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평양에서 왔습니다.<51>~<55>

서석천 2025. 5. 22. 04:15
산 영웅엔 컬러 TV, 유족엔 흑백 TV… 선물도 차별
 
김정일의 대규모 정치 행사 전국영웅대회 
 
1988년 가을 김정일은 평양에서 처음으로 전국영웅대회라는 대규모 정치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대회의 성격에 맞게 6·25 전쟁 또는 대남 침투 및 공작 과정에서 특출한 공적을 세웠거나 그에 준하는 공을 세운 공화국영웅들과 경제·과학·예술·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특별한 업적을 이룬 노력영웅들이 모두 참석했다. 김일성·김정일이 함께 회의에 참석해 영웅들과 기념 촬영을 하는 등 이들을 격려해 주었다.
 
당시 공화국영웅 및 노력영웅 칭호를 받고 전국영웅대회에 참가한 생존자들에게는 본인에게, 사망한 영웅의 경우에는 가족에게 김정일 명의로 선물을 주었다. 그런데 막상 그 선물이 여러 사람에게 실망을 안기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나처럼 대남 침투 및 공작 분야에서 항상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하는 대남 요원들에게는 특히 더 크나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사망한 사람 유가족에겐 차별해서 선물 수여
 
살아서 영웅대회에 참석한 영웅들과 어떤 이유로든 사망해서 참가하지 못한 영웅들을 차별해서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국영웅대회에 참석한 영웅에게는 컬러 TV를 선물로 주고, 희생된 후 자식에게 영웅 칭호가 수여되었거나 영웅 칭호를 받은 후에 사망한 유가족에게는 흑백 TV가 선물로 전달된 것이다. 물론 영웅 칭호를 받은 후에 병을 앓다가 사망한 사람의 유가족 중엔 죽은 사람 덕분에 선물을 받게 되었으니 죽은 사람들까지 잊지 않고 선물을 준다며 감사해 하고 좋아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앞으로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당사자들, 특히 대남 요원들과 함께 자기 남편이나 부모가 희생된 대가로 영웅 칭호를 받은 유가족들의 생각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히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선물로 받게 된 TV가 칼라냐 흑백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희생된 사람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 실망시킨 처사
 
무릇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는 것은 결코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게 아니다. 이 세상에 죽는 것이 좋아서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살려고 하지 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겠는가.
 
인간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한마디로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위해서이고, 나아가 살아 있는 사람들과 후대들을 위해서다. 그런데 누가 목숨을 바친 사람을 그렇게 홀대하고 차별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겠다고 할까. 또 이미 희생된 사람의 자식들이 자라면 자기 부모처럼 죽음도 불사하고 일을 하겠다고 하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나 역시 항상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대남 공작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떤 명예와 보수를 바라거나 누군가의 강요에 못이겨 일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 죽은 사람을 소홀히 할 수밖에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고 그 선물을 주자고 정책을 입안한 사람도 다름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자기는 안 가지고 죽은 사람의 가족에게만 주자고 할 것이며, 그것도 좋은 것으로 주자고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 정책 입안자가 희생된 영웅의 유가족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만약 진심으로 죽은 영웅의 유가족에게 생존해 있는 영웅에 대해서보다 더 좋은 것을 주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성인군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당시 북한 고위층에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 북한 근로 단체에서 2025년 2월6일 조선인민군 창건 77주년(2월8일)을 맞아 공화국영웅·전쟁 노병과의 상봉 모임을 진행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7일 보도했다. 상봉 모임에서 박인호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는 1968년 1월에 발생한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에 대해 설명했으며 허룡 강사는 동해상에서 발생한 미군 정찰기 격퇴 전투 무훈담을 들려줬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죽은 아빠는 흑백, 살아 있는 자식은 컬러 TV
 
위와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가 있다.
 
1985년 가을 남파되었다가 1987년 말경에 복귀해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박모  공작원의 경우 본인도 영웅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역시 과거에 남파되었다가 희생된 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아 결국은 부자(父子) 모두 공화국영웅이었다.
 
박모 공작원은 당연히 살아서 영웅대회에 참가했으므로 컬러 TV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사망한 남편을 대신해 받은 흑백 TV를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아들이 받아 온 컬러 TV를 보고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죽은 양반이 살아 있는 개만 못하다
 
그래서 박모 공작원은 자기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머니를 보기가 너무도 죄송스러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어머니 손을 붙잡고 죽은 양반이 살아 있는 개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북한 당국이 그런 식으로 살아 있는 영웅과 죽은 영웅을 차별해서 선물을 준 것은 누구의 발상이었지 몰라도 이유 불문하고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당시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아예 선물을 주지 말든지, 주려고 했다면 똑같은 것을 주어야 했다. 오히려 죽은 영웅의 유가족에게도 줄 거면 살아 있는 영웅에게 주는 것보다 더 좋고 값비싼 선물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은 당사자인 박모 공작원이나 나를 비롯한 일부 공작원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내놓고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항상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는 모든 대남 부문 종사자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었고 또한 유가족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웅대회 참가자들이 받은 선물 품목이 그대로 중앙당 지도원이상 고위 간부들에게도 전달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역시 ‘죽은 양반이 살아있는 개만 못하다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전국영웅대회가 끝난 후 대남 공작원들 사이에선 선물 수여와 관련해 잘못된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이래 가지고서는 일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영웅이라는 것도 살아서 돼야지 죽어서 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공작원들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가라앉고 사기도 저하되었던 적이 있다.
 
대남공작원들에게 부정적 영향 준 영웅대회
 
이와 비슷한 의견은 영웅대회를 전후로 해서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때마다 대남 공작원들에게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영웅대회가 있기 전에 있은 일이기는 하지만, 1987년에는 김일성 생일 75주년을 기념해 영광의 노래라는 음악·무용 종합 공연이 있었다. 이때도 거기에 참가한 유치원 아이들에게까지 국기훈장을 수여하고 칼라 TV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로 인해 탄광이나 광산에서 수십 년간 힘든 노동을 해 온 노동자들이 불만을 터뜨렸던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어느 곳이든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대폭적인 공작원 축소, 공작원을 그만두려는 생각도
 
한편, 1987~88년 거의 절반에 달하는 중앙당 연락부 공작원들이 제대(해임)되어 사회로 배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와 함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19기 동기생들도 모두 제대해서 일부는 노동당 간부가 되었고, 일부는 김일성종합대학에 편입해 다시 대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자 나도 이듬해인 1989년까지 내 신변에 별다른 변화가 없으면 스스로 공작원을 그만두고 다른 친구들처럼 김일성종합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더 하든지, 아니면 사회에 나가 일반인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전에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이 시기에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없었지만, 왠지 정말 이때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생각은 그 후에도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1차로 남한에 침투했다가 복귀한 후 부부장 등 간부들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적도 있다.
 
