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핵'안보"
[김동식 기획연재] <13>
서석천
2025. 4. 26. 02:33
[김동식 기획연재] <13>
北 제작 이념 서적… 운동권 이념화 ‘교과서’
북한 공작지도부, 이념 서적 직접 제작
당시에 북한 공작지도부가 직접 제작했던 대표적인 이념 서적이 ‘한국사회 성격 논의’와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이다. 이 책자들은 실제로 1990년에 해외를 거쳐 국내 운동권에 배포되어 의식화 작업에 활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북한은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이란 책에서 한국 사회의 성격에 대해 철저한 미국의 식민지 사회인 동시에 덜 발전되고 기형적인 반신불수의 자본주의라는 의미에서 ‘반(半)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남조선혁명…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
그리고 한국 사회의 성격 규명을 바탕으로 남조선혁명의 성격이 규정된다며, 남조선혁명은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기 위한 민족해방혁명인 동시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집어엎고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해방을 실현하는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했다.
북한은 이전까지 남조선혁명의 성격을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민’이라는 표현이 남한 국민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며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했다.
아울러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전취 목표라 하고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전취 목표로 규정했다.
혁명의 타격 목표는 관료·재벌·지주
이와 함께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청산해야 할 대상을 타격 목표로 설정하고 주한 미군을 주 타격 목표로,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와 이를 떠받치고 있는 관료(‘반동관료배’로 표현), 매판자본가(재벌)와 지주 등을 타격 목표로 규정했다.
한편,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에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참가하는 세력을 혁명의 주력군과 보조 역량으로 구분하고 혁명의 주력군에는 노동자·농민·청년 학생·진보적 지식인을 포함시킬 것을 강조했다. 혁명의 보조 역량에는 양심적인 종교인과 중·소상공인, 반제(반제국주의) 의식을 가진 군인·지식인 등을 편성했다.
위와 같은 논리는 이전까지 북한이 한국 사회의 성격을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라고 평가하고 이에 기초해 남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했던 과거의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의 발전을 반영해 대남 혁명이론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 북한 최고 집필진 동원
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이란 책자의 집필에는 북한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철학자·경제학자·이론가들이 동원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교수였던 고초봉과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노동당 대남공작부서 산하 연구소에서 연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영대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 박사인 최모 교수도 이념서적 집필자로 동원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교수였던 고초봉은 ‘고림(高林)’이라는 가명으로 이념서적 집필에 참여했고, 김영대는 이념서적 집필 당시 ‘김영호’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특히 김영대의 경우에는 김씨 일가와 친척 간이었는데, 그는 이념서적을 집필한 이후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1989년)되었고 1990.4월에는 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김영대는 1991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 본부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남북 관계 전면에 등장했으며 1998년 8월에는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김영대는 이념서적까지 직접 집필한 탁월한 대남 혁명 이론가답게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임명된 후부터 남한의 민노당과 민주노총 등 소위 민주진보 세력과의 교류와 협력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활발한 통일전선 공작을 전개했다.
한편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김영대 등이 집필해 국내에 배포한 “한국사회 성격 논의의 재조명”이란 책자를 남한에 침투했던 공작조가 국내에서 구입한 다음 북한으로 가지고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대남 공작원 집단의 세대교체
1970년대 후반 대남공작 조직을 장악한 김정일이 남파 공작원들을 그 어떤 어려운 공작 임무도 능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도핵심으로 양성할 것을 강조한 이후 대남공작기관에서는 공작원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대폭 강화했다.
여기에다 1980년대 초부터 남한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공작원 집단에 대한 세대교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북한에서 태어나서 자란 순수 북한 출신들이 새롭게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후 대남 공작 일선에 투입되면서 공작원들의 수준이 질적으로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고도의 대남침투 능력과 대남공작 임무 수행 능력을 갖춘 신세대 남파 공작원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대남공작부서 전체가 어떤 임무든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선실을 데리러 온 모자(母子) 공작조
이러한 상황에서 1983년 9월 대구미문화원 폭파 임무를 받은 2인 공작조와 1987년 말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서 북한 권력서열 19위였던 이선실을 접선해 북한으로 데려오라는 임무를 받은 2인 공작조가 남한에 침투한 바 있다.
바로 이때부터 북한 출신 신세대 청년 공작원들에 의한 대남 공작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선실 접선 및 대동 복귀 임무를 받고 남파된 공작조는 60대 초반의 여성인 김모 씨를 조장으로 하고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던 김성철이 조원으로 편성되어 있어 흔히 ‘모자(母子) 공작조’라고 불렀다.
모자 공작조의 조장 김모 씨는 남한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월북하여 1960년대부터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내에 여러 번 침투해 공작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한 바 있는 베테랑 공작원이었다.
조원 김성철은 당시 20대 후반이었는데 1982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남파되는 공작원이었다. 그는 1983년 가을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한 이철과 17기 동기생이다.
