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홍석현 허락받고 1996년 북한에 거액의 달러 현금 두번 건넸다

서석천 2019. 6. 17. 19:37
권영빈 중앙일보 전 사장 "홍석현 허락받고 1996년 북한에 거액의 달러 현금 두번 건넸다"

  

권 씨, 북한으로부터 성금 부탁 받고 100달러 지폐 다발 골프채 가방에 가득 담아 마카오에서 전달
"못받았다"는 억지 주장에 같은 방식으로 두번이나 달러 현금 제공...홍석현 사장, 홍라희 씨는 북한서 각별한 대접 받아
남북교류 관련법에 외환관리법 위반까지 저질렀지만 김대중 정부는 눈 감아 줘...북한 삼성에 "사업하라" 압박
원래는 누구보다 열렬한 햇볕론자, 하지만 북한 실체 알고 나서 反햇볕론자 돼...홍석현도 햇볕론자
권영빈 중앙일보 전 사장
권영빈 중앙일보 전 사장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이 1996년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시절, 중앙일보 홍석현 당시 사장의 허락 아래 북한에 거액의 현금을 달러로 전달했다고 폭로해 파문이 일고 있다.

권 씨는 17일 펜 앤드 마이크와의 통화에서 "더 이상의 언론 인터뷰는 사양한다.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권 씨는 지난 15일 출간한 책 ‘나의 삶 나의 현대사’에서 1996년 여름 당시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이었던 자신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의 전금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회위원회 부위원장을 접선해 성금을 부탁 받았고, 국내로 귀국한 뒤 홍 사장의 허락을 받아 ‘쌀 보내기 성금’이란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건넸다고 밝혔다. 

당시 권 씨가 발급 받은 조선인민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증
당시 권 씨가 발급 받은 조선인민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증

권 씨는 “성금의 1차 전달은 마카오에서 이뤄졌다. 유용구 당시 중앙일보 차장이 동행해 골프채 통 속에 현금 달러를 넣고 배를 타고 마카오로 떠났다. 무슨 밀수꾼처럼 도박의 천국이라는 마카오 시내 호텔을 들어갈 때는 등골이 좀 오싹했다. (북한 쪽을 대표하는) 박경륜(재일교포 사업가 삼천리 회장), 이창희(재미교포), 전금철 그리고 우리 일행이 마주 앉아 약간의 담소를 마치고 성금 전달을 끝냈다. 영수증을 받을 일도 아니고 골프채 통을 넘기면서 일은 끝났다”고 돈 전달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북한에 뒷돈을 건넨 것도 불법이지만 달러 현금을 밀반출 함으로써 외환관리법 위반까지 저지른 셈이다. 권 씨는 17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대북 사업의 성격상 돈을 주는 것 이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한 골프채 통에 100달러 지폐를 넣었다고 했지만, 정확하게 얼마를 넘겼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100달러 지폐 다발을 골프채 통에 넣으면 수백만달러가 들어갈 수 있어 거액의 뒷돈이 넘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권 전사장은 달러를 준 뒤에 `배달사고'가 났다는 북한 측의 주장을 접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 달쯤 뒤 성금을 못받았다며 다시 보내라는 통지를 받고 서둘러 베이징으로 가서 북한 측 관계자를 만났는데 "재미교포인 이창희가 골프채 통을 들고 떠났는데 중간에 미국으로 가면서 성금을 가지고 튀었다. 다시 성금을 달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권 씨는 방북을 앞둔 상태라 다시 돈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배달사고 여부도 확인하지 못한 채 울며겨자먹기로 두번이나 돈을 건넨 것이다.

“그쪽이 아니라고 우기면 아닌 것이고 답답한 쪽은 우리일 뿐이다. 다시 성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은 이런 불가측성 사고가 빈발할 때마다 나를 신임했고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다음 일에 힘을 몰아주었다”고 권 씨는 밝혔다. 홍석현 사장의 든든한 후원으로 어렵사리 대북 사업을 성사시켰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방북 사업이 끝난 1년 뒤 돈을 빼돌렸다던 이창희가 서울에 와 권 씨를 다시 찾았다. 이창희 본인 명의로 성금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국세청에서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리라 예상하고 미리 성금 일부를 챙겼지만, 막상 세금이 그보다 더 많이 나왔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중앙일보가 이를 메꿔 달라고 요청했고, 안 그러면 국정원에 고발하겠다고 했다.