그랬더니 담당 간부들은 꼭 사회 일반대학에 가야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앞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면서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그래서 나도 앞으로 기회가 되면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정도로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아버지가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시절 가장 많이 한 운동이 격술이라고 하셨는데, 그 외에 다른 스포츠를 즐긴 적은 없나요? 격투기를 전문적으로 배우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이 다른 스포츠를 한다면 어떤 종목을 즐기는지 궁금해요.
 
아버지 네가 말한 것처럼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운동은 격술이야. 격술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태권도와 일본의 가라데, 유도와 합기도, 기합술과 호신술, 잡기까지 모두 혼합한 종합무술이라고 할 수 있어. 요즘 사람들이 즐겨 보는 종합격투기 대회 UFC와 거의 유사하다고 보면 돼.
 
그런데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도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일반 스포츠 종목을 가지고 중대별 체육 경기를 하기는 해. 대체로 축구·배구·농구 등 3가지 구기종목 경기를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으면서도 살벌하게 진행되는 경기가 축구 경기야.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축구 경기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축구 경기에서 헤딩이 아예 없다는 거야. 축구 경기 중 공이 높이 뜨면 헤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는 공이 높이 뜨면 헤딩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점프를 높이 해서 발로 공을 차는 거야. 그러다 보니 높이 뜬 공에 머리를 갖다 대려 하다가는 상대방의 발차기에 제대로 머리를 맞을 수 있어. 그래서 축구할 때 아예 헤딩이라는 것이 없어.
 
다른 하나는 축구 경기 할 때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 때문에 반드시 다리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치는 친구가 생긴다는 거야.
 
특히 내가 속했던 특공대반 친구들은 축구에서만큼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반 학생들 가운데 축구를 특별히 잘하는 친구가 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친구부터 부상을 입혀 축구장 밖으로 쫓아낸 다음 경기하거든. 그래서 다른 반 친구들 가운데 축구를 특별히 잘하는 친구는 다리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아. 그렇지 않으면 특공대반 친구들이 워낙 과격하게 축구 경기에 임하기 때문에 다른 반 친구들이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갖고 있는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고 경기에서 패하는 경우가 많지.
 
반면에 농구나 배구 경기는 인기도 별로 없고, 그래서 축구처럼 살벌하게 하지도 않아.
 
김동식  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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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52>
“큰일 한번 해 봐라”… 목매어 기다리던 ‘실전’ 투입
 
 
새 세대 공작원 위한 자본주의 체험학습
 
이런 가운데 1988 12월 초에는 약 보름간에 걸쳐 김명걸과 함께 해외 실습을 다녀왔다.
 
해외 실습은 1980년대 이후 북한 출신의 새 세대 청년들이 공작원의 대부분을 구성하게 되면서 새롭게 실시된 프로그램이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살아온 공작원들은 앞으로 공작 활동을 해야 할 외부 세계,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들 새 세대 공작원들에게 겉핥기 수준으로나마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그것을 공작 활동에 활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바로 해외 실습이었다.
 
해외 실습 위해 마카오로
 
당시 공작원들의 해외 실습 장소로는 중국의 북경과 광주 그리고 마카오와 홍콩·태국·말레이시아 등이 이용되었는데 우리도 그러한 실습지 가운데 한 곳인 마카오로 해외 실습을 갔다. 우리 일행은 나와 김명걸, 담당과의 이 지도원 등 세 명이었다.
 
우리는 평양 순안공항에서 중국 항공기 편으로 북경까지 가서 중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나온 당시 해외공작 담당과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대사관 내에 있는 초대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다시 중국민항 편으로 광주까지 갔다.
 
광주에 도착해서는 그곳 무역대표부 직원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는 해외공작과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시내에 있는 백운호텔에 하루 동안 머물면서 간단히 시내 관광과 쇼핑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그곳에 파견 나와 있던 지도원이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 편으로 마카오로 향했다.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아침 일찍 광주에서 출발했는데, 저녁 늦게 마카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카오 현장 실습… 어디서든 살 수 있겠다  
우리 일행은 마카오에 도착해 5일가량 머물며 호텔과 여관·여인숙 등 여러 숙박시설을 이용하며 각각 다른 환경에서 생활 체험을 했다. 또한 관광과 쇼핑을 하면서  여러 가지 서비스 시설을 직접 이용해 보는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방식과 사회 실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하기 위한 실습을 진행했다
 
시장이나 슈퍼마켓·전문 상가·음식점·다방·교회·은행·카지노·개 경주장·택시·해수욕장·극장 등을 보거나 실제로 이용해 보기도 하고 물건도 사 보면서 약간이나마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방식에 대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때 난생 처음 에로 영화와 리스보아 호텔 카지노 내에서 하는 스트립쇼도 보았는데 충격이었다.
 
나는 마카오에서의 해외 실습을 통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자신감과 경험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언어와 피부색ㆍ풍습 등 모든 것이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남한에서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마카오에 가면서 1인당 1500달러 정도의 돈을 가지고 갔는데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당시에 인기 있던 일제 자동카메라와 시계, 카세트 라디오와 양복 원단 등 필요한 것들을 어느 정도 사 올 수 있었다. 그 후 그 물건들은 고향에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 나중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카오에서 광주, 북경 거쳐 귀국
 
마카오에서의 해외 실습을 마친 우리 일행은 다시 해외 담당과 지도원의 승용차를 타고 중국 광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다시 2일가량 체류하면서 백운산 공원과 야시장 등을 관광하고 중국민항 편으로 북경까지 가서 그곳에서도 3일가량 체류했다
 
이때 북경에 체류하면서 해외공작과 지도원의 안내로 북경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고 자금성과 만리장성·이화원·명나라 왕릉(13) 등 중국의 고대 역사 유적을 관광했다. 그리고 다시 북경에서 북한 항공사인 조선 민항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것으로 해외 실습을 마무리했다.
 
