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와 5'18

등 뒤에서 쏘았다!

서석천 2009. 12. 13. 14:28

등 뒤에서 쏘았다!
영화보다, 소설보다 더 재미 있는 12.12 사건 중계
   
 수사관의 선제 사격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터진 최초의 총성은 육군본부 상황일지에 「19시 38분 공관지역에서 총성 네 발」로 기록되었다. 1979년 12월12일 밤의 이 총성은 10월26일 밤7시40분의 총성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게 하였다. 鄭昇和총장 납치가 매끄럽게 이뤄져 총성이 없었다면, 또는 鄭총장이 처음부터 순순히 연행에 응해 총격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날 밤의 병력출동과 유혈사태는 없었을 것이고, 역사의 진행방향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초 겨울밤 한남동의 밤하늘을 울린 이 총성은 한 정권의 잉태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이 첫 총성은 12·12사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돼 왔다.
 
  全斗煥-盧泰愚장군 측에서는 「정총장 경비병이 먼저 수사관들에게 발포, 그 뒤의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주장해 왔다. 이 주장은 사실과는 정반대였음이 객관적 정황으로 입증되고 있다. 鄭총장은, 공관 1층 응접실에서, 『녹음실로 가서 조사를 받으시라』고 말하는 許三守·우경윤(禹慶允) 두 대령에게 『이놈들,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하던가?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라고 소리쳤다. 그는 부관 이재천(李在千)소령을 불렀다. 『총리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 대!』 그 순간 두 대령은 鄭총장을 양쪽에서 낀 채 끌고 가려고 했다. 鄭총장은 겨드랑이를 낀 한 대령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鄭총장의 고함소리에 놀란 총장부인 신유경(申有慶)여사는 2층에서 뛰어내려왔다. 鄭총장이 두 대령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부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을 지나 부관방 쪽으로 뛰어가는 데 총성이 울렸다. 申여사는 엉겁결에 사우나방 속으로 뛰어들어가 숨었다. 鄭총장은 『사격중지!』라고 외친 뒤 『그럼 가자』라면서 현관을 향해 스스로 걸어 나갔다. 이때 홀의 대형 유리창을 박차 깨고 한 사나이가 뛰어들어왔다. 그는 M16소총 개머리판으로 鄭총장의 뺨을 후려치면서 『뭘 꾸물대!』라고 소리쳤다. 안경이 떨어졌다. 鄭총장은 안경을 다시 집어 올리고 끌려갔다. 申여사는 사우나방에서 2층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내려와 부관 방에 가 보았다.
 
  『경호대장 김인선 대위가 흥건히 쏟아진 피 속에서 쓰러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재천 소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기자 주:그는 복부에 한 방을 맞은 뒤 침대 밑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다).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늘어 떨어져 덜렁덜렁 하고 있었습니다. 현관 쪽에는 아주 덩치 큰 사나이가 열십자로 뻗어 있었습니다』 부관실이 첫 총성, 그 현장을 경험한 사람들은 金仁先·李在千, 그리고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 두 명이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생존해 있을 뿐 아니라 현역으로 복무중이다. 이 네 사람 이외에 공관관리 주임 반일부 준위가 중요한 목격자다. 반준위는 그날 저녁 부관실에 있었다.
 
  許, 禹 대령과 함께 온 두 수사관이 부관실로 들어왔다. 총장 경호대장 金仁先대위가 들어오더니 두 수사관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 두 수사관은 쭈빗쭈빗 하면서 나가더니 다시 들어왔다. 반 준위는 바깥이 추워서 그러는줄 알고 『커피 들겠소?』라고 했다. 이때 李부관이 황급히 들어오더니 전화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반준위는 당번병에게 커피를 시키려고 부엌으로 가다가 홀에서 나오는 당번병과 마주쳤다. 당번병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이때 부관실에서 총성이 울렸던 것이다. 보안사 수사관 두 사람이 전화를 돌리는 李소령과 金대위를 권총으로 쏜 것이었다. 金대위는 머리와 척추 근방에 네 발을 맞았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지근거리에서 쏘았으므로 관통력이 약했던 것이다.
 
  禹대령, 오인사격의 피해자
 
  全斗煥측 주장대로 鄭총장 측에서 선제사격을 했더라면 두 보안사 수사관이 다쳤을 것이고 李부관과 金경호대장은 鄭총장을 끌고 가는 두 대령을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실상은 그 반대였다. 부관실에서 총성이 난 뒤 끌려가는 鄭총장을 구출하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禹慶允대령은 왜 하복부에 총을 맞고 현관 쪽에 쓰러져 있었던가. 禹대령은 지난 81년에 千金成씨에게는 『정총장 경비병한테서 피격 당했다』고 했으나 요사이는 일체 함구하고 있다.
 
  禹대령은 합수본부 측 병력으로부터 오인사격을 당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첫째, 李소령과 金대위가 무력화됨으로써 鄭총장 공관에서는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공관 초병들은 그 전에 이미 무장해제 돼 있었다.
  둘째, 합수본부의 당시 수사책임자 李鶴捧씨에게 본 기자가 물었더니 『禹씨를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禹씨의 하복부를 맞힌 총탄을 검사하면 누구 총에서 나온 것인지 간단히 알 수가 있다. 더구나 禹씨는 자신을 쏜 사람을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쏜 사람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밝혔을 경우 全斗煥장군 측이 곤란하게 되기 때문이었으리라.
  셋째, 金仁先·李在千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계속 현역에 복무하면서 승진도 정상적으로 되고 있다. 두 사람이 비열한 선제공격으로 그런 엄청난 사태를 야기 시킨 장본인이라면 그럴 수가 있을까. 오히려 두 장교에게 선제공격을 가한 쪽의 미안감이 엿보이는 인사이다. 넷째, 鄭총장쪽에서 쏜 사람이 없었더라면 합수본부 측에서 쏘았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공관 안팎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일부수사관들은 공관 안에서, 33헌병대 병력은 건물 바깥에서 초긴장 상태 하에 있었다.
 
  초긴장 하에서 피아구별 안 돼
 
  부관실에서 총성이 난 것과 거의 동시에 반일부 준위가 현관을 박차고 나가 (공관 외곽 경비를 맡은 해병대에 신고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이 반 준위를 향해 현관 바깥에 있던 합수본부 측 수사요원이 M16을 쏘았다. 이와 거의 동시에 朴모 보안사 수사관이 M16으로 홀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鄭총장을 후려쳤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긴장상태 하에서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졌으므로 합수본부 측 요원들은 피아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鄭총장을 끼고 있던 許三守대령도 유리창을 깨고 뛰어든 사람이 자신의 부하인데도 순간적으로 누구인지 모르고 당황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엉겁결에 쏜 총탄이 禹慶允대령의 하복부를 맞힌 것으로 보인다. 禹씨나 全斗煥장군측이 『우대령을 쏜 사람은 ○○○다』는 반증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오인사격에 의한 총상」이 정설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全장군측은 또 「鄭총장을 수경사 30경비단으로 모셔 용퇴를 건의하려고 했다」는 해명도 하고 있다. 이날 全장군이 李鶴捧 수사국장에게 내린 지시는 「서빙고 분실로 연행, 법적인 처리를 하라」는 것이었다. 용퇴를 건의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보내고 대통령 결재를 받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다.
 
  12월12일 밤 총장공관에서 일어났던 상황은 진정한 군사문화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군사문화의 핵심은 상관에 대한 복종과 군인신분에 대한 명예심인데, 그날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鄭昇和씨의 말을 빌면 「마피아식」이었던 것이다. 12월8일 盧泰愚 9사단장이 장태완(張泰玩) 수경사령관을 찾아왔다. 육군본부로 鄭총장을 찾아 인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張사령관은 『내 다음에는 盧장군이 수경사를 맡을 것 같으니 잘하시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날 조홍(趙洪) 수경사헌병단장이 오더니 『전두환 보안사령관한테도 말씀을 드려놓았는데, 張 사령관님과 함께 저녁을 모시겠습니다』고 했다.
 
