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10일 金大中 대통령이 오슬로 시청에서 있은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베르게 노벨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상장과 메달을 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 頂上회담이 「5억 달러」 이상의 거액을 지불한 代價로 성사됐다는 의혹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月刊朝鮮은 최근 전직 국가정보원 직원 金基三(김기삼·40)씨가 제기한 노벨평화상 국제로비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확보했다. 일부 해외언론들은 「돈으로 산 노벨상」이라는 식의 보도까지 내보낸 실정이다. 金大中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로비說의 진상은 무엇일까.
최근 복수의 전현직 정부부처 관계자들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노벨평화상 로비와 관련한 구체적 사례들을 털어놓았다. 이들은 이 업무의 책임자로 金漢正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거명했다. 金실장은 이미 東亞日報 2월5일자에 보도된 「청와대 金모 실장」이 자신임을 인정하고 정정보도를 요청하는 언론중재신청을 제기했다. 金基三씨의 글에도 그는 중요한 인물로 실명으로 거론된 바 있다.
이 증언자들은 『金漢正 실장이 노벨상 로비에 관한 활동을 사실상 전담하고 정부부처 소속 극소수의 인사들이 협조하는 식으로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이 일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노벨상 관련 업무를 「NP(Nobel Prize)사업」이라 불렀다는 게 이들의 전언이다. 이 사업은 극소수의 인사들이 주관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또한 『金漢正 실장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스톨셋(Stalsett, Gunnar Johan) 부위원장과도 친분이 있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이들은 『「NP사업」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金大中 대통령의 강력한 노벨상 수상 경쟁자로 故 鄭周永(정주영) 명예회장이 거론됐다』고 주장했다. 한 관계자는 『1999년 말에서 2000년 초쯤 「鄭周永 명예회장 측이 노벨상 수상을 목적으로 국내외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국정원 보고서가 상부에 보고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관계자들의 이런 증언에 대해 金漢正 실장은 『그런 부도덕한 사람(金基三) 말을 듣고 묻는 것에 대해 나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 관계자는 『DJ 측근이 1999년 말 東티모르 유명인사에게 상당한 금액을 제공하기 위해 (제3의 인물이) 기업으로부터 거둔 돈을 서울 시내 모처 지하 주차장에서 당시 정부부처 직원을 통해 전달받은 적이 있다』면서 『돈의 용처와 이후 전달 경위에 대해서는 말할 입장이 못 된다』고 주장했다. 金基三씨의 글에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前 국정원 직원 金基三씨의 노벨상 로비 폭로
노벨상 로비說의 발단은 2003년 1월30일 미국에 유학 중인 前 국정원 직원 金基三씨가 인터넷을 통해 장문의 글을 올리면서 비롯됐다. 그는 남북 頂上회담과 노벨상, 그리고 국정원의 비밀스러운 역할을 폭로했다. 그의 주장은 직설적이었다. 돈에 의해 남북 頂上회담이 성사됐고 이로 인해 노벨상을 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돈으로 노벨상을 산 셈」이라는 3단논법이 아니었다. 金大中 대통령의 노벨상은 受賞(수상)을 목적으로 사전에 치밀히 계산된 「공작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로 시작되는 金씨의 글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돼 있다. 국정원의 노벨상 로비 활동상과 남북 頂上회담의 대가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글에 나타난 노벨상 로비 부분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국정원 관계직원들의 실명까지 거론되고 있다. 남북 頂上회담 대가성 부분은 그가 자체적으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추정의 내용들이 많다.
<저는 이 글을 통해, 가면 뒤에 가려진 現 정권의 醜惡하고 僞善적인 본모습을 국민 여러분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지난 5년간, 金大中 정권이 民族과 歷史 앞에 저지른, 지울 수 없는 犯罪行爲를 저의 양심을 걸고 여러분에게 밝힙니다. 金大中 정권이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對北정책을, 그토록 오랫동안 일관되게 잘못 추진한」 근본 이유는 노벨상에 대한 지독한 老慾(노욕) 때문이었습니다. 金大中은 노벨상을 수상할 목적으로, 국가정보원을 동원하여 해외 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북한의 金正日에게는 약 2조원에 달하는 뇌물을 제공하였습니다. 金大中과 金正日 간의 은밀한 뇌물 뒷거래는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金大中은 국민의 血稅로 이루어진 공적자금을 현대에 지원하면서 현대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 챙긴 것입니다. 현대는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받아 북한에 지원하고, 북한으로부터 금강산과 개성공단 독점사업권을 代價로 받은 것입니다. 북한은 현금을 받아 챙기고 위장평화 생색을 내줌으로써, 金大中이 노벨상을 받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국가정보원의 입장은 신속했다. 국정원은 지난 2월4일 金씨를 명예훼손과 국정원직원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국정원은 『「現 정권이 국정원을 동원, 노벨상 수상 공작을 추진했다」는 내용을 인터넷에 게재한 전직 직원 金모를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직무상 획득한 비밀누설(국정원직원법) 혐의로 고소한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국정원은 노벨상 수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를 위해 어떠한 공작도 추진한 바 없다. 金모가 언급한 국정원 전ㆍ현직 직원들도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였을 뿐, 노벨상 수상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고 외교행낭을 이용해 돈을 빼돌린 적도 없다. 金모는 국정원 재직시부터 성격이 매우 불안정하여 단기간 재직 중 근무부서를 수시로 옮겨 다니는 등 정보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왔던 인물로서 재직시 해외 정보파트 업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국정원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對北 자금지원 등 로비활동을 전개한 것처럼 날조한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밖에 볼 수 없다>
기자는 전직 국정원 직원 「金基三」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확인해 봤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국정원 입사 동기생인 한 관계자는 『조직을 배신한 친구』라고 일축했다. 『그 친구는 2000년 10월 퇴사했는데 당시 그는 6급에 불과한 하급직원이었다. 그는 국정원 전체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국정원에는 「차단의 원칙」이 있다. 옆 방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또 같은 사무실에 있어도 옆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고 또 알아서도 안되는 게 정보원의 기본 자세다. 그는 IO(Information Officerㆍ정보원)로서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다』
