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金大中 납치 사건과 박정희

서석천 2009. 12. 7. 20:56

李厚洛의 과잉 충성일 가능성이 높다.

  

 

정보부 공작선 용금號, 출항하다 
 
중앙정보부(이하 中情) 공작선 ‘龍金號(용금호)’는 全長(전장) 52m에 536톤의 1000마력짜리 배였다. 1944년 미국

에서 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때는 戰時(전시)물자 수송선으로 사용되었다. 中情은 이 배를 1972년 5월 22일 부산지방해운항만청에 화물선으로 등록하였다. 소유자는 ‘정운길’로 되어 있다. 정운길은 용금호를 관리하던 두 中情 요원 중 한 사람으로서 선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령이었다고 한다.
 
 1973년 7월 24일 용금호는 부산 4부두에서 출항했다. 中情 요원이 출항 직전에 선장·항해사·기관장·통신장·操機長을 불러 모았다. 갑판장 이점조 씨에 따르면 中情 요원은 “우리가 金大中 씨를 납치하러 간다”고 말해 주더란 것이다. 中情은 용금호가 출항하기 직전에 선원 두 명을 교체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선원이 아니라 특수요원이었다. 용금호는 7월 26일 시고쿠(四國)의 북쪽 다카마쓰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화물을 부린 배는 7월 29일 오사카 외항에 도착했다.
 
 용금호의 갑판원 林益春 씨에 따르면 中情 요원이 그에게 “혹시 당수나 쿵푸를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金大中 씨를 납치하기 위해 용금호에서 내린 사람은 두 요원과 선장·조기장·기관부원 등 다섯 명이라고 한다. 
 8월 8일 오전 金大中 씨는 도쿄 팔레스 호텔에 묵고 있던 통일당 당수 梁一東과 金敬仁 의원을 2212호실로 찾아가서 점심을 함께 했다. 낮 12시 50분쯤 金大中 씨가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갈 때 옆방에서 뛰쳐나온 中情 요원들이 그를 끌고 2210호실로 들어갔다. 괴한들은 金 씨를 침대에 눕히고 눈과 입을 막은 뒤 마취약을 묻힌 손수건을 金 씨의 코에 들이댔다. 金 씨를 전송하기 위해 나왔던 金敬仁 의원은 다른 괴한 두 명에 의해 梁의원이 있던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나중에 일본 경찰은 이 방에서 駐日 한국대사관 소속 1등 서기관 金東雲 씨의 지문을 채취했다.
 
 괴한 두 명은 기절한 金大中 씨를 부축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던 요코하마 주재 한국총영사관의 副영사 차에 실었다. 차는 오사카로 달리기 시작했다. 납치자들은 도중에 中情이 운영하던 安家(안가)로 金大中 씨를 데리고 들어가 손과 발을 묶고 얼굴은 코만 남기고 테이프로 감쌌다.
 
 다음날 저녁 무렵 납치자들은 金 씨를 모터보트에 태워 오사카 외항에 있던 용금호로 데리고 왔다. 납치범들은 金 씨를 갑판 밑 닻줄을 넣어 두는 좁은 공간에 구겨 넣었다.
 
 용금호가 오사카 항을 출항하기 전 일본 관리들이 올라와 선원수첩을 확인하고 내려갔다.
 
 한여름이라 맨발로 갑판 위를 걸을 수 없을 정도의 무더운 날씨였으니 金 씨의 고통은 대단했다. 金大中 씨에게 식사를 제공했는데 그때는 손목을 묶은 줄도 풀었다. 金 씨는 식사를 갖고 온 선원에게 “지금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나. 내가 남한테 잘못한 일이 없는데”라고 말했다. 金 씨는 식사는 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다.
 
 용금호가 현해탄을 건너 부산항으로 접근할 때 中情 요원들은 金 씨를 기관실로 옮겼다. 용금호의 선원들은 金大中 씨의 몸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키려고 했다는 설을 부정하고 있다. 구출용 비행기도 오지 않았고 조명탄도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에 오를 때 金 씨의 얼굴은 얻어맞은 듯 부어 있었으나 배에 있을 때 구타는 없었다고 한다.
 