  張사령관은 자기 부하가 全본부장을 먼저 찾아간 것이 마음에 걸렸고, 준장 진급이 내정된 趙대령으로부터 술을 얻어 마신다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아 그 초대를 거절했다. 12월 10일 오후 許和平 합수본부장 비서실장이 張사령관을 찾아왔다. 張사령관에게 許대령은 『전 본부장께서 모레 저녁에 계엄업무로 수고하시는 지휘관들을 모시려 합니다』고 했다. 許대령은 『음식점 위치는 메모하여 사령관님 비서한테 맡겨 놓았다』고 했다. 許실장은 全본부장이 보내는 봉투를 전달했는데 그 안에는 1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형님! 김장에 보태쓰십시오」란 글도 들어 있었다. 張사령관은 참모장에게 그 돈을 건네주어 연말 부대회식에 사용하도록 했다.
 
  『앰뷸런스 - 앰블런스 -』
 
  12월12일 禹國一참모장이 보안사로 출근하자마자 全본부장이 불렀다.
  『저녁 약속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내가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그 시각에 각하께 중요결재를 받기로 시간이 잡혀졌으니 대신 가 주시오. 결재가 끝나면 곧 가겠소. 장소와 시간은 조홍이가 알고 있어요』
  점심 때 趙洪 대령이 찾아와 요정의 약도와 전화번호를 전해주었다. 정병주(鄭炳宙), 장태완(張泰玩), 김진기(金晋基), 우국일(禹國一), 조홍(趙洪) 등 다섯 사람은 연희동의 어느 요정에서 초대자인 全斗煥장군이 오기를 한 30분쯤 기다리다가 술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 시각이 저녁 7시30분쯤. 마담이 여자들을 데리고 와 앉혔다. 양주병을 따서 작은 잔으로 한 바퀴 돌리고 두 번째로 잔이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金晋基 헌병감을 찾는 무선 연락이 왔다. 金헌병감이 전화를 걸고 오더니 『총장공관에서 총성이 났답니다』고 했다.
 
  張泰玩 사령관도 요정에서 바로 총장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누가 받는데 『앰뷸런스! 앰뷸런스!』라고 소리치고는 끊는 것이었다. 張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바로 수경사 헌병단 申允熙 부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즉시 장갑차 한 대와 헌병 1개 소대를 끌고 가서 총장님을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張사령관은 『나 먼저 갑니다』면서 요정을 나섰다. 사령부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옆에 탄 趙洪 헌병단장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혹시 집히는 게 없나? 간첩이 들어온 것은 아닐테고 혹시 진급에 불만을 가진 놈이 일을 저지른 것 아닌가』
 
  金晋基, 張泰玩 장군이 비상연락을 받고 차례로 나간 뒤 鄭柄宙장군과 남게 된 禹國一참모장은 보안사 당직실로 전화를 걸었다. 당직사령은 정탁영(鄭棹永) 보안처장이었다. 『공관지역에서 사고가 났다는데 무슨 일인가』 鄭처장은 『아무 보고도 없는데요. 조금 더 기다려 보시지요』라고 했다. 10분쯤 더 기다리고 있다가 鄭柄宙장군이 특전사로 전화를 걸고 오더니 두말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화가 난 표정이었다. 禹참모장은 다시 鄭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鄭처장은 『아무 보고가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가시겠다고 하였으면 가시지 않겠습니까. 더 기다려 보시지요』라고 했다. 禹참모장은 10분쯤 더 기다렸다가 세 번째로 전화를 걸었다. 『내 입장이 곤란하게 됐다. 돌아가야 되겠다』 『그러면 가시지요』 禹참모장은 택시를 타고 보안사로 돌아왔다. 저녁 8시20분이었다.. 보안사는 이미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밤 禹참모장은 자기 방에 앉아서 세상이 바뀌는 과정을 어깨 너머로 구경만 했다.
 
  全斗煥 병력동원 계획 없었다.
 
  총리공관에서 崔대통령에게 全斗煥본부장이 鄭총장 연행결재와 관련된 보고를 올리고 있는데 부속실에 있던 부관 孫杉秀중위가 전화를 받으니 許和平비서실장이었다. 『李鶴捧 중령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각하께 보고중입니다』
  『그래도 바꿔 줘』
  孫중위는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부속실 근무자에게 부탁하여 李중령을 불러냈고, 李중령이 전화를 받고 들어가더니 全본부장이 나왔다. 全본부장은 『이왕 일이 그렇게 됐으면…』이라고 하더니 다시 崔대통령 방으로 들어갔다. 李중령은 먼저 보안사로 떠났다. 李중령은 보안사에서 서빙고 수사분실로 전화를 걸어 거기로 연행돼 온 鄭昇和 총장에 대한 행동 지침을 시달했다. 李중령은 그날 밤을 서빙고분실에서 보냈다. 총장공관의 총성은 全斗煥 장군의 거사계획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全장군은 鄭총장 연행과 대통령의 연행재가를 동시에 성취하려고 하였다. 연행재가를 받아 총장연행을 합법화시킨 다음 연희동 요정으로 달려가 鄭柄宙, 張泰玩, 金晋基장군을 설득, 기정사실화 시킨다는 계획이었다. 盧국방장관-尹誠敏 육군참모차장으로 이어지는 군의 지휘체계에 대해서는 군통수권자인 崔대통령의 결심을 관철시키면 될 일이었다. 경복궁의 수경사 30경비단(단장 張世東대령)으로 초대해 둔 유학성(兪學聖) 국방차관보·黃永時 1군단장·車圭憲 수도군단장·盧泰愚 9사단장·朴俊炳 20사단장·白雲澤 방위사단장·朴熙道 공수1여단장·張基梧 공수5여단장·崔世昌 공수3여단장·金振永 수경사33경비단장 등 10명의 수도권지휘관들과는 鄭총장 연행 이후의 군부재편을 의논할 예정이었다.
 
  全장군은 병력동원에 대한 특별한 계획은 세우지도 않았다. 군부 내의 충돌에 대비하려고 했더라면 경복궁의 10인은 자신의 부대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사태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발전하자 그들은 부랴부랴 자신의 부대를 장악하려고 서둘렀다. 이날 밤 박준병(朴俊炳) 소장은 20사단의 지휘권을, 김진영(金振永) 대령은 33경비단의 지휘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박희도(朴熙道)·최세창(崔世昌)·장기오(張基梧) 세 공수여단장은 황급히 본대로 돌아가야 했다. 총장공단에서 총격이 일어나고 崔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불러 오라』면서 연행재가를 미루는 바람에 계획했던 「합법적 연행」은 「불법 납치」가 돼 버렸다.
 
  이 불법성 때문에 육군본부는 全斗煥 장군 측을 반란군으로 몰면서 진압을 계획하게 되었다. 全장군이 조용한 연행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12·12사태는 유혈충돌로 치달으면서 쿠데타의 1단계 조치, 도는 군부 내 반란으로 그 의미가 증폭된다. 본의 아니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 全장군 그룹은 12·12사태로 해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마는 것이다.
 
 
 
  盧국방의 첫 번째 피신
 
  육군본부 측에서 볼 때 鄭총장 연행은 기습이었다. 기습하는 쪽은 여러 가지 방책과 후보계획까지 깔아놓고 덤비는데 기습당하는 쪽은 최초의 몇시간 동안에는 정보부족의 혼란상태에 빠져 반격의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12·12사태는 그런 의미의 전형적인 기습이었다. 그것도 상대편의 심장부(참모총장)을 직격하여 지휘계통을 마비시킨 대단한 기습이었다. 남편의 납치를 목격한 申有慶여사가 윤성민(尹誠敏) 참모차장, 유병현(柳炳賢) 연합사부사령관, 이희성(李熺性) 중앙정보부장 서리, 그리고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 집으로 전화를 걸어 급보를 전했다. 尹·柳 장군은 직접 전화를 받았고 盧·李 두 사람은 집에 없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 「참모총장 공관에서 19시38분에 총성 네 발」이란 보고가 들어 온 1분 뒤 한남동 파출소에서도 같은 보고가 들어왔다. 7시52분에 총장이 피습된 것이 확인되었다. 54분에는 공관에서 앰뷸런스를 요청하는 연락이 왔다. 8시19분에는 육군본부에 비상소집령이 떨어졌다. 1, 3군에 출동준비태세를 듯 하는 「진도개」가 발령된 것은 8시20분이었다. 진도개는 대(현)간첩 작전 때 발령된다. 8시 30분 육본의 제3국장이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단국대학교에 숨어 있는 盧국방장관을 모시고 육본 B-2벙커로 돌아왔다. 盧장관은 옆집인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성이 나자 사복차림으로 담을 뛰어넘어 피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날 밤 盧국방의 첫 번째 피신이었다.
 
