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청나라, 청(淸) 또는 청 제국(淸帝國)은 1616년 동아시아의 북방민족인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이다. 초기에는 금(흔히 “후금”이라 부름)이었다가 후에 세력을 강화하여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청은 한족의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통합하여 몽골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이민족으로서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간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청의 전성기는 강희제로부터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1백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에는 청의 영토가 현저히 확대되었음은 물론 군주권이 강화되고 여러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국가재정도 풍부하였다. 특히 문화 사업을 크게 벌여 <강희자전>, <사고전서>등이 간행되었다.
**************************************************************
후금(後金)
제1대 누르하치, 1616년 ~ 1626년
청 태조(淸太祖) 천명제(天命帝, 1559년 2월 21일 ~ 1626년 9월 30일)는 건주여진의 출신으로 건주여진을 통합한 뒤 1616년에 자신을 여진의 한으로 선언하고, 1618년에는 자신의 국가명을 금이라고 발표했으며,
1621년까지 명나라의 요동 지역 대부분을 석권했다. 그는 분명 황제가 아니었지만 그의 사후에 개정된 기록에서는 항상 황제라고 언급됐다.
청 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누르하치는 '성스러운 황제'이자, 황실의 종교적 의식에서 숭배를 받는 청 제국의 설립자였다.
제2대 홍 타이지,청 태종(淸太宗) 1626년 ~ 1636년
숭덕제의 이름은 사료에 여러 표기로 등장하는데 황태극(皇太極), 홍대시(紅歹是), 홍대시(洪大時), 홍태극(洪太極), 홍태주(洪太主), 홍태시(洪佗始), 홍태시(洪台時), 홍타실(洪他失) 등이 있다.
사실 그의 진짜 정확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현대학자들은 홍 타이지가 본명이 아니라 칭호라고 많이 여기는데, 몽골 귀족의 칭호인 콩타이지(渾台吉,)에서 유래하였다.
청(淸)
제2대 숭덕제(崇德帝,청 태종(淸太宗) 1636년 ~ 1643년
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후금의 제2대 한이자, 청 제국의 창업 군주이다.
휘는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후금 연호는 천총(天聰,)이고, 청 제국 연호는 숭덕(崇德,)이다.
제3대 청 성종(淸成宗)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청 세조(淸世祖)1643년 ~ 1661년
순치제(順治帝, 1638년 3월 15일 ~ 1661년 2월 5일)는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재위 1643년 ~ 1661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첫번째 황제이다. 휘는 아이신 교로 푸린(애신교라복림),
1643년(숭덕 8년), 아버지인 숭덕제가 급사한 이후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뜻하지 않게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 후 숙부인 예친왕 도르곤과 종숙 지르가랑이 섭정으로서 국사를 도맡아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에는 중원으로 들어가 멸망한 명나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통일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강경책과 유화책을 골고루 사용, 한족의 문화와 생활 관습을 존중하고 중요한 상소문에도 만주어와 한문의 병용을 허락하였으나 한족 백성들에게는 변발을 강요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아담 샬 폰 벨과 같은 예수회 선교사를 골고루 등용하여 천문대와 화포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서양 문화에 대한 호감은 뒷날 그의 아들인 강희제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순치제는 운남성 등에 흩어져 있던 명나라의 잔존 세력인 남명을 궤멸시키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다.
제4대 청 성조(淸聖祖) 1661년 ~ 1722년
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 제국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두번째 황제이다.
연호는 강희(康煕,)이다.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인 순치제의 셋째 아들인 그는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퉁갸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첫 청 제국 군주이기도 하다
제5대 청 세종(淸世宗), 1722년 ~ 1735년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세번째 황제이다.
제4대 황제인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며 강희제의 후궁 출신인 효공인황후 우야씨(孝恭仁皇后 烏雅氏)의 소생이다.
아버지처럼 치밀하면서 거기에 성실하기까지 한 성격의 소유자로 이미 황자인 옹친왕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정치적 세력을 모으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8황자 윤사, 9황자 윤당, 10황자 윤아, 14황자 윤제 등과 정치적으로 크게 대결하였다. 1722년(강희 61년)에 부황 강희제가 붕어하자 창춘원에 감금시키고 강희제의 고명대신들인 장정옥·롱코도 등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오른다.