 용금호가 8월 11일 밤 부산항에 도착할 때까지 선원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들은 中情 요원들이 만약 金大中 씨를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면 증거인멸을 위해 자신들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선원들은 ‘저 양반이 살아서 부산에 가야 우리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졌다는 것이다.
 
 1973년 8월 8일 朴 대통령은 오전에 鄭韶永 신임 농수산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金鍾泌 총리, 金正濂 실장 등이 배석했다. 朴 대통령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金正濂 비서실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외국 통신의 영문기사를 들고 온 그는 “金大中 씨가 도쿄에서 납치되었답니다”라고 보고했다. 바로 전에 金聖鎭 공보수석이 그 외신자료를 가지고 金 실장 방에 뛰어 들어왔던 것이다.
 
 “정말이야! 무슨 일일까?”
 
 朴 대통령의 반응도 놀라움이었다고 한다. 金 실장이 사무실에 돌아와 한 30분 정도 있으니 朴 대통령이 인터폰으로 “무슨 새로운 소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金 실장은 외국 통신의 속보를 보고했다. 朴 대통령은 집무실로 오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金 실장에게 “만약 金大中 납치가 사실이라면 네 가지가 상정된다”고 말했다.
 
 “첫째, 중앙정보부의 공작일지 모른다. 둘째, 일본 우익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 셋째, 在日 거류민단의 과잉충성이 일으킨 사건일지도 모른다. 넷째, 金大中 씨의 자작극일 가능성이다. 실장은 즉시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그리고 在日 거류민단을 관리하는 부서를 체크하여 보고하라.”
 
 대통령 집무실에서 물러난 金 실장은 李厚洛 정보부장, 朴鐘圭 경호실장, 그리고 유관 부서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여부를 물었다. 朴 실장은 일본의 우익단체 사람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朴 대통령은 그런 朴 실장이 몰래 우익인사들을 시켜 金大中 씨를 혼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다.
 
 金 실장은 대통령에게 “우리 쪽에서는 아무도 관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朴 대통령은 “그렇다면 金大中 씨의 하부조직이 자작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이날 신관회의실에서 週例(주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李厚洛 정보부장도 참석했다.
 
 다음날 朴 대통령은 신임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대장을 접견하고 오후엔 정부 여당 연석회의를 주재했다. 8월 10일에는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朴 대통령은 8월 11일엔 오전 11시 15분부터 55분까지 李厚洛 정보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李 부장이, ‘지금 정보부 공작선이 金大中 씨를 납치하여 데리고 오는 중’이란 보고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뒤의 朴 대통령 행동으로 미뤄보아 그런 보고가 있었던 같지 않다.
 
 이날은 토요일이었는데 朴 대통령은 오후 2시 30분부터 밤 10시까지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金振晩 공화당 의원, 조선공사 사장 南宮鍊 씨와 골프를 함께 친 뒤 식사를 했다. 다음날에도 朴 대통령은 오전 11시 25분부터 밤 10시까지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金振晩·南宮鍊 씨와 함께 골프를 쳤다.
 
 
 “金大中이가 서울에 와 있대” 
 
 

8월 13일 월요일 오후 3시 8분~4시 37분, 이때 李厚洛 정보부장이 집무실에서 朴 대통령에게 金大中 납치를 실토한 것으로 보인다. 李 부장은 “이미 金 씨가 한국 땅에 와 있고 오늘 밤에 귀가시킬 작정이다”라고 보고했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 대통령은 이날 오후 자신을 부르더니 “金大中이가 서울에 와 있대. 놀랍고 엄청난 일이야. 조금이라도 위해가 가해져서는 안 되는데…”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한편 金鍾泌 국무총리는 이날 밤 鄭韶永 농수산부 장관과 함께 전국의 목장 실태를 살펴보고 광주에 들렀다가 金大中 씨가 괴한들에게 이끌려 집 앞까지 와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朴 대통령은 다음날 오전 9시 30분부터 20분간 집무실에서 金大中 납치 관련 대책회의를 가졌다. 申稙秀 법무장관, 尹胄榮 문공장관, 鄭相千 내부차관, 尹錫憲 외무차관, 李厚洛 정보부장, 金正濂 비서실장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일단 金大中 납치 수사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오후 4시 金鍾泌 총리가 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집무실에 들어가니 朴 대통령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임자는 몰랐어?”
 