또다른 국정원 직원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정치적 욕심 때문에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한 것이다. 그는 지난 大選에서 한나라당에 줄을 댔다. 한나라당이 집권할 것 같으니까 고급정보인 양 잘 포장을 해서 그 같은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나라당조차도 그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의 현재 상황을 알아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金씨를 높이 평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직원은 『그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소위 말해 잘나가는 직원이었다. 그는 출발부터 달랐다. 교육을 받은 후 처음 발령받은 곳이 對共정책실장 보좌원이었다. 뽑혀서 간 것이었다. 그 자리는 국정원內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인사들만이 볼 수 있는 고급정보를 취급하는 곳이다. 그는 국정원 입사동기들 모임의 회장직도 맡곤 했다. 그가 1998년 신설된 對外협력보좌관실에 간 것도 유능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를 잘 아는 한 간부급 직원도 그의 업무역량과 인간성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 직원은 아주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짧은 근무 기간 동안 여러 부처를 돌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국정원이 그에 대해 「정신불안」 등을 거론하며 정보업무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평가한 것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 일을 말끔히 처리하는 친구였다. 인간성도 나쁘지 않았다』 金씨, 『金大中 정권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기기 위해 폭로』
金基三씨는 서울大 법대를 졸업하고 1993년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에 공채로 입사했다. 경남 密陽(밀양) 출신인 그는 중학교 때까지 자장면 한 번 먹어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고교시절 열심히 공부한 덕에 서울大 法大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고시를 준비하다 뒤늦게 안기부에 입사했다.
기자는 미국에 있는 金씨와 국제전화 및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그의 주장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金씨는 폭로배경에 대해 『金大中 정권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겨 내고 국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국정원 근무시 어떤 부서에서 일을 했나.
『안기부 對共정책실장 보좌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94년부터 1995년 1월까지 딱 1년 했다. 나는 그 곳에서 한 국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대충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그런 다음 해외분야로 옮겼다. 1995년부터 1997년 8월까지 일한 다음 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됐다. 내 직급에서 연수라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일찍 그런 기회가 온 셈이었다.
1998년 6월 귀국한 뒤 국제정책실에 잠시 있었다. 그런 다음 문제의 對外협력보좌관실에서 근무했다. 나는 국정원 근무시절 다른 직원들과 달리 이면을 읽는 노력을 많이 했다』
―잘나갔던 직원이라는 평가가 있다. 왜 퇴사했나.
『2000년 10월28일 그만뒀다. 金大中 정권이 하는 「짓」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였다. 국정원 직원으로서 내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대통령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괴심이 많이 들었다. 월급 때문에 머리 숙이고 산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무모하게 사표를 던졌다. 먹고 살 대책도 없이 말이다. 사람들은 나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노벨상의 저주가 있을 것』
―퇴사 이후 생활은 어떠했는가.
『뭔가 나 혼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金大中 정권의 커넥션을 추적했다. 지난 2년간 金大中 정권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대겠다는 심정으로 칼을 갈며 살아왔다. 틈틈이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뉴욕州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달 말에 시험이 있는데 합격은 어려울 것 같다』
―본인의 행동에 대해 국정원 직원으로서는 옳지 못 했다는 평가가 많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마도 「金基三이니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국정원 직원의 자세가 아니라고 화를 낼 거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좀 이상하지만 항상 겸손하려고 노력했고, 언제든지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 국정원 선후배들에게 미안한 감도 없지 않다. 그분들에게 사명감을 갖고 일하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폭로 이후의 심정은 어떤가.
『매우 홀가분하다. 지난 2년간 항상 가위에 눌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 털어버리고 나니까 해방된 것 같다. 이제야 마음까지도 국정원에서 퇴사한 것 같다』
―주장한 내용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글에서도 밝혔지만 내가 단정적으로 표현한 부분은 직접 확인한 것이다. 내가 그 일을 하던 부서에 있었기 때문에 왜 사실을 모르겠는가. 진실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벨상 로비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이뤄진 일이다. 내가 공개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국민으로서 자랑스런 일이 아닌가.
『진실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노벨상의 저주가 있을 것으로 본다. 민족의 수치이지만 어쩔 수 없다. 감수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이 우리의 손으로 金大中을 심판한다면, 세계는 우리 민족의 용기를 더 높이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金漢正의 일을 목격하거나 추후 확인했다』
2차 인터뷰는 국정원이 金基三씨를 고소했던 2월4일 이뤄졌다. 기자가 『국정원이 오늘 당신을 서울지검에 고소한 사실을 아느냐』고 질문을 던지자마자 수화기 속으로 흥분하는 金씨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됐다.
