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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기획연재] <14>

서석천 2025. 5. 10. 03:04

[김동식 기획연재] <14>
공화국영웅에겐 특별 대우 보장, 죄도 감면해 줘
 
이선실 성과 달성 후 복귀하겠다 
 
이선실과의 권력 다툼 문제가 일단락된 후 모자 공작조의 김모 조장은 이선실의 대동 복귀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자 이선실은 조장을 통해 북한 공작지도부에 남조선에 침투해 8년 이상 적구 활동을 했지만 솔직히 크게 해 놓은 일이 없어 복귀할 면목이 없다아직 내 건강이 괜찮으니 좀 더 활동하면서 꼭 공작 성과를 달성하고 복귀하고 싶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이선실의 요청 내용을 김정일에게 그대로 보고한 다음 그렇게 해도 좋다는 김정일의 허가를 받아 이선실에게 모자 공작조와 대동 복귀하지 말고 공작 활동을 이어 갈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모자 공작조의 조장은 이선실에게 어떤 방식으로 포섭 대상을 공략할 것인지 등 공작 전술을 전수해 준 후 북한으로 복귀했다. 모자 공작조가 복귀한 다음에는 이선실이 예전과 같이 독자적으로 북한 공작지도부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부여된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억지로 만들어 준 공화국영웅 칭호
 
모자 공작조가 북한으로 복귀하자 담당 부서인 중앙당 사회문화부에서는 1년간 남한에 침투해 공작 임무를 수행하느라 고생은 했는데 막상 평가해 줄 만한 공작 성과가 없어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따라서 중앙당 사회문화부에서는 공작조 조장인 김모 씨에게 오랫동안 고생했다며 과거 남한에 여러 번 침투해 활동하면서 수행했던 공작 임무와 성과 등을 모두 종합해 억지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공작조 조원이었던 김성철은 남한에 침투한 경력이 한 번밖에 없는 데다 부여받았던 공작 임무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억지로라도 공적을 만들어 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원 김성철에게는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는 것으로 공적 평가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만들어 수여한 공화국영웅 칭호
 
한편 중앙당 사회문화부에서는 김성철이 모자 공작조의 조원으로 1년간 적구에 침투해 활동하면서 고생했는데도 결과적으로 공작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가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김성철에게 단기로 남한에 침투해 무인 포스트 매몰 및 발굴 임무를 수행하는 비교적 단순한 임무를 부여해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성철은 1989년 초 예전에 침투했던 강화도 해안을 통해 남한에 침투한 다음 일주일 동안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북한에서 가지고 나온 무전기와 공작금 등을 무인 포스트에 매몰한 다음 현지 간첩망에서 매몰해 놓은 연락물을 발굴해 가지고 무사히 북한으로 복귀했다. 복귀한 후에는 공작지도부 간부들의 의도대로 그에게 공화국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결과적으로 모자 공작조의 조장과 조원 모두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사회문화부가 억지로 또는 의도적으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만들어 수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공화국 영웅 칭호도 만들어서 준다는 말을 하면 북한 사람들은 “설마”를 외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김모 공작조 조장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게 해 준 중앙당 사회문화부 부부장으로부터 필자가 직접 들었기 때문에 엄연한 사실이고, 거짓말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운동권 인물 포섭 후 지하당조직 구축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에서는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을 상대로 의식화 공작과 함께 조직화 공작도 공세적으로 전개했다.
 
북한이 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 운동권 인물들을 상대로 조직화 공작, 즉 그들을 전취(포섭)해 노동당에 입당시킨 다음 그들을 중심으로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대남 공작을 어떻게 전개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공작원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주사파를 포섭한 다음 노동당에 입당시킨다. 그런 다음 그를 통해 지하당조직을 구축하고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를 받아 각종 간첩 활동을 벌이도록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틀어 지하당조직 건설’이라고 한다. 바로 이런 지하당조직 건설을 위한 활동을 대남 공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당 건설’이라는 표현은 당원들을 규합해 당 조직을 구축하고 당 조직의 지도하에 당원들이 활동하는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 남파 공작조 김학철·이철은 원래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기 위한 공작을 준비 중 KAL기 폭파 사건으로 계획이 무산되자 국내 운동권 인사 포섭 및 지하당 조직 구축으로 임무가 바뀌었다. 1983년 9월22일 당시 폭파 테러로 폐허가 된 대구 미문화원의 모습. 연합뉴스
 
 
대남 공작의 성공시대를 연 2인 공작조
 
지하당조직 건설 공작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지하당조직 건설 공작, 즉 대남 공작의 성공 시대를 연 공작조는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중앙당 사회문화부(전 연락부) 대남 공작과 소속 2인 공작조였다. 이 공작조에 소속된 2명 모두 1970년대 말부터 진행된 공작원  세대 교체 당시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이 남파 공작조의 조장은 40대 초반의 김학철이었고, 조원은 20대 후반으로 조장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1983 9월 대구 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수행한 바 있는 베테랑 공작원 이철이었다. 이철은 위에서 언급한 김성철과 김정일정치군사대학 17기 동기생이다.
 
또다시 남파된 대구 미(美)문화원 폭파범
 
김학철·이철 공작조는 원래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서울역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등 다중이용시설을 폭파하라는 임무를 받고 폭파 훈련을 본격적으로 하는 등 침투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김현희 등에 의한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김정일의 지시로 88서울올림픽을 파탄 내기 위해 준비하던 공작이 중단되었다. 이에 따라 공작 임무가 국내 운동권 인사 포섭 및 지하당조직 구축으로 바뀐 것이다.
 
