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폭격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서석천 2011. 1. 11. 09:34
현대전은 전쟁의지가 勝敗를 결정한다. 연평도 도발을 통하여 드러난 국가 지도부의 전쟁意志 문제.  북한은 이스라엘을 닮고, 한국은 아랍을 닮아 가는가?

초계비행 중인 한국공군 F-15K편대.
  공산주의자들은 원래 지저분하게 싸운다. 변칙과 속임수가 장기(長技)이다. 뒷골목 싸움꾼이다. 이들과 싸울 때 저들이 만든 전장(戰場)에 들어가면 불리하다. 그들과 똑같이 뒷골목 싸움, 게릴라전, 기습전, 항공테러, 암살 등 비정규전으로 대응하여서는 승산(勝算)이 없다. 국제법이 통하는 정규전으로 싸워야 한다. 뒷골목이 아니라 규칙이 통하는 링 위에서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저들을 링 위로 끌어내야 한다. 2010년 11월 23일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찬스였다. 북한군이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 F-15와 F-16 여덟 대가 신속하게 출격, 연평도 상공에서 대기 중이었다. 사정(射程)거리가 긴 고성능 유도폭탄과 미사일을 싣고 있었다. NLL(북방한계선)을 넘을 필요도 없이 한국 영공에서 발사, 적(敵) 진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무기였다. 한국 공군은 늘 북한 공군과 붙으면 10 대 0으로 깰 수 있다는 자랑을 하고 다녔다.
 
  대통령과 군(軍) 수뇌부는 그러나 폭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얻어맞는 쪽을 선택하였다. 얻어맞는 게 체질이 된 군대요 대통령이기에 찬스가 와도 잡을 수가 없었다. 폭격명령이 떨어졌더라면 F-15K 전폭기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유도폭탄으로 적의 해안포대를 박살내고 도전하는 북한 공군의 낡은 미그23을 모조리 격추시켰을 것이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F-15가 주력(主力)인 공군이 미그23이 주력인 시리아 공군과 대결, 85 대 1로 이긴 베카 계곡 공중전이 재연(再演)되었을 것이다.
 
2009년 1월 가자지구로 진격하는 이스라엘 전차부대.

 
  최후통첩을 했어야
 
  적진(敵陣)을 초토화(焦土化)시켜 놓고 데프콘 3을 발동하면 한미(韓美)동맹 체제가 가동한다. 미군이 사령관을 맡은 한미연합사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 미군 사령관은 멋대로 권한을 행사하는 게 아니고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합의된 지시를 받는다. 즉, 미군이 개입하는 것이다. 겁이 나서 비행기도 타지 못하는 김정일(金正日)이 긴장된 한미연합군에 도전하는 것은 자살(自殺)행위임을 잘 알 것이다. 이때는 물론 미국의 항모(航母)전단이 한국 해역(海域)으로 전개된다.
 
  국민들과 국군은 불타는 적의 해안포 진지, 격추되는 미그23의 동영상을 구경하면서 환호하였을 것이다. 6·25 남침 이후 얻어맞기만 하였던 한국이었다. 이 화려한 대승(大勝)은, 김정일 정권의 기(氣)를 꺾고, 조국이 오랜 피해의식에서 탈출, 자신감을 회복,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11월 23일 놓친 기회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군 지휘부도 이런 대응을 건의하지 않은 듯하다. 국가 지도부는, 국군이 북한군에 지도록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가 꾸며 놓은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희한한 교전(交戰)수칙을 들먹이면서 “확전(擴戰)하지 말고 위기를 관리하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통령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찬스가 지나간 뒤였다. 그래도 기회는 남아 있었다. 북괴군은 포격 이후에도 재침(再侵)을 위협하고 위협사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적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우리가 전투기를 출격시켜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통하는 자위권(自衛權)의 발동이다. 대통령은 이것도 하지 않았다.
 
 
  전쟁의지의 대결
 
박승춘 전 국방부 정보본부장.

