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경재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1]~[25]

서석천 2025. 3. 15. 05:14
 
부속실 전화교환원은 일종의 ‘전문직’… 권력관계 알아야
 
 
새끼 보좌관의 주요 업무는 문서 수발
 
대공정책실 부속실장과 부실장은 대개 8시 전후에 출근했다. 이들이 출근하기 전에 간밤의 상황을 체크하고 보고서를 정리하는 일이 아침나절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보고서 중에서 여러 사람에게 배포할 것은 복사도 해 놓아야 했다. 낮 동안의 주된 업무는 복사가 금지된 보고서를 회람시키는 일이었다. 모든 보고서는 원칙적으로 복사가 금지됐기 때문에 실장이 다 읽고 나면 재빨리 세 명의 부실장들에게 회람시켰다. 특히 일일 보고서와 메모 보고서를 회람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타 부서로부터 문서를 수발하거나 우리 부서의 첩보 보고서를 다른 부서로 전달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수발해야 할 문서 이외에 비공식인 문서 수발의 심부름도 모두 내가 했다. 매주 금요일쯤에는 박성도 정치과장 방에 가서 주례보고를 비공식적으로 받아오기도 했다. 이른바 문서 수발이 나의 주된 임무였다. 당시 정치과장이었던 박성도는 이명박 정권에서 국내 정보 담당 차장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새끼 보좌관은 부속실 내의 모든 문서의 수발과 회람관리파기 등 전 과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대공정책실 부속실은 국내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정보의 길목이었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문건이 많았다.
 
일일 보고서는 기획판단국에서 생산하여 매일 청와대로 보내는 보고서였다. 메모 보고서는 과학보안국에서 작성하여 대공정책실로 전송한 것을 메모 보좌관이 필사한 보고서였다. 메모 보좌관은 하루 세 차례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림 보고서는 실장이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내가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부속실 식구들 보좌관새끼 보좌관여직원과 메모 보좌관
 
대공정책실 부속실에는 모두 네 명이 근무했다. 나 이외에 보좌관과 여직원, 그리고 메모 보좌관이 있었다. 보좌관이 자리를 비울 때는 내가 보좌관 업무도 대신해야 했다. 보좌관은 이용라는 선배였는데, 그는 기획판단국에서 분석업무를 하다 인천지부로 내려갔었는데, 거기서 오 실장을 만나 다시 대공정책실로 따라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는 오 실장의 고려대 후배라서 그런지 오 실장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보기와는 달리 센스와 순발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메모 보좌관은 배충이라는 분이었는데, 정치과 기획관을 하다가 옮겨 왔다. 메모 보좌관을 거치면 대개 과장으로 진급시켜 주는 분위기였다. 그는 베테랑 정보원으로, 대한민국 정치에 관한 한 전문가였다. 배 보좌관은 나에게 고마운 분이다. 회사 생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여러 가지로 마음을 많이 써 주었다. 그는 지난번 미림 사건으로 인해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던 모양이다. 나로서는 본의 아니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지면을 빌려서나마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오정소 실장과 황창평 차장은 문민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고 한다. 특히 황 차장은 이른바 ‘노란 봉투 사건’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노태우 정권 말년에 YS가 소위 노란 봉투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 노태우 대통령과 정면승부를 벌였다. 봉투 안에는 “안기부가 YS를 뒷조사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이 사건은 YS가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해 후계 권력을 접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93년 2월25일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왼쪽)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손을 맞잡아 들고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부속실 전화교환원은 일종의 전문직
 
부속실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실장의 전화를 연결해 주는 일이었다. 보좌관이 자리를 비우면 내가 전화를 연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전화를 연결하는 일은 섬세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일종의 전문직이었다. 나는 한동안 전화교환원 노릇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공포를 느꼈다.
 
전화교환원의 자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수화기를 들면 상대방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감각적으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내게는 그런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다. 물론 나의 어눌한 언변도 이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한번은 퇴근 직전에 외부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어이!”라고 한마디하고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즉각적인 사태 파악이 안 되어 조금 버벅댔는데, 그러다가 된통 크게 깨졌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오정소 실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내 목소리도 분간하지 못하냐며 야단을 쳤다.
 