13년 간의 짧은 치세였으나 그의 정책으로 청 제국은 강희제 말기 약간 부실하던 황권을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실의 안정과 강력한 황권을 수립하기 위해 과거 황위를 놓고 다툰 형제들은 죽이거나 감금하는 등 철저히 배제시켜놓고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의 정책으로 국가는 더욱 안정이 되었고 내실 역시 튼튼해졌다. 또한 재정 개혁을 통하여 기강 단속과 재정 정비를 일거에 실행하는 정책을 추진함과 더불어 조세 제도 자체에도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군기처를 세우고 황권을 더욱 강화, 재상들의 정치 발언권을 규제하였고 재상들의 정치 참여를 규제한 대신 자신에겐 재상들이 본래 결재하던 문서의 양까지 합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문서를 검토, 이에 일일이 답하였고 하급의 지방관이라도 자신에게 상소를 올리면 이 역시 받아주어 주필로 써서 보내주어서 명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상들과 대신들을 군기대신으로 삼고 같이 정사를 의논하였으나 이미 그들의 권세는 명나라 때의 대신들인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에 비하여 크게 축소되어 있었기에 신권은 크게 위축되었다.
강희제 때 일어난 문자의 옥을 다시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한족을 엄정히 다스렸으며 지방관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로 부정부패를 크게 줄였다.
강희제가 죽은 직후 군사들을 동원하여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한 권력 지향적 독재자라는 평판도 있지만, 지칠 줄 모르고 늦은 밤까지 정치에 몰두한 훌륭한 군주라는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제6대 청 고종(淸高宗) 1735년 ~ 1795년
건륭(乾隆)은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연호로 1736년부터 1795년까지 60년간 쓰였다. 중국에서 조부 강희제의 연호인 강희(康熙) 다음으로 오랫동안 쓰인 연호이다.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 치세로, 건륭제의 시대를 끝으로 청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건륭제(乾隆帝,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 가경(嘉慶) 4년 음력 1월 3일 (1799년 2월 7일))는 청 제국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이다.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네번째의 황제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제왕이 지녀야 할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로마가톨릭교회 산하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써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뇨후루 허션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6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이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제7대 청 인종(淸仁宗) 1795년 ~ 1820년
가경제(嘉慶帝, 건륭 25년 음력 10월 6일 (1760년 11월 13일) ~ 가경 25년 음력 7월 25일 (1820년 9월 2일))는 청 제국의 제7대 황제(재위 1796년 ~ 1820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다섯번째 황제이다.
제6대 황제인 건륭제의 열다섯 번째 아들로 건륭제의 후궁 출신인 효의순황후 워이갸씨의 소생이다.
건륭제가 늦은 나이에 본 아들이어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어린 나이에 이미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1795년(건륭 60년) 부황인 건륭제의 양위로 황제에 올랐으나 즉위 초기 4년은 태상황제로서 여전히 실권을 가지고 있던 건륭제의 그늘 속에서 별다른 실권도 없이 평이하게 재위 기간을 보냈다. 그러나 건륭제의 붕어 후, 건륭제의 비호 아래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허션을 체포하여 자결케 하였으며 일시적으로 황권을 공고히 하여 건륭제 치세 말기의 부정부패와 사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커서 백련교도의 난과 천리의 난, 계유지변 등이 발생하며 이를 겨우 평정하였으나 백성들을 달랠 강력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아 점차 통제권을 상실해갔다. 그의 치세 속에서 청나라는 점점 쇠퇴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 아버지의 치세까지 지속되었던 강건성세에 대비하여 그와 그의 아들 도광제의 치세는 연호의 앞 글자를 따 가도중쇠(嘉道中衰)라고 불린다.
제8대 청 선종(淸宣宗) 1820년 ~ 1850년
도광제(道光帝, 1782년 9월 16일 ~ 1850년 2월 25일)는 청 제국의 제8대 황제(재위 : 1820년 ~ 1850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여섯번째 황제이다.
제7대 황제 가경제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지친왕(智親王)으로 봉해졌다. 아호(雅號)는 산난(山南)이다.