『나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세우더니 이제 고소까지 하는군요』
金씨는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흥분하면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국정원으로서는 나를 찢어 죽일 놈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국정원 생리상 어떤 의혹이 제기되면 먼저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글에 대한 진실성을 자신할 수 있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습니다』
―국정원은 당신에 대해 정보업무에 적응하지 못한 무능한 직원으로 평가했습니다.
『정보업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과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1998년 李鍾贊(이종찬) 원장 시절 신설된 對外협력 보좌관실은 가장 민감한 부분을 다루는 부서였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다 썼습니다. 그 사람들 말대로라면 나는 보좌관실에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랑스런 일은 아니지만 나는 다른 직원들에 비해 많이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 덕분에 국정원內에서 핵심 정보가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지 그 길목을 찾아 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大選이 한참이던 12월 초쯤 잠시 귀국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한나라당과 언론사는 왜 방문했나요.
『정치적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언론에 직접적으로 기사화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들어온 후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와 친했던 몇몇 직원들이 감찰실 조사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자료 준 것 있느냐, 만났느냐」고 물어봤답니다. 일부 직원들은 구두 경고까지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청와대 측으로부터 뭔가가 왔다는 것입니다』
―글을 보면 청와대 金漢正 실장이 중요한 일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근거는 무엇인가요. 혹시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 아닙니까.
『글에 적은 그대로입니다. 내가 글에 적은 것들은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도 있고 정확한 소스를 통해 추후에 확인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나는 金漢正 실장을 개인적으로 「선배」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내가 일을 벌이기 전에 먼저 전화를 걸어 나의 생각을 알려 주려고도 했습니다. 지금 金漢正 실장은 「네가 나를 배신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기자는 다음날 金씨와 동갑내기인 부인 金모씨와도 인터뷰를 가졌다. 둘은 밀양의 한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이다. 어떻게 해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 물었다. 부인은 『연애기간이 참 길었다』고 했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나를 따라 다녔습니다』
수줍어하는 부인의 모습이 수화기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부인 金씨는 『남편은 회사(국정원)에 다닐 때 고민을 많이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런 고민을 해결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며 차분히 인터뷰에 응했다.
金씨 부인, 『차라리 잘 했다』
―그렇다면 남편의 고민은 뭐였습니까.
『해야 할 「큰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 「뭔가 일이 잘못돼 가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국가를 위해 해야 할 「큰 일」이 있는데 「이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정권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퇴사할 때 말리지는 않았습니까.
『차라리 잘 했다고 했습니다. 남편의 생각에 나도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 했다고 했죠』
―왜 잘했다고 보십니까.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남편이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남편은 밝혀지지 않을 일을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한 것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 출신으로서 온당치 못하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담담합니다만, 회사 직원들은 남편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 겁니다. 그가 회사를 그만 뒀을 때 우리 가족이 어렵다고 친한 동료들이 신용카드까지 만들어줬습니다. 생활비 필요할 때 쓰라고 말입니다. 물론 쓰지는 않았죠』
―생활비는 어떻게 댑니까.
『퇴직금하고 전세금을 모두 털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다행히도 이곳(미국 펜실베이니아州 헤리스버그) 교포 몇몇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월세 400달러짜리 영세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두 아이는 무료로 운영되는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구요.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나가 일을 좀 도와 주고 있습니다. 수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반찬 값 벌이 정도는 됩니다』
―앞날이 걱정되지 않나요.
『남편은 여기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지난번 시험 때 공부도 안하고 쳤는데 합격 수준에 달했더라구요. 조금만 공부하면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은 현재 이곳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고소를 했으니 이제 한국에도 마음대로 못 가게 됐습니다. 여기 눌러 앉아야 할까봐요』 남북 頂上회담, 미얀마ㆍ東티모르 그리고 노벨평화상
金基三씨는 기자와 통화할 때마다 자신은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했다. 자신의 행동이 국가이익 차원에서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여러 차례 했다. 金씨는 2월7일 對北 비밀송금 사건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다.
『4억 달러가 북한에 전달됐다고 하지만 頂上회담 이후 건네진 것을 포함해 총 15억 달러가 건너갔다고 봅니다. 이 정보는 믿을 만한 데서 들었습니다. 나는 그 정보가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남북 頂上회담을 노벨상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사실 金大中 대통령도 노벨상 수상 이유에 대해 「남북 頂上회담」을 중요한 요인으로 들고 있다. 다음은 金대통령이 2000년 12월13일 노벨상 수상 직후 내외신 기자들과 가진 회견내용의 일부다.
―金正日 위원장을 만나는 것과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 두 가지 꿈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모두 다 실현됐는데 또 다른 꿈은 무엇인가.
『한반도 평화정착이 완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계속 노력해 나갈 생각이다』
―평화상 수상 이후 남북관계가 어떻게 조정될 것으로 보나.