수차례 가명 바꾸며 활동하는 공작원들
다른 공작원들과 마찬가지로 김성철도 가명을 바꿔 가면서 사용했는데 ‘김성철’이라는 이름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생활할 때의 가명이고, 대학 졸업 후 공작원으로 본격 활동하면서는 ‘김광진’으로 가명을 바꿨다. 이후 모자 공작조로 편성되어 남파될 당시에는 ‘김동진’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 후 공작원을 그만두고 대남공작부서인 중앙당 문화교류국 간부가 된 다음에는 ‘이광진’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21년 충북 청주에서 활동하다 검거된 ‘청주간첩단(충북동지회)’ 사건 관련자들과 민노총에서 간부로 활동하다 2023년 검거된 ‘민노총 침투 간첩단’ 사건 관계자들이 중국과 베트남·캄보디아 등 해외에서 접선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공작원 ‘이광진’이 바로 김성철과 동일인이다.
공작조장 김모 씨와 김성철로 구성된 2인 공작조는 강화도 해안으로 침투해 서울에 살고 있던 이선실을 접선한 다음 이선실과 함께 1년간 생활하면서 공작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국내에 침투한 후 과거에 다른 공작조가 구축해 놓은 강원 지역 간첩망을 수습, 지도하려고 여러 번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이선실을 대동하고 복귀하라는 임무도 수행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북한 공작지도부로부터 받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국내에 침투한 지 1년 만인 1988년 말 강화도 해안에서 침투 안내 요원들과 접선해 북한으로 복귀했다.
적구(敵區)에서 벌어진 권력 다툼
이들 모자 공작조가 이선실을 접선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김모 공작조장과 이선실이 권력 다툼을 한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적구에서 두 여성이 권력을 놓고 싸운 한 것이다.
이들의 다툼은 김모 공작조장이 북한 공작지도부가 지시한 대로 이선실에게 과거의 전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공작 활동을 전환할 것을 강조하자 이선실이 반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선실은 1980년 봄 일본에서 영주귀국 형식으로 남한에 침투했다. 그는 대남 침투를 앞둔 1979년 말 일본에서 공작선을 타고 북한에 몰래 들어가 김일성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김일성으로부터 “남조선에 침투하면 노출되지 않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앞으로 유사시에 노동당에 입당시킬 만한 인물들을 점찍어(눈도장 찍어) 놓고 때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국내 정세가 급변하면서 ‘포섭할 만한 대상을 점찍어 놓고 장기적으로 대기’하는 장기잠복 전술이 ‘포섭 대상에게 대담하게 접근해 공작원의 신분을 밝히고 전취(포섭)한 다음 지하당 조직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변한 것이었다.
김일성의 지시 대(對) 김정일의 지시
김모 공작조장이 위와 같은 전술 변화 내용을 이선실에게 전달했는데, 이선실이 “내가 남한에 침투하기 전에 수령님(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받은 지시는 남조선에 침투한 후 장기 잠복하면서 전취할 만한 대상을 점찍어 놓고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당신 말대로 하면 수령님(김일성)이 나에게 지시한 대로 하지 말고 전술을 바꾸라는 것인데,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김모 공작조장의 지시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그러자 김모 조장은 이선실에게 “이제는 과거와 달리 남조선 정세가 변했기 때문에 공작 전술도 변해야 하고, 나는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된 대표의 자격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된 공작 전술은 김정일 동지의 지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접수하고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선실이 북한에서 공작원 생활을 하던 1970년 초까지는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 및 사상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고, 이선실이 남파된 1980년 초에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화되기 전이었으므로 이선실에게는 ‘김정일’의 이름 자체가 상당히 낯설었다.
“나는 남조선 지역 총책임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
특히 당시 이선실은 북한에서 흔히 말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 즉 당조직의 지시를 곧 김정일의 지시로 간주하고 무조건 접수하고 집행하는 체계가 구축되기 전에 남파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조 조장이 자기보다 직급이 낮다는 것만 생각하고 그의 지시를 하찮게 여기면서 무시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선실은 “나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고, 수령님(김일성)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파견된 남조선 지역 총책임자다. 따라서 당신이 아무리 중앙에서 파견되었다고 하지만 나에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고 맞섰다.
결과적으로 목숨을 걸고 일을 해야 하는 적지(敵地) 한 가운데서 두 여성 혁명가의 권력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권력 싸움은 상당 기간 계속되었고, 이렇게 되자 김모 조장은 이러다가는 이선실에게 변화된 공작 전술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고 이선실이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공작 성과를 달성하고 대동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무전으로 북한 공작지도부에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공작지도부에서 이선실에게 지시 따를 것 권고
김모 조장으로부터 구체적인 보고를 받은 공작지도부에서는 이선실에게 별도의 전문을 보내 “남파 공작조의 조장은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직접 파견한 대표이기 때문에 직급 여하를 불문하고 지도할 권한이 있으며, 현지에 있는 당원은 그가 정치국 위원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중앙에서 파견된 당대표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며 공작조장의 지시에 무조건 따를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이렇게 해서 겨우 이선실이 김모 공작조장의 지시 내용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때는 모자 공작조가 남파된 지 1년이 되어 복귀를 앞둔 시점이었다.
김동식 2025-04-25