 
전화를 연결해 주는 상대방의 권력관계에 따라 누구를 먼저 바꿔 주어야 하는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물론 권력 서열이 낮은 당사자가 먼저 받도록 하는 게 노하우였다. 이 문제로 전화 상대방의 보좌관과 머리싸움을 하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권력 순위라는 게 단순히 정부 직제상의 순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의 어려움과 복잡성을 더했다. 때때로 정무적 판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상대방을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집무실에서 몇 발자국을 옮길 것인가를 초 단위까지 계산했다가 연결 버튼을 눌러야 하는 것도 살 떨리는 스트레스였다. 한마디로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오정소 부속실장은 문민정부의 넘버 쓰리
 
내가 부속실에서 상관으로 모셨던 오정소 실장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 실장을 문민정부의 아이콘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문민정부의 핵심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는 문민정부의 막후 핵심 실세였던 김현철 씨와 고등학교와 대학(고려대 사학과) 동창이라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김영삼(YS) 대통령은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점에서 양 김씨는 크게 대조된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이름을 불러 주면 최측근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가령 YS 영춘아, 오늘 나랑 조깅하자고 말한 것이 알려지면 김영춘 의원이 금방 최측근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한번은 김 대통령이 서울시를 순시하면서 정소는 어디 갔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러자 금세 오정소가 최고 실세라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오 실장은 YS 정권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90년대 말, 주먹의 세계를 해학적으로 그려낸 넘버 쓰리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얻었다. 좀 억지이긴 하지만 오 실장은 문민정부의 넘버 쓰리에 비유될 만했다. 물론 문민 정권의 재떨이는 이원종 수석 정도가 될 것 같다.
 
문민정부 초기 안기부 내에서는 오 실장과 황창평 차장이 실세였다. 그들에 비해 김덕 원장은 학자 출신이라 그런지 정보기관장답지 못했다. 그는 정보기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조직을 장악하는 데도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였다.
 
노란 봉투 사건의 주인공 황창평 차장
 
황 차장과 오 실장은 서로 잘 통했다. 아마 고려대 동문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오 실장과 황 차장은 문민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고 한다. 특히 황 차장은 이른바 노란 봉투 사건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노란 봉투 사건이란 노태우 정권 말년에 YS가 소위 노란 봉투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 노태우 대통령과 정면승부를 벌인 사건이다. 봉투 안에는 안기부가 YS를 뒷조사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이 사건은 YS가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해 후계 권력을 접수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황창평 기판국장이 문제의 노란 봉투를 YS 측에 건네줬다고 한다. 확인된 얘기는 아니었지만 분위기상으로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닌 듯했다.
20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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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2]
‘쉰 TK’와 ‘新 TK’… 지는 권력과 뜨는 권력을 지켜보다
 
 
오 실장 덕에 비례대표 국회의원 된 김철 부장
 
오정소 실장은 원래 해외공작국 출신이었다. 노태우 정권 말기, 그는 해외공작국 행정과장을 하다가 대공정책실 협력단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언론 여건이 취약해지자 언론을 조정 통제하기 위해 대정실 내에 협력단이라는 조직을 신설했는데, 그가 초대 협력단장이었다. 해외 부서의 간부가 국내 부서로 옮기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언론계와의 개인적인 친분이나 인연이 고려되었던 것 같다.
 
그의 친형은 모 언론사 간부 출신이고, 그 자신 젊은 시절부터 한국일보 사주였던 장강재 회장 등 언론계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조선일보 국제부장을 하던 김철 씨는 오 실장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아마 고교 동창이었던 것 같다. 오 실장과 김 부장은 서로 소야!” “철아 하면서 끝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이였다.
 
그 후 김철 부장은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당시에 이미 차장으로 승진해 있던 오 실장의 후원으로 집권 여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당의 대변인까지 되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 TK ’ TK
 
보좌관과 보좌원 간의 업무 분장이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실장과 부실장의 개인적인 심부름이나 비공식적인 잡무도 모두 내 차지였다. 이 보좌관은 주로 오 실장을 챙긴 반면 보좌원인 나는 세 명의 부실장을 챙겼다.  1부실장은 임경 단장이었는데 그는 정치학원종교 분야를 담당했다. 임 단장은 김기섭 기조실장의 대구 영남고등학교 후배였다. 그 후 그는 오 실장이 차장으로 승진하자 대공정책실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TK도 여러 가지라는 말이 돌았다. 이른바 () TK’ TK’가 있다는 것이었다. 구정권에서 잘 나가던 TK 인사들은  TK’라고 불렀고, 신정권에서 새로 부상한 TK 인사들을  TK’라고 불렀다. 안기부 내에서는 영남고 출신들이 대표적인  TK’로 분류되었다. 김기섭 실장과 임 단장이 영남고 출신이었다.
 