『이번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은 인권뿐만 아니라 남북회담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를 절대적이고 가장 큰 이슈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노벨위원회도 이 평화상을 주면서 북한의 남북관계 진전협력을 평가하고 있다』
노벨위원회가 金대통령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한 발표문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햇볕정책」을 통해 金대통령은 50년 이상 지속된 남북한 간의 전쟁과 적대관계의 해소에 노력해 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노벨위원회는 한반도의 화해 진전과 통일을 위한 북한 및 여타 국가 지도자들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한다>
노벨위원회는 金대통령이 東아시아, 특히 東티모르, 미얀마의 평화와 인권신장를 위해 보여 준 노력도 높이 평가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의 민주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金大中씨는 확고한 민주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金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東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東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DJ의 노벨평화상은 남북 頂上회담 개최와 東아시아의 평화ㆍ인권신장이 중요한 受賞 요인이었다. 『노벨위원회 부위원장 만난 건 국가홍보 목적』(당시 駐 노르웨이 대사)
金基三씨의 폭로 이후 東티모르와 청와대 金漢正 실장을 연결시킨 기사가 2월5일 東亞日報를 통해 보도됐다. 이 기사는 2000년 말 당시 장관직을 지낸 한 인사의 말을 인용, 「청와대 실장 노벨상 로비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인사의 발언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와대 金실장이 노르웨이를 여러 차례 왔다갔다 하며 (노벨상 수상을 위해) 뛰어다닌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특히 스웨덴 교포 의사 H씨와 함께 그런 활동을 많이 한 것으로 안다. 노벨상은 「로비」로 받을 수 없는 賞인데도 당시 金실장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자 정부 고위 간부들 사이에서는 「위험한 행동」이란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金실장의 활동에 협조했던 노르웨이 주재 P대사는 본부로부터 「외교관이 그런 일에 깊게 관여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다. 金실장이 2000년 초 『노벨상을 위해서는 東티모르에 의사당을 세워 주는 등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외교통상부에 요청한 적도 있다>
기자는 이 인사에게 청와대 金漢正 실장의 당시 활동상을 확인키로 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언론보도 이후 입장이 곤란해진 듯 즉답을 피했다. 그는 『당시 金실장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金실장에게 협조했다는 P대사는 『본부로부터 주의를 받은 적이 있는가』에 대해 『주의를 받은 적이 없다』면서 『노벨상과 관련해 어떠한 지시를 받지 않았으며 로비를 한 적도 없다』며 보도내용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다만 『남북 頂上회담 직후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고 국가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룬데슈타트 노벨위원회 사무총장과 스톨셋 노벨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난 적은 있다』면서 『이들을 만난 횟수는 근무기간 동안 각각 세 차례에 불과하며 공식적인 만남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金실장을 개인적으로 아느냐』는 질문에 『노르웨이 현지에서 金大中 대통령을 수행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난 적은 있다』고 밝혔다. 『노벨상 일은 관계자들 사이에 「NP(Nobel Prize)사업」으로 불렸다』
기자는 취재 도중 노벨상과 관련, 청와대 金漢正 실장과 국정원의 역할을 소상히 알고 있는 복수의 전현직 정부부처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노벨상과 관련된 일은 관계자들 사이에 「NP(Nobel Prize)사업」으로 불렸다』고 말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사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밝히기를 꺼려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부 사실을 공개했고, 그 중에는 金基三씨의 주장과 일치한 대목도 더러 있었다.
―1998년 8월 국정원장 비서실에 신설된 對外협력보좌관실의 역할은 무엇인가.
『주변 4강에 대한 국제적인 인맥을 구성한다는 게 목적이었다. 특히 미국 쪽에 큰 비중을 뒀다. 미국에 영향력 있는 인사를 섭외해서 한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 시절 부시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국내 S기업으로 하여금 텍사스주 현지에 지사를 세울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S기업은 실제 그곳에 지사를 만들었다. 金大中 대통령이 해외에서 자주 거론될 수 있도록 홍보전략을 짜는 일도 했다. 그런 일은 주로 당시 미국유학을 마치고 국정원에 특채됐던 金실장이 주로 담당했다. 그는 金대통령이 해외에서 자주 거론될 수 있도록 이벤트를 만들었다. 미국 현지에서 한반도 평화와 인권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일도 했다.
金漢正 실장과 비슷한 시기에 사무관으로 특채된 金모씨는 국내학자와 해외 언론의 접촉을 주선했다. 그는 국내 주재 해외언론 특파원들을 직접 관리했다. 관리목적은 金대통령과 국민의 정부에 대해 해외언론이 우호적인 보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특파원들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어 (한국에) 우호적인 언론을 골라 좋은 정보를 주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국정홍보처 산하 해외홍보원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對外협력보좌관실이 노벨상 관련 업무를 했다고 金基三씨는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金漢正 실장을 포함해 몇몇 인사들의 역할 때문에 그렇게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IMF 이후 국가信認度를 높이는 게 최대의 목적이었다. 金大中 대통령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신념이 강한 대통령이라는 점을 홍보하면 국가信認度도 높아질 것이라 판단했다. 국내정치상황과 노벨상 등을 떠나 남북문제가 잘 풀리면 경제도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것을 對外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 역할을 對外협력보좌관실에 있었던 金漢正 실장이 주도적으로 했다.
1998년부터인가 판문점, 평양 등에서 평화 콘서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디어는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 曺秀美(조수미)씨가 평화 콘서트에 자주 등장했는데 섭외를 金실장이 직접 했다. 해외에 머물고 있던 가수 서태지의 판문점 공연도 그가 기획했다. 서태지는 준비단계에서 한국에 들어올 때 비밀리에 들어오기도 했는데 출입국할 당시 국정원이 편의를 제공했다.
金실장은 金대통령의 화보집도 발간했다. 金대통령을 해외에 알리는 용도였다. 이런 사업들의 話頭(화두)는 당연 「평화와 인권」이었다. 金대통령의 傳記가 北歐語(북구어)로 발간됐는데 그것도 그가 주도했다. 국제적인 세미나를 개최한 것도 그다. 여기에는 Y대 M교수의 역할이 컸다. M교수와 金실장은 상호협력관계에 있었다. 둘은 해외에도 같이 나가곤 했다』
―金漢正 실장은 어떤 인물인가.