즉위 후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전개한 삼각 무역(아편무역)으로 엄청난 문제가 일어나자 임칙서로 하여금 이를 수습하게 하였다.
결국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으로 이어졌고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이 영국에 넘어감은 물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개항되어 서구 열강이 대대적으로 쇄도해오는 길을 열어주었다.
제9대 청 문종(淸文宗) 1850년 ~ 1861년
함풍제(咸豊帝, 1831년 7월 17일 ~ 1861년 8월 22일)은 청 제국의 제9대 황제(재위 1850년 ~ 1861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일곱번째 황제이다.
재위기간 중에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 중국 대륙이 휘청거렸다. 1854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공사는 함께 광저우로 가서 양광총독(兩廣總督) 엽명침(葉名琛)에게 모든 내지(內地)와 연해도시의 개방, 상선과 군함의 양자강 자유왕래, 아편무역의 합법화, 내지(內地) 통관세의 폐지, 외국사절의 북경상주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난징 조약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53~54 두 번째 개정교섭에서는 1856년 5월 미국 공사가 광저우에서 공사의 북경상주, 중국전역의 개방, 선교의 자유 등을 요구하였다.
1856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와의 군사분쟁(애로 호 전쟁)이 격화되어 1860년 함풍제는 열하(熱河)로 피난을 갔다.
그 사이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공세가 북경까지 이르러 이궁(離宮) 원명원이 전소되었다.
이후 함풍제는 피서산장에서 1861년 8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제10대 청 목종 1861년 ~ 1875년
동치제(同治帝, 1856년 4월 27일 ~ 1875년 1월 12일)은 중국 청 왕조의 제10대 황제(재위 1861년 ~ 1874년)이다.
청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장남으로 황위를 물려받은 황제이다.
1861년 8월 22일에서 1874년 12월 17일까지 재위하였는데 즉위 당시 동치제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종실 및 숙부 공충친왕(恭忠親王)과 적모(嫡母) 동태후(東太后), 생모 서태후(西太后)가 번갈아 가며 섭정하였다.
1861년 8월 22일을 기하여 붕어한 아버지 함풍제의 뒤를 이어 5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친척 종실들인 애신각라숙순(愛新覺羅肅順, 1861년 8월 22일에서 1861년 9월 10일까지 섭정)과 애신각라재원(愛新覺羅載垣, 1861년 9월 10일에서 1861년 11월 8일까지 섭정)과 애신각라단화(愛新覺羅端華, 1861년 11월 8일에서 1861년 12월 15일까지 섭정)가 차례로 섭정하였으며 뒤이어 이복 숙부 공충친왕(恭忠親王)이 1861년 12월 15일에서 1863년 3월 3일]까지 섭정하였고 1863년 3월 3일에서 1870년 3월 3일까지 동태후(東太后)가, 1870년 3월 3일에서 1873년 3월 3일까지 서태후(西太后)가 섭정하였다. 그 후 1873년 3월 3일에서 1874년 12월 17일을 기하여 사촌 남동생 광서제에게 선위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치세 시기 중 친정이 시작된 후에도 서태후는 명목상으로만 정권을 반납하였을 뿐 줄곧 아들을 감시하며 이전처럼 권력을 휘둘렀다.
17세 때 천연두를 앓고 있던 동치제가 사촌 남동생 재첨한테 선위를 하였지만 이런 선위 작전도 사실은 동치황제의 모후인 서태후의 치맛바람이 섞인 입김이었다.
어려서부터 문후(問候)와 명절 시기에 예(禮)를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과의 교류가 없었던 동치제는 엄하고 냉정한 서태후보다 착하고 성실한 동태후와 보다 더 가까이 지냈다.
동치제가 15세가 되자 동태후와 서태후는 각각 그의 신붓감을 추천했는데 동치제는 생모 서태후가 아닌 적모 동태후가 고른 아로특씨(阿魯特氏)를 황후로 선택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서태후는 동치제에게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으니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황후의 침실에 드나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사촌 남동생 재첨한테 선위한 이듬해 1875년 1월 12일을 기하여 상황 동치제는 19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제11대 청 덕종(淸德宗) 1875년 ~ 1908년
광서제(光緖帝, 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는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이다. 묘호는 덕종(德宗). 시호는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이다.