핵심 보직인 감찰과장을 지냈던 이순 과장도 영남고 출신이었다.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해임되자 국강투(국정원 강제퇴직자 투쟁위원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영남고 출신 홍준표 특보 소신이 너무 강해 튀는 존재
 
검찰에서 홍준표 특보가 파견되어 왔는데, 그도 영남고 출신이었다. 홍 검사는 박철언 씨와 이건개 씨를 조사한 탓에 검찰 내에서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안기부로 파견되어 나온 것도 김기섭 기조실장과의 인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정형근 씨가 영입해 왔다는 말도 있었다.
 
홍 검사는 안기부 재직 시절 여러 가지 튀는 행동을 많이 했다. 그는 체질적으로 조직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아 보였다. 소신이 너무 강해 보였다. 팀워크보다는 단독플레이에 능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당시 우스갯소리로 “TK도 여러 가지”라는 말이 돌았다. 이른바 ‘신(新) TK’와‘쉰 TK’가 있다는 것이었다. 구정권에서 잘 나가던 TK 인사들은 ‘쉰 TK’라고 불렀고, 신정권에서 새로 부상한 TK 인사들을 ‘신 TK’라고 불렀다. 1997년 10월22일 자민련 박준규(오른쪽 다섯 번째)·박철언(왼쪽 두 번째)·김복동 의원(오른쪽 네 번째)과 이판석 전 경북지사(오른쪽) 등 대구·경북(TK) 지역 정치인들이 시내 한 음식점에서 회동, TK인사들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연합뉴스
 
 
노태우 정권의 황태자 박철언도  TK’
 
반면에 당시  TK’의 대표적인 인사는 박철언 씨나 박준규 씨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대부분 감옥에 갔거나 집에서 쉬었다.
 
박철언 씨는 노태우 정권에서 소위 황태자라 불리면서 월계수회를 조직하는 등, 정권의 2인자로서 한창 잘 나갔던 사람이다. 박철언 씨는 ‘LP’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LP ‘Little Prince’인지 ‘Little Park’인지 아니면 ‘Little President’인지 몰라도 어쨌든 그는 그렇게 불렸다.
 
나는 우연히 이 ‘LP’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아마 홍준표 검사가 작성한 수사 보고서였던 것 같다. 그 보고서에는 박철언 씨가 파친코 업자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던 정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박철언 씨의 비리 혐의를 찾고 있던 때여서 그랬는지 그에 대한 첩보가 심심찮게 올라왔다. 대부분 난잡한 사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런 첩보들 가운데 이러한 것도 있었다.
 
“LP는 꽃값에 인색하여 여대생들로부터 째째하다고 욕을 먹는다.”
 
어느 첩보에서는 감옥에서 나가면 두 사람은 반드시 손을 볼 것이다고 한 내용도 있었다. 그 두 사람이란 강모 씨와 이모 씨라고 했다. 강모 씨는 그 후 한나라당의 최고 중진이 된 사람이고, 이모 씨는 문민정부에서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인사이다. 아마 그들 간에는 우리 범인(凡人)들이 알지 못하는 무슨 사연과 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박철언 씨의 아내인 현모 씨에 관한 첩보도 심심찮게 보고되었다. 후에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대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현모 씨에 대해서는 맞바람을 피운다는 등의 3류 첩보가 주를 이루었다. 수영강사와 테니스 코치가 등장하는 등,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양아치 정보들이었다.
 
이러한 첩보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음해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첩보를 소개하는 것은 이러한 첩보의 내용들을 사실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다만, 정보기관이 수집하는 첩보의 범위와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소개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국정원이 이런 양아치 첩보를 더 이상 수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김기섭 기조실장 YS의 아마추어 측근 중 한 사람
 
부속실에서 나는 주로 임 단장의 보좌관 역할을 했다. 그의 사소한 개인 심부름도 자주 했다. 좀 짜증 나는 일이긴 했지만, 가끔 은행에 가서 미국에 유학 중인 그의 아들에게 생활비를 부치는 심부름도 했다.
 
임 단장의 심부름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은, 김현철에 관련된 첩보를 친전(親展) 봉투에 넣어 김기섭 기조실장에게 전달해 주는 일이었다. 문민정부 초기에는 김현철 씨의 신상 관련 첩보는 김기섭 실장이 직접 관장했기 때문이다.
 
김기섭 실장은 신라호텔 상무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정보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상도동이 정권을 잡고 난 후 김영삼 대통령(YS)의 아마추어 측근들이 어떻게 하든지 청와대에 들어가려고 박 터지게 다툴 때 그는 안기부 기조실장 자리를 자원해 경쟁 없이 무혈 입성했다고 한다.
 