권 씨가 제의를 거절하자 이후 이창희의 출입이 잦아들었고, 후일 취재한 결과 그가 정말로 국정원에 성금관련 사실을 신고한 게 드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권 씨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 당국이 문제를 키워 사안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덮었으리라 짐작한다고 말한다.

제3차 방북단, 백두산 천지에서왼쪽부터 유영구(통일문화연구소 차장), 유흥준(전 명지대 교수), 고은(시인), 권영빈, 김주영(소설가), 김형수(조선일보 사진기자)
제3차 방북단, 백두산 천지에서왼쪽부터 유영구(통일문화연구소 차장), 유흥준(전 명지대 교수), 고은(시인),
권영빈, 김주영(소설가), 김형수(조선일보 사진기자)

권 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먼저 ‘햇볕론’을 설파한 언론인이자, 광복 후 처음으로 북한을 공식 취재한 언론인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햇볕론'을 주장했으며 홍석현 회장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연민과 뜨거운 가슴으로 북한에 접근하면 적대관계는 개선되고 그것이 통일로 가는 멀고도 바른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0달러짜리 달러 고액권을 두번이나 골프 채 통에 담아 건넨 끝에 중앙일보는 1997년부너 1998년까지 '북한문화유산답사'라는 사업을 진행했다. 북한답사는 3차로 끝났는데 두달 뒤인 1998년 8월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홍라희(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부인. 홍석현 사장의 누나)씨를 위한 추가 방북이 있었다.

권 씨는 "북한 쪽에서 삼성을 담당하는 김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삼성은 돌다리를 두드리며 올 듯 올 듯 하다가는 돌아선다. 어찌 그모양인가'라며 노골적으로 (삼성의 협력을 얻어내라고) 나를 몰아세웠다"며 "작년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던 우리 기업 총수들에게 이선권 조평통 부위원장이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라고 윽박지르던 상황과 유사했다"고 말했다.

권씨는 홍석현 회장이 북한에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홍 회장에 대한 북한의 대접은 월불작가 이기영의 아들인 이종혁 당시 조평통 부위원장이 직접 영접할 정도로 매우 각별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답사가 끝나고 불과 보름도 안 돼 북한이 ‘광명성 1호’를 발사했을 때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권 씨는 고백했다. 지금의 북핵, ICBM 문제와 연결되는 시발점이 광명성 1호였다. 

권 씨는 광명성 1호 발사 후 이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는데 보름쯤 후 북한에서 홍석현 사장과 함께 만나자는 팩스가 왔다고 했다.

그는 "무슨 용건인지 모르고 (홍사장과 같이) 갔다. 북에서는 이종혁과 김철이 나와 있었다. 김철이 ‘공화국이 당신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을 안겨줬는데 소장이라는 자가 우리를 비판하는 글을 버젓이 발표할 수 있나. 그것도 광명성 별명을 지닌 최고지도자를 향해 이게 말이 되느냐’며 소리쳤다. 이게 홍 회장과 나를 상하이까지 불러낸 용건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북한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권 씨는 “나는 ‘반(反)햇볕론자’로 바뀌었다"며 "교류협력을 하고 지원해본들 북한 정권은 바뀌지 않는다. 물론 전쟁보다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를 달성하려면 현실적이고 이성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권이 가진 친북 일변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불가역적 핵 폐기’를 주장하는 데 비해 당사자인 우리 정부는 검증보다는 종전선언이 먼저라고 외치고 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지 종잡을 수 없다"며 "문 대통령은 평화협정과 군사합의로 무장 해제를 진행 중이다. 국가 보위의 최종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정작 나라를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출처: 권영빈씨 저서 '나의 삶 나의 현대사>

안덕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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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빈 전 사장이 언급한 '미스터리의 여인' 박경윤은 누구?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대북 접촉 비화 밝히며 박경윤 언급...