청나라 역사상 최초의 방계 혈통 출신 황제이다. 서태후의 지원으로 즉위하였다.
1874년 12월 17일에서 1908년 11월 14일까지 재위하는 동안 1874년 12월 17일에서 1881년 4월 8일까지는 적모(嫡母)인 동태후가 섭정하였고 1881년 4월 8일에서 1889년 2월 25일까지는 이모(姨母)이자 서백모(庶伯母)인 서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이후 1889년 2월 25일에서 1898년 3월 18일까지 친정을 하였으나 1898년 3월 18일을 기하여 서태후가 일으킨 궁중 정변으로 유폐되어 서태후에게 다시 실권이 박탈되었고 1908년 11월 14일을 기하여 사망할 때까지
유폐되어 허수아비 임금의 신세를 지냈다.
광서제가 재위한 시기에는 양무 운동으로 부분 성향이나마 중국의 근대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894년에서 이듬해 1895년까지 일어난 청일 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 타이완이 일본에 식민지 강제 복속이 되는 등
중국에서의 열강 각축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광서제는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 신진 엘리트들을 등용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무술(戊戌)개혁을 실행하고 완전 근대화를 꾀하였다.
당시 캉유웨이 등의 지식인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 일본과 협력할 것을 제안하고 신문에 개혁안을 싣는 등 개혁을 선도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서태후, 이홍장 등이 반격하자, 개혁에 가담한 지식인들이 망명이나 사형을 맞아야 했고, 결국은 서태후가 섭정을 재개했다.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하는 사이에 광서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으로 피난했고 그가 총애하던 후궁 진비(珍妃)는 서태후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
베이징 의정서가 성립되어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그는 독서를 즐겼고 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해 보수적인 서태후와 대립했다.
1908년 11월 14일에 사망했고, 당시 이질을 앓고 있던 서태후는 제12대 황제로 푸이를 서둘러 지명한 뒤 다음날인 11월 15일에 사망했다.
위안스카이가 그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오다가 2008년 그의 머리카락을 X선 조사한 결과 독살임이 사실로 밝혀졌다.
청나라 비정통 황제-1899년 대아가(大阿哥)
보국공 푸쥔(輔國公 溥儁, 보국공 부준, 1885년 1월 10일 ~ 1942년 1월 19일)은 중국 청나라의 황족 종실이자 정치가이다. 이름은 아이신 교로 푸쥔(愛新覺羅 溥儁, 애신각라 부준)이다. 동치제의 추정상속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1906년 청나라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짜이펑과 서태후의 측근인 대학사 겸 군기대신인 영록의 딸 유란의 아들로 순친왕부에서 태어났다.
부준의 아버지는 광서제의 6촌 형 이혁단군왕(已革端郡王)이고, 친할아버지는 도광제의 서자로 출생하여 돈각친왕(도광제의 이복 동생)의 양자가 된 돈근친왕이며, 양할아버지는 서회친왕(도광제의 이복 동생)의 아들 서민군왕이다.
1891년 1월 7일, 6세 나이로 보국공(輔國公)에 책봉되었다.
1898년 9월 21일을 기하여 그는 서태후의 농간 작전에 의하여 13세의 나이로 1899년 3월 18일 보경제(保慶帝)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0년 1월 24일 서태후에 의해 폐위되고 보국공(輔國公)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청나라 멸망 후에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로부터 배척되었다. 이후 1912년 2월 12일부터 당시 청나라 소조정 수장이었던 선통제의 섭정을 맡았다.
이후 1917년 7월 1일 복벽사건으로 선통제가 청 황제에 재추대되며 중화민국 안후이 제독이었던 장쉰 장군에게 섭정을 위임하였다.
1922년 5월 29일 아버지상을 치르고, 1925년 7월부터 1926년 3월까지 중화민국 총통부 참의를 지냈다. 이후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핑 변두리의 탑왕부(塔王府)에서 칩거하며 지냈다.
1942년 1월 19일, 탑왕부에서 만성 간부전증으로 인하여 향년 57세로 훙서하였다.