김 실장은 무척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매일 새벽 5시경 출근하여 청사를 한 바퀴 돈 후 하루 업무를 시작하곤 했다. 그는 나름대로 안기부가 더 이상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김현철의 최측근으로 행세하면서 물의를 빚었지만 어찌 보면 동정심이 가기도 한다.
 
능력도 소신도 없는 제2 부실장
 
2 부실장은 이근 단장으로, 그는 경제와 사회 분야를 담당했다. 이분은 어떻게 단장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도 소신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랫사람으로서 그를 성심껏 모셨다. 한참 후에 이 단장이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갔더니 다른 사람들은 날 아무렇게나 대하는데 너는 좀 다르구나 하고 말했다. 나의 성의에 고마움을 표시한 말이었다.
 
이 단장의 방에는 진○○‧○○ 같은 고참 직원들이 하루 종일 죽치며 노닥거리기 일쑤였다. 진씨는 별명이 진도깨비였는데 아마도 젊은 시절엔 국내외 부서를 오가며 한가락 했던 것 같았다. 그는 오 실장의 경복고등학교 선배였기 때문에 아무리 땡땡이를 쳐도 오 실장도 어쩌지 못했다.
 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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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3]
오정소 실장은 ‘문민정부 해결사’… 악역 도맡아
 
 
  
안기부 최고 한량 최모 씨 남촌 사건의 주인공
 
2부실장 방에 단골로 드나들던 두 명의 고참 직원 진모 씨와 최모 씨 중 최씨는 안기부 최고의 한량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주색잡기에 일가를 이룬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김대중 정권 당시 일약 감사관으로 승진하여 거들먹거리더니 급기야 보안 사고를 쳤다.
 
그는 이른바 남촌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남촌 사건이란 천용택 원장 부임 직후에 벌어진, 국정원의 해이해진 기강과 전라도 출신들의 전횡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양재역 부근의 남촌이란 고깃집에 국정원 간부들이 단골로 드나들며 심지어 그곳에서 보고서를 손보고 여주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등의 일이 알려져 감찰실이 나서서 조사를 한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한창 잘나가던 목포고등학교 출신의 이른바 4인방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국정원 고참 직원 최모 씨였다.
 
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정보기관이란 사람을 잘 뽑아야 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초인적 성실함으로 권영해 부장 비서실장 된 제3 부실장
 
3 부실장은 이강 단장이란 분이었는데 그는 언론을 총괄했다. 3 부실장은 언론을 조정하는 협력 단장을 겸했다. 이 단장은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전혀 정보기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초인적으로 성실한 사람이었다. 내가 국정원에서 겪어 본 사람 가운데 이 단장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는 10시 이전에 퇴근하는 경우가 없었다. 매일 저녁 8시에 가판(街販)이 나오면 직접 꼼꼼히 챙겨 읽고 문제 기사를 조정한 후에야 퇴근하곤 했다. 일이 터지면 12시를 넘기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고도 다음 날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꼬박꼬박 출근했다.
 
오정소 실장은 그런 이 단장의 성실성을 높이 샀다. 그 후 그는 권영해 부장의 비서실장으로 영전했다. 그는 비서실장 시절 YS의 사생아 문제를 제기하여 물의를 빚은 손모 씨를 관리했던 모양이다. 이 단장이 언론 전문가이다 보니 그 일에 적임이었을 것이다.
 
1997년 대선 당시 손씨는 김대중 X파일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단장이 그 일에 어느 정도 연루되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뀐 후 이 단장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소문에 의하면 이 단장은 발가벗긴 채 극심하게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나는 언젠가 수사국 친구에게 어떻게 한솥밥 먹던 전직 간부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며 따진 적이 있다. 그 친구가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이 단장은 그 후 국정원이 나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 진승현 게이트는 1998년 정권이 바뀐 후 정성◯ 씨가 엄익준 차장과 김은성 차장 아래에서 특명사업을 수행하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2001년 11월29일 서울구치소에서 수감 중이던 진승현 씨가 서울지법에서 3차 공판을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계명구도와 낭중지추
 
오정소 실장은 문민정부의 해결사였다. 모든 악역을 도맡아 했다. 실제로 오 실장이 96 12월 전격적으로 잘리지만 않았더라면 문민정부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주간동아 2005 829일자 오정소 침묵에 국정원 떤다는 제하의 기사 참조). 나는 그러한 견해가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오 실장은 평소 계명구도(鷄鳴狗盜)와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중국의 고사성어를 즐겨 인용했다. 계명구도란 말은 점잖은 사람이 배울 게 못 되는 하찮은 기술이나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 재주는 있기 마련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낭중지추란 말은 능력 있는 사람은 마치 가죽부대 속에 들어 있는 송곳처럼 그 능력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오 실장은 특별히 재주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곁에는 괴팍하고 특이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언젠가 오 실장이 내 주위에는 왜 이렇게 꼴통들만 모이냐?”고 농담 삼아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당신이 꼴통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꼴통은 꼴통끼리라는 말이 목구멍 안에서 맴돌았다.
 