착잡하고 초조했던 8년간의 공작원 생활
 
1981년에 공작원으로 선발된 후 1988년까지 8년간 공작원 생활을 하면서 내 심정은 한편으로는 착잡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조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공작 임무를 받고 남한에 침투했다 복귀해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적지 않은 공작원들이 몇 년 동안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아무 일도 해 보지 못한 채 제대(전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제대한 공작원들은 자의에 의한 제대가 아니라 인원 감축 조치에 의한 제대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제대한 공작원들이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또 대다수가 나와 함께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전투원양성반을 졸업한 친구들이어서 충격이 컸다. 그래서 1년 뒤인 1989년 가을까지 최선을 다했는데도 희망적이고 결정적인 변화가 없으면 그들처럼 타의에 의해 제대하는 수모를 겪기 전에 스스로 공작원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10년이 거의 다 되어 매일 반복되는 단조롭고 지루하고 고독한 생활에 어느 정도 지쳐 있었다. 특히 더 나이 들기 전에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해외로 나가고 들어갈 때 대부분 거쳐야 하는 관문인 중국 주재 북한대사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6월 방중 당시 직접 방문했을 정도로 북한대사관은 북한 외교의 최대 거점이자 다양한 접촉 창구로서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복잡한 마음으로 맞이한 1989년 새해
 
나는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1989년 새해를 맞이했다. 예전과 같이 신정 연휴 첫날 초대소에서 김명걸과 함께 김일성·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를 한 다음 임 과장·최 지도원과 동석 식사를 했다. 동석 식사란 중요한 명절 때마다 술을 곁들여 하는 일종의 명절 파티인데, 초대소에서는 이것을 흔히 동석 식사’라고 한다.
 
동석 식사가 끝난 후 김명걸은 이미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장·지도원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집으로 갔다. 초대소 요리사도 그동안 학원에 가서 공부하던 자식들이 방학 기간이어서 평양 시내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러 가고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새해 첫날부터 아무도 없는 빈 초대소를 혼자서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신정 다음 날인 12일 오전에 내가 있는 초대소로 대남 담당 이원국 부부장 전용 벤츠 승용차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초대소 앞마당에 나가 차에서 내리는 부부장과 새해 인사를 나눈 다음 그를 안내해 초대소 내부로 들어갔다.
 
혼자 지키고 있는 초대소를 방문한 부부장
 
초대소에 들어선 이원국 부부장은 조장과 초대소 요리사가 모두 시내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요즘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물어본 다음 문득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이 선생, 일을 한번 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소?”
 
초대소에서는 누구든 공작원을 부를 때 그 대상의 나이에 상관없이 선생이라는 호칭을 쓰는데, 그 앞에 성씨나 직책을 붙여서 부른다. 예를 들어 조장 선생이라든가 김 선생 또는 이 선생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요리사나 기타 종사자들이 공작원들을 부를 때는 조장 선생님이라든가 김 선생님 등의 호칭으로 부른다
 
나는 부부장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켜만 주십시오. 어떤 임무든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담당 부부장은 자신에 찬 대답을 듣고 자신도 기분이 좋았던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좋소. 나도 선생이 그렇게 대답하리라 믿었소. 그럼, 우리 함께 손잡고 한번 일을 잘해 봅시다. 그런데 앞으로 선생이 일을 하려면 지금의 조장 선생과는 같이할 수 없소. 그 이유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안 해도 선생이 대충은 짐작할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다른 공작조의 조장과 함께 새로운 공작조를 편성해 선생에게 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선생 생각은 어떻소?
 
그 공작원은 선생보다 나이도 많고 사회 활동 경험도 많은 사람이오. 언젠가 선생도 나이 많은 사람과 같이 일을 했으면 한다는 의견을 제기한 적이 있었지? 그래서 부서에서도 여러 가지로 논의한 끝에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선생 의견은 어떤지 듣고 싶소.”
 
부부장이 가져온 반가운 소식
 
나는 이미 지도원을 통해 당시 조장이었던 김명걸이 잠꼬대가 심해 그와 같이 남한에 침투하는 것은 호박 쓰고 돼지 우리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무모한 일이며, 절대로 같이 남한에 침투할 수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부부장의 말은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제가 이미 그런 의향을 당조직에 전했고, 또 저는 부부장 동지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니 어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좋소. 우리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오늘 나와 선생이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겠소. 특히, 내일 조장이 집에 갔다 들어올 텐데 그에게도 이야기를 하지 마시오. 조장도 사람인데 조원부터 일을 시킨다는 것을 알면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소?
 
그러니까 내가 들어와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이것은 선생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비밀을 지킨다는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오. 알겠소?”
 
나는 너무도 기쁘고 반가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실전에 투입된다는 소식은 드디어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기 성취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4, 이어서 노동 단련과 간부현실 체험, 철저한 밀봉 교육과 적구화 교육 등 9년여에 걸쳐 견뎌 낸 엄혹한 훈련들이 마침내 끝나는구나 하는 해방감 같은 것도 몰려왔다.
 
이원국 부부장은 또다시 앞으로 일을 잘해 보자고 한 다음 초대소를 떠났다. 나는 부부장이 돌아간 후 옷가지와 책을 정리하는 등 다른 초대소로 이사할 준비를 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이렇게 3대에 걸쳐 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그런 통치 방식에 어떻게 순응하며 따를 수 있는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무슨 다른 특별한 그들만의 비결이라도 있는 건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1인 군부독재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 전 세계의 역사를 통해 이미 증명됐는데, 북한에선 어떻게 3대에 이어 세습 독재 체제가 잘 작동되고 있는 걸까요?
 
아버지 북한이 김씨 3대 세습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몇 가지 비결이 있어.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강력하면서도 거미줄처럼 촘촘한 주민 통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어.
 
북한의 경제 형편이 최악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주민 통제 시스템이 얼마나 촘촘하고 강력한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김정은이 측근들에게 인적 드문 심심산골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김정은)가 들을 수 있게 하라고 강조했을 정도로 주민 감시 통제 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실제로 노동당 간부를 하면서 주민 감시 통제 시스템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느꼈어. 왜냐하면 위와 같은 주민 감시 통제 시스템을 유지하는 조직이 바로 노동당이라는 거대한 집단이거든.
 
북한이 3대 세습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체제에 반대하거나 체제 유지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본인은 물론 자식과 부모까지 3대를 사형·구속·정치범수용소 수용 등으로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도 한몫하고 있어.
 
더구나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고 주민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고 있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외부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는 것 역시 3대 세습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어.
 
결국 김씨 3대 세습 체제를 붕괴시키고 북한 주민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외부 정보를 들여보내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해서 그들 스스로 김정은 체제에 반대해 투쟁하도록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김동식  202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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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53>
공작조 새로 결성… 남파 ‘실전 훈련’ 본격 돌입
 
두 번째 공작조 해체
 
다음 날인 1989 13일 오전, 신정 명절을 집에서 보낸 김명걸이 최 지도원과 같이 승용차를 타고 초대소로 들어왔다. 자식들을 만나러 갔던 초대소 요리사도 다른 차편으로 들어왔다.
 