  지난 11월 29일 대(對)국민 담화 때도 찬스는 있었다. 여러 번 부도(不渡)어음이 된, ‘추가 도발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다짐하기 전에 김정일에게 최후통첩을 하였어야 했다. 예컨대 “12월 12일까지 전쟁범죄 행위에 대하여 사과하고 책임자를 문책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해안포를 철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위권을 행사할 것이다”고 선언, 공을 김정일에게 던지는 것이다.
 
  김정일이 연평도 사태를 일으킨 의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분석이 전개된다. 다수설(多數說)은 외부에서 긴장을 조성, 흔들리는 내부 체제를 단속하고 김정은 세습과정을 편하게 하기 위한 도발이란 주장이다. 박승춘(朴勝椿) 전 국방부 정보본부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다른 견해였다. 그는 대남적화(對南赤化) 전략에 따른, 2012년 대선(大選) 판을 겨냥, 전쟁공포증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발이라고 했다.
 
  “대낮에 민간 지역까지 포격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그 장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전쟁을 두려워하게 되면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고, 2012년에 친북(親北)세력이 다시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남한의 용공(容共)정권을 통하여 한미동맹을 해체, 남한을 적화한다는 게 그들의 불변(不變)의 전략입니다.”
 
  박 장군은 “북한정권이 대남적화 전략을 포기하고 체제유지에 주력한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판단”이라고 했다. 대남적화 전략을 포기하면 북한정권은 존재이유를 상실한다. 체제의 생리상 적화전략을 버릴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북한정권은 무력도발의 목표를 군사적 승리에 두지 않는다. 남한에서 벌어지는 정치판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연평도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응징으로 북측이 대패(大敗)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 남한에서 확산되어 종북(從北)세력이 집권할 수 있게 되면 정치적으로 이기는 것이 된다. 북의 도발은 한국인의 전쟁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란 이야기였다.
 
  박 장군은 “정부가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한미동맹이 유지되는 한 김정일이 절대로 전면전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 전쟁공포증 확산을 차단하여야 한다”고 했다. “국민들에게 전쟁은 없지만 적의 도발은 계속된다고 솔직히 알리고, 도발이나 국지전(局地戰)엔 적절히 대응할 것임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안보에 관한 한 국론(國論)이 통일되어 있으므로 적을 강력하게 응징할 수 있지만, 한국은 좌익들이 평화지상(至上)주의를 퍼뜨리고 정부와 여당은 안보를 경시, 그런 여론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김대중(金大中), 노무현(盧武鉉) 정권의 안보태세 해체행위가 북의 도발을 불러들였으니 그들이야말로 전쟁유도 세력이지요. 정부는 누가 진짜 전쟁 세력인지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1996년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한국은 준전시(準戰時) 상황이 되었지만 1년 뒤 국민들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2002년 6월 북은 서해교전으로 한국 해군 함정을 격침시키는 도발을 하였지만 그해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6년 10월 북은 핵실험을 하였지만 노무현 정권은 한미연합사 해체 계획을 밀어붙였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을 폭침시켰지만 그 직후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친북(親北)세력이 승리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관찰해 온 김정일 정권은 자신들의 도발이 안보세력을 결속시키는 것보다는 전쟁공포증을 증폭시켜 친북세력을 돕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연평도 도발이 한국인의 생각을 전쟁공포증으로 바꿀 것인지, 일전불사(一戰不辭) 쪽으로 바꿀 것인지에 따라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좌우될 것이다.
 
 
  ‘반격하면 전쟁 난다’는 誤判이 부른 2차대전
 
1936년 3월 라인란트로 진주하는 독일군.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단호히 맞섰다면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독일군은 후퇴했을 것이다.

  1936년 3월 7일, 3개 대대의 독일군이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하여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라인강 주변의 독일영토)로 진주(進駐)했다. 이때 히틀러가 독일군에 내린 명령은 “프랑스군이 나타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이 프랑스군과 정면승부를 하기엔 아직 역(力)부족이라고 판단하였다.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였더라도 독일군은 물러났을 것이고 독일 군부(軍部)가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히틀러를 몰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프랑스가 패망(敗亡)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왜 프랑스군은 안보의 생명선인 라인란트 완충지대가 독일군 주둔지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나? 프랑스 군부가 아주 패배주의적인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원수는 불법(不法) 진주한 독일군에 반격하면 전면전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므로 총동원령(總動員令)을 내린 뒤 반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방부도 이 판단에 동조하였다. 그런데 총동원령을 내리면 하루 3000만 프랑의 경비가 들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외채(外債)가 많아 국가부도 직전으로 몰렸고 선거를 앞두었다.
 
