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스크랩] 고려태조 왕건과 훈요십조를 생각해 봅니다

서석천 2008. 9. 13. 14:33

高麗 太祖 王建

얼마전 高麗太祖 왕건(王建)의 陵을 北韓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아니 그동안 王建陵도 몰랐다는 말인가? 그런데, 역시 우리 역사의 기틀을 다진(?) 어느 日本학자가 발견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우습기 까지 합니다. 日本에서는 역사학 교수되기가 쉬운가 봅니다.

"...북한지방에서 高麗 시대 초기로 추정되는 陵을 찾았다. 그 규모가 큰 것을 보니, 王建陵으로 생각된다.. 조사해보니, 高麗 初期로 보이는 물건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高麗 太祖 王建陵이 확실해 보인다..."

일부 우리 학계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일본 학자의 주장에 힘없이 그것은 高麗太祖 王建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시  高麗太祖  王建의 陵임을 증명하는 어떠한 비석(碑石)이나 지석(誌石)은 없습니다. 희한하게도 일본학자들이 발견한 陵은 모두 誌石도 碑石도 없어서 陵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잘도 주인을 찾아냅니다.. 어떻게 그들은 우리의 감추어진 유적을 이렇게도 잘 알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made in japan의 역사입니다. 아마 신통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슬그머니 뭍어가는 것이 이 나라 역사학계의 현주소 입니다.

하지만, 高麗太祖 王建陵은 "대륙의 사천성(四川省) 成都"에 있습니다. 成都는 三國志를 읽어 보신 분들은  유비(劉備)가 다스렸던  촉(蜀)의 수도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劉備와 王建이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아닙니다.

저의 처남이 인터넷 서버 쪽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저도 얼마 안되지만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상의 게임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게임 중에 三國志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三國志 게임도 일제(made in japan)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경계할 것은 三國志란 華夏族의 국수주의적인 소설로 華族 三國이 멸망한 후 천 년후에 쓰여진 소설입니다. 물론, 成都가 劉備의 蜀漢 수도였다는 것도 사실은 아닙니다만, 三國志란 소설은 몽골의 식민지배로 자존심이 구겨진 그들이 민족적 긍지를 찾고자 만든 그들의 國粹主義 소설인 것입니다. 그것을 일본인들이 역사게임으로 만들었으니, 그것을 보고 우리는 우리의 역사는 초라하다고 여깁니다. 우리의 생활에는 일제가 너무도 많이 자리잡아 어느 것이 日本 것인지도 잘 알 수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李基白이라는 교수(사망)가 쓴 韓國史新論이라는 곳에서는 십훈요(十訓要)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太祖가 왕권의 안정을 이루어 놓지 못한 채 자손들에게 정치, 사상 등에 관하여 後代 諸王들이 지켜야 할 것들을 적어 놓은 것이 訓要十條 입니다.

왕건의 훈요 10조
1. 대업은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으로 인함이니 사원을 보호 감독할 것. (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故創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使各治其業)
2. 사원의 창설은 도선(道詵)의 설에 따라 함부로 짓지 말것. (諸寺院皆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
3. 왕위 계승은 적자(嫡子), 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마땅하지 아니할 때는 형제 상속도 가함. (傳國以嫡雖曰常禮然丹朱不肖堯禪於舜實爲公心若元子不肖與其次子又不肖與其兄弟之衆所推戴者承大統)
4.거란(契丹)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본받지 말것. (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 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衣冠制度愼勿效焉)
5.西京은 吉地이니 중시할 것. (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之根本大業萬代之地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
6.연등(燃燈)과 팔관[八關 : 천령(天靈) 및 명산(名山)ㆍ대천(大川)ㆍ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은 主神을 함부로 가감치 말것. (燃燈八關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後世姦臣建白加者切宜禁止 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
7.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참언(讒言)을 물리칠 것이며,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여 민심을 얻을 것.
(欲得其心要在從諫遠讒而已從諫則聖讒言如蜜不信則讒自止又使民以時輕薄賦知稼穡之艱難則自得民心國富民安)
"8.차현(車峴)이남의 인물은 조정에 등용하지 말것." (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統合之怨犯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變者必有之矣)