제12대 청 공종(淸恭宗) (말황제<末皇帝>) 1908년 ~ 1912년
아이신 교로 푸이는 청 제국의 마지막 12대 황제 선통제(宣統帝, 재위 : 1908년 ~ 1912년, 황제의 칭호는 1924년까지 유지.)이자 만주국의 집정 및 황제(재위 : 1932년 ~ 1934년, 1934년 ~ 1945년)이다.
만주국 집정으로는 대동왕(大同王, 다퉁왕), 황제로는 강덕제(康德帝, 캉더디)이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붕어하자 당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서태후가 푸이를 동치제와 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태어난지 2년 10개월 만에 청나라 12대 황제 선통제로 즉위하였다.
청 왕조의 가법(家法)에 따르면 동치제가 죽었을 때, 항렬이 부(溥)자인 후손들이 황위를 계승해야만 했지만 서태후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광서제로 황위를 승계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푸이는 동치제와 광서제를 겸조하여 대를 잇게 되었다. 서태후는 푸이의 생부인 순친왕을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으로 임명하여 정치의 실권을 위임하였고 광서제가 붕어한 다음날인 11월 15일에 훙서하였다.
즉위식은 1908년 12월 2일 베이징의 자금성 태화전에서 봉행되었다. 즉위식에서 푸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섭정왕인 순친왕은 "울지 마세요,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말하였고, 대신들은 대청제국의 불길한 징조라고들 하였다.
유모 왕초씨(王焦氏)는 자금성에 푸이와 동행하였다. 푸이는 생모를 7년 동안 볼 수 없었고 유모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유모는 푸이가 8살이 되자 자금성에서 출궁하지만, 푸이는 결혼한 후에도 때때로 자금성에 유모를 불렀고, 만주국이 성립한 후에도 유모는 푸이를 만났다.
만주국에서 들인 두 후궁 (명현귀비 탄위링, 복귀인 리위친)은 유모가 소개시켜 준 것이었다. 1959년 특별 사면되자 푸이는 유모의 양자를 방문하기도 했다.
1908년 12월 2일에 즉위로써 푸이의 백부 광서제의 황후인 큰어머니 효정경황태후가 수렴청정하였고 곧 뒤이어 같은 해 1908년 12월 9일부터 아버지 감국섭정왕 재풍이 1912년 2월 12일까지 섭정승하였으며
1911년 10월 10일에 일어난 신해혁명의 여파로 인하여 이듬해 1912년 1월 1일 쑨원이 중화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청나라 황실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1개월 후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멸망과 함께 퇴위하였으나
이후 1912년 2월 12일부터 1924년 11월 5일까지 청나라 소조정 수장으로 재위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선통제 푸이 그의 8촌형 보국공 푸쥔(前 청나라 천립 군주)이 이후 1912년 2월 12일부터 1917년 7월 1일까지 섭정하였다가
1917년 7월 1일 복벽사건으로 황제에 재추대되어 같은 해 1917년 7월 12일까지 前 중화민국 안후이 제독 장쉰이 섭정하였고 복벽사건 좌절 이후 1917년 7월 12일부터 1924년 11월 5일까지 청나라 소조정 명예총리대신
여허나라 나둥(葉赫那拉 那桐, 1857년 9월 11일 출생 ~ 1925년 6월 28일 사망)이 섭정하였고 이후 1934년 3월 1일에서 1945년 8월 18일까지 만주국 황제 치세 시절에는 1934년 3월 1일에서 1945년 8월 18일까지 친정하였고
1945년 8월 16일에서 이틀 후 1945년 8월 18일까지 만주국 총리대신 장징후이가 섭정승하였다.
푸이는 고작 2세의 나이로 청나라 황제에 오르지만 위안스카이와 쑨원과의 협약에 따라 이내 퇴위한다. 협약의 내용에 따라 외국 군주의 대접에 준하여 청나라의 황제 대우를 받지만 자금성 내에서만 한정(청나라 소조정)될 뿐이었다.
펑위샹의 쿠데타로 인해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만주국의 황제에 오르지만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가로 황제로서의 실권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포로로 잡혀 수용 생활 이후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