  육본 벙커에 모인 군 수뇌부(盧국방, 金容烋 국방차관, 尹誠敏 하소곤.河小坤 육본작전참모부장 등) 장성들은 기습이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선 수경사에 대해 총장공관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도록 명령했다. 밤 9시가 가까워지자 鄭총장을 납치해간 두 장교가 합수본부의 권정달(權正達)·우경윤(禹慶允) 대령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육군본부는 두 사람을 체포하라고 군과 경찰에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許三守 합수본부 총무국장은 정보처장이라면서 鄭총장 면담신청을 했기 때문에 權대령의 이름이 오른 것이었다. 육본은 이때까지도 납치가 두 대령의 개인적 행동인지, 합수본부의 조직적 거사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9시쯤 되어서야 총장납치는 全斗煥 장군의 지시이고 30경비단장실에 수도권의 주요실병지휘관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군 수뇌부는 지휘소를 육본에서 수경사로 옮겼다. 이때 盧국방은 육본에서 연합사 지하벙커로 갔다. 이 날 밤의 두 번째 피신이었다. 밤9시를 조금 넘어서 육본에서 尹誠敏 참모차장 등 10여명의 참모들이 수경사로 옮겨왔다. 張사령관은 사령관실을 이들에게 넘겨주고, 자신과 참모들은 그 옆방인 접견실을 쓰도록 했다. 張사령관은 이날 밤 지하1층의 상황실과 2층 접견실 사이를 수 십 번 오르내렸다.
 
  강경한 육본 수뇌부
 
  초장에 육본 측은 강제진압 쪽으로 방향을 잡고 병력을 동원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런 조치의 중심인물은 尹誠敏 참모차장, 張泰玩 수경사령관, 鄭柄宙 특전사령관, 李建榮 3군사령관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규육사 출신이 아니며 鄭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평상시 부대를 출동시키는 적법절차는 이러했다. 육군참모총장이 국방장관을 거쳐 대통령에게서 허락을 받는다. 동시에 연합사 사령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런 뒤 관할 사령관→군단장→사단장으로 지시가 내려가야 한다. 군단장이 사고상태일 때는 사령관이 바로 사단장에게 출동지시를 한다. 서울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충정계획에 따라 육군참모총장이 서울 근교의 충정사단에 대해 직접 이동명령을 내릴 수 있다.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된 상황에서 이런 부대출동지시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이는 尹誠敏 육군참모차장과 盧載鉉 국방장관이었다. 張泰玩 수경사령관은 육본의 지시에 의하여 서울로 진입한 충정부대의 지휘관이 수경사령부에 배속되었음을 신고한 시각부터 지휘권을 행사한다. 張사령관은 다른 부대의 출동을 지시할 위치에 있지 않았지만 이날 밤 가장 열심히 진압군을 동원하려고 했던 이다.
 
  尹誠敏 참모차장은 군 사령관들에게 『지금부터 내가 육군을 지휘한다』는 육성명령을 하달한 뒤 수도권의 충정부대에 출동준비태세를 지시했다. 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도 주요 지휘관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요청하였다. 張사령관은 먼저 충정부대의 관할 군사령관인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李사령관은 『차규헌, 황영시가 자리를 비웠어. 윤필용, 전두환이가 장난을 치는 것 같은데 장 장군이 잘 대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張사령관은 『수도기계화사단을 서울운동장으로, 26사단을 장충체육관으로 이동시켜 주십시오』라고 했다. 李사령관은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李장군이 尹必鏞·全斗煥을 거명한 것은 하나회 인맥이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張泰玩 사령관은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과 손길남(孫吉男) 수도기계화사단장 및 배정도(裵貞道) 26사단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출동명령이 내려가면 즉각 움직여 달라고 부탁했다. 鄭특전사령관은 연희동 요정에서 부대로 돌아와 예하 여단을 점검하니 부천에 있는 9여단의 윤흥기(尹興祺)준장만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鄭사령관은 9여단을 출동시키기로 하고 張사령관과 협의하였다. 張사령관은 鄭柄宙 사령관에게 『9여단장이 노량진에 도착, 중지도 헌병검문소까지 혼자 가서 나한테 전화하면 통과시키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충정부대에 출동준비 명령
 
  수도권의 4개 공수여단 가운데 정규 육사출신이 아닌 지휘관이 지휘하고 있던 여단은 부천에 주둔한 제9여단뿐이었다. 尹여단은 10·26사건 밤에 비상계엄령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계엄군으로 서울에 들어와 육군본부와 국방부의 경비를 맡았었다. 그러다가 12·12사태 바로 이틀 전인 12월 10일에 본부로 돌아갔었다. 全斗煥본부장이 12일로 거사날짜를 잡은 것은 9여단의 원대복귀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비육사 지휘관의 9여단이 육본을 경계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감히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밤8시를 조금 넘어서, 그리고 10시쯤 鄭柄宙 사령관으로부터 尹여단장에게 두 차례 전화가 걸려 왔다. 두 번째 전화에서 鄭사령관은 구체적인 상황설명이나 임무부여를 하지 않고 서울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尹여단장은 『지금 진입하면 교통이 마비될 것 같으니 통행금지 시간 이후에 이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육군본부 작전처장 이병구 준장으로부터는 정식 竪옇疵?날아왔다. 尹여단장은 3군 지원사령부에 출동용 차량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孫吉男 수도기계화사단장은 밤8시를 넘어 張수경사령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張장군은 다급한 목소리로 서울의 상황을 설명한 뒤 출동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그 뒤 尹誠敏차장이 전화를 걸어 『장사령관에게 이야기 들었지? 출동준비하라』고 했다. 출동의 목표나 임무를 주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26사단장 裵貞道 소장은 밤 9시30분쯤 張泰玩사령관의 전화를 받았다. 張사령관은 鄭총장이 납치되고 全斗煥장군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뒤 尹참모차장을 바꾸어 주었다. 尹誠敏차장은 『지금 장사령관의 이야기대로 사태가 발생했다. 26사단이 출동해야 할 것 같으니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裵사단장은 참모들에게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곧 직속상관인 강영식(姜榮植) 6군단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姜중장은 『사태가 불투명하니 출동할 때는 나와 상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裵소장은 『출동명령을 받으면 나가는 것이지 무슨 상의냐』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26사단 보안부대장은 그 날 밤 裵소장을 늘 따라다녔다. 한 연대장이 裵소장에게 보고하기를 『보안부대원이 출동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합디다』고 했다. 약 40분만에 출동준비를 끝낸 26사단은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충정부대 중 최정예인 26사단은 이동명령만 나면 의정부→미아리를 거쳐 한 시간이면 서울도심까지 진출할 수 있는 부대였다.
 