《월간조선》, 1995년 남한 매체 최초로 그와 9시간 인터뷰

17일 자 <조선일보>에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 인터뷰 기사가 게재됐다. 최근 《나의 삶 나의 현대사》란 저서를 쓴 권영빈 전 사장은 최보식(崔普植) 선임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으로 재직하던 시기, 북한과 벌였던 대북 접촉 비화(秘話)를 상세히 털어놓았다.

 
▶기사 바로가기:
"뜨거운 가슴으로 '퍼주기' 주창했지만… 네 번 방북 뒤 '反햇볕론자' 돼"
 
이 인터뷰 기사에는 '박경륜'(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엔 '박경륜'으로 돼 있지만, 이 글에선 '박경윤'으로 통일)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1996년 여름, 권 전 사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금강산 개발 사업에 관여한 재일교포 사업가 박경윤 삼천리 회장을 만났다는 것이다. 권 전 사장은 북한 정권의 핵심부와 닿아 있는 그녀에게 "남북이 서로 만나고 이해할 시점이 됐다"며 방북 취재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했다고 한다.
 
권영빈, 박경윤 주선으로 북측 인사 만나... 이후 돈 요구
 
박경윤을 만난 한 달 뒤, 북한의 외화벌이를 담당하는 전금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협상은 빠르게 진척됐다고 한다. 방북이 임박할 무렵인 1996년 겨울 북한의 전금철이 '쌀 보내기 성금을 내줄 수 없느냐?'고 권 전 사장 측에 말했다.
 
돈 요구를 받은 권영빈 사장 측은 골프채 가방에 100달러 지폐를 담아 배를 타고 밀수꾼처럼 마카오로 갔다고 한다. 그는 “(돈의) 액수는 밝힐 수 없다. 당초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며 “그쪽에서 현금을 요구했다. 송금은 안 되고, 그런 아이디어를 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어지는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세관 통과는 문제가 안 됐다. 외환관리법 위반이지만 대북 사업 성격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카오의 한 호텔에서 전금철, 박경륜, 박경륜의 사무장이라는 재미교포를 만났다. 영수증을 받을 일도 아니어서 골프채 가방만 넘겨주는 걸로 끝났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 북측으로부터 '성금이 안 왔으니 다시 보내라'는 팩스가 왔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도 어이가 없어 베이징으로 가 북한 측 참사를 만났다. 이들은 '박경륜의 사무장인 재미교포가 골프채 가방을 들고 미국으로 튀었다'고만 말했다. 보는 앞에서 주고받았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리 아닌가.”>
 
박경윤의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벌인 황당한 행태
 
방북 사업이 끝나고 1년 뒤 ‘돈 갖고 튀었다’는 재미교포(박경윤의 사무장)가 "북한이 내 명의로 성금을 받는 바람에 미국 국세청이 내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다. 세금 납부액으로 미리 성금 일부를 챙겼지만 이걸로 모자랐다. 중앙일보가 보전해달라. 안 그러면 국정원에 고발하겠다"며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권 전 사장의 말이다.
 
“기가 막혔다. 내가 '신고해라. 법정에서 이 문제를 한번 따져보자'며 전화를 끊자, 그는 성금 관련 사실을 정말 국정원에 신고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어서 국정원은 이 문제를 덮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권영빈 전 사장 측과 북한 당국자를 연결해준 박경윤은, 권 전 사장이 북한과 접촉하기 약 1년 전쯤인 1995년 《월간조선》과 중국 베이징 현지에서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 기사 제목은 ‘남북 비밀접촉 선상(線上)의 미스터리 여인 박경윤(朴敬允) 금강산 국제그룹 회장은 누구인가─ 사업가인가, 공작원인가?’였다.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9시간 동안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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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윤을 최초로 인터뷰 한 <월간조선> 1995년 3월호 기사. 사진=월간조선 캡처

   
24년 전 <월간조선>과 인터뷰 한 박경윤
  
당시 《월간조선》에 실린 박경윤 인터뷰 기사를 요약한 발문(跋文)은 다음과 같다.
 