  프랑스 집권세력은 총동원령을 결단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독일군에 반격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을 찾아 나섰다. 외무장관을 영국으로 보내 “영국이 합세하면 독일군을 치겠다”고 압박한다. 영국이 냉담하게 나올 것임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국민들에게 영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거리를 만들었다. 프랑스 국민들도 결전(決戰)의지가 없어 정부의 애매한 태도를 수용하였다.
 
 
  마지막 기회를 놓친 英·佛
 
제2차세계대전 발발시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던 모리스 가믈랭 원수.

  연평도에 대한 북괴군의 포격이 있은 직후 한국군의 지휘부서와 대통령이 과감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도 ‘우리가 전투기로 적의 해안포대를 폭격하면 전투가 확대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국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프랑스 군대처럼 수세적(守勢的) 자세를 취하고 만 것이다. 프랑스가 영국을 끌어들이려 한 것처럼 한국도 미국의 도움을 청하였다. 영국과 달리 미국은 신속하게 항모전단을 전개하였다.
 
  프랑스 군부가 독일군을 치면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각에 보고한 것은 전쟁을 기피하기 위한 고의적(故意的) 과대평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민간인들에게 그렇게 겁을 주어야 전쟁을 말리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39년 가을과 겨울 프랑스 군부는 똑같은 실수를 한다. 이때 독일군의 주력은 폴란드 침공에 투입되어 서부전선(戰線)에선 프랑스 군사력이 독일군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이때 프랑스가 선제(先制)공격을 하였더라면 독일군은 손을 들었을 것이라는 게 전사학자(戰史學者)들의 거의 일치된 평가이다. 이때도 프랑스군은 가믈랭 원수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개전(開戰)을 결심하지 못하여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격전(電擊戰)으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뒤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가 있었으면 독일군의 기습은 성립할 수 없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르덴 돌파전이 성공, 프랑스는 6주(週) 만에 손을 들었다. 역사는 두 번 기회를 놓친 프랑스를 버린 것이다.
 
  <라인란트 점령은 군사작전으로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럽에 커다란 새로운 전망을 열어 놓았으며, 라인강(江)의 다리를 건너 3개 대대가 진주한 것으로 유럽의 전략 정세가 뒤흔들렸을 뿐 아니라, 다시는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히틀러(그리고 영국에서는 처칠)뿐이었던 것 같다. 1936년 3월 서구(西歐)의 두 민주주의 국가는 중대한 전쟁의 위험 없이 나치스 독재자와 그 제도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
 
 
  舊正공세의 교훈
 
1968년 구정공세 당시 베트남 후에시(市)에서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는 미군들. 구정공세 이후 미국에서는 반전여론이 거세졌다.

  독(毒)가스를 쓴 1차 세계대전은 ‘화학(化學)의 전쟁’, 원폭(原爆)을 쓴 2차 대전은 ‘물리학의 전쟁’, 월남전쟁은 ‘심리학의 전쟁’이라 불린다. 월맹(越盟·북베트남)이 심리전으로 미국의 전쟁의지를 꺾었기 때문이다.
 
  핵폭탄과 신예 전투기로 무장한 미국이 거지군대 같은 월맹군에 진 것은 무기가 뒤져서가 아니다. 군인 숫자가 모자라서도 아니다. 돈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국가지도부의 전쟁의지가 월맹 지도부의 혁명전쟁 방식에 의하여 꺾여 버렸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패배한 것도 전쟁의지가 강한 거지군대가 이긴 경우이다. 전쟁에 대한 최근 연구는 전쟁의지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군이 천안함 폭침, 연평도 도발 등 계속해서 북한군에 패배하고 있는 것도 무기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전쟁의지에서 북한군에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전쟁의지가 이명박의 전쟁의지를 압도하고 있다. 김정일은 고물 해안포에다가 전쟁의지를 더하여 연평도를 공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 정부와 군은 최신예 전투기에서 전쟁의지를 빼버림으로써 고철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전쟁의지가 약하면 기회는 위기로 둔갑한다.
 