  『장태완 파이팅!』
 
  張사령관에게는 여러 장성들로부터 격려전화들이 쏟아졌다. 柳炳賢 연합사 부사령관은 『장장군 잘해주시오』라고 했다. 김용휴(金容烋) 국방차관은 『장태완 파이팅!』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張장군은 金차관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했는데 金차관은 『염려 말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李建榮 3군사령관은 鄭柄宙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부하들을 점검해보니 1군단장 황영시와 수도군단장 차규헌이 행방불명이오. 정장군이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잘해주시오』라고 응원하기도 했다. 육본 측이 全斗煥군을 진압할 수 있는 기회는 밤10시 무렵에 무르익었다. 이때 장관, 참모차장, 3군사령관 등 세 사람이 단호하게 全斗煥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이를 전군에 널리 알리고, 전국의 보안부대장을 일시에 연금 시킨 다음 수도권 부대를 빨리 서울로 진입시켰더라면 全장군측은 간단히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출동준비태세만 발령해 놓고는 全장군측과 협상에 들어감으로써 그 귀중한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밤 9시를 지나서부터 全장군측에서 육본으로 전화를 걸어 끈질기게 설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兪學聖 국방부차관보가 맨 먼저 張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장장군, 왜 이래? 부대를 출동시키고 말이야. 여기 황영시, 차규헌 장군하고 같이 있어』 『선배님 왜 이러십니까. 총장님을 돌려보내십시오. 제가 내일 신문에 기사 못 나오도록 하여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兪장군은 말이 먹혀들지 않으니까 『황장군을 바꾸겠어』라고 했다. 張사령관은 『형님, 그 어른을 왜 붙들어 갔습니까』라고 말을 시작했다가는 흥분하여 욕설을 퍼부었다. 黃永時1군단장은 車圭憲 수도군단장을 바꾸어 주었다. 張사령관은 그에게도 무력으로 제압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통보했다. 그때 兪學聖 국방차관보 등 全斗煥 측 장성들은 崔圭夏 대통령에게 몰려가 총장 연행결재를 간청하다가 대통령이 듣지 않으니까 보안사령관실로 돌아와 있었다.
 
  육본수뇌부, 설득당하다
 
  全장군측 장성들의 선임자인 兪중장은 수경사에 지휘부를 설치한 尹誠敏 참모차장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全장군측 장성들은 鄭柄宙 특전사령관 등 다른 군 수뇌부와도 통화를 유지하면서 『납치가 아니다. 여기 와 보면 알 것이다』고 설득했다. 全장군측은 『유혈사태를 막아야 하니 우선 병력동원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수경사에 있었던 金晋基 헌병감에 따르면 『밤 10시를 넘어서는 육군본부와 합수본부 측 사이에 병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신사협정이 이루어졌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강경하던 尹誠敏, 李建榮, 金容烋, 盧載鉉 등의 태도는 밤이 늦어짐에 따라 유화적인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張泰玩, 鄭柄宙 두 사령관만이 시종일관 무력진압의 자세를 유지하였으나 두 장군도 부하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수경사에는 30·33경비단과 야포단·방포단·헌병단 등 5개 단이 있었다. 단은 연대와 대대 사이의 규모를 가진 편제였다. 5개 단 가운데 주력인 30·33경비 단, 헌병단 등 3개 단의 지휘관(張世東·金振永·趙洪대령)이 합수본부 측에 가담하였다. 張泰玩 사령관 휘하의 수경사 본부 참모들 중에서도 金基宅 참모장, 李鎭百 인사참모, 申允熙헌병부단장 등은 적극적으로 사령관 편을 들고 있지는 않았다.
 
  나중에 대세가 합수본부 측으로 기울자 金참모장은 수색의 수경사 검문소에 대해 공수1여단을 그대로 통과시키도록 명령했고, 申헌병부단장은 총부리를 거꾸로 돌려 張사령관과 육본 측 장성들을 체포해버렸다. 張사령관은 대령급 정규육사출신들의 집단적 이탈·반란에 의해 자신의 부대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全합수본부장과 육사동기인 김기택(金基宅) 참모장은 『그 날 밤 나는 고아신세였다. 사령관이 나를 의심하는 듯했고, 합수본부 측에서도 나를 소외시켰다. 사령관은 나에게 부대를 장악하라면서 주로 바깥으로 내보내 나를 기피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張사령관은 밤10시쯤부터는 『이것은 지는 게임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모차장, 국방장관, 국방차관, 3군사령관 등 부대출동을 결정해주어야 할 사람들의 태도가 애매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는 張사령관에 대한 합수본부측의 회유전화도 그쳤다. 합수본부측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징표였다. 자정무렵에 세 번째로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李사령관은 『장장군, 지금 부대를 동원하면 김일성이가 쳐 내려 와』라고 하더란 것이다. 張사령관은 『무슨 김일성이가 두 세 시간 만에 내려옵니까』라고 되받았다. 「육군본부 측이 일선부대까지 동원하여 합수본부측을 제압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럴 경우 金日成이 쳐내려올 것 같아 나라를 위해 참았다」는 식의 변명이 아직도 많다. 당시 육본 측에 섰거나 어중간한 행동을 보였던 장성들일수록 이런 논리를 잘 내세운다. 사실은 정반대다.
 
  全斗煥측은 휴전선을 지키던 9사단의 1개 예비연대, 30사단의 1개연대, 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 그리고 2개 공수여단을 서울로 불러들였지만 金日成은 쳐내려오지 않았다. 육본측 군수뇌부는 진압 부대를 동원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전쟁준비가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닌데 「나라를 위해서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육본과 합수본부 측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했던 이들이 더러 있었다. 李熺性 중앙정보부장 서리, 김용휴(金容烋) 국방차관, 柳炳賢 연합사 부사령관, 나중에는 盧국방장관도 그러하였다.
 
  이들의 중재는 결과적으로 합수본부 측을 도왔으며, 이 중재자들은 5공화국때 중용되었다. 張泰玩 수경사령관은 12·12사태 뒤 사석에서 이렇게 울분을 터뜨리더라고 한다. 『나는 전두환 편보다는 배신자들을 더 증오한다. 초저녁에는 「장장군 파이팅!」이라면서 응원하던 장성들이 자정 무렵에는 몽땅 태도를 바꾸었다. 鄭柄宙, 金晋基 이외에는 전부 배신했다. 부하들에게는 입버릇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던 친구들이 정작 위기가 오니 제 목숨 아까운 줄만 알더라』
 
 그날 보안사에서 가장 바빴던 이는 鄭棹永 보안처장과 許和平 비서실장이었다. 柳學聖, 全斗煥장군이 대통령과 군수뇌부를 설득하고 있는 사이에 鄭, 許 두 사람은 실병부대의 지휘관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보안처장은 군부의 동향을 감시하는 임무를 띤 책임자로서 보안사에서는 사령관 다음으로 권한이 강한 자리로 알려져 있다. 보안처는 군부 감시 및 통제의 수단으로서 전군의 통신망을 통제·감청하고 각 지구 보안부대를 지휘한다. 鄭처장은 이 날 밤 이 두 가지 수단으로써 지휘부가 흔들리는 육군본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보안처는 우선 육군본부 및 수경사와 통하는 예하 부대의 통신망을 감청하고 있다가 출동준비명령이 내려가면 그 군부대 내의 보안부대를 통해서 출동명령의 실천을 막았던 것이다. 3군 산하 5군단 소속인 수도기계화사단에 육본으로부터 출동준비명령이 내려가자 참모장은 출동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런 명령이 내려갔다는 것을 알아챈 이 사단의 보안부대장은 참모장과 함께 손길남(孫吉男) 사단장을 찾아가 『절대로 출동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孫사단장도 상급부대로부터 출동명령이 내려오지 않아 자정이 지나서는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혼란기에는 정확한 정보판단이 되어야 행동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가 있다. 육군본부는 예하 부대와의 통신망이 노출되고 정보망(보안부대)이 잘린 상태에서 합수본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모른 채 까막눈으로 싸우고 있었다. 합수본부측은 육본 측의 행동을 손바닥 들여 보듯 하면서 천리안을 갖고 대처했다. 육군본부는 사지가 다 잘리고 눈마저 뽑혀나간 채 버둥대는 맹수의 모습이었다.
 
  12·12는 대령들의 밤
 
  許和平 비서실장은 그 날 밤을 전화기를 부여잡고 지샜다. 합수본부장과 경복궁30 단장실 및 주요부대장 瑛見?이어주는 연락책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주요부대의 육사 동기생이나 선후배 장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합수본부측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바빴다.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출동준비태세에 들어간 부대의 연대장이나 참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야, 그게 아니야!』라면서 설득하면 부대가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 수도권의 연대장, 사단참모장과 참모, 대대장 등 실병 지휘관들은 거의 가 許대령의 정규육사 동기생이거나 후배들이었다. 한 미8군 정보통은 『그날은 대령들의 밤이었다.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육본을 지지하려고 해도 정규육사 출신 대령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규육사 출신들은 상층부의 비정규육사 출신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수모를 당해 왔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고 했다.
 