 “아,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후락, 이자가 그를 옆에다 갖다 놓고 나서야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다음날 朴 대통령은 오전 10시 45분부터 정오까지 申稙秀 법무장관과 李厚洛 정보부장을 불러 金大中 납치 사건 대책을 논의했다. 朴 대통령은 형식적으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는, 일본에서의 수사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朴 대통령은 한편으로 정보부의 李龍澤 국장을 불러 진상조사 특명을 내렸다.
 
 그전에 李厚洛 정보부장은 金大中 씨와 친숙한 李龍澤 수사국장에게 金 씨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준 적이 있었다.
 
 “李厚洛 부장은 나에게 ‘직접 가서 설득해 동반 귀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李부장은, 金大中씨의 일체의 언동에 대해 불문에 부치고 적절한 시기에 정치를 재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도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갈 준비를 했습니다.”
 
 李 국장이 李姬鎬 여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李 여사는 “李 국장이 가서 설득해도 그분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침 그 무렵 미국에 살고 있던 李 여사의 친척이 한국에 왔다. 이 친척을 통해 李 국장의 편지와 함께 李 여사도 편지를 써서 DJ에게 보냈다. 金大中 씨로부터 ‘나도 이제부터 정치활동은 일절 안 하겠다. 가능하면 미국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답장이 왔다고 한다.
 
 그러자 李 여사가 먼저 李 국장에게 같이 가자고 제의해 왔다. 李 여사는 “내 말은 듣지 않는데, 李 국장이 직접 가서 해외 언동에 대해서 불문에 부친다는 보장을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李 국장은 李 여사의 제의를 李 부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李 여사에 대한 여권 발급이 자꾸 늦어졌다. 李 국장은 “당시 朴 대통령이 國法(국법)을 어긴 사람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반대해 李 여사가 가지 못하게 된 것”으로 추측했다.
 
 李龍澤 씨의 증언.
 
 “金大中 씨가 나타난 다음날일 거예요. 청와대에서 극비로 즉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朴 대통령은 처음에 ‘자네가 했나’라고 바로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했더니, ‘동백림 사건 때는 어떻게 잡아왔느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때는 국내 부서에서 수사를 다해서 해외담당 차장에게 자료를 넘겼다고 말했습니다. 朴 대통령은 ‘KT(당시 대통령은 金大中 씨를 그렇게 불렀다) 건에 대해서 누가 했는지 자네가 한 번 조사해 봐’라고 지시하면서 ‘누구한테도 보고하지 말고 은밀히 하라. 자네가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거나 압력을 넣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라’고 말했습니다. 朴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섬세해요. 저는 그 순간, 朴 대통령이 DJ 납치에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李 국장은 아무리 그래도 李厚洛 부장에게는 보고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궁정동의 부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李 부장은 이미 李 국장이 朴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李 부장은 말을 더 더듬었고 커피를 연거푸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손을 떨었다.
 
 李 국장은 청와대에 다녀온 것과 대통령으로부터 조사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李 부장에게 말해 주었다.
 
 李 국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데려왔습니까?”
 
 李 부장이 설명한 요지는 이러했다.
 
 <金大中 씨가 한민통을 만들어 그 의장으로 취임하면 망명정부 수반 행세를 할 것이란 정보가 들어왔다. 망명정부 수반 자격으로서 북한을 방문하여 金日成과 만나면 연방제 통일에 합의할 것이고, 북한 측은 한국 정부를 괴뢰 시하게 될 것이다. 진행 중인 남북대화도 중단될 것이다.
 
 金大中을 평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북한의 공작이 진행 중이고 金大中 씨도 주변 인물들에게 의견을 묻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한민통 결성 대회를 하기 전에, 북한이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잡아온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한 뒤 李厚洛 부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잘 알지요. 그쪽에서 냄새를 맡은 것 같으니 李 국장이 손을 써 신문에 나지 않도록 해줘요”라고 부탁했다. 물러난 李 국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만나 물어보았다. 張 국장은 부산 4부두를 관할하는 경찰부서에서 정보가 올라왔다고 했다. 경찰이 오래 전부터 정보부의 공작선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용금호가 며칠 전 밤에 부산 4부두에 닿았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사람을 부축하여 내렸다. 선원들은 그 사람의 머리를 웃옷으로 덮어씌웠다. 초소 경찰관이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용금호 선원인데, 술에 취했다.”
 