『상당히 똑똑한 사람이다. 서울大 운동권 출신으로 기획력이 뛰어났다. 박지원 비서실장이 성실한 반면, 金漢正 실장은 성실성과 머리를 겸비하고 있다. 朴실장 앞에서도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金대통령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金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도 강하다. 운동권 출신이라 국정원에 있을 때 내부 직원들과 마찰이 있곤 했다. 아무튼 그는 운동권 출신으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성격이 급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 東티모르ㆍ호르타ㆍ벨로
金漢正 실장은 일을 처리할 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를 잘 아는 한 인사의 말이다.
『그는 보안의식이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도 힘들었죠. 그는 어떻게 하면 합법이고, 어떻게 하면 불법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될 만한 소지를 아예 없애버리죠. 그러면서도 자기가 기획한 일은 성사시킵니다』
이 인사는 갑자기 東티모르 얘기를 꺼냈다. 金基三씨의 글에도 東티모르 얘기가 나온다. DJ의 노벨평화상과 東티모르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東티모르는 金大中 대통령이 상당한 정성을 들인 곳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東티모르는 2000년 노벨위원회가 발표한 金大中 대통령 노벨상 수상 선정 발표문에 거론된 나라이다. 한국-東티모르 양국은 2002년 5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金大中 정부는 이미 1999년부터 東티모르에 집중적으로 지원을 해왔다. 1999년 11월 인도적 차원에서 25만 달러를 지원했다. 경제재건 및 개발지원 명목으로 7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東티모르 독립기념관 설립에 60만 달러 규모의 건설지원도 하고 있다.
1999년 9월 유엔 안보리의 결정에 따라 한국은 유엔평화유지군 형식으로 東티모르에 파병까지 한 상태다. 東티모르 주요인사의 訪韓도 적극 추진돼 왔다. 2000년 1월 3박4일 일정으로 구스마오(Xanana Gusmao) 東티모르 대통령과 라모스 호르타(Ramos Horta) 외교부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2000년 5월에는 東티모르의 정신적 지도자인 카르로스 벨로(Carlos Belo) 주교가 전남大 5ㆍ18연구소 초청으로 방한하기도 했다. 호르타 장관과 벨로 주교는 1996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이기도 하다. 2001년 11월에는 구스마오 대통령이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해 광주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마리 알카티리(Mari Alkatiri) 총리 및 경제개발 장관은 아태평화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다.
金基三씨의 글에도 東티모르와 관련된 대목이 나온다.
<金大中이 그동안 東티모르에 경제적인 지원과 더불어 상록수 부대를 파견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시한 연유도 노벨상을 받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한 것입니다> 36세에 청와대 제1부속실장
金漢正 실장은 1988년 서울大를 졸업한 직후 민주당 薛勳(설훈) 의원의 추천으로 金大中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그는 薛勳 의원 이종사촌 누나의 아들이다. 1990년 당시 金大中 총재 보좌관을 했던 薛勳 의원을 보조하면서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DJ 정권에서 2인자 역할을 했던 한 원로 정치인은 金실장에 대해 「연설문을 잘 만들던 젊은이」로 기억했다.
『동교동에 어느 날부터 젊은 친구 하나가 왔다갔다 합디다. 처음에는 薛勳이 옆에 있는가 했더니 나중에 보니 선생님(金大中) 옆에 있는 것 아니겠소. 그 친구가 청와대에서 우리 대통령님을 모시는 金漢正이라는 친구요. 그 젊은이는 선생님의 구술과 연설문을 만들어 내는데 선생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퇴임한 후에도 그 친구를 비서관으로 계속 쓸 거요』
金漢正 실장은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뉴저지 럿거스(Rutgers)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박사과정 수료)을 공부했다. 1998년 DJ 정권이 들어서면서 귀국, 李鍾贊 당시 국정원장에 의해 국정원 5급 사무관으로 특채됐다. 이후 1999년 6월부터 12월까지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 사무부총장을 지내다 같은 해 12월13일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발탁됐다. 그의 나이 36세에 불과했다.
당시 청와대內에서는 「파격적 인사」로 봤다. 金대통령은 金漢正 실장이 비록 직급에 비해 젊은 나이지만 그에 대해 「부속실이라는 독특한 기능을 가장 원할히 수행할 수 있는 최적합자」로 판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는 「NP사업」과 관련된 질문을 증언자들에게 계속 던졌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 사무부총장으로 있을 때 金漢正 실장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1999년 5월 千容宅(천용택) 의원이 국정원장으로 부임하면서 그는 일주일도 안 돼서 잘렸다. 千容宅 원장은 청와대를 다녀온 후 그를 곧바로 인사조치했다. 지금도 아마 둘은 사이가 안 좋을 거다. 충격을 받은 金실장은 아태재단으로부터 분리된 아태민주지도자회의로 간 후 열심히 일했다.
金대통령이 퇴임 후 몸담을 아태민주지도자회의를 그는 열심히 키웠다. 그곳에서 그는 기업과 정부부처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노벨상과 관련한 일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그는 해외인사들을 초청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일을 했다. 인권지도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호르타 東티모르 現 외교부 장관을 초청하는 일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1999년 7월 金대통령이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수상한 것도 그의 역할이 컸다』
―金漢正 실장이 청와대로 들어간 후 그 일은 어떻게 진행됐나.