  육본은 초장에 출동준비명령을 내려두었던 수도기계화사단과 26사단에 대해서 그 날 밤 끝내 이동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기자가 배정도(裵貞道)씨(경기도 이천에서 과수원 경영)에게 『출동명령이 내렸다면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정규육사 출신 연대장들이 반발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세 연대장 중 두 사람이 정규육사 출신이었습니다. 반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도 10·26사건 때 정총장의 역할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12일 밤에 정총장이 연행 됐다기에, 퍼뜩 과연 혐의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합수본부 측을 진압하려고 출동한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육본 측이 출동명령을 포기한 것이,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단결과 鄭총장에 대한 군내의 의구심이 육군본부로 하여금 과감한 진압작전을 펴지 못하게 한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全斗煥 측에서는 육본 측이 먼저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자위수단으로써 대응병력을 동원했다는 논리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육본 측이 초장에 9여단에 대해서 출동준비명령을 내린 것이, 이 명령을 감청한 全斗煥군을 자극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全장군은 밤 10시30분쯤, 기동성이 좋은 9여단이 서울로 들어오기 전에 공수1여단을 먼저 불러들여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경복궁30단에 와 있던 朴熙道준장을 본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崔世昌 3여단장에게는 특전사의 지휘부를 제압하라는 임무를 주어 3여단으로 복귀시켰다.
 
  수경사에서는 북악산에 배치된 33 경비단의 일부 병력에 대해 철수하여 본부로 집결하도록 명령했다. 이 이동명령을 감청한 합수본부 측에서는 수경사가 자신들을 포위, 진압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고 오해하여 서둘러 대응책을 마련한 것 같다고 金基宅참모장은 말했다. 張사령관은 33경비 단 병력을 수경사 본부 방어 목적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尹興祺 9여단장은 3군 지원사령부에 요청한 수송차량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자 할 수 없이 본부차량으로 1개 대대만 직접 인솔하여 출발했다.
 
  출발 직전에 尹여단장은 鄭柄宙 사령관실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때 특전사령관실은 3여단의 특공조로 부터 기습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자정 무렵 이었다. 경인고속도로를 향해 나가던 9여단은 남부순환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굴다리에 당도하였다. 머리 위에 난 남부순환도로를 거쳐 행주대교 쪽으로 가고 있는 박희도(朴熙道) 준장의 공수1여단의 차량대열 불빛이 보였다. 이때 본부에 남겨 둔 참모장 신수호 대령으로부터 무선 연락이 왔다. 『보안사령관의 특별지시이니 돌아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尹준장은 병력을 돌렸다. 신수호 참모장에게 병력을 돌리도록 청탁한 사람은 보안사의오일랑( 吳一郞) 중령이었다. 두 사람은 갑종간부후보 동기였다.
 
  박희모(朴熹模), 1여단의 서울진입 방치
 
  지난해 3월 변사한 鄭柄宙 장군은 생전에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었다. 『자정쯤 문홍구 합참본부장이 국방부에서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전화를 노국방에게 바꾸어줍디다(기자 주:그때 노재현 장관은 연합사 벙커에서 막 국방부로 돌아와 있었다). 노장관은 「정장군, 박희도가 공수여단을 이끌고 국방부와 육본을 치러 온다고 하는데 당신이 막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좀 퉁명스럽게 「아니, 장관님 예하의 수사기관(기자 주:합수본부를 의미)이 있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시켜서 잡아넣으시지요」라고 했어요. 鄭사령관은 이 전화 직후에 9여단장에게 출동을 독촉했으며, 몇분 지나지 않아 피습되었다고 한다. 
  
 즉, 9여단을 출동시킨 것은 朴熙道 준장의 1여단에 대한 방어목적이었다는 얘기였다. 張수경사령관은 朴熙道 준장이 지휘하는 공수1여단이 행주대교로 접근중이라는 경찰보고를 받자 朴熹模 30사단장 에게 전화를 걸었다. 『1개 연대를 배치하여 서울진입을 막아달라』고 했다. 얼마 뒤 張사령관이 배경상황을 확인하려고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朴사단장은 『병력이 야외훈련을 나가서 배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1여단이 서울로 들어오려면 세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행주대교 남단의 개화초소는 수도군단 관할인데, 朴熙道 여단장은 이 초소를 간단히 점령하고 통과했다. 행주대교 북단의 검문소는 30사단 관할인데 朴熹模 사단장은 막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수색의 수경사 헌병단 검문소였다.
 
  張사령관은 『헌병단은 부단장이 지휘하고 있으니 조홍 단장의 명령을 듣지 말라. 병력이 접근하면 발포하라』고 지시했었다. 趙洪 단장은 보안사에 위치하여 검문소에 전화를 걸어 『발포하지 말라』는 정반대의 지령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문의가 부하들로부터 김기택(金基宅)참모장에게 쏟아졌다 金참모장은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수색검문소 헌병들은 1여단이 접근하자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공수1여단 병력은 텅빈 검문소를 때려부수었다. 수색검문소에서 서울시내까지는 거칠 데가 없었다. 1여단은 육본과 국방부를 향해 질주하였다. 아무리 소규모의 병력이라도 군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면 정권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5·16때 불과 수천 명의 해병대와 공수단 병력이 한강을 건넘으로써 제2공화국이 무너졌다. 12·12사태 때 제1공수여단의 서울진입도 비슷한 결과를 빚었다. 육본 측 9여 여단은 돌아가고 全斗煥 측의 1여단은 서울진입에 성공했다는 것이 12·12사태의 승부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다.
 
  盧泰愚 소장이 불러들인 9사단의 1개 연대, 이상규(李相珪) 제2기갑여단장의 1개 전차대대, 장기오(張基梧) 준장의 공수 제5연단, 30사단 宋응섭 대령(육사 16기·현 합참본부장)의 1개 연대는 이미 승부가 끝난 뒤 13일 새벽 3시를 전후하며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들 부대는 9여단이 이동을 개시한 직후 全장군측에서 서울로 부른 것이었다. 서울진입을 저지할 책임을 지고 있었던 朴熹模 사단장(갑종9기 출신)은 육본 측을 위해서는 병력을 내지 않는 대신에 宋대령의 연대가 全斗煥 측으로부터의 청탁에 의해 서울로 출동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朴사단장은 그 뒤 중장으로 승진하였고 전역한 뒤에도 산업기지개발공사 이사장을 거쳐 지금 수자원개발공사 이사장으로 있다. 그는 기자의 거듭된 전화에 대해서도 응답해주지 않았다. 공수1여단이 국방부와 육군본부에 들어갈 때 유일하게 저항한 것은 국방부 옥상에 있던 발칸포대였다. 수경사 방포단 소속인 이 방공포대는 張사령관으로부터 사격명령을 받아두었었다. 全斗煥측에서는 국방부와 육본의 다른 부대에 대해서는 저항하지 않도록 손을 써 두었으나 이 방공포대를 잊어먹었던 것이다. 국방부로 공수단 병력이 들어오자 발칸포가 불을 뿜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12·12사태 밤 8군 영내에 있는 연합사 지하벙커에는 위컴 연합사 사령관, 글라이스틴 대사, 브레드너 8군사령관정치고문이 모여 있었다. 밤 9시를 조금 넘어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과 김종환(金鍾煥) 합참의장 및 유병현(柳炳賢) 부사령관이 여기로 왔다. 위컴 사령관은 10·26사건 당일 밤에 연합사가 취했던 것과 비슷한 조치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 국가지휘소에 한국 내의 긴박한 상황을 보고하여 극동의 미 공군과 해군에 비상을 걸고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경고하게끔 요청했다.
 