최 지도원은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어제 부부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갔느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답하자 부부장이 얘기한 대로 하라고 또다시 당부했다. 그들이 초대소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원국 부부장도 들어섰다.
 
이 부부장은 김명걸과 최 지도원 그리고 나를 동시에 응접실로 불러 회의를 소집하고 모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상급당 조직의 결정에 따라 오늘 이 공작조를 해산하게 되었소. 조원은 아직 공작원으로서의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앞으로 공부를 더 시키기로 했고, 조장은 간부 현실 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시키기로 했소.
 
그동안 이 공작조가 일을 잘해 왔는데, 앞으로 서로 갈라지더라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일을 잘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조원은 오늘 오후에 다른 초대소로 옮겨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짐을 싸서 옮길 준비를 해야겠소. 모르는 것이 있거나 의견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시오.”
 
초대소 옮겨 제1차 남파 준비하기로
 
나는 이미 부부장이 이야기한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조장 김명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조직의 결정이고 담당 부부장이 제시한 이유도 적절한 것이어서 김명걸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 같았다. 의견이 있느냐고 묻는 부부장에게 나는 당조직에서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했고 김명걸도 의견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 부부장이 돌아간 후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부부장의 지시대로 다른 초대소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이미 그 전날 부부장과 헤어진 후 대충 준비를 해 놓았기 때문에 잠깐 사이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점심 식사 때는 초대소 요리사가 특별히 음식을 준비해 주어 간소하게나마 송별 파티를 했다. 나는 웃는 얼굴로 김명걸과 후일을 약속하면서 악수한 다음 싸 놓았던 짐을 승용차에 싣고 다른 초대소로 향했다. 이때부터 제1차 공작을 위한 남파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새로 구성된 남파공작조
 
남한 침투 준비를 위해 옮겨간 초대소는 평양시 순안 구역의 초대소 지역에 있는 특별초대소였다. 저수지 기슭에 지어진 2층짜리 한옥이었는데, 정원도 크고 방도 여러 개 있어 생활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1960년대 후반까지 노동당 대남사업담당 비서를 역임했던 이효순의 전용 별장이었는데 그가 숙청된 후 남한 침투를 준비하거나 복귀한 공작원들의 휴식을 위한 특별초대소로 활용하고 있다.
 
승용차에서 내려 초대소에 들어서니 조장 권중현과 새로 담당하게 될 장은택 지도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권중현은 48세였고, 장 지도원은 50대 후반이었다. 내가 도착하자 장 지도원이 먼저 인사한 뒤 권중현과 나를 각각 소개했다.
 
이 선생은 앞으로 조장으로 일하게 될 박 선생이고, 이쪽은 이 선생입니다. 인사를 나누십시오.”
 
그러자 권중현이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춘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우리 함께 손잡고 일을 잘해 봅시다.”
 
북한 이름은 박춘봉, 남한 이름은 권중현
 
박춘봉은 권중현이 남한에 침투하기 전 북한에서 공작원 생활을 할 때 사용하던 가명이다. 그리고 권중현은 남한에 침투할 때 신분 세탁용 주민등록증에 기재했던 이름이다. 그러니까 권중현이라는 이름은 남한 사람 이름이고, 나와 처음 만날 당시의 이름은 박춘봉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권중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순섭 지도원으로부터 권중현의 나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40대 초반 정도로 생각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고 상급자인 그가 먼저 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바람에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그리고 권중현보다 더 깍듯이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철호라고 합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사실 권중현은 대남 공작원으로 소환되기 전에 평양시 낙랑구역당 조직비서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 전에는 외무성 간부과장으로, 1989년 당시 외무성 부상(副相)급 간부들이 신입사원 시절 그들에 대한 인사를 직접 담당했던 고위급 당간부 출신이다.
 
장 지도원은 나와 권중현이 서로 인사를 끝내자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차츰 알려 주겠다며 짐 정리를 하면서 휴식하라고 한 다음 돌아갔다.
▲ 난수 방송(암호 방송)은 특정한 배열 규칙을 가지지 않는 연속적인 임의의 수인 난수를 암호로 이용해 특정 대상에게 비밀스러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송출되는 방송이다. 북한은 남파 간첩들에게 지령을 내릴 때 난수 방송을 이용했다. 연합뉴스·스카이데일리.
 
 
남파 준비 위한 실무 교육·훈련
 
이때부터 남파 준비를 위한 실무적인 차원에서의 교육이 진행되었다. 실무 교육이라는 것은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을 어떻게 세우며 북한 공작지도부와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을 것인지 등을 실제 상황과 같이 설정하고 그 방법을 연구하고 숙달하는 과정이다. 물론 그전까지의 교육은 모두 실제 상황과는 거리가 먼 기초 교육이었다.
 
당시 우리가 본격적으로 진행했던 훈련은 본부인 북한에 보낼 보고 전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무전으로 송신하는 훈련, 본부에서 보내는 숫자 전문(난수 방송)을 수신한 다음 그것을 한글로 바꾸는 훈련이었다. 숫자로 된 암호 전문을 한글로 바꾸는 것을 변신’(암호해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통신 연락과 관련된 것들을 남한에 침투했을 때와 똑같이 실행해 보기 위해 주간과 야간에 평양 시내 주변의 산에 올라가 무전기를 설치하고 송신 훈련을 한 다음 철수하는 동작까지 반복해서 연습했다
 
모스부호 수신, A급 무전수 이상의 수준으로 훈련
 
한편으로는 모스부호 수신 연습을 집중적으로 함으로써 수신 속도를 100자 이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00자를 수신한다는 것은 모스부호로 된 숫자를 1분에 100자까지 받아 적는다는 것이다. 이는 A급 무전수 이상의 수준이다. 아울러 북한 공작지도부에 보내는 보고 내용을 숫자 전문으로 작성하는 연습과 함께, 본부에서 보내는 2·3건의 전문에 대한 변신 연습도 했다.
 
또한 남한에 침투하기 위한 준비를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과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도 진행했다. 예를 들면 신분 위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할 것인가, 침투 전술은 어떻게 세울 것이며 복귀할 때의 접선은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가 하는 등의 기초적인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그에 기초해서 가상(假想) 전술을 수립하는 연습도 했는데, 이와 같은 실무적인 교육과 훈련은 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침투 및 공작 전술안 ‘액션 플랜’ 작성
 
2월 중순부터는 이미 연습하고 교육받은 내용에 기초해 실제로 남한에 침투해 공작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전술, 즉 액션 플랜을 작성했다
 
침투 및 공작 전술안은 크게 공작 임무와 함께 신분 위장, 침투 전술, 정착 전술, 대상 포섭(전취) 및 조직공작 전술, 통신 연락 조직, 복귀 접선 조직, 비상시 행동 전술 등으로 구분해 항목별로 방안을 수립한다. 이때에는 담당과에서 제시하거나 가져다준 기초 자료에 근거해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 등을 총동원해 작성한다. 그 후 공작조 자체 논의를 통해 1차적으로 완성한 다음 담당 지도원과장부부장 등 단계별로 올라가면서 해당 간부들과 여러 차례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최종적인 전술안을 마련한다.
 