정모 씨와 공모 씨 오 실장의 오른팔과 왼팔
 
오 실장 주위의 인사들 중에서도 정성 씨와 공운 씨는 내가 국정원에서 만난 가장 별종 인간들인 동시에, 해결사 오 실장의 오른팔과 왼팔이었다. 정성 씨는 후에 진승현 게이트의 주인공이 된 사람이고, 공운 씨는 안기부 미림팀장으로 언론에 소개된 사람이다. 나는 부속실에 근무하면서 이 두 사람의 얼굴을 매일 보았다.
 
깡패들의 친구 정모 씨
 
정성 씨는 광주의 어느 명문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육사 1학년 때 진해 해군사관학교로 하계 훈련을 갔다가 철모로 해군 제독의 머리를 내리쳤다가 퇴학당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의 모 대학 법학과를 마치고 안기부 정규과정 13기로 입사했다. 그는 신입직원 시절부터 깡패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90년대 초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을 때 그는 큰 사고를 쳤다고 한다. 수원지법 강모 부장과 모 조직폭력배 두목 등과 함께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는데 옆방에서 술을 먹던 부하 깡패들끼리 시비가 붙어 칼부림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은 한참 후에야 언론에 한 줄 기사가 났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세네갈 파견관으로 나갔다. 정보기관에서 도피시켜 준 것이다. 그때 해외공작국 인사과장이 오정소였다. 그는 파견관 생활을 마치고 국내에 들어오면서 대공정책실에 합류했다. 오 실장이 그를 대정실로 부른 것 같았다.
 
시한폭탄 정모 씨 진승현 사기 사건 연루
 
정성 씨는 언제 봐도 시한폭탄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검찰과 깡패 사회에 가장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오 실장의 특명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검찰의 청와대 보고서를 입수해 오기도 했다. 청와대 보고서는 검찰이 극도로 보안에 신경을 쓰는 문건이었다. 가히 검찰의 영혼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안기부에서 이 보고서를 입수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이런 일을 해냈다.
 
그는 1998년 정권이 바뀐 후 한동안 전라도 출신들에게 찍혀서 한직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다시 권력 핵심으로 진입해 엄익준 차장과 김은성 차장의 최측근으로 행세했다. 진승현 게이트는 그가 이 두 차장 아래에서 특명사업을 수행하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진승현 게이트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정성 씨는 진승현 사기 사건으로 1 6개월간 감옥 신세를 졌는데, 출옥한 후에도 뒤에서 진승현을 계속 조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부터 정치권에 줄을 댔던 것 같다. 2001년 구속되면서 그는 조선일보와 전격 인터뷰를 했다. 그는 그때 폭탄선언을 하듯이 자신과 김홍일의 관계를 밝히기도 했다.
 
정성 씨는 출옥하고 난 후 DJ의 사생아 문제(2005 420일 방영 SBS 뉴스추적 ‘DJ의 숨겨진 딸 참조)와 정몽헌 씨 피살 의혹 등을 언론에 제보했다(*월간조선 2006 2월호 정몽헌 현대 회장의 죽음의 행로  3월호 정몽헌 회장 죽음의 5대 미스터리 기사 참조). 그는 동교동의 배신에 배신으로써 답한 것으로 보인다.
202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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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4]
나라 뒤흔든 ‘미림 보고서’… 안기부장도 몰랐다
 
 
 
미림팀장 공모 씨 성실하고 수완 좋은 의리파
 
공운 씨는 선린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졸업했고,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일에 관한 한 그는 민완하고 배짱 있는 사람이었다. 책임감도 강하고 의리도 있었고 열정과 자부심도 대단했다. 지난번 국정원 도청 사건으로 그가 무슨 크게 나쁜 짓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다. 그는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욕을 먹어야 한다면 그에게 그런 일을 시킨 사람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림 사업은 극비에 속하는 사업이었다. 안기부의 같은 부서 내 사람들도 어렴풋이 짐작만 했을 뿐 대부분의 직원은 몰랐던 사업이다. 김덕 부장 같은 사람은 존재조차 모르고 퇴임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운 씨는 그런 일을 태연스레 해냈다. 그것도 아주 기가 막히게 잘 해냈다.
 