  柳부사령관은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과 김학원 1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부대이동은 반드시 연합사령관의 허락을 받아 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하벙커에서 盧국방 등 한국군 수뇌부와 총리공관 및 국방부 사이에는 전화가 자주 오고갔다. 崔대통령과의 직접 통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글라이스턴 대사도 이 날 밤 崔대통령과 통화하려고 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崔대통령은 이날 밤 접근루트와 통신망 부문에서 외부와 차단돼 있었다.
 
  이날 연합사의 상황파악은 국군보안사의 정보차단조치에 의해 늦어지고 있었다. 공수1여단이나 9사단의 1개 연대가 움직이고 나서 한참 뒤에야 보고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柳부사령관은 9사단의 관할지휘관인 李建榮 3군사령관에게 연합사령관의 허락 없이 병력이 움직이는 데 대하여 항의했으나 속수무책인 것은 李사령관이나 위컴이나 똑같았다.
 
  자정 직전에 육본에 남아 있던 金在命 육본작전참모차장은 盧국방장관에게 국방부로 나와서 사태를 해결해 달라고 전화했다. 盧국방과 金鍾煥 합참의장은 국방부로 나갔다. 柳炳賢 부사령관은 자정을 넘어서 국방부로 나갔다. 이때 위컴 사령관은 『내 차를 타고 】첼웩뻑箚?했다. 柳부사령관이 위컴 사령관 차를 타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방북쪽에서는 총성이 콩볶듯 들려왔다. 연합사 지하벙커에 있던 미군 수뇌부에서는 盧국방장관과 柳장관등이 피격된 줄 알았다고 한다. 柳장군이 국방부장관실로 올라간 뒤 공수제1여단병력이 총을 쏘면서 국방부로 쳐들어왔다.
 
  이때 국방부 건물입구에 세워두었던, 위컴사령관 차를 따라온 柳장군차가 총탄을 맞아 안테나가 부러졌다. 이 때문에 위컴 사령관을 태운 승용차가 피격된 것처럼 와전되기도 했었다. 새벽 1시쯤 공수1여단병력이 국방부 건물로 돌입하기 직전 장관실에는 盧국방, 金합참의장, 柳炳賢부사령관 등이 앉아 있었다. 盧국방은 공수단병력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지하실로 피신해 버렸다. 이 날 밤 세 번째의 피신이었다. 金, 柳 두 대장만 앉아 있었다. 공수부대원이 M16총을 난사하면서 장관실로 돌입했을 때 柳장군은 의자에 앉은 채 『잘 생겼군! 자네 나이가 몇 살인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싸우지 말고 말로 해!』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공수1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張사령관은 최후의 방어전을 시도했다. 수경사 본부중대, 헌병중대, 취사병, 행정병까지 다 끌어 모으니 약 2백 명이었다. 탱크는 다섯 대였다. 이들을 본부 주변에 배치시켰다. 탱크는 퇴계로 아스토리아 호텔 앞에 가 있게 했다. 그때 비서실장이 뛰어왔다. 전차부대 대대장이 합수본부 측에 포섭돼 소대장들에게 『사령관을 사살하라』고 전차에 붙은 확성기로 지시하고 있으니 피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는데 張사령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盧국방장관이었다. 
  『장태완이 너는 왜 자꾸 싸우려고 하나!』
  『장관님 무슨 말씀입니까? 반란군인데...』
  『싸우지 말고 말로 해!』
  『저쪽에서 쳐들어오는데 말로 됩니까?』
  『그래도 쏘지 마! 말로 해! 그만 상황 끝내!』
  『정말입니까? 장관님 제가 복명 복창하겠습니다. 상황 끝!』
  張사령관은 金基宅 참모장에게 참모들을 집합시키도록 했다. 그들에게 張사령관은 『이제 상황 끝이다. 나가 있는 병력을 철수시키고 실탄을 회수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말했다.
 
  盧載鉉 국방장관이 국방부 지하계단 아래에 엎드려 있다가 공수1여단 병력에 의해 발견된 것은 새벽4시쯤이었다. 그 직후에 盧국방이 張사령관에게 전화를 했는지, 피신 중에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날 혼란에 빠진 군의 최고 책임자로서 盧국방은 지리멸렬한 행동을 보였다. 육군참모총장이 납치된 상황에서 그가 군의 지휘권을 장악, 초장에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全斗煥 측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盧국방은 세 번이나 피신을 거듭하느라고 그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崔대통령한테도 나타나지 않아 대치상태를 끌게 했고 유혈사태까지 빚게 했었다.
 
  12·12사태 전에 全斗煥 본부장은 盧장관에게 鄭총장을 조사할 필요성을 두 번 건의했으?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全씨는 지난해 말 국회증언 때 밝힌 바 있다. 全본부장은 鄭계엄사령관보다는 盧국방과 더 친근하였고 중요한 보고는 가끔 鄭사령관을 우회하여 盧국방에게만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盧載鉉 국방장관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는 합수본부장을 교체하자는 건의를, 합수본부장으로 부터는 계엄사령관을 조사하자는 건의를 받고 있으면서 어느 쪽으로도 확실한 결심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가 12·12사태를 맞았던 것이다.
 
  『이놈들이 날 쏜다!』
 
  새벽4시쯤 합수본부 측에서 張사령관 앞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MBC를 지키고 있는 수경사 병력을 합수본부 편의 출동병력으로 바꾸겠다는 통보였다. 『마음대로  』고 말하고 전화를 놓는데, 옆방, 즉 사령관실에서 총성이 나더니 사잇문이 열리면서 하소곤(河小坤)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배를 움켜잡은 채 쓰러지면서 들어왔다. 『이놈들이 날 쏜다. 이놈들이 날 쏜다』 河소장의 가슴에서 선지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張사령관은 고함을 치면서 옆방으로 뛰어들었다. 거기에 있던 윤성민(尹誠敏) 차장 등 10여명의 육본 장성들이 손을 들고 있었다. 수경사 헌병들은 M16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수경사 헌병단부단장 신윤희(申允熙) 중령 등(현재 소장·육본헌병감)은 全斗煥 장군으로부터 전화지시를 받고 부하들이 총구를 거꾸로 돌리게 했던 것이다.
 
  헌병들이 돌입하기 전에 河소장은 일어서서 張사령관이 있는 접견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한 헌병장교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던 河소장이 권총을 빼는 것으로 오인하여 쏜 것이었다. 河소장은 허파에 총알을 맞았는데 긴급수술로 생명을 건졌다. 수경사에 있던 육본 측 지휘부 장성들을 몽땅 체포하는 데는 張수경사령관의 세 직속 부하-이진백(李鎭百)인사참모, 金진선 상황실장(육사19기·현재 육본인사참모부장), 申부단장이 손발을 맞추었다. 金진선 중령에게는 盧泰愚 소장이 전화를 걸어 지시를 한 뒤 全장군에게 바꾸어주어 재차 다짐을 받도록 하였다. 李대령은 본부대대의 병력을 동원, 헌병단의 작전을 지원하게 하였다고 한다. 수경사의 함락으로 12·12사태는 막을 내렸다.
 
  육군본부측이 패배한 3대 이유는
  ①군 수뇌부의 명령이 육사장교단에 먹히지 않았고
  ②지휘부에서 목숨을 거는 사람이 적었으며
  ③鄭昇和총장에 대한 의구심이 과감한 진압작전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새 육참총장에 이희성(李熺性)
  특전사, 국방부, 수경사는 차례로 유혈이 낭자한 하극상의 참극을 맛보면서 全斗煥 장군 편에 넘어갔다. 하극상의 세 주인공 최세창(崔世昌), 박희도(朴熙道), 신윤희(申允熙)에게 직속상관을 제압하도록 직접 지시한 것은 全斗煥 본부장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수모는 직속부하로부터 당하는 것이다. 全장군은 그런 수모를 鄭昇和·鄭柄宙·河小坤·張泰玩 등 네 사람에게 주었다. 鄭총장은 보안사에서 물고문을 당했고 총상을 입은 鄭柄宙씨 등은 강제 전역 당한 뒤 보안사의 노골적인 감시 하에서 생활해야 했다. 張泰玩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역모를 했다고 오해하여 식음을 전폐한 채 버티다가 넉 달만에 타계했다. 張씨의 서울대학생 아들은 그 1년 뒤 경북 칠곡군의 그 할아버지 묘소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張씨도 홧병으로 심장병을 얻어 미국에 건너가 대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런 하극상을 지시한 全씨는, 10년만에 백담사로 갔고, 이학봉(李鶴捧) 보안사 수사국장은 감옥살이까지 체험했으나 대부분의 합수본부측 장교들은 지금도 현역에 있거나 전역 뒤 고위공직을 맡고 있다. 13일 새벽 4시10분, 盧載鉉 국방장관을 태운 승용차가 보안사에 도착했다. 全본부장은 30여분간 盧국방과 요담했다. 崔대통령한테 갈 때 全장군은 장관차에 타게 되었다. 합수본부장 부관인 孫杉秀 중위는 앞자리에 있던 장관부관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타려고 했다. 해병대장교인 장관부관이 완강히 거절했다. 두 부관이 실랑이를 벌이니까 全본부장이 孫중위에게 『뒷차로 오라!』고 지시했다.
 