  1968년 1월 30일 월남의 공산군(월맹 정규군과 베트콩)은 휴전약속을 깨고 유명한 구정(舊正)공세를 시작하였다. 공산군은 전국에서 서른 곳의 목표물을 일제 공격하였다.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건물 안으로까지 쳐들어왔고 미군 사령부를 쳤다.
 
  군사적으론 공산군의 대패였다. 게릴라들이 숨어서 싸우지 않고 미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한 것이다. 그들이 유리한 정글이 아니라 대로상(大路上)에서, 도시에서 싸우니 화력이 우세한 미군과 월남군 등 연합군의 밥이 되었다. 특히 베트콩은 구조적인 대타격을 입었다. 그 후 월남전은 월맹 정규군이 주도(主導)하게 되었다.
 
 
  군사적 승리가 정치적 패배로
 
월남전을 월맹의 승리로 이끈 보 구엔 지압 장군.

  군사적으로 대패한 공산 월맹측은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승(大勝)하였다. 미국 존슨 행정부의 전쟁의지를 꺾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68년 3월 31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극적인 연설을 하였다.
 
  “북위(北緯) 20도 이북(以北)에 대한 폭격을 일방적으로, 그러나 부분적으로 중단한다. 만약 공산군측이 협상에 응하면 완전히 중단한다. 미군의 증파(增派)를 중단한다. 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서 월남 평화 협정을 맺은 헨리 키신저는 ‘외교술’이란 책에서 “이 연설은 전후(戰後) 미국 역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대통령의 결정 중 하나였다”라고 했다. 실패한 구정 공세에 의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공산군을 계속해서 압박하였더라면 훨씬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을 할 수 있었는데, 일방적인 양보를 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월남전의 패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존슨 대통령의 전쟁의지는 왜 부러지고 말았는가? 여론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61%는 ‘매파(강경대응 지지층)’였고, 23%가 ‘비둘기파(온건대응론자)’였다. 70%는 북폭(北爆)의 지속을 지지하였다.
 
  문제는 언론과 식자층의 비관론이 정치인들에게 준 영향이었다. 영향력의 절정에 있던 CBS 뉴스 진행자 월터 크롱카이트는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다. 우리가 확전하면 적도 확전으로 대응한다. 끝없는 지구전(持久戰)으로 갈 것이다”는 요지의 논평을 했다. 존슨 대통령의 월남전을 지지하던 <월스트리트저널>과 <타임>지(誌)도 반전(反戰)으로 돌았다. 시사논평가 월터 리프먼도 “월남전에서 우리는 질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였다. 언론이 만든 비관적 분위기에 흔들린 것은 정치인들이었다. 맨스필드, 풀브라이트 같은 대정치가들도 확전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협상제의를 월맹측은 즉시 받았다. 그 전의 협상제의들을 거부해 오던 월맹이 서둘러 협상테이블로 나오기로 한 것은 구정공세의 실패로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1996년 월맹의 전쟁영웅 지압 장군은 CNN과 인터뷰하면서 “구정공세의 전략적 목표는 미국측으로 하여금 확전을 중단시키고 협상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존슨 대통령의 협상제의는 미국이 월남전에서 공산군에 이길 생각이 없다는 공개선언이었다.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확신하게 된 공산월맹측은 협상을 질질 끌면서 ‘완전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파리에서 시작된 평화협상은 5년간 이어졌다. 월맹측은 ‘미군철수와 월남정부의 전복(顚覆)’를 요구하였다. 이는 미국의 무조건 항복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은 미군철수는 약속하였으나 사이공 정부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미국과 월맹이 주도한 협상에서 사이공 정부는 들러리로 전락하였다.
 