어느 날인가 미림팀 요원으로 일했던 선배가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가 TK 인사들에 대한 작업을 마치고 한참 지난 후 장비를 회수하러 작업실에 들어갔는데 누군가 뒤에서 자기를 확 덮치더라는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눈치 채였구나 하고 판단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미친 듯이 대들어서 겨우 상황을 모면했다고 한다.
 
공운 씨도 비슷하게 낭패당한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한번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예약한 저녁 식사 자리에 도청기를 꽂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비서실의 누군가가 나타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김영삼 대통령이 들어서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대통령의 출현에 혼비백산하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요원 3명 구성의 초미니 조직 미림팀
 
미림팀은 공운 팀장을 비롯해 3명으로 이루어진 초미니 조직이었다. 공 팀장과 그를 보조하는 젊은 직원이 두 명 있었다. ○○와 박○○이었다. 이들은 둘 다 착하고 책임감 있는 요원들이었다.
 
미림팀 일이 위험한 일이다 보니 아무도 이 일을 선뜻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공 팀장은 요원을 충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언젠가 공 팀장은 나에게 박○○을 팀원으로 영입할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 공운○ 전 안기부 ‘미림’팀장(가운데)이 2005년 8월4일 서초동 서울지검에서 구속되어 구치소로 향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미림팀은 공 팀장을 비롯해 3명으로 이루어진 초미니 조직으로, 미림팀이 수집한 정보는 손꼽을 정도의 인원만 볼 수 있는 안기부 내의 최고급 정보였고 대한민국 최고의 야사(野史)였다. 연합뉴스
 
 
공 팀장이나 박○○이나 둘 다 정규 일반직원이 아니라 행정 보조요원으로 입사한 사람들이었다. 공 팀장은 박○○에게 “9급 출신이 회사 내에서 살아남으려면 미림 일이 가장 낫다고 설득한 끝에 그를 영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번 미림팀 일이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박○○은 가택수색까지 당하고 악의적인 언론에 시달렸다. 나는 그런 기사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내가 미림팀의 존재와 실상을 세상에 알렸기 때문에 그가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순수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이 지면을 빌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미림 보고서 안기부 최고급 정보대한민국 최고의 야사(野史)
 
공운 씨는 매일 오전 부속실에 들러 밤새 작업한 결과를 보고했다. 미림팀이 수집한 정보는 손꼽을 정도의 인원만 볼 수 있는 안기부 내의 최고급 정보였고 대한민국 최고의 야사(野史)였다. 그가 작성한 미림 보고서는 오 실장이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내가 볼 수는 없었다. 부속실의 모든 보고서는 내가 책임지고 관리했지만 미림 보고서만은 예외였다. 나는 어쩌다 오 실장의 책상 위에 놓인 미림 보고서를 힐끗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가 수집해 온 정보는 언제나 나라를 뒤집을 만한 폭발력이 있는 것들이었다. 거기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번 언론에 소개된 대로,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 같은 사람도 미림 보고서 한 장에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이회창 국무총리나 박상범 경호실장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경질되었다.
 
나는 미림 보고서가 어떻게 쓰이는지 지켜보면서 정보기관의 힘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미림팀의 활동에 대해서는 2005 522일에 방영된 손석희의 시선 집중 인터뷰를 참조하면 된다.
 
대공정책실 보좌원이 지켜본 정치권력의 민낯
 
돌이켜보면 대공정책실 보좌원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보고 들었다. 권력의 턱 밑에서 일하다 보니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었다. 장막 뒤편에서 정치권력이 지어 보이는 음흉한 미소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무대 뒤편에서 정치권력이 토해 내는 거친 숨소리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종필 총재의 관계가 깨지는 과정은 실시간으로 중계하듯이 지켜보았다. 그건 마치 초등학교 어린아이들 다툼 같아 보였다. 아니 그보다도 못해 보였다. 전국 각지에서 사건 사고가 봇물 터지듯 일어나고 사회 각계각층의 집단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했을 때, 아마추어 문민정부가 갈팡질팡 허둥거리던 장면도 가까이서 관찰했다.
 