당시는 구체적인 포섭 대상 및 정보를 전달받지 않은 상태여서 주로 위장 신분 구상과 침투 지역 및 침투 전술을 작성하고 연락 조직과 복귀를 위한 접선 조직, 일반적인 대상 포섭 전술과 지하당 조직 건설 방법, 남한에 침투한 다음 정착 이후의 생활 방안 등에 대해 연구하고 전술 방안을 수립했다.
 
통일전선부에 흡수됐던 연락부, 사회문화부로 부활
 
나와 권중현이 남파공작조를 새로 편성할 즈음 중앙당 대남공작부서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와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87년 통일전선부에 흡수·통합되었던 연락부가 1989년 초에 다시 사회문화부로 부활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1987년 중반 중앙당 연락부장 정경희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지하공작 경험을 대남 공작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해임되면서 연락부가 통일전선부에 통폐합된 바 있다. 당시 통일전선부·연락부를 통합해서 만든 부서의 명칭은 대외연락부였고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허담이 자동으로 대외연락부장이 되었다.
 
정경희는 중앙당 연락부장에서 해임되기 직전인 1987 4월 김일성 생일 75돌을 맞아 연락부 소속 공작원들에게 훈장과 함께 칼라 TV를 나눠 주기도 했는데 해임되어 공작원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이와 함께 교육 담당 부부장을 비롯해 고위급 간부 여러 명이 해임되거나 강등되었다. 당시 내가 몸담았던 연락부 대남 담당 부부장 이원국도 과장에서 부부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안 돼 다시 과장으로 강등되었다.
 
연락부 후신 사회문화부의 부장은 김정일의 측근 이창선
 
대외연락부로부터 분리 독립해 나온 사회문화부는 기존에 연락부가 해 왔던 남한 내 지하당 조직(간첩망) 구축 공작 업무를 다시 담당하게 되었다. 기존에 통일전선부가 담당했던 업무는 대외연락부’라는 명칭을 다시 통일전선부로 개칭한 부서에서 그대로 수행하도록 했다. 한편, 연락부의 후신인 중앙당 사회문화부장에는 김정일의 측근으로 정무원(내각)에서 문화예술부장을 맡고 있던 이창선이 임명되었으며, 통일전선부장은 예전대로 대남담당비서인 허담이 그대로 겸임하도록 했다.
 
또한 대남 공작원 및 전투원 양성기관, 즉 스파이 양성기관인 금성정치군사대학의 공작원 양성 기능을 분리해 봉화정치학원으로 독립시켰다. 봉화정치학원은 과거 최초의 대남요원 전문 양성기관이었던 강동정치학원의 맥을 이어 조국 통일의 봉화를 지펴 올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제가 군에 입대했을 때 북한이 대한민국의 주적이라는 정신교육을 하지 않았어요. 저를 포함한 국군 장병들은 휴전선 철책에서 24시간 북한군의 동향을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고 만약 북한군이 도발을 감행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면 곧바로 투입돼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 분명한데, 왜 대적관을 심어 주는 정신교육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네가 군에 입대했을 당시에는 정부가 주적 관념과 관련한 정신교육을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야. 그때는 국방부가 발행하는 국방 백서에서 주적이란 개념을 아예 빼 버릴 정도였으니까.
 
나는 한국에서 정부가 바뀔 때마다 주적 개념을 가지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북한의 경우 과거엔 내부적으로 주한 미군과 함께 대한민국을 주적으로 간주했지.구체적으로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이를 떠받치고 있는 관료·재벌·지주 등을 주된 척결 대상으로 규정해 놓고 대적관 교육을 강화했어. 그러다가 2023 12월 김정은이 직접 대놓고 대한민국을 1의 주적’ ‘불변의 주적이라고 강조하며 북한 헌법에 주적 개념을 반영하라고 지시했어. 아울러 남북 관계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교전 중인 적대국 간의 관계로 규정하고 대한민국을 정복·수복·평정하겠다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야.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방의 의무가 명시되어 있고, 대한민국 청년들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군에 입대한 후 북한군과 맞서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튼튼히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해 대적관 확립을 위한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해.
 
김동식  202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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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54>
“이선실 데려오고 포섭된 김부겸 입당시켜라” 특명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해 북한은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
 
1989 7월 초에는 대한민국이 개최한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해 북한이 개최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평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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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기장에서 개최된 축전 개·폐막식 행사에는 김일성·김정일이 모두 참석했다. 대남 침투 및 공작을 준비하고 있던 나와 권중현은 김일성·김정일이 참석해 진행한 개·폐막식에 초대되어 행사 전 과정을 관람했다.
 
아직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폐막식 행사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북한 대학생들의 인기를 끈 임수경
 
임수경은 세계 각국 청년 대표들이 입장할 때 남한 청년 학생 대표로서 전대협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앞세우고 입장했다. 그는 입장하다가 김일성·김정일이 자리 잡고 있던 주석단(단상)에 이르자 걸음을 멈춘 다음 90도 각도로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해 관중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에 김일성·김정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임수경에게 박수를 치며 답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에서 미리 준비한 연설문 없이 즉석에서 연설하는 모습은 북한 주민들과 대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한 대학생들은 임수경이 미리 준비한 원고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남한 대학생들이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한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두 번째 마카오 해외 실습
 
조장 권중현과 나는 사회문화부가 부활하는 등 대남공작부서가 개편되고 평양 5·1경기장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초대 손님 자격으로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실제적인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 수행을 염두에 둔 액션플랜 작성과 각종 훈련을 소화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새로운 공작조를 편성한 뒤 대남 침투 준비에 여념이 없던 나와 권중현은 1989 11월 하순~12월 초 2주에 걸쳐 마카오로 해외 실습을 다녀오게 되었다. 권중현은 해외 실습이 처음이었지만 나는 1년 전에 당시 조장이었던 김명걸과 마카오로 해외 실습을 다녀온 바 있어 두 번째였던 셈이다.
 
당시 부부장·과장 등 간부들은 해외 실습을 두 번씩 다녀오는 공작원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공작 부서가 내게 엄청난 혜택을 준 셈이다.
 