  1973년 초 미국과 월맹측은 평화협정을 맺는다. 주월(駐越)미군은 철수하고, 월남에 들어온 월맹군은 그대로 두고 휴전하기로 하였으니 사이공 정부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월맹은 휴전협정이 발효되자마자 그것을 어기면서 전투를 재개하였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그러나 이를 응징할 의지를 상실하였다. 미국의 언론과 의회가 휴전(休戰)협정 준수를 강제할 미군의 개입을 막았다. 1975년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빅3’는 特攻작전통
 
군 장교 수료식장에서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끝).

  이스라엘 정부는, 11월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직후 직설적인 용어를 사용, 강력하게 비난했다. 한국 정부의 반응이 ‘확전 말라’는 수준이었는데 우리보다 더 분노한 모습이었다.
 
  리베르만 외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건은 ‘미친’ 체제를 저지하고 쓰러뜨려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케 한다”고 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도발 이후 “우리도 이스라엘식으로 보복해야 한다” “우리도 이스라엘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들이 많이 나왔다. 이스라엘, 월맹, 북한정권의 공통점은 지도부의 강력한 전쟁의지이다. 이스라엘은 국가 지도부의 구성과 생리가 한국과 너무 다르다.
 
  이스라엘의 현(現) 국가지도부는 ‘특공대’라 불릴 만하다. 대통령 시몬 페레스는 국방차관 시절엔 비밀 핵(核)개발을 주도하였다. 국방장관으로서 1976년 7월 4일에 있었던 엔테베 작전을 총괄적으로 지도한 사람이었다.
 
  엔테베 작전은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이 이스라엘 사람 약 100명이 탄 에어 프랑스기를 납치, 우간다의 엔테베에 착륙시켜 놓고 이스라엘에 수감된 테러리스트 석방을 요구한 데서 발생하였다. 특공대원을 실은 이스라엘 공군기 석 대가 엔테베 공항에 착륙,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작전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제압, 인질(人質)들을 구출한 사건이다. 이 특공작전의 지휘관은 요나탄 네타냐후 중령이었다. 그는 적탄(敵彈)을 맞고 죽었다. 이 작전에서 죽은 유일한 이스라엘 군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 영웅의 동생이 현재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이다.
 
4차 중동전 당시 육군 소장으로 수에즈 도하 작전을 성공시킨 아리엘 샤론 전 총리 (오른쪽).

  베냐민 또한 특공대원이었다. 1972년 5월 벨기에의 항공사 사베나 여객기가 1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채 납치되어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하였다. 이 인질 구출작전에 투입된 이스라엘 특공대의 지휘관은 참모총장·총리를 거쳐 현재 부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있는 에후드 바라크이다. 총리 네타냐후는 그때 바라크의 부하였다. 네타냐후는 구출작전 때 동료가 쏜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대위로 제대한 그는 미국에 건너가 하버드와 MIT에서 공부하였다. 1973년 제4차 중동전(中東戰)이 터지자 귀국, 전투에 참여한 뒤 다시 도미(渡美)하였다.
 
  역대 이스라엘 총리 중 1996년에 암살된 라빈과 바라크는 3군 참모총장 출신이고, 샤론은 4차 중동전쟁 때 수에즈 운하 도하(渡河) 작전을 성공시킨 전쟁 영웅이다. 전임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는 장교 출신이다. 사병으로 종군(從軍)하였던 이 사람은 국회의원 시절에 장교 교육을 따로 받았다. 이스라엘 내각엔 군 장성 출신들이 많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성격이 된 ‘특공정신’은 특공(特攻) 전력을 가진 이들을 중용(重用)한 데서 생긴 것이다. 한국 국가 지도부의 ‘빅 3’인 대통령, 국무총리, 여당 대표는 군대 경험이 없고, 이스라엘의 빅 스리인 대통령, 총리, 부총리는 특공작전 전문가들이다. 이게 국격(國格)의 차이로 나타난다. 한국도 내각, 국회, 청와대에 장교 출신들이 많이 들어가면 연평도 도발과 같은 사건에서 대처가 달라질 것이고 국가의 분위기도 많이 바뀔 것이다.
 