1988년 초 서해안을 통해 남한에 침투한 김학철·이철 공작조는 약 1년간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과거에 다른 공작조가 침투해 만들어 놓은 지하당조직(고첩망)을 검열하고 국내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해 새로운 지하당조직을 구축하는 등 부여된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복귀했다.
 
포섭된 현직 경찰관 안내로 지하철 이용
 
이들은 당시 남한에 침투해 활동할 때 과거에 포섭된 현직 경찰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지하철을 이용했다고 한다. 아울러 과거에 북한에 포섭된 또 다른 고정간첩이 노환으로 사망했는데, 그의 자녀가 부친의 대를 이어 간첩으로 활동하다가 그와 함께 선친의 묘소를 참배하고 북한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부여된 남파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1988년 말 북한으로 무사히 복귀한 2인 공작조의 조장 김학철과 조원 이철은 모두 공화국영웅 칭호와 함께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그 후 조원 이철은 전역해 고위급 노동당 간부를 양성하는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후에는 고위급 노동당 간부로 임명되었다.
 
공작조 안내원, 수중 탈출하려다 심장마비로 사망
 
그러나 조장 김학철은 복귀한 후에도 남파공작원으로 계속 활동했다. 그러다가 1995년 봄에 2차로 유고급 잠수정을 타고 강원도 양양 수산리 해안으로 침투하던 중 공작조를 안내해 주던 안내원이 잠수정 해치를 열고 수중 탈출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침투를 중단하고 북한으로 되돌아간 바 있다.
 
당시 이들이 북한으로 복귀한 이유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안내원이 공작조 조장의 공작 장비, 즉 위조 신분증·무전기·무기·공작금 등을 넣은 배낭을 짊어진 상태에서 바닷물 속에 가라앉아 사망했는데, 그의 시체를 찾지 못해 공작원들이 남한에 침투해도 공작 장비가 하나도 없어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김학철은 북한으로 돌아간 뒤 일정 기간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고위급 노동당 간부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공화국영웅과 노력영웅
 
위에서 남파 공작원 김학철·이철 모두 공화국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공화국영웅 칭호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북한에는 당과 국가를 위해 특출한 공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각종 훈장과 메달, 명예 칭호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명예 칭호는 영웅 칭호이다북한의 영웅 칭호에는 공화국영웅 칭호와 노력영웅 칭호 2종류가 있다.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으면 공화국영웅 증서와 공화국영웅을 상징하는 금별 메달(18금으로 된 메달에 별이 새겨져 있음), 그리고 국기훈장 제1급이 동시에 수여된다. 노력영웅 칭호를 받으면 노력영웅 증서와 함께 노력영웅 메달을 받는데, 노력영웅 메달에는 별과 함께 망치와 낫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노력영웅 칭호를 받아도 국기훈장 제1급이 동시에 수여된다.
 
국가 발전에 공헌하면 노력영웅
 
노력영웅 칭호는 전쟁이나 전투와 관계없이 메달에 망치와 낫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공장이나 농촌에서 노동을 통해 특별한 공적을 세우고 과학 연구에서 특출한 성과를 달성하거나 올림픽에 출전해 1등을 하는 등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각계각층 인민에게 수여하는 칭호이다. 과거 북한의 유도선수였던 계순희가 1996년 애틀랜타에서 진행된 올림픽 여자유도 48kg급 경기에서 당시 세계 챔피언이었던 일본의 다무라 료코 선수를 꺾고 1등을 한 뒤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바 있다.
 
전쟁·남파 공작에 공 세우면 공화국영웅
 
공화국영웅 칭호는 전쟁에 참전해 특출한 공적을 세웠거나 위에서 언급한 김학철·이철처럼 목숨을 걸고 남한에 침투해 부여된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작원, 또는 여러 번 대남 침투에 성공한 전투원들에게 수여하는 명예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남한에 침투하는 과정에 또는 침투한 후 임무를 수행하다 국군과의 교전으로 사망하거나 강릉무장공비사건 당시 집단 자살한 무장간첩들처럼 임무 수행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들의 유가족이 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마라톤 선수 정성옥처럼 김정일의 특별 지시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결국 공화국영웅 칭호가 노력영웅 칭호보다 한 단계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마라톤 선수 정성옥처럼 참전용사 또는 대남 침투 및 공작 등과 관계없는 자가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는 것은 김 부자의 특별 지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공화국영웅이 받는 특별 대우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남파 공작원의 경우 월급은 총리급으로 인상된다. 또한 군 장성 및 차관급 이상 고위 간부들만 출입이 가능한 남산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며 매월 식료품을 특별 공급하는 등 차관 대우를 해 준다. 퇴직 후에는 현직에서 받던 월급과 식료품 보급 등 각종 경제적 혜택을 사망할 때까지 100%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어떤 대학이든 특례 입학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 밖에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으면 간부 임용이나 승진의 경우 우선권과 가산점이 부여되고 반대로 죄를 지으면 감면해 주기도 한다.
 
실제로 정치범으로 낙인 찍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야 할 상황에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대남 침투 요원의 경우 정치범수용소에 가지 않고 시골로 강제 이주하는 낮은 수위의 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다.
 
김동식 202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