 용금호 선원들은 그 사람을 데리고 앰뷸런스에 탔다. 이를 본 경찰관이 앰뷸런스의 차 번호를 적어두었다가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李龍澤 국장이 그 번호를 받아 정보부로 돌아와 운송부서에 확인하니 정보부가 운영하는 앰뷸런스임이 밝혀졌다. 李 국장은 바로 앰뷸런스의 운전사를 불렀다.
 
 “부산 4부두에서 태운 술취한 사람이 누구였지?”
 
 “KT(金大中)였습니다.”
 
 “태우고 어디로 갔나.”
 
 “충청도에 있는 우리 安家로 갔습니다.”
 
 “누가 한 것 같아.”
 
 “공작단이지 누구이겠습니까.”
 
 “밖으로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게.”
 
 李龍澤 국장은 H 해외공작국장을 만났다. H국장은 金大中 납치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KT가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데려왔다. 그를 죽이라는 명령은 받은 적이 없다. 비행기가 왔기 때문에 그를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순찰 중 상공을 지나간 정도이다.
 
 金大中 씨를 기관실에 묶어 놓았는데 갑판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은 바깥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쪼이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칼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끈을 가지고 간 것은 그를 마취시켜 묶어서 내리려고 했던 것인데 호텔이 너무 높고 대낮이어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것이다〉
 
 李 국장은 朴 대통령을 찾아가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朴 대통령은 낙담한 모습이었다.
 
 “李 국장, 옛날 말에 조선 망하고 大國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자가 나를 완전히 망칠 작정을 한 것이구먼.”
 
 “朴 대통령은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라면서 걱정했어요. 진상을 그대로 밝히면 일본에서 원상회복과 함께 국가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각하, 일본을 잘 아는 金鍾泌 총리와 의논해 보면 어떻겠습니까’고 건의했습니다. JP는 그해 11월 진사 사절로 일본에 가서 사과하고 돌아와 정치적 타결을 이뤄 냈습니다.”
 
 
 “金大中 납치는 李厚洛의 과잉충성”
 
 1973년 8월 16일 오후 6시 30분쯤 청와대 식당에서 朴 대통령은 비서진들과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경호 문제가 화제로 오르자, 朴 대통령이 말했다.
 
 “沿道(연도) 경비는 사전에 행차를 알리는 것이므로 적절치 못해. 그리고 자동차로 지방에 다녀올 때도 서울 시장이 뻔질나게 나오는데 그 시간에 자기 일이나 하지. 그런 필요 없는 짓 하지 말라고 일러줘요.”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쯤 朴 대통령은 사투리 이야기를 꺼냈다.
 
 “軍 생활을 하면서 各道(각도)에서 모인 출신 장교들 때문에 평안도·함경도·경상도 사투리를 섞어서 썼던 적이 있어. 지금도 그 버릇이 좀 남아 있을 거야. 윤태일 서울 시장과 이주일 감사원장이 어떻게 말하는 줄 아나? ‘앙이 먹겠다’, ‘앙이 술 마시겠다’고 얘기해. 일본도 가고시마 사투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
 
 朴 대통령이 尹 시장과 李 원장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내어 비서관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朴 대통령도 소리내어 웃었다.
 
 1973년 9월 7일. 이 날짜 <조선일보>는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金大中 납치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사설의 필자는 鮮于煇(선우휘) 주필이었다.
 
 이날 朴 대통령은 李厚洛 정보부장이 보고차 들르자 이렇게 말했다.
 
 “어이 李 부장, 정보부는 사람 잡아 가두는 데라는 말이 있는데 鮮于주필도 잡아넣을 거야?”
 
 朴 대통령의 말투는 잡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이 사설의 全文이 실렸다. 鮮于 주필은 수원에 있는 친지 집으로 피신했다.
 
 며칠 뒤 鮮于煇의 동생 鮮于煉(선우련) 공보비서관은 청와대 구내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는 朴 대통령을 우연히 만났다.
 