 
  부시 만류 묵살, 시리아 원자로 폭격
 
시리아 원자로를 폭격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

  2007년 여름 이스라엘 총리 올메르트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서 짓고 있는 원자로(原子爐)를 미군이 폭격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부시는 안보관계 참모들에게 검토를 시켰다. 답은 부정적이었다. 특공대를 보내 부숴 버리는 방안도 검토하였으나 위험이 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국 CIA 부장 헤이든은 문제의 시설 안에 북한의 도움으로 만들어지는 원자로가 있을 가능성은 높지만 핵무기 제조시설이 보이지 않아 시리아의 핵무장 의도에 관한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부시는 올메르트 총리에게 “우리 정보기관이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시설이란 점을 확인하지 않는 한 다른 주권(主權)국가를 공격할 순 없다”면서 외교적 해결을 제의하였다.
 
  이때 올메르트는 “시리아의 핵개발 계획은 우리에겐 생존 차원의 문제”라면서 “귀하의 전략은 나에겐 매우 실망스럽다(Your strategy is very disturbing to me.)”고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부시는 통화를 끝낸 뒤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그래서 이 사람이 좋단 말이야. 그는 배짱이 있어”라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2007년 9월 시리아의 원자로 시설을 폭격, 몽땅 부숴 버렸다. 때린 쪽은 물론이고 얻어맞은 시리아도 침묵하였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사전(事前)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국가생존에 관련된 문제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해결해야지 아무리 우방국이라도 외국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 지도부의 확고한 철학이다.
 
  2009년 1월 이스라엘을 포격하는 하마스 조직을 치기 위하여 가자 지역을 침공했다. 그들이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하마스 섬멸 작전은 국제여론에서 많은 지탄을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엔 안보리가 즉시 휴전을 결의한 데 대하여 올메르트 당시 총리는, “우리는 이를 무시하기로 하였다. 이스라엘 국가는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외부기관이 결정권을 가지도록 동의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 국방군은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믿을 것은 우리뿐이다”
 
군 참모총장 시절의 이츠하크 라빈(왼쪽)과 에후드 바라크. 두 사람 모두 후일 이스라엘 총리가 됐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전에 대하여 국제여론은 비판적이었지만 이스라엘 국내에선 지지여론이 90%나 되었다. 가자 전투에서 1202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고, 5000명 이상이 부상, 이스라엘 군인은 10명이 전사(戰死), 2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발표되었다.
 
  2010년에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로 구호품(이스라엘은 위해물품이 있다고 주장)을 싣고 가던 터키 배를 공해(公海)상에서 정선(停船)시키고 반항하는 운동가 9명을 사살하였다.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높았으나 네타냐후 총리는 직후 연설에서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이스라엘군의 조치를 옹호하면서 배가 또 들어오면 똑같이 저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뒤부터 구호선은 이스라엘 군대의 정선, 검문(檢問), 검색(檢索)에 순응하였다.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의 특공작전은 이스라엘식(式)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학살과 핍박의 희생양으로 오랫동안 경멸받던 나약한 유대인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행동, 또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러 버리는 모진 자기다짐인 것이다. 그들은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여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특공작전도 사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대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쏘아붙이면서 “믿을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서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0년 6월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이란에 대한 추가제재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12표, 반대 2표로 통과시켰다. 브라질과 터키가 반대표를 던졌으며 레바논은 기권했다.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당초 추가제재에 부정적이었으나 이스라엘이 강하게 중국을 압박해 결의안에 동조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하였다. 이스라엘은 지난 2월 중국에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중국측에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지를 담은 비밀문서를 보여주곤 국제사회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을 폭격하겠다고 통고하였다고 한다. 그럴 경우 원유(原油)의 11%를 이란에 의존하는 중국 경제가 어떤 타격을 받게 될지도 자세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스라엘의 전력(前歷)으로 보아 이런 압박이 공갈이 아님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 대표단을 보내 “만약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을 중국이 계속 감싼다면 우리는 북한의 잠수함 기지와 해안포대를 폭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었을 때 광저우(廣州) 아시안 게임이 제대로 치러지겠는가”라고 압박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페레스, “지도자는 앞에 서는 사람”
 
  지난 여름 방한(訪韓)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은,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로부터 “대통령께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스라엘은 핵보유국입니다. 핵을 가진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대해 핵을 갖지 말라고 요구할 도덕적 권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하였다.
 