<대북 경협 러시 속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북경의 길목을 누르고 있다는 박경윤(朴敬允) 회장은 요사이 방북 주선을 부탁하러 오는 남한의 기업인·정치인·언론인 등으로 문전성시다. 정주영·김우중·문선명 방북, 남북정상회담 밀사접촉, 남북한간 비밀 쌀 거래, 평양―나고야 전세기 취항, 부산―청진 직항로 개설, 금강산 개발의 투자유치 창구 역할, CNN등 서방언론의 김일성 인터뷰 주선 등 최근 6년간 굵직한 막전 막후 거래를 주도해온 박 회장은 도대체 누구인가. 남한 기자와 최초로 본격적인 인터뷰를 가진 박 회장은 활달하고 세련된 태도와 말씨로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금강산국제그룹은 1988년 박경윤이 처음 북한에 갔을 때,  박씨가 북측에 제안해 설립했다고 한다. 처음 만든 회사의 명칭은 ‘금강산 국제무역개발회사’였다. 당초 금강산 관광하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박경윤이 처음으로 그 물꼬를 텄다.
   
북측은 박경윤에게 ‘통일교 측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함께 해보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해 북측의 협조 하에 1992년 금강산국제그룹을 설립했다. 그 1년 전, 김일성은 이른바 '통일교'로 불리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문선명 총재와 만난 적이 있다. 
 
박경윤은 북측에 ‘국제적으로 신용이 약해 돈을 벌려면 은행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 ‘고려상업은행’을 설립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그가 세운 회사의 보증인 역할을 해줬다.
 
北, 대북 밀사로 김복동 지목
 
박경윤이 《월간조선》에 털어놓은 얘기 중, 재미있는 부분을 약간의 해설을 덧붙여 소개한다.
 
<▲ 박 회장을 공작원으로 보는 시각은 박 회장께서 김복동(金復東)씨를 밀사로 북한에서 데리고 가려고 하는 데 관계한 것과 김윤열(金允烈) 도사 등을 북한으로 데리고 가는 데 중간에서 역할을 했다든지 하는 그런 일 때문이겠죠.
 
“… 김복동씨 얘기도 저는 미국식으로, 남북 대화가 제대로 되려면 로비를 해야한다고 (북측에) 말했더니 「로비는 누가 하면 되겠소」 물어 와서 로비는 대통령과 언제든 얘기가 가능한 사람으로 공직에 있지 않은 사람이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김복동씨 잘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김복동, 금진호(琴震鎬) 두 분이 계셨는데 김복동씨가 좋겠다고 저하고 같이 일하는 박종근(朴鍾根) 사장에게 추천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이 북방 외교로 동구권 국가들과 잇따라 수교를 맺자, 북한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이때 북한은 남한에 손을 내밀었고, '대북 밀사역'으로 김복동씨를 요구했다고 한다. 김복동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손위처남이자 노 전 대통령의 육사 11기 동기이다. 금진호는 노 전 대통령의 손아래 동서로 전두환 정권 시절,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박종근은 금강산국제그룹 산하 금강산국제무역개발회사 사장을 지낸 이로, 1990년 12월 금강산국제항공회사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6월,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 사무국장과 1994년 4월 금강산 개발총공사 사장을 각각 역임했다. 2011년 북한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국가 장의(葬儀)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일성-문선명의 인연
 
김윤열은 육영수 여사 사망, 박정희 대통령 암살, 전두환·노태우의 등장을 예언했다고 알려진 역술인으로, 1985년 첫 방북을 시작으로 몇 차례 북을 드나든 인물이다. 두 번째 방북 때 김일성을 만나 ‘남북한 UN 동시 가입’을 권했다고 한다. 북한을 드나든 건 맞지만, 김일성을 만나 깊은 얘기를 나눴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김정일과도 몇 차례 만남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 공작원이라는 이야기가 박종근 사장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닙니까. 박종근씨가 김정일 직속의 대남(對南) 공작을 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건 상상입니다. 저는 교포입니다. 김복동씨가 제일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얘기했고 그 다음에는 김복동씨하고 접촉해 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북한하고 일하는 사람이 불편할 때 아닙니까….”>
 
박경윤은 김일성과 문선명 총재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 ▲ 상당히 궁금하게 생각되는 것이 문선명씨가 종교 활동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선전한 것이 반공이었는데, 어떤 심리 변화가 있어 북한에 가게 됐는지 거기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설명해주십시오.
 