『1998년 그를 채용했던 李鍾贊 국정원장도 노벨상과 관련된 일종의 「뜻」은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 일이 잘 안 됐다. 당시 對外협력보좌관이었던 L씨가 金泳三 정권 시절에 金大中 대통령이 노벨상을 못 받도록 공작을 했다는 소문 때문인지 아무튼 잘 안 됐다. L씨와 金漢正 실장은 같은 사무실에서 트러블을 일으키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태민주지도자회의를 거쳐 金漢正 실장이 청와대에 들어간 후 일은 수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속실장이라는 자리는 대단한 곳이다. 장관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NP사업은 국정원 고위인사와 실무급 P, K씨 등과 업무협조가 비교적 잘됐다』
金基三씨가 작성한 글에도 이와 유사한 대목이 나온다.
<2000년도에 金漢正이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재임하면서 벌인 노벨상 공작의 주요 내용을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金漢正은 P 駐노르웨이 대사, K 駐 노르웨이 국정원 파견관, 그리고 국정원 1국 동구과 북구팀 P 팀장에게 직접 지시하면서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金漢正은 이 공작의 일환으로 노벨委 부위원장이자 5인 심사위원회의 일원인 노르웨이의 스톨셋 주교를 비밀리에 방한 초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톨셋 주교는 金大中의 노벨상 시상식에서 안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극비 訪韓한 마그네 본데비크 노르웨이 總理, 그리고 라프토賞과 노벨평화상
―金漢正 실장의 임무는 따로 있는데 시간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나.
『서울에서 열렸던 2000년 8ㆍ15 이산가족 상봉 때 마그네 본데비크(Magne Bondevik) 現 노르웨이 총리의 극비 訪韓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본데비크 총리는 개인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를 초청한 기관은 그가 부속실장이 되기 전 사무부총장으로 있었던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였다. 본데비크 총리는 같은 해 10월 서울 평화음악회 참석차 또다시 방한하기도 했다.
중도파 성향의 본데비크 총리는 기민당 원내총무 출신으로 노르웨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그는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이산가족의 恨(한)을 현장에서 본 그는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정보를 담당하는 기관이 그를 현장으로 안내하고 편의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金漢正 실장의 역할이 컸다.
본데비크 총리가 돌아간 후 다음달 9월28일 청와대는 「金대통령이 노르웨이 베르겐에 본부를 둔 라프토(RAFTO) 인권재단의 올해 라프토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사실 라프토 인권상을 받을 것이라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쪽에서 수상 결정 소식을 통보해 왔다. 막상 결정소식이 전해지자 일부에서는 受賞을 미루자는 견해도 있었다. 노벨상을 받는 데 역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
당시 국내 분위기는 金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쪽이었다. 때문에 일부 언론들은 라프토 인권상 수상이 오히려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낮게 한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역대 라프토상 수상자 13명 중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미얀마의 反체제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와 東티모르 라모스 호르타 외교부 장관 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라프토상을 받은 후 2~3년이 지나서야 노벨상을 받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라프토 인권상을 노벨상보다 도덕적 권위 측면에서 훨씬 높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라프토상을 金대통령은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金대통령의 라프토상 受賞은 노벨위원회의 노벨상 수상자 결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 교수는 분석했다. 金대통령은 같은 해에 라프토상과 노벨상을 모두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 됐다.
―이른바 「NP사업」은 어떻게 진행됐나.
『金漢正 실장은 1999~2000년 사이에 유럽 현지를 방문해 국내에서 파견된 정부 부처 관계자들을 만나 관련 업무에 대해 논의를 하곤 했다. 현지 관계자는 해당국 상황을 파악해 본국과 金漢正 실장에게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기도 했다. 北歐 현지인의 경우 교포의사 한모씨가 그 일에 어느 정도 관련이 돼 있다. 金실장은 또 노벨상 수장자를 선정하는 노벨위원회 스톨셋 주교와도 친분이 있는 걸로 안다』
―이런 일을 아는 사람은 국내에 얼마나 되나.
『이 사업은 극소수의 인사들만 관여했으며 당연히 일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일부 정부 부처 고위관계자와 대학교수는 이 일을 대충 파악하고 있다』
―노벨상과 관련해 일에 관여했던 이들은 2000년 당시 金대통령의 수상 가능성을 어떻게 보고 있었나.
『일단 가능성을 높게 봤다. 사실 처음에는 2001년이나 2002년에 수상할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2002년은 월드컵도 있고 해서 시기가 좋았다고 생각들을 했다. 그런데 2000년 남북 頂上회담이 성사되고 난 후 그 일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鄭周永 회장 측이 노벨상을 욕심낸다」는 국정원 보고서
―2000년 노벨위원회 측은 노벨상 후보로 개인과 단체 등 140여 명이 추천됐다고 전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후보로 포함됐다고는 알려져 있었지만 여전히 불확실했다.
『頂上회담 무렵 외신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 예비명단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사람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부에서는 金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노벨상 경쟁 상대로 클린턴 대통령이 아니라 현대그룹 鄭周永 명예회장을 꼽고 있었다. 사실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사람은 바로 鄭회장이었다. 「소떼몰이」로 비유되는 現代의 對北사업으로 남북관계는 사실상 비롯됐다.
1999년 말쯤에 이런 일이 있었다. 「鄭周永 명예회장 측이 노벨상 受賞을 목적으로 국내외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국정원 보고서가 윗선으로 전달됐다. 鄭周永 회장 측은 對北사업 이상의 또 다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노벨상 受賞 직전 金大中 대통령과 金正日의 공동수상 얘기도 나왔는데 그럴 가능성은 있었나.