 “요즘 형님은 잘 계신가?”
 
 “형님은 사설 때문에 정보부가 잡으려고 해서 피신 중입니다. 닭고기를 좋아하는 형님이 피신 중에 닭고기를 많이 먹어 살이 무척 쪘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잡아넣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정보부장에게 전화할 테니 형님에게 오늘 저녁 마음 놓고 나오시도록 전해요.”
 
 朴 대통령의 그 말이 있고 난 뒤 鮮于煇 주필은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고, 일주일이 더 지나서는 鮮于煉과 함께 대통령이 초대한 위로 술자리에 함께 참석했다. 한참 동안 술을 마시다가 朴 대통령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그놈 말이야. 머리가 좋고 빨리 돌아간다고 내가 중용했더니만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 가지고 나를 국제적으로 망신당하도록 하고 있어.”
 
 “그래도 충성하느라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과잉 충성이오.”
 
 李厚洛 前 정보부장은 “朴 대통령이 金大中 씨를 납치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고 말해 왔다. 그는 “내가 朴 대통령에게 납치 사실을 알린 것은 우리 배가 金大中 씨를 데리고 오사카항을 떠난 이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1980년 봄에 李厚洛 씨가 울산 同鄕(동향) 친구이자 金大中 씨와도 친했던 최영근(국회의원 역임) 씨를 통해서 金 씨에게 “당신 납치는 朴 대통령이 지시하여 이뤄진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는 說도 있다. 기자가 1985년에 崔 씨를 만나 물었더니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들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의 증언을 소개한다.
 
 〈나는 李厚洛·金大中 씨 두 사람과 각각 별도로 오랜 친교가 있다.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의 李厚洛 씨에게 金 씨를 처음 소개해 준 것도 나다. 10·26 뒤 나는 李厚洛 씨를 만났다. 지금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물어 보았다. 그의 해명은 대강 이랬다.
 
 “金大中 씨가 해외에서 朴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개시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사석에서 朴 대통령은 불쾌한 어조로 金 씨를 없애라는 뜻의 욕설을 했다. 나는 농담으로 넘겨버렸다. 그 며칠 뒤 朴 대통령은 청와대로 날 부르더니 정색을 하고 이 문제를 金鍾泌 씨와도 이야기한 것이라며 엄명을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金 씨를 죽였을 경우, 그 책임이 언젠가는 나한테 올 것이라는 걸 모를 만큼 내가 바보는 아니지 않는가. 결국 나는 납치를 해서 한국에 그를 데려다 놓는 선으로 朴 대통령의 명령을 소화하기로 했다. 그래서 애당초부터 납치였지, 제거 지시가 아니었다.”
 
 나는 李厚洛 씨의 이 말을 1980년 봄에 金大中 씨에게 전해주었다. 金 씨는 李厚洛 씨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는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李厚洛 씨는 자신의 해명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므로 증거는 없다고 봐야겠다. 다만 수십 년간 李 씨와 사귀어 온 나로서는 그가 시키지도 않은 납치를 스스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너무나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朴 대통령 측근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압도적으로 李厚洛 정보부장이 독단적으로 金大中 납치를 지시한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되어 있다. 인간 朴正熙에 대한 체험과 이해가 깊은 사람들일수록 “그분은 政敵(정적) 살해를 명령할 사람이 아니다”고 못 박는다. 李厚洛 씨가 최영근 씨한테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시점은 金大中 씨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보였던 1980년 봄이었다.
 
 살길을 찾기 위해서 죽은 朴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동시에 당시 金大中 씨의 경쟁자였던 金鍾泌 씨도 물고 들어가려고 했을 수도 있다. 金 씨를 살려서 데려오면 국제문제가 생길 것이 뻔한데 왜 李厚洛 부장이 그런 바보짓을 스스로 했겠느냐 하는 주장이 꼭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때의 정보부였다면 한국의 反共단체가 金大中 씨를 납치해 온 것처럼 위장하고, 검찰과 경찰은 수사를 해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영구미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던 정보부의 음모를 뒤집어버린 것은 일본 경찰이었다.
 