  “이스라엘의 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를 먼저 공격한 적이 없어요. 위협을 받는 건 우리입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혹이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리고 이런 의혹 자체가 억지력이 될 수 있다면 그걸 왜 마다하겠습니까. 핵을 이용하는 것보다 핵보유 의혹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지요. 예전에 아랍연맹 사무총장이 내게 이스라엘 핵시설이 있다고 의심받는 지역을 좀 가 보자고 해요. 내가 말했지요. ‘내가 미쳤습니까? 가 보면 아무 것도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의혹이 해소되고 나는 목이 잘릴 거요.’ 의혹으로 충분해요.(웃음)”
 
  87세의 페레스 대통령은 세계 국가원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는 리더십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사람들 위에 서지 않고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 위가 아니라 앞에 있는 것뿐입니다. 리더가 되려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돌격 앞으로!”가 없다고 한다. 장교는 항상 “나를 따르라!”라고 호령한다.
 
  이스라엘은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에 의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 때 프랑스·영국과 합세하여 대(對)이집트 작전에 가담한 것을 기회로 삼아 프랑스와 비밀 핵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프랑스 기술의 도움으로 네게브 사막에 재처리시설, 원자로 등 핵무기 개발 단지를 만든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 벤구리온 총리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나 골다 메이어(뒤에 총리 역임) 등 반대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배짱으로 성공한 핵개발
 
국방차관 시절 이스라엘의 핵개발을 이끈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국방차관으로서 비밀 핵개발을 지휘하였던 페레스는 회고록에서 그 과정을 자세히 썼다. ‘핵무장 선택권’이란 의미이지만 사실상 핵개발을 뜻하는 ‘뉴클리어 옵션’(Nuclear Option)이란 용어를 사용, 비밀 핵개발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돌파해야 했던 여러 난관들을 설명했다.
 
  그중의 하나. 페레스 당시 국방차관이 1959년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방문하고 있는데 벤구리온 총리로부터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줄 알고 돌아오니 벤구리온 총리, 골다 메이어 장관, 정보기관인 모사드 책임자 하렐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총리의 설명인즉, 소련의 첩보위성이 네게브 사막의 핵시설 건설공사 현장을 촬영했고 이 사진을 갖고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이 지금 워싱턴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덜레스 미(美) 국무장관에게 그 사진을 들이대고서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에 대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특사를 미국으로 보내 간청을 해 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페레스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미리 이실직고하면 약점을 잡히게 된다. 그냥 가만히 있자. 도대체 소련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에 뭐가 나오나. 땅을 판 구멍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런 취지의 설득이 통해서 이스라엘 정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핵개발을 계속 추진해 지금은 핵강대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유독 핵무장에 성공한 것은 벤구리온과 페레스 같은 배짱 있는 정치인의 리더십과 자주(自主)국방에 대한 정치권의 전면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한국처럼 미군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었다면 핵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테러에는 철저히 보복
 
뮌헨올림픽 당시 이스라엘선수단 숙소를 습격한 PLO테러리스트가 밖을 살피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저지른 테러리스트들을 추적, 암살했다.

  1972년 서독(西獨)의 뮌헨 올림픽 기간에 선수촌으로 침입한 팔레스타인 ‘검은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 및 코치 11명을 죽였다. 독일 경찰과 총격전으로 테러단 5명이 사살되고, 세 명이 잡혔다. ‘검은9월단’은 그 뒤 서독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여 서독 정부를 위협한 끝에 잡혀 있던 세 명의 동료를 구해 냈다.
 