『최규선씨가 만들었다는 문건에도 들어있지만 공동수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노벨상과 관련해 국내기업들도 일정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국내 기업이 운영하는 한 재단과 노르웨이의 한 단체와 공동으로 2000년 어느 적당한 시점에 구체적인 일을 기획했었다. 두 단체는 협정서까지 체결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일을 추진하는 데 기업 측에서 돈이 많이 든다고 알려 왔다. 세금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賞을 타기 위해 부정한 로비를 하지 않았다면 결국 金大中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은 국가적으로 경사가 아닌가.
『물론 노벨위원회 측에 뇌물을 제공했다거나 부정한 방법을 쓰지는 않았다. 또 그렇게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노벨상의 열쇠는 북한 金正日에게 있었다. 金正日이 영화의 감독, 주연을 다했다. 남북 頂上회담이 바로 그렇다. 일종의 세련된 로비가 있었다는 말이다』
노벨평화상은 국제적으로 저명한 인사에 의한 추천과 노벨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수상자를 선발한다. 따라서 후보 측에서는 노벨위원회 측에 후보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홍보와 관련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 南宮鎭 前 장관, 『남북 頂上회담, 노벨상 로비說 등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노벨평화상이 정치인들에게 수여되면서 로비 의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4년 노벨상 수상자인 일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로 인해 일본만이 국제적 망신을 당했을 뿐이었다. 노벨위원회가 2001년 노벨평화상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공식 책자에도 사토의 受賞에 대해 부적절했던 것으로 적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후보로 14회나 추천됐다. 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작업을 해왔던 南宮鎭(남궁진) 前 문화관광부 장관은 『金대통령은 1987년에 이미 노벨상을 수상할 뻔했다』면서 『2000년 이전까지 그분은 확실한 노벨상 수상자 후보였음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 頂上회담, 노벨상 로비說 등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노벨상과 관련해 또 이상한 얘기가 나옵니다.
『노벨상을 로비로 연결하는 것은 못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노벨상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 상입니까. 노벨상은 로비에 의해 탈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對北문제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남북한 평화체제에 기여한 공로로 상을 받은 것이지요. 烏飛梨落(오비이락)을 사실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노벨상은 노벨상이고 남북 頂上회담은 남북 頂上회담입니다. 노벨상과 頂上회담을 연결시키는 것은 우선 먹기에 좋아 보이지만 종국에는 국익에 절대 도움이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언제 또 노벨상을 탈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노벨상과 관련해 추진했던 일은 어떤 게 있나요.
『노벨위원회에 金대통령을 추천하는 일을 했습니다. 추천서가 잘 도착했는지 잘못 갔으면 다시 보내기도 했지요. 金대통령을 홍보하는 테이프를 보내기도 했고, 해외언론에 났던 관련기사, 그리고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한 일들을 자료로 만들어서 보냈습니다. 과거 독일 의원들이 金대통령을 추천한 적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인 추천자들이었지요』 스톨셋 주교,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다』
기자는 2월10일 밤 10시30분부터 약 5분간 金漢正 실장과 친분이 있다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스톨셋 주교와 국제전화를 통한 인터뷰를 했다. 최근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남북 頂上회담과 노벨상의 연관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떠한 답변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최근 한국 상황에 대해 아십니까? 對北 송금문제 등 정치상황이 시끄럽습니다.
『아무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 상황에 대해 말할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나중에) 한국을 방문하면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 상황에 대해 일절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金漢正 실장을 아십니까.
『그 질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I don’t want to answer to the question)』
그의 답변은 동일했다.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다.
기자는 2월11일 취재도중 여러 번 언급된 東티모르 라모스 호르타 외교부 장관에게도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는 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한국 측이 요청한 두 명의 외국인사 중 한 명이다.
그는 金대통령을 2000년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는 그와 직접 통화하지 못했다. 대신 비서역할을 하는 외교부 관계자에게 질문의 요지를 전달했다. 아울러 이메일을 통한 질문서도 두 차례 보냈다. 외교부 관계자 다음날 곧바로 답변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떠한 응답도 오지 않았다. 金漢正 실장, 『답변할 가치가 없다』
기자는 소위 「NP사업」에 거론된 주요 인사들에 대한 답변을 들어보기로 했다. 먼저 청와대 金漢正 실장. 그는 노벨상과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답변할 가치가 없다』며 잘라 말했다.
―얼마 전 전직 국정원 직원이 노벨상과 관련해 폭로를 했다. 그 일에 대해 묻고 싶다.
『그 사람은 현재 국정원이 명예훼손과 국정원직원법 위반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다.
그 사람(金基三) 말대로 자기가 맞다면 정당하게 들어와서 조사를 받으면 된다. 미국에 도망가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자기 말대로 지난 大選 때 한나라당에 찾아갈 정도로 (정치적) 의도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부도덕한 사람 말을 듣고 묻는 것에 대꾸할 가치가 없다』
―취재한 바에 따르면 金基三씨의 주장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물어보라. 나는 모르는 일이다』
―국정원,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에 있을 때 어떤 일을 했나.