해외 실습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살아온 북한 출신 공작원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를 겉으로나마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이해하고 그것을 공작 활동에 활용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체험학습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작원들은 주로 마카오와 홍콩·태국·말레이시아 등에서 해외 실습을 했는데, 나는 이번에도 예전에 김명걸과 다녀온 바 있는 마카오로 갔다. 해외 실습에는 나와 권중현, 그리고 담당과의 이순섭 지도원 등 3명이 동행했다. 우리는 평양 순안공항에서 북한에 하나밖에 없는 국영항공사인 조선 민항 비행기 편으로 북경까지 이동했다.
 
비행기 트랩 앞까지 벤츠 승용차 타고 온 남녀
 
그런데 해외 실습을 위해 우리가 순안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려던 중 뜻밖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 일행을 포함한 승객 전원이 비행기에 탑승해 기다리고 있는데 초록색 대형 벤츠 승용차가 비행기 트랩 앞까지 빠른 속도로 다가와 멈추는 것이었다. 국제선 비행기 앞에까지 대형 벤츠 승용차를 타고 들어올 정도라면 북한에서 살아온 나도 충분히 얼굴을 알 수 있는 최고위급 간부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내 생각이 크게 빗나갔다.
 
승용차 문이 열리고 거기서 내린 사람은 처음 보는 50대 초반의 남자와 30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그들은 비행기에도 함께 탑승해 우리 바로 앞쪽 비즈니스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탑승을 마치자 곧바로 비행기가 출발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눈초리로 그들이 앉은 비즈니스석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조장 권중현과 담당 지도원을 향해 “도대체 어떤 특별한 사람들인데 비행기 앞에까지 승용차를 타고 와서 탑승하냐?고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러자 권중현으로부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벤츠 승용차를 타고 비행기 앞에까지 와서 탑승한 50대 초반의 남자는 바로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이고, 그와 함께 온 30대 여성은 그의 기술서기(비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장성택이 1989년 여름 평양에서 개최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에 동남아나 유럽에 여행을 다녀오려고 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처음 본 장성택… 특별하고 거침없는 행동 
 
 
 
권중현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노동당 고위 간부를 역임했기 때문에 장성택을 잘 알고 있었고 담당 지도원 역시 중앙당 간부였기 때문에 장성택을 알고 있었다. 당시 장성택은 중앙당 청년사업부장으로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축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그 후 김정일의 신임을 얻어 중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용되었다. 결국 나이 어리고 노동당 간부 경력이 없는 나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장성택은 북경 공항에 도착해서도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다음 곧바로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 고위 간부의 특별 영접을 받으며 벤츠 승용차를 타고 북한 대사관으로 이동했다나는 당시 장성택의 특별하고 거침없는 행동을 보면서 김씨 일가의 특권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북한은 대한민국이 개최한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해 1989년 7월 초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다. 당시 한국 외국어대학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오른쪽 두 번째)이 축전 개·폐막식 행사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해 남한과 북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45일간 방북 일정을 마친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돌아오고 있다. 연합뉴스
 
두 번째 마카오 현장실습… 자본주의 사회 체험
 
우리도 북경공항에 도착해 북한 대사관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사회문화부 중국공작과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대사관 내 초대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중국민항 편으로 광주까지 갔다. 그리고 다음 날 곧바로 승용차 편으로 마카오에 갔다.
 
마카오에 도착한 일행은 일주일가량 호텔에 체류하면서 시장이나 슈퍼마켓·음식점·커피숍·교회·은행·카지노·택시·해수욕장·극장 등을 실제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관광과 쇼핑 등을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 방식과 사회 실상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1년 전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에로영화와 카지노 호텔에서 하는 스트립쇼도 관람했다.
 
당장 대남 침투 및 공작 임무 수행을 앞둔 우리 공작조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는지 두 번째 해외 실습을 갈 때는 1인당 2000달러를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어 일제 자동카메라와 시계·카세트 라디오 등 필요한 물건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마카오에서 광주로 돌아온 우리는 중앙당 사회문화부 중국공작과 김 부과장의 안내를 받아 시내 호텔에 체류하면서 시내 관광과 쇼핑을 했다.
 
그리고 다시 광주에서 북경까지 중국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북한 대사관에 며칠간 체류하면서 북경 주재 지도원의 안내를 받아 자금성과 천안문·만리장성과 이화원 등 관광지를 둘러본 후 북경-평양을 오가는 국제열차를 타고 꼬박 24시간 이동해 평양으로 돌아왔다.
 
1990년 4월, 추가로 내려온 대남 공작 임무 
 
해외 실습을 다녀온 뒤 계속 실전 훈련을 하면서 대남 침투 준비를 하던 나와 권중현이 공작부서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시점은 1990 2월과 4월이다.
 
공작 임무는 기본적으로 대남 침투 준비를 시작하면서 부여받기도 하지만, 침투 준비하는 과정에 추가로 전달받기도 하고 도중에 변경되기도 한다.
 
우리는 1990 2월 초 대남 침투 및 국내 운동권 인물 포섭 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준비하는 과정에 다시 4월 초에 초대소를 찾아온 중앙당 사회문화부 이원국 부부장으로부터 추가적인 임무를 전달받았다.
 
당시 이원국 부부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공작 임무를 전달했다.
 
이선실 평양 복귀시키고 그가 포섭한 김부겸을 노동당 가입시켜라
 
이번에 추가로 공작조에 부여된 임무까지 포함해 다시 공작조에 부여된 공작 임무를 종합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작조의 첫 번째 임무는 10년 전인 1980년부터 현재까지 남조선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북악산을 접선해 대동 복귀하는 것입니다. 북악산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인 동시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입니다. 이 밖에 북악산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를 차후에 가져다줄 테니 그것을 보면서 확인하면 될 것입니다.
 