“비(非)종교인으로서의 제 느낌은 통일교가 세계화를 빨리 했다고 생각됩니다. 냉전 체제가 다 없어지고 반공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해진 것 아닙니까. 북한에 들어감으로써 반공정책이 세계화로 바뀌었다고 봅니다. 문선명 총재하고 북한하고는 극과 극의 관계였으니 오히려 잘 보합된 것 아닙니까.”
 
▲ 김일성이 문 총재 만났을 때 옆에 있었습니까.
 
“저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촉매 역할만 하고 빠집니다. 제가 숟갈 들고 밥상까지 받으러 갑니까. 저는 그런 짓 안 좋아합니다.”
 
▲ 김일성이 문선명씨 만난 다음에 문선명씨에 대해 들은 적 있습니까.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민족주의에 대해서 생각하는 관점이 다릅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이 세계에 나가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북한도 긍지를 느끼고 형제의 입장에서 돕겠다는 입장입니다.”>
 
"김우중, 비신사적... 北, 정주영에 대해선 호감"
 
박경윤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 대해선 혹평을 한 반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해선 ‘북한이 (정주영 회장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 김우중 회장의 북한 방문 때 그를 소개했습니까.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 그 과정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죠.
 
“88년부터 북한에 들어가서 같이 일을 해보자는 식으로 얘기는 나왔는데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문익환(文益煥) 목사 사건으로 뜸하다가 「경평(京平)축구 이어보라」고 해서 그때 들어갔죠. 김우중씨 문제는 덮어두는 것이 편하다고 봅니다."
 
▲ 서울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김우중 회장이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만나서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신뢰 관계가 쌓여 그 다음에 직접 왔다갔다 해서 박 회장이 섭섭해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게 섭섭한 것이 아니고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누구를 소개하면 싹 비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봤을 때 김우중 회장은 신사는 아니었습니다. 누가 잘못했다가 아니라 좋은 일 하고 뺨 맞은 기분은 안 좋죠.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닙니다. 그때 김우중 회장이 사업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 정주영씨가 방북할 때의 역할은.
 
“정주영 회장의 방북 진의를 제가 전달했습니다. 정 회장은 86년부터 방북을 희망한 것으로 압니다.”
 
▲ 89년 초 정주영씨가 배에 건설 기자재를 실어 선물로 보냈는데 북한에서 받지 않아 이것을 보고 김일성이 정주영씨한테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신문에서 봤는데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정 회장의 대변인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고…. 북한에서 정주영 회장에 대한 감정은 지금도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애국자... 박정희도 훌륭한 분"
 
김일성에 대해선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그 동안 일곱 차례 정도 김일성을 만나면서 나눈 대화가 궁금한데.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본 김일성 주석은 애국자입니다. 또 누가 뭐래도 훌륭한 정치가입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에서 전직고관·국회의원이 왔을 때 「남녀가 춤을 추는 데 계속 발등을 밟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김 주석이 물었습니다. 미국 측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좀더 추면 습관이 되어서 잘 추지 않겠느냐며 계속해 춤을 추자」고 말했어요.
그리고 미국 측에서 「당신들은 왜 개방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우리는 문을 닫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근데 당신들 우리보고 개방 얘기하지 말고 뉴욕 UN본부에 있는 북한 대사를 워싱턴에 가게 해주쇼」했는데 그때 왔던 분들이 북한 대사가 워싱턴에 가지 못하는 걸 몰랐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아차 하며 웃고 말았는데 상당히 위트가 있는 분입니다.”>
 
박경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그분도 훌륭한 분”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그분대로 시대에 걸맞는 일을 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 독재를 했다고 하지만 북한도 유일 체제가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글·정리=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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