  盧장관과 全본부장을 태운 승용차는 총리공관으로 들어갔다. 李熺性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12월12일 밤에 남산 정보부장실에서 육본, 합수본부, 수경사, 30경비단 측과 전화하느라고 바빴다. 全斗煥, 문홍구(文洪球), 張世東씨 등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유혈충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설득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李정보부장서리는 13일 새벽 2시33분에 보안사에 들러 全斗煥 본부장과 요담한 뒤 3시15분에 나갔다. 李熺性 정보부장서리는 13일 새벽 5시반쯤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盧載鉉국방장관이 鄭총장 연행 재가를 崔圭夏대통령으로부터 받을 때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盧국방은 崔대통령에게 후임 총장으로 李중장을 추천, 재가를 받아 나오면서 李중장에게 알려주었다. 李중揚?대장승진 및 참모총장 임명은 全합수본부장의 영향력 행사라기보다는 崔대통령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崔대통령은 장성들을 잘 알지 못했으나 중앙정보부장 서리로서 자주 보고하러 들어오는 李熺性 중장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崔대통령이 마침내 사인을 한 鄭총장 연행건의 서류가 든 누런 봉투를 들고 나온 全본부장은 승용차에 올랐다. 차가 보안사로 향해 달리고 있는데 삼청동 길의 양쪽에는 미국 정보기관원으로 보이는 미국인 몇 명이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崔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뒤에도 盧국방은 5시45분에 보안사에 다시 들러 全본부장 등과 면담한 뒤 6시32분에 나갔다.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된 李熺性 대장도 돌아가는 길에 다시 보안사에 들렀다가 5시42분에 나갔다. 이미 힘의 무게 중심은 합수본부로 옮겨 와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밤에 경복궁 30경비단의 全斗煥군 지휘부에서 보안사 상황실로 지시한 지침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1.대통령에 의한 안전조치. 2.대통령 명령을 처리 중 충돌이라고 미 측에 해명. 3.육군본부 동요 없도록 설득. 4.국방부에서 사건전모 발표」
  즉, 합수본부 측에 의한 비합법적 조치를 대통령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위장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날 밤 崔대통령은 10·26밤보다는 훨씬 줏대 있게 행동하였다. 합수본부 측에 영합한 경호실 병력에 의하여 외부와 차단된 속에서 全斗煥측 장성들의 끈질긴 간청을 받으면서도 『국방부장관을 데려 오라』는 고집을 관철시켰다. 盧국방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崔대통령으로서도 이를 추인하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 날 밤의 일에 대한 역사적, 도덕적 추궁은 우선 盧국방을 비롯한 군수뇌부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10·26∼12·12 사이에 군부의 세대교체에 관하여 全斗煥, 황영시(黃永時) 장군과 깊은 얘기를 나누었던 사람 가운데는 당시 광주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 김윤호(金潤鎬) 소장이 있다. 金소장은 黃장군과 같은 육사 10기 출신으로 5공화국 때 합참의장까지 지냈다. 金씨는 최근 기자에게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놨다.
 
  『11월 말에 서울로 올라와 전두환, 황영시 장군들과 만나 군의 개혁에 관하여 의견교환을 했습니다. 그때 정규육사 출신들은 군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던 선배장성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선배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고, 일본지원병 출신이 어떻게 군을 대표하느냐는 식의 울분도 있었습니다. 능력면에서 선배들을 얕잡아보는 분위기도 있었고요. 이렇게 된 데는 선배 장성들이 정규육사 출신들에게 과잉자부심을 심어준 것도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꾸짖을 때는 꾸짖어야 하는데, 너희가 최고다, 우리군의 장래는 너희 어깨에 달렸다는 식으로 간을 부풀게 했습니다.. 황영시 장군이 그래도 정규육사 출신들에게 엄하게 대한 사람이었습니다』
 
  金씨는 또 『10·26 사건 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은 기를 펼 시점에 왔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오히려 崔圭夏, 盧載鉉, 鄭昇和 세 사람을 중심으로 수구 세력이 강화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했다. 金潤鎬 소장은 12일 자정 무렵에 보안사령관실에 있던 黃永時장군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우리가 큰일을 저질렀으니 자네가 와서 도와주어야겠다』는 취지였다. 대충 감을 잡은 金소장은 밤12시30분쯤 차로 광주를 출발, 13일 새벽5시에 육군본부에 도착했다. 육군본부의 참모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金소장은 곧장 보안사령부로 갔다.
 
  사령관실 옆방인 접견실에는 全斗煥, 盧泰愚, 유학성(兪學聖), 차규헌(車圭憲), 황영시(黃永時) 장군이 모여 사후대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金소장도 합류하여 일종의 6인평의회가 되었다. 이 여섯 명은 그 뒤 4일간 보안사령관 접견실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군부의 인사개편, 미국측에 대한 설득, 행정부에 대한 해명 등의 작업을 지휘하였다. 이들이 우선적으로 착수한 것은 혼란에 빠진 육군의 상층부를 새롭게 대체시켜,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盧載鉉 국방장관은 12·12사태 전날에 崔대통령의 새 내각에 잔류하는 것으로 내정돼 있었다. 全본부장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주영복(周永福)씨를 새 국방장관으로 추천하였다. 같은 경남출신으로서 두 사람은 그전부터 친했었다.
 
  金潤鎬씨에 따르면 6인위에서 결정한 「숙군지침」은 이러했다.
  ▲소장급 이상을 심사대상으로 한다.
  ▲鄭昇和, 金載圭 게열을 제거한다.
  ▲진급·보직 운동자들을 제거한다.
  ▲6·25때 후방 근무자들을 제거한다.
  ▲육사 8∼10기 장성들 중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만 남긴다.
  ▲호화생활자나 품위 불량자를 제거한다.
  13일 하룻 동안 대상자들을 선별한 결과 40여명의 명단이 만들어졌다. 명단을 만드는 데 큰 발언권을 행사한 이는 全斗煥, 黃永時 장군이었고 車圭憲중장은 수동적이었다고 한다. 이 명단은 兪學聖 중장이 李熺性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보안사로 불러 건네주었다고 한다.
 