이와 함께 북악산으로부터 그가 전취(포섭) 백암산을 넘겨받아 그를 입당시키는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지하당조직을 건설하고 본부와의 통신 연락 체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백암산은 현재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부겸으로, 그는 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며 서울대 재학 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백암산이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향후 그가 지하당조직을 구축하게 되면 해당 조직을 민중당을 지도하는 정당 지도부로 만들려고 합니다. 김부겸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 역시 우리가 가져다줄 테니 그것을 보면서 전술안을 작성하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원국 부부장은 75세의 이선실을 평양으로 데려오는 공작 임무는 그가 평생을 대남 혁명을 위해 헌신했으므로 여생을 편하게 보내도록 해 주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선실 복귀의 진짜 이유
 
그렇지만 당시 나는 북한이 이선실을 평양으로 데려가려 했던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선실의 대를 이어 간첩 활동을 할 자식이나 공작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선실의 자식 또는 다른 공작원이 이선실의 대를 이어 간첩 활동을 하면서 그가 사용하던 무전기 등 통신 장비 일체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면 북한으로서는 굳이 이선실을 평양까지 데려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선실의 대를 이어 간첩 활동을 할 사람이 없으므로 그가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다 사망하는 경우 그가 가지고 있던 무전기와 통신 조직표, 난수표와 변신용 책자 등 간첩 장비와 관련 자료들이 그대로 노출돼 그의 간첩 활동 전모가 세상에 알려질 위험성이 있었고, 따라서 이를 사전에 차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사전 조치가 바로 이선실을 북한으로 데려가는 동시에 그가 사용하던 무전기 등 공작 장비 일체를 없애 버리거나 가져가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 지도부가 이선실을 평양으로 데려가려고 한 것은 여생을 편하게 보내도록 해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사망할 것에 대비해 사전에 그의 간첩 활동 흔적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는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 북한은 김씨 일가가 3대째 독재를 하고 있는데, 4대째 그 집안에서 또 계승하게 되면 북한 주민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까요? 어떻게 단 한 번의 쿠데타나 저항 없이 시간이 지나도 복종하며 독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거죠?
 
아버지: 물론 김정은에 의한 3대 세습, 그리고 4대째 세습을 하더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북한 주민이 있을 거야. 그렇지만 지금도 겉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지, 김씨 일가의 3대 세습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불만을 갖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적지 않아. 그리고 김씨 체제에 반대하는 시도나 저항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사전에 노출돼 제압되었거나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없어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야.
 
중요한 것은 김씨 일가의 세습을 반대해 조직적인 쿠데타나 대규모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전에 제압되는 것은 북한의 통치시스템이 너무 강력하고 정교하기 때문이야. 체제나 정부를 반대하고 변화시키는 건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수많은 대중의 조직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어.
 
내가 노동당 간부를 하면서 보니까 북한이 경제는 엉망인데 주민 통제 및 감시 시스템만은 정말로 잘 되어 있었어. 아마 북한도 남한처럼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반체제·반정부 투쟁을 하는 경우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정도만 되어도 이미 북한 체제는 무너졌을 거야. 그런데 북한에서는 주민들이 정부나 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만 보여도 본인은 물론 자식·부모 3대에 걸쳐 무자비하게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내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키고 있어.
 
그러니까 주민들이 김씨 일가 3대 세습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불만을 가지고 있어도 쿠데타나 저항 운동을 비롯해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투쟁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거야.
 
김동식 20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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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왔습니다] <55>
“운동권 포섭하고 간첩 가족 경제 지원하라”
 
 
공작조의 두 번째 임무… 지하당조직 구축
 
이원국 부부장은 계속해서 공작조에 부여된 두 번째 공작 임무에 대해 언급했다.
 
공작조의 두 번째 공작 임무는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현재 남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운동권 인사들을 전취(포섭)한 다음 그들을 중심으로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예전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렸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이상 공작 임무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렸습니다
 
나머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예전에 말씀드린 내용을 참고하면 될 것이고 앞으로 공작 준비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 드릴 것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은 조건에서 지금부터 침투 및 공작 전술을 완벽하게 수립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동지들에 대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신임과 기대가 큰 만큼 공작 임무를 성과적으로 훌륭히 완수하는 것으로써 반드시 충성으로 보답해야 하겠습니다.”
 
“황인오·김선태·김영대 등 운동권 인사 포섭하라”
 
그에 앞서 1990 2월 담당 부부장·과장·지도원들로부터 처음으로 공작 임무를  받을 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들이 남조선에 침투해 수행할 공작 임무는 황인오·김선태·김영대 등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지하당조직을 건설하는 것입니다황인오는 강원도(현 강원특별자치도) 정선 출신으로 1980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을 주동한 인물이며, 김선태는 부산 출신으로 1986년 서울대학교 마르크스-레닌주의당 사건 관련자입니다. 김영대는 청계피복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재 전노협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포섭 인물에게도 ‘공작 대호(암호명)’ 부여하라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인적 사항을 비롯하여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를 가져다줄 테니 그것을 보고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작조 조장은 남조선에 침투해 활동할 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대표’, 즉 당대표의 자격으로 활동하기 바랍니다. 공작조의 대호는 오성산이며, 공작조가 포섭할 새로운 대상에게는 대둔산 비봉산 가운데 본부와 상의하여 대호를 부여하면 되겠습니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공작 대호는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 공작원 또는 공작조, 포섭한 인물들의 보안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암호명(nick name)을 말한다. ‘북악산’ ‘관악산’ ‘성남천 등과 같이 산과 강의 이름을 자주 붙이며 광명성’ ‘봉화1처럼 상징적인 명칭을 쓰기도 한다.
 
침투 장소는 제주도, 이선실과의 접선 표식은 금반지
 
이원국 부부장은 계속해서 나와 조장 권중현이 침투할 장소와 함께 이선실과의 접선 방법 및 절차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공작조의 침투 장소는 최종적으로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으로 결정되었으며, 활동 지역은 서울과 수도권 지역입니다. 침투 일자는 1990 6월 하순이며 구체적인 일자는 그때 가서 확정될 것입니다
 
공작조가 남조선에 침투해 사용하게 될 신원 사항은 공작조 조장이 권중현’, 조원은 김돈식이라는 인물인데 남조선 사람인 이들의 신분을 도용하는 방법으로 신분 위장을 할 것입니다. 신원 사항과 관련한 구체적인 자료는 저희가 제공할 예정입니다
 
공작조는 제주도로 침투한 후 제주도와 대전 지역에서 약 1개월간 현지 적응 과정을 거친 다음 서울로 들어가 북악산’, 즉 이선실을 접선해야 합니다. 북악산과의 접선 신호 표식물은 금반지입니다. 금반지는 침투 전에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북악산 접선 이후 백암산과의 접촉 및 향후 활동 방향 등을 논의한 다음 행동할 것이며 황인오·김선태·김영대 등 포섭 대상의 소재를 먼저 파악한 후 접촉·포섭해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북악산과의 접선 방법과 새로운 대상을 통한 지하당 조직 구축 방법에 대해서는 향후 토의를 통해 구체화할 것입니다
 
본부와의 통신 연락 방법에 대해서는 담당 지도원들과 부과장, 무전 연락을 담당하는 통신 지도원과 변신(암호해독)을 담당한 변신 지도원과 상의해서 정하면 되겠습니다
 