 그들은 납치에 가담했던 駐日 한국대사관의 金東雲 1등서기관 지문을 현장에서 채취하는 데 성공하여 金 서기관을 소환하려 했던 것이다. 金 서기관이 소환을 피해 먼저 귀국하면서 정보부의 소행임이 입증되었다(물론 韓日 양국 사이에선 金東雲 서기관이 상부 지시 없이 가담한 것으로 하여 사건을 덮었다).
 
 朴 대통령이 金大中 씨가 서울로 돌아온 직후 정보부 李龍澤 국장에게 진상조사를 지시한 것을 보면 이 사건을 괴한들이 한 것으로 조작하여 덮어두려는 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보부가 진상조사를 하면 결국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李厚洛 부장이 金大中 씨의 해외 언동에 대한 보고를 朴 대통령에게 자주 올리니까 朴 대통령이 신경질을 냈고, 이를 납치 지시로 해석한 李厚洛 부장이 ‘대통령의 뜻을 한발 앞서 시행한다’는 소신에 따라 金大中 씨를 납치했다가 자신의 신세를 망친 경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미국이 1973년의 납치 사건 때 金大中 씨를 살리는 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당시 美 CIA 서울지부장이던 도널드 그레그(뒤에 駐韓 미국대사 역임), 당시 駐韓 미국대사 필립 하비브가 그런 사람들이다. 돈 오버도퍼 기자가 쓴 《두 개의 코리아》란 책에서도 그런 주장이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은 하비브 대사가 金大中 납치 직후 주모자가 정보부임을 알아내고 朴 대통령 정부의 고위인사에게 金大中 씨를 죽이면 韓美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썼다.
 
 미국이 金大中 씨를 살렸다는 주장은 과장이다. 金大中 납치에 직접 관여했던 李厚洛 부장, 정보부 공작단 간부들, 납치선의 선원들은 한결같이 “애당초 金大中 씨를 죽이라는 지시나 계획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CIA의 역할은 많은 경우 과대평가되고 있으며 그들은 그것을 즐기기도 한다. 미국인들은 또한 李厚洛 부장을 물러나게 하는 데 CIA가 작용을 했다고 주장하나 이 또한 과장이다. CIA가 그런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다.
 
 金大中 강제귀국 4일 뒤인 1973년 8월 17일자 美 국무성의 비망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CIA와 의논하고 있다. CIA는 李厚洛 부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중한 검토를 하고 있다. CIA는 한국의 안정과 관련하여 李厚洛을 겨냥한 어떤 행동을 실천에 옮길 것을 생각 중이다>
 
 1978년 미국 의회에서 나온 ‘韓美관계 보고서’는 ‘미국 측이 朴鐘圭 경호실장을 통해서 朴 대통령에게 李 부장에 대한 불만과 李 씨의 그런 행동이 韓美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임을 통보했다’고 썼다.
 
 李厚洛 부장은 1973년 12월 3일에 해임되었다. 朴 대통령은 金大中 납치 사건 직후 이미 그를 해임시키려고 마음먹었으나 그렇게 하면 한국 정부가 정보부의 납치 실행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韓日관계가 11월 초 金鍾泌 국무총리의 사과 訪日로 정상화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朴 대통령 귀에 李 부장에 대한 미국 측의 불만이 전달되었다고 해도 이미 나 있는 결심에 별다른 영향은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1973년 12월 3일 朴 대통령은 10부 장관을 바꾸면서 李厚洛 부장을 해임시키고 후임에 申稙秀 법무장관을 임명했다.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 金聖鎭 씨는 李 부장의 몰락을 보면서 1년 전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날은 유신 선포 직후였다. 李 부장이 유신조치에 고생을 했다고 청와대·軍장성·정보부 간부·내무 관료들을 초청하여 큰 저녁식사 모임을 마련했다. 金 수석이 그 자리에 갔더니 ‘술잔을 들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담소를 하는 자리인데, 李 부장 주위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을 정도로 아첨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버렸고, 다른 자리는 이 빠진 것처럼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고 한다. 金 수석은 ‘이 자리는 내가 올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빠져나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오더란 것이다. 金 수석은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 李厚洛 부장의 심경은 어떠할까에 생각이 미치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1973년 11월 2일. 합동통신 趙成天(조성천) 기자가 駐日 특파원으로 전출하는 것을 축하하는 저녁 식사 모임이 朴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있었다. 趙成天, 崔鍾哲(동아방송), 李鎔昇(경향신문), 그리고 비서관 중에서는 김성진, 유혁인, 권숙정, 선우련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朴 대통령은 국민성에 대한 얘기를 시작으로 긴 시간 이야기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잘살고, 게으른 사람은 못사는 사회야말로 건전한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게으른 사람이 잘사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죄다 수상한 일이야.”
 