  12월19일 40여 장성 강제(?) 퇴역
 
  李熺性 총장은 그 명단에 포함된 장성들 중 동기생인 모 사령관 등 몇 사람을 구제했다. 육본측에 서서 합수본부 측에 맞섰던 장성들 중 尹誠敏 참모차장이 구제돼 1군사령관으로 전보된 것은 그가 호남출신인데다가 12·12사태 밤에 상당히 유화적이었던 것이 참작되었기 때문이었다. 尹誠敏, 문홍구(文洪球)씨(합참본부장) 가운데 한 사람을 살리기로 하고 6인위에서 토의를 했는데 文중장이 盧載鉉 장관계열의 포병이라는 것이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柳炳賢 연합사 부사령관이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합참의장으로 기용된 것은 兪學聖 중장의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6인위 멤버들과의 인간관계로 해서 구제된 사람들이 최초명단의 약 30%쯤 되었다고 한다. 6인위 멤버는 자신들에 대한 인사가 토의될 때는 당사자가 그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兪學聖 국방차관보는 3군사령관, 黃永時 ;1군단장은 참모차장, 車圭憲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 盧泰愚 9사단장은 수도경비사령관, 金潤鎬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은 중장으로 승진하여 1군단장이 되었다. 車중장은 처음에는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내정됐었는데 본인이 사양했었다고 한다. 수도군단장에는 兪學聖장군이 미는 박노영(朴魯榮) 중장이 임명되었다. 이밖에 백운택(白雲澤) 방위사단장은 9사단장으로, 鄭鎬溶 향토사단장도 13일 새벽에 대구로부터 급히 불려 올라와 특전사령관에 앉게 되었다. 40여명의 구세대 장성들이 12월19일자로 대거 예편 당했다. 이들에게는 1천여만 원씩의 위로금이 지불되었다. 張泰玩, 鄭柄宙, 李建榮, 文洪球, 河小坤장군도 포함돼 있었다.
 
  黃永時 장군이 김윤호(金潤鎬) 소장을 불러 올린 또다른 목적은 대(對)미 접촉을 위한 것이었다. 영어를 잘하고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여 미군 고위층과 친면이 넓은 편인 金소장은 12월13일 오전10시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찾아가 글라이스틴 대사 및 참모들과 마주 앉았다. 金소장은 『군부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밝힌 뒤 40여분간 12·12사태의 성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군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고, 『군 지휘부의 재편으로써 이번 일을 마무리짓겠다』고 했다. 글라이스틴 대사 측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金소장은 『쿠데타가 아니므로 변함이 없을 것이다』고 했다. 이 면담장면을 미국측에서는 비디오로 찍어두었다고 한다. 다음날 미국대사관에서는 全斗煥, 金潤鎬 두 사람을 지명하고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全斗煥-글라이스틴 회담
 
  全斗煥 소장은 12월 14일 오후 통역요원만 데리고 정동에 있는 미국대사관저에 가서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났다. 관저 안에는 세파드 한 마리가 풀려 있었고 미군 경비병들이 탄 듯한 밴(Van)이 한 대 서 있어 위압적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풍기더라고 한다. 全소장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케네디 암살사건의 범인 오스왈드의 배후가 규명되지 않았음을 지적한 뒤고 朴대통령 피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鄭총장 연행이 불가피했다고 12·12사태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12월14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全斗煥 소장과 만났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 육군의 분열이 북한으로부터의 침공을 초래한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미국은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해서 말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또한 全씨에게 헌정질서를 유지하고 정치자유화를 향해 진전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全씨는 12·12 사건은 朴대통령 암살사건조사를 하기 위한 합법적인 노력의 우연한 결과로 발생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全씨는 자기는 개인적인 야심은 없다고, 자기는 崔대통령의 자유화계획을 지지한다고, 또 자기는 자기가 단행한 군지휘 구조개편의 결과로 군부의 단결이 강화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12·12 사건에 의한 권력장악에 대한 미국 측의 노여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글라이스틴 대사의 조언에 따라 위컴 장군은 全씨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위컴장군은 한국의 국무총리, 신임 국방장관 및 기타 관리들과 만났다」 이 답변서는 또 이렇게 주장했다.
 
  「12월13일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대통령과 만났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이 문관에 의한 군부통제와, 그리고 정치자유화계획의 계속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 것이 미국의 견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회동을 통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崔대통령하의 약한 행정부가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총리공관에서 崔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 바깥에는 군인들이 서 있었고, 崔대통령은 불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한 주한미군 정보분석가는 『12월13일부터 한국의 최강자는 전두환 장군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계엄사령관을 구속하고 국방장관을 바꿔버리고 대통령을 벌벌 떨게 했으니 그가 최강자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한국인들은 1980년 5·17 조치로써 그가 정권을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12월 13일로 본다』 그때 군은 이미 비상계엄령하에서 3권을 잡고 있었다. 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면 자동적으로 정권까지 잡게 되는 그런 구도 하에 있었다. 12월13일 全斗煥 본부장은 보안사직원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연설했다. 12월 14일 오전 합수본부 참모회의에서 全斗煥 본부장은 『거사계획을 모두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보안 때문이었다. 실천자들에게만 알린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禹國一참모장, 南雄鍾대공처장, 權正達정보처장 등이 사전에 거사를 알지 못했었다.
 
  12·12사태의 성격규정
 
  12월14일 보안사령관 접견실에서는 兪學聖, 車圭憲, 黃永時, 金潤鎬, 盧泰愚, 崔世昌, 朴俊炳장군들이 모여 간담회를 가졌다. 배신자나 이탈자가 없도록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12·12 사태는 구국적인 결단이니 만큼 다각적으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견해도 피력되었다. 우선 12·12 주도세력의 기록을 해나가자는 데 합의하여 그 방에 녹음장치를 달았다. 이틀 뒤 許和平, 許三守대령은 이 녹음장치를 떼 내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12월14일 점심 때 보안사 식당에서는 12·12사태 주역들이 모여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염을 토했다. 이들은 현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모두 34명의 출동부대 지휘관과 합수본부 참모들이 찍혔다.
 
  맨 앞줄에는 왼쪽으로부터 이상규(李相珪)준장, 崔世昌준장, 朴熙道중장, 盧泰愚소장, 全斗煥소장, 車圭憲중장, 兪學聖중장, 黃永時중장 등이 앉았다. 육본 측에 섰던 金基宅 수경사참모장도 끼여 있다. 金씨는 『전장군이 불러서 갔더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6인위에서는 일종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자는 얘기도 오갔다고 한다. 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최단시간 내에 군부 내의 불순세력을 제거하고 혼란상태를 수습한 뒤 군 본연의 임무에 복귀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12 사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를 놓고 全斗煥 본부장과 측근참모들은 토론을 벌였다. 許和平·許三守씨는 「혁명적 상황」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全斗煥·李鶴捧·權正達은 「10·26사건수사의 연장」이라는 견해였고 결국 그런 식으로 결정되었다.
 
  보복이 두려워 집권결심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2·12사태 이후 全斗煥그룹은 쿠데타에 의한 정권장악의 길을 치닫게 되지만 합법적 정권이양으로 위장하였다. 그들이 당당하게 쿠데타나 혁명이라고 선언하기에는 12·12 유혈사태에 따른 무리가 너무나 많았다. 주체세력의 이념이나 배짱도 「혁명적 상황」에 대비하기에는 허약하였다. 12·12 사태에 대한 죄의식이 全斗煥그룹의 행동을 과감하게 뻗어나가지 못하게 제약한 셈이다.
 
  1980년 2월 글라이스틴 대사가 1군단장 金潤鎬중장에게 신군부의 정치간여 가능성에 관해 묻자 金중장은 『다 파먹은 김치 독에 왜 들어갑니까?(Why we the soldiers get into empty kimch pot?)』란 유명한 얘기를 했다. 그 무렵 신군부 안에서는 정치참여를 놓고 토론이 오고갔다. 金潤鎬중장 등은 『12·12사태에 대한 책임추궁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은 뒤 군으로 복귀하여 2년만 기다리자. 그러면 사회가 혼란하여 군대를 다시 부르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다』고 했다.
 
  全斗煥 장군과 그 측근에서는 『우리가 물러서면 보복을 당할 것이다』는 우려를 강하게 표시했다. 2월까지는 全斗煥그룹도 방황하고 있었다. 12·12 사태 때 저지른 엄청난 일에 대한 불안감이 그들의 뇌리를 강박관념처럼 억누르고 있었다. 「다 파먹은 김치독」인 줄 알면서도 그 안에 들어가야 보신이 가능하다는 생각, 이것이 全斗煥장군을 5·17로 치닫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12·12 사태 때 全장군 편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생결단의 자세로 임했기 때문이었다. 12·12 그 날 밤의 유혈과 배반과 하극상은 全장군편으로 하여금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강박감을 더욱 굳혔다. 朴正熙 소장처럼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었던 全장군은 상황에 끌려 달리다가 보니 청와대로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