▲ 1992년 10월 6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 지하당 조직 ‘남한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 조직의 핵심 인물 이선실은 재일교포 출신 실존인물 ‘신순녀’의 이름으로 신분 세탁을 하고 10여 년간 남파 간첩으로 활동했다. 대한뉴스 캡처·스카이데일리
 
복귀는 10월경, 복귀 접선지는 침투 장소와 동일
 
마지막으로 공작조의 복귀 시기는 10월경으로 정하였으며, 구체적인 일자는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복귀 접선 장소는 침투 장소인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으로 하되, 이 장소 역시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접선 방법에 대해서는 전술 토의 과정에 완성하면 되겠습니다
 
먼저 공작조에서 침투 및 공작 전술 초안을 작성한 다음 담당 지도원·부과장과 1차 토의를 거쳐 수정·보완한 후 과장과 토의해 다시 보완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최종적으로 부부장과의 토의를 거쳐 완성하도록 할 것입니다. 성공적인 침투를 위해 전투원 및 안내원들과 해상침투 모의 훈련을 진행할 것이며, 권총 실탄 사격과 무전기 설치 및 전파 발신, 변신 등 기타 공작 활동에 필요한 훈련도 공작 전술 초안 준비와 병행할 것입니다.”
 
가상 시나리오 등 300여 쪽의 액션 플랜 작성
 
 
1990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대남 침투 및 공작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던 나와 권중현은 4월부터 거물 간첩 이선실 접선 및 대동 복귀 등 추가로 받은 공작 임무 수행을 위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연구해 전술 초안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침투 및 공작 준비는 나와 권중현이 실제로 남한에 침투한 5월 하순까지 계속 수정·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하나의 완성된 전술안, 즉 액션플랜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나와 조장 권중현이 단계별로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 가상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각종 돌발 상황에 대비한 대응책을 세세한 항목까지 작성한 다음 치열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완성한 대남 침투 및 공작 전술안은 300여 쪽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혁당·인혁당 관련자의 가족을 찾아라
 
당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 중에는 과거 북한과 연계를 맺고 활동하다 처형된 지하당 조직원들의 가족을 찾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무엇보다도 1968년 발생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사형당한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장이었던 김종태의 부인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찾으려 했던 김종태 부인에 대한 구체적인 신상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김부겸 등 포섭 대상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그의 소재나 근황 등에 대해 파악한 다음 그를 만나 경제적인 도움을 주라는 것이었다.
 
또한 인민혁명당 위원장이었던 도예종의 아들 도한춘을 찾아보라는 지시도 있었다. 도한춘과의 접촉 및 그에 대한 경제적 지원 임무는 보다 구체적이었다.
 
당시 부부장 이원국 등 공작지도부 간부들은 도예종의 아들 도한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도한춘이 강원도 원주에 거주하면서 1960년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혁신 단체  민족자주통일중앙회의(약칭 민자통) 관련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부친의 뜻을 받들어 통일운동을 해 보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포섭 대상인 황인오가 강원도 정선 사람이니 그를 포섭한 다음 같은 강원도에서 활동하는 도한춘의 소재와 근황을 파악하면 될 것이며 그를 만나면 몇 백만 원이라도 건네주라고 당부했다.
 
간첩 가족 등 접선은 실패한 채 복귀
 
물론 과거 북한과 연계되어 활동했던 간첩의 가족들을 찾아 경제적 지원을 해 주라는  것은 부차적인 임무였기 때문에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수행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또한 아니었다.
 
따라서 실제로 나와 권중현은 서울에 침투한 후 이선실과 황인오 등을 통해 강원도 원주에 거주하고 있다는 인혁당 위원장 도예종의 아들 도한춘, 통혁당 서울시위원장이었던 김종태 부인의 행적을 파악하는 등 그들을 접촉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시도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채 복귀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간첩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께서 증인으로 법정에 다녀오신 적이 있다고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기억이 납니다. 저로서는 솔직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고,  아버지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법정에서 아버지를 향한 인신공격성 발언 등도 반대편에서는 분명히 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럴 때 혼자서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받아내셨나요?
 
아버지 : 일심회 간첩단 사건, 왕재산 간첩단 사건, 목사 간첩 사건, PC방 간첩 사건, 청주간첩단 사건, 민노총 간첩단 사건을 비롯해 내가 국내에서 발생한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서 법정 증언을 한 횟수가 10회는 넘을 거야.
 
그리고 네 말대로 간첩단 사건 재판정에 가서 법정 증언을 할 때면 소위 인권변호사라고 하는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본격적인 증언을 시작하기에 앞서 허위 사실을 억지로 지어내 뒤집어씌우거나 빈정거리는 등 인신공격성 발언을 항상 했어.
 
그중에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3대 고시(사법·행정·외무)에 합격한 이정우와 이전에 통진당 대표를 했던 이정희의 남편 심재환 등 법조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변호사들도 있었어.
 
그들이 법정에서 본격적인 심문에 앞서 검찰(고소인) 측 증인인 나를 공격하는 것은 나를 흥분시켜 이성을 잃게 함으로써 제대로 된 증언을 할 수 없게 해 자신들이 변호하는 피고인, 즉 간첩이 무죄 판결을 받게 하려는 의도에서였지. 나도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고 잠깐 그들의 페이스에 휘말려 흥분하기도 했어.
 
그렇지만 나를 공격하는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들의 의도를 파악한 다음부터는 그들이 아무리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더라도 절대로 그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았어.
 
대신 나는 북한에서 15년간 공부하고 실제적인 공작을 하는 과정에 알게 된 대남 혁명전략과 대남 공작 전술, 대남공작부서 인물들의 신원정보 등을 사실대로 구체적으로 설명해 그들이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등 빈틈을 주지 않았어.
 
특히 그들이 북한의 구체적인 실정이나 대남공작 전술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질문하는 경우가 많았어. 그럴 때면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 들어 보라”고 한 다음 재판관들을 향해 그들이 반박할 수 없도록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사례를 들어 가며 논리정연하면서도 단호하게 설명했어. 물론 내가 모르거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거나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사실대로 얘기했지. 어떤 일이든 과장하거나 추상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어.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서 내가 증인으로 출석한 간첩단 사건 재판의 경우 100% 유죄 판결이 나왔어. 그렇게 되니까 언젠가부터는 내가 법정 증언을 하기 위해 재판정에 출정하는 날이면 소위 인권변호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집단 퇴장하는 등 오히려 나를 보이콧하는 현상까지 벌어졌어.
 
결과적으로 처음에는 그들이 내게 인신공격성 발언을 해서 잠깐은 속이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변호한 피고인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니까 재판에서도 패하고 내게도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김동식 2025-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