『그런 것에 대해 (기자) 마음대로 쓰고 알아서 하라. 일체 대답을 안 하겠다. 대답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金漢正 실장은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를 끊겠다고 했다. 기자는 『취재한 것에 대한 확인작업이 필요하며 반론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金漢正 실장은 『기회 안 줘도 된다. 나는 月刊朝鮮에 대해 개인적으로 이렇고 저렇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기자는 청와대 사무실로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응답은 오지 않았다.
기자는 金漢正 실장에게 해외여행을 자주 다닌 이유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는 1998년 국정원에 들어간 후 그 해 10월 약 한 달 동안 공무수행차 미국을 다녀왔다. 1999년에는 총 아홉 차례에 달했다. 특히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사무부총장 시절(1999년 6월~12월)에만 거의 매달(6회) 외국을 다녀왔다. 이때 출국 목적은 공무수행(4회), 유학(1회), 상용(1회)이었다. 그는 태국, 영국, 독일, 홍콩, 스위스, 싱가포르 등을 다녀왔다.
그는 한국과 東티모르 간 정식 항공노선이 생기기 전 軍수송기를 타고 다녀온 적도 있다고 한 인사는 전했다.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여행에 대해서는 말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확인한 바에 따르면 1998년 8월 국정원 근무 이후 지금까지 19회의 출입국 중 개인적인 여행은 단 세 차례에 불과했다. 대부분 「공무수행」이었다.
기자는 이 일과 관련해 金漢正 실장과 협의했다는 당시 전직 국정원 고위간부 K씨의 입장도 들어보기로 했다. K씨 측에 세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K씨 측은 『부재 중이다. 지방 출신을 자주 가시기 때문에 연락이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질문요지를 전달한 후 답변을 기다렸으나 K씨 측은 반응이 없었다.
2000년 당시 국정원 고위간부를 지내고 현재 해외공관 대사로 재임 중인 C씨에게도 확인했다. 그는 『절대 그런 일(로비)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전직 국정원 직원이 폭로한 노벨상 로비說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시 내가 간부로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로비는 절대 없었다. 그런 문제와 관련해 위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없었고 지시를 할 수도 없다』 『不正한 로비는 없었다』
―金泳三 정권 시절 안기부는 DJ의 노벨상 수상 방해공작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실 노벨상과 관련해 문제가 거론된 적은 있다. 과거 정권의 사례도 있고 해서 노벨상 문제는 아주 예민한 문제로 다뤘다. 그것과 관련해 노르웨이 현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있었다. 그러나 신문에 보도되는 정도였다.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노벨상과 관련해 노르웨이 현지 파견관들의 활동은 어떤 것들이었나.
『통상적인 정보활동이다. 현지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나름대로 물어보는 것을 보고하곤 했다. 하지만 파견관들은 시비를 없애기 위해 오히려 거리를 두고 활동했다』
취재 도중 만난 한 전직 대사는 『로비의 槪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해석하기 나름이다』고 답변하자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로비를 부정한 방법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은데 그런 의미라면 노벨상을 타기 위해 「로비」는 없었다. 다만 통상적인 국가홍보활동이나 현직 대통령을 외국에 널리 알리는 것은 한 나라의 대표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전직 국정원 A씨는 『노벨상을 목적으로 활동을 했는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상을 타게 됐는지 그것을 판단하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金漢正 실장의 활동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정부 부처 일부 직원들과 뭔가 하려고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0년 6월14일 평양
2000년 6월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頂上회담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金大中 대통령과 金正日의 첫 頂上회담 자리에 배석했던 한 인사의 증언이다. 당시 국내 대학 캠퍼스內에는 頂上회담을 맞이해 한반도기와 인공기가 동시에 게양됐다. 이를 두고 검찰은 학생회 관련자들에 대해 사법처리 여부에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안 북한 金正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섭섭한 말씀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오늘 아침 남조선 텔레비전을 보니까 대학에서 인공기를 걸었다고 검사가 학생들을 구속하겠다고 하는데 지금 여기서 頂上회담이 열리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께서는 환대를 받으신 걸로 만족하고 푹 쉬신 다음에 돌아가시지요. 대통령께서도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2월10일 金大中 대통령은 노벨상 제정 100년째이자 뉴 밀레니엄 첫 해인 2000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李鍾贊 前 원장은 지난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對外협력보좌관실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정보원장으로 와 보니 (내부보고서 중에) 여러 정보들은 많은데 경제정보가 전달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정보기관의 역할이란 통치권자에게 다가올 위기를 예측하고 이를 사전에 보고하는 것이다. IMF가 온 이유도 사실 정보기관이 경제정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한 박사들을 불러와 對外협력보좌관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취재결과 李 前 원장의 설명은 당시 현실과는 달랐음을 확인했다. 박사급 인사들은 해외에서 國際經濟學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國際政治學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對外협력보좌관실은 정권 초기 DJ 홍보의 핵심조직이었다. 金실장은 아태민주지도자회의를 거쳐 청와대로 들어 간 후에도 국정원 일부 관계자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왔다. 대통령의 非공식 업무를 담당하는 부속실장으로서 그는 맹활약했다. 金씨의 일을 알 만한 위치에 있었던 몇 명의 전현직 정부 부처 관계자의 거의 일치된 증언으로 미뤄 金漢正 실장이 DJ 노벨평화상 로비의 핵심인물이었음은 확실하다. 여기서 「로비」는 부정적 개념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기사에서는 그를 實名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그가 국익이 아닌 대통령 개인 이익을 위해 국가기관과 공무원들의 資源(자원)을 활용했다면 이는 도덕적, 법률적으로 신중히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