쇄한 폐지를 넘겨받아 취재 차량 트렁크에 옮겼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폐지를 분류하는 데에는 5시간이 넘게 걸렸다. 10여명이 100㎏이 넘는 양의 폐지를 밤늦게까지 쪽수별로 맞춰 보며 일일이 확인했다. 일부는 비에 젖어 찢어지지 않도록 드라이기로 말렸다. 찢어진 부분은 테이프로 붙여 가며 끼워 맞췄다. 아쉽게도 책의 20페이지 정도는 폐지를 찾을 수 없어 복원하지 못했다. 책은 저자인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와 김우중 전 회장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책 분량은 표지로부터 시작해 총 448페이지에 이른다.
- ▲ 책 '김우중과의 대화'의 폐지를 복원한 모습이다./강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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