 朴 대통령은 대화 중간에 잠시 中東(중동)의 産油(산유)국가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난 후, 화제를 또다시 국민성 문제로 돌렸다.
 
 “자연의 혜택으로 국민이 오히려 게을러지고 진취성이 없어지면 그 국민의 장래는 어두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연의 혜택이 많았던 곳은 오히려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의식주의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고, 빈둥빈둥 놀다 보니 때는 이미 늦었고…. 결국 남방 지대의 국민들이 미개국으로 남게 된 것은 앞에서 말한 근면성과 깊은 관계가 있어요. 때문에 자연의 혜택 여부보다는 국민들의 근면성 여하에 따라 경제력이 좌우된다고 확신합니다.”
 
 1973년 11월 9일. 朴 대통령 내외는 청와대 출입기자단에게 오찬을 베풀었다.
 
 “지금부터 내가 한 말들은 극비 사항에 해당되기 때문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시오.”
 
 朴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보도 금지(Off the Record)를 요청한 후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남북관계와 주한미군에 관한 것, 朴 대통령이 알고 있는 각종 정보와 계획, 韓美 간의 민감한 문제 등이었다.
 
 “북한이 남북회담을 할 때, 당초에는 미군 철수를 요구하며 미국內의 여론을 환기시켜 실효를 거둬 보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그 반응은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미군이 한국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기니까 대화를 끊으려 하고 있어요.
 
 현재로선 남북조절위원회나 적십자회담 모두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굳이 의의를 찾는다면 단지 회담을 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남북대화는 우리의 국력이 월등하게 강해 金日成이 스스로 ‘이제 무력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自認(자인)하게 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장을 더욱 강화하고, 이에 바탕이 되는 경제력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朴 대통령은 북한의 정세를 좀더 자세하게 분석해 주었다.
 
 “(제4차) 中東戰이 일어났을 때, 나는 한반도의 안보를 무척 걱정했습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북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습으로 상대국 영토를 점령한 후 휴전하는 中東戰의 사례가 金日成에게 어떤 모험심을 일으키게 할지도 모릅니다.
 
 요즘 보면 평화협정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하는가 본데, 북한의 저의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평화협정을 제의하는 것은 진정으로 건설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질질 끌다가 전술상 자기들에게 유리할 때 회담 결렬의 책임을 우리에게 덮어씌우고, 무력 적화통일을 하려는 심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국민들이 자세히 알 필요가 있어요.
 
 금년 유엔 총회에서의 남북 대결은 어떤 쪽의 案이 통과되더라도 그대로 실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대결은 누가 지지국을 많이 얻느냐 하는 스코어戰에 불과할 것입니다.”
 
 朴 대통령의 환담은 무기 구입 부분에서는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앞으로 안보를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對空火器(대공화기)입니다. 이 화기 가격은 한 개에 10만 달러 정도라고 하는데, 가령 미국이 팔지 않을 경우에는 구라파에서라도 꼭 사올 계획입니다.”
 
 육군경리감 출신인 黃寅性 씨(뒤에 국무총리 역임)가 전북지사로 부임한 지 한 달가량 된 1973년 11월 22일 오후 3시쯤이었다. 朴 대통령이 다음날 광주에서 거행될 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호남고속도로 전주 인터체인지를 통과하여 광주로 갈 예정이니 지사는 가능하면 전주 인터체인지에서 배웅을 하고 뒤따라 광주에 오는 것이 좋겠다’는 金玄玉 내무장관의 연락이 있었다(이하는 黃寅性 회고록 《나의 짧은 한국 紀行》에서 인용).
 