9.관리의 녹은 그 직무에 따라 제정하되 함부로 증감치 말것. (百群僚之祿視國大小以爲定制不可增)
10.경사(經史)를 널리 읽어 옛일을 거울로 삼을 것.
(有國有家儆戒無虞博觀經史鑑古戒今)



이것은 王建이 遺訓으로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8 항을 보면 車峴 이남의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했는데, 지금의 역사학계는 이것을  반도의 "차령산맥"으로 해석 합니다.[고개(峴)를 산맥으로 억지를 부립니다] 이 역시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혹자는 王建時代부터 지금의 전라도를 차별 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日本人과 그 제자들이 우리를 분열 시키기 위해서 만든 말입니다.

우선, 王建의 맞수 견훤(甄萱 : 甄을 성씨로 읽을 때는 진으로 발음 합니다만 남들이 부르는대로 견훤이라고 하겠습니다)은 내분으로 王建에게 투항하여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甄萱에게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고, 그를 상부(尙父)라 하여 우대 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王建의 제2부인인 장화황후(莊和皇后) 吳氏는 羅州 사람으로 王建의 나주공략에 큰 공헌을 합니다. 高麗時代의 羅州를 현 사학계는 지금의 전라도 나주라고 주장합니다만,, 자세한 설명은 ☞ "羅州와 淸州人"편을 보세요.

莊和皇后에게서 난 太子 무(武)는 후에 2대 황제 혜종(惠宗)이 되기 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王建이 존경하였던(이유는 어쨋던간에) 甄萱과 심지어 자신의 부인에게는 고향이자, 太子의 고향인 지금의 전라도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다니.. 이것은 과연 사람을 대 놓고 욕하는 셈이 되며, 과연 이러한 訓要10條가 후대에 전해질 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훈요십조를 받들은 인물은 지금의 역사대로라면 차현이남의 인물인 제2대 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역사학계는 高麗時代의 羅州가 지금의 全羅道 羅州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羅州와 淸州人) 우리 역사의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대륙에는 車峴이 아직도 있으며, 車峴 남쪽은 당시의 "倭"지방을 이르는 말입니다(지금의 廣東省 일대). 이것을 半島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즉, 羅州와 車峴 이남은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인 것입니다. 물론, 半島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대룩의 "사천성(四川省) 成都"에 가면  太祖王建陵인 "영릉(英陵)"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아마 일간신문에 나오는 중국관광코스를 봐도 나옵니다.. 그럼 한자(漢字)가 다르겠지? 아닙니다. 우리 사학계야 한자(漢字)가 다른 글자가 발견되어도 그것이라고 우깁니다만(예를 들어 포석정등), 글자도 같습니다.



▲ 사천성 성도에 있는 왕건릉의 외형모습(수리중인 사진입니다)




어, 그러면 王建陵이 왜 여기에 있지? 그럼 高麗가 대륙에 진출 했었나? 아닙니다. 대륙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대륙에 있던 나라  입니다. 상고사학회에서 그곳을 다녀와서 찍은  사진을 올립니다. 이러한 역사를 왜 가르치지 않고 숨기려고만 하는지..그 후손들은 王建陵을 보고도 그 것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나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일반 국민은 그러한 사실을 보면, 당황을 하게 됩니다. 배우지 않았던 사실이라..

허약하게만 알려졌던 高麗, 해외에서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고려(COREA)" 그것은 변방의 작은 나라의 이름이 아니라, 대륙의 중심에 자리 잡았던 초강대국의 역사입니다. 高麗, 우리 역사의 초강대국의 역사를 아주 초라하게 만든 후손들이 각성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여행은 계속될 것입니다.

 

출처: http://myhome.thinkpool.com/think2001

출처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글쓴이 : 치우천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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