정치와 언론의 악어와 악어새 같은 기이한 공생관계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신문에 보도된 수많은 사건의 행간에는 보도되지 않는 은밀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방송에 보도되는 수많은 사건의 뒷면에도 방영되지 않는 깊숙한 이야기가 따로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추락한 민심을 호도하기 위해 연예계 사정이라는 칼을 빼 들었을 때는 연예계라는 별천지의 치마 속 풍경을 흘깃 들여다보는 행운도 누렸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나라의 국가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저열한 인간들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형편없는 곳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 사회는 정치권언론계뿐만 아니라 법조계종교계학계재계 등 어느 곳 하나 성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본 우리 사회는 수술하려고 칼을 들었다가 상태가 너무 심하여 그냥 덮어 버리지 않을 수 없는 환자와도 같은 실정이었다. 비록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이 기회에 내가 본 문민정부의 민낯과 우리 사회의 뒷모습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정보보고서 읽기를 싫어한 YS
 
김영삼(YS) 대통령은 정보기관에 대한 불신이 대단했다. 그는 과거 야당 시절에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로부터 감시당하고 구박받았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는 듯했다. 대통령이 되었으면 자신의 수족과 다름없는 정보기관을 신뢰하고 감싸 주어야 했는데 그는 체질적으로 그러질 못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정보기관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다. 피는 고사하고 먼지도 묻히기 싫어했다.
 
문민 정권 초기, 김덕 부장이 매주 목요일 오전에 청와대로 주례보고를 갔다. 그런데 심심찮게 대통령이 진지하게 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얘기가 들렸다. “YS가 보고서 읽는 걸 싫어한다는 말도 들렸다. “부장이 보고하러 들어갔다가 보고서를 그냥 책상 위에 놓고 왔다는 수군거림도 있었다.
 
대통령이 챙겨 보지 않는 보고서는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다. 각 수석실에서는 보고서 제목만 대충 보고 가져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개 이런 과정에서 보안사고가 터진다. 이런 측면에서 김영삼의 청와대와 노무현의 청와대는 많이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한다.
20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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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5]
안기부 ‘주간 동향 보고서’… 정치권‧언론계 쥐락펴락
 
 
 
안기부가 정무수석 직속이냐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챙기지 않다 보니 문민정부에서는 정보가 왜곡 유통되는 폐단이 생겼다. 다시 말해 보고서가 엉뚱한 곳으로 샜다는 얘기다. 정보가 이원종 정무수석에게로 몰렸고 김현철이라는 사인(私人)에게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문민정부 내내 안기부의 국내 부서에서는 안기부가 정무수석 직속이냐는 자조적인 말들이 돌았다.
 
사실 나도 개인적으로 안기부의 정무수석 예속화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오 실장의 부속실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원종 정무수석에게 보내는 주간 정치권 동향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는 내부 보안 규정을 위반한 것이었다. 첩보 수집 부서인 대공정책실에는 정보보고서를 만들 권한이 없기 때문이었다. 국내 문제에 대한 모든 정보보고서는 기획판단국의 소관이었다.
 
매주 토요일 정무수석에 첩보 보고 감찰실에서도 묵인
 
보통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칙대로라면 감찰실에서 보안 조사를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감찰실에서는 뻔히 알면서도 묵인했다.
 
당시에는 매일 오후 2시가 첩보 보고 마감 시간이었다. 요즘이야 수집관이 컴퓨터로 첩보를 작성해 전산망을 이용하여 분석 데스크로 송고하겠지만 내가 대정실에 근무하던 시절에만 해도 모든 것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첩보보고서도 손으로 작성했다. 매일 각 과의 행정관들이 첩보를 수거해 행정과에 가져오면 행정과 기획팀에서 커다란 가방에 담아 기획판단국으로 배달하곤 했다. 부속실에서는 행정과에 매일 첩보 가방이 기판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부속실부터 들르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날 수집된 첩보들 중에서 가장 쓸 만한것들만 따로 골라내 복사했다. 주로 정치인들의 동향과 가십성 첩보만 가려냈다. 이렇게 하루에 몇 건만 추려도 일주일이면 수십 건의 첩보가 쌓였다. 나는 골라낸 첩보를 토요일 오후에 요약하여 보고서 형태로 정리했다. 보통 한 페이지에 두 건씩 203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만들었다.
 