 黃 지사는 지시대로 했고, 마침 朴 대통령 일행의 차량행렬이 경호차를 선두로 질주해 가기에 도로변에서 그저 머리 숙여 경례를 했다. 행렬은 그대로 통과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대통령 승용차가 급정거했다. 金正濂 비서실장이 차에서 내려 “黃 지사!”하고 부르며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金 비서실장이 운전기사 옆자리로 옮겨 앉자 朴 대통령은 반가운 표정으로 “黃 지사, 잘하고 있소?”하며 자신의 옆자리에 타라고 했다. 黃 지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하였다. 아무것도 보고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아서 그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큰 산을 가리키며 그 이름을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지난번 각하께서 호남고속도로 준공식 때 광주만 다녀가셨다고 해서 이 고장에서는 좀 섭섭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朴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 黃 지사, 정읍 내장산에도 호텔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 손님들이 많이 있나? 호텔이 잘 만한가?”
 
 “예, 썩 좋은 호텔은 아닙니다만 관광객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이 화근이 되었다. 朴 대통령은 金 비서실장에게 말하였다.
 
 “金 실장, 내일 광주에서 올라오면서 하룻저녁 내장산에서 자고 가면 어때?”
 
 金 비서실장은 대통령 말씀이니 “예, 그렇게 하시지요”하였다.
 
 “그럼 손님이 많으면 다음으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룻저녁 자고 갑시다. 광주에 가서 한번 알아보시오.”
 
 광주 관광호텔에 도착하자, 黃 지사는 전주에 있는 부지사한테 전화를 걸어 보안상 문제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은 말하지 못하고 내무국장 책임下에 지금 즉시 내장산 관광호텔에 가서 대대적인 청소를 하고 모든 준비를 갖추라고 말해 두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 후 金 비서실장으로부터 당황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黃 지사, 우리 경호답사팀이 내장산 호텔을 가보고 왔는데 그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여관만도 못 하고 시설도 형편 없어 도저히 대통령께서 유숙하실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黃 지사는 바로 金 비서실장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자신이 없으니 그러면 내일 상경하는 길에 내장사나 잠깐 돌아보시고 올라가시도록 하시지요.”
 
 이렇게 대안을 숙의한 후 朴 대통령께 보고하여 내장산 호텔에서는 차만 한잔 마시고 내장사의 시찰을 하기로 했다. 黃 지사는 참 잘됐다고 생각하고 한시름 놓았다. 당초 朴 대통령 일행의 계획은 대전 유성호텔에서 일박하게 되어 있었다.
 
 朴 대통령은 그 다음날 광주에서 행사를 마치고 바로 내장산 호텔에 도착하였다. 朴 대통령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를 한잔 마신 다음 백지에 정읍시가지 약도를 그리며 정읍 우회도로를 건설할 것과 내장산 관광단지를 現 위치에 건설할 것, 그리고 지사 책임下에 내장사의 복원사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말하자면 지사 취임 후 대통령이 이 지역에 방문한 첫 선물을 준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벌떡 일어나서 침실 쪽으로 가면서 “이 사람들이 여기가 어때서 못 잔다는 거야?”하고는 침대방과 화장실까지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이런 데 오면 아무데서나 자는 거지 뭐. 비서실장, 나는 여기서 자고 가겠어.”
 
 가장 큰 낭패를 당한 것은 黃 지사였다. 黃 지사는 한 시간 전에 먼저 내장산에 와서 보고는 그냥 한 번 돌아보고 가기로 결정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조그마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호텔에서 대통령 일행이 유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전주에서 요리사를 데리고 오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결국 그 호텔 주방에서 준비한 일반 저녁식사를 朴 대통령에게 대접해야 했다.
 
 그 다음날 아침도 흔히 전주에서 하는 콩나물죽을 준비하여 조찬으로 때우니 黃 지사로서는 몸둘 바를 몰랐다. 朴 대통령은 그런 조찬을 들면서 “솔직히 어제 저녁은 좀 시원치 않았는데 오늘 아침 콩나물죽은 맛이 있구먼”하고 그를 위로해 주었다.
 
 전날 밤 黃 지사는 朴 대통령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려고 종종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았으나 새벽 1시까지도 방에 불이 켜 있었다. 그는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후에 알고 보니 朴 대통령은 그날 밤에 새마을운동의 노래 가사(1~4절)를 작사하였다고 한다.

 

-글 조갑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