  화가 난 골다 메이어(여성) 이스라엘 총리는 이 테러를 기획하고 가담한 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군이 합동으로 특수조직을 구성했다. 이 팀의 첫 작전은 1973년 4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침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보책임자 모하메드 유수프 알 나자르 등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 특공작전의 지휘관은 나중에 참모총장, 그리고 총리가 된 에후드 바라크(현재 국방장관)였다. 이 국가공인(公認) 암살단은 주로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추적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였다. 1973년 6월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한 모로코인을 뮌헨사건 관련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오인(誤認)하여 암살하였다가 요원 다섯 명이 붙들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끈질긴 외교 교섭 끝에 옥살이하던 요원(여성 2명, 남성 3명)을 2년 뒤 전원 송환받았다. 이스라엘 암살팀은 살라메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9년 1월 22일 그를 베이루트에서 찾아내 원격조종 폭탄으로 죽였다.
 
  뮌헨 보복작전은 ‘신(神)의 분노’라는 암호명을 가졌다. 1992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 관련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이 이스라엘같이 보복하였더라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 관련자,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관련자, 아웅산 폭파사건 관련자, KAL기 폭파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전쟁의지의 핵심은 보복의지이다. 보복의지의 핵심은 애국심과 분노일 것이다.
 
 
  “외국군 주둔하면 국민정신 망가진다”
 
  1996년 기자가 이스라엘 군대를 취재할 때 만난 군사전문기자 지브 쉬프 씨(氏)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당시 텔아비브시(市)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하레츠>(HAARETZ)의 국방부장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안보분야의 전문기자였다. 그에게 “유대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적 천재성(天才性)은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처럼 독창적인 군사조직과 전술을 개발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유대인은 군사 면에선 아주 형편없는 전통밖에 가지고 있지를 못했지요. 우리는 군대를 조직할 때(영국 식민지 시대) 다른 나라와 아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비밀전투요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는 IDF(Israel Defense Force)를 국민군(People's Arm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건국 주역들은 농업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그 뒤에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엔 무역이나 산업처럼 인력수요에 대한 다른 경쟁부문이 없어서 가장 뛰어난 인재가 군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 기초를 놓은 조직이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 이스라엘 군대를 강군(强軍)으로 만든 요인은 싸우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냐 멸망이냐, 여기서 살 것인가 다시 쫓겨날 것인가, 예속이냐 독립이냐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노 아더 초이스’(No other choice)― 이 말을 기자는 이스라엘 취재 중에 수십 번은 더 들어야 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벼랑에 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박관념이 맹렬한 투지로 전환된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있다는 얘기다. 쉬프 기자는 잊을 수 없는 충고를 하였다.
 
  “우리는 수십 배의 국력과 병력을 가진 아랍의 적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에 외국군이 장기 주둔한다는 것은 국가의 단합성과 정신무장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富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가끔 ‘웰빙 체질’ ‘살찐 돼지’로 표현되는 한국의 국가 지도부와 ‘야윈 늑대’ 같은 북한정권의 지도부를 비교하면 북한은 이스라엘, 한국은 아랍을 닮은 것 같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김정일의 북한정권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이스라엘처럼 외군(外軍)의 도움 없이 자주국방을 하고 있고 한국은 유리한 조건에서도 미군의 도움을 받아 국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북한정권의 투지가 한국 지도부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
 
  아시아 역사는 잘사는 나라가 못사는 유목민족에게 당한 사례를 수도 없이 기록해 놓았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만든 거란, 금(金), 몽골에 차례로 당한 송(宋)은 부자나라였다. 여진족에 당한 명(明), 칭기즈칸 군대에 당한 이란의 문명은 찬란했다. 신라에 당한 백제도 그러했다.
 
  한국의 풍요가 가난한 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한국의 군대와 정치인들은 좋은 권총을 갖고도, 몽둥이를 든 악당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비겁자들이 아닌가. 부(富)를 무기와 용기로 전환시키지 못하면 빼앗긴다.
 
  나쁜 세력은 자동적으로 망하고 착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이긴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착한 사람과 똑똑한 사람이 모자라서 망한 나라는 없다. 악당에게 몽둥이를 드는 용감한 사람이 없어서 망하였다.⊙

 

글/조갑제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