원래 이 작업은 오 실장이 이용 보좌관에게 시킨 일이었는데 그는 보고서 정리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는지 그 일을 자꾸 내게 미뤘다. 그래서 정보분석 경험도 전혀 없던 내가 보고서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정보기관에 갓 입사한 말단 직원이 그렇게 민감한 정보를 취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오정소 실장이라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에 내가 대정실을 떠난 후에는 그 일은 정치과 기획반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챙기지 않다 보니 문민정부에서는 정보가 왜곡되어 유통되는 폐단이 생겼다. 정보가 이원종 정무수석에게 쏠렸고 김현철이라는 사인(私人)에게 흘러 들어갔다. 1996년 8월 8일 단행된 부분 개각에서 장관급으로 격상된 이원종(왼쪽)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기자실에 들러 환히 웃고 있다. 연합뉴스
 
 
부속실은 정치권 방송과는 언론계 주간 동향 보고서
 
부속실에서 작성하던 정치권 주간 동향 보고서 이외에 방송과에서는 언론계 주간 동향 보고서를 만들었다. 서진 방송과 기획관이 매주 토요일 오후에 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사실 언론권 동향 보고서는 신문과에서 맡아야 제격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재 방송과장이 먼저 그 일을 차지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과장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겠다. 그는 부산에 집을 두고 서울에서 호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회사 일로 가정까지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 일에 대한 열정과 아이디어는 풍부했지만 인간성은 별로였다. 그는 윗사람에게는 확실히 아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군림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부산지부에서 정보과장을 오래 했지만 사실은 전라도 사람이었다. 출신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헷갈리는(?) 사람을 우리는 은어로 얼룩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전형적인 얼룩이었다. 언론계 주간 동향보고서 덕택에 그는 김영삼 정권에서 동기들보다 먼저 승진했다.
 
얼룩이 이 과장 DJ 정권 들어서자 더 승승장구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더욱 승승장구했다. 그는 대구지부장으로 영전해 소위 밀라노 프로젝트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대구 지역의 섬유산업을 발전시키는 방안이었다.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때 이탈리아의 섬유 패션산업과 협력하는 다양한 방안이 정부 차원에서 구상되어 추진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기반이었던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안기부 비공식 보고서의 위력 정치권언론계 쥐락펴락
 
매주 월요일 아침 이용 보좌관이 우리 부속실이 작성한 정치권 주간 동향보고서와 방송과가 정리한 언론계 주간 동향 보고서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 두 비공식적인 보고서의 위력은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이원종 수석은 정치권과 언론계 동향 보고서를 양손에 쥐고 정치권과 언론계를 완벽하게 쥐락펴락했다. 이들 보고서 덕택에 그는 정치권과 언론계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었다. 신문기자들은 이 수석이 어떻게 그렇게 언론계 동향을 잘 아는지, 자신들이 몰래 장관들과 만나는 사실을 이 수석이 어떻게 그렇게 실시간으로 파악하는지를 신통해 했다.
 
나는 가끔 내가 쓴 비공식적 보고서의 위력을 보고 나 자신도 놀랄 때가 있었다. 가령 장관급 인사의 비리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할 때가 있었다. 나는 ‘7급 공무원에 불과한 내가 장관의 모가지를 자르는 일을 해도 괜찮은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러다가 내가 너무 교만해지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속실에 근무하는 덕분에 매일 수천만 원어치의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런 짓은 너무 오래 할 일은 아니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려한 비상허무한 결말의 문민 정권 YS의 개인 성향이 원인
 
나는 문민정부의 화려한 비상과 허무한 결말이 김영삼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에 많은 원인이 있다고 판단하는 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의 가려운 곳을 간파하고 충족시켜 줄 줄 아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정권 초기에는 이러한 성향 덕택에 국민으로부터 초유의 인기를 누렸다. 한때 지지율이 90%대에 육박했다. 대통령 자신이 지나치게 높은 지지율이 오히려 부담스럽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논리적이고 치밀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평소 그의 지론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머리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 셈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조깅은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머리 좋은 사람을 찾아 쓰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가 기용했던 수많은 인사는 김현철을 통해 소개된 이류 인재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어쩌면 체질적으로 일류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현철 중심으로 끼리끼리 말아먹은 YS 정권
 
그는 즉흥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정치적인 ()’에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측근들도 대체로 하나같이 에 의존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오정소 실장 같은 사람이 전형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은 은 예리하고 순발력은 뛰어났지만 논리는 허술하고 지구력은 부족했다. 골방에 앉아서 끼리끼리 작당하는 데는 능했으나 광장에 나와 백년대계를 논의하기에는 턱없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문민 정권은 기본이 안 된사람들이 끼리끼리 작당하면서 망가졌다. 그 중심에는 항상 소산(小山) 김현철이라는 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현철 씨의 국정 농단이 심해질수록 정권은 더욱 심각하게 망가져 갔다.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기삼  2025-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